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빛 김만덕 푸른숲 역사 인물 이야기 1
김인숙 지음, 정문주 그림 / 푸른숲주니어 / 200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만덕은 1739년에 오빠 김만석의 동생으로 태어났다. 김만덕은 어렸을 때 대정할머니를 알고 친하게 지냈는데 만덕이 영조 26년, 1750년부터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퍼진 돌림병으로 인해 부모를 잃자, 대정할머니가 만석, 만덕, 얼마 전에 어머니가 낳으신 만재를 돌봐주신다. 하지만 몇 년 뒤, 만덕과 만재는 남의집살이를 가고 만덕은 기생인 설향의 집에 간다. 김만덕은 설향의 집에 가서 부엌일 대신 기예를 배웠다. 그리도 만덕이 열일곱 살이 되었을 때 설향은 만덕을 관아의 기적에 만덕의 이름을 올린다. 그래서 만덕은 기생이 되고, 제주의 명기가 되었다. 하지만 남의 비위만 맞추고 사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관아로 가서 목사께 자신이 기생이 된 억울함을 호소해서 만적은 양인이 된다.

양인이 된 만덕은 동쪽 성문 밖에 있고, 왼쪽으로는 한라산에서 내려오는 산지천이 흐르고, 앞은 포구 너머로 있는 곳에 객주를 세운다. 만덕은 상인들에게 잠자리도 마련해주고, 창고에 물건도 보관해주었다. 만덕은 관가에서 쓰는 물품, 돈 많은 양반들의 일용품을 알고 있는 등등 때문에 상인들의 물건을 팔아주고 수수료를 받았다. 그래서 상인들은 다툼을 해서 만덕에게 물건을 맡겼다. 그 덕분에 만덕의 객주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갔다. 10년 후 만덕은 제주의 큰 상인이 되었다. 어느 날, 청보와 두실이라는 상인이 왔다. 그들 일행 중 들메라는 사람을 고용한다. 
 

몇 년 뒤, 정조 16년(1792년) 재난이 들이닥쳐서 많은 사람들이 흉년으로 굶어 죽는다. 제주도의 목사 이철운은 많은 사람들이 굶는다는 내용과 곡식을 나눠주라는 내용을 왕께 올려서 받은 곡식으로 자기에게 도움 되는 일만 해서 그는 귀양을 갔다. 그래서 만덕은 음식을 만들어 제주도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 흉년이 몇 년 동안 계속되자 만덕은 곡식 오백 석을 사서 사백오십 석을 관아에 주고, 나머지 오십 석을 제주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서 제주도 사람들을 살린다. 그 사실을 안 정조는 만덕의 소원인 국월을 둘러보는 것과 금강산에 갔다오는 것을 허락했다. (원래 여자는 섬을 나올 수 없음.) 만덕은 궁궐에서 수석 의녀로 임명해서 반 년 동안 궁궐에서 지내게 해준다. 그리고 금강산 구경도 시켜준다. 제주도로 돌아온 만덕은 그동안에 만덕의 객주에 있었던 일들을 묻는다. 그리고 그동안 잘 해준 들메에게 객주를 넘길 까 하는 생각도 한다. 만덕은 순조 12년(1812년)에 눈을 감는다.
그런데  이 책과는 좀 다른 이야기도 있다 . 만덕이 실제인물이고 행적도 소문대로 사실인 것도 있지만 만덕의 점모가 그렇게 선량하기만 한 존재는 아니었다는 거다 . 안대화 교수의 글은 다음과 같다 .

<굶어죽지 말아라, 만덕이 있다흉년을 맞은 제주도에 곡식을 풀어 빈민을 구제한 18세기 후반의 스타, 천민 여성 만덕의 삶 ▣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한두 해 전 새로운 화폐 도안을 만들 때 제주도에서는 김만덕(金萬德·1739~1812)이라는 18세기 후반의 여성을 넣자고 적극적으로 요구했다. 제주 출신에다 천민 신분으로 장사를 통해 거부가 되고 그 재산을 털어 빈민을 구제한 의로운 행적이 제주를 상징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리라. 실제로 제주를 상징하는 대표로 만덕을 꼽는 데는 이견을 내놓기가 어렵다. 
 

천민 신분으로서 이렇게 큰 인물로 추앙받는 근거는 설득력을 지닐 만큼 충분하다. 행적이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일성록>에까지 등장하고, 정조와 왕비 그리고 당대의 정승인 채제공을 비롯한 수많은 명사들이 그를 만나보고 시와 산문을 써서 그의 행적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의 행적은 1790년대 후반에 한 시대를 떠들썩하게 한 유명한 사건이었다. 천민 여성이 이렇게까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일은 아주 드물다. <추재기이>에 만덕의 행적이 담긴 것은 자연스럽다. 
 

