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에서 도착한 생각들 - 동굴벽화에서 고대종교까지
전호태 지음 / 창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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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관심 없는 듯이 한차례 휙 구석기 전시실을 둘러본 진석이 아직도 주먹도끼 무리 앞에서 얼쩡거리는 내 곁으로 왔다. 

  

첫 문장을 읽으면서 반가운 웃음이 나왔다. 우리 가족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산책하러 가면 늘 벌어지는 장면이다. 우리 큰 꼬맹이는 늘 비슷한 위치에서 비슷한 유물을 어떤 재미난 상상을 통해 보고 있는지 다 보는 것에는 전시 속도에는 전혀 관심이 없이 몇 개의 유물 앞에서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낸다.

  

목차를 보고 상상한 내용과는 너무나 재미있게도(?) 달랐다. 표준적 형식의 사상서도 철학서도 역사서도 아니고, “응? 고대인들이 진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드는 내용들이 주를 이루고, 문체 또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알려주는 형식이라 술술 읽힌다. 이에 더해 독자의 상상력만 활발하게 작동해 준다면 아주 재미있게 집중할 수 있다. 특히나 명칭 암기를 정말 못하는 나로서는 그런 류의 정보들을 제때 숙지하지 못하면 내용 파악에 자꾸 제동이 걸리는 건 아닐까 염려가 앞섰는데 다행히 그 능력은 요구되지 않는 글이다. 기쁘다!! 그보다도 당시에 살았던 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통해 살아남고 살아갔을까. 결코 경험해볼 수 없는 시대를 1인칭 시점이라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맘껏 상상해볼 수 있게 마련해준 무대가 이 책이다. 

 

사실 선사시대와 지금을 비교하면 논리적 전개 과정이 더 복잡해진 것 말고는 사람이 세상을 보는 눈, 우주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방식이 질적으로 얼마나 크게 달라졌는지 나는 확신하지 못한다. 5

 

Stories are all we have.


선사시대는 현재와 문명적, 기술적 차이가 아주 커. 그러나 이것이 현대인이 선사시대 사람보다 인지적으로 앞섰다는 걸 뜻하지는 않아. 현대인이 인지적 깊이에서는 오히려 대단히 원시적일 수도 있어. 탐욕과 편견에 깊이 물든 현대인이라면, 그 사람은 오히려 선사시대 사람보다 더 야만적인 존재일 수도 있지. 19


뇌과학자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수치스럽게도(?) 인간의 뇌는 선사시대보다 그리 더 진화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혹은 그래서인지 인류 문명 - 과학을 포함한 모든 업적들 - 에 대해 실은 우리가 가진 것이라곤 그 중 가장 말이 되는 듯한 그럴 듯한 이야기들뿐이라는 다소 자조적이지만 진실에 가장 가까운 말이 있다. 그런 이야기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인간만이 가진 상상력, 그리고 그 상상력을 믿는 힘이라면 이 책을 통해 그 상상력이 구체화되는 과정을 잘 볼 수 있다. 특히 종교의 대상으로서의 믿음이 점차 현실화되는 과정이 나에게는 몹시 흥미로웠다. 

 

그러한 내용의 갈피는 아무래도 이 책을 완독하면서 맛을 조금씩 음미하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분량이 많다고 벅찬 것은 아니다. 마치 우리집 꼬맹이들이 더 어릴 적에 내가 이렇게 말해줄 능력이 있었으면 재미난 대화가 되었겠다 싶은 말투이고 내용이다. 학생들을 가르쳐본 이들은 누구나 동감하겠지만 자신이 아는 것을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바꿔 정확하게 전달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저자의 대가다움이 나는 이런 짧고 쉬운 문장들로 이어가는 대화들 속에서 느껴진다.

 

저 짐승들이 지닌 강한 힘, 뛰어난 능력을 누군가가 주었다면 그건 누굴까? 게다가 하늘의 별, 어디선가 불어오는 큰바람, 갑자기 쏟아져 내리는 비는 어떻게 된 거야? 이 세상에는 사람과 짐승 말고도 뭔가 더 있는 것 아닌가?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불, 소리를 내면서 번쩍 거리는 저건 어디서 나온 거지? 저것도 누가 만든 거 아냐?

