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고수
이현 지음, 김소희 그림 / 창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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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꼬맹이들과 나는 이형 작가님의 열렬한 팬이라서 고대하던 [푸른 사자 와니니 2]편을 행복하게 읽고 언제 다시 신간 소식을 들으려나 풀이 죽어 있다가, 뜻밖에! 빠른 출간 소식과 그 내용이 초능력 남매에 대한 것이란 소개 글을 보고 전체 내용을 모르면서도 다 같이 신나게 환호성을 질렀다.

 

형은이는 왼손으로 물풍선의 멱살을, 그리고 오른손으로는 기다란 막대를 잡고 있었다. 막대, 그것도 묵직한 쇠막대였다. 검은색과 노란색 줄무늬가 칠해진 쇠막대에 수박 두통은 됨직한 돌덩이가 달려있었다. 상가 뒤편 주차장 입구에 있는 주차 금지 표지판이었다. 남자 어른도 두 손으로 붙잡고 질질 끌어서 옮겨야 할 만큼 무거운 거였다. 그런데 형은이는 그걸 빗자루라도 되는 듯 가볍게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33-34

 

표지 그림을 보고 궁금했던 점이 설명이 된다. 토르 망치도 아닌 것이 사나워 보이는 저건 무얼까 궁금했는데 주차 금지 표지판!ㅎㅎ

 

처음엔 흔하고 익숙한 학교 폭력 일화가 계기인가 했는데, 유튜버인 물풍선이란 패거리 중 한 명이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 협박하는 내용이 나와서 갑자기 마음이 너무 무겁고 섬뜩했다. 불과 며칠 전 폭력적인 사적 관계로 인한 고통에 더해 온갖 인터넷상의 악플과 위협과 가해로 우울증을 겪고 끝내 세상을 버린 이가 떠올랐다. 이야기 전개와 결말과는 상관없이 이런 내용을 이야기 내용으로 웃어넘기지 말고 심각하고 무겁게 받아들이며 아이들과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전체적으로 엄청 재밌는 장편 소설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전혀 유치한 내용이 없어 즐겁게 몰입하여 읽어 나갔다. 생생할 만큼 충분히 현실적이면서도 신날만큼 충분히 환상적이다. 권선징악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면서 영웅적인 인물이나 초능력자인 주인공이 능력을 발휘해서 악을 처단하는 내용 전개는 결말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고 소재로서는 뻔하다고 느껴질지 모르지만, 그 모든 약점들을 모은 이야기들을 이토록 재미있게 감칠맛 나게 버무려서 재밌고 통쾌하다고 느낄 수 있게 한다는 점이 탁월한 작가의 탁월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색다른 점은 마블과 DC의 배경이 아닌 사랑스럽고 귀여운 대한민국의 생활 밀착형 동네 어린이 영웅 캐릭터라는 것이다. 그에 더해 설화나 전래동화의 모티브를 활용한 점도 독특하고 반가운 일이다. 솔직하게 나는 전래동화를 정말 싫어했지만 말이다. 목욕하는 걸 훔쳐보고 옷을 감추고 거짓말을 하고, 어린 자매가 죽임을 당하고, 아버지가 재혼만 하면 아이가 학대당하고, 호랑이한테 엄마는 잡아먹히고 아이들은 도망가고 어린 시절 읽을 때마다 이야기들이 하나같이 무시무시했다. 어쨌든 내 경험과는 별개로 전래동화들 중 엄청나게 힘이 센 오누이 이야기가 [전설의 고수]의 남매 스토리에 동기부여를 했다는 생각이 든다.

 

옛이야기 속 오누이 이야기는 대개 슬프게 끝납니다. 이들은 엄청난 초능력을 가졌지만 악당을 물리치지도, 영웅이 되지도 못합니다. 어른들로 인해 오누이는 무리한 내기를 하던 끝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곤 했지요. 292

 

그렇다면 [전설의 고수]의 남매는 어떤 결말을 맞이할까요? 다 읽기까지 나도 이 부분이 가장 궁금했다. 더구나 깔깔거리며 즐기기 좋은 전생과 환생이야기! 뭐랄까, 새삼스럽게 히어로물은 이런저런 중층적 문화 구조를 가진 한국형이 이야기꺼리가 젤 수다스럽고 재밌다는 새로운 발견이랄까, 싶은 감상이 들었다. 이현 작가님의 비범한 능력으로 이 모든 수다스러운 문화적 배경들이 자연스럽게!(놀랍게도ㅎㅎ) 이어지고 어우러져서 빈틈없이 탄탄한 구성을 만든다. 초반에 이 이야기 어디로 가나~ 싶은 우려가 살짝 들기도 했는데 기우였다. 초반에 충실히 깔아 주신 복선들이 깔끔하게 모두 잘 설명되면서 마무리되는 통쾌함! 어른들 마리 숙이게 하는 아이들의 엄청 귀엽고도 치밀한 추리 능력!

 

한편으로는 그러한 캐릭터 설정이 누구보다도 심각하기 그지없는 현실을 씁쓸할 만큼 잘 반영하게 되는 장치가 된다. 학교 폭력, 미세먼지, 유튜브 및 SNS 남용 혹은 부작용, 몰래카메라, 아동 유괴. 끊임없이 매스컴에 등장하지만 한 번도 제대로 근절되지 않는 문제. 그래서인지 동화 속에서라도 불의를 응징하는 모습에서 현실에선 쉽지 않은 후련한 기분이 잠시 들기도 한다. 물론 현실에서 제대로 된 예방과 처벌과 지원이 이루어지는 일이 가장 중요하고 끝까지 함께 응원하고 개선해야할 것이다. 더 이상 히어로나 영웅이 필요 없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현실 사회를 지향하도록!


