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
김민환 지음 / 솔출판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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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사상에 대해 잘 모르고 산다. 대학시절 이후로도 여러분들이 언급하시고, 백낙청 선생님도 꾸준히 언급하시지만, 진지하게 공부를 해본 적이 없다. 소설이라면 간접체험을 하게 해줄 거란 기대가 컸다. 일상의 태동으로서 사상을 만나보고 싶었다.

 

동학이란 것이 대체 무엇인가? 공부하는 사람들로서, 그것이 뭣인지는 알아둘 필요가 있지 않겄는가?”

 

소안도라는 생활공간에서 각자의 사연을 가진 이들이 시대와 어우러지며, 개인사를 써내려가듯 이야기가 전개된다. 동학은 소개되는 단계이나, 이를 핑계로 작은 권력을 가진 이들은 제 출세의 기회로 누군가를 희생시키려 한다.

 

동학에서는 가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여.”

 

옷조차 제대로 챙겨 입을 줄 모르던 일본인들을 무시하면서도 같은 섬에서 함께 살아가던 조선인들은, 시대가 변하고 입장이 바뀌고 문물이 달라지는 변화에 충격을 받고, 각자의 신념대로 반응한다.

 

성냥도 석유등에 버금갈 만큼 생활에 이로웠다. (...) 처음에 사람들은 성냥을 도깨비불이라고 했으나, 원료인 석유황을 빨리 발음한, 성냥이란 말로 굳어졌다.”

 

갑오년이 지나고, 시대적 갈등이 더 깊어지고 심화되면, 늘 마주하게 될 참담한 상황이 소안도에서도 일어날 거란 생각에 조금 기분이 무거웠다. 얼마나 죽고 죽이는 비극이 일어날 것인지. 그런데! 이야기는 그런 전개가 아니었다. 악의를 가진 인물, 화해할 수 없는 입장들이 부딪치긴 했지만 작은 섬의 작은 언덕 같은 고저로 해소되곤 했다.

 

헤어지자는 말은 가라는 말이고, 또 만나자는 말은 생각을 돌이킬 시간을 주겠다는 말이다.”

 

육지의 상황과 사람들의 반응은 더 격렬하고 상대적으로 소안도의 갈등은 불가능과 원수를 대적하는 필사적인 분위기는 없었다. 뜻을 가지고 올바르게 살기 위해 터전을 찾은 이들의 삶터이기 때문일까.

 

속 시원한 사이다보다, 어렵게 고민하고 조금씩 합의를 보는 과정이 더 좋은 나로서는 그들의 결론이 궁금해서 놓지 못하고 계속 읽을 수밖에 없었다. “등대”(로 상징되는 무언가)를 부수자는 결정은 내가 생각한 상징의 의미였을까.

 

동학에서 말하는 선천시대가 가고 후천시대가 오는 모습이, 성별과 민족으로 완벽하게 갈라지지 않고, 서로를 사랑하고 함께 삶을 만들어가는 모습이라면, 동학은 초기의 평등사상처럼 친절하고 이타적인 이들의 아름다운 꿈처럼 고운 개념이다.

 

해를 입을까 마음 졸이면 지켜본 소설 속 인물들이 나는 만나본 적 없는 소안도의 주민들 같기도 했다. 꼭 생각도 삶도 사랑도 나눌 이들과 함께 많이 웃으며 어려운 시절을 잘 사셨기를 바라는 마음이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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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되다 - 인간의 코딩 오류, 경이로운 문명을 만들다
루이스 다트넬 지음, 이충호 옮김 / 흐름출판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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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지능이 매우 뛰어나고 유능한 유인원 종인 한편,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큰 결함이 있다. 인간 이해를 위한 종합 교과서 같은 이 책은 시작부터 시원하게 할 말을 다 하고 상세 설명을 펼친다.

 

기대하고 이상화한 내용과는 달리, 인간의 뇌는 완벽한 합리적 사고와 거리가 멀고, 인지 결함과 버그도 넘쳐난다. 이는 경험적으로 증명된 바가 무수하다. 중독에도 취약하고, 자기 파멸의 길도 걷는다.

