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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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묘사된 세계는 아마 몇 해 전이었다면 확실히 SF의 배경으로나 가능할 듯 하다고 생각했겠지만, 놀랍게도 더 이상 아주 먼 미래의 일들처럼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우주탐사, 유전자조작태아, 행성 간 이동, 외계 생명체, 빅데이터와 유사한 망자들의 생애정보 데이터 수집. 이런 기술적용 사회의 모습에 익숙해진 한편 동시에 등골이 서늘하고 섬뜩한 기분이 드는 것은 기술만 진보하고 인간사회의 규범과 규칙들은 근대적이지도 현대적이기도 못한 경우들이 많다는 점이다. 이런 비동시성의 최악의 결합 상태에서 가능한 온갖 비극들이 무척이나 파괴적일 것 같다는 생각이 나 혼자만의 비극적, 부정적 망상으로 그치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글 속에서도 마치 현실의 분단과 이산처럼 어처구니없는 순간의 계획차질이나 책임부재로 인한 생이별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런 이들이 얼마나 많은 지와는 무관하게 우주연방은 경제성이 떨어지는 일로 분류된 후속대책을 외면한다. 그러한 정책의 후진성과 천박한 결론은 행성 간 이동이 가능한 기술현실의 영광을 급격하게 쇠락시킨다. 공간을 확장해서 인류가 가 볼 수 있는 우주의 외연을 아무리 확장하더라도 그것이 경쟁을 줄이고 우주적 인지를 계발하는 것이 아니라, 몇 백 년 동안 사이비 교주처럼 받들어진 ‘경제성’을 이유로 다시 괄호 밖의 인간들을 남겨두고 내다버리고 격리하는 행위로 이어진다면 그때의 우주 시대는 어떤 가치와 의미를 가지는지.

 

경력단절과 독박육아로 인해 우울하고 냉정하고 자식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하는 여성들의 모습, 백인이 아니고 남성이 아니고 기혼자가 아닌 인간이 우주비행사로 선발되어 겪는 최악의 마녀사냥과 같은 상황. 이쯤 되면 우주공간의 확장과 인간의 지성이나 의식은 전혀 무관한 일이 되고 만다. 아마 그런 비극적 모습이 실제 미래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작가는 그렇게 되지 말자고 자신의 책에서 한편으로는 경고를 한편으로는 독려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설을 읽으며 드는 현실감에 우울하다.

 

그렇다면 인류는 가능한 최선의 유토피아를 구현하는 일에 목적성을 두고 진화해야만 하는 것인가. 물리학을 전공하거나 관심이 있는 분들은 이미 다 아실 것이지만 우주는 ‘무의미한 공간이다.’ 별이 되지 못하고 행성인 지구는 우주 어느 곳에서 눈에 띌 가능성이 전혀 없으며(암흑 공간 속에 위치해서 그냥 간단히 안 보인다.), 태양계는 현재 망원경 기술로 알아낸 것만 수천억 개가 더 있고 우리 은하계 이외의 은하계도 현재까지 1조개가 넘는다. 매일 태양과 같은 별들이 생성 소멸을 거듭하고 있고, 우주 시간에서 지구 따위, 인간 따위 아무 의미도 없다. 미안하지만 이건 사실이고 그러니 가능한 겸손하게 사는 것이 제일 좋은 윤리적 판단이라 생각한다.

 

그래도 저자는 지구를 그리워하고 대안이 있어도 지구에 남기로 선택하고 부정적인 감정들을 돈을 지불하고 구매하는 이들을 등장시킨다. 어쨌든 현재, 여기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최대라고 매일 조금씩 더 흉한 곳을 고치고 망가진 곳을 다듬고 그런 매일의 현실이 바로 그 순간을 살아가는 미약한 인간의 유토피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비춰지는 것들이 부정적이고 흉한 것들만이 아니라 다정하고 따뜻하고 긍정적이고 아름답고 다채로운 것들도 있다는 것을, 언어적 소통으로는 실패한 역사가 더 긴 인류가 비언어적 방식으로는 어쩌면 다양성을 존중하는 방법을 배울지도 모른다는, 그래서 어쩌면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이 늘어나지 않는 세상이 될 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한다. 열역할 제2법칙을 진리로 따르는 나로서는 언제나 모든 방식의 무질서도가 증가하는 한 방향으로만 모든 존재들과 사건들이 일어날 것이고, 우주 규모의 기적적인 에너지 수축과정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주의 모든 존재들은, 우리 모두는 점점 더 멀어지며 차가워질 것이다. 마지막 체온이 사라지고 빛이 사라지는 그 순간이 존재의 소멸이다. 우리는 36.5도로 천천히 타들어가는 연료를 생명의 동력으로 사용하고 있다.