  

이런 의문이 쌓이고 쌓이다가 찾아낸 답이 ‘신‘아니었을까? 신이 있어서 만물에 능력을 주고,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현상을 일으키는 거지. 자연에서 보고 겪는 위대한 힘이 모두 신의 손길에서 나온다고 보는 거야. 짐승이 지닌 이상한 능력, 특히 하늘을 날아다니는 온갖 새들을 신이라는 존재와 연결하는 거지. 신이 돕지 않으면 어떻게 하늘을 날아다니겠어? 이런 식으로 묻고 답하는 거야. 34

  

취향이라는 것은 의외로 일관적인 부분이 있어서 나는 늘 통시적 관점을 가진 역사서를 선호하는 편이었고, 그 점은 젊은 적에는 그저 독서취향이었으나 나이가 들고 지적 능력이 비가역적으로 쇠퇴해짐에 따라, 한 번씩 신체건강검진을 받는 일처럼 적절한 순간에 사고의 얼개를 배열하고 정돈하고 연결시켜 주는 의학적 도움처럼 느껴진다. 그럴 때마다 머릿속이 조금은 환해지고 시원해지면서 이런 많지 않은 순간이 독서의 보람이라고 느낀다.

  

“깨는 것과 갈고 벼리는 것 사이에 시대의 경계가 그어졌다.” 50

  

물론 이 시대 구분을 지나 이후 청동기 시대 이후 무기와 연장은 보다 복잡한 지배/피지배 관계를 성립시켰고, 생산방식과 체계 전체를 공고히 하여 일반화시켰고, 전쟁의 규모를 키우고, 제국의 출현을 가능하게 되었다. 이때쯤 되면 제국의 강인한 영웅 스토리가 필요하게 되는데, 이 중 하나는 아마 이름은 다들 들어봤을 주몽 신화이다. 그리고 강력하고 무시무시하고 불가역적인 철기.

  

철기는 사람들을 강하고 자신있게 만들었지. 쇠로 된 농기구를 지니게 된 농부는 농부대로, 쇠로 된 무기를 갖게 된 전사는 전사대로 자연의 수목과 짐승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났어. 중략. 사람들은 자연에서 나는 것은 무엇이든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지. 181-182

  

대화체는 접근하기에 쉽지만 서술의 체계성을 기억하기에는 더 복잡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목마다 전제가 되는 것이 내가 고대인이라면?이라고 상상해보는 일이 많으니 그 방식이 재밌는 이들은 즐기며 읽기 참 좋은 책이고, 창작소설이나 에세이적 분위기보다 진중한 역사서를 원하는 이들에게는 생경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구분이 이 책의 내용이 근거없는 추정과 상상이라는 말은 전혀 아니다. 

  

500쪽이 넘는 분량이지만 재미있게 잘 읽히는 이 엄중한 시절의 무거움을 잠시 잊게 해주는 반가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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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꼬맹이가 올해 초등학교 입학이라 남들만큼 다하지는 못해도, 서로가 두근거리며 가끔은 불안해하며 함께 할 수 있는 준비들을 때론 더할 수 없이 기쁘고 즐겁게 해나갔습니다. 그런데 아직 봄은 멀고 입학도 쉽지 않은 엄중한 시국이 닥쳤네요. 다행히 아이는 나름대로 상황을 이해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기쁨과 축하와 희망으로 작은 가슴을 가득 채워도 모자란 시기가 다르게 기억될까 속상하고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도 가족 모두 건강한 것을 잊지 말고 감사해야겠습니다. 부디 모두가 소중한 일상을 찾고 희망으로 내일을 상상하고 맞이할 수 있는 날들이 하루빨리 회복되길 간절히 기원하는 마음으로 모든 입학생들을 축하하고 응원합니다. 힘내라! 대한민국! 힘네세요 모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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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저트 수채화 컬러링북 - 새콤달콤 쉽고 즐거운
홍희수 지음 / 밥북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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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다른 애정없이 학교 행사인 사생대회에 참가하는 반복되는 일정 정도로만 생각한 초등학교 시절 수채화 그리는 시기를 지나, 중학교 입학 후 의지와 상관없이 미술부에 들어가게 되었다. 수업 중 데생 후 선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나가는 방식이 좋은 편이라고 선생이 추천을 받았다. 기쁘기보다는 어리둥절해서 꿈꾸지 않고 동경하지 않았던 부활동을 하게 되었는데도 무척 열심히 참가하였다.

