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 비늘
조선희 지음 / 네오픽션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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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금’이란 이름에 걸맞게 월급을 소금으로 받은 시절도 있었음을 떠올리게 하는 신비롭고 흥미로운 장편소설이라 반갑고 관심이 큽니다. 환상 소설이라는 분류처럼 현존하는 모든 것들이 판타지일 수도 있겠지요. 어릴 땐 재미나기만 했지만 어느덧 많은 것들이 조금은 서글픈 나이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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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케
매들린 밀러 지음, 이은선 옮김 / 이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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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호메로스는 오디세이아를 지었다.

3천 년 뒤매들린 밀러는 키르케를 써야 했다.

 

사회가 여자에게 허용해준 힘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여성에게 주어지는 단어가 마녀였어요틀림없이 키르케가 그런 경우죠그녀는 오디세우스와 1년을 보냈죠그렇다면 그녀의 나머지 인생은어떻게 그녀는 지금의 그런 존재가 되었을까?

 

10년도 더 전에 친구의 은사가 오랜 기간 연구하고 완역했다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책을 선물 받아 아주 힘들게 읽었는데필사한 몇 구절들 이외에는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다매력적인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해서 <키르케>를 잘 읽어 보고 싶으니지금에 와서 <오디세이아>가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 것이 몹시 아쉽다.

 

키르케의 탄생 장면과 대화들은 시대를 감안하더라도 충격적인 성차별 구조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외모이름능력부모의 기대 등의 모든 것이 그러하다누가 누구를 더 반영한 것인지는 몰라도 인간계나 신계 역시 씁쓸한 장면이다아이들 용 책제목을 보니 <오디세우스를 사랑한 마녀 키르케>라고 뜬다그 책에서는 아마 얻을 수 없는 정보 중 하나로 키르케,가 hawk라는 것을 알게 되어 뜻밖의 기분이 들었다그저 적당한 남편을 만나는 일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있을 듯한 기대가 생기는 이름이다.

 

예전에 아버지가 지상에는 그의 뜨고 짐을 기록하는 천문학자라는 인간들이 있다고 했던 게 기억이 났다그들은 인간들 사이에서 최고로 존경을 받았고 왕의 고문으로 왕실에서 지냈지만아버지는 가끔 여기저기에서 미적거려 그들의 계산을 어그러뜨렸다그러면 이 천문학자들은 섬기는 왕 앞으로 끌려가 사기죄로 처형당했다.

중략.

아버지,” 그날 내가 말했다. “천문학자를 죽일 만큼 늦었을까요?”

그렇구나.” 아버지는 대답하고 짤랑거리는 고삐를 흔들었다.

빨래를 짜듯 가슴이 조여오는 느낌이었다.

중략.

폐하태양 자체가 늦은 게 저희 탓은 아니지 않습니까.

태양이 늦을 리가 있느냐왕들은 왕좌에서 대꾸했다그렇게 이야기하는 자체가 불경죄이니라죽어 마땅하다이와 함께 도끼가 떨어지고 읍소하던 남자들이 두 동강 났다.

아버지,” 내가 말했다. “기분이 이상해요.”

배가 고파서 그런 거다.” 그가 말했다.

 

모두가 비슷한 성격의 자신만만한 가족들에 둘러싸여 사는데자신만 다른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불편할지 혹은 그 이상의 어려움이 있을 지는 대략 짐작할 수 있다이 시대의 신들이 왜 이리 무감한 성격으로 설정되어 있었을까가차 없고 냉정한 것이 신에 속하는 것이고공감 능력과 측은지심은 인간에 속하는 것이라고 그리스인들은 그렇게 믿었을까.

 

키르케는 인간에게는 늘 반가운 이름으로 기억되는하지만 그 행동의 이유는 잘 알 수 없는영원한 고통이라는 상상 가능한 가장 큰 형벌을 받는 프로메테우스와 조우한다.

 

인간들을 도우셨죠.” 내가 말했다. “그래서 벌을 받으시는 거죠.”

그렇다.”

인간은 어떻게 생겼는지 얘기해주실 수 있어요?”

어린아이의 질문이었지만 그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마디로 대답할 순 없어저마다 다르게 생겼거든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불사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뿐그게 무슨 뜻인지 아니?”

알아요하지만 죽는다는 걸 이해하지는 못해요.” 내가 말했다. “용서해달라고 빌라는 걸 거부하셨다던데 진짜예요붙잡힌 게 아니라 제우스한테 가서 솔직하게 얘기하셨다는 것도요?”

그렇다.”

왜요?”

그의 눈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 얘길 한번 들어보자신이 왜 그런 짓을 했을까?

나로서는 대답을 알 수가 없었다신의 처벌을 자청하다니 내가 보기에는 미친 짓 같았지만그가 흘린 피를 밟으며 서 있는 마당에 내 생각을 얘기할 수는 없었다.

모든 신이 똑같을 필요는 없어.” 그가 말했다.

 

영웅담이나 단발성 에피소드를 읽는 것보다 주인공을 따라 중심이 잡힌 서사 속에서 그리스로마신화의 접점을 발견하는 것도 재미있다프로메테우스는 철학자의 면모를 가진 듯 생각과 주관이 뚜렷해 보인다키르케가 마실 것을 가져다 준 것에 감사 인사를 건네는 것도 다른 신들과 구분되어 보인다신이 왜 그런 짓을 했을까.’ 프로메테우스의 질문을 받은 것처럼 나도 잠시 그 이유를 생각해 본다모두 똑같을 필요는 없다는 것키르케는 프로메테우스와의 이 만남과 대화를 통해 어떻게 변화할까어떤 계기가 될 수 있을까 진지하게 상상해본다인간들을 벌레처럼 하찮게 여기는 생각과 달리 키르케는 신과 인간의 존재와 관계 맺음에 대해 다른 의미를 찾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아이에테스(남동생)가 내 귀에 대고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저길 봐다이달로스야인간계의 경이로운 작품으로 꼽히는거의 신에 맞먹는 재주꾼이지내가 왕위에 오르면 저런 자랑거리를 모아서 곁에 두고 싶어.”

