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미스터리 2020 가을.겨울호 - 68호
계간 미스터리 편집부 지음 / 나비클럽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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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가하면 누가 떠오르나요?

 

아무리 시간을 더 줘도 저는 영국미국일본 작가들만 떠올랐습니다.

한국 추리 작가를 한 명도 기억해낼 수 없다니…….

요즘 기억력이 급격하게 상하는 징조들이 보이니 그 탓이라 할 수도 있지만…….

한국추리소설가 누가 떠오르시나요?

 

이런 자각과 함께 한국에도 추리소설 계간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막 알았는데 이번호 테마는 벌써 한국 추리문학의 세대교체로군요…….

 


재미난 인터뷰가 1/3 정도 되고신인상 당선작도 두 편중편초단편들도 있어 순서 없이 후르륵후르륵 넘기며 즐길 수 있는 구성입니다정말 다양한 내용들입니다한국작가들의 진지함사회에 대한 놓치지 않는 관심들이 아주 치밀하게 추리소설 속에 구성된 작품도 있습니다엽기부족님의 리뷰도 있군요읽은 것 같은데 기억이…….

 

어떤 작품은 두세 번 읽어도 그야말로 미스터리하고 어리둥절한 기분인 게 아주 재미있습니다멋진 추리의 세계에서 버무려지는 시간장소인물들의 면면이 흥미롭습니다겨우 행복한 일이 생겼는데읽는 독자는 더 불안해지는 것도 미스터리의 힘과 매력입니다. “모든 이야기는 미스터리다!”라는 말에 귀가 얇디얇은 저는 벌써 세뇌가 되었나 봅니다

 

언제나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소재, ‘살인’, 사람이 사람을 왜 죽이는가는 정말 인류 공통의 질문일 지도 모르겠습니다계획 살인보다 우발적인 충동으로 일어나는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은 몰랐습니다그리고 평범한 사람들도 언제든지 살인자가 되어버릴 수 있다는 현실은 가장 슬픈 비극입니다.

 

한편으로는 여전히 찬반이 격렬한 주제라는 점은 알고 있지만의학적으로도 남은 시간은 오로지 고통에 시달리는 것밖에 남지 않았을 때의 생의 연장은 어떤 의미가 남은 것일지 복잡한 생각이 듭니다자신의 몸에 대한 권리삶과 죽음에 관한 온전한 선택이 있다면…… 작품 속이지만 자신을 살해해 달라 부탁하고 살해당하는 방법 말고도 더 편안하고 존중 받으며 삶을 정리하고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저는 그렇습니다.

 

읽는 중간엄청 몰입할 수 있는 작품을 만나 다 식은 커피를 마시는 일도 재미있습니다충분히 시사적이고 현실적이고 마음을 들었다 놨다하는 작품들다른 생각 없이 읽을 수 있어 감사합니다언제나 멋진 미스터리 작품의 건승을 응원하렵니다.



계간지 한 권 읽고 과분할 만큼 한국추리소설가들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현혹(?)하는 장치 없이 다양한 분들의 풍성한 글로만 승부하는 멋진 잡지란 생각도 듭니다.

 

마지막 장의 미스터리를 쓰는 법이란 글은 정말 매력적인데추리문학을 정말 좋아하지만 내가 쓸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서 재미있으면서도 쓸쓸한 기분이 들었습니다독서글쓰기시사정보역사적 사실을 주의 깊게 보고 대화를 많이 하는 건할 수 있을 듯한데……아무리 그래도 문학작품을 쓸 수는……괜한 고민까지 해보았습니다.

 


세대교체가 치열하고 흥미진진하길한국추리문학계에도 오래된 추리작가님들이 존재할 수 있기를한국추리문학작가들을 기억하는 세계 독서인들이 많아질 시절을 행복하게 상상하고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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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수사학 - 반전 스피치
허만섭 지음 / 지식과감성#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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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만섭 저자는 아주 최근에 법조 기자 카르텔 관련 기사에서 자주 거론되는 분이라 기억하게 되었다언론 제도와 취재 관행 연구처럼 시사적이고 복잡한 연구팀에 참여하는 동시에언론과 공중정치인 간의 의사소통에 관한 연구도 진행하는 분이다.

 

이 책을 집필하기 위해 고대 그리스의 책 '레토릭(rhetoric)'부터 2020년 발간된 국내외 논문까지 '정치수사학(political rhetoric)'과 관련된 230여 편의 문헌을 검토했다고 한다이는 유권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정치인들의 메시지 표현 전략을 설명하는 동시에, '정치수사학'의 원리로 통찰력 있게 설명하여 정치적 소통에 관한 실질적 교훈을 얻는 것이 집필 의도라 밝힌다분명 전문적이고 진지하고 복잡할 내용이지만, 222쪽이라는 부담스럽지만은 않은 분량이라 읽기를 도전해 보았다.



