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그래
교고쿠 나쓰히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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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은 정말 추리물을 좋아하는구나 싶을정도로 다양한 방식의 추리물이 있지만 <죽지그래>는 단순한 추리물의 영역을 넘은 사회파 소설로 본심에 대한 철학을 담고있어 적은 부피의 짧은 독서시간에 비해해 긴긴 사색을 하게 된다.

차례로 등장하는 아사미의 주변인물들을 통하여 인간 내면에 충돌하고 있는 욕망에 미치지 못하는 삶에 대한 불만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모두 현재의 삶에 만족못하는 지옥같은 상황이 자기 탓이 아닌 남의 탓이다.

그렇게 힘들다힘들다 말은 하면서, 행복하지도 않으면서 죽고싶지는 않다.

단순하지만 결정적인 말 한마디에 삶에 대한 미련을 보여준다.

정말 삶에 대한 후회만 막급이라면, 이 보다 세상이 자신에게 잔인할 수 없다면 그대로 인생을 끝내면 만사오케이일텐데 겐야가 막상 죽으라고하면 어째서 그렇게까지 해야하나 싶을 정도로 본인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 본 적도 없기 때문에 결단을 내리긴 커녕 멍해진다.

그제서야 본인의 마음에 자리한 목소리를 듣기시작하는 것이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라는 마음과 '나의 진심'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는 그들과 우리들.

 

아사마의 주변을 훑어가며 그녀가 살아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호기심들이 더 새록새록 샘 솟아났다.

그녀는 사건의 중심에 있지만 주변인물들과의 대화에 필요한 요소라는 소설의 설정은 설정이상으로 그녀의 존재적 가치의 나약함을 보여줘 실제로 아사미가 행복해했다는 겐야의 말이 그녀의 죽음의 이유를 더 수긍할 수 없게 했다.

들으면 들을 수록 그녀에 대한 얘기가 듣고 싶은데 제대로 그녀를 들려주는 사람없이 지 얘기만 한다.

 

대화만으로 아사미를 탐색 해 가는 과정에서 차례로 보여지는 다른 입장, 관계의 인물들을 통해 나 자신이 얼마나 찌질한 사고방식으로 핑계거리들을 삼아왔는지 비춰져서 괴로웠다.

괴롭고 힘들지만 솔직한 겐야의 영향인지 솔직하게 인정하고 제대로 듣고 보려고 노력하는 마음을 먹게 된다.

 

스스로를 낮추는 것도 아니고 그저 '주제'애 대한 자각이 확실한 자칭 찌질한 겐야는 아사미에 대해 궁금해서 그 주변인물들을 돌아다녔다지만 그보다 아사미 주변인물들과의 관계에서 그녀에 대한 곡해를 풀어주고 싶었던 것 같다.

드라마틱한 인생행로를 겪은 아사미이기에 남들보다 염세적인 사고방식이 더 뿌리깊을 수도 있었을 그녀이지만 행복을 인지함에 있어서의 단순명료한 가치관을 보여줌으로서 기존에 없었던(있을 동기도 없었고) 연대의식이 생겼던 것은 아닐까?

그녀를 죽였다기 보다는 그 결정에 순순히 따를 정도로 현상만을 직시하는 스스로를 보았는지도 모른다.

 

나 역시 아사미와 겐야의 관계, 아사미와 주변인물들, 겐야 모두에게서 나를 보며 섬뜩함과 안도, 연민을 느낀다.

타인의 생각을 알 수야 없지만 이색적인 구성 안에서 공감을 주는 교코쿠 나츠히코는 확실히 사회적으로 영향력있는 작가일 수 밖에 없다. <죽지그래>가 단순한 추리소설로만 분류되기 아깝고 철학적으로서 영향력있는 까닭은 타인에게 작가의 생각을 주입시키는 것이 아닌 독자 본인의 생각을 내적으로 함께 토론하는 시간을 길게 갖게하기 때문일 것이다.

 

행복의 순간을 박제한다는 생각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함을 느끼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결정일지 모르지만 역시 죽는 것은 싫다. 난 동물이든 곤충이든 박제 자체가 싫어! 박제와 동시에 끝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행복이 여기서 끝일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그 유지를 위해 노력하는 방식을 택하겠다.

일단은 늘 주어진 순간을 제대로 소비하는게 중요하니까 지금을 즐기도록 한다면 크게 노력할 일은 생기지 않을텐데.

이런말 할 것도 없이 난 나쁜일이 생겨도 다 그 상황의 필연적인 성격을 인지하기 때문에 슬픔도 크게 불행이라 생각지 않는다.

