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를 읽다 - 중국과 사마천을 공부하는 법 유유 고전강의 3
김영수 지음 / 유유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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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의 <사기>는 52만 6,500자에 열전만 70권으로 이루어져 그 방대한 체계를 이해하기도 어렵거니와 일독 자체도 버거운 책이다. 더욱이 사마천은 한자 한 단어에도 미묘한 함축을 부여하여 자신의 속뜻을 숨겨두기도 하였으므로, 이 역사서를 완전하게 독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점 때문에 <사기>를 읽으려는 이들은 필수라고 할 정도로 입문서나 해설서를 읽어야 겨우 이 거대한 저작의 바다를 항해할 수 있는 희미한 줄기라도 잡을 수 있게 된다.

사마천 <사기>를 읽기 전, 이 텍스트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그 핵심을 지적하는 책에는 한자오치의 <사기 교양 강의>가 있다. 이 책은 <사기>의 중요 인물 12명만을 추려서 사마천이 인물을 평가하는 관점, 태도, 그 역사적 사실에 주목하면서도 <사기>가 가진 문학성에도 초점을 맞추었다. 사기를 전체적으로 조망하지는 못하고 구조적 이해를 심화시키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한자오치의 책은 읽어볼 가치가 있다.

김영수의 <사기를 읽다>는 "30년 가까이 <사기> 공부에 매진"한 한국인 학자에 의해 쓰인 "<사기> 입문서"이다.

저자는 '사마천과 사기에 대한 모든 것'이라는 두 권짜리 책도 썼고, 150여 차례 이상 중국 현장 답사를 하였다고 자부하므로, 이 책은 <사기> 읽기에 착수하기 전에 읽어볼 기본서적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기대를 가지고 책을 손에 쥐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내 기대에 한참 못 미치는 책이었다.

일단 목차에서부터 의아한 지점이 많다. 1강에서는 왜 사마찬과 <사기>를 알고 읽어야 하는지를 밝히고 있고, 2강에서는 사마천이 이 책을 저술하게 된 동기를 설명하고 있다. 3강에선 사마천의 생애를 조명한다. 이미 1~3강을 통해 이 텍스트가 가진 의의를 지루할 정도로 설명해놓고서는, 4강에서 드디어 <사기>에 대해 본격적인 해설을 시도하나 싶더니, 저자는 이 '절대 역사서'의 위대함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5강에서는 또 이 책의 매력(정확히는 영향력이지만)에 대한 장황설을 늘어놓는다. 흥미로운 내용이기는 했지만, 과연 <사기>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지식이었는지는 알지 못하겠다.

나머지 6~8강도 본격적인 텍스트에 대한 침잠이 아니라 일종의 부록 같은 느낌으로 사마천의 문학성과 언어, 경제관, 사마천의 현장답사를 다룬다. 6강은 <사기>의 문학적 위대함과 흥미로운 고사들을 나열한다. 그리고 여기서도 이 책의 매력을 설명한다. 이쯤되면 이 책은 <사기>의 매력에 대한 입문서가 아닌가 싶다. 이렇게 본다면, 김영수의 이 입문서에서 정작 사마천 <사기> 자체를 해설한 부분은 4강, 6~7강, 8강 일부이고 다른 부분은 대부분 텍스트 외적인 것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룬다. 구성도 치밀하지 못하다. 4강에서 텍스트의 기본 사항에 대해 설명하고는, 바로 다음 강의에서 이 텍스트의 영향사를 나열하고, 흥미로운 고사와 기사들, 경제관, 현장답사로 이어지는 강의의 흐름은 잘 이해가 안 된다. 사마천과 <사기>의 훌륭함만 주구장창 반복적으로 설명하는 서술과 중구난방한 구성으로 정말 입문서가 될 수 있을까.

