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의 거울
호은 리베라타 지음 / 지식과감성#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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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학소설판타지철학소설로 분류된 장편이다.

SF도 판타지 문학도 좋아하는 나는 혼자 푹 빠져 신나고 재미있게 잘 읽을 시간을 고대했다.

 

그런데…… 도전하고 실패를 반복해서 지난 해 겨우 겨우 다 읽을 수 있었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보다 더 어렵다……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첫 장부터 문장들이 읽히지가 않고 배경과 인물들을 기억하기가 너무 힘들다일단 적었다.

 

수과학우주의 중심인 초문명계 데제리오 네쳐샴쌍둥이 무무리옴탄과 네쳐옴이 만든 철학적 윤리인 우주의 낱알 오방기계 인류 탑 포코스최고 상위 나프타아들 데제로스오르간에 옴이 스며들어마곡귀계우주에 남은 계를 수습실리벨레리베라타(작가의 집안?), 아모르우주의 축인 오방암흑의 기사 니그마달시지구의 옵스 가문나프타리옴탄의 무카시야르토카(모모네쳐리수스베오딘자베즈보리새로운 우주의 신인간 지황거울로 삼으려 한다옵스가의 마야와 지황을 연결감과지혜의 청동거울.

 

단순히 낯설어서 안 읽히는 건 아닐 텐데…….

 

방대한 만큼 난해하고 불친절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거의 모든 장면이 현재형 문장들로 진행된다.

이 결론이 판타지 소설을 읽는 내 독해 능력의 급작스런 퇴행이 아니라면,

태양 아래 온전히 새로운 것들로 창조의 세계를 구축한

내 능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천재 작가의 작품일 터이다.

 

대강 스토리 흐름이 잡히는 부분도 있지만 책을 읽고 이야기 흐름을 좀 알겠다란 걸 읽었다 할 수 없지 않을까.

 

우주가 있고 문제를 일으키는 악당이 있고 라는 존재가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지구로 떠나고우주의 축인 오방을 다시 세우는 게 목표이고진화된 오방을 찾는다?

 

다 읽었는데 어느 시대를 다녀왔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철학이 담겼는지도 모르겠다.

등장인물들은 왜 등장했는지역할은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최악의 번역서라고 하면 이해가 될 것이나 이 책은 번역서가 아니다.

옴니버스 구성이라 해도 연계가 안 이루어진다.

여러 사람이 참여한 것처럼 사건 해석도 일관성이 없다.

 

그나마 제대로 읽을 수 있는 것은 표지뿐이다.


잘 읽을 수 있는 다른 독자들이 있을 터인데, 내가 읽기를 시도한 것이 미안한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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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도 복리가 됩니다 -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인생 역전의 기술
대런 하디 지음, 유정식 옮김 / 부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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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다라고 쓰니 마치 잘 피해야할 불길한 존재라도 되는 양 두려워하는 느낌이다늘 해야 하는 일들로새로 해야 하는 일들로이 두 가지가 올 해는 심하게 혼재되어 있고 어느 때보다 체력이 떨어져 있다.

 

구체적으로 따져보면 대단한 일들도 아닌데뭉쳐 던져 놓은 산더미를 목격하듯 자꾸만 조금만 더 미루고 싶다이런 상태일 때 작심삼일*을 시도할 간단한 목록들이나 허황되지만 즐거운 새해결심을 적는 일도 순탄치 않다.

 

삼일 이상 지속하지 못하더라도 실망하지 않게 목표를 삼일로 잡습니다지속 여부는 다음 삼일을 더 할 수 있느냐에 달렸으니 우습게 보입니다마음이 가뿐합니다혹여 이 방식이 죄책감이 덜하겠다 싶으신 분들 모두 어서 시도해 보시어요.



작지만 현명한 선택 꾸준함 시간 엄청난 차이

 

엄청난 차이까지는 늘 보장되지 않는 것이 나의 경험상의 데이터이지만어쨌든데카르트가 된 양 남들은 다 알고 나만 자꾸 잊어 먹는 내용인 듯 외쳐본다면 꾸준히 노력하는 것 없이 되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확실한 사실이다유일하게 확실한 진실이다.