한국 정치와 미디어 환경에서 생산되는 말들이 어떤 분위기인지 모를 이들은 없을 것이다막말궤변위선식언저자에 따르면 값싸고 부정직한 반수사적인 말들이다. ‘수사rhetoric라는 것이 본래 고귀한 성품에서 우러나는 진실한 말을 지향한다는 사실이 서글프게 느껴지는 현실이다.



물론 이상적으로 정치인들이 늘 진의로 말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것도 아니고상황에 따라 정치적 수사가 극도로 복잡한 셈법으로 작동하는 상황에서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필요할 때도 있을 것이다하지만 정치적 행위들로 보이는 이면에 경제적 이익들이 더욱 복잡하고 강력하게 작동하는 현실에서는 로비나 부탁으로 이루어지는 수사들도 가득하다특히 국제관계를 생각해보면 외교에서 수사는 생존기술에 다름 아니다.

 

어쨌든 이러저러한 수사들이 있다는 점을 기억하고 잘 골라 알아들으면 문제가 없을 터인데더 큰 문제는 한 귀로 흘려야할 수사로비정치의 수사를 듣고 되풀이하는 언론행태일 것이다저널리스트들이라면 당연히 사실과 정보 해석 능력이 있어야 할텐데반복해서 다른 나라들이 자국 사정에 따라 플레이하는 정치적 수사 게임들에 휘둘리는 - 휘둘리는 건지 동조하는 건지 모양들은 민망한 경우가 자주 있다.

 

시청자들이 그냥 듣기에도 전후맥락 하나 없고 되풀이할 가치는 더 없는 이야기들을, ‘그들의 발화 그대로 베껴서 옮길 이유가 어디 있나 싶다일부 정치인들도 마찬가지이다유일하게 관심 있는 것은 오직 이해이익관계인 타국의 정치인들이 그런 시각을 숨기지도 않고 한반도 문제를 바라보는데 왜 그 말을 자진 유통시키는 것일까정치적 입장이고 뭐고 최소한의 판단력과 자국의 이익을 우선하는 정도의 애국심은 무리인걸까.

 

취임서와 연두교서를 분석한 결과미국 대통령들의 문제틑 현대에 들어 더 반지성적이고더 추상적이고더 단정적이고더 구어체적으로 변해 있었다. 45

 

아리스토텔레스는 레토릭에서 인간은 말을 통해 자신을 변호할 줄 알아야 한다게다가 인간이 자신의 육체로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 한다면인간이 말을 통해서 자신을 보호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합리할 것이다말의 사용은 인간에게 육체의 사용보다도 고유한 것이다”(이종오, 2008 재인용)라고 수사학의 유용성 및 필요성에 대해 적고 있다.

 

미디어와 여론이 중시되는 시대에 대통령의 권력은 명백하게 설득력에서 발생한다현대 대통령들의 지도력은 말로써 의회의 협력과 여론의 지지를 끌어내는 수사적 지도력(rhetoric leadership)’을 동반해야 한다민주주의라는 섬세한 통치’ 시스템에서 대통령의 언어는 권력의 원천이 되기도 하고 권력의 맹점이 되기도 한다. 24

 

여론을 실제로 지배하는 존재는 대통령이 아니라 엘리트 담화로도 알려진다엘리트 담화는 대통령이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에 대한 원리를 세운다또 대통령의 말이 이 원리에 부합하기를 희망하는 공중의 기대를 만든다대통령이 이 기대와 무관한 말을 하면대통령이 공중의 지지를 얻는 것을 방해한다. 186

 


아리스토텔레스는 변증법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변증법이 실제적인 삼단논법과 표면상의 삼단논법을 발견하는 데 이용되는 것처럼수사학이 실제적인 설득과 표면적인 설득을 발견하는 데에도 이용된다는 것은 명백하다왜냐하면 궤변술을 행한다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의도이기 때문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차이점이 있다웅변가를 예로 들자면과학적 지식에 의거한 웅변가와 의도에 의한 웅변가가 있다다른 한편 소피스트의 경우의도에 따르게 되면 소피스트가 되고의도가 아닌 자신의 능력에 따르게 되면 변증법론자가 되는 것이다(이종오, 2008 재인용)”라고 대비해서 설명하고 있다.

