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호실의 원고
카티 보니당 지음, 안은주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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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른 이들을 쳐다보고, 그들을 알아가고, 그들의 눈에 들기 위해 몰두하느라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말지. 그래서 그들과 멀어지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더 이상 알 수 없게 되고. 70

 

그런데 저는 알고 있답니다. 이 작품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그 소설은 제가 다시 길을 되찾고 좀 더 멀리까지 나아갈 수 있게 해주려고 그 해변까지 온 거예요. 때때로 서로 만날 수 밖에 없는 책과 독자가 존재하잖아요. 84

 

우연히 머문 호텔방에서 이렇게 흥미롭고 재미있는 소설의 원고가 발견되다니. 그리고 이토록 낭만적인 소재가 실화라니. 유럽에서 내가 머문 모든 곳의 서랍에는 성경이 들어있거나 텅 비어 있었다. 뭔가 억울하고 부러워 속이 살짝 상하는 기분이다. 심지어 프랑스 남쪽 해안 땅끝마을은 내가 가주 가던 영국의 땅끝(Land's end)과 명칭도 유사하다. 그리고 보니 나는 한국의 땅끝마을도 방문한 적이 있다.

 

문득 든 생각 하나, 한국에서 이런 원고가 발견되었다면 원고가 원작자를 찾아가는데 이렇게 온갖 이들을 거치며 사연이 쌓이고 세월을 보내고 결국엔 기적처럼 도착했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풀리진 않을 것 같다. 세계 누구 못지않게 남의 일이라도 도와 줄 여력이 조금만 있다면 열심히 돕고 우편제도 또한 빠르면서도 정확하고 온라인 네트워킹으로 범죄도 고발하고 추적하는 1인 탐정들과 맞먹는 재능과 호기심을 가진 한국인들이라면……. 발견된 다음날 원작자에게 연락이 닿을 수도 있겠다, 싶은 상상을 하니 그 또한 유쾌해서 웃음이 났다.

 

다행히(?) 이 일은 캐나다에서 시작하여 프랑스에서 일어난 일이라 무려 33년 동안 시간을 충분히 들여 훈훈하고 인간미 있는 사연들이 쌓일 동안 원고는 각지를 여행하게 된다. 물론 그 오랜 세월 동안 원고에 쓰인 이야기에 감동하고 원작자를 존중하는 문화를 이어가며 남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이들의 모든 참여가 사랑스럽다.

 

소설이 당신 손에 들어간 걸로 보아 아무래도 그녀의 과거의 흔적을 청산하고 살아가는 모양이군요. 만약 그녀를 다시 만난다며, 우리의 논쟁은 결코 헛되지 않았고 독서에 대한 그녀의 열정은 제게까지 전염됐다고 전해주십시오. 무엇보다 저는 독서라는 행위를 통해 바위에 붙어 있는 고둥처럼 이곳 수감자들에게 들러붙은 만성적인 우울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190

 

사방이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격리되면 그 안의 사람들은 바깥세상을 잊고 말죠. 세상에서 추방된 것처럼 느낀답니다. 이러한 단절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를 가혹하게 관찰하고,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오직 다른 사람들에게 반사되어 보이는 그림자만이 자신을 볼 수 있는 수단이 되기 때문에, 함께 있는 이들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지요. 그리고 이를 대면할 때마다 자기성찰을 하며 결점을 지닌 낙오자의 기괴한 모습을 끄집어내고 말죠. 그러니 어두운 좌절이 자신에게 내려앉지 않도록 하는 해결책은 단 한 가지입니다. 도서관에 가는 것. 236-237

 

도서관을 가는 일도 삼가야하는 일상이 된 현재, 나는 매일 무엇인가를 읽고 쓰고 있다. 며칠 되진 않았지만 오전 중에 새로운 책을 읽고 있지 않으면 오후가 되어 무척 초조해진다. 새로운 중독의 형태가 아닌가, 이런 집착이 꼭 옳은 일이 아닌 것도 같지만, 아직까지는 적어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진 않는다. 어쩌면 눈 돌릴 길 없는 불안한 현실에서 적어도 책을 들여다보는 순간은 잠시나마 다 잊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몰입도가 뛰어난 이야기를 읽고 나면 한동안 마음이 진정되고 차분해진다. 자고 일어나면 뉴스를 확인하는 버릇이 생겨서 다시 금방은 해결되지 않을 지극히 비현실적인 현 상황 속에서 불안과 우울이 차오르긴 하지만.

