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내믹 코리아
정주식 외 지음 / 사계절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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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굴 같이 욕해주기만 하면 날 너무 따뜻하게 대해주니까 계속 그 따뜻함을 즐기게 되는 거죠.”

 

전시회에서 만난 작품처럼 표지를 오래 보았다. 직관적으로 다 이해되는 그림도, 관련 기억이 생각나는 그림도, 한참 보니 알아차린 그림도, 지시어나 상황을 잘 모르겠는 그림도 있다. 반갑고 재밌고 고맙고 궁금한 멋진 표지다.

 

다이내믹이 반가운 연령(?)이 아니고, 그런 상황을 두려워하는 성향이라, 번다한 것들이 대개 버겁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가 다이내믹하므로 품을 수 있는 기대가 분명 있다. 변화에 대한 상상은 분명 구체적인 힘이 될 수 있다.



 

책을 읽고 쓰기 시작한 건 여러 날 전이지만, 마무리를 미뤄둔 사이, 인격 살해가 또 발생했다. 세력화된 범죄 폭력 집단을 언론에서 중립을 지키며 스피커 노릇을 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내란 시절이라서, 반복된 비극이 더 아팠다.

 

누군가를 증오하지 않고 친구를 사귀는 방법을 알고 있는지, 증오보다 나은 우정을 만드는 방법을 우리 사회가 제공해주는지, 실종된 대의()는 누가 어떻게 찾아야하는지.

 

혼탁한 공기를 여과 없이 들이켜야 하는 시간에도, 읽고 토론하고 쓰는 이들은 맑은 해법을 고민하고 토로한다. 그 애씀이 종이의 온기로 전해지는 책을 붙잡고 힘을 나눠받는다. 갖가지 노력을 하는 다양한 이들이 수없이 많고, 그들이 전하는 모든 소식이 모두의 수명을 늘리는 마법 같다.

 

“‘멸종이냐 평등이냐중에서 택하라고 하면 한국의 우파들, 정책 결정자들은 멸종을 택하지 평등을 택하지 않아요.”

 

오프라인 독서모임을 하며, 함께 읽고 토론하고 쓰는 저자들을 마음껏 부러워하며, 다른 시선과 태도를 배우고, 어렴풋하던 것들을 좀 더 선명하게 이해하는 시간이 고마웠다. 전혀 모르던 이슈나 소재도 있기 하지만, 한 사회에서 초래된 완전히 별개인 문제란 없는 거라고 다시 배운다.



 

작가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그 사건들을 고발하는 것에 머문 것 같지 않아요.”

 

마지막 내용이 한강 작가님의 작품들이라 참 좋다. 내란을 막을 수 있었던 시민사회의 힘 중에는, 내란 전 수상 소식이 전해 준, 용서받지 못할 내란의 위해가 전 세계에 전해지고 기록된 그 순간이 있었다고, 그래서 우리는 그 이전으로 절대 돌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기억-고통-죄의식의 의무는 지독한 고통이지만, 회복을 위해 필요하다. “잊을 수가 없다는 말이 사랑에서 비롯된 생생한 아픔이라는 걸 모른 척 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다시 읽을 수 없을 것 같던 작가 한강의 작품들을 다시 펼치는 상상을 한다. 참 고통스러웠는데, 모두 사랑으로 읽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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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차별주의자 (30만부 기념 거울 에디션)
김지혜 지음 / 창비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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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평등하게 태어나지 않았다.”

 

기억을 찾아보니 아주 먼 과거 같기도 하고 상상한 장면 같기도 한 20197월의 여름, 어떤 조우가 될지 몰라서 느긋한 기분으로 새 책을 시원한 집에서 읽게 될 순간을 고대했다.

 

앉아서 펼쳤으니 그럴 리가 없는데, 나는 그 순간을 털썩 무릎을 꿇은 장면으로 기억한다. 본문에 이르기도 전에, 프롤로그를 펼치자마자 나는 내가 차별주의자라는 자각을 변명도 못하고 삼켜야했다. 결정장애란 표현을 사용한 순간들이 붉게 뜨겁고 아프게 얼굴을 달궜다.