 

우주에 경계, Boundary가 있느냐 없느냐의 질문을 만나 헤어날 길 없는 혼돈에 머물다 죽을 운명이 된 시점 이래로, 나는 더 이상 외‘계’인의 존재 유무에 대한 질문이 무의미하다고 느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그 한 점’에서 방출된 CHON(탄소, 수소, 산소, 질소)가 분해되고 결합하기를(인간의 언어로는 죽고 살기를) 반복한 별들의 또 다른 결합체라면, 나의 존재는 순식간에 우주 전체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어느 별에서 잠시 살았나,는 더 이상 가치 있는 질문이 아니게 된다. 심지어 우리의 나이는 우주의 나이와 동일하며 우리의 육체 또한 우주의 크기와 동일하다. 그래서 더 이상 외롭지 않은가... 그건 아니지만.

 

자꾸만 횟수가 줄어가는 밤하늘 별보는 일을 좀 더 의식적으로 힘써서 해야겠다는 생각이 새삼스럽다. 반짝반짝 작은 별이 예뻐서만은 아니다. 자꾸만 남들도 다 아는 이야기를 지루하게 다시 하는 건 아닌가 슬슬 두려움이 강해지지만, 어쨌든, 우주의 실제 모습은 밤하늘의 모습과 유사하다(천자문의 첫 구절, 천지현황. 나는 이 구절에서 왜 하늘이 검은 것이냐고 가능한 모든 어른, 선생들에게 질문을 했고 학창시절 내내 답을 듣지 못했다. 물리학을 전공하고 천체에 대해 배우면서 비로소 이 구절이 이해되었고, 그 시절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이들을 무한히 존경하게 되었다). 그리고…… 듣기 싫거나 믿기 싫을지도 모르지만 ‘빛은 단지 어둠이 잠시 부재한 상태일 뿐이다.’

 

그래서 나의 시선에 들어오는 별의 개수가 3,000개 정도 된다면, 그 별들의 거리가 모두 다르다면, 가장 가까운 별까지의 광속거리가 4년이니, 우리가 밤하늘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빅뱅의 초기부터 4년까지 우주의 전 역사를 눈에 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천체관측을 할 때마다 욕심이 슬몃 스며들기도 한다. 단지 겸손해지는 것 말고도 유레카는 비교도 안 될 대단한 깨달음이 오면 좋겠다.

 

모두가 기피하는 물리학을 전공하고 전공내용이나 시기와 무관하게 거의 모든 새로운 내용들을 팔로우하며 지극히 사랑하는 독자로서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매력적인 제목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가진 책에 기대보다 깊숙하게 흔들려 책을 읽는 내내 기분이 참 좋았다. Let there be light!

 

김초엽 작가에게 진심으로 경애의 마음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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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시대, 라 벨르 에뽀끄 3 - 만화로 떠나는 벨에포크 시대 세계 근대사 여행 아름다운 시대, 라 벨르 에뽀끄 3
신일용 지음 / 밥북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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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12. 1900 무력 올림픽-의화단 사건

챕터 13. 언덕 위의 구름-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챕터 14. 아듀, 몽마르트르-피카소의 몽마르트르 시대

챕터 15. 그해 8월-1차 세계대전의 발발

챕터 16. 마지막 짜르-러시아 혁명과 라 벨르 에뽀끄의 종말

 

이 시기에 유럽은 일단 총성이 멈추었지만 동양에서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일어났고, 이후 유럽은 1차 대전을 목전에 두고 긴장이 첨예화되고 있었다. 파리의 몽마르트는 예술가들이 사라지고 관광지로 변모해 갔으며,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으로 인해 로마노프 왕가 마지막 짜르의 가족은 죽음에 이른다. 이전의 시리즈들과는 달리 3권에서는 예술분야의 내용보다 정치적 내용이 주를 이룬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상당 부분이 조선과 일본, 중국의 역사에 관련된 내용이 많이 소개된 점이다. 이는 유럽의 제국주의의 팽창으로 인해 그 갈등의 최전선이 조선과 중국으로 옮겨진 결과이다.

 

첫 번째로 소개되는 의화단사건을 자세히 알게 되어 반가웠고, 황제가 거주하는 북경에 의화단이 진입함으로써, 영국, 프랑스 등 8개국 연합군과 전투가 일어나 결국 의화단이 패배한다. 이는 외세로부터 자국민을 지키지 못한 국가를 대신해 외세에 맞서 싸운 청나라 최후의 민중 봉기라고 평가되며, 이후 급속히 쇠락한 청나라는 <마지막 황제>를 통해 익숙해진 내용대로 푸이를 끝으로 멸망한다. 오래전 너무나 아름답다고 느껴서 무작정 홀려서 수십 번을 봤던 영화인데, 어느 순간 세면대에 피를 닦아 내는 장면이 역하게 느껴져서 오랫동안 다시 감상하지 못했던 작품이다. 이젠 어떨지, 다시 한 번 그 찬란한 영상들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가능한 넓은 지역들로 소위 ‘세계 여행’을 떠나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여행에 대해 기대하는 것도 바라는 것도 다 다르기 마련이지만, 그다지 아쉽지 않게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머물러본 내 경험에 의하면, 횟수나 기간에 상관없이 <딱! 내가 아는 만큼만> 보이고 들리고 이해하고 느끼고 배우게 된다. 그래서 언어에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의 경험은 기간에 관계없이 피상적이기만 해서 아쉬운 마음이 든 적도 꽤 많다. 물론 비언어적인 경험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은 아니지만, 언어는 단지 의사소통 수단만이 아니라 그 언어에서 출발한 사회, 문화, 역사, 그리고 화자인 사람들에 대한 이해로 나아가는 출발이기 때문에 언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그런 점에서 멀리 깊이 나아갈 수가 없다.

