다채로운 시도, 참신한 문장력, 거침없는 솔직함. 이 박서련 작가처럼 한국 작가들은 장르, 소재, 나이 또는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무엇이든 쓴다. 그리고 잘 쓴다.

-알라딘 eBook <하지 말라고는 안 했잖아요?> (안톤 허 지음) 중에서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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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이 들어선 안 되는 말, 정말로 혼들이 들어줄지 모를 소원…… 그런 걸 뱉은 다음에, 종이에 쓴 걸 찢어버리듯이.
연필을 힘껏 눌러써서 종이에 자국을 남기듯 인선의 음성이 분명해졌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13

바람소리가 거세어질수록 촛불의 움직임이 격렬해진다. 보이지 않는 물체가 불꽃과 천장 사이에 있기라도 한 듯, 기어이 그것에 닿아 사르려는 듯 수직으로 뻗어오른다. 저렇게 긴 불꽃이라면 손가락 하나가 아니라 손 전부로 중심을 통과할 수도 있을 거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23

열려 있는 자신의 캄캄한 방으로 나아가는 인선의 뒷모습을 나는 지켜본다. 마당에서 다시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 방수포가 펄럭이는 소리, 새된 휘파람 같은 바람소리 사이로 그녀는 한 걸음씩 앞으로 내딛는다. 눈 대신 몸 어딘가의 촉수를 사용하는 듯 느리고 조용한 동작이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30

눈을 든 순간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어둠이다. 책에 얼굴을 파묻고 읽어가는 동안 이곳이 어디인지 잊은 거다. 그사이 바람이 멎은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곧 부서질 것처럼 덜컹댄 게 언제였느냐는 듯 침묵에 싸인 검은 유리창을 나는 멍하게 올려다본다. 꿈속에서 문득 다른 꿈의 문을 열고 들어선 것 같은 정적이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42

눈을 뜨자 여전한 정적과 어둠이 기다리고 있다.

보이지 않는 눈송이들이 우리 사이에 떠 있는 것 같다. 결속한 가지들 사이로 우리가 삼킨 말들이 밀봉되고 있는 것 같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52

인선의 눈동자에서 불꽃과 그을음이 함께 타고 있다. 그걸 눌러 끄듯 그녀가 눈을 감는다. 다시 그녀의 눈꺼풀이 열렸을 때는 더이상 그 불이 타고 있지 않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61

소리가 그칠 때까지 우리는 입을 열지 않는다. 물살이 잦아들듯 소리가 희미해진다. 차츰 음량이 낮아져 휘발하는 음악의 종지부처럼, 속삭이다 말고 문득 잠든 사람의 얼굴처럼 모든 것이 고요해진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63

내려가고 있다.
수면에서 굴절된 빛이 닿지 않는 곳으로.
중력이 물의 부력을 이기는 임계 아래로.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78

정적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마주본다.

더 내려가고 있다.
굉음 같은 수압이 짓누르는 구간, 어떤 생명체도 발광하지 않는 어둠을 통과하고 있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92

얼마나 더 깊이 내려가는 걸까, 나는 생각한다. 이 정적이 내 꿈의 바다 아랜가.

무릎까지 차올랐던 그 바다 아래.
쓸려간 벌판의 무덤들 아래.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97

나는 몸을 일으킨다.
내가 든 촛불을 통과한 인선의 엷은 그림자가 책장 옆의 흰 벽 위로 드리워져 있다. 벽으로 다가서자 그녀의 그림자가 사라진다. 초를 들지 않은 손으로 바랜 벽지를 쓸어나가 인선의 얼굴이 있던 자리에 얹어본다. 그 서늘한 벽의 단단함이 이 이상한 밤의 비밀을 알게 해줄 것처럼. 내가 등지고 있는 고요한 인선이 아니라, 사라진 그림자에게만 물을 수 있는 말이 있는 것처럼.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98

더 깊게 입을 벌린 해연海淵의 가장자리,
어떤 것도 발광하지 않는 해저면인가.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312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321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는 집의 어둠 속에서, 그 으스러지는 포옹이 계속될수록 점점 엄마와 나의 몸을 구별할 수 없게 되었어. 얇은 피부, 그 아래 한줌 근육, 미지근한 체온과 혼란이 나의 것들과 뒤섞여서 한덩어리가 되었어.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322