 

공중은 정치인들의 화려한 수사 속에 기만이 들어 있을지 모른다고 의심한다이젠 대통령의 아우라는 대통령다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평범함에서 나오는지 모른다. 201

 

아리스토텔레스의 레토릭에서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사실임직함(eikos)’이다사실임직함이란 대중의 수준으로 내려온 논리학의 핵심을 지적하는 말이다즉 아무리 진실이라도 대중이 그럴듯하다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설득하기 어려울 것이다따라서 그럴듯하지 못한 가능성보다는 불가능한 사실임직함이 (설득에는더 낫다는 뜻을 담고 있다대중이 공유하는 전재를 이해하는 것이 스피치의 설득적 구조에 필수적이며대중의 상식 위에서 삼단논법이나 생략삼단논법 등의 논리도 펼 수 있다는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 (레토릭, 2016.09.01., 박성희)

 

기교 없는 기교는 기술 대신 덕을 지향한다평범한 말 안에 깃든 건전한 판단으로서의 양식, ‘이해관계가 아닌 양심에 따르는 성품으로서의 도덕성, ‘남을 위하고 염려하는 마음으로서의 선의가 청취자를 설득한다. 204

 

예상하대로 페이지수보다 더 많은 내용들을 어쩔 수 없이 보이는 것만 읽으며 통독했다다만한 가지 정치적이든 아니든 우리가 수사학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고 그에 따라 수사학이 통용되는 환경들 내에서의 바람직한 - 지성적이고 구체적이고 진실한 결과들을 보려면두말할 필요 없이 교육과 훈련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확실해졌다그리고 그것은 지금의 수능 체제와는 동떨어진 목표일 것이다.

 

코로나 판데믹이 세상을 다 뒤덮은 듯 보이는 매일이지만일본은 2020년부터 국제 바칼로레아를 도입했다다양한 주제들*에 대해 생각하고 대화하고 토론하고 글쓰고 나누고 공감하자는 의미이다더구나 학생과 교사가 교과서를 함께 만들고 학습하고 교육하는 과정을 제시한다고 한다대한민국의 교육 문법도 이것만이 정답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바뀔 가능성이 있을까.

 

정치적 수사rhetoric’에 대해 아는 바가 적어 친구들에게 물어 봤더니정치적 수사investigation’에 대해 이런저런 의견을 들려준다지금 대한민국의 정치권과 언론이 가장 많이 생산하고 유권자들이 가장 많이 노출되어 있는 정치적 수사rhetoric’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이해가 되었다.

 

......................................................................

 

* - 나는 누구인가

   - 나는 어떤 장소와 시대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 나는 스스로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 만물은 어떻게 기능하고 있고 세계는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

   - 나는 어떻게 스스로를 조직하고 사회를 체계화할 수 있는가

   - 내가 지구에서 다른 생물들다른 사람들과 공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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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단호한 행복 - 삶의 주도권을 지키는 간결한 철학 연습
마시모 피글리우치 지음, 방진이 옮김 / 다른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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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전공하던 시절그리스 철학 강의를 무척 힘들게 들으면서 그래도 나는 일반적으로 알려 지길 스토아학파의 대척점에 있다는 에피쿠로스학파의 철학에 힘을 덜 들이고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그러니 스토아학파*의 철학서들을 열심히 읽지도 않았고귀동냥으로 들은 인물들 중 세네카와 아우렐리우스는 아주 조금 기억이 남았지만에픽테토스*는 과문해서 완전히 낯선 인물이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못 다한 공부를 좀 채워보자반가운 기회로 삼아 이 책을 읽어 나갔다내 시절 교과서 수준이라야 거짓에 근접할 정도로 단순화되거나 일반화된 내용들이 가득했으니에피쿠로스학파가 쾌락주의라는 평이 뜬금없는 엉터리인 것처럼스토아학파가 금욕주의라는 것도 지나친 단순화에 다름 아니다


일례로 스토아 학파의 4대 기본 덕목 실천적 지혜용기정의절제 에 대한 멋진 설명을 이 책에서 읽어 보고나니 비로소 정확하고 아름다운 철학적 내용을 제대로 알 수 있구나 싶다구절 마다 이후의 다른 철학자들이 떠오르는것을 보니 스토아철학은 내 짐작보다 훨씬 더 후대에 영향을 미치며 사상적으로 살아 남았다고 생각된다.

 

단호한 태도로 행복을 진지하게 추구하는 원칙주의자인간을 중심에 두고 깊이 사유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는 당연한 생각이 든다그러니 가장 힘겨운 순간에 처한 이들이 에픽테토스의 철학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수도사가 영혼 수련을 위한 지침서로조지 워싱턴이 전쟁 중에미 해군 영웅이 고문당할 때…….




저자의 인생을 순식간에 변하게 한 에픽테토스의 글을 읽으니대학시절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오늘 무엇을 할 것인가,가 시험문제로 나왔던 것과 교수를 감동시킨 멋진 답변이 생각난다이런 질문을 받으면 다른 이들의 답변은 무엇일까가끔 궁금했다댓글에 달아 주시는 분들 계시면 참 반갑고 감사하겠습니다.

 

우리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분별하는 지혜를 쌓아야 한다.