 

그런데 이 많은 결함은 약점이나 부작용의 결과가 아니라 진화 과정에서 타협한 산물이다. ‘생존이 너무나 중요한 나머지, ‘완벽을 추구할 여유가 없었다.어떻게든 해나가고 살아남을 수밖에 없는 제약이 생존 조건이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오랜 질문에 이 책은 모든 능력과 제약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결과라는 답을 제공한다. 아프리카의 조상으로부터 크게 진화(변화)하지 않은 채,생리와 심리의 거의 모든 측면은 10만 년 전과 동일하다. , 사람을 정의하는 기본 측면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환원주의에는 경계심이 강한 편이지만, 설명의 신빙성과 설득력은 관련 연구 데이터와 결과를 살펴보고 판단하면 될 일이다. 인류학과 사회학의 최신 연구들은 어느 소설보다 흥미롭다. 재밌어서 빨리 더 배우고 싶은 조바심과 분량이 줄어드는 아까움 사이를 왕복하며 밑줄을 죽죽 그었다.

 

샘플북의 1장은 우리 자신의 진화 - 문명을 위한 소프트웨어를 돌아보는 내용이다. ‘무리(짓는) 편향과 초능력과도 같은 생존에 필수였던 협력 능력이 진화적으로 동일한 능력 발현이라서, 쓴 웃음이 나고 어깨에 힘이 빠진다.

 

완벽하지 않은 인간의 문명은 반응성 공격성을 줄이고 순행 공격성을 남겼는데 - 두 공격성을 문명 이전의 존재처럼 가진 이들도 여전히 있지만, 인간은 잔인한 동시에 상냥하다는 것에 아무 모순이 없어서 허탈하기도 하고 정신적 경직이 풀리기도 한다.

 

독재를 견제하기 위해서 언어와 무기가 동시에 필요한 상황, 공격성을 증대시키고 적은 비인간화하는 목적의 군사훈련시스템, 경계 내의 폭력 사용을 독점 행사하는 조직체로서의 국가, 이 모든 것이 협력의 산물로서 문명의 모습이기도 하다는 것이 서늘하다.

 

자산 교환의 한 형태로서 상호 이타성미래 투자로서의 유대를 생물학적으로 매개하는 옥시토신이 만든 신경화학반응인 우정, 진화적 도움이 필요한 시기를 대비한 보험으로서 진정한 친구까지, ‘인간은 몸이다라고 생각했지만 생물로서의 인간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전무했다고도 느낀다.

 

실망과 절망은 아니고, 오랜만에 과학이 전하는 맹렬한 실체에 존재가 광광 울리며 배우는 기분이다. 싸늘하고 쓰리지만 재밌다. 1장 분량인데, 벌써 다 소개할 수 없는 내용들이 아쉽다. 특히 뒷담화가 인간 문화와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 정교하고 핵심적인 진화 결과물인가는 충격적이다.

 

요즘 활발히 명명되는 도파민은 역시 강력하고 다양한 영향력 - 처벌의 즐거움과 사회적 결속 - 을 미치는 요인이며, 도덕성과 종교와 법체계의 기능에 대해서도, 진화와 문명의 관점에서 다시 보며, 독자로서 답을 고민해본다

 

- 인간의 본성은 평화적인가 폭력적인가

- 독재를 견제하기 위한 협력 체계를 진화시킨 인간 사회에 계층화가 심화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정식출간본에 이어질 상세 내용은, 가족, 풍토병, 유행병, 인구, 마음을 변화시키는 물질, 코딩 오류, 인지 편향이다. 1장에 비추어 여전히 흥미로울 거란 기대가 크다. 이 책이 제공할 빅히스토리에서 촉발될, 인류가 자신의 문명을 바라보는 시점의 진화가 개인과 사회적 규모 모두에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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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짧음에 관하여
딘 리클스 지음, 허윤정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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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물리학, 과학 철학, 역사를 공부하고 가르치는 저자의 이력과 논문 주제들이 무척 흥미롭다. 20세기의 나도 물리학에서 설명하는 시간이 새롭고 놀라워서 논문 주제로 삼았다.

 

20대엔 전혀 실감하지 못했던 인생의 짧음을 지금은 매일 느낀다. 한 주나 한 달 단위로 사라지는 시간감각을 애통해하며 사는 중이다. 남은 시간은 얼마일까. 그 생각만 떠올려도 생이 안타깝고 애틋하다.