그래언제 왕위에 오르는데?”

조만간.” 그가 말했다. “아버지가 왕국을 하사하시겠대.”

나는 농담인 줄 알았다. “나도 거기서 살아도 돼?”

아니,” 그가 말했다. “내 왕국이잖아누나도 누나의 왕국을 가져야지.”

중략.

내 것 하나 없이 땅속에서 평생을 썩을 수는 없어.”

나는 어쩌라고묻고 싶었다나는 그냥 썩으라고?

 

다른 동생들이 모두 자신이 속할 곳을 찾아 자신의 몫을 챙기러 떠난 후 홀로 남은 키르케는 자신이 머물 장소도 자신의 역할도 찾지 못한 채로 홀로 남는다그러다 우연히 만난 글라우코스라는 인간과 얘기를 나누다 사랑을 느낀다그리고 그제야 프로메테우스와의 대화 속에서 인간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해낸다인간은 나이를 먹고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제발 도와주세요.” 내가 말했다. “위대한 여신이여그를 이곳으로 데리고 와서 영생을 부여해주세요.”

그건 어떤 신도 할 수 없는 일이란다.”

저는 그를 사랑해요.” 내가 말했다. “무슨 방법이 있을 거예요.”

글라우코스를 내 옆에 붙잡아놓을 수만 있다면 뒤흔드는 정도가 아니라 세상을 찢고 불태울 수도 있었다하지만 내 머릿속에 가장 생생하게 남은 건 내가 파르마콘이라는 단어를 내뱉었을 때 외할머니가 지은 표정이었다.

나는 공포가 뭔지 알아가고 있었다신은 뭘 두려워할까? 나는 그 대답도 알고 있었다.

자기보다 더 뛰어난 능력.

 

똑같은 형태는 아니라 해도 프로메테우스처럼 인간을 사랑하게 된 키르케외롭지 않은 처지였다면 인간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지도 후에 마녀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이 또한 모두 정해진 운명이었을까키르케가 원한 것은 인간을 신으로 만드는 것일까자신이 인간이 되는 것일까.

 

문득 <개구리가 된 왕자>란 동화와 <슈렉>이 함께 생각난다슈렉의 피오나 공주는 유쾌하게도 상징적인 인물이고 반전과 파격을 보여주는 사랑스러운 인물이다틀에 얽매어 고민에만 빠져 있지도 않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용감한 선택을 한다자신의 삶을 자신이 결정하고원하는 행복을 위해 특권을 포기하고 자립한다자신을 구해 줄 갑옷 입은 기사나 백마 탄 왕자에 완전히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을 구한다사랑을 위해 자유와 독립을 제한하는 대가를 치를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의 삶에 반드시란 없다죽음 말고는.

 

동화든 신화든 현실이든 삶이란 본질적으로 죽음과 연결된 길이고최종적인 죽음이 아니더라도 종종 매우 비극적인 단계에 이를 수 있다바라고 꿈꾸는 것과 다르게 아주 씁쓸할 수도 있다그래서 어쩌면 많은 동화의 끝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그 과정을 생략하는 지도 모른다가장 확실한 운명이 죽음이라면영생을 누리는 신들에게는 삶 또한 죽음의 부재처럼 가치가 부재한 시간일 뿐일지도 모른다그래서 나는 시간의 두 축 사이과정에서 맛볼 수 있는 모든 감정들이 가장 궁금하다사랑을 느낀다는 것은 분명 성장의 신호이다.

 

파르마콘자기보다 뛰어난 능력을 두려워하는 신들대단한 위계적 사회이다능력이 없거나 적은 존재라면 신의 자손이라 할지라도 불멸의 삶이 얼마나 무력한 형벌일까 상상해본다.

 

키르케의 손을 거쳐 스킬라와 글라우코스가 변신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운명의 여신의 소행이지키르케에게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다.”

아버지가 잘못 알고 계신 겁니다.”

중략.

그런 술수를 파르마케이아라고 부릅니다세상에 변화를 유발하는 능력이 있는 약초 파르마콘을 쓰기 때문인데신들이 피를 흘린 곳에서 피어나기도 하고 지상에서 지천으로 자라기도 하죠그 약초의 능력을 끄집어내는 것이 재능이고 저 혼자 그런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크레테에서는 파시파에가 독약으로 왕국을 다스리고 바빌론에서는 페르세스가 육신에 영혼을 다시 불어넣습니다키르케가 마지막으로 능력을 입증한 셈이죠.”

 

어쩌면 누나는 파르마키스가 아닌가보다는 생각이 들려던 참이었다고.”

내가 모르는 단어였다그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모르던 단어였다.

파르마키스.” 내가 말했다.

마녀라는 뜻이었다.

 

그 아이는 내 명령을 거부하고 내 권위에 도전했소독약으로 동족을 변신시켰고 다른 반역 행위도 저질렀소.” 새하얗게 이글거리는 아버지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그 아이는 우리 이름을 더럽혔소우리가 보여준 애정에 배은망덕한 태도를 보였소그렇기 때문에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제우스와 합의를 보았지키르케는 아무런 해를 끼칠 수 없는 무인도로 추방될 거요바로 내일.”

