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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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서양인들의 관점에서 원주민들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그들의 식인 행위를 비난하는 일이 있지만 실상 연구 자료를 보면, 그들의 식인은 세상을 떠난 이들을 간직하고 기억하려는 동기로 행해진 것이지 단순히 약자나 적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더 잔인한 보복의 일환으로 신체를 훼손하려는 동기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 반면 근대 이후 본격적으로 타민족과 타국인들에 대한 극렬한 공격을 자행한 서양인들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카니발리즘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 역사 속의 일만이 아니라 현대에 와서도 그러한 대형 학살은 그 규모를 점점 더 키워나가고 있으며 비열하게도 대항할 힘이 없는 여성과 노약자 어린 아이들에게 집중되고 있다.

 

더 나아가 실제 사람의 몸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점을 빼면 더할 수 없이 고통스럽게 타인을 공격하고 사망에 이르게 하고 있으며, 특히 한국 사회에서도 낯설지 않게 된 온라인 공격의 양상은 잔혹하고 교묘하고 끝이 없다는 점에서 규모면에서 비교 불가의 폭력적인 형태를 띤다. 가짜뉴스와 댓글, 힘이 있는 자들은 제도와 경제력으로 타인을 죽음으로 몰아가거나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을 주는 일이 만연하다. 역사 속 원주민들의 식인을 속편하게 비난하기 전에 서로의 마음을 난도질하는 행위와 현상을 더욱 심각하게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통해 처음 접해 본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의 작품 [태고의 시간들]을 읽으며 이런 역사 속에서 고통 받고 죽임당하고 그 억울함조차 기록되지 않은 이들, 특히 조직적이고 제도적인 대규모 폭력인 전쟁의 참화 속에서 살아가야 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만났고 다시 겹쳐서 생각해보는 계기를 가졌다.

 

남자보다 여자가,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남편보다 아내가 더 빨리 죽는 시절이었다. 여자는 인류가 은밀히 고여 있는 그릇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어린 새가 알을 깨고 나오듯 아이들은 여자들에게서 새 생명을 얻었다. 그런 다음 깨진 알은 스스로 붙어 다시 고유의 형태를 회복해야만 했다. 여자가 강할수록 더 많은 아이를 낳았고, 그로 인해 여자는 조금씩 약해졌다. 65-66

 

땅바닥에 누워 있던 사람 하나가 벌떡 일어나더니 강 쪽으로 달려가려 했다. 게노베파는 그녀가 미시아와 동갑내기 친구이자 셴베르트네 식구인 라헬라임을 알아챘다. 품에는 갓난아기가 안겨 있었다. 군인 한 명이 무릎을 꿇더니 침착하게 그녀를 조준했다. 라헬라는 한동안 비틀거리다가 쓰러졌다. 군인이 달려가 그녀를 발로 밀어서 돌아 눕히는 것을 게노베파는 보았다. 군인은 아기를 싼 새하얀 포대기를 향해 총을 한 방 더 쏘고는 트럭으로 돌아갔다. 167

 

무지하여 알지 못했던 20세기 폴란드의 역사를 배웠고, 개개인의 조그마한 목소리들을 들었다. 84편의 조각난 글들이 역사의 연대기 속에서 어떻게 비극적으로 잊혔는지, 그들의 삶은 왜 복원되고 의미를 찾아야 하는지도 무겁게 느꼈다.

 

크워스카는 무덤을 덮은 흙을 오랫동안 쓰다듬었다. 마침내 고개를 들자 주위의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이제 세상은 서로 나란히 존재하는 물체와 사물, 현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크워스카의 눈에 비친 세상은 하나의 덩어리였다. 25

 

세상이 앞으로 나아갈수록, 생을 찬미할수록, 생과 더욱 강렬하게 연결될수록 죽은 자들의 시간은 더욱 혼잡해졌고, 공동묘지는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죽은 자들은 이곳에 와서야 ‘삶이 끝난 후’에 대해 인식하게 되고, 자신들이 지금까지 주어진 시간을 허비했음을 깨닫게 된다. 죽고 난 뒤에 비로소 생의 비밀을 발견하게 되지만, 그 발견은 헛된 것이었다. 264