 

감정적이고 동시에 엄정한 현실인 이 주제에 대해 차분하게 읽으며 배우고 생각해볼 기회가 반갑고 귀하다. 짧은 한번뿐인 인생, 인류는 좀 더 평화롭고 즐겁게 서로 어울려 살 수는 왜 없을까... 늘 궁금하다.

 

시간이 한 방향으로 흐르고 그러면서 과거 사건들이 더는 영향을 끼치지 못하도록 차단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에게 중요한 온갖 함의가 있다.”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인생을 준비하다가 인생이 끝나버립니다.” 세네카, 인생의 짧음에 관하여의 첫머리

 

작고 가벼운 책을 만나면 기분이 좋아서, 한동안 가방에 넣어 다닌다. 이 책은 외모와 달리 깊이 판 문장의 우울 같은 사유가 가득하지만, 충분히 읽을 수 있도록 친절하고 살가운 어조를 띤 문장들로 기록되었다.

 

팬데믹의 울울한 시간 동안, 누군가는 이런 글을 쓰고 있었구나, 생각하면 올려다본 먼 하늘 한쪽이 반짝거리는 듯하다. 슬프고 황망한 갑작스런 이별이 많았지만,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고찰하기에도 적합한 시기였다.

 

죽음은 유한한 경계를 제공하기 때문에 의미에 결정적이다. 사실 그게 이 책의 핵심이다. (...) 존재에 생기를 불어넣고 효용을 주는 선물로 여겨야 한다.”

 

통째로 외울 듯 밑줄을 많이 그었지만, 다 읽고 나니 오히려 주제 파악이 간명하게 된 듯해서 기쁘다. 30년 전에도 지금도 늘 관심사이자 미스터리인, 시간 자체와 그 시간의 일방향성, 그래서 정해진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죽음, 그 끝. 그리고 그 과정인 삶의 애달픔과 애틋함과 안타까움.

 

기적처럼 태어나 반드시 죽는다, 는 운명을 알고도, 시간의 소중함을 절감하지 못하고 산다. 때론 그저 존재하기만하거나, ‘크게 낭비하기도한다 시간 도둑*. 그런 시간을 다 모으면 체감 인생이 더 길어질 지도 모르겠다.

 

* 어떤 일을 정말 해야만 한다는 걸 알면서도 미루는 경우

 

헷갈리게 하지 않는 이 책은 주제에 밀착해서 조언을 거듭 건넨다. 짧은 생을 제대로 살아라” “낭비하지 말아라” “숙고해서 행동하고 미래를 만들어라”... 세네카가 하지 말라는 걸 다 하면서 사는 중이다. 또 반성한다.

 

죽음이 점점 선명해지는 반환점을 돈 나이라서, 그 조바심과 안타까움을 이 책에 적힌 미래의 가소성으로 바꿔 읽으니 격려가 된다. 중요한 건 행동이라고 동의하면서도, 미래를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걸 알면서도, ‘생각만 하다 멈춘다. 운이 좋아 먼저 행동한 이들의 덕을 보며 살아볼 생각을 더 많이 한다. 인지 기능이 손상되지 않은 채 고령으로 생존 중이라면, 그 미래의 나는 현재의 나를 또 부끄러워할 것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의지적 행위이고 가지치기 과정이 필요하다. 관계도 사물도 공간도 시간도 좀 더 가지치기가 필요하다. 지향하는 미래가 현실이 되려면, 열심히 상상하고 행위로 선택하는 것만이 시간 병**이 아닌, 본래적 삶***을 사는 방식이다.

 

** disease of time, 미래에 대한 형편없는 의사 결정, 우리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처럼 저지르는 행위

 

*** 의식이 있고 의미가 있는 좋은 삶. 행동과 목표가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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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아닌 여자들 - 역사에 늘 존재했던 자녀 없는 삶
페기 오도널 헤핑턴 지음, 이나경 옮김 / 북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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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을 보자마자 한국사회에서 목격한 갖가지 관련 상황들이 떠오른다. 정책이라고 보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부실하거나 웃기지도 않는, 모욕적인 내용들 - 쪼이는 댄스, 여성 조기입학, 돈 줄게 애 낳아 등 - 이 다수다.