스무 살쯤 기생 벗어나 돈벌이 나서
200여 년이 지난 지금 제주에는 그를 기리는 사업회가 결성돼 활동 중이고, 그의 행적을 추적한 글과 책이 여러 종 출간됐다. 사대부 여성이나 일반 여성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인물 형상으로서 만덕의 이미지는 지금도 생성 중이다.
먼저, 만덕이 세상에 알려지기 이전의 삶을 채제공의 <만덕전>에 기대어 살펴보자. 그는 제주의 기생이었다. 본래 양민의 딸이었으나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기생집에 몸을 붙였기에 나이가 들자 기생이 되었다. 스무 살쯤 되었을 때 관아에 눈물로 호소해 기적(妓籍)에서 벗어났다. 양민이 된 뒤에는 제주의 남자를 촌스럽게 여겨 남편으로 맞이하지 않았다. 그런데 만덕은 돈을 버는 재주가 있었고, 특히 물가 변동을 잘 알아 적절한 시기에 물건을 사고팔아 십수 년 뒤에는 이름이 날 정도로 돈을 모았다.

기록에 따라 다르기에 만덕이 기생 신분을 벗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쨌든 그는 기녀에 과부로 행세했으며, 장사를 잘해 거부로 알려졌다. 그런 만덕이 만천하에 알려진 것은 제주의 흉년 때문이었다. 제주에는 1792년 이래 잇따른 흉년과 태풍의 피해로 수많은 백성들이 굶어죽었다. 1794년에는 바람과 해수 피해를 입자 제주목사인 심낙수(沈樂洙)가 9월17일과 10월23일에 연달아 구휼미 2만 섬을 조정에 요청한 일이 있다. 상황이 심각하자, 1795년 윤2월에 조정에서는 5천 섬의 구휼미를 내려보냈다. 그런데 쌀을 실은 배 12척 가운데 5척이 난파하자 만덕은 가산을 털어 육지에서 곡식을 사다가 백성들을 구휼해 “우리를 살린 사람은 만덕이다”라는 칭송을 들었다. 이러한 사실을 당시 제주목사가 장계를 올려 조정에 보고했다. 1796년 정조 20년 11월25일의 일로 실록을 비롯한 조정의 사료에 비슷한 내용이 실려 있다.

정조 임금이 만덕의 행적을 가상히 여겨 목사에게 만덕의 소원을 들어주라고 했을 때, 만덕은 “다른 소원은 없습니다. 대궐에 들어가 성인의 모습을 우러러본 뒤 금강산에 들어가 비로봉 꼭대기에 올랐다가 만이천봉을 두루 구경하고 돌아오고 싶습니다”라고 답했다. 신분 상승이나 세금 면제와 같은 실질적 요구가 나오는 것이 상식일 텐데 기대 밖의 엉뚱한 소원이었다.

원래 제주 여자는 바다를 건너 뭍으로 오지 못했고, 더욱이 평민 여자가 대궐에 들어가 임금을 알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만덕의 소원은 그런 엄한 금법을 어기는 것이었다. 정조는 만덕의 엉뚱한 답을 듣고 기이하게 여겨 소원대로 해주라고 하명했다. 내의원 소속 여의(女醫)의 우두머리라는 임시 직책을 하사하는 방편을 써서 각 고을의 역참(驛站)에서 그를 호송케 하는 특전을 베풀었다. 만약 남자가 만덕과 같은 일을 했다면, 아마도 3품의 관복을 입고 만호(萬戶)의 인끈을 임시로 차게 하는 정도의 특전을 베풀었을 것이다. 정조는 만덕에게 특별히 융숭한 은혜를 베풀었다.

만덕은 1795년 겨울 서울에 왔다. 선혜청에서 일체의 비용을 공급받았다. 궁궐에 나아가 중전과 세자빈도 알현했다. 세자빈은 “네가 여자의 몸으로 의롭게 굶주린 수많은 백성을 구하였으니, 참으로 기특하구나!”라며 후한 상을 하사했다.

임금을 알현하고 금강산 관광 가다
기생이 왕에게서 이러한 대우를 받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니 만덕이 서울에 오자 일약 고관대작까지 만나보고 싶어 하는 유명 인사가 되었다. 정월 대보름에 만덕이 한양의 다리밟기 행사에 참여하자 채제공은 시에서 그 사실을 읊고 태평성대의 일이라고까지 말했다. 그는 그야말로 명사로 대접받았다. 홍도(紅桃)란 기생은 만덕을 자랑스럽게 생각해 다음 시를 지었다.

행수(行首) 의녀는 탐라의 기생이라(女醫行首耽羅妓)
만리 길 높은 파도도 겁내지 않네.(萬里層溟不畏風)
이제 또 금강산으로 구경길 떠나며(又向金剛山裡去)
꽃 같은 이름 교방(敎坊)에 남기네.(香名留在敎坊中)

이듬해 봄에 만덕은 드디어 금강산으로 들어가 명승지를 두루 구경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국왕의 특명에 따른 여행이므로 일반 사람은 누리지 못하는 성대한 등산길이었다. 만덕은 서울에 돌아와서 다시 중전과 세자빈을 알현하고, 채제공을 비롯한 정승과 명사들을 두루 만나 그들로부터 방문을 기념하는 시문을 받아냈다. 채제공은 그의 소전(小傳)을 썼고, 이가환과 박제가는 시를 써주었다. 판서 이가환의 시는 이렇다.

