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마르트르 물랭호텔 1 - Hoôtel du Moulin
신근수 지음, 장광범 그림 / 지식과감성#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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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후 신문사 기자를 하며 프랑스 유학을 준비했다"

"회사가 갑자기 폭삭 망해 파리에서 4년 동안 한식당을 운영했죠."

“원래 발 뻗고 글이나 쓰려고 몽마르트르 언덕에 호텔을 개업했는데 웬걸, 글 쓸 틈도 없었다”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르, 하루 3만 명, 연간 1천만 명의 여행자들이 방문한다는 그 규모면에서 지구상 최고의 여행지 중 하나일 것이다. 실제로는 상당히 지저분하고 너무나 붐비고 안전이 잘 확보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마음 편히 머문 곳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언제나 연상되는 것은 설레면서도 느긋하면서도 세련된 '예술'이다. 그저 (예비)직업 예술가들이 많다는 뜻이 아니라, 우충충한 하늘도 매케한 공기도 평범한 커피도 어떤 메뉴도 어쩔 수 없이 예술적인 곳이 파리이다. 그 중에서도 몽마르트르에서 호텔을 우직하게 28년간 경영하며 만난 이들의 추억담을 들려 주는 책이라니, 펼쳐 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더구나 이 책이 제 1권이다. 저자가 계획대로 책을 7권 더 출판한다면 한동안은 파리와 몽마르트르의 일상에 제대로 푹 잠길 수 있을 것같아 기대된다.

이 뒷표지를 보고서 오랫만에 몽마르트르의 물랭 드 라 갈레트 Le Moulin de la Galette, à Montmatre를 찾아 보았다.


짐작대로 목차 또한 '예술'적이다. 첼리스트, 영화, 음악, 연극, 노래, 그림, 글, 발레 등등. 저자가 짐작하기엔 27만 명 정도의 세계인들과 만났고 단골만 5만 명이 될 것이라 한다. 이야기가 시간 순서가 아니라 주제별로 나위어져 진행되는 형식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27년 동안 27만 명은 ‘평범한 세계인들과의 만남’이었다.

한 지붕 아래서 귀중한 만남을 통하여 귀중한 시간들을 가졌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사연도 많았다.

산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다.


이들 중에는 내 오랜 기억 속에 잊혀진 분들도 있어 놀랍고도 반가웠다. 이문열, 안성기, 김민기, 이호철.


"세월이 지나도 배우 안성기씨는 좀처럼 잊히지 않아요.

얼마나 인성이 푸근하고 점잖던지,

아! 화면에서 보던 모습 그대로더라고요."


"많은 손님 중에서 청와대 특별보좌관과 주미 대사를 지낸 김경원씨가 기억에 남아요." 1990년대 중반 '호텔 수준에 맞지 않는 귀빈'이란 생각에 바짝 긴장했지만 '곰탕에 김치 식사가 좋다'며 보인 검소하고 정중한 모습에 감동받았다. "겸양이 몸에 밴 분이었죠.'갑질 손님'을 만나면 늘 그분이 그립더군요."


'아침이슬'의 가수 김민기와는 달 밝은 날 호텔에서 대작하다가 "밤에 작은 배를 타고 나가 술을 마셨는데, 달빛이 창창한 바다를 보자니 얼음장이 깔린 것 같아 그 위를 걷고 싶었다"는 시(詩) 같은 회고를 들었다.

술이 셌던 소설가 이문열씨는 새벽까지 호텔 마당에서 함께 포도주를 마시다 "이 일 접으시고 글을 쓰시라"는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무일품의 한국인이 자기 자본금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프랑스 중소자영업 전문투자은행에 대출을 받으러 방문해서, 한국인으로서 최초 신청자에다 최초 대출 수혜자라는 기록을 만든 이가 이 책의 저자이다. 그런 믿어지지 않은 일도 잘 하셨듯이, 이제 부디 원하시는 글을 실컷 원하시는 만큼 쓰시길, 그래서 덕분에 몽마르트르 이야기를 오래 잔뜩 들을 수 있길 고대한다.