또한 우리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을 먼저 처리할 수 있는 용기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정심을 키워야 한다. 33

 

온전히 개인에게 달린 것은 판단의견목표가치관 그리고 어떤 행동을 하거나 하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47

 

말로만 철학을 떠들어서는 안 되고 그것을 실천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조롱을 당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86

 

다리가 부러질 때도 스토아철학의 원칙대로 말했고추방당했을 때도 굴하지 않고 철학 학교를 세워 운영한 의지의 인물소크라테스를 롤모델로 삼아 아무 것도 글로 남기지 않은 철학자현재 전해지는 <담화론>은 짜 중 한 명이 기록한 것이고유실본을 제외한 것을 요약한 것이 <엥케이리디온>이라는 짧은 지침서이다.* 정말 많은 지식인지성인 작가들 그리고 영화감독들까지 읽고 소장하고 변형해서 언급하였다심지어 현대의 증거기반 심리치료요법 중에 가장 성공적이라고 인정받은 인지행동 치료요법이 앨버트 앨리스의 합리적 행동정서 치료법이고 이 역시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을 참고한 것이다왜 전혀 몰랐을까…….

 

원래 세상에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다.

다만 우리의 생각이 좋고 나쁨을 결정할 뿐이다.

햄릿 2막 2셰익스피어. <엥케이리디온 5절 변형>




에픽테토스와 <엥케이리디온>의 가르침은 한 번도 중단되지 않고 인류의 삶에 외형을 조금씩 바꿔가면서 늘 머물러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저자는 1,900년 전의 철학자와 그의 가르침이 여전히 유효할 수 있다는 이유를 이렇게 전한다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인간의 본성 그 자체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고. 2,000년 전 이들도 오늘날 우리가 그러하듯 사랑하고희망하고두려워하며 살아가다 죽었다고.

 

저자가 붙인 별칭처럼 이 책은 바데메쿰vade + mecum, 가다 나와 함께’, 즉 휴대용 책이라는 뜻이며저자는 이 책을 실전 지침서라 부르고 싶어 한다그런 의도와 기획에 충실하게 너처럼 스토아주의와 에픽테토스의 기초부터 시작하는 이들에게 좋고철학적 훈련이나 지식이 없어도 현대 언어로 사례를 통해 설명하는 글이라 아무 문제없이 읽을 수 있다, 2부 중반부터 3부는 저자가 독자적으로 접근하고 해석하고 수정한 내용이라논점을 바꿔가며 읽을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실전과 실천을 위해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첫 번째로 떠오르는 것은 에픽테토스가 거급 권장한 철학 일기 쓰기이다철학이 앞에 나서긴 했지만그냥 일기 쓰기와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매일 그날 한 일을 전부 돌아보기 전까지는 당신의 유약한 눈꺼풀 안으로 잠을 들이지 마세요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어떤 일을 완수했는지어떤 일은 왜 마무리하지 못했는지 반성해야 합니다그러니 시작하세요자신의 행동을 돌아보세요그런 다음 자신의 악행을 꾸짖고 선행에는 기뻐하세요.‘

 

초등학교 시절부터 이런 목료를 정하고 일기쓰기를 권장해주는 사회였다면 어땠을까아쉽고 아깝다어른들에게도 이런 글쓰기를 권해주는 사회라면 또 어떨까…….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리기를 기대하지 마세요.

철없는 아니나 그런 기대를 합니다.

우주는 우리에게 빚진 것이 없습니다.

개인의 사정을 고려해가며 우주의 일을 하지는 않습니다. 8

 

미신에 현혹되지 마세요.

카드찻잎심령술사를 통해 미래의 징조를 읽을 수는 없습니다. 18

 

누군가 여러분의 몸을 마음대로 다루어도 된다며 남에게 넘겼다고 해봅시다.

분명히 화가 나는 상황이지요.

그런데 왜 다른 사람이 여러분의 마음을 조종하고 마음대로 다루는 현실에는 화를 내지 않는 겁니까? 28

 

낯설지도 난해하지도 않은 철학과 철학자, 뒤늦었지만 만나게 되어 다행이고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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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기 스토아 철학에 이르러서는이론적-논리적 관심보다는 실천 철학에 대한 관심이 더 부각되어 전면으로 나타나고 있다헬레니즘 시기의 다른 철학 유파들과 마찬가지로 스토아 사상도 개인적 실존을 철학적으로 확고히 하려는 소크라테스적인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급격하게 붕괴되어 가는 사회와 정치적으로 불완전한 사회에서 불확실한 미래를 내다보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인지에 대한 관심이 철학적 화두였다

 