만덕은 제주도의 기이한 여인!
나이는 예순이건만 얼굴은 마흔 살.
천금 같은 쌀을 내어 굶주린 백성들 구하고
배 타고 바다 건너와 임금님을 뵈었네.
원은 한 가지로 금강산을 보는 것
금강산은 동북쪽 멀리 안개 속에 쌓여 있네.
성상께서 고개를 끄덕이시며 나는 듯한 역말을 내려주시니
천리 길 빛나는 영광이 곳곳에 넘쳐흘렀네.
높은 봉에 올라 멀리 조망하여 눈과 마음 확 트이게 하더니
표연히 손을 흔들며 섬으로 돌아가네.
탐라는 아득한 옛날 고씨 부씨 양씨부터 비롯했는데
서울을 구경한 여자는 만덕이 처음이리라.
우레처럼 떠들썩하게 와서는 고니처럼 홀연히 떠나고
높은 기상을 길이 남겨 천하에 흩뿌렸네.

여성 의협(義俠)으로서 만덕의 기상을 몹시도 치켜세웠다. 만덕의 유명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드러난다. 그렇게 많은 사대부에게 얻은 시문으로 한 권의 시집을 만들었다.
다산 정약용도 이 시권에 발문을 써주었다. 그 글에서 다산은 만덕에게 세 가지 기특함과 네 가지 희귀함, 곧 삼기사희(三奇四稀)가 있다고 말했다. 기생이 과부로서 수절한 것, 많은 돈을 기꺼이 희사한 것, 섬에 살면서 산을 좋아한 것이 세 가지 기특함이다. 여자로서 겹눈동자를 가졌고, 종의 신분으로서 역말을 타고 왕의 부름을 받았으며, 기생으로서 중을 시켜 가마를 메게 하였고, 외진 섬사람으로 내전(內殿)의 사랑과 선물을 받은 것이 네 가지 희귀함이라고 했다. 만덕이 누린 호사가 당시로서 얼마나 파격적인지를 보여준다.

서울에 머물 때 만덕은 여러 일화를 남겼다. 이재채(李載采)의 <만덕전>에는 그가 서울에 머물 때의 일화를 두 가지 기록했다. 그 가운데 한 가지는 이렇다. 서울의 악소배(惡少輩)들이 돈이 굉장히 많은 과부라고 하여 만덕에게 바짝 접근했다. 그러자 만덕은 “내 나이 쉰이 넘었다. 저들은 내 얼굴을 곱게 봐서가 아니라 내 재물이 탐나서 저런다. 굶주린 자를 구할 여유도 없는데 어느 겨를에 저런 탕자를 살찌우랴?”라며 거절했다. 세상 사는 곳에는 언제나 남을 등치려는 사람이 있는데 만덕은 의연하게 대처했다. 의협의 풍모가 넘쳐난다.

만덕이 얼마나 파란을 일으켰는지는 만덕이 겹눈동자의 소유자란 소문에서도 알 수 있다. 만덕의 눈 한쪽이 겹눈동자라는 소문이 서울에 널리 퍼졌다. 겹눈동자는 한 눈에 눈동자가 두 개 들어간 것으로 역사적으로 성인인 중국 고대의 순임금과 진한 교체기의 항우가 있다. 박제가와 조수삼 등은 그가 겹눈동자를 지닌 특별한 용모임을 부각시켰다. 박제가는 전생에 부처의 마음과 신선의 풍골이 있어서 만덕이 그런 특이한 상을 지녔다고도 말했다.

다산이 밝힌 ‘겹눈동자’ 소문의 진상
시 이 소문이 크게 확산되자 명확한 것을 좋아하는 다산이 사실을 확인해보려고 만덕을 자기 집에 불렀다. 확인해 밝힌 뒤에 ‘겹눈동자의 변증’(重瞳辨)이란 한 편의 짧은 글을 썼다. 그 글에서 다산은 만덕이 물건을 두 개로 보지 않고, 가까이서 그의 눈을 보니 흑백(黑白)의 정동(睛瞳)이 보통 사람과 다름이 없음을 확인했다고 하면서 겹눈동자란 헛소문임을 밝혔다.

하지만 만덕 자신도 그 사실을 믿고 있었다. 다산은 소문이 사라지지 않고 횡행한다고 하면서 사람들이 허탄(虛誕)함을 좋아하여 스스로 바보가 된다고 개탄했다. 이러한 뜬소문이 떠돈 것은 만덕이 일으킨 소동이 얼마나 컸는지를 말한다.

만덕은 제주로 돌아가 살다가 1812년에 사망했다. 돌아간 뒤 제주에서 생활한 사연은 일부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있다. 묘비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선 더 언급하지 말자.
여성 의협(義俠) 만덕의 선행과 왕명을 받은 서울·금강산 여행은 당시만이 아니라 이후에도 전설이 되었다. 홍희준(洪羲俊), 이희발(李羲發), 김희락(金熙洛), 유재건(劉在建) 등이 그의 삶을 조명하는 글을 지었다.

