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이는 간소하게 화가 노석미 사계절 음식 에세이
노석미 지음 / 사계절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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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도 일러스트도 단아하고 멋져서, 일상의 약속과 책임을 다 팽개치고 어서 읽고 싶은 기분. 간소한 먹이가 더욱 간절한 여름이 시작되었다. 식사의 모든 과정이 경건한 지옥 같아.

 

고민이 끝나지 않는 식사는 준비부터 마무리까지 고역이다. 제목도 목차도 간소한먹이들인 책에서 배울 수 있는 메뉴를 얼른 만나고 싶다는 생각으로 펼쳤다. 그런데... 먹이를 먹을 수 있기까지의 과정이 정성스럽고 자연스럽고아름답고, 삶의 방식 자체가 부럽다.

 

“‘음식이나 요리가 아닌 먹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 것은 소박하다거나 간소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이다. 사람이 먹고 사는 일이 동물의 그것에 비해 특별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저자가 시골 마을에 간지 15년이 넘었고, 정원과 밭에 기르는 작물들과 과실수들이 다양하다. 언제부터인지 확정은 못하지만, 나도 무척 오래 바랐던 - 행동은 전혀 못하고 있는 - 삶이라서 부러움이 한숨과 함께 새어나온다.

 

내 삶의 반경에서 쉽게 구매할 수 없거나 먹는 법을 전혀 모르는 식재료들은 행동하지 않은 대가로 부재한 삶의 증거 같고, 나도 좋아하는 먹이들은 그래도 간소한 삶으로 향하는 미비한 노력의 보답 같다.



 

두부에 대한 애정과 에피소드에 크게 웃었다. 아픈 이웃에게 다짜고짜 생두부와 무장아찌를 사가서 먹어보라는 문병과 격려! 그리고 정제밀가루가 아닌 밀의 향긋함과 갓 구운 빵에 대한 저자의 애정은 한동안 그만둔 베이킹을 다시 시작하고픈 생각을 일렁이게 한다.



 

저자는 자신이 심고 수확하는 먹이 재료에 대해 매번 겸손하지만, 귀촌 생각만 가득하고 텃밭도 본격 해보지 않은 나로서는 대여섯 평 땅에서 빵 열 개 분량의 향긋한 밀가루가 나온다는 것만 해도 경이로울 따름이다.

 

덕분에 상상 속 나의 귀촌 생활은 더 다채로워진다. 많이 좋아해서 꼭 심어야지 했던 밭작물과 과실수에 더해, 나도 따라 해봐야지 싶은 목록이 길어진다. 보리수 잼이라니! 겨울까지 먹을 수 있는 토마토 수확이라니!

 

어떤 미래를 살게 될지 모르지만, 덕분에 풍경화 같은 꿈의 지도를 얻었다. 부디, 어쩌면 나도 심게 될 사과나무 묘목에서도 5년 정도가 지나면 사과가 주렁주렁 열려주기를. 자연스럽게 벌레와도 새와도 누구와도 나눠 먹으며 사는 풍경이 내 삶이기를 간절하게 바라본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단호박의 껍질이 단단해지면서 우둘투둘한 점들이 생기기 시작하면 수확 철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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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유전자
리처드 도킨스 지음, 야나 렌조바 그림, 이한음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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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문화사에서 번역 출간된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확장된 표현형>을 읽었다. 2018년과 2022년이라는 것이 새삼스럽다. 어느새 2025, <불멸의 유전자>로 다시 만나는, 그가 본 생명과학의 세계가 몹시 기대된다.

 

이 책의 주제는 동물 자체, 동물의 몸과 행동, 표현형phenotype’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다.”

 

조금은 두려운 기분으로 펼친 책은 뜻밖에(?) 사례들과 그림들이 가이드하는 안도가 되는 방식이었다. 언제 도킨스 식의 강력한 주장을 만날지 몰라 조마조마했지만, 새 책에 익숙해질 때까지 부담 없이 따라 읽을 수 없는 사례들이 반갑고 재미있다.