 

그리웠던 남동생아이에테스를 통해 아버지 앞에서 키르케와 형제 자매들의 능력을 발설되고 확인된다그리고 바로 그 일이 키르케를 각성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이제 키르케는 더 이상 아버지의 딸님프가 아니였고그제야 본격적인 자신을 찾아 본격적인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펼치기 된다신화 속에 등장하는 최초의 마녀 이야기.


세상은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거야키르케나는 아버지에게 마법을 우연히 발견했다고 얘기하고아버지는 내 말을 믿는 척하고제우스는 아버지의 말을 믿는 척하고그렇게 세상은 균형을 유지하지실토한 누나가 잘못했어왜 그랬는지 나는 절대 이해하지 못할 거야.”

 

그렇다그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프로메테우스가 채찍질을 당했을 때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으니.

 

마치 피오나 공주처럼또한 그 자신에 가장 어울리는 모습으로 마녀 키르케는 유배지 섬을 감옥이 아닌 자신의 삶의 터전으로 바꾼다주어진 상황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되 원망도 회복도 귀향도 바라지 않고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마법 능력을 연마한다헤르메스다이달로스오디세우스 등 쟁쟁한 인물들을 만나고 함께 시간을 보내지만그들은 키르케에게 세상 이야기를 들려주는 친구들이다키르케는 아무도 붙잡거나 매달리지 않는다자신의 아들을 죽음으로부터 지키려 어머니로서 할 수 있는 온갖 주술로 보호하며 양육하지만아들이 떠나려하자 순순히 보내 준다운명에 휘둘리는 것도 순종하는 것도 아니면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원하는 것을 알고 얻고 지키고 또 다른 흐름에 따른다그 과정이 모두 주어진 능력이나 행운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의지를 발휘해서 도전하는 모든 과정이다신으로 태어나 인간적인 모습으로 살아간온 마음으로 응원하게 하는 결심을 하는 주인공반전에 놀라는 한편 그 결심이 가장 당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그래도 그의 끝이 어떻게 될까 한참을 생각 속에 머물렀다.

 

확실한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걸 저희도 압니다.

하지만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일이 있으면 저는 당신에게 맡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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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초판본, 양장)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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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소설!’ 평론가가 이토록 극찬한 소설이라니 의심(?)스럽다취향에 절대적으로 휘둘리는 것이 문학작품이고더구나 감상 능력은 다 제각각일 텐데……물론이런 딴지는 최고의 소설을 알아보지 못할 지도 모르는 독자로서의 나를 위해 미리 쳐두는 방어막 같은 비겁함에서 비롯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닉 혼비*유학 시절 한심한(?!) 인간들을 같이 마구 헐뜯는 듯 뒤틀리고 꼬인 병리학적 공감을 느끼며 가장 크게 웃게 해준 작가라 무조건적인 애정이 있다나만 나이 든 건 아닐 텐데…… 닉 혼비도 나이 따라 고상하고 말랑하고 시시해졌을 가능성이 있지만…… 어쨌든 경애하는 작가가 <스토너>를 애정하고 극찬하니 제 맘에 드는 사람들 의견에는 귀가 얇다 못해 투명하다는 평가를 받는 나로서는 저항감이 스르르 내려간다.


찬란하고가차 없이 슬프며 또 아름답다현명하고 우아한 소설닉 혼비

 

묵묵히 자신을 길을 걷고자 했던 인물에 대한 이야기출세에 뜻도 없었고조용하고 소박하게그러나 쉼 없이 열정을 좇아가는 인물, 존경해야할 인물 유형이지만 궁금하지도 않은 유형이라 다시 망설이게 된다그래도 이 책을 추천한 분들의 면면이 워낙 설득력이 있어 책 정보를 오르락내리락하며 읽어보았다.

 

어머니는 삶을 인내했다.

마치 생애 전체가 반드시 참아내야 하는 긴 한순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위와 같이 살았는데도 굳이 말하자면 실패에 가까운 삶이라……삶에 주어진 1인분의 고통을 받아들인다는 태도의 캐릭터주류에 속하는 인생이거나 꽤나 많은 남성들에겐 낭만적일 이런 태도를 나는 주변의 무수한 여성들의 불행한 삶에서 숨 쉬기가 갑갑할 만큼 빈번하게 목격했다비겁한 변명이지만 꼭 알아야할 의무감이 동반되지 않는 상황이라면 자세히 알아보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먼저 드는 내용이다.

 

영문과 교수 윌리엄 스토너를 추모하는 뜻에서 그의 동료들이 미주리 대학 도서관에 기증.”

 

가끔 어떤 학생이 이 이름을 우연히 발견하고 윌리엄 스토너가 누구인지 무심히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만그 이상 호기심을 충족시키려고 애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스토너의 동료들은 그가 살아 있을 때도 그를 특별히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지금도 그의 이름을 잘 입에 올리지 않는다노장교수들에게 스토너의 이름은 그들을 기다리는 종말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고젊은 교수들에게는 과거에 대해 아무것도 일깨워주지 않고 동질감을 느낄 구석도 전혀 없는 단순한 이름에 불과할 뿐이다.

 

주인공의 마지막을 첫 페이지에 밝히다니안 그래도 망설이는 마음에 온갖 거부할 이유들이 들끓는다……그래, 50년 만에 극적 부활한 드라마에는 분명한 이유가설득력이 있을 것이다에세이도 아닌 소설이과장도 없이 실제 삶과 가장 유사한 질감을 재현한다는 정말로 그렇다면 이 작품은 비소설로 분류되어야 마땅하다매력 파괴의 평범함이 어째서 감동을 주고왜 많은 독자들이 인생 소설이라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지 그 이유는 솔직히 궁금하다그리고 결정적으로 읽지 않고 쌓아 둔 책 타워에서 이 책의 아름다운 표지가 빛나고 있다.

