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서 읽습니다, 그림책 - 어른을 위한 그림책 에세이
이현아 외 지음 / 카시오페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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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에세이 재미있겠다, 라고 느긋한 생각을 했던 시간이 낯뜨겁게 머리가 쭈뼛하거나 마음이 떨리는 내용들이 한 가득이다.

 

저자들의 작업은 그저 아이들을 위해 그림책들 구비하다가 어느새 내가 더 좋아하네하고 깨달은 그런 수준의 애정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역시 창작으로 나서는 동력이란 다른 종류의 확실한 열망이 필요하다고 느껴졌다이 책을 만든 좋아서하는그림책연구회 분들은 그림을 그리며 잃어버린 마음 조각도 찾고 자기반성도 하고 이해와 공감을 위한 매개로도 삼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좋아서하는그림책연구회의 두 가지 운영 철학>

 

아이들 곁에서 교사도 함께 창작하는 삶을 살아갈 것.

** 학교 안과 밖의 온도 차를 줄이는 통로의 역할을 할 것.

 

직업인으로서의 정체성에서 한발 더 나아가 여성으로서엄마로서읽고 쓰고 운동하는 사람으로서가족과 사회의 일원으로서그리고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이끌어가는 한 명의 어른으로서 잘 살아가고픈 저자들의 면면.”

 

글을 쓰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떤 글을 쓸까 고민하고 흥분하는 그들의 모습이 나를 좋은 방향으로 자극했다

평소 글쓰기보다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나는 

먼지 쌓인 아이패드를 꺼내 드로잉부터 시작해보기로 했다. 

 

살아있다는 건 말이야,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거야.

삶과 죽음이 맞닿아 있는 경계를 기억하면 삶의 무게 중심을 바로 잡을 수 있다.

죽음을 잘 준비하는 삶,

내가 떠난 후에 남겨질 것들을 헤아리는 삶을 살겠다고 다시금 다짐하게 된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들은 이렇게 얽히고설킨 인연으로 삶과 죽음 가운데에 순환하며 살아간다

생명력을 가진 죽음이기에 아프지만 슬프지 않고애틋하지만 허무하지 않다.

 

마라톤에서 중요한 것은 옆 사람을 제치고 빨리 도착점으로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도착점에 가겠다는 목표를 포기하지 않는 것임을 배웠다.

 

나의 손길이 있어야 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

그 사람들이 나의 노동에 고마워한다는 것

그것이 노동의 보람이자 가치다.


우리는 대체로 내가 살아온 삶의 방식대로 관성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타인도 나의 잣대로 섣부르게 판단해 버린다.

투박한 시선과 생각은 오해를 쌓고 대상과 거리감을 만든다.

 

공감의 핵심은 가만히 들어주었어의 토끼처럼 대답을 채근하지 않고 기다려주는 것이었다

상대방의 고통에 진심으로 눈을 포개고 듣는 것이었다

상대방의 에 상대방의 방식으로 그 존재를 존중해주며

상대방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가는 것이었다

때론 나와 전혀 다른 생각을 하더라도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게 공감의 핵심이었다.


내가 다수에 속할 때,  

우리는 상대방에게 나의 기준을 들이밀며 쉽게 이야기한다.

내가 가진 일상적인 특권을 내려 놓고,

 주변을 둘러보며 그 특권을 갖지 못한 누군가를 위해 익숙한 질서를 깨는 다수가 있다면......


자연스레 성장해나가는 생명을 믿고

그저 곁에서 지켜보고

보듬어주는 일

이 따뜻한 손길 덕분에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 찬 삶을 살아가면서도 우리는 모순과 얼룩을 툭툭 털어내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보다는 옷을 더 입어야 편할 듯하지만

이렇게 나무 그늘 아래 긴 의자에 잠시라도 누워 본 적이 언제일까

그런 일이 있긴 있었나

얼굴을 책으로 덮고 깊이 잠들었나

궁금하고 부러운 마음이 차오른다.