 

기억할 수 있는 어린 시절부터 손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들을 편지봉투들과 함께 모아 두었다. 내가 써 보낸 편지들의 행방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내가 받은 편지들을 통해 일부의 내용을 기억해 낼 수도 있다. 손글씨라는 건 확실히 실체감이 생생해서 문서 폰트로는 도저히 느껴지지 않는 상대방의 모습, 분위기, 성격 등등을 다시 떠올리게도 만든다. 오래 만나지 못한 이들은 내가 변했듯이 그들도 기억하는 그 모습은 아니겠지만.

 

시절이 이러니 염려와 그리움이 증폭되는 이들도 있다. 그 중 주소지가 아직도 일치하는 이들에게 오랜만에 다시 손으로 꾹꾹 눌러 쓴 편지를 띄워 볼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나에게도 손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들을 보내달라고 졸라보고 싶기도 하다. 비록 그 편지들이 코로나를 물리치고 일상을 되돌려 받진 못해도 이 책의 편지글들처럼 누군가의 삶에 선한 영향을 주기도 하고 작은 위로가 되기도 하고 나의 사소한 구원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어느 저녁 따뜻한 불빛 아래 바스락거리는 종이를 펴고 펜을 뜨겁게 잡고 아픈 마음을 펼쳐서 편지를 받는 이들이 다치지 않을 말들을 골라내어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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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웃음의 나라 - 문화인류학자의 북한 이야기
정병호 지음 / 창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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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단어는 없는데 쉽게 상상이 안 되어 어려운 제목이다.

 

아마도 내 여권을 들고는 자유롭게 방문할 수 없는 나라라서,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직접 확인할 방법이 없는 곳이라 그럴 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본 적 없는 북한과 만나본 적 없는 북한 사람들이 나는 만나기도 전에 이미 낯설기만 하다. 언어가 같으면 - 마치 혈육에 대한 모든 신비주의적 믿음처럼 - 무작정 더 가까울 것이란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나는 같은 언어를 쓰는 타인들과 전혀 이해하고 이해받지 못했던 경험들이 있고, 다른 언어를 사용하지만 금방 친구가 될 수도 있었을 뿐 아니라 깊이 이해받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잘 들여다보이는 이들을 만난 적도 있다.

 

그러니 그 오랜 세월을 공식적으로 ‘주적’으로 언명하고 적대적 감정을 의식화하는 교육을 받은 남북한 서로가 과연 분단선, 휴전선만 물리적으로 사라지면 다시 하나가 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일은 정말 최선이자 바람직한 것일까.

 

 

애초에 실향이나 이산의 아픔을 겪은 당사자나 후손이 아니라 관념적인 수준에서 맴돌며 그나마 해온 생각도 점점 차갑게 멀어져간다. 그래도 남북정상적십자회담이나 북미정상회담을 비쳐준 영상들은 깜짝 놀랄 만큼 몸짓 하나가 다 유의미해 보였고, 그동안의 모습들이 얼마나 지난하고 낯 뜨거웠는지 미래세대는 그 세월을 웃으며 서로 얘기할 종전과 평화의 방향이길 기원했다.

 

경험도 이해도 비교할 이가 별 없을 듯한 영역이라 경력과 노력과 재능이 합해진 저자의 글이 당연히 독보적인 현장성과 흥미와 - 그동안은 종합적으로 판단할 양이 모자라기만 했던 - 정보량이 풍부할 것이란 생각은 했지만, 그토록 단단한 공정성을 지닌 채로도 이토록 따스한 연민의 마음을 드러낼 수 있다는 점이 우선 놀라웠다. 문화인류학이란 원래 인간에 대한 호기심만이 아니라 연민도 애정도 많은 건가 싶기도 했다. 무엇보다 한 개인의 의견이나 적용 가능한 이론보다는 현장의 모습들이 제일 궁금했는데, 수많은 현장의 섬세한 묘사들이 가득한 점이 무엇보다 반가웠다.

 

살면서 깨닫게 되는 놀라운 점들 중 하나가 한 번도 애써 ‘고정관념들’을 확립하려 노력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분야에 빠짐없이 끼어들어 기어코 스스로에게 방해를 받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이번 역시 책을 읽으며 빈약한 고정관념들과 편협한 사고들을 스스로 짚어갈 수 있어 감사한 일이었다.