* 에픽테토스 그리스어로 구매된 것을 뜻한다 는 늘 자유와 노예를 자신의 논의 주제로 삼는다그가 말하는 자유란 원칙적으로 인간이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정신적 자유를 의미한다. ‘노예란 자기 자신이 스스로에게 부여해서 만들어진 정신적 부자유이다. ‘정신적 자유와 스스로 자초한 노예의 대조야말로 그의 일생을 통한 철학적 화두이다자유와 노예는 자신이 속하는 사회적 지위와 무관하게 사람에게 속하는 정신의 지위이고 태도에 대한 비유이다에픽테토스 [Epictetos, Epictetus]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 에픽테토스의 담화록에서 아리아노스가 직접 뽑아 놓은 도덕적 규칙들과 철학적 원리들을 모은 요약본의 성격을 지니는 선집(選集)’ 내지는 편람(便覽)’인 엥케이리디온(Encheiridion; 문자적 의미는 손 안의 작은 것이다)이 전해진다에픽테토스 담화록』 (해제), 2006.,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김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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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0-12-20 19: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랜시간 산책하면서 삶을 리뷰해볼것 같아요!ㅎ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처음 읽었을때 전체적인 저자의 취지는 어느정도 알겠지만 무서운 지배논리가 숨어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꼰대가 되어가는지 스토아학파 논리가 조금은 다가오기도 하더군요!ㅎ
좋은 글 감사합니다! 담주도 따뜻한 한주 되십시요!ㅎ

poiesis 2020-12-21 16:28   좋아요 1 | URL
크흐... 명상록을 읽으신 분! 저는 이제 기력도 체력도 달려서 편안하게 라떼는~ 꼰대의 삶을 저항없이 살고 있습니다...ㅠㅠ 지배를 감지하는 일도 저항하는 일도 더 예민한 젊음의 몫으로 막 멋대로 떠넘기고...ㅠㅠ 따뜻한 인사 말씀 감사합니다. 모쪼록 무탈, 건강하시길 늘 바랍니다.
 
세계사톡 5 - 현대 이야기 세계사톡 5
무적핑크.핑크잼 지음, 와이랩(YLAB) 기획, 모지현 해설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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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만든 책보다 책이 만든 사람이 더 많다.

팩트 체크 가능하신 부운~



인류에 위기가 찾아왔다고 할 때마다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은 미래에 대해 어떤 상상을 했을까언젠가 다 지나간 일이 되어 옛이야기 하고 살 날 있으리라 믿었을까아니면 지금처럼 어쩌면 옛 이야기할 미래는 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고 체념하고 좌절 했을까……어쨌든 인류가 살아 온 시간의 기록을 우리는 아직은 읽을 수 있다.

 

다시 생각해보니 꽤 오랜 세월을 세계사톡 시리즈와 함께 했다카톡앱을 지우는 부모 세대와 달리 톡을 열어 두고서는 삶이 불가능합니다 ― 카톡도 틱톡도 익숙하고 거부감이 없는 아이들 세대에 딱 맞춰 기획 출판된 세계사책이다.

 

지난 암울한 학창시절, ‘국사와 세계사를 얼마나 난폭하고 지루하게 가르쳤고 배웠던지 안 그래도 암기 꽝인 나로서는 그 둘은 진저리처지는 수험과목일 뿐이었다그런 경험을 교훈 삼아 뭐든 그보다 덜 지루하고 덜 무용하다면접근성이 좋고 가독성이 좋다면 읽어서 좋을 책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뻥입니다다 뻥이었습니다!!!

 세계대전이 야심가들 때문에 발발했다고 생각하시나요뻥입니다

불합리한 두려움과 무능함이 수많은 인명을 희생시켰습니다!!!

 

짐작한 대로 아이들 세대에 훨씬 더 친근하고 읽기 즐거운 책이었지만분명한건 내 교과서들보다 훨씬 알차고 제대로 된 역사지식들이 충실히 담겨 있다는 점이다이런 교과서였다면 그토록 뜨거운 원한이 쌓이지 않았을 것이다다시 생각해봐도……좋은 책들 넘쳐나는데 다 못 읽고 너절한 정보를 암기하느라 낭비한 시절이 너무 아까워 화가 치민다.



통시적으로 살펴 본 인류사에는 생각보다 예언가들이 참 많고 그 점이 재미있기도 하다주로 소행성 충돌전쟁 혹은 자연재해들을 이유로 삼았다내 세대라 할 시절에 세상이 멸망한다고 해서 주목받았던 노스트라다무스도 한 때는 정확한 예언으로 유명했던 인물이다 메디치 가문 출신 프랑스 왕후와 세 아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참고하세요냉정하게 살피면 지금 보니 웃긴다고 느껴지는 역사 속 세상들 중 일부는 바로 얼마 전 일이다첫 미국흑인여성 부통령 카멀라 해리스의 당선 100년 전 여성들은 참정권조차 없었다.