 

일 년에 한 마디만 성장하는 소나무를 보고 있으면 시간이 천천히 가는 듯 느껴지지만

열심히 몸집을 키우는 삼나무를 보면 여름 한 계절도 쏜살같이 빠르게 지나갔구나 싶다

식물들의 시간 의식을 보고 있으면

작은 들풀

커다란 나무

울창한 숲 등 자연은 그 누구 하나 계절을 쉬이 보내지 않는 것 같다.

 

이 책이 첫 눈에 마음에 들었던 이유 중 하나는그림책 읽기가 조금 민망하기도 한 어른들 보라고어른을 위한 그림책 에세이라고 해준 것이다경험과 생각들이 밀도가 높아서 솔솔 풀어가며 제대로 읽고 충분히 상상하는 일에도 필요한 시간은 다 들이게 된다.

 

읽을수록 확실해지는 생각은 성장을 마친 어른이란 존재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그래서 특정 나이가 닥치면 법적으로 이런저런 것들을 할 수 있다는 증명서를 주고대접은 변변치 않게 해주면서 어른다움이나 어른구실에 대한 강요가 강한 사회가 불편하고 어려워지는 것이다.

 

이런 이중적인 태도에서 솔직하게 갈피를 못 잡겠다그건 당신 생각일 뿐이지알아서 살겠다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묵묵히 요구받은 방식으로 살아가고자 애쓰는 이들도 많다그런 분들의 처진 어깨흔들리는 눈빛지친 얼굴이 마주칠 때마다 늘 아프다.

 

이 책이 그런 어른들에게 얼른 도착했으면 좋겠다마음을 들여다보고 서로를 이해하고 그래서 자기의 속도에 맞는 성장을 비로소 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 텐데……자신이 겪은 억울한 일들을 되풀이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누군가를 위해 남아 있는 폭력의 질서를 깨는 제대로 출세한(세상으로 나아간)’어른들로 말이다.

 

타인의 고통을 쓴 수전 손택은 

연민이 내 삶을 파괴하지 않을 정도로만 남을 걱정하는 기술이라면

공감은 내 삶을 던져 타인의 고통과 함께하는 삶의 태도‘ 라고 했다

처음에 수민이는 캄보디아 아이들과 멀찌감치 떨어져 맨발로 축구하는 장면을 관망했다면

종내에는 그들 사이로 성큼 들어가 함께하기로 결정한다

그들의 삶에 동정이나 연민을 보내지 않고

공감한 것이다.

 

대충 살고 싶은데 자꾸만 똑바로 제대로 살라는 매력적인 글들이 천지사방에 가득하다심지어 표지의 촉감조차 격려와 응원인 듯 매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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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엔 노스탤지어가 흐르고
김효정 지음 / 지식과감성#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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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채화 물감과 팔레트를 꺼내들고 싶게 만드는 참 아름다운 표지 색감이다이렇게 원근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구도에 늘 끌리는데장면이 시선이 끝나는 곳에서 더 나아가려고 안절부절 못하게 되는 그 간절한 느낌이 좋다할 수만 있다면 계속 이대로 끝까지 걸어가고 싶었던 시간들이 떠오른다.

 

코로나가 끝나면 내겐 별 흥미와 의미가 없었던 산티아고 순례길 조차 즐겁게 걸을 수 있을 듯한 기분이다매일 일하다 다치고 죽는 이들이 있는 현실에서 함부로 내뱉을 말이 아니기도 하지만갑갑하고 답답하다기상과 동시에 베란다 창을 활짝 열고 앞에 바짝 붙어 서서 심호흡을 열 번 정도 하는 새로운 버릇이 생겼다.