 

그리고 보니 나도 ‘그때 그 시절’엔 반공포스터를 열심히 그린다거나, 북한에 눈이 빨갛고 이가 날카로운 늑대들과 괴물 돼지가 살고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기도 했다. 그리고 좀 더 커서는 북한 사회에 대한 인상이 본인들이 내세우는 ‘주체성’과는 달리 ‘주체적인 사고’가 부족한 전체주의 사회로 고정되었다. 가짜정보와 이해부족과 연민부재 기타 등등의 빈약한 인상주의 합작품이랄까.

 

세계의 구성원으로서 북한이라는 나라에 대한 이해, 정치와 정치를 하는 사람들 이야기, 문화인류학자가 아니라 현장 실천가로서의 생생한 공감들이 잘 드러난 내용들도 아주 유익하다. 나는 문화인류학이란 식민지쟁탈전과 자본주의 시장 확대의 시기가 지나고 시대성이 거의 소멸되었다고 내심 과거형 유물형 학문이라고 얕보는 속마음이 있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북한은 그야말로 지구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연구와 학문의 대상이기도 하겠다. 물론 많은 이들이 살아가는 곳이니 행여나 존중심을 잊고 대상화하는 일은 금물이지만. 내 좋은 한 친구는 북한관련 - 새터민 패널들과 드라마 등등 - 방송을 몇 개 알려주며 거기서도 생생하고 재미난 얘기를 들을 수 있다고 하는데, 다른 수다를 떨다 그새 제목들을 모조리 까먹었다. 이제 만나러 갑니다? 남녀북남?

 

아는 것도 배운 것도 즐기기만 하고 정책화하고 현실화할 아무 의무가 없는 독자라서 진심으로 속편하다. 많은 분들이 유의미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정책을 구상하고 제안하고 실행하느라 고된 근무를 하고 있겠지만 - 다른 분들에 비해 비교적 미디어에 자주 노출되는 강경화 장관을 볼 때마다 반갑고 자랑스러우면서도 한편 마음이 덜컥, 걱정이 된다. 그레이 헤어는 그 멋을 더할 뿐이지만 점점 패는 볼과 안색이…… - 매번 미루어 그 고됨을 잠시 짐작해보곤 잊는다.

 

내용이 낯설기도 흥미롭기도 유쾌하기도 불쾌하기도 애잔하기도 화가 치밀기도 했다. 어쩌면 모든 사회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군가에겐 비슷비슷하게 이러저러할 지도 모른다. 그 모든 노고로 쓰인 냉철하고 지적인 내용을 다 지나 다시 저자의 마음이 울리는 것 같은 구절로 돌아와 본다.

 

무기를 내려놓게 하려면 우선 그 마음을 알아주어야 할 것이다. 13

 

개인적 자선과 마찬가지로 국제원조도 대상국의 상태와 실력에 비례하는 경향이 있다. 아무리 참혹한 모습으로 도움을 청해도 가난한 걸인에게는 동전을 던져줄 뿐이다. 입성이 반듯하고 갚을 능력이 있어 보이는 사람에게는 도움을 주는 단위나 지원 방식이 달라진다. 실력과 배짱이 있는 상대가 '나'를 해칠 수 있는 힘까지 가지고 당당하게 요구를 한다면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된다. 대기근 상황에서 발사한 미사일 광명성은 바로 그런 길을 가기로 했다는 선언으로 들렸다. 24

 

외교도 정치도 사람이 하는 일, 어쩌면 당대의 연민 가득한 인문학자들이 이 길에 함께 하며 출판한 책을 읽을 기회가 올 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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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여자들 스토리콜렉터 82
아나 그루에 지음, 송경은 옮김 / 북로드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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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시간쯤 뒷면 나는 살인자가 된다.