마지막으로 분량이 넉넉한 장편이라 하마터면 우리 집 작은 꼬맹이는 즐겁게 완독하기 힘들 뻔도 했는데, 감사하게도 표정이 풍부하고 색채가 정감 있고 장면 묘사를 잘 보충해주는 일러스트레이션이 포함되어 감사하고 더 재미있었다. 동화책을 읽었는데 만화책을 읽은 것도 같은 신나는 기분!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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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다라 색칠 명상 - 신개정판, 세상 시름 거뜬하게 이기는 명상과 컬러링
변건영 지음 / 밥북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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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다라(Mandala)는 산스크리트어로 본질(mandal)과 소유(la)가 합쳐 이루어진 글자로, 우주의 본질을 담고 있는 안내도이자 그림을 가리킨다.


 

아이들이 아무런 조건과 제약 없이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고 색칠놀이를 하는 것을 보면 집중하는 반짝이는 눈빛들과 오므라든 입 모양도 귀엽고 눈부십니다. 명상의 기본이 곁 생각 없이 지금, 여기에 몰입하고 집중하는 것이라면, 아이들이야말로 진정한 명상 능력자들인 셈이지요. 명상을 처음 접한 것은 틱낫한 승려를 만나면서이고 덕분에 최초의 선입견을 깨고 개안을 한 소중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 경험으로 지금까지 영향과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 기회로 기복 소원과 세속적 욕망으로 끓어 넘치는 한국불교 말고도 다른 불교 형태와 방식과 내용들이 있다는 것을 배웠고 덕분에 그 세계에 대한 이해의 가장자리가 넓어지는 운 좋은 혜택도 받았습니다. 특히 티벳의 역사와 불교에 대해 완전한 무지 상태에서 새롭게 배우게 되어 가늘지만 긴 인연이 서울에서도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틱낫한 승려와의 시간들 중 소중하지 않은 한 순간이 없지만, 마지막 날 참가 지원한 다른 동료들과 함께 커다란 만다라를 함께 만들어 나간 것은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강렬하고 행복한 경험이었습니다. 초월적이고 신비로운 종교적 경험이 아니라 즐겁고 자연스럽게 배우는 색칠 명상! 도안을 처음 보았을 때는 2차원 평면 종이 위에 원과 사각형이 다소 지루하면서도 어지럽게 그려져 있네, 하는 시큰둥한 느낌이었는데, 귀가 얇고 특히나 좋아하는 이들의 말은 세뇌 수준으로 쏙쏙 알아듣는지라, 설명을 들을수록 2차원이 다차원으로 밋밋함이 복합 시공간으로 느껴지는 기분이 들었고, 함께 색칠하는 단계에서는 즐거우면서도 기분 좋게 집중할 수 있고 정답이 없으니 무한 상상력으로 마구 색깔을 난발했는데, 다 끝나고 나니 문양과 색채와 신비롭게도 어울리고 오묘하게 멋진 것도 같고 완성된 작품이 가진 위엄과 권위가 존재감이 확실해서 크게 공헌한 바도 없이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마음이 들어 잠시 우울하고 시름에 겨운 자신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세상 일이 완전히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것이 없다는 말이 실감날 만큼 운 좋게도 융의 심리학(Jungian Psychology) 과정을 들을 수 있게 되어 다시 만다라를 상기할 수 있는 기회도 만나게 되고, 현대에 이르러 정신심리의학자인 칼 구스타브 융(Carl Gustav Jung)이 만다라를 심리치료에 소개 활용한 내용을 알게 되면서 반가움과 기쁨이 더해졌습니다.

 

누구나 자신에게 가장 유용한 방편이 있게 마련인데, 제게는 만다라 색칠명상이 더 없이 즐겁고 행복한 작업이었고 기억이라, 굳이 명상수련의 방식으로 활용하자는 제안이 없이도, 더욱 자연스럽게 함께 하고자 하는 이들과 자주 하면 좋겠다 싶은 놀이입니다. 평생을 불교 신자로 차분하고 엄숙한 사찰 참선을 좋아하시는 어머니께도 좀 더 다채롭고 일상적일 수 있는 만다라 색칠명상을 권해 보았습니다. 아직 도안들이 처음 상태 그대로 모셔져 있어 언제나 처음 시도해 보시려나 궁금해 하는 매일입니다.

  ​

만다라의 철학과 역사와 의미를 학구적으로 익히고 그 내용을 풍부하게 알아야 한다는 부담과 의무감 없이 그저 다양한 도안들을 만나보고 술술 넘기며 구경하다 마음에 드는 하나가 있으면 색연필을 꺼내서 그저 색칠해 보면 어떨까 합니다. 자신을 토닥토닥 위로하는 기분으로, 잘 했어, 잔 견디고 있어, 멋져, 이렇게 가벼운 위로를 던지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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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행복과 인간관계 - 행동에 변화를 주는 강력한 힘
강영석 지음 / 지식과감성#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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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공부는 했어도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배운 바가 없다.