 

매년 토정비결을 보고 좋은 내용이 있으면 신이 나서 챙겨 보내주는 친구가 있다올 해 내용을 받아만 두고 아직 안 읽어 봤다내용이 아주 길다생각해보니 그 친구가 사주도 봐줬고 유학 가기 전 명성이 자자한 동대문 어디의 유명한 점집에서 점도 봐줬다그래서 알게 된 내 사주에는 역마살이 아주 강했다세 마리 말이 끌고 달리는 사주라나 - 삼두마차!라며 좋아했던 기억이 젊은 시절 가족 떠나 집 떠나 고향 떠나 나라 떠나 오래 돌아다니며 살겠다는 풀이였다.

 

사주를 보기 전 미리 계획된 것이긴 했지만 공항 멀미가 날 만큼 돌아다니긴 했다십대 때에도 이왕 태어난 거 지구를 다 둘러보고 싶다는 말을 종종 했다그래봐야 지구의 동동 뜬 섬 위를 오종종 일부 다닌 것뿐이지만이 책을 읽으니 예전에 할 일 마치고 은퇴해서 유유자적한 세 마리 말에 고삐를 슬쩍 다시 매고 싶은 기분이 든다.

 

호모 바이에이터.

 

여행하는 존재.

 

살다가 큰 배반감을 느낀 적이 있는데그 중 하나가 세상에 여행가라는 직업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 순간이었다잠시 눈을 의심했다분했다이런 직업이 세상에 존재하는 지도 모르고 전형적인 직업군의 세계에서만 선택지를 고민했던 시간이 아까웠다그러다 여행을 하는 것만이 직업을 모두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면, ‘여행가란 직업은 어떤 일을 하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게 별로 없어 금방 자신감을 읽었다.

 

어쨌든 이런저런 복잡다단한 이유들로 현재의 나는 여행기 읽기를 좋아한다모든 여행기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선택 가능한 스펙트럼은 남부끄러울(?) 정도로 넓다아무래도 정보보다는 여행가이자 저자의 생각과 필력이 충분히 포함된 책들을 읽을 때가 아쉬움이 적다여행이라는 행위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나’ 궁금해 하며 둘러보는 혹은 살아 보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여행지 거주민들의 이야기나 여행가의 체험이 담긴 이야기가 궁금하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내용은 저자가 평화구현 세계민박단체 서바스 SERVAS’에 소속되었다는 점이다http://www.servas.or.kr/ 찾아보니 한국서바스 홈페이지가 존재한다행정안전부 주관 비영리민간단체(???)로서 나로선 모순되는 듯해 재밌고도 헷갈리는 설명이긴 했지만 정부기구가 주관하는 비정부기관이다혹시 아니라면 정정 부탁드립니다.

 

명칭에서 쉽게 짐작하시듯 서바스SERVAS는 서비스Service, 에스페란토어*로 봉사를 뜻하며사람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인종종교문화를 초월한 지구 평화를 원하는 단체이다서로가 호스트와 게스트로서 서로의 집을 방문할 수 있다이것은 내겐 엄청난 도전일 듯하다사적 공간에 대한 집착이 어느 고양이보다 강한 지금은 불가능해 보이지만언젠가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이렇게 호방한 일도 해보고 싶다.

 

에스페란토Esperanto : 

 

1887년에 폴란드 안과 의사 라자로 루드비코 자멘호프(Lazaro Ludoviko Zamenhof, 1859~1917) 박사가 창안한 배우기 쉬운 국제 공용어이자 가장 대표적인 인공어이다.

 

에스페란토 사용자들은 ‘1민족 2언어주의에 입각해 같은 민족끼리는 모국어를다른 민족과는 중립적인 국제공용 보조어 에스페란토를 사용한다에스페란토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에스페란티스토'라고 한다에스페란토어를 상징하는 것은 초록별로서 초록색은 평화를별은 희망을 나타낸다. (네이버 지식백과 내용 중 일부 발췌).

 

세상에 나와 5분이 지나면

생명줄의 서맥은 스스로 멈춘다.

탯줄이 잘리는 순간,

하나의 독립된 존재가 되었다.

 

배꼽의 탄생이다.