심장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이미 떨어져나갔으며, 움푹 파인 그 자리를 적시고 나온 피는 더이상 붉지도, 힘차게 뿜어지지도 않으며, 너덜너덜한 절단면에서는 오직 단념만이 멈춰줄 통증이 깜박이는……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327

무섭지 않았어. 아니,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행복했어. 고통인지 황홀인지 모를 이상한 격정 속에서 그 차가운 바람을, 바람의 몸을 입은 사람들을 가르며 걸었어. 수천 개 투명한 바늘이 온몸에 꽂힌 것처럼, 그걸 타고 수혈처럼 생명이 흘러들어오는 걸 느끼면서. 나는 미친 사람처럼 보였거나 실제로 미쳤을 거야. 심장이 쪼개질 것같이 격렬하고 기이한 기쁨 속에서 생각했어. 너와 하기로 한 일을 이제 시작할 수 있겠다고.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329

아버지가 십오 년 동안 형무소에도 있고 저 건너에도 있었던 것이.

책상 밑에서 내가 무릎을 구부리는 동시에 활주로 아래 구덩이 속에도 있었던 게.

네가 꾼 꿈을 생각하고 생각하면 캄캄한 어항 속 지느러미처럼 어른거리던 그림자가.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333

아직 사라지지 마.
불이 당겨지면 네 손을 잡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눈을 허물고 기어가 네 얼굴에 쌓인 눈을 닦을 거다. 내 손가락을 이로 갈라 피를 주겠다.
하지만 네 손이 잡히지 않는다면, 넌 지금 너의 병상에서 눈을 뜬 거야.
다시 환부에 바늘이 꽂히는 곳에서. 피와 전류가 함께 흐르는 곳에서.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335

숨을 들이마시고 나는 성냥을 그었다. 불붙지 않았다. 한번 더 내리치자 성냥개비가 꺾였다. 부러진 데를 더듬어 쥐고 다시 긋자 불꽃이 솟았다. 심장처럼. 고동치는 꽃봉오리처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가 날개를 퍼덕인 것처럼.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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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방에 들어선 순간 눈에 들어온 건 내벽의 사면에 기대서 있는 서른 그루 남짓한 통나무들이다. 등신대가 아니다. 대체로 이 미터의 키를 훌쩍 넘겨, 내 몸집과 비슷한 몇몇 나무들은 비례상 열두 살 전후의 아이들처럼 보인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49

내가 없는 그곳에 인선이 있고, 그녀가 없는 이곳에 내가 있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61

인선의 손가락이 잘리지 않은 평행우주가 존재한다면 나는 지금 서울 근교 아파트의 침대에 웅크려 누워 있거나 책상 앞에 앉아 있을 거다. 인선은 싱글 매트리스에서 잠들어 있거나 안채의 부엌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거다. 암막 천에 덮인 새장 속 횃대에 아마가 발을 걸고 있을 거다. 잠든 몸이 어둠 속에서 따스할 거다. 가슴털 아래 심장이 규칙적으로 뛰고 있을 거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61

이제 더 할일이 없다.

몇 시간 후면 아마는 얼어붙을 거다. 2월이 올 때까지 썩지 않을 거다. 그러다 맹렬히 썩기 시작한다. 깃털 한줌과 구멍 뚫린 뼈들만 남을 때까지.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62

나중에 그 동굴을 찾아갔는데, 찾을 수 없었어요.
몇 번이나 기억을 더듬어서 가봤는데 실패했어요.

아니요. 꿈은 아니었습니다.

아홉 살 되던 겨울에 간 게 마지막이었어요.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64

이 섬의 동굴들은 입구가 작아요. 한 사람이 겨우 드나들 정도니까 돌로 가려놓으면 감쪽같은데, 안으로 들어갈수록 놀랄 만큼 커집니다. 1948년 겨울엔 한마을 사람들이 모두 들어가 몸을 피한 곳도 있어요.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64

속솜허라.
동굴에서 아버지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이에요.

양치잎 같은 그림자가 벽 위를 미끄러지며 소리 없이 솟아올랐다.