 

신 형은 못한 것이 아니고, ‘안 한 것’이 아닐까요?...... 감사하고 부끄러웠다.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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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아씨들 (영화 원작 소설) - 완역, 1·2권 통합 걸 클래식 컬렉션 1
루이자 메이 올콧 지음, 공보경 옮김 / 윌북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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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드디어 [작은 아씨들]이다. 걸 클래식 시리즈 중 마지막이며, 968쪽이란 기쁘고 설레는 분량의 훌륭하고 감동적인 새 번역서이며, , 세라, 하이디 모두 부족함이 없지만, 걸 클래식이란 호명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모두 여성작가, 모두 여성 번역가들, 모두 여성인 서문 작성자들, 여성 표지 디자이너, 모두 여성 편집자들. 보석보다 아름다운 여성 고전 선집이다.

 

어릴 적 어떤 식으로든 이들을 만나 무엇이든 느끼고 생각해본 추억이 없는 이들이나, 소위 성인이 되어 내용을 알게 된 독자들은 달리 느끼겠지만, 나는 이 선집이 어린 시절 잃어버린 소중한 보물을 기적처럼 찾게 된 것에 버금가는 감동적인 조우이다. 창밖의 한기로부터 완벽하게 보호받으며 달콤한 향기가 온 집안에 퍼진 듯이 행복한 크리스마스가 매일 반복되는 세월에 머물 수 있을 듯한, 그 걱정과 염려 없던 시절을 한 번 더 살아 보고 싶다는 환상과 상상을 호명한다.

 

목차를 보며 기억을 떠올려 보자니 마치 청교도 사상가의 전형처럼 검소하고 바르고 강인했던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의 의견을 잘 따르던 자매들이 떠올랐다. 어려서는 작가에 대해 알 생각을 못했는데, 이번에 제대로 알게 되면서 작가에 대해서도 작품 못지않은 여러 생각이 들었다, 루이자 메이 올컷 자신이 청빈하고 엄격한 청교도 집안에서 자란 점. 첫째 메그처럼 가정교사로 일한 것, 남북전쟁 당시 간호사로 근무한 것, 1868년 출간 전후 시기는 여성에게 직업이 허락되지 않고 결혼과 육아만이 삶의 옵션이었던 것, 넷째 에이미는 실제 화가였던 동생이 모델이라는 점 등이다. 그 중에서도 루이자 메이 올컷의 어머니는 그 시절에 드물던 사회운동가로서, 여성의 참정권, 노예 해방과 교육에 관심이 많았으며, 딸인 루이자 메이 올컷에게 글쓰기 재능이 있으니 셰익스피어같은 작가가 될 것이라 격려했다고 한다. 여성이 대학에도 진학하지 못하고, 투표권도 없던 그 시절에.

 

그런 교육의 힘이었을 것이다. 여성운동, 노예해방운동, 금주운동들이 전개되던 그 시절에 올콧 작가가 라는 캐릭터를 탄생시킬 수 있었던 신비롭고 존경스러운 원동력은. 뚜렷한 꿈이 있고, 몰입할 수 있는 재능이 있고, 살짝 지나치지만 솔직하고 두려움 없이 용감한 캐릭터. 이기적이지 않고 가족에겐 사랑과 헌신을 아까지 않지만 자신의 꿈도 포기하지 않는 현명한 캐릭터. 지금에도 누구나 되고 싶은 캐릭터 중 하나일 것이다. 바로 얼마 전에 제일 좋은 친구에이런 말은 소용없겠지만 좀 영리하게 살아.란 문자를 받았는데, 대고모가 에게 세상 영리하게 살라고 가르치는 장면이 있어 재밌고 짠했다.

 

선물 없는 크리스마스가 무슨 크리스마스야.”

첫 문장이 예전 그대로이다. 마음이 설레고 떨리고 반갑다.

   

나는 더 이상 네 자매 중 한 사람에게 자신을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그 시절은 지나갔다. 대신에 이 작품이 건네는 이야기들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더 많이 들린다. 어린 시절과는 비교도 안 되게 지금의 나의 고민의 스펙트럼이 넓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그 중 일부는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새겨듣지 못할 지도 모른다.

 

너희가 짊어져야 할 작은 짐에 대해 조언을 해줄게. 때로는 짐이 버거울 때도 있겠지만, 짐은 우리에게 유익한 거야. 짊어지는 방법을 깨달으면 점점 가볍게 느끼게 돼. 243

 

솔직하게는 이런 말에 여전히 조금은 화가 나고 섭섭하다. 그런 마음 배경은 그저 짐을 지고 싶지 않다, 라는 것이다. 그래도 하기 싫은 일을 마냥 하지 않겠다고 펑펑 울며 거부하면 되는 시절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살아간다는 것은 운이 좋아야 때론 가벼운 짐을 지는 일이란 것을, 대부분은 버거운 짐을 지는 일이라는 것을, 그래도 버텨봐야 하는 일이 다반사라는 것을 안다. 서글프다.