 

단지 내게만 해당되는 변명인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세대의 한국 교육에서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세계사에 대한 공부는 단지 과거로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세계로 떠나보는 여행이기도 하다. 시간차를 두고 세계사에 대한 이해가 풍부해질수록 과거에 단편적인 경험들이 이제야 이해가 되기도 하고 조각들이 들어맞는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세계사 완전정복’과 같은 단 한 권의 책이 정답처럼 존재한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냐만, 현실이 그렇지 않으니, 세계사든 세계 여행이든 풍부하고 깊이 있게 실행해보려면 적절히 선별된 좋은 이야기들을 가능한 많이 접해보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경우 건조한 사건이나 제도에 대한 나열과 서슬이 아니라, 가급적이면 생명력이 담뿍 담겨 생생하게 대화하고 체험하는 듯한 그런 구성이 제일 즐겁고 재미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흑백으로 그려진 만화책들임에도 불구하고 3권에 이르는 여정 동안 형형색색 다채롭게 느껴지는 전개를 쉽게 따라갈 수 있었고, 마지막 장을 덮을 때 아쉬운 마음이 들게 하는 대단한 매력을 가진 책이다. 새삼 흥미롭고 부럽기 그지없는 저자의 이력과 실력에 감탄이 든다.

 

아쉽게도 연속성을 가지고 기록 보관된 역사는 얼마 없고 그래서 역사는 구멍투성이이다. 따라서 그 사이사이를 얼마나 그럴 듯하게, 누가 더 말이 되게, 한 점의 증거물이라도 더 발견하여 채우는가가 마치 거대한 퍼즐처럼 이어지는 관련 학문 연구들이다. 역사관련 저술이라면 어떤 것이든 지루한 줄 모르고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렇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작은 퍼즐 하나씩을 발견해서 나의 역사적 상식에 빈 칸을 채워 넣는 일이 정말 즐겁다.

 

<라 벨르 에뽀끄> 시리즈는 그 중 재밌고 유쾌하고 즐겁기 그지없는 방식으로 퍼즐 조각을 건네주었고, 그래서 3권을 모두 만나 읽는 내내 행복했다. 2019년과 2020년의 송구영신의 나른하고 행복한 시간들의 일부를 이 책에 빚졌다. 감사한 일이다.

 

처음부터 목표한 바는 아니었지만, 역사에 대한 이야기들에 매료되는 이유들 중 하나는 언제나 어떤 역사의 단편이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여기, 이 사회를 읽어내고 멀지 않은 미래를 짚어보는데 도움이 되는 점이다. 나 자신의 삶을 그려보는 고민과 학습의 틀거리는 내 경우엔 어쩔 수 없이 고금의 다른 이들이 살아온 이야기들을 토대로 한다. 다시 구성된 그 틀거리가 다시 세상에 대한 나의 관심의 방향을 정해주기도 하고 어떤 공부를 더 해야할 것인지의 고민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돕기도 한다.

 

당연히 나는 우리집 꼬맹이들도 이런 경험을 공유할 수 있기를 바라지만, 적극적으로 책을 골라주는 일은 없고, 그저 내가 재밌게 읽은 책들을 잘 보이는 높이의 서가에 전시하듯 정리해 두는 것이 전부이다. 다행이 이 시리즈는 방학 동안에 만났고 비록 흑백이지만 만화로 구성되었고 한 챕터의 구성이 차례로 반드시 기억해야 진도가 나갈 수 있는 역사적 서술이 아니라 흥미로운 인물과 사건들이 다수라, 기대 이상으로 아이들 역시 재밌게 읽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독립된 ‘국사’란 과목은 편협한 이해와 혼란을 가져올 수도 있으니, 나는 가능한 아이들이 세계사를 통해 한국사를 볼 수 있기를, 역사를 바라보고 과거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사회 현상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판단하고 비판할 수 있는 사고력이 자라나길 바란다. 나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이 책은 자주 역사의 한 장면을 실제 보거나, 그 시대를 사는 것 같은 아주 특별한 역사 체험을 선물해 주었다.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몰락으로 시작해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멸망으로 마무리되는 <라 벨르 에뽀끄> 시리즈. 아이들과 함께 만들어갈 우리들의 <라 벨르 에뽀끄>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적어도 인류는 이제 이데올로기보다 인간이 먼저인 세상에 주차한 듯하고, 앞으로도 이론 때문에 수만 명이 죽어나가지는 않는 세상이 될 것이라 본다. 물론 어쩌면 브레이크를 걸거나 해답을 찾기 더 어려운 문제들이 산적해 있는 지도 모른다. 나는 잔 다르크 신드롬을 앓아본 적도 없고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 희망에 들떠본 적도 없지만. 극히 작은 가능성이라고 있다면 계속해서 그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다른 길은 없다.