무엇보다 가장 의아한 것은 <사기> 입문서를 자처하는 책이 정작 사마천의 <사기> 원전을 직접 인용하며 해설하는 일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있어도 <사기> 속 고사나 기사를 설명하면서 관련 부분을 인용하는 정도지, 이 텍스트의 특징을 보여주고 사마천의 사상이나 관점과 의도가 드러나는 부분을 직접 짚어가며 해설하는 부분은 6강과 7강을 제외하고는 거의 찾을 수 없다. 다른 고전 입문서와 비교해보자. 강유원의 '고전 강의' 시리즈도 일종의 고전 입문/해설서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책은 저자가 공부한 내용을 바탕으로 한 텍스트가 형성된 역사적 배경, 사상사적 배경도 짚는 동시에 텍스트의 구조도 설명하면서도, 원전에서 중요한 부분을 직접 인용하고 해설하는 방식을 통해 매우 밀도 높은 텍스트 독해를 한다. 그래서 독자는 원전 텍스트를 직접 읽고 그에 대한 강유원의 해설도 접하면서 독서력을 높일 수 있다.( 나 역시 그의 책을 통하여 호메로스, <신곡>, 마키아벨리, 데카르트, 논어 등과 같은 어렵다는 고전 텍스트를 직접 읽을 수 있었다.)

이건 어찌보면, 이 책이 "재미 위주"로 구성된 강의를 글로 풀어 쓴 것이라는 한계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봤을 때, 쉽기만 하면 입문서의 역할은 끝났다고 보는 저자의 관점이 더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저본이 되는 강의는 사람들이 흥미를 가질 만한 내용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그 강연을 글로 옮긴 이 책도 비슷한 구성을 취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아들도 읽을 수 있도록 최대한 쉽게 쓰는 것이 이 저작의 목표이다. 물론 저자는 깊이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고 하지만, 저자의 포커스는 쉬움에 맞춰져 있다.

입문서하면 쉬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반만 옳은 말이다. 입문서의 궁극적 목표는 독자로 하여금 원전 텍스트를 읽게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입문서에는 독자가 원전을 직접 읽을 때 꼭 알아야 하는 기본적인 사항들을 알려줘야 한다. 여기에는 저술 동기와 의도, 텍스트의 구조, 역사적/사상사적 맥락, 해당 텍스트의 핵심 개념에 대한 설명, 핵심 주장 등이 포함될 것이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으로 읽어야 하는지, 입문서 저자가 생각하는 고전의 중요 부분을 원전 인용으로 볼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따라서 고전 입문서는 평이한 서술과 쉬움이 미덕이 아니다. 얼마나 기본에 충실한지가 입문서의 탁월함을 가늠한다. 독자로서도 쉬운 해설서는 이후 독서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조금 어렵더라도 기본에 충실한 책을 읽어야 더 어려운 책을 독해할 수 있는 능력이 길러진다. 따라서 쉬운 책 여러 권이 아니라 단 한 권의 책을 반복적으로 꼼꼼하게 독파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

이 책은 권하고 싶은 책은 아니다. 만약 <사기>와 관련된 기본 사항들을 알고 싶다면, <사기>의 구조를 설명하고 '보임안서'를 통해 저술 동기를 설명하는 4강만 읽으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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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2-07-13 08: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4강에 관련해서 궁금한 게 있습니다.
세상의 명문장인 <보임소경서>를 보면, 임안 또는 임소경任小卿이 ˝불측의 죄˝를 안고 있어서 사형선고를 받아 대기중인데 혹시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설명을 하고 있나요? 있다면 도서관에서라도 찾아 읽어봐야겠습니다. 물론 그 부분만입니다.

Redman 2022-07-13 14:26   좋아요 3 | URL
아쉽게도 그건 없습니다.. 책에선 ˝究天人之際 通古今之變 成一家之言˝에 대한 설명만 있습니다

그레이스 2022-07-14 01:09   좋아요 2 | URL
후한서 <임안전>에
임소경은 주둔 사령부의 관리로 태자에게서 위조된 명령서를 받았으나 성의 군문을 닫고 추이를 관망하고 있었다. 사건이 수습되는 과정에서는 임소경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으나 나중에 부하의 밀고로 연좌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만다. 관망하던 태도가 기회주의적인 처사로 판결받았던 것.
<기록자의 윤리, 역사의 마음을 생각하다> 40p에 인용하고 있네요.