 

인구가 81억이 넘었는데 여전히 모자랐는지, 인간과 닮은 AI도 만들고 싶어 하는 기이한 욕망이 투자를 받는 과학 기술의 시대에, 여성을 국가가 동원 가능한 자궁 수로 계산하는 전근대적(?) 태도는 현상 유지 중이다.

 

숨을 고르고 책을 펼쳤다. 문자를 통해 들썩이는 감정을 가라앉히며, 미국 사회의 여성은 애 낳는 일을 어떻게 파업해왔는지 읽어본다. 로 앤 웨이드 판결을 뒤집은 자유주의 인권국가에서 여성 공동의 경험, 그 역사를 만나본다.

 

여성이 자녀를 갖지 않는 이유와 연결된 여러 가지 문제의 역사를 살피지 않으면, 자녀를 갖지 않는 것이 파업보다는 개인의 선택처럼 느껴진다.”

 

여성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임신 위험을 설파했기에, 임신중지 시술을 살인죄로 재판한 1800년대 미국 기독교 사회의 사례에 놀라 읽다가, 피임 방법들이 4천 년 전, 기원전 1900년으로 거슬러가서 더 놀랐다. ‘현대인은 얼마나 오만하고 무지한 건가. 여성이 아이를 갖지 않는 이유는 짐작보다 다양했다.

 

21세기 한국에서도 여전히 익숙하고 가시적인 이유는, 여성과 모성은 가정에 머물러야 하고 근로는 다른 곳에서 이루어진다는 200년 된 믿음, 그 탓에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고 느낀 사람들은 자녀를 최소로 갖거나 갖지 않는 것이다.

 

이미 커리어가 삶의 일부라는 인식은 실재하는데, 유자녀 여성의 임금과 경력 불이익은 성별 차가 모욕적으로 크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갖고 싶지만 갖지 못하는 이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렇다면, ‘어머니가 되는 방법은 꼭 혈연이어야만 할까.

 

시험관 시술이 실제로 약속하는 것은 여성을 생물학적 어머니로 만들어 자궁에 가치를 회복시켜준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가 있고, 그 실패로 인해 여성은 선택지가 적었던 과거보다 더욱 실패한 존재처럼 느낄지도 모른다.”

 

사회적 약자인 어린이들이 전혀 안전하지 못한 사회를 생각하면, 어른들이 이미 태어난 아이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떠올리면, 생각은 더 복잡해진다. 동시에, 아이 생산자로서 스트레스를 받는 성인들의 삶도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래서 아이 말고 친족을 만들자는 운동이 흥미롭다. 과거 공동체에서 함께 양육하던 방식처럼, 똑같지는 않더라고, 낳지 않은 아이들, 아이를 낳지 않은 사람을, 미래 세대들에게 우리가족과 마음과 헌신을 열자는 제안이다.

 

어머니와 어머니가 아닌 여성 사이에 현실이라고 알고 있는 구분은 여성의 택지를 제한하려는 의도였다. 이 재밌고 새로운 책을 통해 나는 역사적으로 늘 존재했던 엄마 아닌 여자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의 개인사와 관련 기록이 우리의 역사다. 우리는 동시대인들은 물론 그들과도 연대할 수 있다.

 

역사서는 늘 좋아하지만, 특별히 개안을 돕는 책이다. 한국의 엄마 아닌 여자들도 언젠가 출간될 수 있을까. 읽는 것으로 연대를 시작할 수 있는 날을 고대하며, 존경하는 엄마 아닌 여자의 기록으로 감상을 마무리한다.

 

사망 7개월 전, 한 기자는 보부아르에게 전 세계 페미니스트와 여성운동에 어머니상으로 간주되는 데 대한 소감을 물었다. “터무니없는 비유죠.” 보부아르는 웃으며 말했다. “사람들은 어머니 말을 도통 듣지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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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나에게 쓴 편지 카프카 전집 8
프란츠 카프카 지음, 오화영 옮김 / 솔출판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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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가 일기장을 맡길 만큼 신뢰했던 밀레나에게 쓴 편지이자 유고, 한국어 정본 완역은 최초라고 한다. 어떤 번역인지, 내용만큼 궁금하다. 전집의 표지 일러스트가 카프카의 문학 퍼즐 조각처럼 멋지다.