 

아이들의 독서카드에 ‘그때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세계의 역사가 꼭 이렇게 흘러와야만 했을까? 혹시 다른 길은 없었을까?’이런 질문들을 포함한 다른 질문들이 빼곡하다. 어떤 역사적 상상을 하고 있을까, 함께 이야기 나눌 시간을 행복하게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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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 피아노 소설Q
천희란 지음 / 창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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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그래, 죽음에 대해서.

그런데 내가 죽음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일단 이렇게 시작해야 할 것이다.

나는 여기에 혼자 있다.

나는 내가 언제 도착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아주 오래되어서, 혹은 아직 오지 않아서.

그럼에도 이미 여기 혼자.

그럼에도 단 한 번도 혼자가 되지 못한 채로.

슬프다고 말하면 슬픔이 달아날까 겁이 난다.

무섭다고 말하면 말해지지 않은 무서움에 사로잡힐까 겁이 난다.

겁에 질린 내가 가장 위협적인 것으로 거듭난다.

이 모든 게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지긋지긋하다

죽고 싶다고 말하지 못하면서 죽고 싶다는 열망이 의심받을까 죽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일이.

죽지 않겠다는 말로 죽고 싶은 마음을 이해받으려는 비겁함이.

죽는 일에 실패할까 죽기를 시도하지 못하게 하는 망설임이.

빠져나올 수 없는 진창에 빠지면 정말로 죽어버리면 된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일이.

죽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서 단번에 죽을 방법을 궁리하는 일이.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말하면서 진짜로 두렵지 않을 때를 기다리는 일이.

지긋지긋하다.

이것은 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이다.

 

지긋지긋하다.

죽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 죽을 수 있다는 확신이 무너질까 거듭 죽고 싶다 생각하는 일이.

옆구리에 칼이 들어와도 여전히 때를 기다리는 일이.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으면서 참고 있어서 참을 수 있다고 믿어야 하는 일이.

하염없는 유예 속에서 미련 없이 끝장내리라 다짐하는 일이.

비우고 비운 다음에도 의미가 나를 향해 침투하는 일이.

이런 말을 하고 나면 이 모든 게 유순해지는 경험이 정말로 지긋지긋하다.

이것은 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이다.

 

“나는 지금 증언을 하고 있는 것이지 설득하려는 게 아니다.”

장 아메리 [자유죽음]

 

설득하지 않으려하는 태도는 감사한 일이다. 다만 작가가 끈질기게 매끄럽게 들려주는 언제 끝날지 도무지 모르겠는, 끝났다 싶으면 다른 변주가 시작되는 ‘죽음’이라는 주제의 연주는 각 장에 함께 실린 피아노곡들과 더불어 다채롭고 어둡고 깊고 날카롭게 화음을 발산한다. 그리고 그 내용들에게서 눈을 떼는 일은 쉽지 않다.

 

나는 이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 마음을 다잡고 가다듬어 이 책이 이끄는 심연으로 딸려 들어가지 않겠다는 결심을 반복하며 읽어 나갔고, 실제로 역사 속에서 기사화된 여러 다양한 매체들이 감상자들에게 실제로 충격적일만큼 강렬하게 영향을 미쳐서 직접 행동으로 나아간 무시무시한 사례들을 상기하며 절대 그런 ‘경우’가 되지 않겠다고 삶의 의지를 말 그대로 태워 올렸다.

 

단순하고 명백한 답이 존재하는 지의 여부도 알 수 없고, 오롯이 혼자 자신 안에 갇혀서 치열하게 반복해야 하는 싸움인 경우, 필요한 도움을 바라기도 어렵고 언제 끝나는지도 알 수 없어 피로도가 훨씬 더 크고 힘겨울 터이다. 선명한 같은 내용이 반복되는 것도 아니고 방향을 알 수 없이 사방으로 분열하는 목소리를 반복해서 들어야 하는 일은 상상으로도 지치고 숨 가쁘다. 어떤 의미로 살아가는 일은 멈추지 않는 여러 고통을 느끼고 직면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좀 더 정직하게 그 일상을 들여다보면 그런 식으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통에 잡혀 살다가 문 밖에서 기회를 엿보던 죽음에게 결국엔 따라잡혀 소설이 끝나 듯 삶도 끝난다고 생각하면, 그건 절망일까, 그래도 희망이고 위안일까.