사기 열전 권104에서 세번째 인물 임안편에도 나와 있습니다.

Falstaff 2022-07-14 07:33   좋아요 2 | URL
아, 한무제 때 사람으로 열전에도 나왔군요!
ㅎㅎㅎ 제가 열전 2권은 좋아하지 않아서 설렁설렁 읽었더니. ㅋㅋㅋ 지금 읽어봤습니다. 그레이스님, 답글 고맙습니다!
 

나의 가설은 과거와 미래 사이의, 혹은 인류학적으로 말해서 경험과 기대 사이의 차이규정 속에서 역사적 시간‘ 이라는 것을 포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이가 듦에 따라 경험과 기대의 관계도 변한다는 점, 하나가 커지면 다른 하나는 작아진다는 점, 하나가 다른 하나를 통해 보상된다는 점, 내면적이거나 외면적인 생물학 외적 지평이 있으며 이 지평을 통해 개인의 삶이라는 유한한 시간이상대화된다는 점은 생물학적으로 규정된 인간의 성질이다. 그러나역사적 세대들의 연쇄 속에서도 분명히 과거와 미래의 관계는 변화해왔다.
이 글들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어떠한 시간이 새로운 시대로, 즉 ‘근대(Neuzeit)‘로 경험될수록, 미래의 도전은 점점 커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현재와 지금은 어느덧 지나가버린 그 당시의 미래가 고찰대상이 된다. 어떤 시대의 사람들이 주관적으로경험을 소화해내는 가운데 미래의 비중이 커진다면, 그 세계는 틀림없이 새로운 경험을 모으고 점점 빨라지는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인간에게 점점 짧은 시간간격을 강요하는 기술적·산업적으로 고도로 형식화된 세계이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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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상가를 정치사상가로 부르기 위해서는, 현실 사태에 대한 그의 원인 규명과 그에 대한 해결 방안이 있어야 한다. 묵자는 전국시대의 혼란상을 각자가 자신만을 사랑하고 서로에 대해 강렬한 배타성을 보이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 두 가지 문제의식은 묵자의 중심사상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므로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다.

 

사람들이 서로를 배척하고 타인에게 손해를 입히는 것은 ‘11하기 때문이다. , “모두 제 의만을 옳다고 하고 다른 사람의 의를 잘못이라고 한다.”(皆是其義, 而非人之義, <묵자> <상동하>) 공동체 내에 서로 다른 가치관과 이해관계를 지닌 개인들이 조화되지 못하고 자신의 옳음만을 주장할 경우, 이들은 서로 배타적이게 되고 사회는 파탄에 이르게 된다. 묵자는 이러한 11의와 그로 인한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의의 통일을 주장한다. 이때 의를 통일하는 주체는 국가와 정부여야 한다. “11의를 통일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형정을 수립하고 정장을 세울 필요가 있다. 정장의 우두머리가 바로 천자다.” 여기서 형정이란 오늘날의 말로 국가기구이고, 정장은 관료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국가-군주-관료집단이 하나의 의를 수립함으로써 다른 의를 제거하고 통일하는 것이 혼란한 국면을 위로부터 변화시키는 길이라고 묵자는 본 것이다. 이러한 묵자의 위로부터의 개혁을 상동(尙同)’이라고 한다.

 

형법과 법령을 수단으로 의는 성취된다. 그리고 이 법률은 군주에 의해 제정된다. “의는 어리석고 천한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반드시 귀하고 지혜로운 사람에게서 나와야 한다.”(<天志中> 천자야말로 귀하고 지혜로운 존재이기에 법률 제정에 가장 적합하다. 그러므로 아래 계급은 천자의 의를 절대적으로 따라야 한다. 군주와 관료조직에 의해 법률을 확립해야 한다는 데에서 묵자의 상동의 핵심은 통치질서의 확립임을 알 수 있다. 통일된 의는 어떻게 보급할 것인가? “부귀로 앞에서 인도하고, 분명한 형벌로 뒤를 이끈다.”(<상동하>)