만덕의 행적이 의협으로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당시 만덕이 일으킨 떠들썩한 소동을 지켜보면서 만덕이라면 침을 뱉는 제주 사람들이 있었다는 이견을 제시한 사람이 있다. 앞서 제주목사 심낙수가 기근을 구할 구휼미를 요청한 사실을 언급했다. 심로숭은 그의 아들로서 1794년 아버지를 뵈러 제주에 가 있던 몇 달 동안 주민들로부터 만덕의 사연을 자세히 들었다며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그에 따르면, 만덕이 기생 노릇을 할 때 품성이 음흉하고 인색해 남자의 돈을 보고 따랐다가 돈이 떨어지면 떠나되 옷마저 빼앗아서 그가 지닌 바지저고리가 수백 벌이었다. 그 바지를 늘어놓고 햇볕에 말리는 것을 보고는 동료 기생마저 침을 뱉고 욕했다. 육지에서 온 장사꾼들 가운데 만덕의 탓으로 패가망신하는 이가 많았다. 그렇게 해서 만덕은 제주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음식을 구걸하는 형제도 돌보지 않던 만덕이 제주에 기근이 들자 곡식을 바쳐서 한양에 이르고 금강산을 구경하고자 하였다. 만덕이 호탕한 말을 하여 여러 학사들이 전(傳)을 지어 칭송했다.

심로숭이 전하는 사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만덕의 행실과는 전혀 딴판이다. 심로숭은 소문과 실상이 서로 어긋난 사례로 만덕의 일을 들었다. 심로숭은 전을 지어 만덕을 칭송한 채제공과 같은 사람들이 만덕에게 기만을 당한 것으로 보고 싶었다. 심로숭은 만덕이 한창 행세할 때 제주에서 4개월을 지내면서 소문을 들었으므로 서울에서 만덕의 말만 듣고 판단한 다른 사람보다는 실상에 가깝게 사실을 전달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에 따르면, 어쨌든 만덕이 구휼미를 낸 것은 사실이지만, 만덕의 전모는 그렇게 선하지 않다. 한 번의 선행으로 만덕은 많은 것을 얻었다.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쓴다는 평이 그에 합당하다. 심로숭의 판단에 따르면 그렇다.

과연 심로숭의 전언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어느 쪽 말이 진실에 가까울까?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채제공과 이재채·정약용을 비롯해 만덕을 높이 평가한 사대부가 대체로 남인 계열이라면, 심로숭은 노론에 속한다. 서로 다른 평가에는 당파적 입장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만을 말해둔다. > 
 

 

그러므로  이 책을   위인전으로 분류해야 할지는 문제다 . 내 아이에게 권한다면  다른 면모도 있다더라 , 하는 부연 설명을 해주고 싶다 . 
========================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porque 2020-12-17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로숭의 아비 제주 목사가 자기는 임금을 못 뵈고 김만덕만 임금께 잘 뵈니 배가 아파서 가짜뉴스를 퍼트렸나 보죠. 김만덕이 돈을 번 건 기생으로서가 아니라 양민이 되어 장사를 하고서부터인데, 스무 살까지밖에 안 한 기생 일, 그것도 그렇게 벗어나고자 했던 신분의 일로 돈을 못되게 벌었다는 것 자체가 미덥지 못한 소문이네요. 조선왕조실록과 채제공의 기록을 무시하고 그런 모자란 인간들이 옮긴 내용을 근거로 책에 별을 한 점을 주다니 우습고요.
 
황금용 왕국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15
이사벨 아옌데 지음, 권미선 옮김 / 비룡소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믿을 수 있겠는가 ? 이런 나라가 있단 사실을 ? 이 황금용 시리즈는 다 이렇다 . 1 편 야수의 도시 3 편 소인족의 숲도 다 비현실적이지만 읽어보면 말이 된다 . 그래서 이사벨 아옌다는 특이한  천재다 . 1 편의 알렉스와 나디아는 또 황금용 왕국으로 간다 .