 

“나는 당신이 살아 있기를 바랍니다.”

 

끝없이 죽음을, 죽음만을 이야기하는 작가의 이 고백은 새삼스레 더욱 뭉클하다. 각 장의 피아노곡 연주처럼 이야기 또한 유려하게 흐른다. 나는 그 모든 것들의 도착지가 작가의 이 한 마디라는 생각이 든다.

 

“삶이 정체되어 있다는 감정에는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양한 현실적 조력이 필요하고, 그 조력 없이 개인의 의지는 자주 무력해진다. 나는 내 의지만으로 여기에 온 것이 아니고, 내 경험이 다른 누군가에게 섣부른 희망으로 전달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다만 이 말은 남겨 두고 싶다. 평생 변하지 않는대도 괜찮다. 그러나 절대로 변할 수 없는 것은 없다.”

 

어쩌면 인류 공통의 증상처럼 작가도 가끔은 급격한 불안과 긴장을 느끼고 일상의 많은 시간을 학습된 무기력과 싸우는 데에 소모한다고 한다. 나도 그러하고 내 지인들도 그러하다. 그리고 미처 이야기를 듣지 못한 다른 이들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한 삶의 길에서 작가는 글쓰기를 즐거움으로 받아 들여, 운명에 따라붙는 잔혹성이 아니라 오히려 혹독한 삶에 파묻혀 자신을 파괴하지 않도록 붙드는 이유로 삼는다. 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쓴다,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쓰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는 것!

 

“자기 안에 빠져나갈 길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물론 이 책이 길을 제시해주지는 않겠지만, 본인만의 고통이 아니라는 걸 느꼈으면 좋겠어요. 물론 자기가 느끼는 고통은 고유한 고통이죠. 다른 것들과 비교될 수 없는 고통이지만, 이와 유사한 종류의 감정들을 사람들이 많이 느끼고 산다는 것. 그게 위안이 되기를 바라지는 않지만요. 그걸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 또 한편으로는 그런 사람들을 곁에 두고 있는 사람, 아주 힘들어하고 자기 자신에 빠져들어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곁에 두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이 읽어 줬으면 좋겠어요.”

 

반어와 역설이 가득한 문장들이 작가인지 주인공인지 두 사람 모두인지의 내면에 폐쇄적으로 들어가 있는 느낌, 그 문장들이 그려내는 풍경이 얼핏 보였다가 곧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피아노 소리로 바뀐다. 비록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정제된 문장으로 써나간다.

 

이제야 고백컨대,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95

 

내용과 문장이 철저할 정도로 숨김없이 표현되어 압도되는 즈음에 위의 문장이 등장한다. 끝까지 감당하고 읽는 가는 독자의 몫이 된다. 어쩌면 작가는 이를 짐작하고 마지막에 작가의 말을 상당히 길에 실었을 지도 모른다. 혹시 자신의 엄중한 상황으로부터의 피난처로서 혹은 위안이나 구원으로서 이 글을 택했다면 그런 종류의 역할을 없다. 적어도 작가는 독자들을 자신의 감정을 쏟아 부을 쓰레기통으로 삼지는 않았다. 그래서 어쩌면 독자는 오히려 서운할 수도 안심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허구가 아니다. 당신을 볼 수 있다.

​당신이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 여기에 있다. 과잉의 고통이 있다. 119

 

나이를 먹는다고 사는 일이, 시대가 덜 힘겨워지는 일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는 일을 소중하게 여긴다면 다 이해하지 못하는 시간들이 있을지라도 버티고 견디고 살아가야 한다. 설사 그 고통 속에 끊임없이 변주되는 음악이 들릴지라도 말이다. 참 어렵다. 기력이 다한 낙엽처럼 쓸쓸히 자신의 삶을 읊조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혹시나 열렬하게 죽고 싶기도 하지만 그만큼 살고 싶은 심정을 지닌다는 것은.

 

죽고 싶다고 생각하는 도중에 다른 것을 생각하고 사는 삶. 135

21장은 소제목에도 내용 전체에도 가로줄이 그어져 있다. 목차를 볼 때에도 그랬지만 심장이 달칵거리며 겁이 난다. 일말의 익숙한 희망도 없는 죽음에 관한 도무지 자비 없는 이야기. 그래서인지 읽는 내내 마음이 서늘해서 뜨거운 커피를 자꾸만 내려 마셨다.