 

첫 일독은 혼자였지만, 이제는 나보다 키가 더 큰 십대 아이들과 함께 읽고 싶었는데, 대입을 앞둔 큰 아이는 당분간 책을 읽고 싶어 하지 않는 듯하고, 2가 된 작은 아이는 토익시험을 궁금해 한다. 나도 40대에 이 책을 만났으니 다그치지 말고, 운이 좋아 더 늦지 않게 배운 내 기록을 다시 남기려한다.



 

6년 만임에도 책은 강력하다. 표지 거울에 어른거리는 나를 요리조리 각도를 바꿔도 피할 수가 없다. 전면적 솔직함 말고, 표현형 몇 가지만 들키고 반성하고 변명하며 살고 싶은데, 내 사정을 봐주는 법이 없다. 차별을 인지하기 위한 최적의 기초공사처럼 단단한, 여전히 유효한 지적들이다.

 

결정장애란 표현은 다시 사용한 적이 없지만, 그 이후 얼마나 더 알아차리고 멈추고 설명하고 바꾸며, 차별주의적인 사유와 언행을 조금이라도 덜 재생산하며 살아왔는지, 가이드이자 의지가 된 이 책을 다시 꽉 붙잡고 상기해본다.




 

여전히 잘 보이지 않는 차별들이 있다. 내가 선 자리가 달라지지 않으면 놀랍도록 평범한 특권인 차별을 평생 알아차리지 못할 지도 모른다. 기분 나쁜 농담처럼 들렸던 혐오와 차별과 폭력의 목소리들이, 어느새 구체적인 현실 위협이 되는 풍경을 지옥도처럼 목격하기도 한다.

 

먼 곳의 전쟁을 반대할 여유도 앗아가는 사회적 격변이 악몽처럼 벌어지기도 한다. 공정성과 평등에 관한 차분하고 끈질긴 논의는 고사하고, 하루 종일 속보를 찾아보며 하루를 견디다 지치고 황폐해진다. 언제쯤 마지막 기회를 놓쳐버렸을까 그런 절망감이 우울을 앞세워 찾아오기도 한다.

 




그리고 동시에, '세상이 더 이상 망하지 않을 것만 같아……' 그런 낯설고 말랑한 희망을 품고 싶게 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들은 한 곳에만 서 있지 않고 어디든 찾아가서 연대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위계와 폭력과 능력주의의 목줄이 지우지 못한 차별의 증거들이다. 그쪽을 향하는 것만으로 내 삶의 풍경이 바뀌곤 한다.

 

두렵지만 다시 시도하는 용기, 질 것을 알지만 또 도전하는 용기, 이기지 못해도 뭐라도 해야 하니까 할 수 있는 것부터 꼭 하는 용기, 연대는 약하기 때문에 서로 내민 손들이라고 안심시켜주는 이들이 있다. 기대보다 더 많이 있다.

 

그 손들이 정의롭지 않은 현실의 부당할 수 있는 법들을 바꿔낼 거라 희망한다. 더 간절한 서로 다른 우리이 더 약삭빠른 저들에게 지지 않을 거라고. 기후격변으로 인류가 끝장나기 전에, 차별금지법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그만큼은 평등해서 안도하며, 그 법을 준수하는 건전 시민으로 살아보고 싶다.

 

차별금지법의 제정은 (...)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지에 관한 상징이며 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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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천대루
천쉐 지음, 허유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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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휴가에 범죄, 미스터리, 추리소설 신간을 쌓아두고 읽는 즐거움을 지난해에는 놓쳤다. 아주 오래된 루틴이라서 낯설고 아쉬웠다. 보상처럼, 다른 작가도 아닌 천쉐의 장편 추리, 미스터리, 범죄 소설을 만났다. 연휴가 즐거워진 선물이다.



 


백만 개의 퍼즐을 맞추라는 듯 펼쳐진 장대하고 깊은 이야기들을 따라 읽으면, 작가가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주 구체적으로 느껴진다. 한 작품에 이토록 매력적인 인물들이 많은 것이 즐겁다.