 

물론 내가 훨씬 이전부터 더 꼼꼼하게 고민했더라면 이런 상황에 빠지지도 않았겠지만, 그랬더라면 오늘 저녁 다른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짓 따위는 하지 않고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었겠지. 그리고 릴리아나는 그야말로 천만다행이었다는 것도 모른 채 계속 살아 있었을 텐데. 10

 

생각을 억제한다. 이래선 안 된다. 과제를 끝내야 한다. 12

 

<이름 없는 여자들>은 불법 채류자 외국인 여성의 이야기다. 청소하다 살해당하고 이름도 사는 곳도 국적도 모르는 한 여성의 삶을 재구성하면서 플레밍 수사관과 단의 일주일의 행보를 따라가다 보면 복지선진국이라 불리는 북유럽 - 특히 덴마크 - 의 실상과 사람들의 의식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외국인 여성 노동자를 둘러싼 거대한 불법 거래 네트워크(Human Trafficking)는 어디까지 뻗어 있을까? 의지할 곳이 없고 생계 해결이 절박한 이들은 자신을 도와준다고 생각해서, 혹은 그것이 유일한 동아줄이라서 그 손을 잡지만, 사업의 본질과 성격상 그 끝은 수많은 폭행과 죽음이다. 왜 그걸 모르냐고 피해자들을 안타까워하는 한편 한심해할 수도 있지만, 사소한 희망이라고 필요한 이들에게 해결책 없이 정신 차려라, 현실을 똑바로 보라, 는 말만큼 안 먹히는 것도 없다.

 

생계에 도움이 안 되는 그깟 이름은 없어도, 일자리와 사회적 안전망을 제공해 준다면 일정 정도의 착취는 정당한 것인가. 자신의 나라 덴마크에 대한 포장 의지가 전혀 없는 작가의 의도에 부응한 이야기 전개에서 섬뜩할 만큼 다른 인간을 사물화하고 대상화하는 이들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 여성들은 모두 세 가지 공통점이 있었죠. 외국 여성이라는 것, 크리스티안순에 몰래 숨어 산다는 것, 그리고 덴마크에서 추방당할까봐 무서운 나머지 어떤 형태든 관청에 도움을 청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는 것이었어요. 295

 

이곳이야말로 그런 여성들이 도움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도시 아닌가요. 사회가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 기꺼이 나서서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395

 

코로나19로 인해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제대로 조망 받지도 축하받지도 못한 3.8 여성의 날에 헛헛한 마음으로 읽기 시작해서 때론 시시한 이유들로, 때론 그냥 우울해서 손에서 자꾸만 놓았다 태풍급 강풍이 인간들이 만든 것들을 뒤흔드는 소리를 들으며 겨우 다 읽었다.

 

주제가 무겁지만 사회고발르포가 아닌 추리소설이라 트릭들을 푸는 재미도 있고 전체적으로 작가가 고발하고자 했던 의도를 범죄 이면의 이야기를 만나면서 이해할 수 있다. 이야기 전개 속도에 따라 하나씩, 혹은 부분적으로 여러 개의 범죄 사건들이 잇달아 일어나고 해결의 실마리를 주거나 중심에서 해결하는 이가 존재한다.

 

교차 방식으로 등장인물들의 삶을 간략하게나마 소개하는 내용이 공감과 동일화하는데 도움을 주며, 유별난 괴물이라기보다 친근한 정도로 평범한 캐릭터들이 현실감을 더 하는 차분하면서도 치밀한, 가끔 바람 소리를 무시하고 집중할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인 소설이다.

 

한 때 외국인 여성으로 덴마크 코펜하겐에 근무한 적이 있어 그때는 전혀 몰랐던 작가가 반갑기도 했다. 민주적이고 복지제도가 훌륭하고 평등사상이 일상화된 그곳에서 ‘우리’가 아닌 ‘타자’를 대하는 분리주의적 방식을 드러낸 소설이 엄청나게 널리 읽히고 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읽었다. 문제점이 분명히 있긴 하지만 완벽한 사회란 어디에도 없을 터라, 그래도 비판과 고발의 목소리가 받아들여지는 사회가 위험해 보이진 않는다.

 

공동 생활권으로 묶여 더 이상 딴 나라 사정이 남의 일이 되지 않는 이런 시국에 함께 사는 방식과 가치관에 대해 곰곰 생각해보기에도 적당하고, 마음이 한시도 편하지 않아 스트레스가 쌓여가는 시기에 재밌는 추리소설 작품을 읽는 계기로도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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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붐 세대 맏형의 6070 음악감상기 - 그 시절 심야 라디오 음악방송의 추억의 노래들
김경 지음 / 지식과감성#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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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정리를 이유로 원목으로 CD장을 세 개 맞췄다. 분명 주문 전 집안에 있는 앨범을 미리 다 세어 두었는데 결국 수납공간이 부족하다. 앞으로 매일 하나씩 다시 들으려면 몇 살까지 살아야하나. 왜 이렇게 많이 샀나. 한 때는 대단한 기쁨이었는데……. 온갖 상념들이 지나갔다.