 

지구의 배꼽 중에서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의 영화를 안 봐서 몰랐는데그 영화의 주인공들이 애절하게 가고 싶었던 곳이 지구의 배꼽이라 불리는 호주의 울루루라고 한다젊을 때 도전해볼 수도 있을 일이나백혈병까지 앓는 첫사랑과 함께 행복하게 경험할 장소는 아닌 듯하다무덥고 파리들이 떼 지어 덤비는 황량한 고지대 사막…….



독박육아로 아이를 수년 간 키우다 제대로 미칠 것 같아 한 달 휴가를 받아 저 멀리 호주로 한 달 떠난 친구가 들려 준 이야기로는 대도시를 제외한 호주는 아프리카보다 더 험하고 불편한 땅이라 했고 사막 비율만 봐도 해안가를 제외하면 그럴 것이라 짐작된다.

 

다시 불끈 주먹을 든다.

뽀얀 창을 닦고,

한쪽 귀퉁이가 망가진 지불을 새로 고치고,

색바랜 담벼락을 칠한다.

골목에서는 뚜벅뚜벅 천천히 걸어도 괜찮아.

 

골목엔 노스탤지어가 흐르고 중에서

 


!

나뭇잎 하나 어깨 위에 떨어진다.

우주가 내려앉는다.

 

바삭한 가을 중에서

 


참 좋다.

 

수필의 자유로운 문학적 특성은 언제나 여행기에서 그 진가를 더 발휘하는 듯하다.

저자가 문득 멈춰 서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문득 찾아온 느낌을 기록하는 여행이야기.


지구가 자전을 멈추지 않는 한 그 공간을 시간으로 바꾸어 쪼개 쓰는 우리의 시간 역시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런 도저한 흐름을 순간순간으로 나누어,

때로는 지난 순간들을 꺼내어,

현재에 다시 의미를 부여하고,

남은 시간을 이렇게 살아가리라 하는 생각들.

 

저자의 감정은 때론 골목길에 멈춰 선 듯,

때론 우주를 비행하는 듯 그렇게 교차하기도 한다.

 

직접 찍은 사진들 역시 각각의 이야기를 지닌 채,

단지 말이 아닌 방식으로 펼쳐친 순간들을 설명하고 있다.



담담한 위로와 편안한 글좀처럼 잠들지 못하는 시간에 좋은 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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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자리는 비워둘게요 - 영화가 끝나고 도착한 편지들
조해진.김현 지음 / 미디어창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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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도구로 쓰는 생각과 마음을 도구로 쓰는 생각은 어떻게 다를까.

생각이 머무는 장소를 상상하니 눈송이처럼 머릿속에 흩날리던 그림들이 마음으로 내려앉았습니다.

 

잃어버린 것에 관한 생각의 파도는 자연스럽게 잃어버려선 안 되는

아직 잃어버리지 않은 것들에 가닿지요

 

어쩐지 편지 바깥에서 너는 이미 행복한 듯 난감하게 웃고 있을 것만 같다.

하긴인간이 아름다운지혹은 인간을 아름답게 보는지?의 

기준은 모호하고 우리의 생각이나 신념은 가변적이지.

어제와 오늘의 나는 다른 사람일지도 모르고

아침과 저녁 사이에도 우리는 유빙인 듯 먼지인 양 생각과 생각 사이를 표류하는 존재들이니까.

고민하고 방황하고 배회하는 과정 안에서 우리는 가까스로 인간일 테니까.

 

현아

슬픔을 상쇄하고도 남는 기쁨이 있다면 그 소식을 꼭 전해줘.

슬픈 소식만큼 기쁜 소식도 의무감을 갖고 전해줘.

우리 이것을 잊지 말자,

기쁨도 공유가 되어야 한다는 걸,

가꾸어지고 이름 불려야 한다는 걸.

 

편지를 마치며 마지막으로 어머님의 안부를 물어요.

그리고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과 작별한 친구 분께 두 손 모아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고생했으니 이제 편히 쉬라고어느 바람결에 전해주세요시인님…….