요구하고 주장하고 애쓰고 결국엔 목숨을 바쳐 뜻을 펼치지 않으면세상에 선물처럼 거저 받는 것들은 아무 것도 없다여성 참정권 운동에 참여한 모든 분들을 곡해하고 경시할 의도는 천만번 죽어 다시 태어난다해도 없지만전쟁터에 나간 남성 인구가 너무 많아서 사회 노동력 확보를 위해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용이해졌다는 것도 찜찜한 사실이다언제나 가장 냉정하고 정확하게 세상을 이해하는 도구는 역시세상 제일 무섭고 어려운 먹고 사는 문제경제이다그런데 함께 먹고 함께 사는 삶이란 인류 문명을 뒤흔드는 판데믹이 와도 도저히 안 되는 건가.

 

역사 속 인류의 면면을 볼수록 영민하다기 보다는 참……1차 세계대전을 겪고 한 선택이 전체주의나치독재자그리고 또 다른 전쟁이러니 만병통치약이 그 오랜 세월 팔렸던 것이다. 21세기 쇼닥터들의 활약도 뒤지지 않지만!



어쨌든 이 멍청한 선택으로 유럽이 붕괴하고 연합군이 승리하고 세계의 축이 바뀌고 미소전쟁이 발발하고 그런데 지들 땅에서 안 하고 한국과 베트남을 초토화시켰다유럽은 통합인지 뭔지를 하긴 했지만 역시 전쟁은 사라지지 않았다임마누엘 칸트가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을 쓴 때가…… 눈물이…… 언제 세상이 철학자 말에 귀 기울인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다고 새삼스레…….

 

자극적인 이야기를 좋아하진 않지만현대사를 다루니 현실 분노가 치미는 예들이 많다특히 전범 국가들의 이야기와 전후 태도의 차이는 볼 때마다 - 요즘 말로 딥빡이라는 신종 감정이 느껴진다얼마나 빠르게 사람 목을 벨 수 있나 내기하면서 공중으로 던진 아기 베기를 했다고그러고도 사과도 처벌도 없냐밥은 먹을 만하냐.



현대사를 고루 다룬 여행기와도 같은 38개의 톡을 읽은 직후에 떠오르는 건 역시나 현재의 상황이다과연 인류는 현재의 판데믹에서도 살아남아 제대로 된 문명을 유지하고 이 시절을 역사로 기록할 수 있을 것인지.

 

특히나 일 년 가까이어쩌면 훨씬 오래 전부터 최선을 다해 최전선에서 노력해 본 많은 분들을 생각하면 <202X년 XX월 XX일 신종코비드19 판데믹이 종식되었다>란 기록이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오랜 세월 책면으로 을 보내준 무적핑크에게 감사하며 그의 무사안일을 바란다.



조선왕조실록을 죽기 전에 꼭 완독하리란 얼토당토않은 계획을 오래 가지고 있었는데이제 그만 정신 차리고 무적핑크와 함께 <조선왕조실톡>을 가족들과 함께 읽을까 마음이 흔들거린다.


톡은 종료되어도 세상은 흘러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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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 지나온 집들에 관한 기록
하재영 지음 / 라이프앤페이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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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떤 일상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시절의 집

 

이 책을 읽으며 내가 흘린 눈물 속에는 아주 복잡한 재료들이 섞여 있기도 했다아직 독립하기 전 기억 속의 집에 대한 디즈니 동화와도 같은 그리움책임도 고민도 불안도 대책도 필요 없었던 미성년 시절에 대한 유치한 동경안전한 울타리로 오랜 세월 기능하기 위해 집 전체를 돌보고 애쓴 가족 구성원들에 대한 미안함과 부채감그리고 집을 집답게 유지하기 위해 기어코 집 자체가 되어버린 가족에게 얼마나 모욕적일지 몰라 마냥 떠나고 싶어 했던 경박한 욕망이런 것들도 들어 있다내가 충분히 안락하고 편안했던 시간들이 다른 누군가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었을 거란 숙고는 얼른 도망치지 않기가 너무나 괴롭다.

 

집은 우리에게 같은 장소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집이 쉼터이기 위해 다른 누군가에게 집은 일터가 되었다.

보수도출퇴근도휴일도 없이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가사 노동의 현장.

엄마는 운전을 배우고 싶어 했고 같은 지역에 사는 친언니를 만나러 가고 싶어 했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는 웬만해선 며느리의 외출을 허락하지 않았다.

'집처럼 편하다'는 관용구대로 일과가 끝난 뒤 돌아가는 휴식의 공간을 집이라 한다면

엄마에게 집은 집이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가족에게 집이 집이기 위해 엄마는 집을 비워선 안 되었다. 26

 

언제나 혼자인 것과 항상 함께인 것 가운데 어느 쪽이 더 견딜 만할까?