이미 즐기며 살고 있지만 <죽지그래>를 통해 좀 더 지금을 즐기는 차원을 넘어 나의 '관계자'들의 상황을 배려해야겠다는 마음이 이번 독서에서 내가 성장한 부분인 듯 싶다.

 

시간이 흐를 수록 <죽지그래>에서 가지는 겐야의 존재적 당위성에 대해 생각할 수 밖에 없으니 예상은 하며 읽어나가지만 막상 갈등의 구조도 없이 추리소설이 목표로하는 요소가 충족됐을 때는 김이 샐 정도였다. 

그래도 등장인물들과의 대화내용의 패턴에서 암시를 느끼며 예상한 결과로 충족되었으니 좀 위안을 삼아볼까...;

 

추리물 매니아들에겐 미약한 강도라 성에차지 않겠지만 추리소설에 비해 사회파소설에 더 관심많은 나이기에 추리물임에도 추리소설로서의 역할보다는 전반적으로 사회파, 혹은 철학적인 의도가 더 많이 반영되어있어 개인적으로는 만족스러운 독서였다.

 

그리고 역자후기에 딸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보여주는 모성애에 나도 엄마가 보여준 사랑들이 생각나 추리소설을 읽고도 포근한 마음이 든다. 권남희번역가가 번역한 책은 그래서 늘 역자후기가 어딨나 찾아보게 되는 것 같다.

만족도 정도가 번역가의 역량에 좌우되는 해외도서는 늘 번역가의 이름을 더 중요시 여기는데 실제로 그분의 책은 읽기에 편안하여 표지만보고도 완성도를 의심하지 않았지만 역시나 재밌게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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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자본주의 선언 - 자본주의의 운명을 바꿀 미래 기업의 5대 조건
우메어 하크 지음, 김현구 옮김 / 동아일보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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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며 무한할 것 같은 경제의 고속성장기였던 20세기를 지나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부터는 몇차례의 금융위기를 겪으면서도 되풀이되는 경영구조의 틈을 지나친다고 생각했는데 혁신을 부르짖는 목소리에 따르는 실행이 강해짐을 느낀다.
점차 이대로는 안된다, 지속가능한 미래성장성을 찾아야한다는 경영마인드가 꿈틀하는가 싶더니 근래의 증시폭락여파로 지금의 자본주의에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2008년에 이어 바로 최근의 금융위기가 자본주의에 경종을 울렸을까?

깨달음에 안타까워할만큼 지나간 자본주의의 고속성장에 반성해야할 부분들이 너무 많았다.

미래를 전망하면서도 유산으로 남길 환경과 사회문제를 고려하지 않았던 20세기까지의 비윤리적 자본주의 속에 남용된 지나친 수요와 공급으로 황폐해진 21세기의 자본주의가 위협을 받고있다.

정치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회의적인 목소리들이 적지않지만 저자도 말 했듯이 최고는 아니나 최선의 방법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만큼 수정해야함이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 상황이다.

진작부터 서점에 느껴지는 경영의 흐름에는 상생경영과 소통이 화두로 떠올랐으나 위기의 순간에야 절실히 느끼게 되었으니 늦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조정해나갈 수 있다면 상당부분이 예상치보다는 그리 절망적이진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저자는 지금의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만 비추는 것도 아니고 최선의 선택임을 인정하면서 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제시를 하고 있다. 조심스럽다기보다는 냉정하고 이성적인 판단의 시선을 보여주고 있어 경제&경영 관련인력들에게 필요한 조언을 한다.

벤처기업인, 미래의 기업경영을 꿈꾸는 경영예비자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책이다.

일반인에게도 자본주의사회에서 위기를 현명하게 대처하고 미래를 보다 효율적으로 준비할 수 있게 시야를 넓혀 주고 있어 앞으로의 투자처에 대한 불확실함에 불안한 개미투자자들과 조직들에게도 효과적이다.

한 부류에 국한된 개념이 아닌 역사와 문화를 아우르는 자본주의의 흐름을 짚어주고 보다 나은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어 개인이나 안정적 궤도에 있는 현역 경영자들에게도 필수적인 경영의 청사진을 제시한다.

 

나만의 생존을 위한 자본주의는 쇠퇴의 길을 걷기시작한지 오래다.

아무리 정글의 법칙이 적용되는 자본주의라 하더라도 한곳의 흐름이 원활하지 못하게되면 같이 쓰러진다. 상생경영이 단지 이론상으로 이상적인 이념이아니라 현실로 나타난 사례들을 유념해야한다.