흔히 무슨 무슨 ‘비법’이라는 책들에서 들려주는 설득력이 강한 이론들이 아니라 수많은 스토리텔링 예화들이 있어서 일단 처세술이나 계발서의 이론을 새로 습득하는 느낌이 전혀 없고 술술 잘 읽히는 재미있는 이야기책처럼 느껴졌다. 가독성이 좋은 것에 더해 적어도 나에게는 이런 방식이 더 생생하고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밑줄 긋고 애써 외어야하는 수고가 없이 이야기 자체로 기억되는 방식이 어쩌면 더 오래 기억될 거란 기대도 장점으로 생각된다.

만남에 대한 책임은 하늘에 있고 관계에 대한 책임은 사람에게 있다는 말이 있다. 만남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만남을 통해 만들어진 인간관계를 이어나가고자 하는 노력이 더 중요한 것이다. 중략. 따라서 이 책은 인간관계에 대한 이론을 기술하려는 서적이 아니라 보다 나은 인간관계를 이루기 위한 실천적인 노력을 다루는 실제에 중점을 두었다. 9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곳은 마음속 어딘가가 아니다. 지도 위의 어딘가도 아니다. 그곳은 너와 나 사이의 공간이고 우리가 그 공간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그 공간을 더 편히 여길수록 행복도 더 커진다.” 중략. “사람이 없다면 천국도 갈 곳이 못된다”는 레바논 속담도 우리의 행복에 사람이 얼마나 필수적인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26

레바논의 문화에 무지해서 이런 속담이 있는 줄 처음 알았다. 그런 한편 사람이나 인간관계처럼 양면성이 강한 것도 없을 것이다. 사람은 행복의 필수 조건이기도 하지만, 그 행복을 망치거나 지옥을 경험하게 하는 때로는 선택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조건이기도 하다. 그냥 별 생각없이 가끔 이런 표현을 하며 살았던 것도 같은데, 흔히 하는 이야기로 “거리감이 느껴진다”거나 “멀게 느껴진다”란 말이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감을 표현하는 말이구나 새삼스레 깨닫는다. 그러고 보면, 사람 사이의 경계, 바운더리는 피부가 끝이 아니다. 내게 딱 붙어 있는 경우가 아니라도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적당한 거리, 공간의 확보가 필요하다. 아마 서로 그 거리를 유지하는 일이 관계의 필수적인 기술일 것이다.

 


우리가 전달한 말과 문자 메시지는 자기중심적 사고 속에서는 자명한 것이지만,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지극히 애매하게 여겨지기 마련이다. 이러한 의사불통으로 인해 생겨나는 오해와 갈등에 대해 사람들은 서로 상대방의 무감각과, 배려가 없음을 탓한다. 39-40

나는 늘 의사소통에 있어 가장 정확하고 쉬운 방법이 구두든 문이든 언어를 통한 것이라고 얘기해왔고, 비언어적 소통방식을 어려워했으며 그런 감각이 확연히 떨어지는 편이다. 소위 말하는 눈치는 절망적일 정도로 없다. 그런 면에서 저자가 말과 문자가 자기중심적 사고 속에서만 자명한 것이라고 지적하는 구절을 읽고 갈등이 생긴다. 그러고 보니 살면서 나는 충분히 설명한 것 같은데 왜 이해를 못하는지 아니면 이미 전에 대화를 나눈 것인데 왜 기억을 못하고 엉뚱한 얘기를 하냐고 반발했던 일들이 떠오른다. 어쨌든 지금 와 생각해보면 역시 다소 폭력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었으며 이해심이 부족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말이 있다. 중략. 세속적인 안목으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 보이는 사물이 오히려 진정한 도움을 준다는 뜻의 무용지용이라는 말도 있다. 중략. 윤구병은 잡초로 보이는 풀들을 잔뜩 뽑아버렸는데 알고 보니 그 잡초가 제각기 이름을 지닌 약초이고 반찬거리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 존재 이유가 없는 풀은 없다는 결론을 얻고서 [잡초는 없다]는 책을 출판했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아무 데도 쓸모없어 버림받거나 업신여김을 받아도 마땅하거나 괜찮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70

나무와 잡초의 세상에서는 다른 판단 기준이 없어서 표현 그대로의 역할을 하는 것인 사실이지만,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인간의 노동력과 가치에 대한 효용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확실하고도 냉정해서 마음이 무겁다. 실은 측정 가능한 모든 요소가 대상 인간의 가치 판단 기준이 된다. 연령, 외모, 성별, 국적, 인종, 결혼 유무, 가족관계 등등. 이 모든 것들이 또한 원칙적으로는 차별받지 않아야할 차별금지조항들이지만 현실에서는 모든 경우에 있어 정량적으로 계산되고 환산되는 판단기준들이다. 씁쓸하고 쓸쓸하다. 그래서 인간 세상의 모든 갈등과 분쟁이 끊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SNS에서 널리 퍼진 ‘명절 잔소리 메뉴판’에는 ‘대학 어디 지원할 거니?’ 5만원, ‘살 좀 빼야 인물이 살겠다’ 10만 원, ‘취업은 언제 할 거니?’ 20만 원, ‘이제 결혼해야지’ 30만 원, ‘아이는 언제 가질 거냐?’ 50만 원이라고 적혀 있다. 또 명절 잔소리 메뉴판의 맨 아래에는 “걱정하는 마음은 유료로 판매하고 있으니, 구입 후에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75-76

