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와 두꺼비의 사계절 난 책읽기가 좋아
아놀드 로벨 글.그림, 엄혜숙 옮김 / 비룡소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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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개구리와 두꺼비가 등장하는 이야기라 신기하고 재밌고 궁금했다자연도감도 아닌데 이야기 속에 겨울이라고 등장하지 못할 이유는 없는데여태 그런 반전은 상상조차 못해보았다니그래서 특별히 유쾌하고 고마운 책이다.


눈개구리인가요 

눈두꺼비인가요

 

겨울밤에 서로의 집에 놀러 다니기도 하고친구 찾아 밤길을 나서기도 한다눈썰매를 타는 실력도 대단하다크리스마스의 낭만을 한껏 즐기며 겨울잠은 잊은 모습이다뭔가 갑갑한 일상에 머리가 시원해지는 통쾌함이 든다. 영어 원작본도 아주 쉽게 읽을 수 있는 사랑스러운 책이다. 아이들이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고 좋아할 멋진 책이다.



안녕두껍아늦어서 정말 미안해. 선물 꾸리다가 그만 늦었어.”

너 구덩이에 안 빠졌어?”

.”

너 숲에서 길 잃지 않았어?”

으응.”

너 커다란 동물한테 안 쫓겼어?”

그래전혀 그런 일 없었어.”

개굴아너하고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낼 수 있어서 정말 기뻐.” 하고 두꺼비가 말했어요.

 

각각의 존재도 사랑스럽지만 어쩌다 이렇게까지 절친이 되었는지 그 사연이 궁금할 정도로 아주 각별하게 서로를 친구로 사랑한다친구네 집 마당을 청소해주고 세상 제일 행복한 기분으로 잠에 빠진다.



생각보다 자주 내 인간관계의 적당함과 얄팍함에 대해 생각나게 하고 부러워지기도 한다어릴 적엔 친구들끼리 모험을 나서는 이야기를 참 좋아했는데그렇게 동시대를 함께 경험하고 공감하는 친구들의 존재가 무척 중요하고 설레는 일일 때가 있었는데…….

 

개구리와 두꺼비의 외모를 좋아하지 않는 이들에게도 충분한 이야기 전달력이 있지 않을까 싶게오랜만에 우정!’이라고 크게 써놓은 모습의 이야기를 제대로 만난 기분이다.

 

겨울을 신나게 살고 있는 양서류를 처음 만난 신나는 일과 더불어 내가 가진 시답지 않은 다른 편견도 부서졌다개구리가 의젓하고 침착한 캐릭터이고 두꺼비는 마음은 언제나 진정이지만 엉뚱하고 웃기는 사고를 곧잘 친다.


우리 썰매 타고 언덕 아래로 내려가자.”하고 개구리가 말했어요.

나는 싫어.”하고 두꺼비가 대꾸했지요.

무서워하지 마내가 같이 탈 테니까썰매는 신나게빠르게 달릴 거야.

두껍아네가 앞에 앉아내가 너 뒤에 앉을 테니까.”


영어본 맛보기


아주 오래된근원적인 그리움과 행복감이 동시에 든다마음이 간질거리면서 따끔거리기도 한다공동체를 만들어 생존해온 인간의 사회성이 소속 이익 집단을 위해서만 발현되는 세상의 뉴스들을 거의 매일 접하느라개구리와 두꺼비의 우정을 목격하며 감동하고 싶은 인류애를 느낀다이 책은 저자가 1976년에 그려 만든 책이다.


Frog&Toad 인형들바지를 올려 입고 벨트를 맨 모습!

사진 출처: costumespecialist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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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자기 결정 - 행복하고 존엄한 삶은 내가 결정하는 삶이다 일상인문학 5
페터 비에리 지음, 문항심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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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감정과 소망의 방향은 흔히 타인과 그들의 행동을 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타인으로부터 받는 영향력 가운데

우리의 자기 결정을 방해하는 것과 도움이 되는 것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인간의 사회생활에서 이처럼 중요한 질문은 몇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스트리아 그라츠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주제로 열린 강연을 토대로 집필된 글이라서인지읽으며 필사를 하다 보니 심리상담 세션을 마친 기분이 들었다질문과 대답이 반복되는 형식과 철학자가 단정하고 말끔하게 입말로 전해 주는 문장들 덕분이다.

 

과감히 플라톤적 대화의 방법적 기본 사상을 표현해본다면문법적으로 잘 만들어진 문장이 전부 어떠한 사상을 나타낸다는 생각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애초에 내가 정한 주제가 아니었을지는 몰라도저 질문을 오래 고심해본 적이 없는 이는 또 누가 있을 것인가임시방편의 대답들에는 계속 도달했을지라도 결국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지도’, ‘잘 하는 일을 하며 살지도’ 못하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사는’ 일상이  다른 모든 가능성들의 앞을 막아선다그러나 이 결론은 내가 한 선택들의 총합이다.

 

프랑스의 모럴리스트 라브뤼예르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우리는 외부에서 행복을 찾는 데에 그치지 않고 굴종적이고 올바르지 않으며 정의와는 동떨어진미움과 전횡과 편견으로 가득 찬 인간들의 판단 안에서 행복을 찾으려 한다대체 이게 무슨 미친 짓인가!"

 

자기결정에 대한 글을 읽으며 타인의’ 글을 충실히 필사하는 과정을 거치고 나니내 자신의’ 덧붙일 만한 의견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내적 구조 변경은 뚝딱 이루어지는 법이 없다는 저자의 말을 의지 삼아기억하고 익히고 경계하고 내 것들로 만들고 싶은 문장들을 기록해 두는 것으로 싸움을 포기하고 화해를 청했다.