 

그런데 묵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의의 통일이라는 위로부터의 통합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런 상황이 조성된 원인은 사람과 사람 사이가 서로를 사랑하지 않기때문이다. 그 뿌리는 자애에 있다.” 자애의 실제 내용은 자리(自利)’이다. 자리의 문제점은 그것이 사람을 차별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묵자는 자애’ ‘자리가 서로 통한다고 생각했다. ‘자애’ ‘자리는 사람을 대하는 데, 처세하는 데, 일을 하는 데 있어 반드시 교별즉 서로 차별하게 만든다.” 나의 이익과 나의 집단의 이익만을 우선시하면서 다른 집단을 배척하고 차별한다. 그리고 이것이 필연적으로 묵자가 살던 시대와 같은 혼란함을 일으켰다. 이런 자애와 자리를 무엇으로 대체할 것인가? 그것이 겸상애와 교상리이다. 겸상애는 다른 사람의 나라 보기를 제 나라 보듯이 하고, 다른 사람의 집안 보기를 제 집안 보듯이 하고, 다른 사람 몸보기를 제 몸 보듯이 하는것이다. 겸상애는 자와 타 사이의 차이와 차별을 폐기한다. 이것이 중요한다. ‘은 평등의 원리를 표명한다. 물론 이때의 평등은 정치적·경제적 평등이 아니라는 점을 유념해야 하지만, 겸은 ’ ‘자리의 원리와 대조된다. 교상리는 겸상애의 현실적 반영이다. 말 그대로, 서로가 서로에게 이익이 생기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교상리의 중요한 정신은 상하의 조화이다. 위 계급과 아래 계급이 조화를 이룰 때 이익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평등을 지향하는 겸애와 상동은 모순된다. 그렇지만 묵자는 이 양자를 통일해낸다. “겸애는 평등을 지향하고, 상등은 전제를 지향한다. 보기에는 양자가 완전히 상반된다. 그러나 사실상 묵자는 이 둘을 기묘하게 통일하여 나타낸다. 그는 상동의 방법으로 겸애를 끌어내는 데, 이때 겸애는 행정 권력의 종속물로 바뀐다. 겸애는 상동에 의지해 실현되는데, 이때 상동은 사회조작의 주체가 되므로 전제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백성으로 하여금 상동하게 함에 있어서 백성을 사랑하여 힘쓰지 않게 하면 어느 곳에서도 부릴 수 없다. 그래서 <상동하>에서는 반드시 적극적으로 사랑하면서 그들을 부리고, 지극히 믿게 하면서 지키도록 한다고 쓰여 있다. 국가가 겸애와 교상리를 의로 삼아 적극적으로 이에 개입하여 보급하면, 서로 대조되는 겸애와 상동이 통일된다. 겸애는 백성을 부리는 수단이 되고, 엄격한 형벌을 통해 그것을 지키게 한다. 묵자의 정치적 실천 프로그램은 이렇듯 강제성을 띤다.

 

묵자의 정치사상에서 상동과 겸애 외에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상현설, 절용설, 비공설 등이 있다.

- 상현설

능력 있는 인재의 고용은 다른 제자백가들도 주장한 것이지만, 묵자는 이를 가장 급진적으로 주장했다. 그는 부귀친척을 용인하는 귀족정치를 폐기하고 능력주의적 관료정치를 세우고자 하였다. 이는 귀족들이 정권을 장악하던 현실에 대한 비판이다.

 

- 절용설

절용(節用)은 묵자 전체 사상 체계의 기본 명제 중 하나이다. 이는 단순히 물건을 아껴 쓰는 것을 넘어 소비와 생산 등 경제의 기본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시도이다. 묵자의 절()1) 일정한 수준의 소비가 있어서 생활의 기본 수요를 만족시키는 것, 그리고 2) 소비를 재생산에 유리하게 만드는 것 등의 의미이다.