내용은 대략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인터넷상에서 본 적은 없는데, 마치 끝나지 않는 영원한 스트레스 극강 질문들인 것 같다. 이러한 배려 없는 질문 공세들이 ‘덕담과 애정과 걱정’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다니 그 고착이 더 무시무시하다. 어렸을 적 생각한대로 훌륭한 어른이 되지 못한 것처럼 나이가 들어갈수록 어떤 모습이 될지 스스로도 장담을 할 수 없는 처지이긴 하나, 새삼 어른 노릇 부모 노릇이 어렵다는 생각이다. 의도가 선하든 아니든 상대방이 받아들이길 불편해하면 적어도 그만 해야 하는 것이라는 점을 가능한 오래 잊지 말아야겠다.

 


“옷차림을 보고 판단하는 이들에게 이 거지 같은 가우디가 이런 곳에서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게 하라. 그리고 난 가난한 사람들 곁에 있다가 죽는 게 낫다.” 81

전혀 몰랐던 내용이다. 스페인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가 남루한 차림으로 거리에 나섰다 전차에 치였는데, 운전수가 노숙인이라 판단해 구호 조치를 취하지 않고 뺑소니를 쳤고, 역시 노숙인으로 생각한 택시들의 잇단 승차 거부로 가까스로 병원에 갔으나 병원 2곳에서 진료 거부를 당했고 결국 빈민구제를 위한 무상병원에 방치된 이야기이다. 신분이 증명되어 친구들과 친적들이 달려 와 병원을 옮기려 했으나 위와 같은 말을 남기고 사망했다고 한다. 1926년의 일이지만 참으로 야만스럽고 잔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유일무이하게 아름답고 독특한 건축을 설계했고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아니라면 인류의 보고로서 영원히 보전될 작품들의 건축가가 인간 자체보다 옷차림이 더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는 바람에 이렇게 세상을 떠나다니. 지금은 신분증이나 지문조회를 할 수 있으니  혹은 그런 천박한 판단은 하지 않을 정도로 인류의 정신도덕윤리문화가 진화해서 덜 비극적일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시간은 단지 지금뿐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당신과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당신과 함께 있는 사람 외에, 다른 사람과는 그 어떤 일도 도모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당신과 함께 있는 그 사람에게 선행을 베푸는 일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난 유일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85

이 책의 목차를 보고 무척이나 궁금했던 톨스토이의 <세 가지 질문>의 내용이다. 당연한 말인 듯도 싶지만 무언인가 머릿속이 복잡하기도 하다. ‘지금’에만 집중하고자 하는 이들이 집중할 줄 말라서 혹은 하기 싫어서라기보다 할 수 없게 만드는 구체적인 사안들이 분명히 있지 않나 싶은 생각 때문이다. 그래도 언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에 좀 더 충실한 선택을 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비록 모두 다 그렇게 할 수도 없고 그런 선택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유일한 방법도 아니겠지만 말이다.

우리가 생존을 위해 음식이 필요한 것처럼, 사람들의 고유한 인성과 자아는 존중과 인정이라는 밥을 먹어야 건강한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88

존중과 인정은 관계가 미리 성립해야 가능한 행위 작용이므로 존중과 인정에 관한 의지와 욕망이 구체화되고 확립되기까지의 인간관계에서의 태도와 경험이 전적으로 중요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오래 전 자주 논의에서 등장한 ‘인정투쟁’이 가물가물 기억이 나려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누군가의 미소가 촉발시키는 강력한 감정적 경험은 뇌의 생화학 작용을 변화시킨다.” 웃으면 혈압이 떨어지고 스트레스가 줄어들며, 뇌에서는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 세로토닌, 엔도르핀 등의 호르몬 분비가 촉진되는 것을 의미한다. 93

진화의 과정이 참 대단하고 효율적이고 신비로운 것이, 바로 이렇게 인간의 뇌에 직접적인 화학반응명령을 내리는 가장 강력한 장면이 갓난쟁이, 아기들의 미소와 웃음이다. 다른 종과는 달리 출생 후 아무런 생존 능력이 없어서 그야말로 전적으로 타인에게 생존을 의탁해야하는 인간의 아이들은 그래서 아마 이토록 강력한 생화학 기술을 진화시켰을 것이다. 무장해제와 동시에 죽도록 사랑해주고 필요한 것은 다해 주리라는 마음이 윗 세대들의 뇌에서 무럭무럭 피어나게 만드는 명령!

...... 미소는 받는 사람을 풍요롭게 하지만 주는 사람을 가난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미소가 없어도 될 정도로 부유한 사람은 없고, 미소가 주는 혜택을 누리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 역시 없습니다...... 그러나 미소는 돈으로 살 수 없고, 구걸할 수도 없고, 빌릴 수도 없으며 훔칠 수도 없습니다. 미소는 누군가에게 주기 전까지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펜하임 콜린스 회사의 광고문> 94

일부는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과연 돈으로 살 수 없다는 점은, 사실이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갖가지 감정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이들이 필요로 하는, 혹은 대가도 없이 위계적 관계 속에서 소위 ‘어른들’에게 책잡히지 않기 위해 필요한 미소들이 수두룩하다. 그래서 여전히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행복과 인간관계>에 대한 내 생각은 복잡하고 어렵고 어수선하다. 미소 혹은 웃음은 인간의 중요한 능력이자 판별 지표임에는 분명한데, 어쨌든 현실 사회에서는 이 또한 여러 권력 관계 속에서 복잡한 역할과 표정을 지니고 있는 것도 분명하다.