 

내적 구조 변경은 어느 날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하여 영혼의 연금술로 뚝딱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중략이 모든 것은 내적 단조로움과의 싸움체험과 바람이 변화 없이 굳어버리는 현상과의 투쟁입니다중략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이 나를 조종하는나의 느낌들과 내가 원하는 것들의 표면 밑에서 흐르고 있는 소용돌이를 감지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확실하다고 믿어오던 것들에 대해 긍정과 부정의 증거를 찾아가는 동안 나는 그 확신들이 변화할 수 있는 내적 과정의 문을 열게 됩니다이 과정이 충분히 반복되면 내 의견의 총합이 완전히 탈바꿈하여 결과적으로 생각의 정체성이 변화하게 됩니다.

 

코로나 확산의 반복을 지켜보며 특정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에 대해 차갑게 식어가는 공감과 연대를 감정을 느낀다울화가 더욱 파괴적인 혐오의 에너지로 전환되기 전에 나는 나름의 이해와 정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시의적절한 것이 사적 필요와 우연히 맞아 떨어진 것인지이 책을 추천한 작가의 빛나는 통찰력의 은혜가 내게도 골고루 닿았다는 편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어쨌든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다.

 

조종은 계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최면광고속임수정보의 차단사람의 감정을 비열하게 이용하는 행위생각의 형성도 못하게 만드는 세뇌작업 등입니다조종은 대부분의 경우 자기가 가진 자아상과 너무나도 동떨어져 내적 상처를 유발합니다이런 경우 독립적인 인격체로서의 우리는 무시당합니다이건은 존엄성의 상실을 의미하는 가혹한 행위입니다.

 

막강한 권위에 의해 제정된 요란한 공식이 띠는 당위성이 지극히 당연하게 다가올수록 우리는 더욱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야 합니다중략다른 이가 먼저 살아가고 먼저 이야기한 것을 그대로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이 가르치는 논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지요.

 

공동체를 만들어 현재의 문명까지 이어온 인간의 사회성이 낳은 상호 의존성에 어떤 의문도 반감도 없지만그 안에서 여러 이유로 스스로의 도덕적 기준보다 타인의 시선이 가장 중요하게 살았던살 수 밖에 없었던 분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나 역시 뭐 별나게 주체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이런 구분은 실제로 무의미하기도 하다허나 의존성이 두려움으로 소속감이 신봉으로 상호작용을 넘어 과한 충성으로 이어지는 행동은 개인에게는 지속 불가능한 무리한 방식일 것이고집단을 이루면 소속된 집단이 소속된 사회 전체를 훼손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자기 자신이 하는 행동의 동기에 대한 이해가 적을수록 잔인함에 치우칠 위험은 높아집니다우리의 시기와 미움드러나지 않는 질투심비록 겉으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숨겨져 있는 증오 같은 것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잔인한 폭력이 많습니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타인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나의 생각그리고 그 사람이 어떠했으면 좋겠는지에 대한 나의 생각그 두 가지 사이의 차이를 구별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가짜뉴스가 적어도 지구상의 어떤 바이러스보다 확산 속도가 빠르다는 것을 목격한 이후판단을 위한 정보와 지식을 찾는 일이 훨씬 더 힘겹다통계 방식이 아니고서는 이 세계를 파악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지만내가 찾아낸 수치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어디까지 확인해 봐야하는 것일까물론 수치가 바로 사실은 아니다하지만 정확한 사실을 알아내고 그 사실들에 근거해서 세상을 보고 자신을 이해하고 거듭 선택과 결정을 해야 하는 일이 삶이라면 어찌나 고단한지 하루 종일 목이 뻣뻣한 기분이다.

 

타인이 휘두르는 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은 눈과 귀를 틀어막는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타인은 어디까지나 타인에 불과하며 그들이 우리를 평가할 때 우리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오직 그들만의 문제인 수만 가지 요인에 의해 그 평가가 왜곡되고 부정적이 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본능이 앞서는 줄 알면서도 오류를 범하는 것 또한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라고 한다자신의 경험을 신뢰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편견에서 출발해본다는 말에 다름 아닌 경우도 있다자기 포장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철학자가 가장 선명하고 친절한 표현으로 열심히 전해 준 <자기결정>을 첫 입부터 꼭꼭 씹어 다 소화시키고 싶어서 꾹꾹 눌러 쓰며 읽었다맞춤한 분량이라 참 행복했다. 2021년 1월이 분주하게 거의 다 지나간다.

 

성공과 실패승리와 패배경쟁과 순위의 논리가 너무도 시끄럽게 세계를 뒤덮고 있어요제가 원하는 문화는 조금 더 잔잔한 소리가 지배하는 문화, 자신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모든 사람이 도움을 받는 고요함의 문화입니다오직 그것이 최우선이며 다른 모든 것들은 그리 중요하지 많은 그런 문화 말이에요.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나 나 개인적으로는 존엄성과 자유가 있는 삶 속에서

나는 다른 방식이 아닌 내가 보는 바로 그 방식으로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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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빈스키 - 종(種)의 최후 현대 예술의 거장
정준호 지음 / 을유문화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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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살아남은 음악이다.

살아남았다면 다 클래식이다.

죽은 음악을 양분 삼아,

잊힌 음악과 맞서 여전히 전하는 것이 클래식이다.

 

스트라빈스키를 본격적으로 듣기 시작한 것은 2009년 개봉한 [샤넬과 스트라빈스키] 영화를 보고 스토리보다 음악에 빠져서 한참을 듣게 된 순간이었다사람이든 다른 무엇이든 첫눈에 반하지 않는 성격이라알게 되니 좋아하게 되고 익숙해지면서 더 알게 되고 더 좋아지고 그렇게 찾아서 듣는 작곡가로 자리 잡았다

버릇처럼 잃어버린 2020년 봄에도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을 보고 들으며 순진하게도 코로나 상황이 곧 해결될 거라고 믿었던 기억이 서럽게 떠오른다.