 

(원하는줄거리가 없다. (마땅히기대하는 내용이 없다주인공은 세월이 흘러도 배경이 바뀌어도 관계가 변해도 편안해지지도 행복해지지도 않는다한결같이 어렵고 지난한 삶이 계속계속 흘러간다답답하고 갑갑하다분통이 터질 듯하다묵언 수행의 의무가 있는 양 입을 앙다물지 않으면 후회할 말이 터져 나올 것 같다제발 이 주인공의 삶에서 꼴 보기 싫은쓸데없이 불행만 끼얹는 한 명이라도 치워 달라고 작가에게 연락이라도 해야 견딜 듯하다그러다 호흡 사이에 잠시 정신이 들면(?) 이 정신 나간 작가는 왜 소설에서 주인공을 이토록 학대하는 거냐며 작가에 대한 원망으로 감정의 물꼬가 방향을 틀기도 한다.

 

젊다 못해 어렸을 때 스토너는 사랑이란 운 좋은 사람이나 찾아낼 수 있는 절대적인 상태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어른이 된 뒤에는 사랑이란 거짓 종교가 말하는 천국이라는 결론을 내렸다재미있지만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부드럽고 친숙한 경멸로그리고 당황스러운 향수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제 중년이 된 그는 사랑이나 은총도 환상도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그는 지혜를 생각했지만오랜 세월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무지였다.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그는 생각했다.

또 뭐가 있지?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맙소사…… 이미오랫동안아무도믿지 않아도우리는 이전보다 뭐라도 나아질 거라고최선을 다해있는 힘껏자신을 속이면서까지 견디며 사는데이 작가가 끝끝내 아무 희망의 실마리도 위안이 되는 환상도 배치하지 않는다변함없이 힘겨운 하루하루거기에 대중소의 고난과 시련들이 다채롭고 지속적으로 번갈아 들이친다그러다 거의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인물로 스토너의 삶이 마감되었다라고 쓰여 있다체온보다 높은 온도로 울화가 치밀고 이 소설은 금서가 되어야 천만번 마땅하다는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릴 지경이다.

 

그에게는 지금까지 내면을 성찰하는 버릇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의도와 동기를 찾아 해매는 일이 힘들 뿐만 아니라 살짝 싫다는 생각도 들었다자신이 자신에게 내놓을 것이 거의 없다는 생각내면에서 찾아낼 수 있는 것 또한 거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마침내 결정을 내리고 나자 결국 이렇게 될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스토너는 견디기 힘든 맹렬한 폭풍 속을 지나갈 때처럼 고개를 숙이고옷깃을 단단히 여미고생각은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딛는 데에만 고정시킨 채 그 시절을 겪어냈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다시 생각했다.

기쁨 같은 것이 몰려왔다.

여름의 산들바람에 실려 온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실패에 대해 생각했던 것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런 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고.

이제는 그런 생각이 하잘것없어 보였다.

그의 인생과 비교하면 가치 없는 생각이었다.

 

그는 순전히 자기만의 즐거움을 위해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머리는 그가 원하는 곳으로 이끌려 가려고 하지 않았다.

생각은 그가 들고 있는 책에서 멀어져 방황했고그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시간도 점점 늘어났다

마치 그가 알고 있던 것들이 때로 머리에서 싹 비워져버리는 것 같았다.

 

이미 날마다 부족한 체력을 마지막 장과 더불어 말끔히 소진시키고심장이 부풀어 올라 목에 걸린 듯해서 애써 삼키는 서글픔을 기어코 빼내려는 불온한 소설이다이런 결말이 내 현실이 될까 눈을 감고 견디는데딱 그런 결말을 말끔하게 보여주는 인물에 정신적 빙의가 되어 체험하는 잔인한 시간을가장 효과적이고 거의 유일한 피난처인 독서로 경험하다니.

 

마지막 종지부는 옮긴이의 말이다.

 

잘 생각해 봐라스토너의 삶이 실패한 슬픈 이야기인가우리 대부분은 이보다 못한 삶을 산다스토너처럼 하고 싶은 일도 자각하지 못하고그 길을 스스로 선택하지도 못하고평생 그 일에 머물지도 못하고애정과 보람은 부재하고의미도 못 찾고매일을 충실하게 삶을 살아내지 못하는 주제에그런 주제에 누구를 동정하는 건지!*”

 

옮긴이가 직접 표현한 내용 그대로가 아니라

분노에 엉클어진 제가 해석한 과장된 어투의 표현입니다

내용상 일치하거나 합의에 이를 내용은 그대로입니다(라고 믿습니다).

 

6시간 30분을 꼼짝 않고 읽은 분의 간결한 서평을 읽고 추천을 받아 읽었다요란하게 망가진 심정으로 안절부절못하다혹시하며 먼저 읽었을 법한 이가 있어 연락을 했더니 7시간을 마법에 걸린 것처럼 움쩍거리지도 못하고 읽고아무도 없기에 꽤나 속 시원히 울었다고 한다.

 

그런가…… 원체 아는 바가 없기도 하지만<스토너>라는 이 작품은 내가 특히 모르는 인문학’ 작품일거란 생각이 문득 든다특정 시공간에서 살아간 지극히 평범한 인물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작가가 단조롭게만 그려냈지만독자들은 그 이야기 속에서 오롯이 자신만의 사유를 하고 고민을 하고 공감을 하는그런 기능을 하는 매개체로서의 문학독자가 어떤 판단을 하건 강요도 비난도 하지 않는 작품메시지와 이슈와 장르의 형식성에서 가장 멀리 있는 작품……배경이 되고 토대가 될 지식이 너무 없어서 생각이 더 나아가거나 정리되지는 않는다.