숨을 죽이라는 뜻이에요. 움직이지 말라는 겁니다. 아무 소리도 내지 말라는 거예요.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66

밤낫이 어신 거라이. 군사작전이라는 건.
어멍이 기다릴 건디.
내가 어멍이라는 말을 뱉은 순간 아버지의 몸 전체가 움찔 떨리는 걸, 전류가 옮겨온 것처럼 느낄 수 있었어요.
그러니까 우릴 따라와서야 해신디.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67

1948년 미군 기록물이라는 자막 위로, 해안선에서부터 오 킬로미터를 표시하는 경계선이 두드러진 굵기로 그어져 있었다. 한라산을 포함하는 그 안쪽 지역을 소개疏開하며, 해당지를 통행하는 자를 폭도로 간주해 이유 불문 사살한다는 내용의 포고문이 자막으로 이어졌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68

더이상 길이 없는 산속으로 접어들면 나에게 등을 내밀어 업히라고 하고, 그때부턴 당신의 발자국만 쓸어내며 비탈을 올랐어요. 업힌 채로 나는 발자국들이 사라지는 걸 똑똑히 지켜봤어요. 마술 같았어요. 매 순간 하늘에서 떨어져내리는 사람들처럼, 우린 단 한 점의 발자국도 남기지 않으며 걷고 있었어요.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70

언젠가 어머니가 말한 적이 있어요.
느네 아방이 소나이다워시민 아마 내가 싫어실 거라. 처음 봐신디 소나이 얼굴이 얼마나 곱닥하던지. 십오 년을 햇빛을 못 봐난 그래나신가, 살갗이 버섯같이 히영했주게. 그런 사름을 다들 피하는 게 잘도 이상해서. 죽었던 사름이 돌아온 것추룩. 눈초리 한 번만 섞어도 귀신을 옮길 사름인 것추룩.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71

아버지가 그것들을 먹다가 문득 환상에서 빠져나오길 어머니는 바랐던 것 같아요. 그 방법이 정말 통하는 날도 있었어요. 내 손에서 귤을 건네받으며 아버지는 반쯤 웃었어요. 마치 두 세계를 사는 사람 같았어요. 한 눈으로는 나를 보고 다른 한 눈으론 내 몸 너머 다른 빛을 보는 것같이, 어두운 방인데도 부신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올려다봤어요.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72

그러나 마루를 짚고 몸을 일으킨다. 싱크대로 달려가 개수구에 토한다. 먹은 게 없으니 위액만 게워져 나온다. 약이 필요하다. 지금 나에게 없는, 넉넉히 조제받아 서울 집 책상 서랍에 넣어둔 약봉지 속 한 포가. 장기 복용시 심장을 해친다는 경고를 의사로부터 받은, 그러나 유일하게 듣는 약이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73

열이 오른다. 점점 더 몸이 떨린다. 살에 닿는 모든 게 차가워진다. 패딩 코트 소매의 겉감이 손목을 스칠 때마다 얼음 날에 베이는 것 같다. 패딩을 벗는다. 시계도 풀어 벽으로 밀어놓는다. 욕실 세면대로 가서 위액을 더 토한다. 입속을 헹구고 비누로 손을 씻는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74

차가웠지.
아니, 부드러웠지.
나는 고쳐 중얼거린다.
돌같이 단단했지.
입술을 뗄 때마다 피에 젖은 얼굴이 소리 없이 입을 벌린다.
아니, 솜같이 가벼웠지.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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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갑 낀 손등에 방금 내려앉았다가 녹은 눈송이가 거의 완전한 정육각형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뒤이어 그 곁에 내려앉은 눈송이는 삼분의 일쯤 떨어져나갔지만, 남은 부분은 네 개의 섬세한 가지들을 본래 모습대로 지니고 있었다. 부슬부슬한 그 가지들이 가장 먼저 사라진다. 소금 알갱이같이 작고 흰 중심이 잠시 남아 있다가 물방울이 되어 맺힌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13

눈처럼 가볍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눈에도 무게가 있다, 이 물방울만큼.
새처럼 가볍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그것들에게도 무게가 있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13

그러던 어느 밤 우연히 찾아낸, 간명한 선으로 그린 새의 단면도는 특별히 아름다워 이미지를 저장해두었다. 몸 가운데 정말 풍선 같은 기낭이 있었고, 뼈들에는 타원형의 구멍들이 피리처럼 뚫려 있었다.그래서 그렇게 가벼웠던 거야.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15