 

늙어서 관절이 굳을 때까지, 목발을 짚고 다녀야 하는 날까지 계속 뛸 거야. 나를 철들게 하려고 재촉하지는 마, 언니. 사람이 하루아침에 달라질 수는 없잖아. 나는 최대한 오래 아이로 살고 싶어.” 312

 

어린 시절이었지만 나도 최대한 오래 아이로 살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제대로 된 어른이 되는 법을 모르겠다. 아마 늙어갈 테지만 성장은 못하는(grow old, not grow up) 인간으로 마무리할 것 같다는 비통한 예상이 매일 더 확실해진다.

 

조는 자신이 천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글이 잘 쓰일 때면 모든 것을 잊고 몰입했다. 결핍도 근심도 좋지 않은 날씨도 의식하지 않고 상상 세계 속에 안전하고 행복하게 들어앉아 작가에게는 현실과 다름없는 상상 친구들과의 삶을 즐기며 희열을 느꼈다. 그럴 때면 잠도 오지 않고 식욕도 동하지 않았다. 그렇게 행복한 몰입의 순간이 찾아올 때면 밤낮이 짧게 느껴졌고, 결실을 맺지 못해도 매 시간이 너무나 소중했다. 523

 

우리가 읽고 싶어. 우리를 위해 뭐든 써보렴. 세상 사람들은 신경 쓰지 말고 시도해봐. 분명히 너한테 도움이 될 거고 우리도 즐거울 거야.” 843

 

어쨌든 다시 만난 작은 아씨들에서도 역시 의 이야기가 가장 궁금하다. 생계를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서 행복하게 몰입할 수 있는 일을 찾은 와 같은 이들은 참 부럽다. 어찌된 일인지 젊은 날의 결심과는 달리 직업은 자아실현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직장인들처럼 나 역시 행복하지 않았다. 집보다 공항에서 더 자주 식사를 해야 했던 워크숍 강의들도, 늘 바쁘고 오랜 기간의 출장들이 많아 세 달 동안 집에 오 일 정도 밖에 들어오지 못한 기업체 일도, 그게 싫어서 9-6타임터널을 반복하던 공사의 무사태평일도, 한국사회 우리가 남이가의 조직생활이 도저히 적응불가능해서 선택한 프리랜서도 모두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게 세월은 멀어지며 흘러갔고 에이미의 열정은 사라지고 베쓰처럼 소심한 마음과 아픈 몸이 남았다.

 

그래서 1868년부터 오늘날까지 150년이 지나도록 수없이 태어나고 살아가는 현실의 수많은 들을 응원하고 싶다. 오늘날의 는 아마 작은 아씨들의 가난한 것 빼고는 운이 좋은 보다 훨씬 더 힘겹게 살고 있을 가능성이 많다. 시대를 뛰어 넘어 두려움 없이 소신껏 살아가는 의지가 되는 어머니도 없을 수 있고, 힘들 때마다 기꺼이 곁을 내어 주고 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을 주는 자매들도 없을 수 있고, 혈육만큼 친밀하고 솔직하게 오래 사귈 수 있는 친구도 한 동네에 없을 수 있고, 무엇보다 오롯이 나만의 공간으로 방해받지 않고 즐겁고 행복하게 몰입할 수 있는 다락방도 없을 수 있다.

 