 

매년 고민고민하다 왜 이걸 골랐는지 끝내 이해가 안 가는 새 다이어리를 펼치고 그냥 계획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왜 이 계획을 세우려 하는지왜 이런 계획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이 계획을 성공시키면 다음에 뭘 하고 싶어서인지....... 도플갱어를 취조하고 심리상담을 하는 것처럼 마구 질문을 퍼붓는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지 못하는 삶에 대한 온갖 원통함을 연말에 다 털어버리리라 대결심을 한 것처럼 생각도 일상도 이리 저리 뒤집어 샅샅이 살펴본다그렇다고 잊어버린 숨겨진 인생을 한 방에 바꿔줄 보물이 어디서 튀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좌절과 체념만 미리 선택하지 말자언제 내가 큰 꿈을 꾼 적이 있다고하던 대로 사소하고 소소한 절대 실패 안할 듯한 일들만 소복하게 적어 본다.

 

반복해서 맛보는 성공이 아주 달달하고 때로는 그 당분이 확실한 힘이 되기도 한다그리고 자존감과 자신감을 덜 상하며 살 수 있다그 끝에 복리효과가 있을지 없을지는 처음부터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만큼 시시한 목표들이라 그럴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일부 목록들을 끼적거려 두었다1차 성공이다!

 

그럼 이제 남은 일은 지루할 만큼 간단해진다.



내 계획이 스마트’ - 무지 얄팍한 느낌의 단어이긴 하지만 한 것이 분명하다면새로운 습관이 딱 붙을 때까지 반복해야 한다그래서 기어코 그 습관이 일상에 처음부터 있었던 루틴인 양 자리를 잡아야 한다그러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상당한’ 시간 동안 꾸준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매년 반드시 업데이트할 항목인데잊지 말자나는 꽃노래도 싫어한다는 것을그러니 변화하고 싶은 생각은 1꿈에도 없으면서 남의 시간 막 갖다 쓰는 그런 넋두리는 더 짧게 듣고 얼른 도망치도록 하자반복을 거듭하며 확신에 이른 것인데이런 굴레에 갇힌 이들은 조언도 해결법도 원하지 않는다그러니 이야기를 듣는 일 자체가 무가치할뿐더러 심지어 모두에게 몹시 부정적인 결과만 가져온다.

 

부디그 힘든 굴레에서 떨치고 빠져 나오길 바랍니다습관이라는 걸 아시는 줄 압니다.

 

그리고 큰 좌절을 겪었을 때 확실히 도움이 되었던 간단한 것들을 지속하자.

특히 더는 뭘 하고 싶지 않고 눈 뜨기도 싫을 때십분 스트레칭하기로 약속한 시간이야이렇게 상큼하게 말해보는 일을 계속하자어처구니없을 뿐만 아니라 도대체 이유도 알 수 없지만 효과가 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약속에 엄청 얽매이는 인간 유형이었다.

 

부디 모두들 응원과 격려가 되는 일들 많으시길

그렇게 연말연시 보내시길

원대한 소원도 소소한 소원들도 이루시며 사시길 바랍니다.

 

대책이 없을 때

아무 생각도 안 날 때

정 급하시면 이런 간단하고 별 재미없는 제 방법이라도 가져다 쓰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결국 이것이다당신은 성공에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다더 이상 무언가를 배울 필요는 없다필요한 것이 더 많은 정보라면인터넷을 검색할 줄 아는 사람들이 모두 대저택에 살고 강철 같은 복근을 자랑하며 더없는 행복을 누려야 마땅하지 않은가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더 이상 새로운 정보가 아니다실천에 필요한 새로운 계획이다이제 성공으로 이끄는 새로운 행동과 습관을 창조할 때가 온 것이다간단하지 않은가? 28

 

간단합니다라고 동의하려니 뭔가 속이 상합니다표현할 언어가 부족해서 더 속이 상합니다.