유난히 커다란 눈송이가 내 손등에 내려앉는다. 구름에서부터 천 미터 이상의 거리를 떨어져내린 눈이다. 그사이 얼마나 여러 차례 결속했기에 이렇게 커졌을까? 그런데도 이토록 가벼울까. 이십 그램의 눈송이가 존재한다면 얼마나 커다랗게 펼쳐진 형상일까.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15

건강해 보여도 방심할 수 없어.
아무리 아파도 새들은 아무렇지 않은 척 횃대에 앉아 있대. 포식자들에게 표적이 되지 않으려고 본능적으로 견디는 거야. 그러다 횃대에서 떨어지면 이미 늦은 거래.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16

그렇게 두 개의 시야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건지 나는 알고 싶었다. 저 엇박자 돌림노래 같은 것, 꿈꾸는 동시에 생시를 사는 것 같은 걸까.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18

엔진음과 함께 버스가 다가온다. 둔한 잔향을 눈송이들이 빨아들인다. 백묵 끝으로 흑판을 긁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버스가 멈춰 선다. 그 잔향도 눈의 정적 속으로 삼켜진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22

숲이 소리치며 흔들리고 있다. 나무들이 이고 있던 눈이 흩날린다. 깨어질 것 같은 이마를 차창에 댄 채 나는 해안도로에서 봤던 눈보라를 생각한다. 먼 수평선 위로 흩어지던 구름을, 수만 마리 새떼처럼 낮게 날던 눈송이들을 생각한다. 섬을 삼킬 듯 흰 포말을 몰고 달려들던 잿빛 바다를 생각한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28

울창한 삼나무 숲 사이로 일차선 도로가 휘어든다. 박명 속에 수천 그루의 높은 나무들이 눈발 속에 흔들려, 마치 내 오랜 꿈속 검은 나무들이 아직 살아 있던 풍경 같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28

눈이 떨어진다.

이마와 뺨에.
윗입술에, 인중에.

차갑지 않다.
깃털 같은,
가는 붓끝이 스치는 것 같은 무게뿐이다.

살갗이 얼어붙은 건가.
죽은 사람의 얼굴처럼 눈에 덮이고 있나.

하지만 눈꺼풀들은 식지 않은 것 같다. 거기 맺히는 눈송이들만은 차갑다. 선득한 물방울로 녹아 눈시울에 스민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29

턱이 떨린다. 이가 부딪히며 딱, 딱 소리가 난다. 잇새에 혀를 넣으면 베일 것 같다. 젖은 눈꺼풀을 밀어올려 나는 어둠을 본다. 눈을 감았을 때와 똑같은 어둠이다. 보이지 않는 눈송이들이 눈동자로 떨어져 나는 눈을 깜박인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30

내가 느끼기에 이 섬의 바람은 마치 배음처럼 언제나 깔려 있는 무엇이었다. 거세게 몰아치든 온화하게 나무를 쓸고 가든, 드물게 침묵할 때조차 그것의 존재가 느껴졌다. 특히 침엽수들과 아열대 활엽수들이 섞여 자라는 구간에서는, 수종에 따라 다른 속도와 리듬으로 가지와 잎사귀들 사이를 통과하며 형용 못할 화음을 만들었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34

시시각각 더 무거운 어둠에 잠기는 눈길에서 나는 그 바람을 생각하고 있었다. 정적의 뒷면에 먹 자국처럼 배어 있는, 언제든 형상을 이루며 선명해질 수 있는 그림자 같은 그걸 걸음마다 느꼈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35

그들의 얼굴에 쌓였던 눈과 지금 내 손에 묻은 눈이 같은 것이 아니란 법이 없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39

무엇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나.
가슴에 활활 일어나는 불이 없다면.
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네가 없다면.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39

모른다, 새들이 어떻게 잠들고 죽는지.
남은 빛이 사라질 때 목숨도 함께 끊어지는지.
전류 같은 생명이 새벽까지 남아 흐르기도 하는지.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40

몸을 펼친 채 단박에 얼어붙은 순간들이 결정結晶처럼 빛난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43

모르겠다, 이것이 죽음 직전에 일어나는 일인지. 내가 경험한 모든 것이 결정이 된다. 아무것도 더이상 아프지 않다. 정교한 형상을 펼친 눈송이들 같은 수백 수천의 순간들이 동시에 반짝인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지 모르겠다. 모든 고통과 기쁨, 사무치는 슬픔과 사랑이 서로에게 섞이지 않은 채 고스란히, 동시에 거대한 성운처럼 하나의 덩어리로 빛나고 있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43