 

시간이 생겨도 난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를 걸세.” 스토너가 말했다.

그런 걸 배운 적이 없으니까.”

 

스스로 대단한 기대를 한 적은 없으나 낯 뜨거워질 일은 없을수록 좋겠다싶은데그럼에도 두서없이 내뱉는 말과 별 다를 바 없는 글을 마구 끼적였다(추천해 주신 이웃분께 민망하고 죄송스럽다). 그런데…… 내면의 폭우가 그치자 수치심도 따라 흘러간 듯 멀쩡한 기분이 돌아와 한편 당혹스럽다.

 

나는 무엇을 기대했나?

 

일상에서 아주가끔자그마하고 우호적인 웜홀을 통과한 것처럼 공간이 겹치고 연결되어서아주 멀리 떨어져 무관하게 존재하던 서로 다른 세계들이 우연처럼 차례로 등장하는 신비 체험을 할 때가 있다같은 날 경애하는 한 이웃의 <마담 보바리> 서평 글을 읽고 책을 뒤적였고늘 부러운 다른 분의 서평을 읽고 <스토너>를 펼쳤다따로 실재하던 두 작품을 내가 같은 날 추천받아 읽었다는 행위만으로 <마담 보바리>에서 발견한 말들이 <스토너>를 읽은 감상인 양자리를 옮겨 달라붙는다양자역학이 아름답게 작동하는 미시 세계를 천만 배쯤 확대한 VR을 체험하는 기분이다.



등장인물과 한 몸이 되어서 그들의 의상 속에서 자신의 심장이 고동치는 것만 같아지는

 

당신은 때때로 그런 일이 없어요옛날에 가졌던 막연한 생각이라든가 아주 먼 곳에서 되살아오는 것 같은 어떤 알 수 없는 이미지또는 자신의 가장 은밀한 감정을 그대로 표현해 내놓은 것을 책 속에서 발견하는 일 말예요.’

 

불안이 바닥이 아니라 천장을 계속 치는 날들이 이어지자인내심은 마땅히 차있어야 할 모든 저장 용기가 비어가는 것처럼 가난해진다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알지도 못하고 알아 낼 수도 없는 막막한 시간어쨌든 덕분에 읽는 동안에는 기운 팔팔한 생명체처럼 들끓고 뒤척이는 감정을 맛보았다울지는 못했지만 심정적으로 다 빠져 나오기 전 식료품 쇼핑을 다녀왔더니 정말 낯선생전 처음 보는 물품이 담겨 있는 뜻밖의 망각 체험도 하였다귀리우유………….

 

행복불행 포함 모든 감정과 판단이 모두 개별적 사건들이고 체험이라 종종 아무 것도 권하지 못하지만최고로 단조롭고 담담한 소설을 읽으면서 폭풍 같은 감정의 요동을 느끼고 싶다면 읽어 보시길 권합니다(반응 결과는 독자에 따라 모두 다를 수 있으니 아무런 보장은 못 드립니다만). 그리고 혹시나 무엇을 기대했는지’ ‘한 줄 평감상평서평낙서욕설(?)’ 무엇이든 쓰게 되시거든 제게도 부디 소식 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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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메이르 - 빛으로 가득 찬 델프트의 작은 방 클래식 클라우드 21
전원경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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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탓에 해외 이사가 잦은 독서가인 친구가 10년이 넘게 고민하고 슬퍼하다 전자책으로 바꾼 세월도 한참 지났다나 역시 책장에 넣을 엄두도 안 나게 쌓여가는 특히 코로나 자체준자가격리를 하면서 책들을 나란히 벽에 쌓아가면서 가끔 흠칫 어떻게 정리하고 어떻게 나누어야 하나 고민이 매일 반복된다정말 전자책이 대안일까싶어 우울해지는 어느 날 들뜬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소식이 왔다종이책으로 소장하고 싶은 책들을 발견했다는클래식 클라우드의 더 없이 화려하고 아름답고 유익함으로 빼곡한 책들을 너도 보라고이래저래 반가운 소식을 변명으로 삼아 전자책에 대한 고민을 훨훨 날려 보냈다.



<진주 귀고리 소녀>의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세상의 많은 지식정보를 다 알아야겠다,란 생각은 한 적이 없지만영화를 본 주제에 포스트도 남아 있다 화가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 건 좀 낯 뜨겁다그러면서도 소녀의 속눈썹이 왜 없는지에 대해 대화를 나눈 기억은 있으니 전두엽이 쪼그라들고 있는 것인지…… 가히 코미디 같은 조우이다친구와 통화 중에 화가 이름이 베르메르로 통용되던 시절이 있었음을 애써 서로의 위안으로 삼았다.

 

스튜디오에 들어가 앉아보며 해묵은 궁금증을 다시금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이곳에 앉았던 여성들편지를 읽고 레이스를 뜨거나 와인을 마시던 여자들은 누구였을까

페르메이르의 그림에 등장하는 모델들 중에 신원이 명확하게 밝혀진 이는 한 사람도 없다

그들은 다만 화가의 걸작 속에서 3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영원히 살고 있다.

 

전생인 것만 같던 유학 시절 암스테르담을 두 번이나 방문했는데예술무지한 우리들은 전시회 소식도 마을 풍경도 문화와 역사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다이제 와서야 이 책을 통해 델프트,라는 마을에 대해 읽고 보고 그리고 상상해본다현재의 거장이 고향에서도 숨겨진 화가였다니모델 중 신분이 밝혀진 사람이 하나도 없다니상상력이 풍부한 어느 작가가 자료 부족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미스터리를 밝혀내듯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면 반갑겠다,란 생각도 든다. 300년 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화가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된 사연은 덥석 달려들 만큼 궁금하다<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르셀 푸르트르가 극찬했던 작품이 <델프트의 풍경>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잃어버린 시간 속 화가의 인간관계가 더욱더 흥미로워진다.