 


무엇보다 점심 시간에 간단한 스케치 활동을 한다는 폼나는 이유로 그때도 지금도 좋아하지 않은 수다떨기에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고, 그렇게 일년이 흘러 꽤나 스케치 스킬을 갖추었다고 생각한 어느날 유달리 맘에 드는 그 오후의 풍경 앞에서 늘 그렇듯 간단하 스케치를 하려고 하는데, 잘 알지 못하는 다른 반 아이가 옆에 와서 "넌 저런 풍경을 보면 그림을 그리고 싶니? 난 사진을 찍어 두고 싶고, 내 친구는 글을 쓰고 싶대."라는 말을 건네준 것을 화두로 삼아 며칠 진지하게 고민하다, 나는 딱히 아름다운 것, 마음에 드는 것을 목격한다고 해도 그림을 그리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인지를 솔직하게 받아 들이고 미술부를 탈퇴하였다.

 


그후 전혀 미술부 활동을 그리워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꿈과 희망과 미래의 삶을 연결지어 마음을 다하는 친구들 틈에서 나도 비슷한 부류인 듯 말없이 앉아 굳이 부정하지 않는 것이 마치 참여하러 온 것이 아니라 엿보러 온 듯한 기분이 드는 계면쩍음은 더 이상 느끼지 않아 마음이 가벼웠다.

 


그 시절이 계기가 된 것인지 아님 굳이 이유를 찾이 않더라도 내 취향이 그랬을 것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세상 모든 색상들을 경애하고 경외한다. 어떻게 이런! 이 요즘도 새로 과일을 사게 되면 그 중 어여쁜 하나를 빤히 바라보며 늘 드는 생각이다. 그것은 물리학을 공부하면서 무지개를 포함 모든 아름다운 색상들의 태생과 본질을 알게 된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마음이다.

 


그래서 오랫만에 온 집을 뒤져서 찾아낸 수채화 그림도구들을 늘어놓고 종이를 쓰다듬으며 물과 색료의 향을 느끼며 붓을 잡는 일은 즐거운 일은 넘어서 경건한 시간처럼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그림을 그린 그 시절의 나를 단숨에 소환하는 마법의 시간.

 


비록 내가 딸기와 한라봉을 전혀 표현할 능력이 없고 - 딸기는 늘 썩기 직전처럼 한라봉은 플라스틱 장난감처럼 - 바로 옆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따라 그리기를 해도 맞는 색을 찾아낼 수 없는 지경이라는 것을 처절하게 깨닫는 시간이기는 했지만. 그리고 절망적일만큼 전혀 그릴 수 없는 복숭아! 알러지가 있어 평생 복숭아를 먹지 않았고 그래서 맛을 모를 뿐더러 간혹 목격하게 되어도 그리 유쾌하지 않다. 복숭아라고 쓰고 있는 이 순간도 팔의 어느 언저리가 가려워지는 듯 하기도 한다.

 


한참을 고군분투하다 다시 색상표를 들여다본다. 비록 내가 가장 사랑하는 로열블루는 없지만 이토록 눈 앞이 반짝이는 기분이 드는 건 참 신기하고도 반가운 일이다. 마치 한동안 빛을 못보고 살았던 것처럼.

 


대상이 무엇이든 혹시 집 안에 묵혀둔 수채화 재료들이 있다면 그냥 물과 섞어 색들을 죽죽 펼치고 겹쳐보길 바란다. 마음에 물감이 번지는 기분이란 게 이런 것인가 싶게 알록달록하면서 투명한 기분이 정말 대단한 위로와 기쁨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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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 장혜령 소설
장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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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계기로 마침 <시그널> 드라마를 다시 몰아서 보고 신기하게도 이 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처음과 다르지 않은 아픈 질문, "거긴 좀 다릅니까, 그래도 20년이나 지났으니…… 돈 많고 권력 있다고 개차반 짓을 하고도 멀쩡하게 사는 그런 세상은 아니겠지요……."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되는 거라고, 그 메시지를 멈추지 않는 드라마를 이젠 영락없는 기성세대가 되어 복잡한 마음으로 끝까지 지켜보았습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누군가에게 손 내미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육신의 빛이 모두 꺼졌지만 두 눈만은 여전히 빛나는 채로 그는 찾아온 모든 사람들과 손을 잡았습니다.

그것이 한 인간에게 정말로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것,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는 것은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았습니다. 251

 

실제로 대학운동권의 끝자락에 대학에 입학한 나는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많은 것들이 낯선 이야기들이 아닙니다. 투옥, 고문당한 선배들도 있었고, 군대에 끌려가고 집에 끌려가서 연락이 되지 않은 이들도 있었습니다. 더 윗세대인 부모님 대에는 흔적 없이 실종된 이들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내 개인의 삶을 뒤돌아보면 금방인 것 같으면서도 참 긴 세월이었다 싶은 기분이지만, 실제로 20~30년 전이란 기술변화의 내용에서는 충격적일 정도로 급변해왔지만, 정치, 경제 민주화의 시선에서는 참으로 더디고 무거운 몇 걸음 정도로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 몇 걸음을 걸어나기 위해 치러야했던 무수한 대가들은 얼마나 버겁고 두려웠는지, 그 시기를 운 좋게 살아남은 나와 같은 이들은 이제 체력도 열망도 거의 바닥이 난 채로 일상의 평온함이 깨지는 것만이 너무나 두려운 일이 되어, 대부분의 남은 체력과 노력을 거기에 바치는 매일이고, 그나마 이런 짓까진 하지 말고 살자,란 하한선을 지켜내는 일에도 힘이 듭니다.