 

추리/미스터리 작품은 퍼즐풀기의 속도를 즐기면 전력 질주하듯 읽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 작품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하나하나가 완결되고 이어지는 연작을 읽듯 고유한 스토리텔링이 있었다.

 

사건이 두드러지기보다 역사와 사회와 인간에 대한 이해들이 천천히 용해되는 화합물처럼 녹아들었다. 읽을수록 불안한 슬픔이 짙어지는 예감에 안타까웠고, 사적복수나 폭력을 전혀 지지하지 않음에도, 한 인물을 책 속에서 잡아 뜯듯 뜯어내어 아무도 못 찾을 곳에 내다버리고 싶었다.

 

다소 긴장감이 떨어져도 돌이킬 수 없는 희생과 많은 눈물과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덜한 결말이길 바랐다. 퍼즐 풀기보다 작품에 푹 잠기는 것이 더 좋아질 무렵, ‘그 한 단어에 그만 어떻게 된 것인지가 스르륵 이해되었다.

 

짐작대로면 속상한 비극이라서, 내가 틀렸기를 바라며 읽었지만, 행복해지길 바랐던 인물은 다시 살아오지 못했다. 어떤 악인은 하나의 혹은 그 이상의 목숨이 끝나서야 겨우 죄를 물을 수 있는 설정이 현실과 겹쳐 보여 씁쓸하다.

 

그럼에도 이런 사적인 후감으로는 트집을 잡을 수 없는 멋진 작품이다. 일단 메시지가 분명하고 그 메시지에 무척 공감한다. 완벽하지 않아도 애쓰고 싸우며 만든, 그렇게 이어진 세상이고, 그렇게 이어나갈 세상이다.

 

내 삶도 누군가의 삶을 아주 조금이라고 더 살만해지게 만들 수 있기를 간원하고 필요한 도움이길 바랄 뿐이다. 이쪽이 지지 않을 결심을 하면, 끝까지 버티면, 그자들이 질 것이라고 그렇게 단단히 걸어가 볼 뿐이다.

 

책을 덮어 두고 호흡을 고르다 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간절해서 아름답고 약해서 강한 것들이 더 많이 보인다. 삶을 함께 나누던 친구들이, 기꺼이 타인을 돕는 이들이 더 그리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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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사람은 파인애플을 좋아해 열린책들 한국 문학 소설선
도재경 지음 / 열린책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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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사람이 파인애플 좋아하는 이유가 당장 알고 싶어지는 마성의 제목, 에세이 같았는데 소설이라 더 기대된다. 파인애플을 좋아하고 잘 먹지만, 일곱 개를 선물 받은 건 처음이다. 상자 크기에 놀라고 내용물에 압도당함.

 

각인되어 잘 안 잊힐 제목의 책과 낯선 파티에 초대된 듯 인상적인 거대한 선물이 평범한 목요일을 유쾌하고 특별한 날로 만들었다.





 

작가님 질문에 대한 답변:

 

, 파인애플 좋아합니다. 먼 아프리카 출신인 것도, 특이한 외모도, 열매가 아닌 부분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도, 화분에 심으면 나무로 자라는 것도, 달콤한 유년 시절의 향을 품은 것도, 행복해지는 과육의 색도 다 좋아합니다.”

 

.........................................

 

오늘날 상식이라고 일컬어지는 것도 한때는 이해하기 힘든 그 무엇일 때가 있지 않던가.”

 

결국엔 읽는 중간에 크게 웃고 말았다. 이 책이 만약에 정답을 맞히는 시험 텍스트였다면 나는 빵점을 받았을 것이다. 생전 처음 소설을 만난 이()세계의 존재처럼, 모든 단편이 생경했고 짐작하는 족족 다 틀렸다.

 

비슷비슷한 고민을 오래하고 살아가는 게 생명체가 묶인 저주라서, 그 설정이 문득 숨 막히곤 하는데, 이렇게 낯선 어떤 것을 만나는 시간이 뜻밖에 숨통을 열어주는 듯했다. 무능하고 무책임한 존재가 된 기분이 정말 상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제는 수시로 자신의 주위에 끊임없이 경계선을 긋는 듯했고, 그로 인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거듭 확인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뭘 좀 배우고 짧지 않게 살아봐도, 나는 실재하지 않거나 개념으로 굳건해진 모든 경계에 수없이 갇히고 가두고 사는 어리석고 게으른 존재다. 이래서야 필연적으로 만날 삶과 죽음의 얇은 경계를 의젓하게 넘을 수 있을까.