 라마승 텐싱은 금지된 나라의 왕이 될 딜 바아두르 왕자와 함께 산을 올랐다. 금지된 나라의 왕이 되기 위해선 어릴 때부터 가르침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십년 넘게 스승과 생활하고 있는데 이제 곧 왕이 될 날도 머지않았다. 그들은 예티 계곡으로 가고 있었는데 중간에 사나운 맹수를 만났다. 타오슈 라는 무술을 연마한 그들은 맹수를 제압할 수도 있었지만 제자가 방어 자세를 취하자 스승이 텔레파시로 차분하게 앉아 명상을 하라고 했다. 맹수는 그 둘을 보더니 가버렸다. 예티 계곡에 도착한 그들은 몸집도 크고 무섭게 생긴 예티들 앞에서도 그렇게 행동했다. 그런데 예티들은 많이 병들어 있었다. 그래서 그나마 머리가 좋아서 왕이 된 그르르임프르에게 질병의 원인은 물이라며 물을 먹지 않게 하라고 했다. 곧 그들은 건강해졌고 스승과 제자는 떠났다. 그 때 뉴욕에서는 나디아와 원숭이 보로바,알렉스와 케이트는 금지된 나라로 가기 위해 뉴델리로 갔다.그런데 세계에서 두 번째로 부자인 수집가는 금지된 나라의 황금용을 갖고 싶어 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문가에게 거액의 돈을 지불하고 황금용과 그것을 해독할 암호를 사기로 했다. 전문가는 황금용을 빼앗기 위해 계획을 짰다.비행기에서 알렉스 일행은 텍스 아르마딜로와 주디 킨스키를 만났다. 알렉스와 나디아는 뉴델리에서 텍스 아르마딜로가 뭔가 안 좋은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런데 금지된 나라에서 나디아와 페마,그리고 소녀들이 푸른 남자들에게 납치되었다. 그 소식은 금세 퍼졌고 경찰들은 소녀들을 찾아다녔다. 한편 납치된 소녀들은 겁에 질려있었다. 그런데 밤에 탈출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소녀들이 나디아만 탈출해서 도움을 요청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서 나디아만 탈출했다. 나디아는 길을 잃어서 팔이 빠진 채로 토템동물인 독수리로 라마승 텐싱과 딜 바아두르왕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들이 독수리를 따라오다가 원숭이 보로바의 안내를 받고 온 알렉스와 만나 같이 나디아를 구해냈다. 그리고 소녀들을 구했다. 주디 킨스키는 왕에게 지금처럼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 황금용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왕은 황금용이 있는 신성한 구역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왕에게 소형카메라를 설치해 GPS를 이용해 푸른 남자들과 텍스 아르마딜로가 뒤를 따라가 납치하고 황금용도 가져왔다. 그리고 주디도 포로로 삼기 위해 데려왔는데 사실 주디가 그 전문가였다. 그래서 주디는 왕을 이용해 암호를 알아내고 녹음기에 녹음했다. 왕이 납치되었다는 것을 안 딜 바아두르와 텐싱, 알렉스와 나디아가 왔지만 왕은 상태가 심각했다. 그런데 텍스 아르마디로가 그를 배신하고 황금용과 녹음기를 들고 헬리콥터를 타고 날아가다가 그만 추락하고 말았다. 당연히 황금용도 파괴되었다. 왕은 딜 바아두르에게 신성한 구역을 지나 황금용에게 가라고 했다. 사실은 받침대가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었다. 신성한 구역에는 엄청난 장애물들이 있었지만 모두 통과했다. 딜 바아두르는 왕이 되고 파괴된 황금용은 수집가라는 사람에게 압력을 넣어 보상하게 하기로 했다.

