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천대루
천쉐 지음, 허유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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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휴가에 범죄, 미스터리, 추리소설 신간을 쌓아두고 읽는 즐거움을 지난해에는 놓쳤다. 아주 오래된 루틴이라서 낯설고 아쉬웠다. 보상처럼, 다른 작가도 아닌 천쉐의 장편 추리, 미스터리, 범죄 소설을 만났다. 연휴가 즐거워진 선물이다.



 


백만 개의 퍼즐을 맞추라는 듯 펼쳐진 장대하고 깊은 이야기들을 따라 읽으면, 작가가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주 구체적으로 느껴진다. 한 작품에 이토록 매력적인 인물들이 많은 것이 즐겁다.

 

추리/미스터리 작품은 퍼즐풀기의 속도를 즐기면 전력 질주하듯 읽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 작품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하나하나가 완결되고 이어지는 연작을 읽듯 고유한 스토리텔링이 있었다.

 

사건이 두드러지기보다 역사와 사회와 인간에 대한 이해들이 천천히 용해되는 화합물처럼 녹아들었다. 읽을수록 불안한 슬픔이 짙어지는 예감에 안타까웠고, 사적복수나 폭력을 전혀 지지하지 않음에도, 한 인물을 책 속에서 잡아 뜯듯 뜯어내어 아무도 못 찾을 곳에 내다버리고 싶었다.

 

다소 긴장감이 떨어져도 돌이킬 수 없는 희생과 많은 눈물과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덜한 결말이길 바랐다. 퍼즐 풀기보다 작품에 푹 잠기는 것이 더 좋아질 무렵, ‘그 한 단어에 그만 어떻게 된 것인지가 스르륵 이해되었다.

 

짐작대로면 속상한 비극이라서, 내가 틀렸기를 바라며 읽었지만, 행복해지길 바랐던 인물은 다시 살아오지 못했다. 어떤 악인은 하나의 혹은 그 이상의 목숨이 끝나서야 겨우 죄를 물을 수 있는 설정이 현실과 겹쳐 보여 씁쓸하다.

 

그럼에도 이런 사적인 후감으로는 트집을 잡을 수 없는 멋진 작품이다. 일단 메시지가 분명하고 그 메시지에 무척 공감한다. 완벽하지 않아도 애쓰고 싸우며 만든, 그렇게 이어진 세상이고, 그렇게 이어나갈 세상이다.

 

내 삶도 누군가의 삶을 아주 조금이라고 더 살만해지게 만들 수 있기를 간원하고 필요한 도움이길 바랄 뿐이다. 이쪽이 지지 않을 결심을 하면, 끝까지 버티면, 그자들이 질 것이라고 그렇게 단단히 걸어가 볼 뿐이다.

 

책을 덮어 두고 호흡을 고르다 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간절해서 아름답고 약해서 강한 것들이 더 많이 보인다. 삶을 함께 나누던 친구들이, 기꺼이 타인을 돕는 이들이 더 그리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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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사람은 파인애플을 좋아해 열린책들 한국 문학 소설선
도재경 지음 / 열린책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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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사람이 파인애플 좋아하는 이유가 당장 알고 싶어지는 마성의 제목, 에세이 같았는데 소설이라 더 기대된다. 파인애플을 좋아하고 잘 먹지만, 일곱 개를 선물 받은 건 처음이다. 상자 크기에 놀라고 내용물에 압도당함.

 

각인되어 잘 안 잊힐 제목의 책과 낯선 파티에 초대된 듯 인상적인 거대한 선물이 평범한 목요일을 유쾌하고 특별한 날로 만들었다.





 

작가님 질문에 대한 답변:

 

, 파인애플 좋아합니다. 먼 아프리카 출신인 것도, 특이한 외모도, 열매가 아닌 부분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도, 화분에 심으면 나무로 자라는 것도, 달콤한 유년 시절의 향을 품은 것도, 행복해지는 과육의 색도 다 좋아합니다.”

 

.........................................

 

오늘날 상식이라고 일컬어지는 것도 한때는 이해하기 힘든 그 무엇일 때가 있지 않던가.”

 

결국엔 읽는 중간에 크게 웃고 말았다. 이 책이 만약에 정답을 맞히는 시험 텍스트였다면 나는 빵점을 받았을 것이다. 생전 처음 소설을 만난 이()세계의 존재처럼, 모든 단편이 생경했고 짐작하는 족족 다 틀렸다.

 

비슷비슷한 고민을 오래하고 살아가는 게 생명체가 묶인 저주라서, 그 설정이 문득 숨 막히곤 하는데, 이렇게 낯선 어떤 것을 만나는 시간이 뜻밖에 숨통을 열어주는 듯했다. 무능하고 무책임한 존재가 된 기분이 정말 상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제는 수시로 자신의 주위에 끊임없이 경계선을 긋는 듯했고, 그로 인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거듭 확인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뭘 좀 배우고 짧지 않게 살아봐도, 나는 실재하지 않거나 개념으로 굳건해진 모든 경계에 수없이 갇히고 가두고 사는 어리석고 게으른 존재다. 이래서야 필연적으로 만날 삶과 죽음의 얇은 경계를 의젓하게 넘을 수 있을까.