 

이 책의 주요 논지는 모든 동물이 조상 세계의 기술 문서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자연선택이 가장 세세한 부분들까지 깊이 유전자 풀을 조각하는 엄청나게 강력한 힘이라는 숨겨진 가정에 도태를 둔다.”

 

본질과 이데아와 이념 대신, ‘생명이라는 협력체의 현상으로 존재하는 찰나의 삶을 받아들이고 나면, “유전자 관점gene's eye view”의 생명관이 전하는 냉정한(?) 내용을 큰 저항 없이 받아들이도록 돕는다.

 

개체로서의 나의 고유성, 실존, 자아 등의 개념을 내려두고, “유전자가 임시 탈것으로, 미래세대로 옮겨가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 생물()이라는 것을 기억하면, 필멸하는 나를 슬퍼하기보다 불멸하는 유전자를 더 알고 싶어진다.

 

유전자는 어떻게 불멸성을 획득할까? 사본의 형태로 생존하고 번식할 수 있도록. 그럼으로써 다음 세대로 더 나아가 먼 미래까지 성공한 유전자가 전달되도록 몸들의 기나긴 연쇄에 영향을 미침으로써다.”

 

시험공부 하듯 일주일을 꼬박 읽었다. 결론은 내가 자연선택 과정을 통해 살아남은 세균 무리의 협력체라는, “우글거리는 공생성 수직바이러스의 군집을 유전자 풀로 가지는 표현형이라는 것이다. 수십 년 전이라면 울고도 싶었겠지만, 지금은 평화로울 만치 괜찮다.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한 종의 유전자 풀은 저마다 미래로 여행하려고 굳게 결심한 바이러스들의 거대한 군집이다. 그들은 몸을 만드는 사업에 서로 협력한다. (...) 당신은 득실거리고 뒤섞이면서 시간 여행을 하는 바이러스들이 빚어낸 위대한 협력의 화신이다.”

 

몹시 불안하고 어지럽던 수개월이 지나 편안했던 긴 주말 동안, ‘나는, 인간이란, 생명이란,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왜 이런저런 행위를 하는지를 가만히 곱씹으며 배워볼 수 있었던 반가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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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안녕
유월 지음 / 서사원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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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난이든 조언이든, 그건 하는 사람의 것이지요, 그 사람이 던진 말을 받을지 말지는 김 선생이 선택하는 것일 테고.”

 

왜 이토록 몰입되는지 문득 의아해하며 빠져든 작품이다. 구구절절한 사연을 마주 앉았지만 튼튼한 창살 너머로 듣는 듯 거리감이 느껴지는데, 그 점이 감정에 체하지 않고, 끝까지 이야기를 읽게 돕는다.

 

경험하지 않으면 모르는 남의 직장(?) 풍경도 그곳이 법원이라서 더 기막히고, 너나없이 경험하는, 이 사회에 만연한 촘촘한 차별과 불합리와 불의를 소설 속 에피소드마다 환기하고 절감하니 한숨이 푹푹 나온다.

 

해진 마음을 끌어안으며 다짐했다. 누군가의 말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겠다고, 일로 만난 사람에게 마음 따위 주지 않겠다고, 다른 사람에게 나의 어떤 것도 맡기지 않겠다고, 쉽지 않은 사람이 되겠다고, 참지 않겠다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지키겠다고.”

 

열심히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착하게 내 몫 이상을 해내며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보상과 감사와 인정 대신 결과로 자리한 아픔과 상처에 심장이 저릿하다. “마침내라고 편한 숨을 내쉴 수 있는 순간은 왜 이리 야박한 건지. “안녕을 고하며 패턴을 끊고 바꾸고 다르게 살아보는 일은 왜 이리 드문 건지.