전체적으로 읽어나가며 생각 속에서 이어나가고 파악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나 보다. 단락단락 생각이 멈추고 만다. 언제나 손쉬운 날씨와 컨디션 탓을 해본다. 그래도 책을 잘못 읽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것이 처음에 장점으로 밝혔듯이 에피소드들의 패치워크처럼 한 권의 책이 엮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미난 이야기들을 여러 말솜씨 좋은 사람들에게 느긋하고 편안히 들은 기분이 든다.

잘 아는 것도 같은데 어느새 진지하게 생각해본 지 오래인 인간관계, ‘무엇이다’라고 제대로 한번 명쾌하게 알아낸 적도 없지만 그렇게 되길 원했었고, 그렇게 되리라 근거 없이 기대했었고, 역시 어느새 인가 인생의 옵션에서 당연하다는 듯이 빠져버린 ‘행복’.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이전에는 구체적으로 엮어 본 적이 없는 인간관계와 행복을 아주 구체적으로 짝지을 수 있는 상황들을 한번 정리해봐야겠다는 의지가 조금 생긴다. 내가 아는, 내게 중요한, 내게 유의미한 인간관계들과 구체적 행위를 통해 가능한 행복감! 어쩐지 작은 보물찾기를 하는 것처럼 설레고 꽤나 수확이 좋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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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의 아이
신카이 마코토 지음, 민경욱 옮김 / 대원씨아이(단행본)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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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는 참 신기하다.

​그저 하늘의 상태일 뿐인데 이렇게나 사람들의 감정이 움직이다니.”

 

영화 포스터와 책 표지가 똑같은 작품이 있었나. 기억은 정확하지 않지만 어쨌든 정말 예쁘다.

 

속도감 있는 짧은 대사, 표정, 배경톤, 목소리톤, 감정톤, 리듬, 효과음, BGM 등의 모든 요소들이 사라지고 문자 그대로가 전달되는 스토리로서 남은 부분이 독자 각각의 상상력으로 채워진다. 무엇보다 ‘맑음 소녀’를 상상하기 위해서는 환상적이고 동화적인 상상 능력이 필요하다. 대사들은 짧지만 섬세한 독자들은 충분히 대사 속에 감춰진 인물들의 심리와 관계의 미묘한 차이를 느낄 수 있을 것이며 집중할수록 장면들이 상상 속에서 영상과 음향을 구비하고 아름답게 완성되는 유쾌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영상이 더 강한 인상을 주는 매체이긴 하지만, 영상을 본 유무가 원작소설을 즐겁게 경험하는 일에 아무런 제약도 조건도 되지 않는다. 사랑스럽고 순수하고 솔직한 소년이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지가 가장 궁금했고 흔치 않아 감동적이고 경이로웠던 [날씨의 아이]이다.

 

-요컨대 나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아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도 정말 한심했다. 어렴풋하게나마 그런 자신의 한심함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그 소년이 나타났다. 엄청나게 천진난만하고 무방비하게, 하나하나의 말과 사건, 풍경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감동하면서. 갑작스레 동아리 후배를 돌보라는 명령을 받은 듯한, 귀찮은 마음과 호기심, 약간의 뿌듯함. 나츠미 씨, 나츠미 씨! 지금도 바이크 뒤에 앉아 내 이름을 불러대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그런 기묘한 따뜻함과 새로운 뭔가가 시작된 것만 같은 설렘을 느끼고 있었다. 바이크가 가르는 비 섞인 바람이 오랜만에 흔쾌했다. 67

 

“봐, 이제부터 맑아질 거야.”

“뭐?” 중략. 소녀가 살며시 빛나고 있었다. 아니, 그게 아니다. 옅은 빛이 소녀를 비추고 있었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소녀의 갈래머리를 훅 들어올렸다. 점차 빛이 강해졌다. 소녀의 피부와 머리카락이 빛을 받아 금색으로 빛났다. 설마. 91

 

히나 씨는 정말 즐거운 듯 깔깔대고 웃었다.

“너는 정말 진지하다니까.”

또 놀림당했다.

“그래서 고맙다고, 호다카.”

.쿵! 머리 위에서 소리가 나, 히나 씨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주 큰 빛의 꽃이 반짝이다가 흩어졌다.

“……아름답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옆얼굴에서 나는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날씨는 참 신기하다, 나는 생각했다. 그저 하늘의 상태일 뿐인데 이렇게나 사람들의 감정이 움직이다니.