 

익숙하지 않은 구성의 조각들을 상상력만으로 구체적이고 섬세하게 표현한 작가의 문학적 여량이 비현실적일 만큼 대단하다. 다큐와 같은 역사적 시간과 인간의 일들을 신화와 신의 시간으로 이끌어가는 전개가 경이와 감탄을 그치지 못하게 한다. 시간을 의미한다고 짐작했던 ‘태고’는 공간적 배경이고 개인과 마을공동체에서 흐르기 시작한 시간은 인류 전반으로 영원으로 이른다.

 

태고(太古)는 우주의 중심에 놓인 작은 마을이다. 1

 

“여기가 태고의 경계야. 여기에서 태고가 끝나. 더 가봐도 아무것도 없어.” 중략. 그는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서더니 루타가 경계라고 말한 그곳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멈춰 섰다. 왜 그런지 자신도 알지 못했다. 뭔가 이상했다. 두 손을 앞으로 내밀자 손가락 끝이 사라졌다. 중략. “걱정 마, 이지도르. 우리에게 다른 세상은 필요 없잖아.” 147-149

 

허구와 현실의 구분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더 이상 구분할 필요도 의미도 없어지는 심정에 이르러서야 84편의 이야기들이 다시 순환하며 들리는 깨달음이 왔다. 바로 이래서 역사란 그리고 이야기란 끝없이 반복되고 회자되어 고전이 되고 보고가 된다는 것이라는 생각이 더 선명해졌다.

 

인간이 처음 나타나자 신은 계시를 경험한다. 그리고 처음으로 밤과 낮을 가르는 가녀린 선을, 밝음이 어둠이 되고 어둠이 밝음이 되는 그 미세한 경계를 명명하게 된다. 그때부터 신은 인간의 눈으로 밝음이 어둠이 되고 어둠이 밝음이 되는 그 미세한 경계를 명명하게 된다. 서로 다른 수천 개의 얼굴을 보게 되고, 가면과 다름없는 그 얼굴을 마치 배우처럼 썼다 벗었다 하면서 그는 자기 안에서 모순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거울 속에 비친 상은 현실이 되었고, 현실이 상 속에 투영되었다. 113

 

이토록 짤막한 이야기들 속에 인류의 공통경험의 서사가 촘촘하게 엮여서 공존한다. 이야기가 멈추지 않고 지속되고 되풀이되는 것은 독자로서는 반가운 일이나, 한편 소멸되지 않고 변형되어 반복되는 전쟁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인간은 도대체 왜 전쟁을 멈추지 못하는가, 하는 오래 묵은 답답하기 그지없는 질문이 마음속에 다시 떠오른다. ‘진화’의 정의도 여전히 분분하지만 도대체 언제쯤이면 이런 저급한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는 것에 인류 전체의 공감대가 이루어질까 여전히 희망보다 절망이 더 가깝다.

 

누군가를 죽인다는 건 움직일 수 있는 권리를 빼앗는다는 뜻이다. 삶이란 결국 움직임이니까. 죽임을 당한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인간은 몸이다. 그리고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것들의 시작과 끝은 몸 안에 있다. 212

 

“다 잘될 거예요. 세상이 전과 많이 달라졌잖아요. 더 커지고, 더 나아지고, 더 밝아졌으니까요. 예방주사도 생겼고, 전쟁도 끝났고, 사람들의 수명도 늘어났고……. 안 그래요?” 미시아는 유리잔에 가라앉은 찌꺼기를 들여다보면서 천천히 옆으로 고개를 저었다. 321

 

다른 이들이 저마다 살아오는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그 시간들을 읽을 때마다 지금 나의 시간은 어디인가, 나는 언제쯤 경계를 넘었고 절정에 도달한 적은 있었으며 지금은 아래로 아래로 걸음을 내딛고 있는 중인가, 그래서 결국 모든 인간은 죽는다거나 우리는 모두 필멸의 존재란 것을 죽음에 이르러 확신하는 것이 종착지인가, 그렇다면 왜, 이토록, 노력을 거듭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것인가, 이런 기운 빠지고 허무한 생각들이 차오른다.