이 이야기를 논리적으로 보려고 하면  비현실적인 요소가 그득해서 믿기 어렵다 . 말이 안통하는 외국인과 텔레파시로 대화를 한다 . 정말 편리하지  않은가 ? 하지만 어차피 소설은 허구다 . 투명인간이 되고 재규어와 독수리로도 변한다. 게다가 라마승 텐싱은 바람의 흐름까지 바꾼다. 그런데 실제로 황금용이 있다면 좋을 것 같기도 하다. 미래의 일을 예측할 수 있으니 편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나 사용하진 못할 것 같다. 왜냐하면 복잡한 암호를 알아야 하고 마음이 맑고 깨끗해야 하며 엄청나게 비쌀 것이기 때문이다. 수집가는 세계에서 두번째 부자이면서 만족을 못한다. 갖가지 보물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두운 경로를 사용해서라도 다른 값비싼 물건을 가지고 싶어 한다. 지금에 만족하지 않고 더 열심히 해야 발전한다고도 하지만 지금 상황에 대해 만족하고 행복을 느끼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그런데 주디 킨스키라는 사람은 정말 못됐다. 왕은 주디를 신뢰했지만 사실 모든 게 다 주디 때문이다. 그렇게 배신을 했는데도 왕은 용서를 하고 감옥에서 여생을 보내게 하지 않았다. 주디는 왕 때문에라도 앞으로 착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근데 이 소설 리뷰가 여지껏  없다는 게 이해불가다 . 쩝!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틴 강가에서 시공주니어 문고 3단계 13
필리파 피어스 지음, 유기훈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시공주니어 / 200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케이트네 가족은 다른 아이들과 좀 다른 가족구성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케이트는 아빠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빠대신 외할머니와 엄마, 첫째오빠인 랜달오빠, 둘째오빠인 레니오빠, 그리고 케이트가 가장 아끼는 고양이 시럽.. 케이트의 가족은 각자 할 일을 하기만 하고, 대화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케이트는 이런 생활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늘 방에 들어가 시럽과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어렸을 때 케이트와 친했던 랜달오빠는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케이트와 멀어져갔다. 그리고 케이트도 이제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케이트의 친한 친구의 이름은 ‘안나’이다. 그래서 케이트는 이제 심심하지 않게 되었다. 하루 종일 안나 집에서 놀고 퍼즐 맞추기도 했다. 그리고 한겨울이 되어 썰매를 탈 때가 되자, 레니오빠와 브라이언 이라는 레니오빠의 친구와 썰매를 타러온 케이트는 랜달오빠의 여자 친구인 비키도 만났고 안나도 만났다. 엄마가 주신 큰 까만 쟁반으로 탔더니 너무 속도가 빨라서인지 케이트는 눈덩이를 못 피한 채 부딪히고 만 것이다. 그걸 보고 레니와 안나는 물론 아까는 없었던 랜달오빠와 비키언니가 케이트주위를 에워싸고 있더니 케이트를 부축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케이트는 갑자기 아빠에 대해 궁금해졌다. 아빠는 왜 돌아가셨는지, 아빠가 어떻게 생겼는지 이만저만 궁금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랜달에게 가서 물어보았지만 랜달은  대답을 꺼렸다. 며칠 뒤, 케이트가 혼자 있을 때, 누군가가 케이트를 지켜보는 것 같아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눈동자가 보이더니 이내 사라졌다. 케이트는 오싹함을 느끼며 아래층으로 내려가 항상 누가 오는지 문을 살짝 열고 방안에 계시는 외할머니에게 들어오는 사람이 없었냐고 물었다. 그러자 할머니께서는 없다고 하셨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서 케이트는 아빠가 계셨다는 새틴 강가에 갔다 왔고 며칠 뒤, 랜달이 케이트에게 모든 사실을 알려주었다. 죽은 사람은 아빠가 아니라 밥 삼촌이었고 아빠는 살아 계셨다는 걸 말이다. 그래서 친할머니도 만나보고 아빠와 대화도 해본 케이트는 아빠도 함께 살 것을 권유했다. 아빠는 흔쾌히 허락을 하셨다. 마침내 케이트는 아빠와도 살게 되었다. 아빠는 오스트레일리아로 이민을 가자고 하셨고 외할머니와 친할머니를 제외한 나머지는 이민을 가기로 했다. 케이트는 이 사실을 안나에게 알렸고 친할머니께 심심하시지 않도록 하기위해 시럽을 대신 돌보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케이트는 이민을 가기로 결정한 상태에서 친할머니의 집에서 잠이 든다. 이 책은 끝이 마무리가 되지 않은 열린 구조 형식의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은  더 많은 상상력을 일으키게 하였고 다음 내용이 너무 궁금했다. 내 생각엔 이민을 갔다가 몇 년 뒤 다시 이곳으로 올 것 같다. 케이트는 아빠와 살게 되어 굉장히 기쁠 것이다. 이제 케이트는 힘들지 않고 다른 아이들처럼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아이들에게는 누구나 조금씩 상처가 있다 . 어느 가족이건  조금씩 비밀이 있듯이 ...새틴강은 비밀을 간직한 강이다 .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커버스토리]박근령-박지만, 육영재단 분쟁 2라운드

2009 01/06   위클리경향 807호

수조 원 개발이익 노린 재산싸움 점입가경
공익법인 취지 무색… 수십 억대 적자 운영




육영재단을 둘러싼 박정희 자녀들의 재산 싸움이 점입가경이다. 경영 부실화 명분으로 박근혜 전 이사장을 몰아냈던 박근령·박지만 남매가 2라운드를 펼치는 중. 박지만 측근 인사들의 맹공에 박근령 전 이사장이 수성하는 모양새다. <권호욱 기자>

2007년 12월 초 어느 날 밤, 서울 광진구 능동 육영재단 어린이회관 주변에 검은 양복 차림의 괴청년이 여기저기 포진했다. 법령에 어긋난 운영을 시정하라는 교육청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는 사유로 이사장 승인이 취소되자 이에 불복해 소송을 냈던 박근령 전 육영재단 이사장. 하지만 항소심에서도 패소하자 박 전 이사장과 측근은 대법원 확정 판결이 있을 때까지 이사장직이 유효하다면서 이사장실에 머물며 재단 운영에 개입, 사무국 직원들과 운영권을 두고 마찰을 빚어왔으며 이 과정에서 각종 신고와 고발이 난무했다. 이날도 양측은 사설경호원들을 동원해 용접기로 출입문을 막느니, 소화전으로 이를 끄느니 하며 이사장실 확보 싸움을 전개했다.

양측의 대치가 거듭되고 관할 광진경찰서가 양측의 충돌을 막기 위해 수십 차례 출동한 끝에 그달 11일, 결국 박근령 전 이사장은 어린이회관 이사장실을 떠나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지난해 5월 박근령 육영재단 이사장에 대한 이사장 승인 취소 처분은 정당하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오면서 육영재단 사태는 진정되는 모양새를 띠었다.

‘3억5천만원’ 차용증으로 박지만 역공
그러나 박 전 이사장은 지난해 11월 1일부터 재단 사무실에 다시 출근하고 있다. 이사장이 아닌 사무국장 직함으로 업무를 보고 있는 상태. 이유는 동생인 박지만 EG 회장의 측근 인사들이 속속 육영재단 경영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으로, 재단 운영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육영재단을 둘러싼 박정희 전 대통령 자녀들의 분쟁이 ‘2라운드’에 돌입한 것이다.