또한 고갈되는 자원과 회복이 불가 할 정도의 환경문제들을 고려하지 않으면 지속가능한 성장을 바랄 수 없음은 당연하다. 

윤리의식을 배제한 경영은 자원의 한정적인 문제도 있고 소비자들의 높아진 소비문화에 도덕적가치까지 부합시키지 못한다면 쇠락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동안 타사와의 경쟁구도 속에서 소비자들의 선택의 폭에 제한을 두었다면 이제는 문을 열어 소비자의 행동에 제약을 걷고 편의를 확보하는 경영방침이 살아남을 수 밖에 없다.

구글만이 위기를 직접 만들었지만 결국 그 긴장감이 기업의 성장을 불러오는 사례가 발생했기에 혁신을 실행으로 옮기는 지금의 CEO들에게 전략적인 힘이 되어 세계적인 도약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새로운 자본주의 선언>에서는 윤리의식, 지속가능성, 상생경영을 키워드삼아 건강한 자본주의로 발전할 것을 촉구한다.

훌륭한 이념에는 근성있는 실행이 따라준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그런 장미빛 청사진까진 바라지 않더라도 이미 기존의 자본주의가 가지는 문제점들에 대한 위기의식이 필수적으로 지속가능한 경영을 실행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기에 다행이다.

이 상황을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지만 경영자도 근로자도, 기업도 소비자도 모두 책임의식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보고 행동할 수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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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 진화 - 시대를 통섭하고 정의하는 위대한 경영 패러다임
스튜어트 크레이너 지음, 박희라 옮김, 송일 감수 / 더난출판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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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보다 약간 묵직한 책이지만  <눈먼자들의 경제>를 읽은 후 읽어서 그런지 꽤 부피감이 적당하다.

저자는 <경영의 진화>에서 근 100년간의 자본경제에서 유행을 타며 변형되어 온 경영의 역사에 대해 안내하고 있다. 새로운 장으로 넘어갈 때마다 한 경영문화를 정리해서 소개해주어 순차적인 경영문화의 흐름을 이해하면서 정리까지 할 수 있게 구성되어있다.

경영이라는게 결국 사람의 일이라 당시의 사회에 대해서도 함께 맞물려 소개되기 때문에 근현대사를 공부한다는 느낌으로 대학생들이 꼭 알아야할 인문학 교양서적으로도 좋다.

경영의 변천을 다루고 있어 다소 지루할 듯 했지만 생각보다 유행을 타는 그 흐름이 지루할 새를 주지않고 시대적 당위성과 맞물려 흥미를 유발한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경영으로 인해 취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가시적으로 느끼게 되면서 기업의 목표는 오로지 이윤창출에 맞춰줘 돌아가기 시작했다.

노동자가 생계유지만을 목적으로 생활할 때의 경영은 단지 이윤창출에만 목적을 두면 되었기에 경영자가 고려해야 할 범위가 오로지 자본이었지만 생활의 향상으로 소비자, 노동자 모두 높아진 삶의 질에 따라 윤리의식 또한 높아지면서 경영자가 추구해야 하는 관점도 변했다.

지금은 기업윤리라는 단어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어느정도 경제적 안정기에 있는 선진국가들은 사회환원을 실천함으로서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보여주며 정책적인 측면이 아니더라도 오너 스스로가 기업윤리를 제창하며 인간성을 배제한 경영방침에서 인간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경영을 슬로건으로 거는 사례가 많아졌다.

 

단지 기업윤리를 실천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기업의 영속적인 존립을 위해서도 인간을 중심으로하는 경영은 필수적이기 때문에 왠만큼 성장한 대기업들은 실적에 기반을 둔 고속성장으로 인한 부작용들에 대한 대안을 개선해오면서 지금은 '소통'에 초점을 두고있다.

가정이라는 작은 조직 내에서도 소통은 어려울 수도 쉬울 수도 있는 법이라 쉬이 답이 안나오는 요소인데, 다양한 인원을 수용하며 나아가는 기업에서 소통을 화두로 올리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소통없이 조직이 건강하게 흘러가기란 어렵다는 것을 근래의 사회문제들을 통해서 충분히 학습했을 것이다.

 

기업의 내부 조직문화에서도 공공연한 부작용들에 대한 대안들이 점점 진화하여 지금은 기업을 움직이는 것은 돈이 아닌 인간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고 경영철학을 재정비하여 혁신을 제창한다.