 

- 비공설

()은 묵자가 말하는 의와 이에 합치하지 않는 경제·정치·도덕 여러 방면의 모든 행동을 지칭한다. ‘비공(非攻)’이란 을 반대한다는 것이다. 묵자는 공을 기준으로 전쟁을 설명한다. 묵자는 모든 전쟁이 아니라 의와 이에 대치되는 전쟁만을 반대한다. 그는 당시의 겸병 전쟁을, 사유재산권의 침해, 백성의 손해, 막대한 군비 부담 등의 이유로 반대하지만, 이익이 있고 의에 합치하는 ()’의 전쟁은 긍정한다. 그런데 과연 정당한 전쟁이란 있을까? 비공설을 읽고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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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이상
에인 랜드 지음 / 자유기업센터(CFE) / 199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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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작년 이맘때쯤 <정념과 이해관계>를 읽고 서평을 썼다. 그 책은 초기 자본주의 옹호론의 역사를 추적하고 있는데, 현대의 자본주의 옹호론을 엿보고자 에인 랜드의 <자본주의의 이상>을 읽었다. 하지만 이 독서는 실패한 것 같다.

일단 저자 소개 먼저.
에인 랜드는 20세기 후반 영미의 우파와 자유지상주의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소설가, 사상가이다. 그녀의 영향은 정치적으로는 대처와 트럼프 같은 이들을 통해서 드러나며, 경제학 사상쪽으로도 밀턴 프리드먼 같은 자유시장 신봉자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녀의 대표작 <파운틴헤드>와 <아틀라스>는 미국에서는 지금도 많이 읽히는 소설이며, 과장 보태서 말하면 그녀에게서 영향을 받은 우파 지식인 정치인들이 오늘날의 개인주의적 제도를 형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녀는 소설가로서 경력을 시작했지만, <아틀라스> 이후로는 소설 집필보다는 대중을 상대로 하여 자신의 객관주의 사상을 전파하는 것에 몰두했다. <자본주의의 이상>은 이때 강연 원고들과 그녀가 정기간행물에 기고한 글들을 모은 책이다.

에인 랜드의 사상은 자본주의에 대한 옹호, 자유방임주의와 능력주의로 정리할 수 있다. 이만한 영향을 미친 사람이니, 체계적이고 설득력 있는 자본주의 옹호론을 썼을 거라 생각할 법하지만, 실제로는 학문적인 부분은 거의 보이지 않고 지루한 웅변조로 자본주의와 자유방임을 주장하는 선전물이다. 딱 소설가가 몇 가지 학문 개념을 대충 익혀서 썼을 법한, 딱 그만큼에서 멈춘 문장과 사유의 깊이.

에인 랜드는 인간의 이기심을 긍정하고, 개인의 자유로운 생산활동을 방해하는 어떠한 정책이나 행위를 절대적으로 반대한다. 이런 맥락에서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나 부의 재분배를 책 전반에 걸쳐서 비판한다. 그러나 그녀는 ‘공유지의 비극‘은 말하지 않는다. 에인 랜드는 능력주의를 옹호하나, 능력주의 엘리트의 우연성, 능력주의적 세습과 그것이 불러올 사회적 악영향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에인 랜드는 개인과 사회 사이의 아무런 연관도 없기에 공공선 같은 실체가 불분명한 목적을 위해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희생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정치사상의 무지에서 나온 터무니없는 헛소리다. 에인 랜드는 자신을 객관주의자로 말하고 객관주의의 틀을 통해서 자본주의와 자유방임을 정당화한다. 그녀가 말하는 객관주의란 내가 봤을 때 대공황 이전 자유주의 경제사상과 똑같은 독창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지만, 그녀는 역사적으로 실패한 이 사상과 차별성을 주고 싶었는지 객관주의라는 조잡한 용어까지 갖다 붙인다.