 

가끔 그래도 마음이 부대끼어 그저 몇 번 후원을 하는 일로 혼자만의 안전한 참여활동을 하는 것이 고작이고,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하나라도 한번이라도 더 해보자,가 새해에 마음속으로만 되뇌어보는 다짐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별 하는 일 없이 사는데도 늘 힘은 듭니다. 힘들지 않은 삶이 어디 하나라도 있었냐 하면 늘 그렇듯이 이번에도 할 말은 없습니다. 그러니 가능하면 엄살은 부리지 말고 견뎌야 하겠지요.

 

이토록 깜냥이 작은 나 같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사람이 사는 일이 언제나 조금 덜 힘들고 조금 더 행복한 게 궁극적으로는 맞는 거지만, 그렇지 못한 환경에서 언제나 자신의 이익을 조금 더 줄이고 조금 더 희생한 분들은 언제나 있었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이제까지 알고도 모르고도 얼마나 많이 자주 무임승차를 한 삶이었을까요.

 

그런 분들은 처음부터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 한 일이 아니었으니 적어도 그런 선택에 대한 평가만은 제대로 해드리고 비록 지금은 말뿐이지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하는 일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가끔은 너무나 두렵게도 폭력적이고 악랄하고 의도적인 인신공격들이 생각보다 도처에 흔하지만, 미리 겁을 집어먹고 움츠려든 나와는 달리 그 전쟁터에서도 꿋꿋이 할 일 다 해서 조금씩 구태와 적폐를 밀어내고 치워내는 분들이 과문한 제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을 겁니다.

 

그들은 그들의 교훈이 당신 내면에 자리 잡아, 당신 자신이 했던 것과 그들이 말하는 것 사이의 차이를 당신이 더는 구분할 수 없게 되기를 바란다. 불법적인 연행 불법적인 감금 불법적인 시간의 탈취 이런 낮 이런 밤이 열흘 스무 날 삼십 일 넘게 이어지는 동안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낮으로부터 밤이, 밤으로부터 낮이 나뉘지 않고, 그들로부터 당신들이, 그들의 말로부터 당신들 말이 완전히 구별되지 않는 고통은 당신들이 이 방을 나간 뒤에도 계속되어, 그 고통이 당신들을 서서히 지치게 하고 쓰러지게 하고 병들게 하고 무너지게 하고, 당신들 모두가 죽어 없어진 뒤에도 이 방의 불빛은 절대 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들의 밤 당신들의 악몽은 우리의 삶이 될 것이다. 129

 

아무리 너덜너덜해졌더라도, 비록 이젠 전생의 일이었던 듯 일관적으로 지켜내지 못한 기억들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나에게 그것들은 허구가 아니고 창작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만들어서 지탱해주는 역사입니다.

 

그런데 나와 함께 책을 읽은 큰 딸에게는 자기는 한 번도 해보지 못해서 궁금하고 재밌는 에피소드처럼 글 내용이 느껴지나 봅니다. 이해하지 못한 내용들에 대한 큰 고민이 없는 것은 한편으로는 행이지만, 이 소설을 읽고 한 유일한 감상평이 엄마랑 소품 만드는 바느질 체험이 하고 싶다고 눈을 반짝이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한편으로는 더 이상 이런 이야기들이 당장의 나의 현실이 아니라 미안하면서도 다행이고 감사하고, 그리고 저렇게 기쁜 소소한 일들이 내 아이들의 삶에서 멈추지 말고 자주 있기를 불안한 마음으로 빌고 싶은 기분입니다. 그래서 이 아이들의 서사는 더 아름답고 더 천진하고 더 희망차게 미래를 상상한 방식이 되기를 기원하고 싶습니다.