히나 씨에게 마음이 움직이고 말았다. 145

 

[날씨의 아이]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만의 감수성을 그대로 전해주는 신비로운, 초자연적인 현상과 풋풋한 남녀 주인공들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 아직 청소년기를 벗어나지 않는 주인공들, 그런 만큼 아직 완벽하게 성장하지 않은 그들은 그 나이에 찾아오는 성장통을 앓게 되고 그런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는 자그마하고 아름답고 순수하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 호다카는 살고 있던 섬마을에서 빠져나와 무작정 도쿄로 향하며 배에 올라탄다. 특별한 목적이 있을 거란 예상과는 달리 사실은 그냥 가출한 것이어서 살짝 웃기네 하며 당황하기는 했지만, 그 행해 도중 배에서 위험한 상황에 우연찮은 도움을 받게 되고 그 남자 스가에게 호다카가 밥을 사면서 작은 규모의 편집 프로덕션 회사에 취직까지 하게 된다. 호다카의 업무 분야가 도시 괴담, 우주인설 같은 다소 황당한 주제들인데, 나름 취재를 해서 잡지를 만드는 일이라 그 와중에 ‘100% 맑음 소녀’에 대해 듣는다. ‘맑음 소녀’뿐 아니라 ‘비 소녀’도 있다는 취재 대상자의 말에 처음에는 어이없어 하지만 알고도 오락거리로 그런 이야기를 제공하는 것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 배운 호다카는 마침 자신에게 호의를 보여 준 소녀가 바로 그 실재하는 ‘맑음 소녀’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일단 이야기들이 흥미롭고 재미있다. 흔히 접할 수 있는 일상과 가까운 이야기들은 아니다. 그래서 좋은 한편, 이런 이야기들이야말로 영상 효과가 ‘무척이나 적절하게 효과적’일 거란 생각이 자꾸만 비집고 들어온다. 단, 이 대목에서 사실 가장 중요한 점은 맑은 날씨를 위해 누군가의 희생이 있다는 것! 우리가 자부심을 가지는 것과는 별도로 인간의 인내심과 생존능력은 별로 대단하지 않아서 삼일만 물을 못 마셔도 폭동이 일어나는데, 3년간 끊임없이 비가 내리는 환경이라면, 그리고 그 비를 그치게 할 확실한 방법이 있는데, 내 희생이 아니라 타인의 희생이 필요한 경우라면, 품위와 품격과 이성과 도덕과 윤리는 증발하듯 사라질 수도 있을 것이고, 그것이 옛 이야기 속에서만 등장하는 예화가 아니라는 점이 서글프고 두렵다.

 

원작 소설을 먼저 읽고 영화화된 것을 축하하며 기뻐하며 본 순서가 아니라서인지, 이 작품에 대한 나의 독자적인 상상력이 만들어낸 장면들보다 이미 습득한 애니메이션 장면들이 이렇게 저렇게 떠오르고 끼어들어 마치 원작이 애니메이션의 컬러북인 것 같은 전도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혹은 책을 읽다가 일러스트레이션 북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A가 B보다 낫네 못하네 이런 결론은 아니다. 그냥 다르다! 그리고 각각의 경험에서 받는 감상은 정서의 길이에 따라 단면적에 따라 경도에 따라 다른 모든 요건들에 따라 다를 것이다. 덕분에 몇 배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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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iesis 2019-11-28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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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맛있는 게 이렇게나 많다니 - 카페, 레스토랑, 빵집, 디저트까지 세계의 미식을 만나다
장완정 지음 / 밥북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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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모로 대단하신 저자!

60여 개국을 방문하고 열 두 나라를 엄선하여 만든 미식과 문화 이야기.

 

책을 펼치자 첫 번째 내용으로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뉴욕 카페> 이야기가 나와서 눈물이 왈칵 고인다(추억에 더해진 노화와 호르몬의 친화 과정일까).

 

“비 오네요.” “비 그쳤네요.” “비 또 오네요.” 매일 이어지는 예의 바르고 무의미한 대화에 신물이 나고, 한 겨울에도 파아랗게 생존하는 잔디의 생경함과 신선함도 더 이상 위로가 되지 않는 영국의 우울한 일상에 진절머리가 나는 겨울이었다. 첫 해에는 영국인들이 하루에 섭취하는 알코올과 초콜릿 양에 놀라 이 중독자들 뭔가 싶었는데, 날씨에 관한 한 못지않게 우울하고 지루하고 한기를 뿜으면서도 건물 내부는 건조한 참 불편한 기후에 살다 보면, 어느새 초콜릿과 알코올에 손을 뻗게 된다(확인한 공식 연구 자료나 근거는 없지만 기후 덕에 문학과 음악이 광범위하게 계발되었을 거란 의심이...... 자주 밖에 나가서 뭘 할 수가 없다. 운이 나쁘면 갑작스레 쏟아지는 주먹만 한 우박에 맞아 사망할 수도...... 우산도 비바람에 서너 번 찢어 먹다 보면 어느새 더 이상 안 사고 태연하게 안 쓰게 된다. 나의 최초의 낮술도 이런 날이었다. 우박이 뭘 다 때려 부수는 소릴 들으며 3시에 이미 깜깜한 실내를 벽난로 불로 밝히고 한 잔 두 잔.....).

 

지내던 학교의 기숙사는 온갖 알러지별 선택 메뉴와 베지테리언과 비건 메뉴도 구비되어 있었고(주방 셰프의 스트레스 지수가 매일 극한까지 올랐지만 우리는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했다. 그 와중에 초청 교수 한분은 생식 다이어트를! 필수재료 베이비 코코넛을 갑자기 어디서 구하냐는 비명이 다이닝 홀에 울려 퍼지던......), 식재료 자체가 친환경 유기농이라 확실히 장수할 듯이 건강하고 다채로운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점점 더 우울을 더해가는 날씨를 이겨낼 만큼 위로가 될 (내 기준에서)훌륭한 맛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매일 갑갑증이 더해오는 가슴을 부여잡고 심호흡을 할 수 밖에 없는 곳을 떠나 “진짜 날씨(real weather, 뭐라 번역해야할지 솔직히 모르겠다)”가 있는 곳으로 그냥 무작정 떠나고 싶어서 구름이 스모그보다 더 무겁게 내려앉던 어느 날 부다페스트로 향했다. 한 겨울에 더 춥고 눈 많은 동유럽으로 왜 가는 거냐는 동기들과 친구들의 염려를 뒤로 하고, 이것저것 지긋지긋한 영국을 떠나 도버해협을 건너니 마음이 막 가벼워졌다.