다시 읽은 작은 아씨들은 내가 기억하던 것보다 훨씬 성숙하고 강인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캐릭터들이다. 150년이란 세월이 무색하다. 그야말로 little이란 수식어는 little한 내 인생에나 어울리는 말로 남은 기분이다. 개인의 삶과 가족의 관계, 자신의 바람과 사회적 시선 이런 것들이 내 삶에선 완벽한 불협화음을 이루고 있다. 각각의 고민의 해답은 언제나 숨은그림찾기에 감춰져 있는 것처럼 명쾌한 적이 없다. 이런 우울한 감상을 늘어 놓다보니, 우리 집 10대들은 어떻게 읽어 내는지 몹시 궁금하다. 어쨌든 그래도 나는 이 새로 단장하고 환골탈태한 고전의 무게감이 사랑스럽다. 적어도 그거 하나는 확실한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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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공주 세라 - 어린 시절 읽던 소공녀의 현대적 이름 걸 클래식 컬렉션 1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 지음, 오현아 옮김 / 윌북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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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혼란스러울 뿐만 아니라 가끔은 절망스럽거나 두렵다. 일반화의 오류는 늘 경계해야 하는 것이지만, 의사소통의 주된 창구가 되어야할 언론들과 인터넷 소통 매체들이 직업윤리나 공공윤리와는 생면부지의 상태인 듯하다. 악의든 선의든 피해자들은 발생할 것이고, 그 모든 것이 바로 잡히지 않아 아픔이 남을 것이지만, 그 모든 것도 한 때이고 결국은 지속가능하면서 바람직한 방향을 찾아나갈 것이라 믿고 싶다. 체력이 달려서 그 전쟁 통에 뛰어 들어 짜증 발산도 못하는 처지이지만, 그래도 내면의 중심은 잘 잡으며 매일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얼핏 보기엔 어린이 동화 같겠지만, 그 분량이나 내용이 아동 문고를 뛰어넘는 고전 클래식을 매일 읽고 있다. 이런 날엔 어릴 적 일본식 한자로, ‘소공녀라 불리던 [작은 공주 세라]가 적격이다. ‘공주라는 말이 주는 부정성에 여러 의혹을 받고 코웃음을 먼저 받을 지도 모르지만, 이 작은 공주는 마음가짐이란 측면에서 살펴보자면 절대 누구에게도 만만한 인간상이 아니다. 1905년 출간 이후, 100여년이 넘은 세월 동안 분야를 달리해서 재창조되어온 가치 있는 고전이다.

 

리틀, little’이 붙을 만한 나이인데, 외적 환경이 나락으로 떨어져도 무너지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어른들이 이럴 수 있을까, 오히려 충분히 풍요한 데에도 뭔가를 더 팔아 치워서, 혹은 기회만 있다면 탈법과 불법에 가담해서 더 부유해지고자 안간힘을 쓰는 게 익숙하지 않은가. 어쩌면 속담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인간 정신이 보여줄 수 있는 반성 능력과 강인함과 자존감을, ‘세라는 주체적이고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캐릭터이다.

 

나도 잘 모르겠어, 내가 진짜로 착한 아이인지, 아니면 못된 아이인지. 지금까지 힘든 일을 겪지 않아서 아는 사람이 없을 뿐, 어쩌면 난 끔찍한 아이일지도 몰라.”54

 

특히 이런 성찰은 아무나 아는 것이 아니다. 사정없는 사람 없고 잘못한 건 잘못한 거지만, 죄를 벌하고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경구에는 그 사정을 별도로 이해하라는 권고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상대방의 입장에 있지 않고서는 절대 알 수 없는 것이 각자가 견디어가고 있는 삶의 모습일 것이다.

 

시련에 좋은 점이 어디 있어?” 어먼가드가 고집스레 말했다. “그건 그래, 사실대로 말하면.” 세라가 솔직히 인정했다. “그렇지만 모든 일에는 우리가 모르는 좋은 점이 있을 거야.”144

 

조금 더 젊을 때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참 부질없이 들렸다. 그래도 이제는 조금은 다른 이해가 가능하다. 아마 이 말은 시련을 겪어 힘든 이들에게 조금만 힘을 내보라고 견뎌보라고 조심스럽게 손을 내미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 좋은 점이 있을 수도 있다는 작은 희망이 당사자들에게 음식을 넘기고 문 밖으로 나올 수 있는 힘이 되라는 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발끈 화를 내지 않으면 사람들은 네가 그들보다 더 강하다는 사실을 알게 돼. 넌 그들과 달리 분노를 조절할만큼 강하기 때문이야.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나중에 후회할 어리석은 말을 내뱉게 돼. 분노는 강하지만 그보다 더 강한 건 분노를 통제하는 힘이야. 적들에게 대답하지 않는 건 잘하는 일이야. 나도 거의 대답을 하지 않잖아. 어쩌면 에밀리는 나보다 나와 더 비슷할지 몰라. 그래서 친구에게조차 대답을 안 하는 건지도 몰라. 모든 걸 가슴에 담아두면서 말이야.” 174

 

발끈은 해가 갈수록 나의 가장 큰 고민거리이다. 갈수록 인내심의 길이가 짧아지고 깊이가 얕아지고 수치심이 적어지면서 그런 자신에 짜증이 난다. 세라의 말대로 그럴 때 한 말들은 모두다 나중에 후회하게 된다는 걸 알면서도 반복을 하는 나 자신에게 연민마저 느낀다.

