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트 러브 소설Q
조우리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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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편 소설과 번갈아 가며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가지 색을 바탕으로 한 팬픽 이야기가 교차 구성되어 있고, 매 시작에는 여성 아이돌이 부른 노래 제목들이 글의 제목처럼 달려 있다. 우리 집 꼬맹이 덕분에 들어본 아이유의 팔레트 말고는 처음 듣는 곡들이었다. 덕분에 글을 읽으며 음악을 함께 듣는 호사를 누렸다.

https://youtu.be/d9IxdwEFk1c

 

학창시절과 성장기 내내 담임교사나 아이돌 중 누구도 열렬히 좋아해본 적이 없고 팬픽(fanfic: 스타나 TV 프로그램, 영화, 소설, 만화, 음악 등 대중문화 작품들의 특정 팬들이 창작한 픽션 소설)이란 장르를 접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도 기분 좋은 조합인데, 팬픽에 익숙하고 아이돌들과 그들의 노래들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정말 기분 좋은 독서 경험일 듯하다.

 

한참 듣다보니 나에게도 신선하고 기분 좋게 다가오는 가사가 늘어난다.

 

갈 데 없는 기성세대 연령의 독자로서 더구나 텔레비전을 사본 적이 없어서 시청 기회가 아주 드물지만, 10대 초반부터 시작되는 다년간의 ‘연습생’ 시절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아동/미성년 불법노동착취 르포 취재인줄 알았을 만큼 치열하고 고된 시간을 보낸다는 점을 알고 있다. 데뷔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연예계 특성 상 어쩌면 데뷔 전보다 더 치열한 경쟁에 휘둘리다 잊혀져가는 수순도 허다할 것으로 짐작된다.

 

준은 열심히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열심히 하는 건 노력이고, 잘 하는 건 재능이니까. 노력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재능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것이니까. 그렇다고 배웠다. 131

 

잘하지 못하는 건 열심히 하지 않아서인가. 얼마나 열심히 하는 게 정말 열심히 한 걸까. 최선의 노력은 재능에 도달할 수 있을까. 재능에 도달하지 못하는 노력은 어떻게 되는 걸까. 준은 그 답을 알지 못해서 노력하는 것이 두려워졌다. 134

 

다인의 동그렇게 커지던 눈을 기억한다. 그건 준이 처음으로 느낀, 무언가를 잘하고 있다는 감각이었다. 또한 잘하고 싶다는 욕구였다. 찬란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아득한 나락이었다. 준은 자신의 노래가 다인의 귀에 가닿지 못하고 흩어지는 순간을 상상했다. 준은 깨달았다. 초라해지는 거였다. 재능에 도달하지 못하는 노력은, 초라해지는 거구나. 135-136

 

물론 다른 직장인들은 결코 기대할 수 없는 경제적 보상이 따르는 경우들도 있지만, 사생활도 자기 생각도 자유로운 발언도 모두 그 대가로 치른 것이라면, 그에 더해 갖가지 악플과 오명에도 제대로 된 분노와 저항이 조심스러운 삶을 하루 이틀도 아니고 오랜 세월 견뎌야한다면 과연 그 단기적인 경제적 보상을 무엇과 바꾸었는지 불현 듯 생각이 들 것이고 그야말로 숨 막히는 삶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끊이지 않는 연예인들의 자살 소식이 들리는 나날들엔 이런 우려 섞인 생각이 더 진해진다.

 

루비나는 무관심보다는 미움을 받는 게 낫다고 했다. 미움도 관심이 있어야 생기는 감정이라며 자신의 기사에 달린 모든 댓글을 읽었다. 나쁘다는 말로는 부족한 악한 댓글들을 소리 내어 읽기도 했다. 마린은 동의할 수 없었다. 아이돌도 직업인데 왜 고행을 하듯이 살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106

 

그저 웃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대답이 없는 질문들이었다. 질문이긴 한가. 요구에 가까운 말들이었다. 계속 웃다보니 웃는 게 편해져서 이런저런 손짓이나 눈짓 같은 걸 더했더니 그 모습이 또 귀엽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걸 질문이라고 하시는 건지”라고 할 수는 없었을 뿐인데. 107

 