 

십 대에 암수술을 하고 꽤나 감성적일 뿐 아니라 진지해져 있던 그 시기도, 대학원 때 <죽음에 관한 철학> 강의를 받으며 발제발표를 하고 나니, 지도교수가 “너희들은 젊어서인지 이런 주제를 전혀 이해 못하는구나.”하신…… 살짝 발끈했던 그러나 실제 나이가 들어간다는 일이 느끼게 해주는 죽음에 대한 늘 떨리는 미세한 불안과 확인을, 그때는 정말 전혀 몰랐던 것이 사실이었구나, 하는 생각도 새삼 든다.

 

어쩌겠는가, 이만큼 확실히 보장된 미래 사실도 없고, 시기조차 확신할 수 없는 일이 살아가는 일의 정체인 것을. 그래서 가끔은 가족, 친구, 지인, 타인 누구에게도 아무런 기대도 원망도 판단도 보류되는 일이 종종 있다. 나이가 들어 성품이 너그러워지고 유순해진 것이 아니라, 매일이 마지막일지 모르는 시간을 함께 살아가는 일의 고단함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12월 31일, 유독 상세 내용이 생각나지 않을 만큼 살아가버린 2019년의 마지막 날이다. 그리고 다시 2020년 또한 단 1분도 잠깐 멈춤을 할 수 없이 흘러갈 것이다.

 

벌써 내년을 빌어주는 마음 착한 이들의 문자들이 도착하고 있다.

 

즐겁고 신나고 맘껏 유명세를 누릴 작품들을 쓰는 점점 더 영리해지는 양지의 작가들도 사방에 가득한데, 마치 직업윤리에 철저하게 부응하는 양심고백을 하듯 이런 글을 끝까지 마무리할 수 있었던 천희란 작가의 일상은 따뜻하고 가볍고 포근하고 웃음이 자주 머무르는 그런 것이길 진심으로 바래본다.

 

3개월을 내 안에 오래 감춰둔 두려움과 충격과 즐거움을 꺼내 볼 수 있도록 함께 한 소설Q 시리즈에 다시 한 번 경애의 마음을 보냅니다.

​매번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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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시대, 라 벨르 에뽀끄 2 - 만화로 떠나는 벨에뽀끄 시대 세계 근대사 여행 아름다운 시대, 라 벨르 에뽀끄 2
신일용 지음 / 밥북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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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벨르 에뽀끄>를 영상으로 가장 매력적으로 만난 것은 아무리 기억을 헤집어도 단 한 작품 [미드나잇 인 파리, 우디 알랜]의 영화에서이다. 함께 본 오랜 친구와도 각자의 벨 에뽀끄가 달라서 그러냐며 새삼스레 서로를 이해한 적이 있다. 나는 언제나 세심하게 제정된 법이 더 많은 현대가 덜 야만적이라고 생각해서 잠시 가볼 수는 있겠지만 과거로 돌아가서 살고 싶지는 않다. 물론 단순히 내가 과거로 관광 차 돌아가는 것뿐만이 아니라 세계대전정도를 막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이런 사적 선택과는 별개로 분명 이 시대는 현재까지, 어쩌면 더 먼 미래까지 크나큰 영향을 미치는 수많은 문화사조들이 생겨나고 발전한 시대임이 분명하고, 너무나 유명해서 익숙하기까지 한 스타 예술가들이 등장해서 인상주의라는 다채로운 사조를 시대와 더불어 더욱 화려하게 펼쳐낸다.

 

한편 시점을 달리해서 본다면, 유럽의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는 그들에게만 아름다운시대였을 뿐, 다른 세계는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확장 정책으로 인한 유혈사태들이 정리된 이후 본격적으로 착취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물론 내부적으로도 계급/계층/빈부 갈등이 심화되어, 피카소가 사랑에 빠져들던 빠리의 몽마르뜨에서 빠리꼬뮌의 전사들이 민주주의를 외치며 피를 흘리고 있었고, 무려 해가지지 않는 영광의 제국빅토리아 왕조 치하 영국의 자본주의적 착취 구조는 자국 노동자들을 한계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 결과 아나키스트들의 봉기와 테러가 연이어 일어나고 마르크시즘이 태동하고 이를 응용/오용/남용한 레닌의 인류사 최초의 공산혁명실험이 시작된 시기이다. 그리고 바로 이때가 메이지 유신으로 자력으로 근대화의 길로 나간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한 통한의 시기이기도 하다.

 

인물 중심이 아니라 개별 인물에 대해 내가 원하는 만큼(?)의 자세한 에피소드를 발견할 수는 없지만 시대의 분위기를 통시적으로 볼 수 있는 흐름이 원하는 바라 만족스러웠다. 예술문화사만이 아니라 정치적 사고 양식 또한 어떠했는지 결합해서 보여주는 이야기라 한 영역이 다른 영역에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는지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을 예시로 연결해서 들려준다.