서울동부지법은 11월 13일 육영재단 임시이사 9명을 선임했다. 이번 9명의 임시이사를 보면 전원이 박지만씨가 추천한 인물로, 누나인 박 전 이사장이 추천한 9명과 재단 사무국에서 추천한 9명 중 한 명도 선임되지 못했다. 임시이사장은 DJ정부 시절 교육부 차관을 지내고 이후 한경대 총장을 역임한 이원우 안양대 석좌교수가 맡았다.

하지만 12월 23일 어린이회관 3층에서 열린 첫 임시이사회에서 박 회장 측 인사를 사무국장에 앉히려고 하자 노조 측이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회의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최재영 육영재단 노조위원장은 “1년을 끌던 분쟁이 겨우 수습 국면에 왔는데 또다시 분쟁의 한 당사자가 사무국장으로 부임하는 것을 반대한다”고 밝혔다.

박근령 전 이사장과 재단 측도 반발하고 있다. 1990년대 육영재단을 둘러싼 ‘박근혜-박근령의 난’ 이후 또다시 ‘박근령-박지만’의 대립이 부각되면서 경영 정상화는 물 건너가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한때 소송을 벌였던 재단 사무국 직원들은 지금은 박 전 이사장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분위기. 어차피 박정희 전 대통령 일가 중 하나가 재단을 맡을 것이라면 박근령 전 이사장이 적임자라는 판단에서다.

박지만씨가 법원에 임시이사진을 추천할 수 있는 자격은 재단 채권인이기 때문. 1990년대 초반 이사직을 수행한 것 외에 그동안 육영재단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던 박지만씨가 재단 측에 빌려준 3억4200만 원에 대한 차용증을 앞세워 임시이사회를 추천해 만들고 재단을 통째로 먹으려 한다는 게 노조의 주장이다. 차용증에 따르면 2008년 2월 29일 4200만 원과 4월 24일 3억 원을 어린이회관 관장 이름으로 빌린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차용증 어디에도 빌려준 사람은 기명돼 있지 않다. 당시 재단을 장악했던 사무국장과 관장이 개인적으로 써준 차용증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육영재단을 둘러싼 세 남매의 분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1969년 4월 고 육영수 여사가 어린이복지사업을 벌일 목적으로 세운 이후 1982년 큰딸인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이사장을 맡았지만 방만한 경영 등을 이유로 측근 인사의 사퇴를 요구하는 재단 안팎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쫓기듯 물러났다. 당시 문제의 측근으로 지목된 최모씨는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 과정에서 박 전 대표의 ‘아킬레스건’으로 재등장하기도 했다.

세 남매 간의 물고 물리는 재산 싸움
문제는 재단을 둘러싼 분쟁의 핵심에 ‘재산’이 있다는 것이다. 어린이회관의 면적은 약 13만2000㎡(4만 평). 인근에 있는 건국대 야구장을 주상복합으로 개발하면서 남긴 5000억 원보다 큰 개발 차익이 나올 것이라는 게 주변 부동산업계의 판단이다. 3.3㎡당 최저 2500만 원을 잡아도 1조 원의 수익이 남는다는 게 노조 측 설명. 하지만 이는 상당히 보수적인 계산이고 3.3㎡당 8000만 원으로 계산해 3조 원이 넘는다는 게 부동산업자들의 분석이다.


2008년 12월 육영재단 이사장 자리를 놓고 박근령 전 이사장과 사무국 직원들이 충돌하고 있는 와중에 고 육영수 여사의 영정이 바닥에 뒹굴고 있다. <조득진 기자>

재단 측 한 인사는 “임시이사회가 꾸려진 이후 벌써 서편 운동장 1만3200㎡에 대해 실측이 들어갔다”면서 “이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의결기관이 필요한데 이번에 꾸린 임시이사회가 바로 그것”이라고 주장했다. 세종대와 건국대 사이, 게다가 지하철역까지 끼고 있는 이곳은 길 건너편 낙후한 로데오거리를 대체할 수 있어 크게 주목받고 있다.