몰론 팬 층도 당연히 다양하기 마련이고 이 책의 저자처럼 반짝이는 재능이 눈부셔서 사랑과 찬사를 보내는, 급기야 첫 소설을 팬픽으로 ‘우리가 사랑했던 그 시절’ 그 마음에 헌사하는 서로가 행복한 팬들과의 관계도 분명히 있다. 새삼스럽지만 뒤늦게 조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좋아하는 대상이 있다는 것, 뜨겁게 열렬히 몰두할 수 있는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언제나 좋아하는 아이돌이 있었다. 텔레비전이라는 걸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 63

 

그렇게 외쳐야만 한다고 믿었던 사랑. 그런 사랑들. 167

 

<라스트 러브>의 본편은 무대 뒤와 화면 속 얼굴들 뒤에 숨겨진 엔터테인먼트 시장의 냉정함과 시장에서 팔리지 않고 탈락 또는 소외되는 이들의 고민과 갈등을 상당히 생생하게 들려주지만 본격 고발 형식을 취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유행 아이템처럼 필요와 호감에 따라 쓰이고 버려지는 상품들이 개별 인간이라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소비자이자 판관인 대중의 사랑을 받고 유지하기 위해 어떻게 각종 위협에 무자비하게 노출되는지, 인간으로서 그들이 느낄 수밖에 없는 불안과 강박과 패배감을 아주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함께 불러요.” 다인은 그렇게 말하는 자신을 상상해보았다. 하지만 그런 말은 없을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끝은 올 것이다. “이제 기다리지 말아요.” 다인은 그 말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은 그것뿐이라고. 17

 

특별히 스타가 되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런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싶었다. 아주 많은 사람들. 보이지 않을 때도 있고, 다 헤아릴 수도 없고, 그래서 결국은 잘 모르는,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서 관심을 받고 싶었다. 열아홉 살의 루비나는 관심이라는 단어가 호의와 같은 뜻이라고 생각했다. 33

 

이런 이해가 더 널리 깊이 공유되는 분위기였다면, 적어도 “괜찮아요!”라고 웃으며 괜찮은 척 하다 끝내 자신을 놓아버린 어리거나 젊은 이들의 이면과 내면과 심정을 조금은 더 이해하고 헤아려줄 수 있지 않았을까 안타까운 마음이 가득해진다. 모든 것이 쇼쇼쇼로 환원되고 거래되는 쇼 비즈니스라는 냉혹한 현실 사이사이에서 어떤 상상의 캐릭터이든 팬픽이라는 헌사에 담긴 다양한 사랑의 모양은 더욱더 눈부시고 애틋하다.

 

보고 있으면 괜히 웃음이 나고 그 순간엔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얼굴들. 이제는 볼 수 없는 얼굴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얼굴들.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얼굴들. 그 짧은 순간, 그래서 너무나 생생한 순간, 그때의 마음. 63

 

중략. 친구나 애인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나에게 주는 건 좋은 음악과 볼거리가 전부인데, 어째서 부족한 것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 돈과 시간을 바치는 게 아깝지 않았던 걸까. 저마다의 사정은 있을 테니 단정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내게 그 사람들은 불행한 십대를 버틸 수 있게 한 존재였다. 중략. 현실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랑을 거부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내 사랑을 거부한 적은 없었다. 거부당하지 않는 사랑, 그 사랑이 부족하거나 과하다 말하지 않고 언제나 고맙다고 답해 주는 사람. 그런 사랑이, 그런 사람이, 내 삶에 들어와 있는 게 좋았다. 그런 사랑과 사람이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도록, 저버리지 않도록, 그렇게 팬질이라는 걸 했다. 183-184

 

내가 쓴 최초의 소설이 팬픽이었던 것은 내가 사랑을 쓰고 싶은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의 첫 책이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어서 기쁘다. 193

 

내 재능과 노력을 내가 자유계약을 통해 팔아먹고 살 수도 없는 시대, 고스란히 거대산업시스템에 팔아넘기거나 흡수되는, 단순하고 거칠게 표현할수록 더 잔혹하게 들리는 시간이 흐르고 있다. 노동력만 파는 것이지 노동을 파는 것이 아니라는 사회경제학 토론을 벌이던 오랜 세월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이들의 계약서에 ‘시술과 수술을 동원해서라도 주기적으로 관리하야 하는 외모, 상황에 따라 연기 가능한 감정 노동, 유일한 사적공간과 거의 대부분의 사적관계에 대한 공개나 포기’ 항목이 사라지고, ‘오직 재능만’을 거래하는 공정거래가 이루어지고 미디어를 통한 소비형태도 그 재능에만 집중하는 시간이 어서 빨리 오기를 고대한다.