 

어쨌든 정리는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가지고 있는 음반을 다시 찾아 들어보면서 그야말로 레트로한 시간을 누렸다. 그 와중에 사치스러울 정도로 기능 오버인 블루투스 스피커를 홀린 듯 구입…… 후회막급은 아니지만 꼭 필요하진 않았다. 코로나19 스트레스 자가치료행위로 눈감아주기로 했다.

 

“그 날 선약이 있어서 못갑니다.”란 세상 쿨한 이유로 노벨 문학상 수상식에 불참한 밥 딜런 음악을 들으며, 한국 포크 가수들과 라디오 진행자들은 왜 그 시절 사이먼 앤 가펑클을 끝없이 그리 틀어댔나 뒤늦게 뜬금없이 맥락 없이 울컥한다.

 

오랜만에 칸초네, 샹송, ‘눈이 내리네 Tombe La Neige, 아다모Adamo’를 들으니 눈 구경 귀했던 지난겨울이 새삼 서운하고, 어릴 적 추운 줄 모르고 행복했던 눈(으로 하는)놀이들도 그립게 떠오른다.

 

그리고 아비의 ‘One summer night.’ 겨울에 태어난 탓인지 찬바람이 돌기 시작하는 늦가을부터의 봄이 오기 전의 계절을 가장 사랑하지만, ‘여름’ 노래를 들으면 예외 없이 가슴이 마구 뛴다. 한여름 밤의 열기와 공기와 수많은 생명체들이 한꺼번에 만들어 내는 소리들은 마음속의 북이 둥둥 울리듯이 그렇게 전율스럽게 느껴진다.

 

재니스 조플린, 지미 헨드릭스, 짐 모리슨...... 음악이 시작되자 자력으론 빠져 나올 방도가 없다. 머릿속까지 파고들어 울리는 블루투스 스피커가 한 몫 한다. 한 곡에 꽂혀서 열 번도 더 듣기도 한다. 다 포기하고 싶은 생각을 버리고 정신을 차려야 한다. 이러다가는 책은 절대 다 못 읽는다. 어머니가 합세하여 시간이 더 길어진다. 페티 페이지 노래들을 몰아서 이렇게 들어보긴 처음이다.

 

이제 1971년, 양희은, 송창식, 윤형주, 김민기...... 신중현, 산울림, 사랑과평화, 대학가요제...... 그리고 ‘그대에게’ 강력한 마약과도 같은 신디사이저의 시작……

 

끝없이 가수들과 음악들이 소환되고 나의 그 시절도 끊임없이 뒤따라 나온다. 심지어는 첫 번째 ‘마이마이’까지 기억에서 튀어나온다. 너무나 좋아서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려서 앨범에 남겨 둔 미니카세트라디오.

 

음악은 언제나 이토록이나 강력하고 위험하다.

60-70년 대 당대에 음악이 탄생할 때 동시에 즐기진 못했지만, 만들어진 음악은 사라지는 법이 없고 들은 음악 역시 잊히는 법이 없다.

 

이 글을 읽는 많은 독자들이 끊임없이 인터넷에서 음악을 찾아가며 오랜 시간을 들여 완독을 하리라 짐작해본다. 20년 간 동안 널리 사랑받은 다양한 장르의 국내외 음악 목록을 소개한 것이 아니라 느낌과 감정들을 한 권의 책으로 기록한 독특하면서도 가치 있는 기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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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림지구 벙커X - 강영숙 장편소설
강영숙 지음 / 창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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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모든 개인은 특정 장소에 대해 다소간 독특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이것은 각 개인이 장소를 각기 다른 시공간적 계기를 통해 경험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들이 그 장소에 대한 자신의 이미지에 색깔을 칠하고 독특한 정체성을 부여하는 개성, 기억, 감정, 의도를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조합하기 때문이다.