진지하게 다룰 책은 아니나 나는 역설적으로 에인 랜드의 다른 책에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에인 랜드의 사상 때문이 어니라 그녀의 영향력 때문이다. 에인 랜드의 사상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연구소가 있을 정도로 그녀가 남긴 유산은 적지 않으며 그 중요성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소설들은 미국에서는 고전적 지위를 누린다. 고전이 당대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책이라고 한다면, 에인 랜드의 소설들도 1960년대 이후 미국의 시대상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나의 고민이 시작된다. 텍스트를 둘러싼 미국의 시대상(콘텍스트)을 읽기 위해 <자본주의의 이상>에서 일부 발췌문만 보아도 유치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소설들을, 심지어 드럽게 긴 그 소설들(<아틀라스> 번역본은 3권이나 한다)을 읽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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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2-06-26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에릭 랜드 사상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연구소가 미국 랜드 연구소는 설마 아니겠죠? ^^

Redman 2022-06-26 19:27   좋아요 1 | URL
ㅋㅋ 아쉽게도 아인 랜드 연구소 였습니다
 

https://blog.aladin.co.kr/739070192/12368342

작년에 이런 글을 썼는데, 그동안 더 알게 된 괜찮은 책들을 추가해봅니다.


1. 고대 그리스 비극

작년 10월까지는 아직 그리스 비극을 읽지 않았는데, 훈련소에 있으면서 본격적으로 읽어보았습니다. 거기서는 훈련 제외 남는 게 시간이니...천병희 선생이 번역한 선집 <그리스 비극 걸작선>으로 읽었는데, 그리스 비극 작가 3인(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대표작 두 작품씩을 선별하여 엮은 것입니다. 천병희 선생의 번역으로 전집이 나와있지만, 선집으로 입문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합니다. 


천병희, <그리스 비극의 이해>는 고대 그리스 비극을 읽을 때 알아두면 좋을 기본적 사항들을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만, 책소개와 달리 본격적인 해설은 하지 못했습니다. 천병희 선생은 번역에는 탁월하지만, 해설은 미진한 부분이 있습니다. 최혜영의 <그리스 비극 깊이 읽기>는 비극의 정치사회적 맥락과 종교사회적 맥락을 짚어주어 텍스트가 생산된 맥락 속에서 텍스트를 읽도록 도와준다는 점에서, 천병희 선생의 책을 보완하는 본격적인 해설서라 할 수 있습니다.



컨티뉴엄 리더스 가이드 시리즈에서 최근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입문>을 출간했는데, 이 책은 아직 안 읽어봤지만 이 시리즈는 믿고 볼만하니 <오이디푸스 왕>을 읽을 때 같이 읽어봐야겠습니다.


참고로, 김기영 선생이 을유문화사에서 <오레스테이아 3부작> <오이디푸스 왕 외> <메데이아> 등을 새로 번역하여 출간했으니,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로버트 페이건이라는 학자가 영역한 penguin classic 판 소포클레스의 <The Three Theban Plays>는 번역도 좋지만, 앞에 해설도 충실하여 같이 읽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리스 비극을 읽기의 끝판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라 할 수 있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분석틀과 개념으로 그리스 비극을 읽어도 좋은 독서가 될 것입니다. 니체는 고전문헌학을 연구한 학자였다. 니체의 중요한 문제의식이 집약된 <비극의 탄생>은 쉽게 이해할 텍스트도 아니며 한 차원 깊은 비극 공부를 위해 읽어볼 만하므로, 순서상 뒤로...




2.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시학 얘기가 나왔으니,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최근 번역출간된 뒤퐁록과 랄로의 주해서를 같이 읽으면 좋겠다. 












3. 장자

중국 도가철학의 중요한 사상가인 장자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장자>


국내에 여러 번역본이 있기는 하지만, 전 일단 길 출판사에서 나온 번역본으로 읽습니다. 


같이 읽어볼 책은 후쿠나가 미쓰지의 책인데, 저자는 세계적으로도 권위 있는 장자 연구자입니다. 그가 지은 장자 입문서인 <장자 - 고대 중국의 실존주의>는 저자의 깔끔하고 깊이 있는 장자 이해와 풍부한 원전 인용으로, 방대한 장자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이 책 후반부에 실려 있는 <장자 내편> 해제를 통해서 노자와 장자와의 차이점까지 짚을 수 있으니, 꼭 읽어볼 책입니다. 


후쿠나가 미츠지의 <장자 내편>도 따로 번역되어 있으니 참조.