 

어느 매듭을 풀고 잘라야할지 숙고를 거치지 않은 나의 생각과 얕은 고민은 떠돌기만 하나, 적어도 무소불위의 소비자가 되어 관심과 돈을 내어줄테니 대신 네 인생 전체를 세세히 엿보고 일일이 판단내리겠다는 태도는 무의식이라도 갖지 않도록 거듭 성찰해야겠다.

 

작가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하고 사랑받는 이야기를 해주어 여러모로 바닥까지 우울해지지 않았다.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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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공화국 리포트 - 미중 경쟁시대에서의 생존전략
김경종 지음 / 밥북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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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제목으로 이끄는 내용이 끝날 때마다 <생각해야할 과제>가 3문항씩 나온다. 일반적인 물음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기 때문에 평소 자주 들었던 의문들을 상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도움이 된다. 한편으로는 읽은 책의 쪽수가 늘어날수록 의문들도 답을 찾지 못한 채 쌓여만 가는 답답한 심정이 없지 않아 있다. 누군가 귀에 쏙쏙 들어오고 거부감 없이 납득되는 정답을 알려줬으면 하는 마음은 늘 있지만 당분간 그건 일단 내 과제로 남겨둘 일이다.

 

제목 그대로 충실한 ‘리포트’ 형식과 내용의 책이다. 한반도 공화국의 현실이 더욱 무게감과 현실감을 가지고 다가온다. 언론사의 심층취재글보다 더 긴 글이니 호흡도 길고 느리게 한반도 정세에 대해 곱씹으며 천천히 생각해보게 한다. 거의 매일 뉴스를 접하며 대한민국의 외교 노력과 당장 바로 앞의 미래가 어찌되는 건지 마음을 졸인 시간이 꽤 오래된 듯하다. 미국은 동맹이라기보다는 수금에 관심을 올인한 듯 보이고, 일본의 경제보복은 진행 중이고, 중국과는 틀어진 외교가 정상화 단계에 이르렀는지 확실하지 않다. 다행히 그 와중에 가시적인 피해가 눈에 띄지 않아 당분간은 안심이지만, 앞으로의 변동 상황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을 듯하다.

 

저자 역시 한반도의 ‘생존전략’에 대한 물음을 진지하게 전개해나가며 한반도의 미래를 위한 수많은 과제들을 짚어간다. 저자의 목표는 한반도의 평화통일에 이르는 것인데, 이를 위해 제안하는 방법은 활발한 토론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크게 5가지 방향을 제시하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1) 남북대화와 북·미대화가 유지되는 지금이 새 길을 찾는 최적의 시기,

2) 우리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는 ‘자주독립국가’,

3) 한반도에서의 전쟁방지와 평화유지,

4) 남과 북이 합의한 평화통일,

5)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주변 강대국과 긴밀한 관계 유지이다.

 

이 과정에서 중국 전문가이자 산업정책을 다룬 관료로서 자신의 경험과 지식, 정보를 아낌없이 제공하고 있으며, 독자이자 시민들이 우리들이 스스로의 사고를 통하여 우리나라가 나아갈 최선의 길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찾고, 그럴 때 한반도 공화국이라는 소망이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다. 이 때 저자가 특히 기대하는 주역들은 “머지않아 이 나라의 주역이 될 현재의 20대, 30대, 40대”이며, 이들이 이 책을 읽고, 사색하고, 행동하기를 바란다. 연습과 리허설이 없는 인생을 살아가야하는 우리들이, 자신의 미래만이 아니라 긴밀하게 연동된 한반도의 미래를 함께 고민하녀 ‘한 번도 가지 않은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주인이자 주역으로서 당당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본문 이외에도 스토리텔링과 언제 읽어도 깊은 감동과 여전히 유효한 가르침을 주는 백범 김구 선생의 <나의 소원>이 별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도 오랜만에 다시 그 문장들을 필사하듯 천천히 읽으며 당시의 시대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먼 미래를 정확히 상상하며 전하는 김구 선생의 말씀에 다시 한 번 감탄하고 더 깊이 배울 수 있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히 아니한다. 중략.