 

우정이란 그의 집에 찾아온 슬픔을 내 집으로 불러들이는 것.”

 

그렇게 하지 못해서 내게 힘들다 말 전하지 않고 못하고 갑자기 떠난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의 삶이 중단된 것보다 내가 받은 충격이 더 크고 중해서 제대로 이별도 못했습니다

그게 벌써 2년 전입니다

이 책에서 세상과 작별한 친구에게 전하는 구절이 있어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꼭 늦은 인사를 전하자고 그렇게 혼자 결심했습니다

덕분에 저도 두 손 모아 하고 싶은 말들을 전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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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김포공항 쏜살 문고
박완서 지음 / 민음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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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 실린 작품으로 만난 세대가 아니라어느 해 어머니의 책장에서 무심코 꺼낸 작품으로 만난 작가가 박완서이다<이별의 김포공항>은 1966년 창립된 민음사의 로고 쏜살을 달고 재출간된 불안하고 아슬아슬하고 순수하고 더 쌀쌀맞고 거침없는 젊은 작가가 1974년에 발표한 동명 단편 소설을 포함한 4편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이다.

 

한 페이지에 담기는 단출한 분량에 느긋해졌다가는 어느 한 문단에서 뼈 맞고 눈물 콧물 흘리는 꼴을 면치 못하리란 것도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고이번 역시 거침없이 그러했다차마 혼자 하는 필사를 이어하지 못할 만큼 민망한 날 것으로 드러낸 누추하고 저열한 망가진 인간과 삶의 모습들이 작정하고 독하게 등장하기도 한다.

 

젊어 더 날카롭고 거침없고 준열한 호통들이 어쩔 수 없이 살아내야 했던 시절의 사방팔방에 울리는 느낌이다특정한 누군가를 대변한다고 공표하지 않음으로써 무엇도 빠트리지 않는 예민하고 영민한 작가는 상스런 시대를 통째 후려치기도 한다일상의 바닥과 이면까지 훑으며 기어이 드러내야할 것들을 기어코 불러낸 그는 또한 그 모든 아픔과 분함과 원한을 기막힌 완결성을 지닌 문학으로 재탄생시킴으로써 용서 없지만 맑은 사회의 거울처럼 비춘다.

 

사람이 어떡허면 편하고 재미나게 사느냐를 생각하지 않고사람은 왜 사나뭐 이런 게지돈을 어떡허면 많이 벌 수 있나 하는 생각보다 돈은 왜 버나 뭐 이런 생각 말이야그리고 오늘 고깃국을 먹었으면 내일은 갈비찜을 먹을 궁리를 하는 게 순선데내 이웃은 우거짓국도 못 먹었는데 나만 고깃국을 먹은 게 아닌가 하고 이미 배 속에 들은 고깃국조차 의심하는 바보짓 말이다이렇게 자꾸 생각이 빗나가기 시작하면 영 사람 버리고 마는 거야. [카메라와 워커]

 

말랑한 위로 따위 한 마디도 없는 작가는 이 작품들에서도 역시 권력이든 금력이든 가진 자들의 야만성에 토악질하듯 글로 고발하고 생존의 위기 상황일지라도 속물성과 위선에 진저리치는 세계관을 망설임 없이 표현한다<82년 생 김지영>에 떠들썩하고 뜨거운 욕설 한 마디씩 토해낸 이들은 박완서 작품을 읽지 않은 이들이 분명하다쌀쌀맞고 거침없는 그의 언어들을 만난 적이 없음이 분명하다잡다한 버라이어티도 말끔한 다큐도 아닌 살아 있는 여성들의 처지와 삶을 어떻게 생생하게 고발했는지 모르는 이들이다온갖 환상과 허위의식에 관해 그의 언어들이 얼마나 사납고 불편할 정도로 차가웠는지 그의 존재 자체가 후대 여성 작가와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이자 힘인지 전혀 이해 못하는 이들이다.