 

문학이 내어주는 위안의 호흡법을 느끼며 다른 분들도 즐겁게 읽으시기를 바란다. 독특한 창작의 세계로 유쾌하고 노련하게 이끌어주신 작가님께 감사드린다. 다른 작품은 뭘 쓰셨을지 찾아봐야겠다.

 

민아가 파인애플을 좋아했던가. (...) 먼 하늘에 유난히 반짝이는 별 하나가 보였다. (...) 춘천을 지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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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렇게 말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어 - 좋은 말, 나쁜 말, 이상한 말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엎는 언어 이야기
발레리 프리들랜드 지음, 염지선 옮김 / 김영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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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음vowels’에 관한 책을 썼는데 bowels’에 관한 책을 팔러 다니는 위장병 학자로 오해받는 일이 잦았다.”

 

표지와 제목을 보고 기대한 바는 완전한 오해였다. 자주 있는 일이라 당황은 하지 않았다. 다만, 언어학 책을 읽으며 이렇게 많이 웃을지는 몰랐다. 그러니까, ‘언어학이 무엇인지도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던 셈이다.

 

언어학자는 여러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이다. 언어학은 언어 사용자와 그들의 사회적 삶을 기반으로 한다.”

 

재미있지만, 구체적이고 학술적인 내용도 적지 않다. 많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많은 연구를 한 학자의 사고의 방식이 문장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영어를 원어로 쓰는 독자가 아니라서 모두 공감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수다도 못 즐기고 즐거운 언어생활도 구사하지 못한다. 업무상 전화를 받으면 상대방이 응답기인줄 알고 녹음알람을 기다린 적도 있다. 고백하자면 많은 경우 읽기와 쓰기가 말하기보다 편하고 덜 시간낭비라고 느낀다.

 

사용하는 언어는 생각보다 훨씬 더 적나라하게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낸다. 말할 때 누구나 무의식적으로 언어를 변형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훈육되고 훈련받은 대로 업무 효율성과 능력주의, 결과주의, 정량 평가에도 익숙하다. 본보기가 되어준 많은 분들과 좋은 책들이 없었다면, 최악의 최악을 더한 인간 유형으로 살았을지 모른다.

 

일반적으로 현대 언어가 점점 잘못된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 초등학교 때부터 세뇌받은 문법 교육에서 한 걸음 떨어져 생각할 필요가 있다.”

 

언어뿐만 아니라 표현된 많은 것들이 실은 권력과 관점의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여전히 진실과 당위가 헷갈리고, “올바른것에 집착한다. 그 집착이 누군가의 선호라는 걸 안 후에도 재빨리 혼동을 정리하지 못한다.

 

여전히 싫을 수는 이지만 최소한 그런 말을 쓰는 이유는 이해할 수 있길 바란다.”

 

그래서 이 책은 웃음과 함께 곱씹을 배움도 정확히 제시한다. 여전히 맞춤법 테스트를 자발적으로 하며 평생 배울 수 없을 문법에 목매는 나는, “그 올바름과 권위에 대해 이렇게 다시 각성하고 배울 기회가 자주 필요하다.

 

고쳐야 한다고 배워온 말버릇이 어쩌면 인류의 언어 유산으로 남을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각자가 다소 가진 권력이라는 계단 위에 선 자신을 제대로 보고, 새로운 세대의 발화 방식과 언어 수용의 말랑함과 발랄함을 평가하는 대신에, 살아있는 언어의 생장 방식이라고 보는 태도가 더 필요하다.

 

기초지식이 부족해서 깨달음도 적겠지만, 언어를 통해 내가 파악할 수 있는 내 정체성(을 이룬다고 생각하는 면면들)과 규범, 사회적 구별성에 대해, 현상이 아닌 권력의 척도로 재고해볼 수 있어서 고마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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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밍 소설Y
최정원 지음 / 창비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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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생엔 나무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 했다. 물론 현 의식체로 구성원소 모두를 다른 개체로 바꿀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인간이 나무로 바뀌는 바이러스라니!

 

이 책에서 활용하는 소재가 무섭기보다 흥미진진하다. 수백만 명이 나무가 되어 이뤄낸 숲의 풍경도 궁금하다. 그렇게 종species 간 경계를 넘은 변환이, 인간에게 그리고 지구 생태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지, 작가가 담아내고 전하는 메시지가 기대된다.

 



인류 멸종의 카운트다운은 구 년 전 6월의 햇살 좋았던 어느 날 아무 예고도 없이 시작되었다. (...) ‘그것은 보다 조용히, 시시하게, 그러나 막을 수 없는 방법으로 사람들을 덮쳤다.”

 

내 짐작은 한가했고 내용은 긴박했다. 읽는 동안 슬프고 아픈 감정들이 일렁거렸는데, 모든 걸 상실하는 더 슬픈 결말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덕분에 기분도 생각도 추스를 수 있었다. 이 정도 다정과 희망은 가져도 되는 거잖아…….