스무 살의 내 소원이 서울에 가는 일이었다면 스물여섯 살의 내가 바라는 것은 '자기만의 방'이었다.

자기만의 방은 독립과 해방의 공간이기 이전에 나의 눈물을 타인에게 들키지 않을 권리였다. 54-55

 

집에 대해 쓰는 것은 그 집에 다시 살아보는 일이었다.

간절히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었고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돌아가고 싶거나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은 공간이 아니라 시절일 것이다.

과거가 되었기에 이야기로서의 자격을 부여받은 시절.

나는 집에 대해 쓰려 했으나 시절에 대해 썼다.

내가 뭔가를 알게 되는 때는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이다.

현재의 집이 가진 의미를 깨닫는 것도 이곳을 영원히 상실한 다음일 것이다.

아직 이집은 한 시절이 되지 않았다. 198

 

2. 재정 능력과 정치적 공간으로서의 집

 

봄에 이사 가려고 둘러봤다 그만 둔 집들이 모두 2억 이상 매매가가 올랐다고 이런 미친 세상 포기라고 화를 내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었다.

 

사는 곳living space을 사는 것buying item 카테고리에 넣어두고 필요할 때마다 정치 자금 마련의 수단으로 이용했던 초기 부동산 투기 정책부터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줍니다라는 광고가 낮밤을 밝힐 때에도 이런 결말은 마련되어 있었을 것이다

 

똑같은 원리로 돈 안 되는 공공의료시설 따위 성가시기만 하다고 줄일 궁리나 하다 병상이 모자라다고 연일 보도하는 것처럼공공주택 역시 이제 와서 <대한민국공공주택 설계디자인공모따위를 떠들썩하게 해봐야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이 책은 부동산 투자 성공법 이라 쓰고 투기 비법을 간절히 원한다 이 쓰인 책이 아니라 브랜드가 찍힌 매물들은 한 채도 나오지 않는다하지만 여전히 건물로서의 집은 구성원들의 재정 상황을 가릴 수 없이 드러내는 확실한 증거이기도 하고각자의 집이라도 구성원들이 생활공간을 어떻게 배당하고 있는지를 들여다보면 가장 정치적인 셈법이 정답처럼 선명하기도 하다.

 

가장 생생한 증거는 아이들의 발화 어디 사니몇 평? - 와 TV 프로를 보면 잘 드러난다어느 집에 들어가서 아버지를 위해 주방을 리모델링 해주고 어머니를 위해 서재를 리모델링한다고 할 때 익숙한지 어색한지 웃긴지 불편한지 잠깐 상상해보자.

 

공간을 소유하는 것은 자리를 점유하는 일이었다.

나는 누구인가?’하는 물음만큼이나 나의 자리는 어디인가?’하는 물음이 나에게는 중요했다.

집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집에서의 내 자리를 인식하는 일이었다.

사회도 물리적으로는 하나의 거대한 장소이므로 공공체 구성원으로서 나의 위치도 자리의 문제였다이것은 하나의 화두가 되었다.

넓게는 이 세상에서좁게는 이 집에서 나의 자리는 어디인가? 130

 

"괜찮아집 전체가 다 내 방이지." 엄마의 뜻과 달리 그 말은 엄마의 처지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었다며느리아내엄마인 여자는 집 안의 어느 곳에나 있어야 하므로 집 안의 어느 곳도 소유해서는 안 되었다엄마는 장소 그 자체였다. 141

 

3. 거부하거나 잃어버린 것들로 기억되는 집

 

이 책의 정체는 무엇일까책을 읽는 도중 그런 의문이 들었다내 감정과 반응이 여러 장르의 책을 읽는 것처럼 휙휙 변하는 것을 느꼈다작가가 가장 친밀하게 느껴지는 에세이를 쓰다듬듯이 읽으며 기억 속 내 집들을 불러다 온갖 감정을 맛보기도 하다가대한민국 주거공간의 역사라는 부제의 사회 과학책인 양 읽으며 여러 통계와 기사들을 떠올려 보다가가장 인문학적인 사상서인 것처럼 논리에 집중하며 머릿속으로 온갖 논쟁을 나열해 보기도 한다.

 

어쩌면 아마도 이라는 공간이 이 모든 것들이 종합적이고 중첩적으로 일어나는 장소이기 때문일지 모른다가장 사적인 공간이면서 언제나 정책의 대상이면서 또한 갖가지 부조리와 범죄와 환원적 이유가 배양되는 곳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그러니 저자가 친절히 언급해주고 내가 기억하지 못한 말처럼 에 대해서 쓴다는 것은 그 집에 살았던 시절에 대해 쓰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작가가 살아내고 기억해낸 시절의 최초의 집부터 현재 머물고 있는 시절의 집까지 작가 개인의 인생사회의 변화 그리고 시대정신의 변화를 혼란스럽도록 따라 읽고 있었던 것이다덕분에 그 시절은 지났는데도 머릿속에 달라붙어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 반갑지 않은 집도아무리 그리워도 구조 변경과 함께 모든 남은 것들조차 영원히 사라져버린 분들도 떠올랐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

서울 관악구구로구동작구영등포구금천구와 경기도 군포시광명시 일대에서 발생한

이 사건은 '서울 서남부 연쇄살인사건'이라 불렸다.