 

요행을 바라는 기대감을 모두 떨쳐 내겠다고 당신 자신과 약속하라사람들은 승자의 의기양양한 모습을 보면서 그 뒤에 수많은 패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직시하지 못한다라스베이거스의 슬롯머신 앞이나 샌타애니타의 경마장에서 펄쩍펄쩍 뛰며 환호하는 사람은 보지만돈을 잃은 수많은 사람의 한숨과 절망은 느끼지 못한다요행을 얻을 확률은 0에 가깝다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의 저자이자 하버드대학교의 심리학자인 대니얼 길버트는 이렇게 주장했다매회 복권에 당첨되지 못한 사람들이 TV에 나와 나 돈 땄어!”가 아니라 나 돈 잃었어!”라고 말하는 데 30초씩만 배정한다고 해도복권 1회당 9년의 시간이 걸릴 거라고 말이다. 52-53

 

꿈속에서 번호 6개를 누가 딱 찍어 알려 주거나진짜 막 사고 싶은 날이라면 살 겁니다.

 

만약 당신의 말과 당신의 행동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경우나는 항상 당신의 행동을 믿을 것이다당신이 내게 말로는 건강해지고 싶다고 하면서 손가락에 과자 부스러기가 남아 있다면나는 당신의 말보다 그 과자 부스러기를 더 신뢰할 것이다자기 계발이 최우선이라고 말하면서 도서관보다는 게임기 앞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역시 당신의 말보다 게임기를 더 신뢰할 것이다자기 일에 책임질 줄 아는 전문가라고 말하면서 제대로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로 현장에 늦게 나타난다면당신은 자신의 행동에게 배신당하고 있는 셈이다가족이 1순위라고 말하면서도 일정표에 가족을 위한 시간이 없다면당신의 그 말은 사실이 아닌 것이다당신이 방금 작성한 나쁜 습관 목록을 들여다보라바로 그것이 당신이 실제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 주는 진실이다이제 그 상태로도 괜찮은지아니면 정말 변화를 원하는지당신이 결정하라. 136-137

 

아픈 말이네요그 상태로 괜찮은지 아닌지네가 보고 판단해서 결정하라.

 

완벽하게는 살아생전 뭐라도 할 수 없겠지만언제나 제 기준은 소박한 Better than before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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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블러드
임태운 지음 / 시공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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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IRUS……PARA……SITE

 

SF를 좋아하고 우주에 궁금한 게 많고 관심에 비해 환경에 무지한 나로서는 저항할 수 없는 좀비아포칼립스* x 스페이스오페라** 작품이다오염된 지구와 새로운 선택지전 세계가 실제로 전시상황인 요즘에 선택지도 없는 독자로서 어떤 마음으로 읽게 될까 궁금하기도 했다.



아포칼립스(Apocalypse) : [SF 용어세계종말을 테마로 하는 장르인류 문명이 거의 멸망한 뒤의 세계관또는 그런 세계를 배경으로 삼는 픽션 작품을 뜻함.

** 우주를 무대로 전개되는 활극적인 우주 공상과학소설의 총칭



인류는 먹이사슬의 정점에 선 이래 그 어떤 맹수에게도 왕좌를 내준 적이 없었지만 정작 그들에게 체크메이트를 선언한 주인공은 이빨도발톱도 없는 존재였다특수 광견병 Z19. 모든 대륙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창궐한 초거대 역병이었다전 지구적 방역은 실패로 돌아갔고 치료제 개발 역시 성과가 없었다속도가 문제였다전염되는 속도가 대비책을 만드는 속도를 가볍게 앞지를 정도로 빨랐던 것이다살아남은 자들은 죽지 않는 자들로부터 안전해지기 위해 스스로를 격리했으나 그로 인해 조금씩 고사해갔다.

 

바이러스 창궐이란 문구가 확 마음에 와 닿는 만큼 걷잡을 수 없는 감염 속도’, ‘방역 실패이런 문구들에 기사가 아니란 걸 알지만 불안에 두근거린다어떤 디스토피아건 SF의 이야기 속에서 신나고 재밌기만 했던 좋았던 시절은 영원히 지나버렸다그래도 최선을 다해 즐기며 읽어 보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지구에서의 신분과 재력은 게르솜 탑승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뛰어난 두되를 갖고 있거나 아니면 강한 면역력과 신체 조건을 타고나야 했다최상위권의 두되를 가진 천재라 하더라도 공감 능력이 결여되었거나 공격적인 성품의 소유자라면 탑승할 수 없었다.