​오직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중략.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중략.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다.

​나는 우리나아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중략.

​우리의 적이 우리를 누르고 있을 때는 미워하고 분해하는 살별, 투쟁의 정진을 길렀었거니와 적은 이미 물러갔으니 우리는 증오의 투쟁을 버리고 화합의 건설을 일삼을 때다. 집안이 불화하면 망하고 나라 안이 갈려서 싸우면 망한다. 동포 간의 증오와 투쟁은 망조다. 중략.

​최고 문화로 인류의 모범이 되기를 사명으로 삼는 우리 민족의 각 원은 이기적 개인주의자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극도록 주장하되 그것은 저 짐승들과 같이 저마다 제 배를 채우기에 쓰는 자유가 아니오 제 가족을 제 이웃을 제 국민을 잘살게 하기에 쓰이는 자유다.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의 꽃을 심는 자유다. 우리는 남의 것을 빼앗거나 남의 덕을 입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가족에게 이웃에게 동포에게 주는 것으로 낙을 삼는 사람이다. 중략.

​나는 우리의 힘으로, 특히 교육의 힘으로 반드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우리나라의 젊은 남녀가 다 이 마음을 가진다면 아니 이루어지고 어찌하랴. 314-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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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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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서양인들의 관점에서 원주민들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그들의 식인 행위를 비난하는 일이 있지만 실상 연구 자료를 보면, 그들의 식인은 세상을 떠난 이들을 간직하고 기억하려는 동기로 행해진 것이지 단순히 약자나 적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더 잔인한 보복의 일환으로 신체를 훼손하려는 동기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 반면 근대 이후 본격적으로 타민족과 타국인들에 대한 극렬한 공격을 자행한 서양인들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카니발리즘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 역사 속의 일만이 아니라 현대에 와서도 그러한 대형 학살은 그 규모를 점점 더 키워나가고 있으며 비열하게도 대항할 힘이 없는 여성과 노약자 어린 아이들에게 집중되고 있다.

 

더 나아가 실제 사람의 몸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점을 빼면 더할 수 없이 고통스럽게 타인을 공격하고 사망에 이르게 하고 있으며, 특히 한국 사회에서도 낯설지 않게 된 온라인 공격의 양상은 잔혹하고 교묘하고 끝이 없다는 점에서 규모면에서 비교 불가의 폭력적인 형태를 띤다. 가짜뉴스와 댓글, 힘이 있는 자들은 제도와 경제력으로 타인을 죽음으로 몰아가거나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을 주는 일이 만연하다. 역사 속 원주민들의 식인을 속편하게 비난하기 전에 서로의 마음을 난도질하는 행위와 현상을 더욱 심각하게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통해 처음 접해 본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의 작품 [태고의 시간들]을 읽으며 이런 역사 속에서 고통 받고 죽임당하고 그 억울함조차 기록되지 않은 이들, 특히 조직적이고 제도적인 대규모 폭력인 전쟁의 참화 속에서 살아가야 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만났고 다시 겹쳐서 생각해보는 계기를 가졌다.

 

남자보다 여자가,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남편보다 아내가 더 빨리 죽는 시절이었다. 여자는 인류가 은밀히 고여 있는 그릇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어린 새가 알을 깨고 나오듯 아이들은 여자들에게서 새 생명을 얻었다. 그런 다음 깨진 알은 스스로 붙어 다시 고유의 형태를 회복해야만 했다. 여자가 강할수록 더 많은 아이를 낳았고, 그로 인해 여자는 조금씩 약해졌다. 65-66

 