그림은 단순할 정도로 간결하고 솔직하고 사실적이다그런데 그 간결함과 회화의 사상적 기반이 시대를 관통하여 페르메이르의 위상을 만들어오지 않았나 싶다<진주 귀고리 소녀>가 순간 정지한 빛의 포착이라면 <뚜쟁이>는 표정들이 다채롭고 생생하고 감정적이다화려한 색감까지 발랄하다물론 전문지식이 없는 감상이다그래서 사전지식부재의 독자가 회화 관련 이야기를 무리 없이 따라갈 수 있는 이 책의 배려가 감사하다그런데다음 내용으로 넘어가자뚜쟁이란 직업은 내가 짐작한 것과는 충격적으로 달랐다.

 

페르메이르의 그림에서 은 안과 밖을 이어주는 도구가 아니라 빛을 전달하는 매개체로 기능한다창을 통해 들어온 빛은 한결 순화되어 방 안에 안온하고도 안락한 느낌을 전달한다시적인 정서로 충만한 부드럽고 온화한 세계드디어 페르메이르의 세계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가톨릭의 관점에서 노동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은 대가로 받아야 하는 벌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개신교특히 칼뱅파 목사들은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하며근면한 노동은 그 영혼이 얼마나 고귀한지 알려주는 증거라고 설교했다이 설교 내용대로라면 일의 종류와 상관없이 노동은 사람의 영혼을 한 발자국 천국에 더 가까이 가게 하는 과정이다.

 

노동’, ‘직업’, ‘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느끼는지를 물으면 대략 어떻게 나눠질까즐겁고 신나는 이들도 분명 있을 것이고, ‘보수를 받는 일과 즐거움은 양립할 수 없다고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동의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정당한 보수가 보장되면 즐거울 수 있다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오래된 고민처럼 해답을 찾는 도중에 지쳐버린 질문들이 떠오른다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 수 있는 삶잘 하는 일을 하고 살 수 있는 삶 아니면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견디는 삶


350년 전 페리메이르의 입장은 <우유를 따르는 하녀>의 모든 것이 빛나는 만큼이나 분명하다노동의 순간은 아름답다일의 종류와외모와 나이와 상관없이변화하는 시대와 가치관을 작품으로 적극적으로 표현한 화가였다당시 네덜란드가 상업과 자본을 바탕으로 성장해서 전성기를 구가한 것은 분명 개신교도들 중 박해받던 이들을 대거 받아 들여 고용하고 고무한 배경이 있을 것이다푸른 빛 치마를 한참 바라보다 시선을 돌리니 정밀하게 사실적인 빵 맛과 우유 흐르는 소리가 느껴지는 듯하다.


다시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유명한 바로 그 작품으로 돌아가보면,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그림은 치밀한 완벽주의자 페르메이르의 작품치고는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고 대담했다그림에서 가장 꼼꼼히 그린 부분은 검은 배경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배경을 온통 검은색으로 칠해버려 어둠 속에서 인물이 홀연히 떠오르는 듯한 인상을 준다최소한의 색과 붓질로 오히려 가장 생생한 인상을 창조할 수 있다고 화가는 말하는 듯했다.

 

페르메이르는 진주 귀고리 소녀 외에 다른 트로니를 세 점 더 그렸다

네 점의 트로니는 모두 1665년에서 1670년 사이에 완성되었다

그런데 뜻밖의 사실이 있다

페르메이르가 그린 트로니 네 점 중에서 진주 귀고리 소녀를 제외하면 나머지 세 점은 기대 이하의 작품이라는 점이다

진주 귀고리 소녀의 참된 수수께끼는 이 그림 속 모델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아니라왜 페르메이르 본인이 자신의 솜씨를 재현하지 못했느냐에 있다중략

이 작품의 총체적 매력은 그림을 그린 화가 본인마저 흉내 낼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누구나 한번은 젊은 날을 맞지만 그 젊은 날을 영원히 붙잡을 수 는 없듯이 진주 귀고리 소녀에서 빛났던 페르메이르의 천재성은 다시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

 

낱낱이 알 수 없으니 더욱예술가를 방문한 영감과 쏟아지던 재능이 이 한 작품에 모두 드러났다는 내용이 로맨틱한 신화처럼 들린다예전에 마크 쉬갈(샤갈)의 스테인드글라스 전시회에 간 적이 있는데전시회 내부 조명은 따로 없이 자연광만으로 감상하는 기획이었다늘 빛이 부족한 런던이었지만 일몰 전과 일몰의 짧은 순간 그리고 일몰 직후의 빛의 변화로 스테인드글라스가 어떻게 빛나다 스러지는지를 보고 그 빛을 모조리 내부 공간에서 느끼며이 전시회를 평생 못 잊겠구나싶었다



원작의 수준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350년 전 그 순간의 빛은 영원히 찾을 수 없겠지만 회화란 그래서 더욱 직접 찾아가서 자연광 아래서 보아야만 한다그럴 수가 없어서 그림을 화면에 띄우고 괜스레 모니터 밝기만 키웠다 줄였다 해본다진주 귀고리보다 인물의 눈과 입술에 더 시선이 가는 작품루브르 모나리자처럼 짙은 어둠 속에서 드러나는 존재다시는 같은 수준의 그림을 그릴 수 없도록 한 마력을 가진 작품저자의 말로 마무리를 대신한다.