 

어느 해 3개월 정도 정준호 작가가 진행한 <FM실황음악>을 들으며 거의 매일 오후 산책을 하기도 했다규칙적인 산책이 멈추고 시간대가 바뀌면서 그렇게 또 잊고 살았는데출간을 하신 줄은 몰랐다초판을 읽어 보지 못해 개정판 소식이 무척 반갑다특히나 올 해로 타계 50주년을 맞이한 스트라빈스키를차분하지만 가득 채워진 방송처럼 애정과 재능을 가득 쏟아 평면의 역사로부터 생생히 살려 내셨을 거라 믿으며 읽었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Igor Stravinsky) 1882년 6월 17일 출생 - 1971년 4월 6일 사망.

 

평전에서 가장 자주 볼 수 있는 대비는 다루는 예술가의 예술 작품의 위대성을 최고로 끌어 올리고그 예술가의 사생활은 아슬아슬한 수준까지 불리한 이야기를 들려준다예술가를 경애하는 독자나 예술 작품을 사랑하는 애호가들이나 평전을 읽는 독자는 거의 예외 없이 이 구도에서 갈등과 실망과 혹은 더 종합적이고 입체적인 이해를 하게 되는 여러 갈림길에 서게 된다.

 

사적으론 사생활이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고 천인공노할 명백한 범죄가 아니라면 작품을 통해 예술가를 평가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단지 이토록 많은 책들을 인용하고 스트라빈스키의 작품 연주들을 성실히 언급하는 저자가 진정한 복원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담지 않았을 내용이라 신뢰하기 때문에내용을 살펴보았다.

 

계산적속임수도 마다 않는이용가치 여부를 냉정하게 판단자기중심적권위적인 가부장불륜 행위니진스키는 비난을 했고 쇼스타코비치는 실망했다고 한다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이상적인 가치로 여기는 한편사생활에 대한 관심도는 병적일 만큼 높은 대한민국에서는 제대로 활동하기도 평가받기도 어려운 예술가임에 분명하다.

 

내 분야는 아니지만 성공이란 걸 하기가 얼마나 가능성이 희박한 세계인지 아는 지라당시 그가 할 수 있어 시도한 모든 책략들과 태도들은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작곡가가 되어 살아남기 위한 생존기술들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그는 부와 명성을 추구한다나는 부와 명성을 바라지 않는다스트라빈스키는 훌륭한 작곡가지만 인생에 대해 쓰지는 않는다그는 아무런 목적 없는 소재들을 창안한다나는 목적 없는 소재를 좋아하지 않는다나는 자주 그에게 목적이 무엇인가를 이해시키려고 애썼지만그는 나를 한갓 어린아이라고 생각했다중략스트라빈스키는 일의 낌새를 예민하게 알아챈다나는 그렇지 못하다니진스키의 말 중에서. 121-122

 

2020년 노벨상 재단에서 한해 마무리 공연으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과 스트라빈스키의 <불새>를 연주했다고 한다베토벤이 고전과거라면 스트라빈스키는 새로운 미래를 묘사한 것이라 하니 음악사를 전공한 분들에게는 익숙한 내용일지 모르나 나는 조금 충격을 받았다무척 중요한 인물에 대해 무척 무지했구나하는 심정!

 

스트라빈스키조차 인정했듯이위대한 베토벤도 멜로디 위주의 작곡가는 아니었다스트라빈스키는 그 점을 시인하면서 무리하게 멜로디 주도론을 이어간다. ‘반독일 친 이탈리아 프레임의 핵심이 바로 멜로디 즉 선율이기 때문이다. 11

 

나는 <봄의 제전>을 정말 좋아한다발레 무용수들의 근육과 뼈를 찢고 부수는 노고를 통해 만들어진 안무이긴 하지만 조금 마음이 불편하기도 하지만 그 리듬을 들으면 봄에 소생하는 만물 중 하나가 된 듯지쳤다가도 일단 벌떡 일어나 보게 되는 힘이 있다.



나는 봄의 제전을 쓰면서 어떤 체계도 따르지 않았다당시 내가흥미를 갖던 다른 작곡가들곧 쇤베르크베르크베베른에 대해 생각해 보면 그들의 음악은 훨씬 체계적이다그리고 그것은 위대한 전통에 의해 지탱되었다봄의 제전을 쓰면서 내가 믿을 것이라고는 내 귀뿐이었다나는 들었고 내게 들리는 것을 적었다.” 123-124

 

또한 <봄의 제전>을 쓰면서 스트라빈스키가 음악이나 예술의 종교화를 경계하였다는데이는 바그너와 바그너주의에 대한 반감반 독일 입장 등의 여러 요소들도 복합적으로 영향을 끼쳤겠지만어쨌든 결과적으로 나는 무척 마음에 드는 그의 예술 철학이다이로서 <봄의 제전>을 한층 더 가뿐하게 좋아할 수 있다니 신나는 노릇이다.

 

그것은 억제하지도 감추지도 못하는 슬픔이었다자신(드뷔시)과 전혀 다른 세계 앞에 놓인 사람의 얼굴이었다그것은 뒤에 남은 슬픔이자자신의 한계를 드러내는 새로운 형식을 마주친 예술가의 고통이었다.” 215

 

러시아 민족주의의 영향 하에서프랑스에서의 신고전주의 곡들의 작업차이코프스키에 대한 존경러시아 정교회의 교인이 된 이후의 종교음악미국보스턴에 정착한 후의 모더니즘영화 음악에까지 이르는 활발한 작곡 활동 등스트라빈스키의 삶은 자신의 욕망과 역사의 물결에 의한 끝없는 여정이었다.