 

듣지 못해도 느낄 수 있다는게 세라의 생각이었다. “창문과 문과 벽이 있어도 다정한 생각은 그 너머까지 전달돼. 이 추운 날 내가 여기에 서서 아저씨가 하루빨리 건강을 되찾고 다시 행복해지기를 빌면, 아저씨는 영문도 모른 채 마음이 푸근해지면서 위로를 받을 지도 몰라. 아저씨 때문에 마음이 아파.” 199

 

나도 실은 이렇게 아름다운 일들을 상상하고 믿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 어린 시절 아동문고로, TV 어린이명작동화 애니메이션으로 오래 전 만났지만, 다시 만난 지금 세라는 여전히 어리지만 대단한 주인공이자 친구로 살아 있고, 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어른이 되고 말았다는 열패감이 든다. 시련과 모험이 부족한 인생이라 그런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일단 마음속에서 두 가지는 버려야겠다. 안 한다고 하면서 은근 자신을 남과 자꾸 비교하는 헛된 버릇, 그리고 자신답게 살고 싶다면서 노력 없이 하던 대로만 하는 버릇.

 

어쩐지 다시 읽은 이 책은 더할 수 없이 교훈적인 내용이 되고 말았다.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에게는,

여자아이든 남자아이든 상관없이, 피부색이나 신체적 특징과 상관없이,

누구든 세상을 더 아름답게 바꿀 권리가 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자유로운 상상력의 시간, 놀이의 시간을 빼앗겨 가는 아이들에게,

이 책이 혼자 골똘히 생각에 빠져드는 소중한 성찰의 시간,

이야기의 매력에 푹 빠져 살아볼 시간을 선물해주었으면.

 

정여울 (문학평론가, 작가)

 

 

https://blog.naver.com/kiyukk/221631050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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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디 걸 클래식 컬렉션 1
요한나 슈피리 지음, 이경아 옮김 / 윌북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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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스위스의 알프스를 가보기도 전에 그토록 익숙해진 것은 '하이디' 덕분이었다. 다른 이들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어린 시절 빨간 치마를 입고 빨간 볼을 하고 구르듯이 뛰어 다니던 하이디가 그곳 어딘가 있을 것같은 생각에 영국 유학 중 기어이 스위스 마이엔펠트를 방문한 적이 있다. (Heididorf, 하이디 마을에 관한 훌륭한 최근 포스팅. https://blog.naver.com/kinami7/221614609693)

 

유럽의 피릇파릇 잔디 언덕에 이미 익숙해져서인지라 스위스의 초록초록이 눈에 들어 오기보단, 그야말로 파아아아란 하늘과 하아아아얀 양떼 구름들이 시선에 가득 찼다. 알프스에도 사계가 있지만, 어쩐지 내내 향긋한 건초와 들꽃 향이 풍기는 봄만 있을 것같은 그 장소에서 나는 하이디처럼 방방 뛰어 다니며 온갖 달콤한 것들을 맛보고 싶었다.

 

하이디 대신 작가 요한나 슈피리를 제대로 만나게 되었고, 들꽃 화관을 쓰고 평화 그 자체인 듯 풀을 우물거리는 소들과 인사 나누며 산책하고, 하얗지 않은 빵과 감탄이 절로 나오는 치즈와 염소젖(소젖 유제품 알러지가 있는 이들에게도 무해!)의 황홀한 맛에 삼시세끼 빠져, 흐리고 비오고 맛있는 거 별로 없는 영국으로 돌아오기 싫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할아버지. 오늘은 눈에 보이는 것마다 예쁘고 사랑스러워요, 그렇죠?” 235

 

 

“하이디. 이곳은 정말 아름답구나.” 그가 말했다. “혹시 이곳에서는 마음속 슬픔을 잊고 기쁨을 느낄 수 있을까?” “여기서는 아무도 슬프지 않아요.” 하이디가 대답했다. 249

 

어린 시절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법에 빠져들지 않을 재간이 있을리 만무했겠지만, 그래도 생각해보면 참 이상하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라던가, 평화롭고 즐거운 농촌의 풍경과 생활이라던가, 내가 그런 것에 노스탤지어를 느낄 근거가 어디에 있었을까. 그래도 하이디가 자연 속에서 여유롭고 즐겁게 살 때면 나도 마음이 덩달아 즐거웠고, 클라라네 이불 속에서 소리도 못 내고 울음을 쏟아낼 때면 나도 눈물이 차올랐다.