한국인으로서는 가장 좋은 것은 한국인이 쓴 해설서이므로 전호근 선생의 <장자 강의>도 같이 읽어봐야겠습니다.












4. 마키아벨리 <군주론>

국내에 수많은 마키아벨리 <군주론> 번역서 중 추천하는 것은 이 세 가지입니다. 곽차섭 역, 김경희 외 역, 박상섭 역. 






군주론뿐만 아니라 마키아벨리 자체에 대해서는 두거물 정치철학자들의 저서를 소개하고자합니다.


하나는 레오 스트라우스의 <마키아벨리>이고, 다른 하나는 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하비 맨스필드의 <마키아벨리의 덕목>입니다. 스트라우스의 책에 대해서는 맨스필드의 책에서도 거론하니 이 책을 먼저 읽을 것을 권합니다. 


맨스필드의 책은 이런 순서로 읽으면 좋을 것입니다. 첫째, 서문을 읽는다. 둘째, 2부의 군주론 해제를 반복해서 읽는다. 마지막으로 셋째, 1부 '마키아벨리의 덕목'을 읽고서 통독을 한다. 녹록치 않은 글이지만, 이 순서로 읽으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실 1부와 2부 군주론 해제만 집중적으로 읽어도 무방합니다. 


마키아벨리가 살던 당대의 역사상을 알고자 한다면, 스티븐 그린블렛의 <1417년, 근대의 탄생>도 같이 추천합니다.













5. 논어


논어는 저번 글에서도 다루기는 했는데, 그때는 번역본 위주로 소개했다면, 이번에는 해설서 두 권을 소개하려 합니다.


하나는 중국인 연구자 양자오가 쓴 <논어를 읽다> 그리고 일본인 사상사 연구자 오구라 기조의 <새로 읽는 논어> 둘 다 역사적 관점에서, 사회적 맥락에서 논어의 내용을 해석한 책으로 한 번쯤 읽어볼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상사 연구에서는 잘 지적하지 않는 공자가 살던 춘추시대의 사회상을 자세하게 알려면 리펑의 <중국고대사>가 좋은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6. 카를 마르크스

권위 있는 사상사 연구자 이사야 벌린의 <칼 마르크스>는 사상사적 관점에서 마르크스의 생애를 서술한 책으로, 아직도 최고의 마르크스 입문서로 꼽히는 책입니다. 이 책은 마르크스가 영향을 받았던 당대 유럽의 사상사적 흐름들을 조명하는 한편, 그것을 마르크스가 어떻게 수용하고 자신의 저서에 녹여냈는지까지 다루어, 마르크스의 생애를 알고자 하는 이들 그리고 마르크스의 저서를 읽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가장 먼저 읽어야 할 최적의 입문서입니다. 구하기는 어렵지만, 레셰크 코와코프스키가 쓴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흐름> 제1권도, 마르크스의 사상을 청년기부터 주요 저작들에 대한 해설을 통해 살펴보므로 큰 도움이 됩니다.

토니 주트의 <재평가>를 읽으면서 알게 된 책인데, George Lichtheim의 <Marxism>이라는 책이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를 깊이 있게 다룬, 여전히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합니다. 












마르크스의 방대한 사상 체계로 입문하려면 역시 <공산당 선언>이 좋을 것이며, 그의 사상의 절정은 <자본론>에서 정리되어 있습니다. <자본>을 완역한 강신준 박사가, <자본> 관련으로 의미있는 연구를 많이 남긴 마르크스주의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자본> 강의>까지 번역하였군요. 그리고 본인이 직접 <자본> 해설서를 쓰기도 하였습니다. 이 책은 아무것도 몰랐던 대학교 1학년 때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다가 어려워서 반납한 기억이 나네요 ㅋㅋ 지금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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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9o8p7h6i5s4t 2022-07-27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대진 선생님의 <비극의 비밀> (2013)을 읽어봤는데, 비극 입문 및 해설로 아주 좋았습니다.

Redman 2022-07-27 16:11   좋아요 0 | URL
추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