 

급히 인터넷 예약을 한 ‘붇다’ 지역의 숙소로 가서 짐을 내리고 눈이 잔뜩 덮인 상큼하고 아름다운 거리를 총총 걸어서 ‘페스트’ 지역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체감상 백만 년 만에 겨울과 가장 어울리는 그냥 여기 머물다 세상 뜨고 싶게 설레는 장소에서 못지않게 아름답고 감동적인 식사를 했다. 그곳이 이 책의 첫 번째 이야기 부다페스트의 ‘뉴욕카페’이다. 저자가 이 카페에 들어갔을 때의 느낌을 ‘흠칫’이라고 적은 표현이 정말 흥미롭다. 내 경험은 ‘화들짝’이란 느낌에 더 가까웠지만, 공통된 점은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제어할 틈도 없이 ‘깜짝’ 놀라게 된다는 것이다. 박물관인지 전시관인지 호텔인지 카페인지 정의 내리기 어려운 장소이고 실은 이 모든 것이 종합예술처럼 복원되어 완벽하게 조화로운 장소이기도 하다. 주문을 하고 나면 마치 관람료 무료인 전시회에 초대받은 기분으로 눈에 담을 수 있는 모든 것을 감상할 수 있다. 저자가 미식만이 아니라 문화 여행의 내용을 선별해서 담아 둔 의도에 잘 맞게 이곳은 헝가리의 대표적인 케익 셀렉션과 커피를 마시는 카페이면서 19세기의 벨 에포크로 떠나는 시간여행의 플랫폼이자 종착역이다.

 

전혀 예상치 못하게 미식 여행에 영국식 애프터눈 티와 크림 티가 나와 흠칫&화들짝 놀랐다. (영국과 미식이라니, 세상에 이렇게 어색한 조합도 있나 싶지만, 맛이란 그야말로 개별적인 취향이니 이런 인식 또한 나의 개인적인 원한(?!) 탓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제일 맛있는 영국 레스토랑을 알려 달라고 하면, 나는 아직도 주저 없이 OO 타이레스토랑을 권한다.) 크림 티의 본산인 데본에서 오래 살았고 옆 동네(?!) 콘월을 들락거리며 현지조사여행(field trip)을 한 나로서는 크림티만 떠올려도 피곤과 목마름이 동반 연상되지만, 그렇다고 샌드위치와 스콘을 싫어한다는 말은 아니다. 고된 시간들에 짧은 휴식과 열량을 충실하게 제공했던 담백하고 든든한 샌드위치와 스콘 또한 지역에 따라 조리법에 따라 먹는 방법에 따라 즐겁고 행복한 훌륭한 식사이다. 크림이 먼저인지 잼이 먼저인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자신의 소소한 취향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흔한 재료이지만 아마 한국에서는 적어도 판매하지는 않을 듯한 영국식 오이 샌드위치도 한번쯤 추천하고 싶다. 생오이 향을 즐기지 않는 나로서는 빵 사이에 당당히 단일 재료로 들어간 오이의 모습에 순수하게 진심으로 놀랐지만, 특히 고령층 영국인들이 설탕 가득 티와 생오이버터 샌드위치를 어떻게 즐기게 되었는지 유래를 듣는 것도 잔잔한 재미이다.

 

다음은 소소하고 잔잔한 영국이야기와 대비되는 황홀한 프랑스 빵, 바게트 이야기이다. 워낙 지리적으로 가깝기도 하고 당시에는 물가도 훨씬 싼 터라 기회만 있으면 빠ㅎ리에서 지내고 싶었던 시절이었다. 센강 근처에 세모난 공간의 플랏(flat, 아파트?)을 임대해서 머무는 내내 매일 산책을 다녔다. 미술관을 가든, 카페 거리를 가든, 중고 서점을 가든 시간은 빠르고 아쉽게 지나갔다. 당시는 꽤 엄격한 채식주의자라서 레스토랑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곤 채소 일색의 오믈렛이 거의 유일했지만 전혀 섭섭하지도 부러울 것도 없었던 것은 바로 프렌치 브레드, 빠ㅎ리의 바게트 덕분이었다. 밀가루, 물, 이스트 소금만으로 이토록 맛있는 음식을 만들다니! ‘전통’ 바게트를 드실 기회가 없었던 분들은 제가 완전 헛소리를 한다고 하셔도 드릴 말은 없지만, 기회가 있다면 꼭 제발 반드시 ‘전통’ 바게트를 드셔 보시길 바란다. 정말 딱 이 네 가지 재료로만 구워낸 바게트인데 심지어 향기도 취할 듯 어지러울 정도로 강렬하다. 아무리 정신력이 강해도 바게트가 입에 닿는 순간부터 최초 3초 정도는 의식을 잃게 된다. 늘 간도 딱 맞게 구워져서 다른 부재료가 필요 없지만, 가끔은 실험(?!) 삼아 토마토나 치즈나 올리브를 곁들여 먹는 것도 별미이다. 세계적인 미식 국가 중 하나인 프랑스를 소개하는 부분에 저자가 왜 바게트 얘기만 끝까지 하고 마쳤는지 아무런 불만 없이 완전히 이해한다. 수상 경력이 즐비한 베이커리뿐만이 아니라 루브르 뒷골목이나 강변 중고노점상들 근처에 멈춰 서서 무심히 하나 사먹어도 하나같이 맛있던 빵! 혼자만의 뻥이 아니라 빠ㅎ리 여행을 하는 친구들에게 실험(?!)해본 결과 검증이 잘 된 사실이다. 그러니 빠ㅎ리에서 길 가다 눈에 띄는 아무 베이커리에서 빵을 주문하게 될 경우에도 두려워 마시라. 덕분에 영국에 돌아 온 후로 샌드위치를 먹을 때마다 서럽고 속상한 마음이 한동안 들었다. 물론 더욱 슬픈 일은 한국에 산재한 ‘파리바게트’의...... ‘파리크라상’의 바게트가 조금, 아주 조금 더 바게트 비슷한 맛이 난다......