 

타인들의 아픔과 상처를 들어 온 시간이 도연의 힘이 된 걸까. 나라면 외면하거나 포기했을 고비에도 도연은 연대를 놓지 않는다. 우정을 버리지 않는다. 그럴 수 있는 결정에는 자신의 경계를 살짝이라도 허무는 용기가 필수다.

 

작고 사소한 사랑이 얼마나 자신의 곁을 스쳐 갔을지 도연은 알 수 없었다.”

 

뒷목이 뻐근할 정도로 긴장해야하는 상황이 적지 않지만, 역시 이런 희망이 파릇한 이야기가 좋다. 열정적이고 적극적이지 않아도 끊어지지 않는 이웃과 동료의 태도로 타인을 지켜보는 이가 좋다. 재빠른 계산과 이익을 위해서는 못 할 게 없다는 태도보다 윤리적 고민과 성찰이 있는 삶이 더 아름답다.

 

여름이라도 이런 따뜻한 이야기는 환영이다. 지난겨울의 광장에서처럼, 괜찮지 않은 것들. (...) 징징대고 싶은 것, 힘든 것, 견딜 수 없는 것, 더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누구나 계속 이야기하며 살 수 있기를.

 

좋은 방향으로 키를 맞춰두지 않으며 더 쉽고 편안한 나쁜 방향으로 이끌려갔다. 매일 어떤 모습으로 사는지, 곁에 어떤 사람을 두는지에 따라 삶의 모양도 조금씩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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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병과 마법사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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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처럼 커서 곰개, 고마, 가마, 가문, 거문, 이런 말은 다 곰이라는 뜻인데, 모두 크다는 소리야.”

 

배명훈 작가의 오랜 팬으로서 제목이 낯설고 짐작이 어려웠다. 익숙한 SF 장르도 익숙한 판타지 소재와 형식도 아니다. 매번 그렇듯 학위논문보다 자료조사를 더 많이 하고 난 창작물,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

 

1부를 읽으면서는 집중과 노력이 꽤 필요했다. 사극에 별로 익숙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처음 만나는 단어들이 적지 않았다. 사전 중심의 빠른 게임 같은 전개가 아닌 차분한 묘사와 서술이 치밀하게 얽힌 이야기다.

 

그저 살아 있기만 해도 반역이 되는 사람도 있다. 잠깐 숨통이 트이기만 해도, 발을 뻗고 자는 날이 아주 조금 길어지기만 해도.”

 

끊임없는, 피할 수도 없는 권력의 위협 속에서, 생존을 위해 제대로 된 삶을 거의 다 포기해야하는 깊은 함정 같은 상황이 실감나게 표현된다. 숨 막히는 긴장감이 크다. 이렇게 오래 억눌리면 무엇을 계기로 각성할지 기대가 커진다.

 

자료와 지식 정보가 탄탄한 작가는, 가볍고 빠른 속주 대신 마치 그물 밑을 기어서 빠져나가는 고단함을 느낄 만큼 정교하면서도 무리 없는 자연스러움으로, 독자를 현실감 있는 이야기 속으로 더욱 깊이 끌어들인다.

 

“1021. 이제는 기억조차 전해지지 않는 고대 천문학의 가장 중요한 숙제. 그보다 짧은 어떤 주기로도 대비할 수 없는, 번거로운 주기의 숨겨진 의미.”

 

제목의 기병과 마법사가 어떤 존재들인지 궁금했다. 순전한 창작물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존재한 이들처럼 느껴지는 지점이 놀랍다. 기록이 없던 시절을 작가가 발굴해서 시각 정보로 전해주는 듯한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



 

상상 불안과 위협에 스스로를 괴롭히다, 망상과 모함이 날개를 펼쳐 제가 아닌 다른 모든 일들을 해치는 권력자가 짜놓은 모진 그물 같은 세상에서, 약한 개인이 할 수 있는 건 그리 다양하지는 않다.