 

어릴 적엔 뭐가 재미난 지 잘 몰랐고 젊어서는 중견작가분의 옛 이야기처럼도 들렸다그 환한 웃음이 나비가 된 듯 그가 세상을 폴폴 날아 떠난 이후작가와 작품들은 해마다 젊어지고 나는 점점 더 지지부진 비겁한 중년이 되어간다그리고 한국을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노파는 운다삶의 뿌리가 뽑혔다고 여기며.

 

마침내 기체가 이륙한다는 것을 노파는 심한 충격과 함께 의식한다그것은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물리적인 충격이 아니라 노파 하나만의 것인 아무도 헤아릴 수 없는 크나큰 충격이다몇 백 년쯤 묵은 고목이 어떤 거대한 힘에 의해 몽땅 뽑히는 일이 있다면 그때 받는 고목의 충격이 바로 이러하리라노파의 의식이 비로소 혼돈을 헤치고 뿌리 뽑힌 고목으로서의 스스로를 인식한다. [이별의 김포공항]

 

뿌리는 내리고 산다는 것은 무엇이며 내 자리라고 믿는 것은 또 무엇인가더 나아지려는 노력이 필요한 시절이라 다들 흔들리는 눈빛으로 매일 결심을 한다그 와중에 나는 매일 더 쭈그러드는 자신을 가만 지켜보며이렇게 계속 더 나빠질 수는 없지 않냐고...... 그렇게 묻기만 한다.

 

분명히 내 내부에는 유독 부끄러움에 과민한 병적인 감수성이 있어서 나는 늘 그 부분을 까진 피부를 보호하듯 조심조심 보호해야 했다그러자니 나는 늘 얌전하고 말썽 안 부리는눈에 안 띄는 모범생이었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작가가 부끄러움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냉큼 꺼내 놓은 장면이 내 실상을 더 부끄럽게 한다어쩔 수 없이 살아 내야만 했던 노년의 여성의 모습에 작가는 과장도 포장도 없이 실감할 수 있냐고 만 묻는다이 구별되는 태도가 박완서 작가가 박완서 문학이 되는 지점이다. 

 

21세기에도 여전히 학대와 살해와 자살이 그치지 않는 현실에서 창작 활동을 하는 작가가 여성일 때 어떻게 세련되게 여성(작가로 소비되는 지는 인터뷰 사진 한 컷으로도 모두 설명될 때가 있다그래서 여전히 박완서’란 존재는 여성 작가와 독자들의 아픔과 삶에 있어 귀한 자긍심과 자부심과 의지 처로 실존하고 있다.

 

두 표현 다 전혀 좋아하진 않지만 박완서 작가는 국민어머니로 감히 소비할 수 없는 인물이자 어른이 귀한 시대의 어른이 맞다나는 지키고 싶은 귀한 가치가 있는 보수란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고 늘 그를 통해 재확인한다치졸하고 저열한 그럴싸한 가짜들은 사정없이 까발리고 고발하는 자긍심과 용기와 능력이의 없이 인정하고 마는 품격 있는 한국 사회의 진짜 보수는 박완서 작가이다도깨비 말고 한 겨울 눈으로 박완서 작가나 다시 오셨으면 좋겠다그립다그립다. 그립다.




.........................

 

<이별의 김포공항>을 통해 정확히 배운 말.

 

1. 지청구까닭 없이 남을 탓하고 원망하는 짓.

2. 금시발복어떤 일을 한 보람으로 당장 복을 받아 부귀를 누림.

3. 서발막대 거칠 것 없는가난해서 세간이 없는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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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루몽 3 - 춘몽의 결結
남영로 지음, 김풍기 옮김 / 엑스북스(xbooks)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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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를 처음 읽었을 때 조금은 당황하고 놀랐다약 200년 전 지어진 장편소설로 조선 전역에서 큰 인기를 누린 작품내용이 한 줄도 기억 안 나니 전혀 모르는 작품이다조선 후기 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간 작가 남영로또 나만 모르는 분이시구나.