 

그리고 저자 역시 스트라빈스키를 찾고 만나기 위한 도저한 여행을 충실히 수행한 것으로 느껴진다번역서가 아니라서 더욱 잘 읽히는 내 생애 최초이자 최고의 평전으로서살지 못한 시대를 알 수도 있을 만큼 그렇게 세심하고도 깊이 있게 묘사해준다.

 

아주 오래 전 파리 <오페라 가르니에>의 천장화를 보러 갔더니 오페라를 관람하러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샤갈의 그림이 어울리지 않는 듯 혹은 그래서 더 특별한 듯 눈에 띄었다그림의 에펠탑 오른쪽이 스트라빈스키의 [불새firebird]를 나타낸 것이란 설명을 들었다.



그것 말고는 두 예술가에 얽힌 이야기를 모르니 화가 샤갈과 스트라빈스키 관련 내용이 무엇일까 내심 몹시 궁금했다<불새>의 탄생과 성공 스승인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새를 소재로 한’ 작품 <황금닭>과 <불멸의 카셰이> 설화를 차용한 것으로 파리가 원하던 아방가르드란 요소로 전 유럽에서 연주가 성공하게 된다 은 그 오래전 지식 없이 만난 불새와 샤걀을 이제야 정식으로 만난 만족감을 주었다.

 

또한 들리는 것을 적었다라는 작곡가의 곡을 듣지 못하고서야 문장들 역시 제대로 이해된 것이 아닐지 모른다는 면에서 유튜브나 온라인 스트리밍으로 공연 영상들을 감상할 수 있게 소개해준 부분의 내용이 반갑다.

 

무명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탁 후 파리 활동장 콕토와의 첫 조우드뷔시와 라벨의 프랑스 음악 전성기피카소와 마티의 미술 작업 활동코코 샤넬의 여성 패션 개념의 전복이 시기를 경험하면서 스트라빈스키는 러시아 음악인에서 세계적인 음악가로 발길을 향하게 된다벌써 10년 전우디 알렌의 <미드나잇 인 파리 Midnight in Paris>에서 각자의 벨 에포크belle époque 시절을 그리워하고 찾아 떠나는 눈부신 장면들이 떠오른다.

 

러시아 혁명으로 재산도 돌아갈 곳도 사라진 스트라빈스키는 프랑스로 국적을 바꾼다1차 세계 대전으로 스위스로 건너갔다 20세기 중반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국적을 옮긴다어느 분야든 역사에 따라 중심지는 옮겨 가게 마련이고 스트라빈스키는 고향과 집에 연연하지 않았다그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것우정도 명성도 영광도 기억도 작곡 스타일도 그리고 자기 자신도마치 과거의 것이라면 무엇이든 버릴 수 있다대신 원하는 결과를 얻겠다라는 강력한 의지가 느껴지는 선택들이다.

 

“1945년 12월 28스트라빈스키는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전쟁이 끝나면서 유럽에서 건너온 인사들이 잔류와 귀향 사이에서 고민했지만중략그에게 가장 중요한 여건은 자유롭게 창작하고 연주할 환경이었다고민은 필요 없었다.” 377

 

초판본에 현대 음악의 차르라는 부제가 사라지고 이 책에는 종의 최후라는 부제가 달렸다왜 그랬을까저자는 스트라빈스키가 사망한 후 20세기 클래식 음악신고전주의 예술가란 종은 최후를 맞았다고 최종적인 비극을 발표하는 형식으로 스트라빈스키를 지상의 가장 높은 자리까지 밀어 올린 것이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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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이 쓰고 바다가 그려주다 - 홀로 먼 길을 가는 이에게 보내는 편지
함민복 지음 / 시공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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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글들은 나 혼자서 쓴 것이 아니라 내가 만난 모든 것들과 글의 세계가 써준 것이다.

나의 삶 또한 모든 삶들이 나를 살아주는 것이다.

 

..성명의 뜻은 정확히 모르지만 이름과 사진과 삶과 시가 이토록 많이 닮아 있는 작가는 흔하지 않을 것이다아프고 날카로운 말이라곤 하나도 없을 듯해 목덜미의 묵직함이 사는 일의 무게처럼 느껴지는 지친 날에는 그의 말과 글과 삶이 담긴 책을 열어 구경하고 싶어진다반가운 신간 소식을 들은 지 여러 날책이 도착하니 강화도의 바람도 바다향도 땅 냄새도 같이 온 듯 반갑다.

 

함시인이자 작가가 아주 세련된 모습으로 자본주의에 잘 적응한 스타작가로 성공을 위한 팁을 들려주며 사는 모습은 어울리지 않다 못해 웃음이 절로 터지는 상상이다그렇다고 작가가 문명 비판을 말이나 글로 열렬히 설파하는 것도 아니다큰 목소리 대신 작가는 낡은 것들을 가까이하고 산다고자연과 친밀하게 산다고 자신의 일상을 그저 보여준다문장에도 쓰인 속도가 있다면 작가가 느릿하게 살아가는 그 속도와 나란히 태어났을 듯한 그런 단출한 문장들로 이루어진 글줄에 세상을 담는다.

 

세상에서 제일 큰 마을은 스마트폰 속에 있다.

이 마을의 길은 전파다.

이 마을에는 집과 방을 만들 수 있는 영토가 무량하다.

이 마을은버튼 하나로 전출입이 자유롭다.