 

어쨌든 살아남은 인류가 있고 이들은 새 행성으로 이주를 시도하다 의문의 재난을 만나 우주를 표류하는데…… 끔찍하다이런 절망 가득한 상황에서 화이트블러드 즉 백혈인간 이도가 등장한다상처 많은 영웅이 주인공감정 동조가 쉽다주인공이니 당연히(?) 성장 배경활약상생각과 고민 등등을 알려주는 배분이 많다무척 서사적이고 신비한 인물이다.

 

대방벽을 계획했을 당시 기아나 우주센터장은 평등과 박애를 벽돌 삼아 장벽을 세우겠다고 설파했다 한다하지만 벽을 지나치게 높이 쌓은 모양인지 대방벽 안에서 가장 먼저 품절된 것이 바로 그 두 가지였다신체 등급에 따라 계급이 나뉘고 누구의 밑에서 태어나느냐에 따라 인생의 격차는 말할 수 없이 커졌다친구를 죽이고 은인을 배신해야만 살아남는 암흑가의 논리가 이도에게는 요람에서 듣는 자장가였다.

 

그 외 다양한 캐릭터들도 모두 매력적이다훌륭한 액션 능력이 있고 시원 불편한 독설들도 마구 뿜어내는 연령과 종족의 다양성에 AI도 등장한다. 1993년 개봉작 [블레이드 러너]를 몇 번이고 보면서 인간다움과 품격을 지닌 복제인간과 비겁하고 저질스런 인간들의 대비에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을 무엇인지깊은 고민에 빠졌던 기억이 곤란하게도 다시 난다.

 

[...... 저는 현재 여러 명의 인간과 동시에 대화를 나누고 있어요그 덕분에 저의 대화술도 풍부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27초 전에 새로운 욕설도 하나 습득했어요......]

말해봐.“

[지네 신발 벗기다가 굶어 뒈질 새끼.]”

 

무척 흥미로우면서도 고민이 되었던 투표 장면생사를 건 선택의 상황에서 현실에서 잠들 것인가 수면파아무런 보장은 없지만 희망을 찾아 나갈 것인가 비행파으음......

 

분명히 탈출했는데 어째서 다시 이곳에 왔지?]

 

기억의 역류와 감각의 혼재사내는 언젠가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고 교육받은 적이 있었다중략태풍이 지나간 자리의 호수처럼이것은 냉동 수면에서 강제로 해동될 때의 자연스러운 각성 과정이다중략.

 

반란입니까!“

 

모세가 두 아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하나의 이름은 게르솜이라

이는 내가 이방에서 나그네가 되었다 함이요.

하나의 이름은 엘리에셀이라

이는 내 아버지 하나님이 나를 도우사

바로의 칼에서 구원하셨다 함이더라.

(출애굽기 18:3-4)

 

당신의 추축은 옳았습니다우리 엘리에셀이 우주 한복판에 멈춘 이유는 게르솜을 마주쳤기 때문이에요.” 중략.

동생이 형을 따라잡고 만 거죠.”

 

지구엔 누가 남아 있을까요.” 중략.

누가 남아 있든지그걸 인간이라 부를 순 없을 겁니다.” 중략.

“‘무엇이라고 불러야겠죠.”

 

인간은 합리적이지 않지특정 상황에서는 밧줄 없이 빌딩에서 뛰어내리거나 불타는 기름 위에 몸을 던질 수도 있어.”

[어떤 특정 상황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공포에 질렸을 때.”

 

언급하는 내용마다 스포가 될 듯해서 두렵다.  절대적인 재난그래도 찾아야할 희망상황은 수용하지만 더욱 강해지는 생존 욕구그리고 가족애이 모든 것들은 잘 버무려질수록 실패 없는 재미를 보장한다나는 이 작품에서 보이는 클리셰도 재미있게 읽었다친구와 적이 선명한 작품이 재미있었던 어릴 적에 비해 나이가 들수록 어느 한 사람도 온전히 비난할 수 없는 점들이 보인다다 나보다는 멀쩡해 보이는 점도 한 몫을 한다안타까운 점은 정답이 없는 상황에서는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들만 내 편이 되고 나머지는 모두 일단 적이 된다는 절박함이다.

