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가고 가을운동회를 준비하는 이계절. 운동장에 나부끼던 만국기가 떠오르게하는 <고마워! 아리가또,땡큐>는 만국박람회에 참석한 듯 다양한 문화를 펼쳐준다. 작가의 일본유학 동안의 에세이인데 일본생활에 대한 적응기라기보다는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과의 교류를 중심으로 구성하고 있어 새롭고 신선함 일색이다. 표지에도 그 발랄함이 드러나지만 다량으로 등장하는 컬러풀한 삽화와 큼직한 글씨로 동화같기도 하고 애니메이션 소개집을 보는 듯도 하여 내용 자체도 밝고 가볍기 때문에 지루할 새 없이 읽힌다. 쉽게 읽힐 구성이라 내용이 들어가 전개된다해도 막힘없이 읽힐텐데 저자와의 친분에만 초점을 두어 인물 중심으로 짧막하게 다루고 있어 독서에 시간을 뺏길 일이 없다. 그저 읽고 싶을 때 잠깐 3~4페이지 읽는 것으로 이미 그 인물과 친해질 수 있기때문에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든 싫어하는 사람이든 그저 기분전환삼아 손에 집으면 후다닥 읽어버릴 것이다. 풍족한 유학생활이 아니라 다소 힘든 생활고를 동반한 에세이로 그의 주변 친구들 역시 결코 유쾌할 수 만은 없는 입장이기에 발랄한 분위기와는 다른 그들의 이야기에는 다소 마음이 묵직 해 진다. 하지만 저자가 긍정적인 성향인지 <고마워! 아리가또,땡큐>의 구성방향이 밝고 유쾌한 분위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인지 그의 친구들 또한 밝고 낙천적인 자세로 일본생활의 어려움을 극복해나가고 있어 나도 모르게 부모의 마음이되어 뿌듯해졌다. 타지 생활에 좋은 일 보다 서운한 일이 더 많았을 것임에도 그 모두가 아름답게 추억되어져 있어서 그 시간이 짐작되어 힘들었겠다는 안쓰러움과 함께 가만히 앉아 가슴따뜻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단조로운 일상과는 다른 분위기로 새로운 재미는 있을지 몰라도 시험에 들게하는 순간들이 많아 괴로웠겠지만 그 환경에 더 견고해졌는지도 모를 그들의 우정을 보며 왠지 동경과는 거리가 먼 일상이지만 그 속에 섞여 함께 하고싶더라. 여행을 간다해도 그 지역민들과의 관계는 있을 수 있지만 타지에서 만난 서로 다른 타지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녹아있어 많은 여행에세이들 중에서도 독특한 분위기를 발한다. 글로벌시대라지만 실제로 그 분위기를 실감한 적이 별로 없었는데 이렇게 유학에세이로 보니 막연함뿐이던 형태에 윤곽을 그려넣을 수 있었고 또 만만찮은 재미를 맛볼 수 있었기에 즐겁다. 저자의 눈을 빌어 좋은 시간을 대리만족 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국내에서라면 쉽게 접할 수 없는 환경과 사람들 사이를 패치워크 하듯 이어붙인 <고마워! 아리가또,땡큐>땡큐! (이 서평은 큰나무출판사로부터 무료로 제공 받아서 작성한 서평입니다.)