가느다란 맥박 같은 감각이 손가락 끝에서 차츰 또렷해진다.
잊고 있던, 손바닥에 남았던 감각도 새로 피가 통하듯 생생해진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46

저 너머에 뭔가 있다. 빛을 발하는 무엇인가가.
덤불숲을 가로질러 나가자 길게 휘어진 검푸른 눈길이 이어진다. 숲을 끼고 도는 그 길은 점점 밝아져, 모퉁이의 끝에 이르러서는 선명한 은빛을 발하고 있다. 나는 필사적으로 속력을 낸다. 허벅지까지 쌓인 눈을 가르며 숨차게 나아간다. 모퉁이에 이르렀을 때 다시 눈언저리를 닦는다. 눈을 바로 뜨고 멀리 있는 불빛을 본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47

철문이 활짝 열려, 마치 빛의 섬 같은 그곳에서 불빛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누가 저기 먼저 와 있나, 몸서리치며 생각한 다음 순간 깨닫는다.
그날 이후 아무도 오지 않은 거다.
공방에 불이 켜져 있는데 대답이 없는 게 이상해서 들어와보니 내가 기절해 있었대.
피 흘리는 환자를 급히 트럭 짐칸에 실으며 아무도 불을 끄지 않은 거다. 문을 닫을 겨를조차 없었던 거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활짝 열린 문 안으로 바람이 몰아쳐 들어가고 있다. 눈부신 빛을 내쏘는 눈가루들이 함께 공방 안으로 빨려들어간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48

막 내려앉은 순간 눈송이는 차갑지 않았다. 거의 살갗에 닿지도 않았다. 결정의 세부가 흐릿해지며 얼음이 되었을 때에야 미세한 압력과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얼음의 부피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흰빛이 스러지며 물이 되어 살갗에 맺혔다. 마치 내 피부가 그 흰빛을 빨아들여 물의 입자만 남겨놓은 것처럼.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92

제목이 뭐야?
밀폐용기에 담긴 것을 나무 숟가락으로 덜어 주전자에 넣다 말고 인선이 물었다.
우리 프로젝트 말이야.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돌아보며 그녀는 주전자에 생수를 부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제목을 묻지 않았어.
나는 대답했다.
작별하지 않는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98

가로등도 이웃도 없는 집에서 말이야. 눈이 내리면 고립되고 전기와 물이 끊기는 집 말이야. 밤새 팔을 휘두르며 전진해오는 나무가 있는 곳, 내 하나만 건너면 몰살되고 불탄 마을이 있는 곳 말이야.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02

찰랑이는 촛물을 심지로 빨아들이며 타오르는 불꽃을 나는 보았다. 공방 난로의 격렬하던 불꽃과 비교할 수 없이 작고 고요한 것이었다. 너울대는 불꽃 안쪽에서 파르스름한 심부가 흔들리고 있었다. 맥이 뛰는 씨앗 같았다. 가물거리는 주황빛 가장자리까지 고동이 번지는 것 같았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09

음미하는 일이 허락되지 않는 찰나의 감각이어서, 기억하기 위해선 여러 차례 더 빠르게 반복해야 했다. 각질과 표피를 건너 예리한 화기가 진피로 스며들기 직전까지.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10

새 그림자가 흰 벽 위로 소리 없이 날고 있었다. 예닐곱 살 아이의 몸피만큼 커진 그림자였다. 꿈틀거리는 날개 근육과 반투명한 깃털들의 세부가 확대경을 통과한 것처럼 선명했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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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성 위경련 때문에 단골 병원에 가기 위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팔차선 도로의 횡단보도를 어기적어기적 건널 때, 오지 않는 약속 상대를 기다리며 소란한 카페 구석에 웅크려 앉아 문 쪽을 바라볼 때, 또다른 악몽에서 깨어나 고개를 떨며 천장의 어둠을 올려다볼 때, 그 모르는 벌판에 눈이 내리고 검은 나무들 사이로 바다가 밀려들어온다고.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47