자본주의사회에 이윤창출만큼 기업의 목표에 부합하는 것은 없겠지만 이제 더이상 도덕성을 배제하고 이윤만이 최대목표로 삼을 수가 없다.

자본의 힘에 기대어 운영되고 있지만 인간의 손으로 운영되고 있고, 그 자본의 흐름에 소비자라는 인격체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은 이제 단순히 생계수단을 위해 지출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활이 향상되면서 스스로의 도덕적 의무를 의식하게되어 양심적 소비문화를 지향하게 되었다. 이른바 '착한소비'가 확산되면서 기존의 유통구조와 경영방침등에 혁신이 시작되었다.

아무리 기업윤리가 과거에 비해 이윤창출에 많은 저해요소를 내포한다해도 겉치레의 쇼라도 할 수 있는 CEO만이 생존하는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의 자발적인 양심적 소비는 초기에는 상위계층 극소수의 이념으로 출발하였으나 경제발전과 더불어 사회적,문화적 풍요로 인해 일반소비자들에게도 삶의 질적 향상으로 인한 사고의 여유에 윤리의식이 자리잡아 점점 가속되고 있다.

때문에 소비자들의 니즈가 단순한 상품의 수요에서 상품이 지니고있는 윤리적가치까지 고려하는 상황으로 변하였기 때문에 기업들은 거기에 맞춰 발빠르게 기업윤리의 이념을 전반에 내세워야 한다.

 

상품에 대해서 뿐만아니라 노동자들의 복지, 환경적 효과까지 고려할 수 있는 경영자만이 존경받을 뿐만 아니라 기업의 존립을 확고히 할 수 있기때문임을 깨달아야 한다.

경영도 유행이고 소비도 유행의 패턴을 보여주지만 부각되는 환경문제와 고취되는 윤리의식은 한순간의 유행으로 흘려보낼 수 없다는 사실은 <경영의 진화>에서 말하지 않더라도 지금 출간되는 경영서적들이 어떤 방침을 지향하는지 알 수 있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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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경제 - 시대의 지성 13인이 탐욕의 시대를 고발한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 마이클 루이스 외 지음, 김정혜 옮김 / 한빛비즈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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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요즘같은 전세계적인 금융위기에는 개인들이 투자보다는 투기성으로 금융상품에 투자하며 실패하여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례들을 담은 안타까운 뉴스들이 속출한다.

전문성이 떨어지기에 더욱 조심하고 안정적으로 접근해야하지만 공부하려는 노력없이 투기성으로 접하거나, 설지식으로 과잉자신감으로 그릇된 욕심을 부려 실패하는건 어쩌면 너무 당연해서 그들을 탓할 순 없지만 그 어리석음에 왜 마지막까지 그릇된 선택을 했는지...

개인들의 묻지마 투자의 실패에 대해서는 전공자도 아니고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분명 경제관련 행정부서나 금융기관의 날고기는 엘리트들이 전부터 반복되는 경제의 흐름을 공부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오고 있는데 어째서 주기적으로 경제위기의 타격이 개인에서 국가로, 이제는 세계로 점점 확산되는 것일까?

 

<눈먼자들의 경제>는 13명의 저명한 저널리스트들의 시선을 빌어 소수의 영향력있는 계층의 욕망으로 눈이 흐려 그릇된 판단과 과한 긍정적 전망으로 인한 그 파급효과를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무섭다는 말로 다 하기엔 그 피해의 폭이 넓어서 짧은 한숨만 연거푸 나온다.

그들에겐 보다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선택의 영역이 넓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식의 부재가 아닌 욕망의 절제에 대한 브레이크가 고장났을 뿐이라는게 명백하여 그럴지도 모르겠다.

 

장장 700페이지에 달하는 사전같은 두께의 위용을 자랑하며 '다 읽을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들게 나를 위축시키던 겉모습과 다르게 소설과 르포의 형식으로 적절히 구성하여 속도감있게 읽힌다.

추리소설보다 더 중도에 손을 놓기 힘들었던건 아마도 지금 시기에 과거에 대한 학습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한 초점이 흐렸던 인간의 욕심에 소설보다 더한 감성적 요소를 느꼈기 때문일것이다.

 



경제위기는 주기적으로 찾아오고 있지만 생활고를 겪느라 경제위기의 인과관계에 대해 깊이있게 접근하지 못하는 일반인들은 위기가 닥칠 때마다 폭풍우 속 돛단배처럼 좌초되기 일쑤다.