이 마을에는 없는 게 없지만 자체 무게가 없어 휴대하고 다닐 수가 있다.

이 마을에는 범죄 신고 센터가 있고 우체국도 있다.

이 마을에는 담장도 있고 우물도 있다.

주문하면 이 마을에서 물이 배달되어 온다.

이 마을을 개인이 소유할 수는 없다.

정확히 말하면 소유할 수도 있으나 완벽하게 소유되지는 않는다.

이 마을은 전파 공동체다.

 

시가 아니라서 살짝 서운한 마음은 아마도 내 테이블까지 잘 조리된 식사를 가져다주길 바라는 유형의 마음일지도 모르겠다시인의 에세이 글은 내게 낚싯대를 건네고 물가에 가서 직접 낚아보라고 펼쳐 놓은 체험장처럼 다가온다<눈물은 왜 짠가>를 낯설고 불편하게 읽으며 알게 된 시인이고<긍정적인 밥>을 읽으며 내가 하는 일을 가늠해보았던 작가의 에세이라그때보단 덜 서러운지눈물은 덜 짠지밥은 늘 따뜻한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표지를 투닥거렸다.

 

풀을 베다가 쉬면서 맡는 풀 냄새는 정말 향기로운 것일까.

몸 잘린 풀의 냄새가 향기롭다니.

새소리가 정말 아름답게 들리는 것일까.

새소리에 나비가 놀라고,

놀란 나비가 다가오던 방향을 바꿔 실망한 꽃 빛깔이 순간 옅어졌을 텐데.

내 감각에,

잔인함을 아름답게 느끼는 폭력성이 이미 내재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썩어 내가 못 먹게 된 음식에서만 악취를 맡는 내 후각도 감각에 내재된 폭력성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증거가 되지는 않을까.

내재된 폭력성을 이마에 버젓이 다는 이 시대의 언어에서는 폭력 냄새가 난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되새겨보지 않고 묵인한 결과일 것이다.

 

언어로 표현되는 폭력이 가장 활기를 치는 시절이 현재가 아닌가 한다. 그런 부류 중 최고라는 댓글은 안 봐서 모르겠지만, 전해 들은 말에 의하면 서로 죽여라, 죽이자, 라는 고함이 들리는 글이 대부분이라고 하니 글로 만든 지옥도가 따로 없겠다 싶다. 실제 그런 댓글들로 생을 중단한 이들이 적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이 시대의 언어에 얼마나 많은 폭력성이 내재되었는지 분석하기가 처참할 것 같다. 물론 언어 말고 행동으로 과격하게 표현되는 과장된 폭력성도 꽤 있다. 일례로 사람들이 죽인 뱀이 뱀이 죽인 사람들보다 비교가 안 되게 많음에도눈에 띄기만 해도 뱀을 혐오하고 사생결단을 보려는 사람들이 참 많다심지어(?) 함민복 시인도 그런 경험을 기록해 두었다.

 

뱀은 내가 수없이 제 집 위를 밟고 지나도 나를 물지 않았었는데 나는 뱀을 보자마자 공격했으니……올여름 내가 죽인 뱀이 내게 시 한 편 써주었습니다.

 

나는 본가 조모께서 집지킴이 구렁이가 창고 쌀가마니 위에 살고 있는 것을 묵인하실 뿐 아니라 놀래어 집을 떠나지 않도록 조용히 필요한 것들을 꺼내 오는 장면들을 어릴 적부터 본 지라그리고 살면서 뱀에 해를 당해본 적이 없는지라, 두려움이나 혐오와 같은 강렬한 감정이 없다.

 

오히려 산책이나 등산길에 옆으로 스르륵 기어가는 뱀을 만나도 다람쥐나 딱따구리를 본 것처럼 역시 반가웠다무척이나 아름다운 무늬에 부드러운 몸짓등산용품을 구비하고 영양 보충을 하면서도 연신 터덜 터벅거리는 나에 비하면 얼마나 우아한 생명인지.

 

언젠가 잠깐만사진 한 장 찍고 싶은데!”라고 장난처럼 말을 했더니지나가던 뱀이 가만히 멈춰 선 적이 있다의사소통이 이루어진 거라 멋대로 생각한 나는 신이 나서 좋아하며 가까이 가서 정말 아름답게 생겼다하며 사진을 찍었고동행한 친구는 누구를 더 원망해야 할 상황인지 몹시 혼란스러운 감정으로 돌발 상황을 나름 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허나 영암에 사는 그 아름다운 뱀은 쿨하게 사진 모델을 해주고 내 감사 인사까지 챙기고 유유히 풀숲으로 가던 길을 이어갔다.

 

소스라치다      함민복

 

 

뱀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란다고

말하는 사람들

사람들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랐을

바위나무하늘

지상 모든

생명들

 

말랑말랑한 힘함민복문학세계사, 2005

 

지름길을 벌고 살아가다 보면 만날 수도 있는 밤길.

살면서 더러 만나보는 건 어떨까요.

만나 길의 냄새길의 소리길의 침묵들어보는 건 어떨까요.

 

자꾸만 과거의 장면들을특히 신나게 즐겁게 이곳저곳 다녔던 추억을 꺼내보는 일조차 위험한 시기이다남들 여행기로는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가시지 않는 답답함에 잠깐 나가볼까하는 생각이 뭉게뭉게 솟는다막 희망의 단초가 보이기 시작한 때에병리적인 사명이라도 완수하려는 양 자꾸만 확산을 부추기는 몰상식한 집단의 소식을 자세히 전해 들은 날이라 더욱 갑갑하다.