1, 2, 3권 세트 작품인데 일단 쪽수는 이러하다. 512 + 544 + 560 일단 한시처럼 읽히는 두 줄 목차들이 멋지다. 1권을 읽기 시작하면서는 인명을 기록 정리하는 일 요즘엔 이 단계 없이 책을 잘 못 읽습니다세월이 야속합니다 을 말투에 익숙해지는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얼마 안 읽었는데도 전생에 읽었던 책인가싶게 속도가 붙는다쪽수에 걸맞은 방대한 서사는 기본이고 각종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가득한데 반전 역시 거듭되니 다음 회를 보시라는 저자의 주문과도 같은 말에 본 적 없는 사극을 몰아보듯 책장을 넘겼다.

 

물속의 달이요 거울 속의 꽃이라 할만 했다.”

 

강물은 동쪽으로 흐르고 달빛은 서쪽으로 기우는구나예부터 이 정자를 오른 재자가인이 몇이나 되는가지금은 그 종적을 물어볼 곳이 없구나다만 빈산에 흰 원숭이와 대숲의 두견새만이 고금의 흥망을 비웃나니뜬구름 같은 인생살이가 어찌 가련치 않은가.”

 

가장 뜻밖이었던 것은 인물 캐릭터들이다.* 1840년 조선시대에 쓰신 거라 하지 않으셨나요? 19세기 조선양반남성이 지은 책이 아니라 최근에 19세기 배경으로 쓴 소설 아닌가하는 의심이 생겨 책소개를 다시 들여다볼 정도로 여성 캐릭터들이 능동적극당당승승장구하는 신박한 이야기이다전형에서 까마득하게 멀리 벗어난 캐릭터들검열 생각나는 거침없는 말투비조선현실적인 무협 액션추리스릴러범죄소설인가 싶은 반전들그리고 뮤지컬인양 등장하는 노래!

 

주요 캐릭터는 옥황상제와 남주인 선관 문창성(양창곡그리고 다섯 명의 선녀들 홍란성(강남홍), 제천선녀(벽성선), 도화성(일지련), 제방옥녀(윤소저), 천요성(황소저).



옛말 목란은 아버지 대신 출전하여 만 리 밖에서 종군했지만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낭자는 어째서 그 문제에 얽매입니까?”

 

책 소개에 무협로맨스판타지걸크러쉬페이크주인공 소설이라 해서 뭐래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는데 다 있다악당은 반드시 물리치니 속이 시원하고 제발 현실에서도 좀 느껴보자 만나기만 하면 사랑에 막 빠지고그릇된 사회 인식과 제도에는 안 참고 대사로 퍽퍽 때린다할 일을 다 하고 여유가 있을 때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노래도 부르고 시도 읊으며 잔칫상 차려 즐겁게 놀며 지낸다


읽다 보면 와나도 이렇게 보람 있는 일하고 좋아하는 이들과 모여 잘 놀며 인생 꽉 채워 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드니그 당시 독자들 특히 여성 독자들 은 집 팔아 다음 회를 사서 읽어 보고 싶었을 거라 짐작하고도 남음이다.

 

간관은 조정의 귀와 눈입니다폐하께서 지금 간관을 엄하게 견책하시어 귀와 눈을 막으시니폐하께서는 장차 어떻게 폐하의 문제점을 들으시겠습니까?”

 

폐하께서 만약 한때 마음을 푸시는 것이라면 잘못을 고치는 것에 인색하지 않으셔야 하는데도리를 지키기 어려운 것이 무엇이기에 언관에게 죄를 주고 대신을 쫓아내 조정 관료들의 입을 막아 버리고 기운을 꺾어 버리시는 것입니까친구 사이라도 곧은 말과 선을 경계하여 꾸짖는 말을 모두 어렵게 생각했습니다오늘 폐하의 신하들은 생사고락이 폐하께 달려 있고 재앙과 복과 영광과 욕됨이 또한 폐하께 달려 있습니다어찌 폐하께서 듣고 싶어 하시지 않는 말을 해서 폐하를 거스르고 스스로 엄한 책임을 자초하겠습니까?