삶에 고비를 맞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만한 '무엇'을 제공할 수 있는 매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여행? 음악? 노래? 미술? 운동? 대부분 스트레스를 풀 때와 마찬가지로 기분을 환기 시키기 위해 정적이든 동적이든 예술분야를 통한 방법을 통하고 있다. 실제로 심리치료에 예술분야는 다양하게 활용 될 정도로 그 효과가 입증되었다. 대부분의 경우 혼자서 할 수 있긴 하지만 준비하는 과정이나 시공간 적인 여유를 요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불현듯'시작하기 힘든게 사실이다. 한번 가기 시작한 길에서 쉽게 이탈하지 못하는 일상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문득','불현듯' 해소할 수 있는 매체가 필요한데 그중 하나가 '책'이 아닐까 한다. 아무런 준비없이, 별 생각없이 펼쳐든 책 한권에 휴식을 느끼기도 하고 사고의 전환을 맞기 도 하기에 <삶의 고비에서 만나는 두 번째 인생>역시 부담없는 부피와 심플한 구성으로 고뇌하는 우리에게 든든한 지지를 보내 준다. <삶의 고비에서 만나는 두 번째 인생>은 오세웅작가가 인생의 고비를 도약시점으로 삼은 사례들을 모은 책으로 작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이 그저 편집에 지나지않는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 보여주는 그의 인생을 바라보는 자세에 대한 조언을 통해 짧게나마 작가와 소통하게되니 공감이 생기고 내용이 총정리되면서 '역시 이 구성이 탁월한 책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가 알고 있는 지식을 구구절절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진행형인 지금의 '열정'을 이미지로 떠올릴 수 있게 다양한 사람들의 인생의 결함시기와 노력을 보여주어 독자와의 '공감'을 효과적으로 연결시킬 수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부터 젊은이든 중년이든 노인이든 우리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시행착오를 거치며 성장하고 있다. 사실 내 인생의 고비가 대체 언제인지 확실하게 자신하기도 힘들 정도다. 늘 '지금'의 시기가 주는 불안감에 대해 그저 '열심히'하는게 아니라 '현상을 마주해야 함'을 들려주는 <삶의 고비에서 만나는 두 번째 인생>. '왜 나는 그 당시에 그런 조언자를 만나지 못 했을까...?' 책으로 드라마나 영화로 숱하게 느끼던 이 생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돌이켜보면 늘 주변에 말로, 행동으로 나를 각성시켜주려는 인력들이 있는데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이 도서 역시 크게 공감하지 못하는 독자도 있기야 하겠지만 단순한 조언이 아닌 다른 이의 '이야기'로 기억할 수 있어 잔상이 남기는 시간이 길기 때문에 당장은 아니더라도 시간이 흐른 뒤 영감을 줄지도 모른다. 한 위인의 생애를 다룬 것도 아니고, 대기업의 연혁을 보여주는 것도 아닌 11가지의 '도약의 시기'를 짧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읽어나가야 할 필요도 없고 그저 목차를 보고 마음 가는 사례부터 편안히 읽을 수 있으니 참고하시길. 시력 저하로 장시간 독서가 불가능해 장편소설의 부피에 겁먹는 우리집 여사님에게 딱인 책이었답니다. 요일로 인생의 고비와 도약, 결실과 감사에 대한 표현에 새삼 일주일이 아름답게 느껴지게 한다. 자기계발의 기능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정서적인 부분까지 포함 해 성장을 촉진시킨다. 아직 우리는 고민하기도 하고 결실을 보기도 하고 다시 좌절하기도 하면서 삶의 과정에 있고, 실패는 아프지만 그 노력의 습관에서 재도약을 꿈꾸는 힘을 얻어 다시 도약해 더 큰 결실을 보기도 한다. 언제나 그 금요일의 과정까지는 당연한 듯 받아들였는데 토요일과 일요일을 실천하는 마음은 월요일에 시작했던 열정이 미치지 못했던 것 같다. 저자의 바램처럼 인생의 고비를 기회로 삼아 도약하고, 결실을 보게 되었을 때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토요일의 관계를 소중히 하고, 일요일의 따스함을 나누어야지.