 

내 자식만 잘 되면 장땡이라는 교육열이란 다소 고상한 표현을 가진 욕망과근본주의적 종교관으로 우리 편 아니면 사탄과 악마라 악을 쓰는 열기와판데믹 시절의 틈새에 수익창출을 노린 탐욕스러운 안목이 비릿하게 결합한 결과로서의 재확산언제까지 되풀이할 건지언제까지 다루기 어려운 문제라 조심스러워만 할 건지언제까지 시민사회와 정부가 사후 대책과 비용을 감당해야 하는지 울화가 치민다.

 

따스한 이상 기후가 잠시 물러나고 태풍과도 같은 눈보라와 한파가 다시 온다고 하니그전에 해야 할 일은 넉넉한 식료품 사재기만은 아니라는 분한 마음에 오늘은 꼭 바람과 파도와 눈과 밥과 나무와 통증과 희망이 담긴 이 책을 다 읽는 호사를 누리겠단 오기가 들었다.

 

모든 농지는 수평지향적이다.

논이 그렇고 밭이 그렇다.

농부들은 보다 많은 경작지를 확보하기 위해 끝없이 경사진 땅을 까 내려 평평한 땅을 넓혀 왔다.

또한 어촌의 생활은 말할 필요도 없다.

바다 그 자체가 수평 아닌가.

파도가 높이 일어 수평이 깨지면 어부들은 일할 수조차 없다.


한참을 읽다가 부제가 다시 생각난다. 

홀로 먼 길을 가는 이에게 보내는 편지. 

이 글은 시인이 꾹꾹 눌러 쓰고 담은 편지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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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지 13
존 맥그리거 지음, 김현우 옮김 / 미디어창비 / 2020년 12월
평점 :
절판



몇 페이지 읽지도 못하고 낭패감이 들었다낯선 장소에서 허둥거리듯낯선 얼굴이 분간되지 않듯낯선 목소리가 들리지 않듯 그렇게 눈에서 머물다 정리되지 않는 이야기를 읽는 기분이다그냥 읽으면 되는 것인지 뭘 기억해야 하는 것인지 전혀 모르겠다몰입하고 공감하고 싶은데 안전선 밖에서 보기만 하시오란 지시를 받고 선 기분이다.

 

실종 사건이 발생한 1당연히 이 암울한 시기에 대화란 부재해야 한다고 작가는 작정을 한 것일까마음이 무거워 말조차 떠오르지 않는 시기라고 설명하는 것일까내가 느끼는 이 긴장 역시 작가의 안배일까아니면 선 밖에 선 채로도 이 마을 사람들의 분위기에 어떻게든 동조한 것일까나는 결국 의지가 될 만한 음악을 틀었다.

 

모든 것이 멈춰 마땅할 것 같은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지만 일상은 멈추지 않는다일상의 한 겹도 찢어 내지 못한 이벤트지만 간혹 긴장과 죄책감을 불러내기는 한다시간은 무감하게 흐른다선택이나 행동이 모두 인과관계로 설명되지도 명쾌한 결말로 수렴되지도 않는다이 세계가 우리의 현실과 가장 닮은 것인가 싶은 생각에 머리를 내젓고 싶다하지만 단 한 명의 삶도 충분히 복잡할 것인데수많은 등장인물들의 삶을 차곡차곡 축적해서 압축한 문장들이 결국에는 하나로 규정하기 어려운 삶이란 총체를 가늠하게 해준다는 것을 도무지 부정할 수가 없다마음에 들고 안 들고는 별개의 문제일 뿐이다.

 

어떤 대단한 일이 있다 해도 끊임없이 무언가가 일어나는 삶이란 그 모든 것을 손쉽게 싸안고 오직 전진할 뿐이다사람들은 살아서 사라지기도 죽어서 사라지기도 하고 그들 중 절대 찾을 수 없는 이들도 있는 법이다. ‘이제 그만 수색을 멈춰 달라는 유가족의 최종 결정은 단 하나의 엄정한 사실수색하는 이들의 인생도 다른 모두의 인생도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그러니 누군가의 실종은 상실로 남겨 두기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오늘도 목격하는 현실 역시 그렇다판데믹에도 세계인의 삶은 어떻게든 이어지고 지구가 자전을 멈추지 않는 한 시간 역시 멈추지 않는다.

 

사랑이별성공실패친절폭력열정피로인내실망반복단순함안전함기쁨지겨움소통상실고통그리고 다시 오늘이 되는 내일안도감저수지 13의 13, 목록의 1부터 13 , 1년씩을 다루는 각 장에는 열 세 달, 13개의 문단이 반복된다매해 수미상관 불꽃놀이가 반복된다.

 

이러한 반복이 이어진다는 것이일상을 이어나갈 힘이 남았다는 것이사람들이 실종 소녀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되기도 하는 걸까언젠가 결정적 증거가 나오면 실마리가 풀리면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나 함께 찾아내 줄 수 있지 않을까그런 기대와 희망을 잃지도 잊지도 않고 기억하는 일에 담아 두고 싶다.

 

보다 정의로운 세상을 향한 기나긴 투쟁 속에서

우리의 기억은 가장 강력한 무기 가운데 하나다.

긴즈버그

 

1

 

실종된 여자아이의 이름은 리베카베키혹은 벡스였다사라질 당시에는 열세 살이었다후드가 달린 흰색 상의와 진청색 방한 조끼검은색 진캔버스화 차림이었다지금은 키가 152센티미터보다 클 것이고헤어스타일은 물론 머리 색깔도 달라졌을 것이다수사는 계속 진행 중이라고경찰 대변인은 분명히 말했다.

 

아이들은 베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그 아이에 대해 자신들이 알고 있는 점들에 근거해 똑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자신들이 했을 행동과자신들이 아는 주변 풍경에 근거해 추측을 했다아이들은 중략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그 아이와 함께 보냈다그 때문에 아이들은 자신들도 사건에 연관되어 있다고 느꼈다.