- 에드워드 렐프 <장소와 장소상실>

 

시각이 아주 중요한 종합예술인 영화에서 공간에 대한 이미지를 통해 해석 이상의 메시지를 전해주는 경우들이 있다. 최근 가장 유명한 영화라면 역시 <기생충>이 있다. 지나보니 그렇더라~ 정도의 생각일 뿐이지만, 어째 근래 재난과 지하공간이 등장하는 문화매체들과 코로나19가 창궐한 영화였으면 좋았을 현실!이 뒤섞여 비슷한 모습으로 내 삶에 들어온다. 특히나 이 책은 재난과 지하공간을 모두 소재로 삼아서 읽으면서 참……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훌륭한 창작품인 걸 알지만 순간 르포를 읽는 감정이 차오르기도 했다.

 

2006년 영화 괴물에서 괴물과 접촉한 이들에게 지나치게 단호한 태도를 보이던 방역복을 입은 직원들은 전혀 현실감이 없었는데, 이젠 화면 속 의료진과 방역직원들의 방역복이 부족하지 않고 안전해야 할 텐데 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생각만 든다. 겨우 14년만이다.

 

부림지구의 벙커는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알게 된 핵전쟁 시 한시적인 생존을 보장해주는 완벽한 지하아파트같은 벙커가 아니다. 침구도 욕실도 침구도 없는 벌레와 쥐가 들끓는 어두운 공간, 지하에 버려진 관광버스 내부이다. 그리고 소설 속 정부는 어떤 지원도 하지 않고 방관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견디며 살아있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도 죽은 아내의 도움을 받은 그 늙은 운전사처럼,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도움에 의지해 살아가겠죠.

누군가가 우리를 보호할 겁니다.

나는 그렇게 믿어요. 234

 

전염병의 영향 아래 있지만 비교적 아직은 안전한 장소에서 단지 가끔 소리를 막 지르고 싶은 갑갑증과 무력증에 빠지는 현실도 당사자에게는 고통이고, 이런 변명에 힘을 싣기 위해 그래도 나는 최선을 다해 안간힘을 내어 끝날 때까지 편히 쉬는 한순간도 없이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지친 얼굴들을 매일 떠올린다고 말한다. 마스크 땜에 힘들 때는 마스크를 너무나 장시간 착용하고 환자들을 돌보느라 상처투성이, 밴드와 붕대투성이가 된 의료진을 떠올려본다. 지금은 저 먼 곳의 달라이 라마보다 더 맑고 깊은 눈빛들을 한 땀벅벅인 그들을.

 

그제는 마스크 공장에도 자원봉사자들이 달려가 일을 돕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재해란 무엇인가. 어린아이들 표현대로 정말 지구는 아픈 걸까. 재해 상황에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재해가 과연 기회가 될 수 있을까. 어쩌면 이미 모든 걸 되돌릴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재해 시 사람은 얼마나 인간적일 수 있을까. 297

 

한 번도 내 이익을 완전히 내어놓고 살아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어쩌면 이 시절만이 아니라 평생을 더 노력했던 다른 이들의 도움에 의지해 살아온 것일 터이다. 그런 생각에 이르면 짜증과 울화로 가득한 못난이에서 지극히 사랑받는 이처럼 마음이 살 풀리고 기운이 조금 난다.

 

이런 시기에 힘이 되어주는 이들에 대한 자각이 아무리 진심이라 하더라도 결국 질량에 따라 중력이 제각각이듯, 같은 정도로 보답할 일은 요원할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나도 내 일상에서 끝까지 힘껏 버틸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소소하더라도 함께 할 방법을 찾아볼 것이다.

 

어젠 손석희/양준일 인터뷰 내용 중에 양준일이 미국에 있는 동안 쓰레기를 계속 버리며 살았다고, 자신 안에 있던 쓰레기를 계속 버렸다고 한 말이 다시 기억났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불리는 격리된 상황을 기회로 안팎으로 버리고 닦고 재정리를 해볼까하는 생각이 든다. 매일이 처음 살아보는 새 날이지만 어쨌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은 순간이 지금인 것 같다. 정리를 시작하자.

 

뜻밖에 일어난 재난은 어떤 계급이나 격차를 한순간에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재난과의 동거는 늘 더 어려운 쪽의 몫이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재해가 나기 전부터도, 지금도, 평생 동안 재해를 앓듯 살아간다. 이쪽에서나 저쪽에서나 모두들 그저 묵묵히 살고 있을 뿐인, 그림자 같은 착한 사람들이 이 소설에 있다. 나는 부림지구라는 허구적 공간 안에서 그들의 조용한 움직임을 따라 다녀보고 싶었을 뿐이다. 나는 소설의 주인공들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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