 

다른 국가의 다른 맛있는 베이커리 이야기들이 내용 가득이다. 어지럽도록 맛있는 향이 가득한 빵집에서 메뉴를 고르기 직전처럼 보기에 참 행복한 글과 사진으로 채워진 책이다.

 

4장에서는 내게 참 복잡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트러플’ 이야기가 나와 열심히 읽었다. 나는 커리의 향신료를 포함해서 강렬하다고 하는 향이 포함된 음식들에 거부감이 전혀 없고 발효 청국장부터 소위 양말 악취가 난다는 치즈까지 절대 못 먹겠단 생각이 든 적이 없다. 세상에서 단 한 가지 식재료, 화이트 트러플 오일을 빼고. 대단한 미식가여서 미식 재료들을 찾아 챙겨 먹는 건 절대 아니며, 진정한 미식은 쉽고 일반적인 제철 재료로 맛있게 만들어 먹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희귀하거나 고가의 재료에 관심이 있지도 않다. 그저 경로를 정확히는 모르나, 내게 도달한 화이트 트러플과 오일, 재료가 담긴 포장과 예술적인 유리병과 속재료 중 뭐가 더 비쌀까 싶은 낯선 식재료를, 이왕 생겼으니 매뉴얼대로 가열도 하지 말고 살짝! 그 대단하다는 풍미와 향을 느껴보자 했는데...... 그토록 깊고 진하고 쾌적하고 풍미가 남다르다는 재료 앞에서 철저히 거부당했다. 비염 알러지가 있기는 하지만 급성악화로 향과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가 아니라 참을 수 없이 역했다. 생전 처음 식재료에 거부 반응을 보였다. 적어도 트러플 중독으로 파산할 일은 없다는 어쩐지 쓸쓸한 위안도 들지만 왜 이런 것인가... 궁금하기 그지없다. 이 책에 쓰인 내용으로는 의문이 해결될 것 같지가 않다. 트러플을 만나 행복한 사람들의 표정과 이야기만 가득하니 말이다. 없어도 그만이지만 알러지도 아니고 현재까지 유일하게 역해서 섭취 불가능했던, 남들은 죄다 황홀하다고 하는 식재료라 정말 진심으로 궁금하다. 트러플 버섯이 체외 분비성 물질 페로몬은 분비한다고 하는데, 인간은 탐지가 불가능하고 돼지만 강렬하게 반응한다는데, 인간과 돼지 간에 유전자나 장기 교환도 하는 마당에(인간의 의료복지를 위해 행해지는 동물실험의 잔인함과 정당성을 미화하거나 희화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어쩐지 나만 인간으로부터도 돼지로부터도 소외되는 기분에 두 배로 쓸쓸하다.

 

이렇게 우울한 이야기로 끝낼 책이 아닌데...... 최근 금전 뒷거래로 인해 권위도 신뢰도 잃어버린 미슐렝 관련 이야기는 건너뛰고 싶다 하더라도 저자가 엄선한 12나라의 달콤한 이야기들과 막강 셰프들과 진정한 장인들과 먹방만이 아니라 관련된 전통과 역사를 품어 한층 더 넓어진 유럽의 미식의 세계는 더할 수 없이 흥미롭고 감칠맛이 가득하다.

 

차오르는 침을 삼키며 책을 끝까지 읽고 나니 까마득히 잊혀졌던, 친구네 고향마을, 피치니스코에서 로마로 향하던 어느 구불구불 산길에서 만난 한산한 레스토랑에서 내어 주던 따끈한 콩스프의 충격적인 맛이 다시 떠오른다. 맛있는 콩스프 따윈 세상에 절대 존재할리 없을 거라 확신하며 산 세월을 한 번에 날려 주던, 멈추지 못하고 마셨던 한 그릇. 저자처럼 유럽에서 틈틈이 나도 이렇게 외치고 싶었던 순간들 중 하나였다. “세상에 맛있는 게 이렇게나 많다니!”

 

결국은 베이커리가 아니라 콩스프 얘기로 마무리..... 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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