 

2

 

마을에서는 아이 어머니가 오래 머무를지 궁금했다사람들은 여자아이가 발견되어 이 모든 게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낮은 길고 고요했다뜨거운 태양 아래 언덕길을 걷는 것만으로 죄책감이 느껴질 때가 있었고어떤 사람들은 그 죄책감을 떨쳐내려고 다른 이들보다 더 열심히 일했다헌터 저택 주변을 피해 다니면 도움이 되었다기분이 그랬다여자아이의 어머니가 아직 그 집에 있었다중략종종 나타나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있었고중략늘 남자였다그런 사람들은.

 

그녀는 손바닥으로 입을 가린 채 비명을 지르고 싶은 것을 참았다자신이 지금보다 강해져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어떤 아침에는 완전히 혼자인 것처럼 느껴졌다부모님은 너무 멀리 계셨다친구들도 너무 멀리 있었다마을에는 아무도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실종된 여자아이의 이름은 리베카베키혹은 벡스였다최근 공개된 비디오에서 아이 엄마는 벡스라고 불렀다비디오에서 소녀는 웃고 있었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3

 

사람들은 그 아이를 찾고 싶었다그 아이가 안전하다는 걸 알고 싶었다거의 모르는 아이였지만자신들과 관련이 있는 일이라고 느꼈다.

 

제임스어머니가 말했다이건 중요한 일인데그 애 실종되던 날도 만났니그는 고개를 저었다고개를 젓기만 하고 말은 하지 않았다.

 

그와 아이 어머니가 이혼했다는 소문이 있었고그 무렵 그에 대한 목격담도 늘어났다저수지 가에서채석장 끝에서짐말용 다리 아래서늘 멀리서만 눈에 띄었고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4

 

나는 그냥 그 아이한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았으면 좋겠어.

 

후드 달린 흰색 상의가 황무지 고지대 계곡에서 발견되었다중략실종된 여자아이의 어머니가 상표와 디자인을 확인했다과학 수사팀의 조사에 몇 주가 걸렸고 결론은 나지 않았다중략포괄적인 수색 작업이 벌어졌지만더 이상의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114

 

실종된 여자아이의 이름은 리베카베키혹은 벡스였다.이제 열일곱 살이 됐을 테고경찰에서는 현재 모습을 컴퓨터로 합성한 이미지를 공개했다.

 

5

 

제임스 브로드는 결국 로하에게 베키 쇼 이야기를 했다.

 

제임스는 이제 이야기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실종 전해 여름에 모두가 그 아이를 만났다고그는 말했다.

 

6

 

아버지는 린지가 떠나면 빨래는 누가 하냐며 대학 이야기 자체를 농담으로 받아들였다남자 형제들은 에든버러에서는 영어를 거의 쓰지도 않는데뭐 하러 영문학을 배우겠다고 거기까지 가냐고 물었다중략그리고 자신이 떠나고 나면 어머니가 자신이 하던 집안일까지 모두 떠맡게 될 거라는 점도 알고 있었다다른 사람과 그 문제를 상의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기도를 많이 했지만아이가 정상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정상’ 같은 말을 쓰지 않으려고 애썼다중략남편이 이런 사실 때문에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 것도 같았지만확신할 수는 없었다그런 식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남자가 아니었다보통은 술을 마시거나소리를 지르거나문을 거칠게 닫는 식이었다아니면 그냥 쉬는 쪽이었다.

 

7

 

미리 알리지도 않고 이럴 수는 없습니다존스씨가 말했다개인 보일러실이 아니잖아요존스 씨절대 못 물러납니다그가 말했고기술자들은 다른 날 다시 오겠다고 했다.

 

실종된 여자아이의 이름은 리베카베키혹은 벡스였다사진에서 여자아이는 카메라로부터 고개를 반쯤 돌리고 있어 마치 눈에 띄고 싶지 않은 것처럼어디 다른 곳에 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이제 스무 살이 되었겠지만그녀는 늘 여자아이라고 칭해졌다.

 

전남편을 본 사람들은그가 그런 폭력을 저지를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그런 몸집이 아니었고그런 유형의 남자로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사람들이심지어 그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난 후에도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그런 말들 때문에 그녀는 한동안 그 모든 게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중략 그는 늘 통제력을 잃어버리는 거라고 이야기했지만그 와중에도 그녀의 얼굴에 상처를 남기지 않으려고 주의했다팔이 두 번 부러졌고어깨가 탈골된 적도 한 번 있었다병원에서는 그런 부상에 대해 거짓말을 해야 했다.

 

그는 자신이 없으면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라고사람들이 그녀를 야단스럽고시끄럽고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그는 그녀가 살을 빼고체력을 기르고옷을 가려 입고큰 소리로 웃지 말고사람들 앞에서 음식을 먹지 말고다른 친구들을 사귀고더 좋은 엄마가 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로한이 왜 떠나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그런 일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그때 로한은 열두 살이었다어떤 상황인지 아이가 그녀보다 먼저 파악한 것 같았다.

 

8

 

8년째가 되니 읽는 나는 더 초조해진다마치 집중력을 흐리기 위해 고의로 배치된 장치들처럼 몇몇 인물들이 눈에 띄기도 했지만결국 누가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정리되는 인물이 없다삶에 깔끔하고 분명한 일이 어디 한 번이라도 있었냐는 냉정한 목소리가 들린다규칙적인 자판 소리만 계속되는 문장들에서 여전히 대화와 설명은 구분되지 않고이 소설은 주인공이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처음에는 일상과 확연히 구분되는 사건이었던 실종 역시 언제부턴가 태연한 일상인지 여전히 사건인지 헷갈리는 지경에 이른다실종된 부모의 대화조차 등장하지 않는다감정 역시 등장하지 않는다.