 

우리에겐 이도와 같은 주인공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생존력전투력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능가하는 의지와 이유하지만 지금도 함께 살아남기 위해 있는 힘껏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수많은 분들이 계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나는 그분들과 함께 지금 살고 있다는 것에 내 희망을 걸어 두겠다.

 

인간은 성장이 멈춘 후 아이를 낳는다신생아가 커가는 속도는 상상을 초월한다마치 아이와 부모가 다른 시간을 살고 있는 것처럼업는다는 것은 아이가 자라는 속도를 부모가 함께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중략어깨 너머로 세상을 배우는 것은 자녀의 전유물인 것 같지만부모도 어깨 너머로 자식을 느끼며 같은 시간을 살아보려고 노력한다.

 

"죽이지 말고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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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 흡혈마전
김나경 지음 / 창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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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여성 흡혈귀 주인공이 뭔가 낯설지만 작가도 언급했듯이 여성이 주인공인 모험이야기는 외면당하기 십상이라 시도조차 드물다흡혈귀로 살아간다는 것의 고단함을 생각하니 어떻게 잘 숨어서 잘 위장해서 잘 살아가고 있나……부터 궁금해진다.

 

무려 1930년대 경성기숙학교 교사로 근무…… 배경 설정부터 완전히 새롭다흡혈마전이란 제목 때문에 설마하니 흡혈귀 무협(?)이 펼쳐지는 건가 잠시 긴장하기도 했다.

 

어쨌든 십자가와 햇볕에도 끄떡없는 흡혈귀가 새롭고이로써 흡혈귀는 마늘에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 또한 증명된 듯하다그리고 사감 선생님의 뾰족한 귀와 붉은 눈동자를 신비로운 분위기라고 정리하는 학생들이 엄청 쿨하다.

 

계월 같은 자들이 꼭 나쁘다고만 생각하니?”

……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르지어쩌면 말이야

너처럼 묻는 사람들이 아주 많을 거야

그게 세상이 변해 간다는 증거일지도 몰라중략

 

일제 식민지라는 배경의 그림자가 너무 크고 짙어서흡혈귀의 존재가 아주 미미한 위협처럼 잘 부각이 안 된다(고 저 혼자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여성으로 부딪히는 일들은 현실 역사를 조금만 뒤져봐도 흡혈’ 정도는 저리가라 할 정도이니나는 계월 주인공 흡혈귀 과 학생들의 안전을 염려하는 심정으로 이야기를 따라갔다.

 

광복 연수만 세면 뭐하나당시 13살 언저리 아이들 억울함도 아직 못 풀어 주고 있는데반복해서 모욕만 더 가하고 있는데……싶다어쩔 수 없이 읽는 내내 슬프고 아프다문장력이 주는 가독성이 덜했다면 더 자주 읽다 멈췄을 것이다.



손녀를 유언을 통해 간절히 교육시켜야 한다고 믿었던 할아버지의 소망과는 동떨어진 교육환경이 너무나 안타까웠다어쩔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이지만선교사가 세운 사립학교마저 일본 정부의 눈치나 보고 일본인 선생들에 의해 좌우되고 당연히 일본어만 사용해야 하고 조선이 당연히 일본 것인 것처럼 여자는 좋은 아내가 되는 것이 최고의 덕목이라고 가르친다.

 

좋은 가정부인이 되어 남편을 위해 아름다운 자수를 놓는다면 얼마나 훌륭합니까

조선 여성이 응당 몸에 익혀야 할 미학입니다.”

 

하지만 여성도 남편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 배울 수도 있지 않나요?”

 

외롭고 고독한 주인공에게 필적할 능력 혹은 휘둘리지 않는 특별한 힘 -을 가진 또 다른 주인공의 등장은 여러 작품들에서 반복되어도 반가운 플롯이다하지만 자연스러운 성장처럼 능력의 각성을 이루는 14살 임희덕의 존재는 단순히 감정의 교류나 위안에서 그치는 설정이 아니다계월이라는 이름을 지어 준 특별한 존재이자만주로 떠나는 계월의 신분을 보장하는 유일한 존재가 희덕이다.