 

시간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98

 

그의 인생에서 정오의 시각은 이미 지났음을, 그리하여 이제부터는 은밀하게, 서서히, 자신도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땅거미가 내려앉으리라는 것을. 249

 

그럼에도 내가 그리고 인간이 오늘을 있는 힘을 대해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그래도 미래에 대한 일말의 여지를 놓아버리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악으로 악행으로 넘쳐나는 듯해 보이는 세상이지만, 실제로 괄목할만한 개선이 이루어질지 그 실현 여부도 결국 알지 못하고 소멸될지도 모르지만, 분명 굳건히 버티고 한 걸음씩 힘겹게 내딛으며 이런 세상에서 견디며 살아내고자 하는 이들이 더 많다. 그래서 나는 종종 아이들에게도 괜찮아질 거다, 잘 될 거다라고 진심을 다해 위로와 격려의 말을 전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모든 노력들이 아무리 미약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그녀의 인생처럼 평범하지만, 그 속에는 어둠과 슬픔이 깃들어 있다고 가족들은 생각했다. 세상은 인간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이 함께 숨을 수 있는 껍데기를 찾아내서, 그 안에서 자유로워질 때까지 버텨내는 것이다. 345-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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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1페이지, 세상에서 가장 짧은 교양 수업 365 1일 1페이지 시리즈
데이비드 키더.노아 D. 오펜하임 지음, 허성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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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과 철학과 환경학을 전공했고 문학이라면 아동문고부터 꾸준한 팬이고 아마추어 취미 수준의 피아노 첼로 연주를 좋아라하며 살고 있다. 전공과목들을 공부하는 학생일 때는 물론 남들처럼 소위 1차 서적들을 공들여 힘들여 읽었지만, 자연과학과 인문학과 구체적인 정책으로 제공되지 않는 환경학을 직접 활용하지 않는 사회생활과 직장 생활을 하며 그런 방식의 독서들을 할 수 있는 사치스러운 기회는 점점 사라졌다. 어느 해 대학원 방학 시절 지도교수님이 <칸트의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를 함께 읽어 보자 추천하셨는데, 그 이유가 학교를 벗어나서 이 책을 읽고 토론하는 기회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고, 그 점이 안타까워 꼭 추천하고 싶은 도서이니 이 참에 방학이지만 시간을 마련하자 하신 제안이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칸트를 읽는 독서모임>을 새롭게 만들지 않는다면 과연 찾을 수 있을까 싶다. 일단 간단한 인터넷 검색으로는 발견할 수 없었다.

 

이제는 매일 더욱 수동적인 방식으로 일상이 바뀌고 있어서,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일상의 평온함이 제발 부디 깨지지 않는 것이 되었고, 서글프게도 그런 일상에 체력의 대부분이 투입된다. 다시 본격적이고 집중적인 공부나 독서가 가능한 날이 다시 올까, 이미 노안으로 눈도 건조하고 침침하다. 이러다 내 노후는 오디오북에 의지하는 모습이 될 거란 생각도 가끔 한다. 게다가 예전에 몸과 마음을 바쳐 공부했던 내용들도 점점 흐려진다. 복기를 하지 않으니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아쉽고 허전한 기분은 어쩔 수 없다.

 

인문학이든 다른 분야든 ‘다이제스트’ 판으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고 여전히 생각하지만, 구성에서 분야까지 최대한 꾸준히 독서하고 관심의 폭을 넓힐 수 있게 고심한 이 책의 목록을 보며 반가운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미 읽은 내용들이라면 상기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고, 몰랐던 내용이라면 마침내 알게 되는 것이고, 흥미로운 내용이라면 아마 언젠가 해당도서를 찾아 읽게 될 수도 있는 일이다.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쉬지 말고 읽어야 하는 상당히 엄격한 구성이다. 공부란 매일 빠지지 말고 하란 뜻인가 보다.^^ 한편 구성 상 순서에 전혀 상관없이 읽을 수 있는 내용이다. 조그맣고 귀여운 체크박스도 있다.