 

나는 편지를 알고 활용하고 추억도 있는 세대다. 얼마의 진심을 얼마나 긴 내용을 써서 한 때 누군가에게 보냈는지, 기억도 가물거리지만, 장면만은 선명하다. 손가락의 고통으로, 머리의 뜨거움으로, 심장의 간질거림으로.

 

마지막 편지를, 팬데믹의 어느 날 의도적으로 써보았다. 손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를 보내면서, 상대의 손으로 꾹꾹 눌러쓴 답장을 받고 싶었다. 육필, 이란 단어를 새삼스럽게 느껴보았다. 편지를 쓴다는 건 무엇이었을까.

 

이제 그만 써야겠습니다. 이 끝도 없는 하얀 종이는 저의 눈을 태워버리려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꾸 쓰게 되지요.”

 




 

최상의 선입견과 최상의 오독, 인간의 소통이란 그런 것인가 싶을 때도 간혹 있다. 그 결함(?)이 때론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예술작품처럼도 보인다. 오해가 상상을 촉발하고 독려하여 어딘가의 이상향으로 질주하는.

 

이제 부인을 더 또렷하게 볼 수 있습니다. 몸과 손의 동작들을 말입니다. 그렇게 민첩하고 그렇게 단호할 수가 없군요. 거의 직접 만나 뵙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느낌입니다.”

 

실시간 채팅의 방식이 아닌, 이모티콘으로 충분한 방식이 아닌, 구구절절한 의문과 의심과 불안과 간절함이 담긴, 도착과 읽기와 답장 쓰기와 회신의 물리적 시간이 여러 날 걸리는 편지라는 방식이 이제 와서 새삼 애틋하고 그립고 부럽기도 하다.

 

단 한 통의 편지로도, 아니, 아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지 않은가요? (...)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뒤로 한껏 기대어서 편지들을 들이켜고는, 계속 들이켜기를 멈추지 않겠다는 생각밖에 할 줄 모른답니다.”

 

프란츠 카프카라는 문학 대가의 편지는, 대화체의 퇴고 없는(아마도) 문장들이라서, 빠른 속도로 재생되는 영상 대본을 읽거나, 대화를 엿듣는 기분이 든다. 당연히 지루할 틈 없이 재밌다. 문장마다 담긴 감정의 종류와 상태도 달라서, 웃고 감탄하기를 반복한다. 중반쯤 읽다가 가름끈을 찾았을 정도로, 펼치면 즐거운 속독을 하게 된다.

 

이렇게 다채롭게 격변하는 감정의 동요와 변화와 열렬함과 뜨거움을 밀레나는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계속 (거의) 모르는 상태로, 카프카의 다량의 편지를 읽는 일는 일은 카프카 퍼즐을 맞춰나가는 즐거운 놀이 같기도 하다.

 

병은 그에게 거의 믿기지 않을 정도의 섬세함과, 거의 소름끼칠 절도로 타협을 모르는 지성적 민감함을 가져다주었다.”

 

작품을 번역한다는 것은 작가를 가장 깊이 들여다보는 일이라서일까, 마침내 밀레나의 편지들을 만나고 애도사를 읽으니, 단단하고 차분하게 카프카라는 작가(사람)을 본질적으로 이해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프랑크는 살 수가 없습니다. (...) 우리는 모두 겉으로 보기에는 살아갈 능력이 있습니다. 언젠가 거짓 속으로 도피했기 때문이지요. (...) 하지만 그는 아직 그를 지켜줄 만한 어떤 피난처로도 도피하지 못했습니다. (...) 그에게는 아무 피난처도 안식처도 없습니다.”

 

전혀 만만하지 않은 자신의 형편에도 굳건해서 너무나 궁금해진 밀레나라는 체코어를 사용하는 인물이 이 책을 가장 매력적으로 갈무리하는 요소다. 그의 문장들은 정갈하고 의지적이다.

 

그는 세상을 비범하게, 그리고 깊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신 또한 비범하고 깊은 세계였다.”

 

한 시대, 어느 인물들의 사랑과 아픔과 재능과 열정과 병과 죽음이 한차례 비바람처럼 지나간다. 편지지가 깃발처럼 날리는 상상을 한다. 비범하든 아니든 인간의 삶은 짧다. 울컥하는 기분에 그 핑계를 댈 수 있어 고마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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