 

아비규환은 인구 천만 이상의 세계적 대도시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현재 한국은 내란 이슈가 사회와 시민의 체력과 관심을 모두 집어 삼킨 상태다. 하루빨리 이 상태를 정리하는 게 중요하지만, 나 역시 매일 그 이슈에 사로잡혀 살지만, 문득! 민주정을 바라는 바대로 구현한다고 해도, 지구공동체에서 인류의 생존이 얼마나 지속될지 두렵다.

 

공식적으로 수도 서울 내의 생존자는 제로여야 했다.

확실히, 반드시, 무조건 제로여야 했다.”

 

저자는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서도, 인간이 가진 약점과 오류에 관해서도, 깊고 예리한 시선을 시종 유지하면서도, 잘 읽히는 문학의 방식으로 메시지를 유려하게 전한다. 대비와 반전이 오해의 여지가 없이 선명하고 통쾌하다.

 

어쩌면,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은 마음이다. 재난의 앞에서 늘 그래 왔듯 짧은 순간만 유행처럼 애도하다 금세 치워 버리고 아직도라는 말로 슬픔마저 얼른 잊도록 강요해 온 세상에 대한 배신감 (...).”

 

지킬 것이 있는 이들이 선택하고 살아가는 방식, 그런 사랑으로 지켜져 성장한 이들이 맺는 관계와 만드는 세상, 아름답고 그리워서 가슴이 미어졌다. 혐오와 폭력의 굉음들 속에서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들리는 노랫소리처럼.

 

숲이었다. 숲 전체가 노래하고 있었다. 온몸으로. 가슴이 조여 왔다.”

 

누구의 것이든 생명과 존재에 무감하지 않고 감응하는 서로가, 죽음과 파괴를 향하는 방향을 바꾸고 멈추는 유일한 희망이다. 우리가 바라는 것들이 얼마나 이뤄질지, 당최 뭐라도 이뤄지기는 할지 알 수 없지만, 그래서 우리에겐 꿈을 꾸는 능력이 있는 거라고. 힘이 센 작품이다. 인상적이고 감정적이다.



 

📖 출판사 서평단을 통해 제공 받은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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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수수께끼를 풀다 - 문화 상대주의로 세상을 바꾼 인류학의 모험가들
찰스 킹 지음, 문희경 옮김 / 교양인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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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하고 새로 만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상들의 힘, 심장이 빠르게 뛴다. 두근거린다. 도덕적 책무와 정치적 신념의 격돌 대신, 사법논쟁들로 삶이 다 쪼그라든 것인가 싶은 내란 한국 사회의 현실이 긴박한 중에도 쓸쓸하다.

 

그 혁명은 철학과 종교, 인문과학의 중심에 있는 골치 아픈 질문들에서 시작됐다. 인간 사회에서 자연스러운 구분은 무엇인가? 도덕은 보편적인가? 우리와 다른 신념, 다른 관습을 가진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상시 모욕감과 버려진 존엄성과 수치심을 모르는 무지성주의의 현실에 병들어가는 시간이다. 안전한 도피처로 펼친 책의 사상가들은 폐만이 아니라 구겨진 뇌에도 호흡을 불어넣어준다. 읽기가 심호흡하는 치유과정 같았다.

 

이 책은 우리 시대 가장 큰 도덕 전쟁의 최전선에 서 있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 그렇다고 정치나 윤리, 신학에 관한 책은 아니다. (...) 그보다는 과학과 과학자들에 관한 이야기다.”

 

수입학문이 대부분인 한국의 제도적 교육 내용들은 여러 이유와 한계로 오독과 오해로 남기도 한다. 인간 사회에서 인류 구성원으로 살면서,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인 과학, 문화인류학을 제대로 배워본 적은 없었다.

 

문화는 우리가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궁극적 원천이다. (...) 다만 사회 세계에서 인간이 스스로 만든 현실만큼 근본적인 현실은 없다.”

 

속보와 단신과 잡담과 욕설과 뉴스와 진지한 헛소리들에 사로잡혀 사는 연말연시에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는데, 해독제와 같은 책을 만나, 인간이 가진 능력과 존엄성과 변화를 위한 지적 열기를 느낄 수 있어서 살 것 같았다.

 

보아스는 자신의 지적 작업을 단순한 과학이 아니라 어떤 정신의 상태로, 나아가 바람직한 삶을 위한 처방전으로 보게 됐다.”

 

전율이 느껴질 만큼 흥미로운 주제들을 유려한 문체로 전해주니 즐겁게 술술 읽을 수 있다. 일 년쯤 다른 생각, 다른 일은 작파하고 고요하고 깊이 있게 공부해보고 싶어서, 못하는 현실이 아쉽고 서글프기도 하다.

 

보아스 학파의 핵심 개념은 현명하게 살아가려면 타인의 삶을 공감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원래 그랬는데 나는 몰랐던 것인지, 점점 더 인류의 지성이 집약된 좋은 책들이 많아지는 것인지, 전공 서적들 못지않은 짜임새와 전달력으로 만날 수 있는 책들이 참 많다. 다 읽고 즐길 수 없는 짧은 수명이 안타까울 뿐이다.

 

다른 인간을 이해하는 과제를 사랑한 과학자이자 사상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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