 

역시 고향이나 농촌이나 자연에 대한 풍성한 추억도 그리움도 부족한 우리집 9살 꼬맹이에게 [하이디]를 읽어 줬더니, 얼굴이 몹시 어두워지면서 눈물을 똑 하고 흘리며 절절한 감상평을 들려 주었다. "어린이가 병에 걸릴 때까지 집에 보내주지 않는 일은 용서가 안 돼!"

 

어린이들 입장에서 애착을 가지는 것은 대개가 부모 그리고 확장된 가족 구성원들일텐데, 어떻게 '집'이 그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집에서 멀어져서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공감할 수 있을까, 신비롭고 감동적이다. 아마 내가 평생 이해못할 명절의 민족대이동도 어쩌면, 돌아가고 싶은 곳,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는 행복한 이들의 축제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리움'이 부족한 내 삶은 어딘가 '사랑할 인생'이 부족한 기분도 든다.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사실에 먹먹한 감동을 느꼈다. 스위스가 유럽에서 가장 늦은 1971년에 여성 참정권을 인정한 나라라는 배경을 안다면, 성인 여성도 아니고 어린이의 경우 그 주체성과 독립된 자아를 인정받을 여지가 더 없었을 시기였을 텐데, 1880년 '대자연 속에서 거침없이 살아가는 내면이 건강하고 강한 여성 어린이' 캐릭터를 창조하여, 더 나아가 어린이를 자연을 힘으로 성장시키는 이야기는 그 당시에 혁명에 가깝도록 놀라운 교육관이었다고 한다.

 

어려서 몰랐던 저자 요한나 슈피리 (Johanna Spyri)정식으로 감사와 경애의 마음을 드린다. 덕분에 생각해 본다. 하이디처럼, 내일은 모르지만 오늘은 조금은 더 행복하게 만들 힘이 있지 않을까, 문득 그런 희망을 품고 싶다. 가능하면 그런 오늘을 이어가는 일상에서 누군가를 도울 수 있으면 더 좋겠다.

 

이 아름다운 번역서 말고도 [하이디]전 세계 50여개 국어로 번역되었다고 한다. 가능하면 여러 권을 갖고 싶다.

https://blog.naver.com/kiyukk/221628843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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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 머리 앤 걸 클래식 컬렉션 1
루시 모드 몽고메리 지음, 고정아 옮김 / 윌북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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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앤을 생각하면 그 독보적인 생명력으로 인해 언제나 꽃이 활짝 핀 햇살 좋은 봄날이 떠오르지만, 이토록 아름다운 표지 안에 다시 돌아온 [빨강 머리 앤]은 마치 가장 설레고 들떴던 크리스마스의 아침 같다. 발을 동동 구르며 온 집안을 한번은 달려 보고 싶었던, 어린 시절의 행복하고 따뜻했던 그 시기.

 

얼마나 내용이 정확히 기억날까 궁금하고 재밌는 기분으로 목차를 천천히 읽었다.

대실수, 상상력의 잘못된 사용, 허영심이 안겨준 절망. ''이다!

이런 주인공은 앤밖엔 없다!

 

그리고 앤만큼 그립고 반가운 레이첼 린드 부인, 매슈 커스버트, 마릴라 커스버트, 그린게이블스, 다이애나, 스테이시 선생님.

 

사실 어릴 땐 앤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다.

 

하루에 딱 한 시간만 볼 수 있는 텔레비전 앞에서 화려한 색감의 장면들이 펼쳐지고 "주근깨 빼빼마른 빨강 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라는 주제가를 따라 부르는게 신났다. 너무너무 수다쟁이라 친구라면 싫을 것도 같았고 워낙 사고를 많이 쳐서 같이 혼날 것 같아 친해지기 싫은 친구처럼 느꼈다. 그래도 재미가 없는 건 아니라서 가끔은 아주 크게 웃기도 했고 앤이 행복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그래서 이다해 작가, 기자의 추천의 글 읽는 것이 무척 흥미로웠고, 그때는 어려서 몰라서 몰랐던 것들이 이해되면서 비로소 앤의 처지가 슬프고 안타까웠다.