땅바닥에 누워 있던 사람 하나가 벌떡 일어나더니 강 쪽으로 달려가려 했다. 게노베파는 그녀가 미시아와 동갑내기 친구이자 셴베르트네 식구인 라헬라임을 알아챘다. 품에는 갓난아기가 안겨 있었다. 군인 한 명이 무릎을 꿇더니 침착하게 그녀를 조준했다. 라헬라는 한동안 비틀거리다가 쓰러졌다. 군인이 달려가 그녀를 발로 밀어서 돌아 눕히는 것을 게노베파는 보았다. 군인은 아기를 싼 새하얀 포대기를 향해 총을 한 방 더 쏘고는 트럭으로 돌아갔다. 167

 

무지하여 알지 못했던 20세기 폴란드의 역사를 배웠고, 개개인의 조그마한 목소리들을 들었다. 84편의 조각난 글들이 역사의 연대기 속에서 어떻게 비극적으로 잊혔는지, 그들의 삶은 왜 복원되고 의미를 찾아야 하는지도 무겁게 느꼈다.

 

크워스카는 무덤을 덮은 흙을 오랫동안 쓰다듬었다. 마침내 고개를 들자 주위의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이제 세상은 서로 나란히 존재하는 물체와 사물, 현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크워스카의 눈에 비친 세상은 하나의 덩어리였다. 25

 

세상이 앞으로 나아갈수록, 생을 찬미할수록, 생과 더욱 강렬하게 연결될수록 죽은 자들의 시간은 더욱 혼잡해졌고, 공동묘지는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죽은 자들은 이곳에 와서야 ‘삶이 끝난 후’에 대해 인식하게 되고, 자신들이 지금까지 주어진 시간을 허비했음을 깨닫게 된다. 죽고 난 뒤에 비로소 생의 비밀을 발견하게 되지만, 그 발견은 헛된 것이었다. 264

 

익숙하지 않은 구성의 조각들을 상상력만으로 구체적이고 섬세하게 표현한 작가의 문학적 여량이 비현실적일 만큼 대단하다. 다큐와 같은 역사적 시간과 인간의 일들을 신화와 신의 시간으로 이끌어가는 전개가 경이와 감탄을 그치지 못하게 한다. 시간을 의미한다고 짐작했던 ‘태고’는 공간적 배경이고 개인과 마을공동체에서 흐르기 시작한 시간은 인류 전반으로 영원으로 이른다.

 

태고(太古)는 우주의 중심에 놓인 작은 마을이다. 1

 

“여기가 태고의 경계야. 여기에서 태고가 끝나. 더 가봐도 아무것도 없어.” 중략. 그는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서더니 루타가 경계라고 말한 그곳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멈춰 섰다. 왜 그런지 자신도 알지 못했다. 뭔가 이상했다. 두 손을 앞으로 내밀자 손가락 끝이 사라졌다. 중략. “걱정 마, 이지도르. 우리에게 다른 세상은 필요 없잖아.” 147-149

 

허구와 현실의 구분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더 이상 구분할 필요도 의미도 없어지는 심정에 이르러서야 84편의 이야기들이 다시 순환하며 들리는 깨달음이 왔다. 바로 이래서 역사란 그리고 이야기란 끝없이 반복되고 회자되어 고전이 되고 보고가 된다는 것이라는 생각이 더 선명해졌다.

 

인간이 처음 나타나자 신은 계시를 경험한다. 그리고 처음으로 밤과 낮을 가르는 가녀린 선을, 밝음이 어둠이 되고 어둠이 밝음이 되는 그 미세한 경계를 명명하게 된다. 그때부터 신은 인간의 눈으로 밝음이 어둠이 되고 어둠이 밝음이 되는 그 미세한 경계를 명명하게 된다. 서로 다른 수천 개의 얼굴을 보게 되고, 가면과 다름없는 그 얼굴을 마치 배우처럼 썼다 벗었다 하면서 그는 자기 안에서 모순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거울 속에 비친 상은 현실이 되었고, 현실이 상 속에 투영되었다. 113

 

이토록 짤막한 이야기들 속에 인류의 공통경험의 서사가 촘촘하게 엮여서 공존한다. 이야기가 멈추지 않고 지속되고 되풀이되는 것은 독자로서는 반가운 일이나, 한편 소멸되지 않고 변형되어 반복되는 전쟁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인간은 도대체 왜 전쟁을 멈추지 못하는가, 하는 오래 묵은 답답하기 그지없는 질문이 마음속에 다시 떠오른다. ‘진화’의 정의도 여전히 분분하지만 도대체 언제쯤이면 이런 저급한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는 것에 인류 전체의 공감대가 이루어질까 여전히 희망보다 절망이 더 가깝다.