 

명나라 최고의 장수이자 양창곡 원수가 평생 총애하는 여인인 여주 강남홍의 성격은 그야말로 호쾌하고 강직하다취미는 남주 놀리는 것이다특기는 쌍검술과 변신술이다이 작품 속 여성들 형편은 여성들은 현대문학의 소수자 캐릭터와 비교해도 꿀릴 바 없이 서러운데완전 반전으로 활약 비중이 거칠 것 없이 웅장하다


뛰어난 검술과 전략으로 전쟁터를 누비며 군사들을 지휘하는 여성불필요한 살생 없이도 연전연승하는 장수임금의 신의를 독차지하고 자신을 비웃는 자들은 도술로 골려 주고 희롱하는 적은 당할 자 없는 검술로 혼내 주는선비만큼 학문도 갖춘 여성이 정도면 현대 문학에서도 잘 안하는 수준의 성역할 바꾸기이다.


 

저 역시 강남 사람으로 만리 남쪽 하늘에 떠돌아다니던 신세였고북방 외딴곳 바람 먼지 지루한 속에서 온갖 고초와 위험을 겪었습니다이제 이 산에 올라 지난 세월을 굽어보니 뱁새가 달팽이 뿔 위에 둥지를 틀고 메추라기가 쑥대에서 노니는 듯합니다낭자들은 저 중원 땅을 보세요손바닥 하나 정도 크기에 불과합니다그런데 예부터 영웅호걸들과 재자가인들이 저 안에서 태어나 자라 저 안에서 사라집니다슬픔과 즐거움의 감정을 어찌 다 논하겠습니까?”

 

성질이 서로 다르고 각각 혈기의 차이가 있는데 모든 것을 하나의 기준에 맞추어 마음속의 즐거움과 칠정의 욕망을 억지로 억제한다면기품이 부족한 사람은 어려서부터 하루살이 같은 기상을 가지게 되고기품이 넉넉한 사람은 끝내 겉을 꾸미고 안을 속이게 됩니다그 말과 행동을 살펴보면 의관을 정제하고 우러러보는 군자지만그 마음을 논하고 쓰는 것을 살펴보면 고루하면서도 들은 것이 적어 당면 문제를 알지 못합니다이런 점에서 보자면 사람의 성취는 모두가 다른 것이라하나의 법규로써 논의할 것이 못 됩니다.”

 

부패한 과거제를 목격하고 좌절하고 염세하는 작가의 서러움이라면 차라리 홍길동전 식의 활약이 본인의 입장에서 더 속 시원할 듯한데....... 작가님정체가 무엇인지 점점 더 궁금해지는 작품이다


새해를 맞아 차분하고 기품 있게 고전소설을 읽어 보나 했는데한자어와 우리말의 용법과 의미가 새롭게 환기되는 점을 빼면 만화방에 앉아 베스트셀러 읽는 것만 같은 이 기분은 무엇일까싫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누가 지었는지왜 널리 사용되는지 정말 싫지만, ‘집콕을 하는 형편에 일의 능률은 점점 떨어져 매일 야근하는 원치 않는 패턴이 생긴 일상에서 한숨과 근육통만 늘어 가는데이 나라 저 나라 다니고 천상과 지상을 넘나들고 마주치는 벽은 모두 부수며 본인들이 꿈꾸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미려한 표지만큼이나 눈부시다.

 

다 같은 청춘의 젊은 나이에 풀잎 끝의 이슬 같은 인생이 서로 시기 질투하다가날아드는 나방이 등불에 부딪힘에 인간의 희로애락이 다 한바탕 꿈인 것이지요.”

 

구성과 표현력과 개성을 고루 갖춘 멋진 소설 작품이다.

 

또한 백만 년 만에 만나보는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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