 

유럽의 근대사 이야기이긴 하지만 고립된 자국만의 역사란 불가능한 것이기에, 이 시기의 중요한 사건들이 미친 영향을 대한민국의 정치제도와 사회문화에 대한 분석을 통해 활용해볼 수 있고, 의외로 이런 맥락을 따라가다 보면 대한민국의 근대사가 아니라 얼마 전 뉴스보도에서 이해한 한국사회의 현재진행형 문제들과도 전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독자들 개별 해석에 따라 달라질 것임이 분명하겠지만). 마침 2권의 마지막 부분들은 여러 나라의 정치적 인물들이 등장하고 전쟁 전의 어수선한 분위기가 시작된다. 어리석고 탐욕스런 비극으로의 거대하고 파괴적일 뿐인 전쟁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3권을 통해 더 자세히 설명될 모양이다.


만화책이라는 형식으로 다룬 역사이지만 내용이 즐겁게 감사하게 위해서는 사전 지식이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치밀하고 알차다(과문한 나의 인상일 뿐일 수도 있다). 유럽, 아시아 그리고 필요한 다른 나라의 역사를 함께 검토한 작업을 거쳐 만들어진 책이라는 느낌이다. 자연스럽게 이런 드넓은 시야를 가지고 거대한 프로젝트를 시도한 기업인 출신의 작가에 대해 궁금해진다. 자신의 관심사에 대한 지식의 생산량을 늘려서 저서와 같은 구체적인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이런 이들과 마주치면, “정말 내게 의미 있고 중요한 것이라면 기억에 남겠지.”란 태도로 대부분의 경험들을 흘려보내는 게으른 존재인 나로서는 어쩔 수 없이 늘 부럽다.

 

한 가지 재밌었던 점은 글에 드러난 저자의 말버릇이다. ‘잠깐 옆으로 샜다.’ 처음 들을 때는 모르고 넘어 갔지만 반복적으로 듣다 보니 아하! 저자의 사고 패턴이 조금 파악되는 듯하다. 전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연상 작용이 아주 활발하다는 것! 그래서 이 책은 다채롭고 풍부하고 떠들썩하게 재미있다. 또한 깔끔하게 자신이 내린 결론으로 마감하는 것이 아니라, “?”라고 마지막에 물음으로써 독자가 자신의 생각을 낯설게 느끼게 하고 헤집어 볼 기회를 제공한다. 혹은 재미난 사족처럼 다른 예화를 덧붙인다.

 

언제나 깔끔하고 산뜻하게 마무리되는 관광보다는 낯설고 돌발 상황이 없지 않은 여행()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저자의 연상방식도 마무리방식도 참 마음에 든다. 마치 런던과 빠리에 가더라도 환하고 떠들썩한 광장이 아니라 골목 사이로 자연스럽게 들어가 거기 사는 이들과 같은 음식을 먹고 한가한 시간이 되면 역사 속의 배경으로 환기하고 상상해보는 여유를 가지는 여행. 근대사에 관심이 적은 분들에게는 어떤 느낌일지 모르겠으나, 가끔 두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밤늦도록 근대사 장면들에 놀라며 떨리며 감정이입하며 시간을 보낸 내 시대에 관심과 애착을 가진 독자로서는 개별 사건들에 대한 가치의 현대성 효용성 따위를 따지는 거만한 후대들의 질문들을 잠시 덮어 두고서 나만의 평화로운 비동시적인 동시성의 세계에 머물러 본다. 맘 편하게.

 

2019년 겨울, 그리고 12월이 한 때의 연착도 없이 지워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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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할머니, 미생물, 그리고 사랑 - - 한 인간의 삶을 통해 고찰한 인문·생물학적 생장에세이
이낙원 지음 / 밥북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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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 안에 들어 있는 무언가가 호흡하는 모든 것을 특별한 존재로 만든다고 믿는다.

 

호흡기내과 의사로서의 경력에서 비롯된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인식을 그대로 선명하게 보여주는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서 할머니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역사적 생물’로 그려지고, 그런 할머니의 존재는 저자의 마음속에 별과 사랑으로 새겨져 저자뿐만이 아니라 우리들 각자가 하나의 단순한 후손이 아니라 다소 생소한 명칭인 ‘생장체’로서 스스로와 우주를 마주하게 하는 전개로 나아간다.

 

시간이 가면 바뀌는 것들이 있다. 후임자들이 자라면서 자신의 영역이 줄어들고, 또 넘겨줘야 하는 것들이다. 그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우리의 물리적인 몸 그 자체이다. 언젠가 몸 자체를 후임자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시는 조부모님과 함께 산 조손들의 기억은 편안하고 행복한 기분들로 가득 채워져 있을 것이다. 나는 정기적으로 찾아뵙는 쪽이었지만 모두 소천하신 지금도 만남의 모든 기억들은 언제나 언제나 환한 빛과 따뜻한 볕과 그리운 음식 향들로 떠오른다. 언제나 기다려주고 반겨주는 존재. 실재로 그러했든 아니든...... 그렇게 기억되는 존재들은 드물고 살아가는 일은 그런 존재가 엄청 귀하다는 것을 죽도록 쓸쓸하게 절감하는 경험을 포함한다는 것을...... 한 겨울 칼바람에 얼어붙은 듯이 멍하니 깨달았던 지난 기억에 늘 마음이 시리다.