 

누군가를 죽인다는 건 움직일 수 있는 권리를 빼앗는다는 뜻이다. 삶이란 결국 움직임이니까. 죽임을 당한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인간은 몸이다. 그리고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것들의 시작과 끝은 몸 안에 있다. 212

 

“다 잘될 거예요. 세상이 전과 많이 달라졌잖아요. 더 커지고, 더 나아지고, 더 밝아졌으니까요. 예방주사도 생겼고, 전쟁도 끝났고, 사람들의 수명도 늘어났고……. 안 그래요?” 미시아는 유리잔에 가라앉은 찌꺼기를 들여다보면서 천천히 옆으로 고개를 저었다. 321

 

다른 이들이 저마다 살아오는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그 시간들을 읽을 때마다 지금 나의 시간은 어디인가, 나는 언제쯤 경계를 넘었고 절정에 도달한 적은 있었으며 지금은 아래로 아래로 걸음을 내딛고 있는 중인가, 그래서 결국 모든 인간은 죽는다거나 우리는 모두 필멸의 존재란 것을 죽음에 이르러 확신하는 것이 종착지인가, 그렇다면 왜, 이토록, 노력을 거듭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것인가, 이런 기운 빠지고 허무한 생각들이 차오른다.

 

시간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98

 

그의 인생에서 정오의 시각은 이미 지났음을, 그리하여 이제부터는 은밀하게, 서서히, 자신도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땅거미가 내려앉으리라는 것을. 249

 

그럼에도 내가 그리고 인간이 오늘을 있는 힘을 대해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그래도 미래에 대한 일말의 여지를 놓아버리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악으로 악행으로 넘쳐나는 듯해 보이는 세상이지만, 실제로 괄목할만한 개선이 이루어질지 그 실현 여부도 결국 알지 못하고 소멸될지도 모르지만, 분명 굳건히 버티고 한 걸음씩 힘겹게 내딛으며 이런 세상에서 견디며 살아내고자 하는 이들이 더 많다. 그래서 나는 종종 아이들에게도 괜찮아질 거다, 잘 될 거다라고 진심을 다해 위로와 격려의 말을 전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모든 노력들이 아무리 미약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그녀의 인생처럼 평범하지만, 그 속에는 어둠과 슬픔이 깃들어 있다고 가족들은 생각했다. 세상은 인간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이 함께 숨을 수 있는 껍데기를 찾아내서, 그 안에서 자유로워질 때까지 버텨내는 것이다. 345-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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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1페이지, 세상에서 가장 짧은 교양 수업 365 1일 1페이지 시리즈
데이비드 키더.노아 D. 오펜하임 지음, 허성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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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과 철학과 환경학을 전공했고 문학이라면 아동문고부터 꾸준한 팬이고 아마추어 취미 수준의 피아노 첼로 연주를 좋아라하며 살고 있다. 전공과목들을 공부하는 학생일 때는 물론 남들처럼 소위 1차 서적들을 공들여 힘들여 읽었지만, 자연과학과 인문학과 구체적인 정책으로 제공되지 않는 환경학을 직접 활용하지 않는 사회생활과 직장 생활을 하며 그런 방식의 독서들을 할 수 있는 사치스러운 기회는 점점 사라졌다. 어느 해 대학원 방학 시절 지도교수님이 <칸트의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를 함께 읽어 보자 추천하셨는데, 그 이유가 학교를 벗어나서 이 책을 읽고 토론하는 기회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고, 그 점이 안타까워 꼭 추천하고 싶은 도서이니 이 참에 방학이지만 시간을 마련하자 하신 제안이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칸트를 읽는 독서모임>을 새롭게 만들지 않는다면 과연 찾을 수 있을까 싶다. 일단 간단한 인터넷 검색으로는 발견할 수 없었다.