 

다시 한 번 더 말뿐이라 죄송하지만, 삶을 이어서 이제껏 넘겨주신 모든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저도 할 수 있는 한 온전하게 아름다운 한 자투리를 그렇게 넘겨 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내일 또 내일이 오면 한 사람이라도 눈물 덜 흘리고 젖은 얼굴 마르는 그런 세상이길 끝까지 함께 응원하고 기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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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찾아서 창비시선 438
정호승 지음 / 창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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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 『새벽편지』 『별들은 따뜻하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이 짧은 시간 동안』 『포옹』 『밥값』 『여행』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당신을 찾아서』, 『흔들리지 않는 갈대』 『내가 사랑하는 사람』 『수선화에게』, 『참새』, 『항아리』 『연인』 『울지 말고 꽃을 보라』,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 『당신이 없으면 내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느 별에서』

 


이 제목들을 보고 다른 독자들은 얼마나 생각나는지 궁금하다. 나는 기억나지 않은 것보다 기억나는 것들이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곁에 있어준 느낌을 늘 가진 시인이 1973년 등단하셔서 올 해 또 다시 시집을 출간하셨다는 연혁을 처음 기억할만큼 알게 되었다.

 


머리가 뜨거울 때도 마음이 차가울 때도 몸이 아플 때도 자주 위로가 되어준 시들이 많다. 언제나 탁한 실내 공기 속에서 지쳐가다 갑자기 생각난 듯 창문을 열고 환기를 하면, 그제서야 하아~ 하고 숨이 제대로 쉬어지는 기분이 든 작품들이었다. 어쩌면 그 격렬하고도 엄중한 시기들을 시인으로 살아오면서 늘 고운 언어들을 지켜오셨는지, 참 세상이 어떤 환경이더라도 이렇듯 살아가시는 분들은 늘 있구나 싶다.

 

내가 살아 온 세상이 꼭 늘 그랬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누군가에겐 분명 세상은 간혹 더없이 잔인하고 냉혹하고 그래서 사는 일이 비루하고 지긋지긋하지만 그래도 사람을 사랑하는 일을 멈추는 일이, 뭐 하나 도움이 되겠나, 계속하자, 라고 늘 지치지 않고 얘기를 들려 주는 시인이 정호승 시인이다. 좀 더 젊은 날에는 건조해지고 사나워진 마음 사이에 콕, 콱, 박히는 느낌으로 만나게 되는 시들도 있었다. 늘 따스했지만 아픈 마음에 젊은 기운에 간혹 반감이 들고 말이 되는 소리가 아니다,라는 마음이 슬며시 들기도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나 읽어 보면 글자가 아니라 시인의 목소리가 직접 전해지는 기분이 들면서 비로소 공감하는 부분이 생기기도 했다. 이 수많은 오독과 저항과 수용의 반복 속에서도 나는 늘 정호승 시인의 따뜻하고 다정한 느낌만은 잃지 않았다. 사랑과 연민이 가득하다. 실내 온도와 상관없이 간혹 한기가 드는 삶에서 그것이 참 큰 위안이다.

 

 


당신을 찾아서 정호승

 

 

잘린 내 머리를 두 손에 받쳐 들고

먼 산을 바라보며 걸어간다

만나고 싶었으나 평생 만날 수 없었던

당신을 향해

잘린 머리를 들고 다닌 성인들처럼

걸어가다가 쓰러진다

따스하다

그래도 봄은 왔구나

먼 산에 꽃은 또 피는데

도대체 당신은 어디에 있는가

진달래를 물고 나는 새들에게 있는가

어떤 성인은 들고 가던 자기 머리를

강물에 깨끗이 씻기도 했지만

나는 강가에 다다르지도 못하고

영원히 쓰러져 잠이 든다

평생 당신을 찾아다녔으나 찾지 못하고

나뒹구는 내 머리를

땅바닥에 그대로 두고

 

 

 

나는 지금까지 시를 통해 인간으로서 가치 있는 삶을 살려고 노력해왔으나 과연 가치 있는 삶을 살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내 시를 필요로 하고 영혼의 양식으로 삼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버린 적은 없다.

 

이 시집은 불가해한 인간과 인생을 이해할 수 있는 두가지 요소, 즉 사랑과 고통의 본질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과정 속에서 쓰인 시집이다. 이번 시집을 준비하는 동안 “사랑 없는 고통은 있어도 고통 없는 사랑은 없다”는 김수환 추기경님의 말씀을 내내 잊지 않았다. 비록 설화이지만 참수당한 자신의 머리를 두 손에 들고 걸어간 생드니 성인의 사랑과 고통 또한 잊지 않았다.

 

(…)

 

돌아가신 부모님에게, 나의 또다른 나인 아내에게, 무엇보다도 나의 당신인 절대자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

 

2020년 1월

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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