 

참 이상하고 더 서러운 것이 그렇게 조부모님들이 돌아가신 후에는, 이전에 역시나 따뜻한 추억들로 채워지고 성장 과정에서 중요한 공간이었던 본가의 집들도 마당도 나무들도 하물며 공기도 하나같이 생명의 빛을 잃고, 아무리 주기적으로 관리를 해도 싸늘하니 어딘가가 망가지고 무너져간 경험이다. 아무리 과거란 미화되기 마련이라 할지라도 과장 없이 솔직하게 심정을 토로하자면, 그렇게 나는 완벽하게 행복했던 그 시기를 지나 돌아갈 옛 집도 그리운 분들도 잃고 심리적으로는 불안과 걱정이 많은 가난한 어른이 되어 뜻밖에 사회적 고아 같은 기분으로 늙어가고 있다.

 

할머니의 음식은 일용할 양식이었지만, 단순한 포만감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 이상이었다……. 내가 먹었던 그 모든 것들은 내 기억 속에, 그리고 내 몸을 이루는 세포와 식성과 정서 속에 남아 있다. 

 

대한민국 할머니들의 인생사를 얘기하는 데에는 당연한 듯이 ‘파란만장’이란 표현이 등장하기에 사전까지 찾아보았다. 딱히 저 적확한 표현이 생각나진 않지만, ‘파란만장’ 정도로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할머니들의 인생 얘기에 한 자리 끼어들지도 못하겠다 싶게 사전적 의미가 공허하긴 했다. 다사다난 억척같이 살아내다 보답과 보람과 영화는커녕 인생무상의 결말을 보는 분들이 얼마나 많으실지……. 떠들썩한 지가 꽤 오래 되었지만 아직 유투브도 책도 접하지 않은, 그렇지만 피할 수 없어 이런저런 내용들이 무척 익숙해진, 2019년 베스트셀러임이 분명할 [박막례, 이대로 죽을 순 없다] 역시 [별, 할머니, 미생물 그리고 사랑]과 ‘파란만장’이나 ‘다사나단’에서 궤를 같이하는 내용이 많을 것이다.

 

늘 한결같은 애정, 근검절약 정신, 부지런함, 이타성. 왜 대개의 할머니는 비슷했을까? 중략. 절약과 헌신이라는 이 품성의 절반 이상은 시대가 강요한 성품일 것이기 때문이다. 식민지와 전쟁, 그리고 전후의 가난 속에서 자식을 길러내는 여성으로서 살아남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 시대 할머니들의 성품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중략.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자랐고, 전쟁 후에 자녀를 길렀고, 근대 산업화시기에 할머니가 되었다. 인류 역사상 이토록 가파른 언덕을 올라간 세대가 또 있을까.

 

예전에 유달리 피곤했던 어느 날, 조부모님 얘기를 들으면서 재밌기보다는 ‘아, 저 이야기는 200번쯤 듣는 것 같아......’하고 시큰둥 흘려들었던 게 여태 기억이 난다. 살다보면 그런 ‘진짜 이야기들’을 들을 기회가 귀한 건 줄 모르고,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역사가 절로 움직거리고 마음도 더불어 움직이는 그런 이야기인 줄 모르고. 가사문학을 즐겨 낭독하시던 조모의 음성을 어느 날 녹취한 짧은 분량 말고는 이제 그분들의 음성은 영영 들을 수 없다...... 라고 쓰는데 눈물이 차오른다.

 

이렇게 조부모님 얘기로 징징거려도 가여울 나이는 이미 한참 지났는데,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성장의 시기를 한참 넘어 부모님도 잘 돌아볼 줄 알아야하는 시기임이 분명한데, 누구에게나 남은 시간이 얼마나 짧을 지는 아무도 모를 일인데, 아직도 갈무리 못하고 짜증을 부리는 나를 보자니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다. ‘내 짜증을 남에게 알게 하지 말라’를 새해 결심으로 올리고 만방에 공표해서 그 부끄러움에라도 기대 철딱서니 없는 짓을 그쳐보자 했는데, 아무리 잘 봐줘야 조금 어조가 덜 상스러워진 듯하기도……. 그 정도.

 


어떻게 읽은 책인지 정리가 안 된다. 감정이 엉클어졌는데, 동서고금 가족을 연상시키거나 환기시키는 모든 이야기들이 그렇게 복잡한 작용을 하는 건 분명하다. 그냥 그 상태로 정리되는 건 다시 주워 담고 안 되면 다른 결심을 하고 그래야겠다.

 

오래된 기억을 조용히 하나하나 찾아내어 차분히 옮겨 적은 그리운 이야기 한 가득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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