 

설명할 수 없는 아이러니 속에서 <진주 귀고리 소녀>는 여전히 눈부신 반짝임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진주 귀고리 소녀>의 원래 배경은 초록색 커튼인데 검게 변색된 것이 오히려 화면에 깊이를 더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회화의 기술>은 그림 그리는 자신의 뒷모습을 담은 작품으로 페리메이르 자신이 가장 아낀 그림이었다많은 비밀 코드가 들어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화가가 죽을 때까지 팔지 않았고 유족들도 오래 보관했으나이후 독일 히틀러가 작품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여 소장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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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숲
니콜 크라우스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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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 이후 지식은 거의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권능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결국 지식은 그가 상상한 대로 자연을 장악하고 소유하는 데 이르지 못했고,

장악하고 소유했다는 환상만 초래했을 뿐이다.

결국우리는 자발적으로 지식이라는 병을 얻었다.

 

의식하며 살아가는 삶과 나란히 존재하는 그러나 형태가 잡히지 않고 이름이 없는 다른 삶,이란 무엇일까. 본격적으로 읽기 전부터 저자의 상상력이 상상 이상으로 자유로워야함은 물론 독자 또한 그 상상력의 갈피를 잘 잡고 따라가야 할 듯 긴강이 된다. 다행히 숨을 멈추고 읽는 긴장을 느슨하게 해주는 유머어두운 유머가 등장할 때마다 쉼터를 만난 듯 잠시 쉬어 갈 수 있었다.

 

정말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이제 없나싶게 신기한 것들이 모두 소멸하고 궁금한 것들도 다 시시해지는구나,하는 기운 빠지는 기분이 들 때에 나를 제외한 다른 이들에게 유명한하지만 나로서는 처음 만나는 작가들이 등장한다잠시 놀라고 오래 반갑다더구나 한 작품도 읽지 못한 작가인데 그 작가의 기량이 정점에 서 있다는 작품을 가장 먼저 만나는 일은 뭔가 운좋게 지름길로 들어선 것마냥 신이 난다.

 

친절하지 않아서 미스터리의 시작으로 곧장 들어가는 듯한 도입이 흥미롭다문장들을 읽는 것만으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장소들과 장면들을 꽤나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사는 장소만으로 인물들을 극단적으로 대비시키는 구도사전정보 없이 읽는 이야기의 시작이 무척 재미있다아무도 방문한 적 없는 고적하고 낡은 공간에 살면서 친척에게는 상당한 돈을 후원하고 한밤중에 서성이다 감쪽같이 사라진 아버지. 그 인물의 삶의 구체적인 내용과 사라진 확실한 이유가 그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수만큼이나 궁금하다.



실종이란 단어만큼 관심과 질문을 증폭시키는 것도 없을 것이다인물의 중요도에 따라 다르겠지만아버지의 실종 신고 이후 이스라엘 정보기관이 나서고 대통령에게 보고되는데그 나라의 시스템이 이런 구조인지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사건이 복잡하고 커질 것이란 기대는 확실해진다마지막 행선지가 교차로라니유적지와 자연 보호 구역 중간의 교차로단초를 제공하는 듯하면서도 행방을 더욱 모호하게 만드는 장치이다텅 빈 서류가방 역시 같은 기능을 한다시신도 목격자도 보고도 없는 부재사라지기 전에 희미했던 존재가 부재로 인해 확실해지는 반전. 역시 재미있다.

 

이런 상황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지만 결국에는 더없이 적절한 마무리처럼 보였다엡스타인에게 죽음은 너무 하찮았다돌이켜 생각해보면 실제적인 가능성도 아니었다생전에 그는 공간을 꽉 채우는 사람이었다몸집이 컸다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도 오롯이 담기지 않았다는 의미에서그의 존재는 너무 컸고 항상 넘쳐흘렀다모든 것이 쏟아져나왔다열정분노열의사람들에 대한 경멸과 전 인류에 대한 사랑그는 언쟁이라는 배양액 속에서 길러졌고 살아 있음을 알기 위해 언쟁이 필요했다그는 친해진 사람들의 사분의 삼과 사이가 틀어졌고남은 이들은 잘못이라고는 저지를 수 없는 사람들로서 영원히 엡스타인의 사랑을 받았다그를 안다는 것은 그에게 사정없이 뭉개지거나 터무니없이 부풀려지는 일이었다그의 묘사 속에 등장하는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그를 따르는 후배들이 긴 줄을 이루었다엡스타인은 그들에게 자기 자신을 불어넣었고 그가 사랑하기로 택한 모든 이들이 그렇듯이 그들은 커지고 또 커졌다마침내 그들은 메이시스백화점의 퍼레이드 행사용 풍선 인형처럼 날아다녔다하지만 그러다가 어느 날 엡스타인이 추구하는 윤리의 높은 가지에 걸려 펑 터지기도 했다그때부터 그들의 이름은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부풀리는 습관이 있다는 면에서 그는 뼛속까지 미국적이었지만경계에 대한 존중 부족과 동족 의식이라는 면에서는 그렇지 않았다그는 또다른 무엇이었고그 다른 무엇이 끊임없이 오해를 낳았다.

 

황혼 이혼을 하고 혼자 쓸쓸하게 살아가는 인물인가 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선호도/불쾌도 분명하고 솔직하며자신을 삶의 중심으로 두는 자신만만한 인물이다자신의 호기심에 투자하고 조사하기 위해 떠난 것일까왜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았을까.