대중성과 작품성 둘 중 하나도 놓치지않고 사회의 문제점을 환기시키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진 미야베 미유키라는 이름이 아직도 영향력을 잃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R.P.G.>. 처음 <화차>를 접했을 때는 현실에 대한 문제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감성적으로 연고를 발라줄 줄 아는 그 능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던 아쉬움이 남았었다. 하지만 내가 미미여사를 접한 시기가 오래지않다보니 시대적 갭이 있어서 연락책이나 생활상등의 묘사를 접할 때마다 이질감을 느꼈었는데 <R.P.G.>는 시기적으로 공감을 충만하게 했다. 시기는 다르지만 비슷한 속도로 사회적발전을 이룬 일본이기에 늘 우리보다 몇년 앞선 사회문제들이 이슈화하여 관심받았는데 <R.P.G.>에서 다뤄진 가족간 소통의 부재는 지금 한국가정 내의 상황과도 통하는 부분이기에 더 짠하더라. 이미 사춘기는 지나버렸지만 사춘기였던 당시의 나와 부모님과의 소통오류, 이제 성인이 된 입장에서 미래의 자식과의 소통에 대한 염려 등이 떠올랐고 가족의 소중함과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살벌한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아기자기한 느낌이 들 정도로 부드러움이나 포근함을 느낄 수 있다는게 미야베 미유키 작품의 특징 중 하나다. <R.P.G.>마지막에 등장하는 '나비'라는 시구는 소통의 실패로 인해 생긴 박탈감과 문제는 해결됐을 지라도 문제의 동기에 대한 환기가 주는 심리적 삭막함을 정서적으로 부드럽게 감싸주고 있다. 어떤 캐릭터에 빙의 된다 해도 치유받는 기분을 느끼게 할 정도로 많은 이들에게 친근함을 선사하여 미미여사라는 애칭에 걸맞는 모성이 느껴지는 작품들 덕에 한번 미야베 미유키를 접하면 방대한 그녀의 작품들을 독파하게 된다. 종종 등장인물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곳곳에 녹아있어 비중이 작은 출연진 하나라도 소홀히 지나치기가 미안할 정도로 섬세한 손길이 닿아있기 때문인 것 같다.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은 추리를 통해 문제를 보여주는데 정통 추리소설이기 보다는 사회문제에 초점을 두고있어 범인을 알아가는 재미보다 사건에 대한 인과관계, 또 그 사건해결에 대한 과정에 독서의 묘미가 있다. <R.P.G.>역시 애초에 범인에 대한 짐작은 이뤄졌지만 범인의 동기를 어떻게 표현해줄지에 대한 기대가 커서 읽어가는 내내 범인에 대한 궁금증보다 예상되는 범인의 언행에 주목하게 되어 사건의 범인이자 시대적 피해자의 심리적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평범한 일상에서 발생할 수 있는 상황들을 묘사하는 미미여사이지만 <R.P.G>에서는 세대의 갭과 그로 인해 올 수 있는 소통에 대한 묘사로 인터넷이라는 요소를 선택하면서 독특한 방식의 상황극을 보여줬다. 심리치료에 종종 사용되는 역할극에서 발상을 시작했을까? 작가가 보여주고자하는 구성원간의 이상적인 역할과 바램들의 불일치가 가져오는 사회적 부작용들이 역할극이 가지는 심리치료의 효과를 인간의 혁신적인 창조물이자 사회문제의 동기가 되는 '온라인'과의 접목으로 시너지효과를 발생시켜 작품의 완성도를 더 높였다. 표지디자인은 북로드에서 직접 하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무대 위에 진공처럼 느껴지는 무채색 박스 안의 종이인형이 연상되는 가족놀이를 보여주고 있다니 작품의 내용과 작가의 목소리를 잘 캐치하여 반영하는 센스를 보여주고 있다.
그녀가 보여주는 민중에 대한 눈물과 관심은 다른 정치인들과는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비단 여자여서만은 아니다. 매사에 냉철함을 대변하 듯 희노애락을 표정에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을 눈여겨봤기에 그렇고, <박근혜 스타일>에서도 언급하듯이 일관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진심을 전달받을 수 있는 것이다. 정치하는 곳의 상황을 일반인들은 알 수 없기에 그들의 실제 인성이 어떤지 전혀 알 수는 없지만 우연한 기회에 사회적인 문제로 이슈화 되면서 불거지기도 하고 진심을 담지 못하면 연기라도 제대로 해야하는데 선거유세에 너무 피곤한 나머지 불성실하게 '연기'에 임하면 아무리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도 '가식'을 느낄 수 밖에 없기에 가식을 목격할 때마다 점점 불신이 쌓여갔다. 