중요한 건자기 스스로의 의지대로 삶을 살아가는 자세야

당연해 보이지만 연습이 필요한 일이기도 하고 말이야.”

 

더구나 21세기에 이르러서야 겨우 디즈니에서 시도했던 왕자가남자가 없어도 괜찮아!’ 정도의 여성 캐릭터가 이 소설에서는 더욱더 선명하고 확실하고 통쾌하게 변주된다.



또한 마음에 들고 안심이 되었던 구성은 작가가 시대적 배경에 갇힌 전형적인 캐릭터들만 등장시키지 않았다는 점이다아버지는 친일파이지만 나는 정의롭게 살련다하는 희덕의 절친 경애는 작가가 가진 인간관의 너른 품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 외에도 미디어영상작품들에서 신스틸러라 불릴 만한 다양한 인물들이 깨알같이’ 등장하는 것도 재미있다어쩌면 다양한 인물군도 만주하와이상해에 이르는 지역적 배경들도 사건의 집중도와 몰입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하는 독자도 있을 수 있겠지만나는 풍성한 설정들이 마음에 든다.

 

연령과 직업이 다양하지만 폭력적인 언사도 행동도 없는 여성들 간의 모습도 편안했고역사 속에서 목소리를 갖지 못한잊히거나 지워진 이들에 대한 발굴처럼 여성독립운동사의 한 대목처럼 전개되는 내용에도 마음이 뻐근해져왔다.

 

불과 얼마 전 한국미술사 책을 읽다가 다시 만난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나혜석의 이야기가 떠오르는 다른 한국 근현대 여성작가들의 작품들도 많은데 과문해서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 소제목 구성도 놀랍고 반가웠다그냥 재밌는 이야기를 쓰자가 아니라 아주 세심하게 많은 공을 들여 하나하나 써나갔구나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어쩌면 이 모든 무자극적이지만 유쾌하고 흥미롭고 진지한 이야기 장치들이 새로운 의미의 역사 판타지 로맨스라는 장르를 재정의할 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화란이 그러는데누구나 살아남는 데엔 이유가 있을 거래요.”

그런 말을 했어?”

계월은 살아남았잖아요그러니까 지금부터 그 이유를 만들어 나가요.”

 

어쩌면 이런 게 나 같은 사람의 운명인지도 몰라

쫓겨난 자들을 거두어 보호하고함께 어우러지도록 조율하는 것 말이야.”

 

다 읽고 나니 태어난 이유와 살아남은 이유를 찾아가던 소녀들은 모두 다 성장하여 스스로를 위해 그리고 서로를 위해 결정을 다 내리고 세상에 뛰어 들었는데나만 계속 성장이 멈춘 채로 10대로 살아가는 듯해 낭패감이 든다.

 

마지막으로더 이상 '영'하지 않으면서도 영어덜트 문학 장르를 좋아하고 재밌게 읽는 독자로서 이런 저런 아쉬운 나름의 이유들이 남았다이 작품이 작가의 본래 스케일에 걸맞게 흡혈마전 시리즈 2탄의 소식으로 계속 써지길 바란다참고 도서 목록들로만 짐작 해봐도 작품의 바탕이 된 자료들도 많고 고민한 시간들도 길었을 것이다.

 

이 책에서 공들여 창조해낸 세계는 이제 겨우 풍성한 역사적 배경과 인물들의 캐릭터를 구축해 두었다. 부디 다음 편에서는 결정을 내리고 가야할 곳을 찾아 나선 해야 할 일을 하러 떠난 인물들이 어떻게 활약하는지를 들려주시길 바란다. 궁금한 것들이 잔뜩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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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 어느 마을에 시체가 있었습니다 옛날이야기 × 본격 미스터리 트릭
아오야기 아이토 지음, 이연승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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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제목을 읽을 때는 재밌겠다싶어 흥미가 솟았는데무카시이무카시이아루토코로니이~ 일본 원제는 왜 이렇게 으스스할까요ㅠㅠ

 

책의 띠지에 시체가 떡하니 핏자국과 함께 누운 것도 처음 보았습니다흐윽...