 

매슈를 처음 만난 앤이 "만나서 정말 기뻐요. 혹시 저를 데리러 오시지 않는 건가 겁이 나서 어떻게 된 일인지 온갖 상상을 다하고 있었거든요"라고 말을 늘어놓는, 꽃이 하얗게 핀 벚나무에서 달빛을 받으며 잘 생각이었다고 쉬지 않고 말하는 '첫 만남'을 다시 읽는 지금은 울컥하는 마음에 잠깐 읽기를 멈추고 책장을 손으로 쓸어본다.

기다리고 거절당하는 일이 익숙한 앤은 환대가 아닌 거부를 근심한다. 상대방이 앤의 말을 기다리고 경청하지 않기 때문에 앤은 언제나 빨리 말하려고 한다. 하고 싶은 말을 늘 마음속에 가득 쌓아두고 있다.

존재 자체로 사랑받을 만하다고 확신하지 못하는 앤은 그 이유를 빨강 머리에서 찾는다. 하지만 빨강 머리와 마찬가지로, 앤이 겪는 어려움은 앤의 잘못이 아니다. 앤이 고아원에서 성장해야 했던 사실부터 시작해서. 8

 

극대화된 호감형으로 이미지화된 아역들이 계속해서 잡지와 텔레비전에 등장해서 매일 자신의 부족한 점, 못난 점을 상기시켜 주는 환경에서 자란 한국 사회의 여자아이들은 아마도 앤처럼 내면화된 깊은 상처가 다 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무도 앤처럼 꽉 차게 유년시절을 산 이도 없을지 모른다. 운이 좋으면 사랑은 받았을지언정, 응원과 격려는 충분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또한 이 이야기는 머물 수 없는, 집이 될 수 없는 고아원에서 나온 앤이 떠나지 않아도 되는 곳, 집을 찾는 이야기라서, 원제는 <빨강 머리 앤>이 아니라 <그린게이블스의 앤 Anne of Green Gables>이 되어야 했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마찬가지겠지만, 나는 지치도록 오랜 시간을 어디서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는가란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로 무려 지구 반 바퀴를 떠돌았고, 대게 그 두 질문은 한데 엮어지기 마련이라 결국은 이도저도 결정하지 못하고 도망 다닌 세월이 너무 길었다. 그래서 앤의 그 길고도 고달픈 여정이 이제는 가슴 저리게 느껴진다.

 

30여 년만에 다시 읽어 보는 앤에게서 나는 어린 내가 앤을 그다지 좋아할 수 없었던 나의 사회적 조건화를 반성한다. 앤은 그 어린 시절부터 살아서 좋은점들을 끝없이 발견해내는 능력을 갖추었지만, 나는 이제야 저체중을 유지해서 예뻐 보이고 싶다는 욕망보다는 생존을 위한 운동이 더 시급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청순가련 따위 일고의 가치가 없고 그저 가까운 이들 모두가 건강하게 평안하게 일상을 꾸리는 일이 제일 중요해 보인다. 그래서 가까운 이들이 걱정하고 않고 슬퍼하지 않고 가능한 자주 서로 즐겁게 함께 할 시간이 많기를 바란다.

 

나도 그 시절의 앤처럼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정말 행복해요. 지금 기도를 하라면 전혀 힘들지 않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동화책으로, 애니메이션으로, 가장 최근까지 영화로 나를 즐겁게 웃게 해 줬던 ''을 이제는 우리 집 꼬맹이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꽃만큼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꽃보다 더 아름다운 표지디자인이 정말 감사하고 귀중한 마음이 들었지만, 역시 아직 이 책은 꼬맹이들보다는 한 번 더 ''를 위한 것이다. 꼬맹이들은 추억이 없으니 원하는 마음도 없을 것이지만, 나는 아직 ''과 더불어 살고 싶다.

 

476쪽이라는 분량이 한밤중까지 이어지는 크리스마스 파티처럼 신나고 흥분되는 선물이다.

 

 

https://blog.naver.com/kiyukk/221627753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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