 

첫 번째 시도에서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내용은 <인지부조화>였다. 1957년 스탠포드대학교의 사회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의 [인지 부조화 이론]이란 저서의 소개글이다.

 

우리는 과학자들이 인지라고 부르는 다양한 믿음과 개념과 생각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인지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지 않다. 중략. 그러나 생각이나 행동들이 서로 관련되어 있을 때 우리는 그것들이 일관되어야 한다고 절실히 느낀다. 만일 일관되지 않고 모순이 생긴다면 정신이 견딜 수 없는 부조화 상태에 이른다. 정신이 다시 평형상태를 회복하도록 하기 위해 상충되는 생각이나 행동은 바뀌어야 한다. 대개 행동보다 생각을 바꾸는 것이 쉽기 때문에 우리는 아마 마음가짐을 바꿀 것이다. 중략.

 

담배 피우는 사람은 담배가 건강에 해롭다는 말을 들을 때 인지 부조화를 겪는다. 한 가지 해결책은 담배를 끊는 것이다. 그러나 행동을 바꾸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그 흡연자는 인지 부조화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담배에 대한 생각을 바꿀 공산이 크다. 예를 들어 긴장 완화나 체중 감소 같은 담배의 긍정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기로 마음먹을 것이다.

 

신입생 신고식은 인지 부조화 원리에서 작용한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첫 신고식이 가혹할수록 그 집단의 일원이 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는 신입생이 더 많았다. 사회심리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노력 정당화 패러다임’이라 부른다.

 

페스팅거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돈을 받고 거짓말을 할 경우 자신이 한 거짓말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돈을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거짓말을 할 경우 종종 스스로 그 말을 믿는다. 돈을 받는다는 정당화 없이 거짓말을 하면 인지적 부조화를 겪기 때문에 자신이 한 거짓말을 믿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175

 

‘교양’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는 다양하겠지만, 나는 정보나 지식의 양이 아니라 ‘생각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생각하는 방식이 그 틀을 채우는 지식이라는 내용 없이 자극을 받아 상정하고 폭넓어질 리는 만무하다. 그러니 가능하다면 짧은 시간을 마련하는 수고를 들여 가능하다면 다양한 분아의 지식을 읽고 익히는 일을 꾸준히 하는 일은 종합적 판단능력을 키우는 목표에 필수적인 과정일 것이다.

​적어도 이 책에는 365가지 분야의 지식 내용들이 소개되어 있다. 선별을 하는 수고에서 한 단계 나아갈 수 있으니 한편 안심이 되는 일이다. 많은 독자들이 재미와 결실을 모두 맛보고 즐기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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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 알고 싶다 : 낭만살롱 편 - 고독하지만 자유롭게 클래식이 알고 싶다
안인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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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와 함께 보낸 올 가을 주말은 올해 최고의 휴식 시간이었다. 음악은 삶과 함께 태어나고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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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다, 개정판 현대 예술의 거장
피에르 아술린 지음, 정재곤 옮김 / 을유문화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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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매그넘 사진전에 꼬맹이를 데리고 함께 갔던 기억이 다시 떠올라 마음이 행복해집니다. 천천히 감상하고 이동하며 사진이 아니라 역사 속에 푹 담겼다 빠져 나온 기분이었습니다. 오랫만에 예전 도록을 다시 넘겨 봐야 겠습니다. 반가운 책과 사진전의 건승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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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바쁜씨와 로봇 고래책빵 그림동화 9
조희양 지음, 임종목 그림 / 고래책빵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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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0년 손바닥으로 배터리 충전, 채소로 만든 자동차, 햇빛 먹고 자라는 초록 소 등 인상적인 생명공학 소식으로 시작하는 내용이라 아이보다 내가 더 흥미가 솟았다. 어린 시절 기대대로라면 지금쯤 자동차를 하늘을 붕붕 날아다녀야 하고 해저도 붕붕 다녀야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2040년이 그리 먼 미래는 아니지만 여전히 배터리와 자동차를 이용하고 소들이 자라는구나하고 혼자 상상해본다. 예전 인간도 광합성을 할 수 있으면 세상이 얼마나 평화로울까 하는 생각을 해봤는데, 햇빛을 먹고 자라는 초록소! 피부만 초록인지가 뜬금없이 궁금하다. 우리집 꼬맹이를 구슬려 배터리와 자동차와 초록소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면 재미있겠단 궁리도 든다.