 

엡스타인은 매우 세련된 사람이었다정제되지는 않았어도그는 자신에게 있는 잡티를 모두 없애버리고 싶어하지 않았다반짝반짝 잘 닦인 사람이었다그는 쾌락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크고 진실한 쾌락을 느꼈고그래서 아무리 섬세한 것들 사이에서도 느긋하고 편할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자신에 대해바라는 바에 대해 정확히 알고 원하는 것은 노력해서 차지하고 세계관이 흔들림없이 확실하고 설득력도 강한 사람그러나 집착이 강하거나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잘 만나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인물처럼 느껴진다그렇다면 실종은 자발적으로 사라지겠다는 결정,이었을까.

 

하지만 마지막에는 표류라고 할 만한 현상이 나타났다나중에자식들은 아버지에게 벌어진 일을 이해하고자 당시를 돌아보며 그에게 변화가 시작된 시점을 쾌락에 관심을 잃었을 때라고 특정할 수 있었다엡스타인과 그의 왕성한 욕구 사이에 무언가가 열렸다욕구는 한 남자가 내면화한 인식의 지평 너머로 물러갔다그때 그는 자신이 사들인 섬세한 아름다움과도 결별하고 살았다그 모든 것을 조화롭게 융합할 능력이 부족했거나그렇게 하겠다는 야심이 시들해졌다중략그의 안에서 뭔가가 변했다엡스타인의 존재를 이루는 거센 기후가 더는 밖으로 휘몰아치지 않았다급격한 기상학적 사건들이 생기기 전에 그러하듯이사방에 거대하고 부자연스러운 고요가 내려앉았다그러더니 바람이 바뀌며 안으로 방향을 틀었다.

 

한 순간 급작스런 내면의 변화를 겪는 이들이 드문 것은 아니지만궁금한 지점은 그 계기가 된 것이다문화적 차이일까아버지가 자신이 이룬 재산을 기부하는 행동을 자식이 모욕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무슨 심정인지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이따금 밤에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줄 때사람들이 수백수천 년간 전해온 똑같은 동화와 성서 이야기와 신화를 그대로 반복하면서 나는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빼앗는다는아이들의 정신에 케케묵은 인과의 경로들을 그토록 일찍그토록 깊이 각인시킴으로써 세상을 이해할 무한한 가능성을 강탈한다는비뚤어진 생각이 떠오르곤 했다밤이면 밤마다나는 아이들에게 관습을 가르치고 있었다제아무리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라도 그것은 언제나 관습이었다.

 

짧고 속도감 있는 문장들이 마치 속구만 던지는 투수의 경기를 보는 듯하지만한 구 한 구가 묵직하다어떤 복잡한 미스터리 장치라도 소설이라면 인물의 행동에 모든 이유가 있어야 하고결국에는 마지막 구성 단계에서 그 동기가 드러나야 할 것이다설마 이 소설이 이를 모두 배반하는 무정형이라고는 생각지 않으면서 계속 읽는다장면들이 바뀌는 속도만큼 두서없고 무질서하고 흐릿한 모든 부분들이 더욱 섬세하게 처리될 과정이라고 믿는다그러다 카프카가 등장하면서 독자인 나를 위로하는 이 모든 생각과 믿음이 흐트러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프카처럼 철저히 문턱에 머물러 산 사람도 없었다행복의 문턱저 너머로 가는 문턱가나안의 문턱우리에게만 열려 있는 입구의 문턱에서탈출의 문턱변신의 문턱에서거대하고 최종적인 이해의 문턱에서거대하고 최종적인 이해의 문턱에서그런 일을 카프카처럼 잘해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그런데도 카프카가 결코 불길하거나 허무주의적이지 않다면그것은 문턱까지 이르는 데도 희망에 대한 민감성과 강렬한 갈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문은 있다올라가거나 건너가는 길은 있다우리가 이 삶에서 거기에 도달하거나그 문을 알아보거나통과하지 못할 것이 거의 확실할 뿐.

 

두려움과 불안과는 다르게 카프카의 등장 이후 가독성이 더 증가한다커튼을 아무리 밀어내도 여전히 어둑한 공간처럼 내 안의 어두운 숲을 향해 동시에 전력질주하는 기분이 든다숲이 끝나는 장면에서는 비가 쏟아질 것인지 빛이 쏟아질 것인지 모를 일이다한 번에 모두 다 쏟아 붓듯이 어느 한 페이지를 잘라 소개할 방법이 없다놀랍게도 카프카의 이야기가 이 혼돈과 어두운 숲길을 빠져나오는 가장 강력하고 확실한 안내판이다이렇게 쓰고 보니이 말이 정확히 맞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수수께끼처럼 들린다길잡이가 된 카프카이렇게 모순되고 유쾌한 역할이라니.

 

번역의 힘을 빌려 읽은 책이지만유대인 문화역사종교갈등을 다루는 시대의식이 빼곡하고 짙으니 문학상 소식에 자주 오르내릴 작품이 되지 않을까하는 순전히 자의적인 예언을 덧붙인다.

 

왔던 방식 그대로 돌아가리라

오던 길을 되짚어서

이제는 어둠도 잠긴 사페드의 거리를 지나고

이제는 어두워진 산비탈을 내려가 어두운 계곡을 뚫고 어둡게 빛나는 바다를 따라

모든 것을 아까 전과 반대로

유한한 세상에서 사는 건 바로 그런 거니까

그렇지 않은가?

대립쌍들로 이루어진 삶?

행동하거나 돌이키고

여기이거나 여기가 아니고

있거나 있지 않고

평생 있지 않은 것을 있게 하며 살아왔다

안 그런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할 수 없는 것을 몰아붙여 생생한 존재로 만들었다

인생의 정상에 서서 얼마나 자주 그렇게 느꼈던가?

...

충만한 인생

비존재에서 존재를 향해 그칠 줄 모르고 씨름한 인생

...

그 안의 세상이 너무도 완전해서 그는 모두지 믿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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