어느 언론은 당시 개봉한 영화 <살인의 추억>의 제목을 따와

충격경악서울판 '살인의 추억'이라는 헤드라인을 내보냈다.

또 다른 언론은 범행이 주로 비 오는 목요일 밤에 일어났다며

비 오는 목요일 밤의 괴담이라는 타이틀을 붙였다.

그들에게 여성들의 죽음은 자극적인 흥행물이거나 진부한 도시 괴담이었으나

나에게는 현실이었다나는 연쇄살인범이 여성들을 해치는 동네에 혼자 살고 있었다. 62

 

눈을 뜰 때마다 상실을 깨닫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되었다중략.

내가 잃은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떠나보낸 것은 개 한 마리가 아니라 다정한 존재와 함께한 내 삶의 한 시절이었다.

가끔 피피의 이름을 불렀다.

세상에 없는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한 시절을 부르는 일이었다. 175

 

4. 아직 도착하지 못한 친애하는 나의 집은 어디인가

 

어디에서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제삼자가 보기에도 미련할 만큼 오랜 세월 동안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와 짝을 지어 끊임없이 결정을 요구했다내 신경증을 키운 것은 팔 할이 이 질문이다아무도 대신 답해줄 수 없어 오로지 혼자서 답해야 하는 질문자꾸만 의료진이 공무원이 정부가 다른 나라들까지 집에 머물라생사가 거기에 달렸다너 자신만이 아니라 남들의 생사까지 좌우된다고 하는 시간이 길어지니근무도 집에서 하라는 시절이니적어도 내 짧은 생에서는 유례없이 에 대한 개념과 태도를 정리할 필요가 매일 더 확실해진다.

 

이 책의 어디쯤에서 이전 월세 세입자는 마구 비웃었지만나는 작가가 아등바등하며 자신의 공간을 바꾸고 꾸미려고 하는 장면들이 정말 좋았다그런 시도와 노력이야말로 무심한 공간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유일한 방식이라 믿기 때문이다그 과정에서 여기서 살 나 자신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상상하고 원하고 꿈꾸는 일을 했을 테지라고 짐작해 보는 일이 정말 좋았다.

 

우주에서 단 한 곳오롯이 자기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공간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진 공간그런 자기만의 방과 집은 감히 말하건대 모두에게 필요하다나는 판자촌과 노숙에 해당하는 가난을 모른다너무 무서워서 모르고 싶다단지 내 불안증이 활발하게 증폭될 때면 지킬 것도 별로 없는 삶에 뭔가를 더 잃을까 싶어 신경이 짓눌리고 실제로 통증을 느끼기도 한다.

 

게다가 불안증 안에 머물 때 내가 잃게 되는 것에는 가족들도 포함이 된다이전에 잃어버린 잃었다고 기억된 가족을 떠올리고는, 이별이란 사진 속에 함께 했던 딱 그 시간까지만 삶이 존재했고 이후는 정지시키는 것이란 무시무시한 생각을 한다남은 표정을 들여다보며 무엇을 더 이해할 수 있을까 괴로워하기도 한다그래서 어쩌면 사람들은 고인의 흔적을 남김없이 치워버리는 지도 모르겠다.

 

몇 년 전에 오래 전 살던 동네 근처를 갈 일이 있어 기억 속의 공간에 들러보았다어쩌다 주택지가 관광지처럼 보일 때까지 다듬어졌는지내가 알던 시절을 모두 상실한 기분이 아니라애초에 잘못 찾아왔나해서 기억을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어쩌면 다시 불려갈 필요가 없는데도 자꾸만 꿈속에 소환하는 악몽의 배경이 되는 장소도 이젠 기억조차 안 날 정도로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 지 오래일 지 모른다그러니 시도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일은 지금의 공간을 스스로에게 좀 더 친절한 곳으로 바꾸는 일일 지 모른다. 이런 기특한 생각은 [2021년 작심삼일을 반복할 목록들]에 넣어 둬도 좋겠다 싶지만...... 워낙 게으르니 하루도 못가 집어 치우고 머물고 싶은 미래의 공간만 자꾸 상상해 보고 있을 가능성이 더 그럴 듯하다.



조금씩 읽고 오래 울기도 했다.

 

경애한다고 말하며 그의 글들을 스토킹 하듯 찾아 읽는 정희진씨는 역시 진실만을 말하는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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