현재 누나 박근령씨와 동생 박지만씨 양측이 서로 제기한 소송만 폭행, 출입금지가처분신청, 통장 가압류 등 20여 건에 달한다. 근령씨 측은 최근 임시이사등기금지가처분 신청, 이사장승인취소처분에 대한취소청구, 위헌제청신청서 등을 법원에 낸 상태다. 이에 대해 동생 지만씨 측은 “말려들지 않겠다”는 분위기다. EG 측 한 관계자는 “법적으로 결정난 일을 가족 간 분쟁으로 비쳐지게 하려는 목적”이라며 “육영재단 정관은 사무국장을 이사장이 선임하도록 규정하고 있어 박 전 이사장의 사무국장직은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설립 취지 맞는 경영 정상화 필요
육영재단에 대한, 구체적으로 누나 근령씨에 대한 동생 지만씨의 공격은 여러 수로 읽힌다. 그중 근령씨가 최근 신동욱 백석문화대 교수와 결혼하는 과정에서 틀어졌다는 분석이다. 측근에 따르면 큰 누나인 박근혜 전 대표가 정치권에서 승승장구할 때 둘째 박근령과 막내 박지만 사이는 돈독했다고 한다. 무대에 오르지 못하고 막 뒤에 있는 두 사람으로서는 동병상련의 정이 있었던 것. 하지만 이번 결혼건을 두고 반대한 누나에 대해 반감이 커졌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결국 근혜씨와 지만씨는 근령씨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박근혜 전 대표의 입장에서는 10여 년 전만 해도 박지만 회장이 자신의 이미지에 해를 끼쳤다면 최근엔 박근령 전 이사장이 발목을 잡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육영재단 직원은 성동교육청이 지만씨가 추천한 인사들에게 편파적 자세를 보여 이번 법원의 임시이사 선임에 영향을 미쳤다고 의심하고 있다. 육영재단 관계자와 노조 측은 “공무원은 공정한 업무를 수행할 의무가 있는데 성동교육청은 그렇지 않았다”면서 “9년째 감사를 하고 있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만들어놓지 못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박용권 성동교육청 평생교육과 과장은 “그동안 인허가 과정 등 민원 발생시 교육청이 조사하고 이에 대해 이행을 지도했지만 재단 측이 이에 반발해 이후 취소와 소송이 이어진 것”이라며 “이사 선임의 권한은 법원이나 이해 관계자의 문제지 우리 소관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성동교육청에 확인한 결과, 지만씨는 법원에 의해 임시이사가 확정되고 나서 교육청을 찾은 일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교육청 측은 ‘사전 교감설’에 대해선 강력 부인했다. 이원우 신임 이사장 또한 “이사장하던 분이 사무국장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면서 “나는 박지만 회장과 어떤 관계도 없다”고 밝혔다.

사실 지금까지 육영재단을 둘러싼 박정희 전 대통령 자녀들의 분쟁에 대해 여론은 호기심어린 눈길과 남매들에 대한 질타를 보냈을 뿐, 육영재단이 어떤 자금을 기반으로 세워졌는지, 이후 남매들이 이사장 자리를 넘겨주고 받으며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그들이 육영재단을 소유하는 것이 맞는 일인지 정색을 하고 들여다본 적은 없다. 어느 정권도 박정희를 추모하는 세력의 반발을 사고 싶지 않았고,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명실공히 이 재산을 국고로 환수해 원래 목적에 맞게 써야 한다는 주장이 고개를 들고 있다.

세 남매의 분쟁으로 육영재단은 매년 70억 원의 적자를 보고 있다. 분쟁이 일어난 2001년부터 시설에 대한 투자와 새로운 사업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답보 상태에 빠져 있다. 어린이회관 과학관에 한참 구식인 286컴퓨터를 전시해놓고 있을 정도고, 일부 임대사업을 제외하곤 회관을 찾는 사람도 거의 없다.

박정희가 남긴 슬픈 유산 ‘육영재단’. 70~80년대 어려운 시기, 국민의 세금으로 지은 이곳이 이젠 그 자녀들의 재산 싸움터로 변질됐다. ‘밝게 뛰놀자’는 현판이 걸린 어린이회관은, 그러나 그 어느 공간보다 을씨년스럽다.



육영재단 관련 일지

1969. 4. 재단법인 육영재단 설립
1970. 7. 어린이회관 준공개관(남산)
1974. 10. 새 어린이회관 부지 3만1238평 사용 허가(서울시)
1974. 10. 새 어린이회관 기공식 거행(현대건설)
1975. 10. 새 어린이회관 준공, 개관 (현 위치)
1976. 12. 서울시로부터 어린이회관 부지 매입(3만1238평)
1982. 10. 박근혜 이사장 취임
1990. 12. 박근령 이사장 취임(박지만 이사 1990~1994)
1994. 6. 서울동부교육청, 육영재단 편법 운영 조사 착수
2001. 12. 성동교육청, 박근령 이사장 취임 취소
2002. 5. 박근령 이사장, 취임 취소 관련 소송 패소
2004. 7. 헌법재판소 위헌 결정, 박근령 이사장 복귀
2004. 12. 성동교육청, 박근령 이사장 취임 재취소
2007. 1. 성동교육청, 육영재단 이사진 7명 취임 취소
2007. 6. 서울고법, 박근령 이사장 해임 정당 판결
2008. 5. 대법원, 박근령 이사장 해임 정당 판결
2008. 11. 박근령 전 이사장 사무국장으로 출근 시작
2008. 11. 서울동부지법, 박지만 추천 임시이사 9명 선임

<조득진 기자>

<조득진 기자 chodj21@kyunghyang.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중고] 한끝 고등국어 -상
비상교육 / 2008년 10월
평점 :
판매중지


중고를 샀는데 사진은 신제품같아서 속았다는 느낌이라환불신청!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