 

이제는 매일 더욱 수동적인 방식으로 일상이 바뀌고 있어서,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일상의 평온함이 제발 부디 깨지지 않는 것이 되었고, 서글프게도 그런 일상에 체력의 대부분이 투입된다. 다시 본격적이고 집중적인 공부나 독서가 가능한 날이 다시 올까, 이미 노안으로 눈도 건조하고 침침하다. 이러다 내 노후는 오디오북에 의지하는 모습이 될 거란 생각도 가끔 한다. 게다가 예전에 몸과 마음을 바쳐 공부했던 내용들도 점점 흐려진다. 복기를 하지 않으니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아쉽고 허전한 기분은 어쩔 수 없다.

 

인문학이든 다른 분야든 ‘다이제스트’ 판으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고 여전히 생각하지만, 구성에서 분야까지 최대한 꾸준히 독서하고 관심의 폭을 넓힐 수 있게 고심한 이 책의 목록을 보며 반가운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미 읽은 내용들이라면 상기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고, 몰랐던 내용이라면 마침내 알게 되는 것이고, 흥미로운 내용이라면 아마 언젠가 해당도서를 찾아 읽게 될 수도 있는 일이다.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쉬지 말고 읽어야 하는 상당히 엄격한 구성이다. 공부란 매일 빠지지 말고 하란 뜻인가 보다.^^ 한편 구성 상 순서에 전혀 상관없이 읽을 수 있는 내용이다. 조그맣고 귀여운 체크박스도 있다.

 

첫 번째 시도에서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내용은 <인지부조화>였다. 1957년 스탠포드대학교의 사회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의 [인지 부조화 이론]이란 저서의 소개글이다.

 

우리는 과학자들이 인지라고 부르는 다양한 믿음과 개념과 생각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인지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지 않다. 중략. 그러나 생각이나 행동들이 서로 관련되어 있을 때 우리는 그것들이 일관되어야 한다고 절실히 느낀다. 만일 일관되지 않고 모순이 생긴다면 정신이 견딜 수 없는 부조화 상태에 이른다. 정신이 다시 평형상태를 회복하도록 하기 위해 상충되는 생각이나 행동은 바뀌어야 한다. 대개 행동보다 생각을 바꾸는 것이 쉽기 때문에 우리는 아마 마음가짐을 바꿀 것이다. 중략.

 

담배 피우는 사람은 담배가 건강에 해롭다는 말을 들을 때 인지 부조화를 겪는다. 한 가지 해결책은 담배를 끊는 것이다. 그러나 행동을 바꾸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그 흡연자는 인지 부조화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담배에 대한 생각을 바꿀 공산이 크다. 예를 들어 긴장 완화나 체중 감소 같은 담배의 긍정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기로 마음먹을 것이다.

 

신입생 신고식은 인지 부조화 원리에서 작용한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첫 신고식이 가혹할수록 그 집단의 일원이 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는 신입생이 더 많았다. 사회심리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노력 정당화 패러다임’이라 부른다.

 

페스팅거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돈을 받고 거짓말을 할 경우 자신이 한 거짓말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돈을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거짓말을 할 경우 종종 스스로 그 말을 믿는다. 돈을 받는다는 정당화 없이 거짓말을 하면 인지적 부조화를 겪기 때문에 자신이 한 거짓말을 믿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175

 

‘교양’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는 다양하겠지만, 나는 정보나 지식의 양이 아니라 ‘생각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생각하는 방식이 그 틀을 채우는 지식이라는 내용 없이 자극을 받아 상정하고 폭넓어질 리는 만무하다. 그러니 가능하다면 짧은 시간을 마련하는 수고를 들여 가능하다면 다양한 분아의 지식을 읽고 익히는 일을 꾸준히 하는 일은 종합적 판단능력을 키우는 목표에 필수적인 과정일 것이다.

​적어도 이 책에는 365가지 분야의 지식 내용들이 소개되어 있다. 선별을 하는 수고에서 한 단계 나아갈 수 있으니 한편 안심이 되는 일이다. 많은 독자들이 재미와 결실을 모두 맛보고 즐기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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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 알고 싶다 : 낭만살롱 편 - 고독하지만 자유롭게 클래식이 알고 싶다
안인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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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와 함께 보낸 올 가을 주말은 올해 최고의 휴식 시간이었다. 음악은 삶과 함께 태어나고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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