개인의 실수로 개인의 피해로 인한 경우보다 조직의 원할하지 못한 정책으로 인한 그 피해를 일반인들이 고스란히 견뎌줘야하는 비중이 더 크다는게 안타깝다.

2008년의 끔찍한 위기를 견디고 이제 좀 허리를 펼까했더니 최근 다시 전세계적인 금융위기가 닥쳤다.

유럽발 증시 폭락과 미국의 재정위기까지 불거지면서 지난 몇주동안 외수에 의지하여 연명하는 우리나라역시 증시폭락으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인간은 감정이 있기에 위대하고 예측할 수 없고 위험하다.

경제라고하는 수의 체계로 이뤄진 분야도 결국 인간이 운영하기에 이성적요소만 존재할 수 없고 때에 따라서는 감정적 요소가 이론을 흔드는 경우까지 발생한다.

최근 몇주 동안의 증시폭락에서도 선학습시기가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혼란에 함께 휩싸였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지난 2008년의 대공황상태에 비해서는 비교적 침착하게 대응하는 반응도 적지 않았다.

그때만큼 심각하지 않아서 그런다고할지 모르겠지만 경험에 의한 학습이 작용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나 역시 재빠르게 손절매한 종목은 한숨 돌렸지만 물린 종목의 수익률을 보면 짜증이 솟구치는걸 알면서도 어김없이 안타까움에 조회해보며 아침부터 저혈압발동!하는 스스로를 질책한다.

대학을 졸업하도록 경제와 관련한 공부에는 근처에도 가지 않아 금융지식이 전무했던 나였지만 경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속물근성이 아닌 필수상식이며 성인으로서의 책임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무섭게 흥미를 느끼며 홀로 공부했다.

그러나 독학의 단점 중 하나가 다독을 하여도 아는 것은 알고, 모르는 것은 계속 모른채 지나간다는데 있어 초반의 가속력에 비해 시간이 흐를 수록 점점 제자리걸음하는 진도를 느끼고 답답해졌다.

결국 짧은 지식으로 금융상품에 멋모르고 투자해서 이익과 손해를 경험하며 '투자의 실패는 몰라서 오는 것이 아닌 과욕으로 발생'하는 것임을 절감했다.

문제는 그런 경험으로 깨달은 학습이 기억에 있음에도 '기회'를 눈앞에 두는 상황이 왔을 때 이성보다 감성이 더 크게 튀어올라 욕심을 부리게된다는게 어처구니없다.

 

재화의 보유정도가 그 사람을 보여주는 시대인 만큼 사람들은 인생을 설계할 때 확실히 '인생'자체보다는 '재산'에 초점이 크게 맞춰져 있다.

아무리 돈도 중요하고, 더불어 가족, 지인, 지식, 취미등의 생활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돈과 함께 동등한 무게를 지니지 못해 인생설계의 포인트가 재화에 맞춰져있는데, 사회적으로 개인적으로 재정적인 문제가 없을 때는 별 문제없이 살 수 있지만 주기적으로 닥치는 금융위기가 닥치면 그 때마다 인생자체가 흔들리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운 선택으로 치닫는 것이다.

<눈먼자들의 경제>에서 보여주는 상위계층들의 생활을 읽다보면 나도 그 생활을 누리고 싶고 그 생활을 누릴 수 있다면 남은 생의 설계의 초점을 재화에만 두어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실제 삶은 결코 재화의 부피가 만족을 충족시켜주기엔 무리다.

교과서에나 나올 말이라고 치부하기엔 이미 삶에 있어 돈은 필요한 개체이지 목표로 삼을만하지는 않다는걸 모두 느끼고있다.

다만 많으면 편리하지만 그만큼 위험도 높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어떤 드라마에서 "돈이 더럽냐? 난 무섭다."라는 대사가 있었는데 듣는 순간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돈이 무섭다는 것을 생활고로 겪는 사람들은 돈에 관련하여 조심성있게 행동하지만 지나치게 풍족한 사람들은 마치 부르마블 게임하 듯 현실감각을 잊고 자금의 흐름을 탄다.

결국 순간의 욕망으로 눈이 흐려져 영원할 것 같던 금융기관이 무너지고 국가가 흔들리고 사람으로서 지켜내야 할 존엄성까지 무너뜨리게 됨을 <눈먼자들의 경제>에서 여실히 볼 수 있다.

 

꽤 두꺼운 책이지만 금융위기에 대해 쉽게 이해하기 위해, 혹은 다양한 방면으로의 시선을 느끼기 위해 좋은 경제서적이니 개인투자자들의 시야를 넓히기 위해 추천하고 싶다.