 

다만, 연결되고 연대한 개인들은 유무형의 힘들을 독점한 소수보다 강할 수 있다는 것만은 현실에서도 판타지에서도 같은 희망이다. 겨우 한 표만 행사할 수 있는 주권자이나 그 결과로 현재와 미래 모두가 바뀔 수 있는 것처럼.

 

웅숭깊은 이야기가 품은 의미와 작가가 전하는 개념을 더 선명하게 독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지만, 어떤 뜻인지 짐작하는 것만으로도, 일희일비를 잠시 잊고 오지 않은 행복을 상상해보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역시 배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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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죄
존 위티 주니어 지음, 정두메 옮김, 김형태 감수 / 한길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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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주된 목표는 성경과 전통에서 제기된 혼외출생의 원칙에 대한 찬반양론들을 다시 따라가보는 것이다.”

 

대학이 기업 인력 충당소로 빠르게 변모하는 시절에, 연구기관인 대학에서 진행된 프로젝트의 결과를 만나는 일은 감동적이다. 더구나 그 주제가 멸칭으로 사용되는, 유구한 구조적 차별을 받은 혼외자에 관한 인식, 그 유래를 배워 볼 기회라면 더 반갑다. #혼외출생자의원칙 (doctrine of illegitimacy)

 

역사적으로 혼외출생으로 고통받은 이들이 아주 많을 것이며 관련 차별과 혐오와 배제가 사라진 적도 없다. 이 책은 이런 방식으로 성(sex)관계를 정의하고 규제하기 위한 절차들을 왜 그리고 어떻게 고안해왔는지를 깊이 들여다보는, 법과 종교와 사회를 아우르는 연구 결과다.

 

교회는 교회법, 고해, 교회법정 등의 장치를 통해 교인들의 내적 삶을 감독했고, 국가는 성범죄에 대한 정책, 기소, 처벌 등의 장치를 통해 시민들의 외적 삶을 감독했다.”

 

덕분에 서구의 고전 문헌과 성경을 탐구한 내용, 고대 로마법, 중세 캐논법, 영국의 코먼로, 미국의 혼외자법에 대해, 통시적으로 읽고 배울 수 있었으며, 현대사회에서 갈등의 형태로 나타나는 관련 문제의 유래와 연원에 대한 이해가 생겼다. 한 권의 책이 전달할 수 있는 지식 정보의 양질 모두가 대단하다.

 

조급한 심정에 늘 시야가 좁은 독자인 나는 늘 성급하게 실망을 거듭한다. 제퍼슨이 미국 독립선언에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양도할 수 없는 특정한 권리들을 부여받았다고 쓴 뒤, 미국 법에서 친자와 혼외자가 똑같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완전한 인정을 얻기까기는 200년이 걸렸다.

 

입양과 관련된 제도적 약점과 불완정성이 존재하고, 변화란 대개 아주 고단한 노력의 산물이다. 그럼에도 태어난 존재들에게 사회가 제도적 지원을 최대한 제공한다는 지향만은 선명하다.

 

다만, ‘임신과 동시에 해당 자녀를 보호해야할 책임이 생긴다거나, ‘무책임하게 임신하는 부모에 대한 자격 문제라거나, 자녀의 임신과 양육이 결혼제도 하에서 가장 효과적이고 권장될 방식이라는 내용에는, 단번에 동의할 수 없다. 그렇다고 반박 주장을 제대로 할 지식 배경도 없지만.

 

혼외자법의 가장 주된 요점은 진정한 상속자가 누구인지를 가리는 것이었다.”

 

이견과 질문들에도 불구하고, ‘출생한 방식 - 자신이 알 수 없던 - 만으로 죄악을 부여받고, 이후의 모든 기회를 상실하는 것은 정당하지도 필요하지도 않다는 것에는 전면 동의한다.

 

날마다 새로운 차별과 혐오가 바이러스보다 빠르게 변형 전파되는 시절에, 일상적으로 흔하고 오래된 차별과 혐오에 대해 깊이 배워보는 기회가 든든한 격려와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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