 

아동 포르노 혐의로 기소된 남자 이야기를 다룬 지역 뉴스가 나왔다중략경관 한 명이 본 사건은 실종된 여자아이와는 관련이 없다고 했다법원 건물로 들어가는 남자의 모습이 나왔다머리 위에 스웨터를 덮어 쓰고 있었지만그것만으로는 존스씨의 얼굴을 알아보는 일을 막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9


작가는 행동과 상황만 관찰하고 묘사한다실종된 건 소녀만이 아닌 듯하다모두가 실종 상태인 듯 살아간다.

 

마틴은 차를 타고 버려진 채석장으로 가서 망치로 자신의 컴퓨터를 박살 낸 다음불에 타서 형체만 남은 조각들을 자동차 밑으로 밀어 넣었다.

 

그는 아이들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을 지켜봤다여전히 폐는 작지만 아이들의 몸은 빠르게 자라고 있었다중략그는 자신이 그 세 사람을 받치고 있는 것 같은그 거실과 집을 받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자신이 대단히 능력 있는 사람인 것 같은 느낌과이런 상황을 전혀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인 것 같은 느낌이 동시에 들었다.

 

실종된 여자 아이의 이름은 리베카베키혹은 벡스였다여전히 살아있다면 지금은 키가 거의 180은 됐을 것이다중략사건은 계속 수사 중이라고 대변인이 말했다검은색 진과 방한 조끼후드 달린 흰색 상의는 이제 너무 작을 것이다당시의 신발을 신으면 솔기가 터질 것이다.

 

10

 

존스는 잠시 걸어가다가 뒤를 돌아보았다제가 한 짓이 아닙니다그가 말했다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그 어떤 짓도 저는 하지 않았어요실수였다고요컴퓨터가 뭔가 잘못된 거예요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마음대로 하라고 해요다 필요 없으니까그는 힘을 주고 선 채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였고순간 그녀는 두려웠다.

 

여자아이가 실종된 지 10년이 지났고이야기가 나오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그녀는 지금도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여자아이의 이름은 리베카베키혹은 벡스였다후드 달린 흰색 상의와 진청색 방한 조끼 차림이었다지금이면 스물세 살이 됐을 것이다.

 

몇 번이나 이 문장을 썼는지 모르겠다그런데 이 문장을 쓰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생각에 홀린 듯 자꾸 쓰며잊지 않겠습니다기억하겠습니다란 서글프고 아픈 문장들이 반복되는 기분이다삼가 고인의 명복을 비는 일은 그만했으면 좋겠는데결국 이 소망은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11

 

제임스는 여자 친구를 황무지로 데려가 실종된 여자아이 사건을 이야기해주었다여자 친구는 귀 기울여 듣고 나서제임스의 잘못이 아니라고 했다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사람들이 늘 그렇게 말한다고 했다.

 

12

 

건물들은 전소했고다음 날 아침까지 희미한 연기가 피어올랐다실종된 여자이이의 아버지가 불을 질렀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그는 알리바이가 확실한 것 같았다경찰이 확인했다그 남자에게 그런 걸 물어보러 가는 일은 하고 싶지 않을 것 같아마틴이 말했다.

 

13

 

실종된 여자아이의 아버지가 화재 문제로 다시 한 번 조사를 받았고체포되었다.

 

그들은 주차장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질 예정이었고세 명은 먼 길을 가야 했다아직 헤어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실종된 여자아이는 아직 잊히지 않았다여자아이의 이름은 리베카베키 혹은 벡스였다그 아이를 찾아보았다중략소용이 없었다여전히 모두들 그 아이에 대한 꿈을 꿨다.

 

실종 당일에 그 아이를 찾는 꿈들이 있었다어스름 무렵에 황무지에서 아이를 우연히 발견하고 부모에게 데려다 주었다꿈속에서 여자아이의 부모는 감사하다고 짧게 인사를 했고사람들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침대에 누운 잭슨씨는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모두 고요했고모두 빛났네.

 

기억은 저무는 해와 더불어 매년 더 흐려지고남은 기억은 각자의 방식으로 다른 장면들로 저장된다모두가 범인인가 싶은 순간들도 있고 모두가 이 사건과는 무관한 다른 비밀을 숨기느라 전전긍긍한 건가 돌발적인 의심이 들기도 한다.

 

문장으로도 만나지 못한 실종된 소녀는 끝까지 이야기의 주인공도 되어 보지 못하고 어디로 사라진 걸까마음이 많이 아프다매번 다른 아이들처럼 나이를 먹고 머리카락이 자라고 키가 자라고 있을 거란 문장들은 업데이트 되었지만 결국 마지막까지 살아서 나타나지도 찾아 데려오지도 못했다구체적인 실물 증거가 아무 것도 없으니상상 속에서마저 존재할 수가 없다.

 

소녀가 실종되고그 부모의 목소리가 실종되고마을 사람들의 삶에는 실종된 소녀의 이야기가 채워졌다빼앗긴 기억 없이도 우리 모두가 상실하며 살아가는 것들은 무엇일까얼마나 자주많은 것들을 잃고 잊고 삶은 이어지는 걸까.

 

밤이면 사람들은 여자아이가 있을 만한 곳에 관한 꿈을 꾸었다아이가 황무지를 따라 걸어가는 꿈에서아이의 옷은 젖어 있고 피부는 거의 파란색이었다맨 처음 아이를 발견하고 담요로 감싸서 안전하게 데려오는 꿈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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