 

​​한편 2040년에도 여전히 넥타이를 매고 바삐 출근하는 직장인이 등장하고 부모의 노후가 가족과 분리되어 쓸쓸하다는 것, 그리고 ‘효’의 가치가 여전히 사회에서 논쟁이 된다는 점이 살짝 마음 아픈 모습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바쁜 당신을 위해 대신 효도해줄 로봇이 발명>되는 전개로 나아간다.


최신형 로봇인 만큼 아버지를 잘 보살필 거라고 생각하니 이제야 자식 노릇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주인공 이름은 ‘참바쁜’이고 그 아들의 이름은 ‘참빠른’이다. 이름이 이들의 삶의 모습을 미리 들려주는 스포일러처럼 명맥하다. 어머니의 철학이 이겼다면 아이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다르게 사는 이야기가 되었겠지만, 애석하게도 아버지의 주장을 따라 아이의 이름이 정해지고 이후의 삶 또한 이름을 따라가게 된다.

 

“누구보다 동작 빠르게 움직여야 앞서갈 수 있어요. 우리가 이만큼 잘 사는 것도 내가 바쁘게 산 덕택이잖소. 남보다 좀 서둔다 하여 손해 볼 게 뭐 있소.”

 

2040년인데 심지어 아직 먹튀사기사건도 있다. 슬프다. 나는 확실히 미래란 무조건 좋은 방향으로 개선 될거란 믿음이 너무 강한 듯하다. 더구나 효도대리사업에서.

 

효도를 대신해 준다 해 놓고 계약금만 받고 달아난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자 옛날에는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라 했는데, 이제는 로봇만도 못한 사람이란 우스갯소리가 생겼다면 출연자들이 웃었습니다.

 

아버지에게 효도대리로봇을 사드렸던 참바쁜 씨는 아들에게서 효도대리로봇을 받게 된다. 이때가 아흔이니 적어도 50년은 지났을 때인데 두 세대에 걸쳐 살아가는 모습에 변화가 없어 이또한 쓸쓸하다. 작가가 그림동화 이야기 전개를 간결하고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하려한 구성인데 괜히 어른인 내가 나서서 이런저런 혼자만의 지적이 많다는 생각도 든다. 아이는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빠르게 집중해서 잘만 읽고 있는데.ㅎㅎ

 

마지막 장면은 참바쁜 씨가 영원하길 바라고 또 바랐던 순간이다. 함께 하는 시간, 함께 웃는 시간. 참 마음이 아리고 쓸쓸하다. 아무래도 나이 탓이다. 어린이용 그림책이 어린이만을 위한 이야기가 아닌 것은 다 아시는 바이겠지만, 이 책은 내가 느끼기에는 어른 독자들에게 더 큰 울림과 생각거리를 제공하는 주제와 분위기가 있다.

책을 읽고 가만 생각해보니 가족들이 모두 모여 시간을 들여 이야기를 진솔하게 나누는 시간은 드물다. 일상을 해결해 나가는 일에 시간과 노력을 대부분 쏟아 붓는 일로도 버거운 나날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대화는 줄어들고 있지만, 한번이라도 우리가 가족으로서 함께 만들어 가고 싶은 행복이란 어떤 모습인지 어떤 내용인지, 과정과 결론이 멋지진 않더라도 시도해 보는 일은 중요한 일일 것이다.

 

...... 지금 내가 살아가면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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