그런데겉표지 안에 특별 수록된 설화두근두근멋진 디자인 기획입니다띠지와 겉표지 속표지에 담긴 떡(?!) 줍고 다니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는 특별한 도서(예술)작품입니다.



기시감이 들락날락하는 설화들입니다일본 설화에서 전해진 우리전래동화나 이야기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겠지요하지만 이 책이 반가운 것은 동화가 아니라 본격 추리미스터리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를 말끔히 지워버리고 살해되었습니다로 바꾼 이야기들!

 

당연히 재미난 장치들이 마구 등장합니다특수설정 미스터리부재증명알리바이 트릭다잉 메시지도서 추리, (엄청 복잡한)도치 서술*, 밀실 트릭시체 바꿔치기오인 트릭 그리고 후더닛* 등등.

 

<은혜 갚은 두루미>는 다 읽고 나니 이야기가 모조리 섞인 느낌이 들었습니다마지막 부분에 ‘1로 돌아가 3, 5, 7 순서로 읽는다라는 안내글이 있습니다다시 순서대로 읽으니 더 잘 섞여서 더 헷갈리게 되었습니다이것도 의도한 트릭인가요아님……. ㅠㅠ

 

*후더닛: whodunit. Who's done it? ‘누가 저질렀나라는 뜻으로 미스터리mystery와 동의어처럼 쓰입니다.

 

추리 소설은 일단 완성도가 무척 중요합니다너무 당연한 말인가요. 추리라는 건 단계적 훈련과도 같아서일정 수준의 추리 작품을 읽고 나면 그 이전 단계에는 전혀 재미를 느끼지 못합니다풍부한 작품 속에서 훈련된 독자들을 생각해보면, 2020년에 추리소설작품을 쓴다는 것은 그야말로 극한두뇌노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다섯 개의 단편은 딱히 순위를 매길 수 없이 재미있고 추리 완성도가 뛰어납니다옛날이야기라 익숙할 것 같은 배경을 펼쳐놓고 완전히 기발한 상상력과 정교하고 치밀한 트릭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니.......반전과 헉!이 반복되는 즐거움을 한껏 누릴 수 있습니다다 읽으면 바로 아까워지는 수작!

 

아오야기 아이토 작가는 고전을 확장해서 추리 트릭과 접목시켰으니 완전히 새로운 작품만 창조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가능하심 전 세계 고전 작품들 모두 다 추리작품으로 재창작 출간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일본전래동화 원작 내용을 몰라도 아무 상관없이 읽을 수 있습니다.

 

메시지에 담긴 작가의 통찰력 또한 작품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저는 일반화된 통찰에 약하기도 하고 기피하기도 하는 지라가끔 남들은 이렇게 생각하는구나하고 읽게 되면 재미있습니다탐욕과 악의와 오랜 업보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는 권선징악 역시 작가의 필력 덕에 위화감은 전혀 없이 반갑고 후련합니다현실에서는 고구마를 너무 자주 많이 먹고 기분이 나빠지는 지라 더 그렇습니다그러니 이야기들이 모두 피투성이라는 점만 인지하시고 읽으시면 됩니다.

 

문득 장르물의 대가김은희 작가도 생각납니다내 작품에 등장하면 다 죽거나 죽이거나 지!”

 

푸욱 빠져서 읽을 수 있는 장편소설을 더 좋아하는데 이 책은 단편 구성임에도 아쉬움이 없습니다혹시나 마지막에 단편들이 다 연결되는 건 아닌가 기분 좋게 긴장하며 읽었는데그런 구성은 아니었습니다각 단편에서 다룬 소재들은 재등장해서 살짝 연결되는 내용이 있긴 합니다만다 읽은 것이 아쉬우니 성급하게 시리즈물로 방영해주진 않으려나 이런 상상도 해봅니다.



겉표지에 수록된 작품 <꿩은 도깨비 섬으로 향한다>에서 갈매기가 왜 옛 이야기를 수집하는 지 다 읽고 나서 공감했습니다.

 

후속작의 빠른 번역 출간을 고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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