매사에 본인의 이념을 생각하고 가슴으로 염려하고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데 워낙 공적업무만이 아닌 사적으로 챙겨야 할 일들이 넘치다보니 어쩔 수 없이 틈이 생기고 가식을 노출할 수 밖에 없는 상황들이 발생한다. 시간에 대해 말하자면야 정치적입지와 영향력이 높은 박근혜의원만큼 바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내 생활','내가족' 등 정치 외적인 라이프스타일을 배제할 수 없는 정치인들에 비해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성숙해지는 시기부터 '국가'에 초점이 맞춰져있고 부모의 부재와 미혼으로 가정적으로는 외로운 삶의 영역이 그녀를 온전히 정치에만 몰두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인지 박근혜의원은 특별한 개인적이슈가 없다. 박탈감이 느껴지는 생활이 가식을 연출 할 필요도 없는 환경을 만들어주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면 측은하다. 여인으로서 선뜻 동경하고싶은 삶은 아니지만 인간으로서 본받고 싶은 사람 박근혜. 하지만 그렇게 살라고 하면 과연 살아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의문은 커녕 그렇게 살기 싫다고 징징거릴지도 모른다. 유신정권에 대한 비난의 화살을 비껴갈 수 없는 박의원이지만 그녀가 정치판에 몸 담으면서 얻은 것 보다 잃은게 많기에 젊은사람 뿐만 아니라 나이드신 어르신들까지도 짠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그렇게 개인으로서 열악하다 할 수 있는 상황과 그를 극복해 나가는 모습이 신뢰를 부르고있다. 절제와 근성으로 대변되는 그녀의 삶은 정치인이기 전에 사람으로서의 삶에 아쉽기도 하고 잔인스러웠던 정치판이기에 도망치고 싶을 것 같지만 사춘기부터 시작되는 정치적인 인생경로의 지속은 대한민국에 대한 애정과 저력을 보여준다. 박근혜의원은 대한민국 정치판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아이콘이다. 아버지의 보조적 역할로 시작하였으나 다시 정치계로 돌아왔을 때 중장년층들에게 도약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박정희전대통령과 육영수여사의 후광을 벗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싶었으나 어느새 박의원 자체적 이미지를 굳건히 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어느새' 조용히 꾸준하게 스스로를 갈고 닦으며 정진해왔음이 그 성격을 온전히 보여주는 듯 하여 왠지 이런 한결같음을 이후에도 지속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크다. 강준만교수도 모든 정치인을 강남좌파라 했듯이 뚜렷이 성향을 구분짓기는 힘들지만 그녀만한 강남좌파는 없을 것 같다. 그나마 국민들이 소통을 요청할 수 있는 창구가 되는 보수세력이다. 늘 배우려는 자세로 열린마음을 갖고 있어 미니홈피, 페이스북 등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선 매체를 십분 활용하여 국민들과 소통하고싶다는 의지를 행동으로 보여준다. 많은 정치인들이 서민을 이해하고 돕겠다지만 머리로는 알아도 경험이 없으니 체험으로 얻지 못하는 생활의 어려움을 깨닫기엔 일반인들과의 갭이 크다. 예전에 정몽준의원의 버스비사건에 우린 얼마나 황당했던가; 그래도 박의원은 재정적 풍요를 즐기며 살기보다는 절제가 몸에 베어있어 개념은 잡혀있기에 경제적 망언은 없지만 '절제'와 '부족'은 엄연히 다르기에 향후 얼마나 실질적인 정책을 펼쳐줄 수 있을지 불안하다. 지인도 겉모습만으로 믿기 힘듦에도 불구하고 굳이 박의원의 인격을 신뢰할 수 있다고해도 인생자체가 일반인과 다름에서 오는 차이가 우직한 정치를 전망하게 하지만 그만큼 현실성이 떨어지는 정책이 펼쳐질까봐 걱정되기 때문이다. <박근혜 스타일>은 박의원에 대한 호의적인 시선으로 다소 편향적인 의견을 담고 있지만 특별히 우상화하려는 조짐없이 존경할만한 인물에 대한 평전정도로 그친다. 그래서 불편하진 않은데 읽다보면 '그건 저자의 생각일 뿐'이라는 부분도 분명있어 가끔 갸우뚱하게 된다. 정치인으로서의 박근혜가 아닌 사람 박근혜를 보여준다. 거의 자기계발서에 가깝다 할 정도로 박의원의 정치적 이념보다는 한 개인의 '절제'와 '실행'을 기반으로 한 언행을 다루었다. 존경할만한 덕목에 대해 장마다 간략하게 부담없이 구성해놓고 중간중간에 그와 성격을 같이하는 행동덕목들을 삽입하여 본받아야 할 부분에 대해 환기시키고 넘어간다. 행동양식에 초점을 맞춰 묶어놓았기 때문에 시간이 없는 사람도 손에 집히는대로 혹은 목차를 보고 맘이 가는대로 펼쳐서 짧게 읽을 수 있으니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