경제서적이라고(게다가 두껍다고) 고리타분하게 생각할 것 없이 소설책이 주는 재미가 더 클테니 비가 와서 방콕에 심심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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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좌파 -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 강남 좌파 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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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의 편에 서서 민주화를 외치지만 엘리트 인생코스를 걷고 그들이 누리는 사상에 반하는 생활적 풍족을 비꼬는 표현으로 각 나라마다 들어 찬 진보주의의 엘리트적 모순을 꼬집고 있다.
사실 그 전에도 이런말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노무현정권때부터 유독 짝퉁우파, 강남좌파라는 말이 자주 들렸다.

정치적이념이 변질될 위험에 늘 긴장상태를 줄 수 있는 당파적 논쟁은 어느정도 필요하지만 영역넓히기에 급급한 탓에 각 당파가 가지는 정치적 이념에 대한 성향을 알아보기 힘들다.

칼로 무 자르듯이 나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뭉뚱그려보더라도 과연 우파와 좌파가 제대로 대립하고는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우파라고 칭하는 당은 좌파가 아니라는 이유로 우파라고 할 수 있는가?

좌파는 그들이 제창하는 정치적이념을 탁상이 아닌 생활로 보여줘야하는 것 아닌가?

시민들은 우파에게 분노하고 좌파에게 불신의 감정을 토한다.

 

정치적 참여도가 높아진 지금 시민들의 자발적 시위가 자칫 정치적으로 이용될 위험이 있음에도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건 바로 우리 이야기를 지어가는 과정이기에 바쁘고 힘들더라도 눈떠서 보고, 귀를 열어 듣고, 생각하여 말해야하는 것이다.

촛불시위가 한창일 2008년에 가까운 지인과 함께 참석하여 얼마나 많은 시민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얘기했는지 모른다.

그 지인은 우리가 행사하는 이런 시위에 당위성을 부여하며 참석하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겨야한다고 했지만 정말 정치적으로의 보상이 간절한 계층은 이런 시위에 참가하는 시간조차 내기 힘들다.

과연 강남좌파만을 탓할 일이 아니란 것이다.

나 역시 시민의 일원으로 정치인들에게 책임을 요구 할 만큼 시민의 도덕적 의무를 수행하고 있는가?

부끄럽지만 답은 '아니오'였다.

사람이기에 추구하는 사상을 온전히 생활까지 유지하는 강남좌파가 많지 않다는데 국민으로서 흥분할 수 밖에 없지만 꼭 정치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일반인들 중에 본인의 이념과 대립되는 상황에 부딪힐 때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선택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정치인에게 권력에 따른 책임을 요구하는 우리도 권리에 앞서 의무를 다하는 고차원적인 시민의식을 가져야 한다.

 

강준만교수는 <강남 좌파>에서 좌파에도 여러 성향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어 영향력있는 인물들에 대한 소개로 흥미를 제공하고 이해를 돕고 있다.

정치적 성향이 강한 사람이라면 본인의 입장에 반하는 쪽으로 편향된 집필이라고 느낄지 모르겠지만 일반독자인 나로서는 강경하고 온건함의 차이를 보여주며 편향적인 시선을 최대한 배제하려 애쓴 흔적이 보인다.

 

이념과 그에 따른 생활적 실천도 바라는 것은 그들이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그저 부유층일 뿐이라면 이념과 생활의 모순에 왈가왈부 할 필요가 없지만 국민에게 한표를 부탁하며 본인의 이상을 펼치는 만큼 진정성없어서는 안된다.

경제적인 풍족을 넘어 윤리적 자기만족까지 채우고 싶은 욕망이 아니라 진정으로 사회복지와 환원에 뜻이 있다면 불편을 감수하고서라도 지금까지의 편리를 벗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진보주의성향이 진심에서 우러나온다면 그 행동자체가 용기도 필요없이 자연스럽게 이뤄질텐데)

 

국민들은 민주화가 이룩되면서 많은 '쇼'들을 거치며 처음엔 신선해했지만 이제 너무 눈에 빤한 쇼에는 질렸다.

단 몇명이라도 진정성을 가진 진보주의를 만날 수 있길 바래본다.

비록 '쇼'에 불과할지언정 그들이 제시하는 비전에 희망을 걸어보고싶은 시기다.

이왕 할꺼면 눈에 빤히 보이는 쇼가 아니라 너무 완벽해서 주체가 동화될 정도의 정치'쇼'를 펼쳐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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