 

문학이 내어주는 위안의 호흡법을 느끼며 다른 분들도 즐겁게 읽으시기를 바란다. 독특한 창작의 세계로 유쾌하고 노련하게 이끌어주신 작가님께 감사드린다. 다른 작품은 뭘 쓰셨을지 찾아봐야겠다.

 

민아가 파인애플을 좋아했던가. (...) 먼 하늘에 유난히 반짝이는 별 하나가 보였다. (...) 춘천을 지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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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렇게 말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어 - 좋은 말, 나쁜 말, 이상한 말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엎는 언어 이야기
발레리 프리들랜드 지음, 염지선 옮김 / 김영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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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음vowels’에 관한 책을 썼는데 bowels’에 관한 책을 팔러 다니는 위장병 학자로 오해받는 일이 잦았다.”

 

표지와 제목을 보고 기대한 바는 완전한 오해였다. 자주 있는 일이라 당황은 하지 않았다. 다만, 언어학 책을 읽으며 이렇게 많이 웃을지는 몰랐다. 그러니까, ‘언어학이 무엇인지도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던 셈이다.

 

언어학자는 여러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이다. 언어학은 언어 사용자와 그들의 사회적 삶을 기반으로 한다.”

 

재미있지만, 구체적이고 학술적인 내용도 적지 않다. 많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많은 연구를 한 학자의 사고의 방식이 문장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영어를 원어로 쓰는 독자가 아니라서 모두 공감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수다도 못 즐기고 즐거운 언어생활도 구사하지 못한다. 업무상 전화를 받으면 상대방이 응답기인줄 알고 녹음알람을 기다린 적도 있다. 고백하자면 많은 경우 읽기와 쓰기가 말하기보다 편하고 덜 시간낭비라고 느낀다.

 

사용하는 언어는 생각보다 훨씬 더 적나라하게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낸다. 말할 때 누구나 무의식적으로 언어를 변형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훈육되고 훈련받은 대로 업무 효율성과 능력주의, 결과주의, 정량 평가에도 익숙하다. 본보기가 되어준 많은 분들과 좋은 책들이 없었다면, 최악의 최악을 더한 인간 유형으로 살았을지 모른다.

 

일반적으로 현대 언어가 점점 잘못된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 초등학교 때부터 세뇌받은 문법 교육에서 한 걸음 떨어져 생각할 필요가 있다.”

 

언어뿐만 아니라 표현된 많은 것들이 실은 권력과 관점의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여전히 진실과 당위가 헷갈리고, “올바른것에 집착한다. 그 집착이 누군가의 선호라는 걸 안 후에도 재빨리 혼동을 정리하지 못한다.

 

여전히 싫을 수는 이지만 최소한 그런 말을 쓰는 이유는 이해할 수 있길 바란다.”

 

그래서 이 책은 웃음과 함께 곱씹을 배움도 정확히 제시한다. 여전히 맞춤법 테스트를 자발적으로 하며 평생 배울 수 없을 문법에 목매는 나는, “그 올바름과 권위에 대해 이렇게 다시 각성하고 배울 기회가 자주 필요하다.

 

고쳐야 한다고 배워온 말버릇이 어쩌면 인류의 언어 유산으로 남을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각자가 다소 가진 권력이라는 계단 위에 선 자신을 제대로 보고, 새로운 세대의 발화 방식과 언어 수용의 말랑함과 발랄함을 평가하는 대신에, 살아있는 언어의 생장 방식이라고 보는 태도가 더 필요하다.

 

기초지식이 부족해서 깨달음도 적겠지만, 언어를 통해 내가 파악할 수 있는 내 정체성(을 이룬다고 생각하는 면면들)과 규범, 사회적 구별성에 대해, 현상이 아닌 권력의 척도로 재고해볼 수 있어서 고마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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