머리로는 추구할 수 있어도 내 삶이 미치는 영역이 온전히 나 혼자만의 영역으로 국한되지 못하는 관계로 보통은 실행까지 이어지기 힘든 마광수교수의 사상모음이 잔뜩 담겨있다. 정말 구구절절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면 내가 사회통념에 따르지 못하는 것일까? 사실 마교수의 말 중에 '다르다'라고 할 수 있어도 '아니다'라고 할 부분은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추구하는 이념을 관철하기 위한 쇼를 하는 것도 아니고 잘난척 하는 것도 없이 정말 본질을 순수하게 보고 말한다. 어린아이가 가지는 순수함을 담고 있기에 배려심이 없긴하지만 그 솔직함이 없이 그의 담론이 어떻게 완성되랴. 지금이야 아무리 외설적인 주제를 다루는 예술품도 예술로서의 허용되는 범위가 넓어져 관대해졌지만 마광수교수가 막 사회에 나와 본인의 생각을 피력할 당시는 외설은 커녕 국가의 절대권력이 가지는 비위를 건들이면 그대로 매장당하는 것은 불사해야했던 시대인데 압제에 반발하는 임계점이 낮은 젊은 혈기에 교편을 잡아서인지 그동안 쌓아온 지식을 토대로 그가 완성시킨 주장은 매니아를 형성하며 관록이 붙었고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지금의 마교수는 자유로운 성적표현의 아이콘으로 상징된다. 본인의 존재적 가치를 자랑스러워 해야 할 만큼 젊은이들의 왕성한 호기심이 마교수의 연륜이 녹은 표현들로 메울 수 있는 장이 형성되었으니 지금까지의 행로가 고생스럽지만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호불호가 명확히 갈리는 교수인 탓에 안티가 많긴 해도 그를 옹호하는 절대적인 지지자층도 확고하니 그동안 걸어온 가시밭길 역시 그의 역량을 보여주는 듯 해서 안쓰러움이 아닌 역사로만 느껴진다. 그가 욕을 먹는 이유는 외설적이거나 너무 솔직해서 뿐만이 아니라 순수해서 배려심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제 어른이니까 남을 배려하며 말 해줘도 될텐데 지금까지 보여진 완고함을 너그럽게 돌리면 변질됐다고 욕먹을 까 두려워서 일까? 아니면 강경하지 못한 주장은 스타일 구긴다는 생각 때문일까? 누군가 상처를 받든 말든, 본인이 욕을 먹든 말든 '타인에 대한 피해를 입히지 않기만'하면 일단 소리 지르고 보는 스타일인 탓에 그의 목소리는 시원스럽긴 하지만 불편하다. 사회적인 영향력이 전혀 없는 나같은 사람이야 그의 시원한 목소리를 즐기기에 편하지만 대내외적으로 솔직함만을 추구하기엔 지켜야 할 사회적 지위에 대한 필연적인 겉치레 속에 사는 사람들은 가끔 본인의 모순된 정치적 행동에 뜨끔하겠지. 성공하고 싶으면, 건강한 생활을 영위하고 싶으면 성욕을 충족시키라 음지에서 덮느라 급급해하지 말고 양지로 끌어올려 직시한다. 덮는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진정 덮는 이유가 무엇인지 제대로 마주하긴 해야할 것이 아닌가. 어째서 조명받지도 못했는데 매도당해야하나? 세상엔 그런 말도 안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그는 단지 자유로울 뿐이라고 말 하지만 어쩌면 본인이 예상치 못하는 사이에 사회적으로 제압당하는 약자들의 입장과 상황을 시원하게 긁어주고 있다. 원래 의도를 그대로 반영하는 행동의 결과가 가지는 의미는 해석하기 나름이니까 본인은 그럴 의도가 없다해도 말이지. 한번이라도 대화해보고싶다. 그가 지금까지 한가지 주장만을 펼치면서 분명 힘든부분이 있었을텐데 어떻게 지내왔을지 너무 궁금하다. 솔직히 '다름'에 불편한건 사실이다. 배려를 좋아하는 나는 그 무례함에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한다. 그치만 시원하고 공감한다. 내가 정의내린 적은 없는 나의 생각들을 말로 표현할 사회적으로 영향력있는 지식인이 필요한만큼 마광수의 언행은 사회에도 나에게도 필요악(까지는 아니지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