하지만 바람이 다시 몰아치기 시작하면 마치 거대한 팝콘 기계가 허공에서 맹렬히 돌아가는 듯 눈송이들이 솟구쳐오른다. 눈이란 원래 하늘에서 내리는 게 아니라 지상에서부터 끝없이 생겨나 허공으로 빨려 올라가는 거였던 것처럼.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62

바람이 센 곳이라 그렇대, 어미들이 이렇게 짧은 게. 바람소리가 말끝을 끊어가버리니까.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76

결국 집을 나온 건 살고 싶어서였어. 그러지 않으면 그 불덩이가 나를 죽일 것 같아서.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80

부리가 젖은 운동화 속 발가락들이 시렸다. 파카 호주머니에 찔러넣은 주먹들이 딱딱하게 얼었다. 머리에 더 눈이 쌓여 이젠 마치 흰 털실로 뜬 모자를 쓴 것처럼 보이는 인선이 입을 벌려 말할 때마다 반투명한 불꽃 같은 입김이 흘러나와 어둠 속에 번졌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88

오직 그 눈에 대해서만 말했을 뿐이야. 수십 년 전 생시에 보았고 얼마 전 꿈에서 보았던, 녹지 않는 그 눈송이들의 인과관계가 당신의 인생을 꿰뚫는 가장 무서운 논리이기라도 한 것처럼.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90

계속해서 엄마는 말했어.
내가, 눈만 오민 내가, 그 생각이 남져. 생각을 안 하젠 해도 자꾸만 생각이 남서. 헌디 너가 그날 밤 꿈에, 그추룩 얼굴에 눈이 히영하게 묻엉으네…… 내가 새벡에 눈을 뜨자마자 이 애기가 죽었구나, 생각을 했주. 허이고, 나는 너가 죽은 줄만 알아그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90

젖은 아스팔트 위로 눈이 내려앉을 때마다 그것들은 잠시 망설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 그래야지……라고 습관적으로 대화를 맺는 사람의 탄식하는 말투처럼, 끝이 가까워질수록 정적을 닮아가는 음악의 종지부처럼, 누군가의 어깨에 얹으려다 말고 조심스럽게 내려뜨리는 손끝처럼 눈송이들은 검게 젖은 아스팔트 위로 내려앉았다가 이내 흔적없이 사라진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93

더이상 달리지 않는다. 눈송이들이 떨어지는 속도가 시간의 흐름과 일치하는 것 같은, 내 걸음도 거기 맞춰야 할 것 같은 기묘한 느낌에 사로잡혀 나는 걷는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96

두 개의 물분자가 구름 속에서 결속해 눈의 첫 결정을 이룰 때, 그 먼지나 재의 입자가 눈송이의 핵이 된다. 분자식에 따라 여섯 개의 가지를 가진 결정은 낙하하며 만나는 다른 결정들과 계속해서 결속한다. 구름과 땅 사이의 거리가 무한하다면 눈송이의 크기도 무한해질 테지만, 낙하 시간은 한 시간을 넘기지 못한다. 수많은 결속으로 생겨난 가지들 사이의 텅 빈 공간 때문에 눈송이는 가볍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97

밖에 눈이 오고 있을지도 몰라.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지루한 방학숙제를 하다 말고 방안에 눈이 내린다고 생각했다. 방금 거스러미를 뜯어낸 손 위로. 머리카락과 지우개 가루가 흩어져 있는 장판 바닥 위로.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98

이렇게 눈이 내리면 생각나. 그 학교 운동장을 저녁까지 헤매 다녔다는 여자애가.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99

눈만 오민 내가, 그 생각이 남져. 생각을 안 하젠 해도 자꾸만 생각이 남서.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99

마침내 노인이 입술을 떼었다. 통역자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으며, 놀라운 집중력으로 오직 카메라만을 응시한 채 대답했다.
좋아. 내가 이야기해줄게.
카메라 렌즈를 꿰뚫고, 그 뒤에 서 있었을 인선의 눈까지 관통해 날아온 그 눈의 빛이 내 눈을 찔렀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02

인내와 체념, 슬픔과 불완전한 화해, 강인함과 쓸쓸함은 때로 비슷해 보인다. 어떤 사람의 얼굴과 몸짓에서 그 감정들을 구별하는 건 어렵다고, 어쩌면 당사자도 그것들을 정확히 분리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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