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 가이도 다케루의 메디컬 엔터테인먼트 1
가이도 다케루 지음, 권일영 옮김 / 예담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지금 우리나라엔 "하얀거탑"이라는 드라마가 인기를 얻고 있다. 이 드라마를 보며 일각에선 환자는 없고 의사만 있다고 성토하기도 한다. 의사 가운부터 침대시트 등 온통 배경이 하얀 곳이라 더 냉정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바티스타 수술팀"이 있는 공간 또한 '환자'가 없다. 다만 D(사망)라고 쓰인 카르테가 부각되며 죽은 환자에 대한 조사만이 있을 뿐이다. 죽은 환자에 대한 "유족들에겐 사과를 하겠습니다" 라고 변명하고 끝을 맺음은 생명을 경시하여 일어난 사태에 너무나 간단한 단 한줄의 사과인지라 한동안 멍한 상태가 되며 내 주위에서도 심심찮게 일어나는 일이라 화가 나게 된다.

의학드라마를 보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사람냄새가 나기 때문이 아닐까. 죽어가는 사람이 살아나고 또 기적이 일어나서 가망 없는 사람이 살아나게 되는 내용은 그 자체로도 가슴을 울리는 감동일테니까. '나에게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면서도  그런 상황이 되면 '나에게도 희망이 나타나길' 바라는 마음이 그곳으로 나의 시선을 잡아끌게 되는 것 같다. "좌심실 축소성형술"이라는 바티스타 수술의 용어는 난생 처음 듣는다. 뭐 다른 수술이라고 익숙한 용어들은 아니겠지만 먼저 현대의 의학기술의 발전에 박수를 보내고 싶어진다. 정말 가능한 이야기일까? 의문을 품으면서도 책속에 빨려들어가는 '나'는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된다.  

'의료사고'는 쉽게 다룰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명백히 일어나고 있는 문제이지만 쉬쉬하며 감추어지는 문제들이다. 환자의 입을 통해 가까스로 듣게 되는 누가 가해자고 피해자인지 갈수록 헷갈리게 되는 문제를 여기서는 메스를 들고 철저하게 해부해 나간다. '고도의 심리전' 다구치 선생이 바티스타 수술팀 한명 한명 면담할 때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으나 후생노동성의 "시라토리"가 투입되고 난 후부터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고도의 심리전이라는 전쟁을 치른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연이어 터지는 사망사고. 수술집도의 '기류'는 분명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다카시나 병원장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면서 이 사건은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충분히 위험성을 지니고 하게 되는 수술이라 수술중 있게 되는 사망사고라고 말할 수 있는 문제이나 분명 집도의는 과감하게 치부를 드러냈다. 누가 범인일까? 답답한 마음에 몇번이나 결말부분을 들춰보았다. 하지만 추리소설의 묘미를 자를수는 없는일. 하나씩 풀려가는 사건의 실마리들, 어느새 나는 시라토리의 괴변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의료사고'라고 생각한 나의 생각에 일침을 가하는 시라토리. 그의 접근 방식은 '살인'이라고 규정짓고 증거들을 놓치지 않으려 자신의 논리를 정리해 나간다. 살인이라니? 의료사고라고 생각할때는 일어날 수 있다는 가정하게 생각의 고리들이 막히나 '살인'이라고 규정짓고 바라보게 되는 증거들은 점차 윤곽이 잡히게 된다. 이 괴짜같은 인물은 뭐야? 이런 생각을 할때쯤이면 이미 시라토리의 마수에 걸려들었다고 보면 된다. 그의 괴변에 동조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나'는 뭔가? 참 혼란스럽지만 멋지다는 생각과 함께 명쾌한 그의 의견에 마음까지 상쾌해지는 듯 하다.   

끝까지 등장하지 않는 환자들. 카르테속에만 존재하는 그들을 보며 피해자임에도 오히려 단 한마디의 외침도 등장하지 않는 환자들이 내내 마음에 걸린다. 사건이 종결되며 발빠르게 대응하는 병원 관계자들. 어찌 보아야 할까? 한편의 연극을 보는 느낌이다. 손발이 척척 맞는 매스컴의 동조를 구하기 위해 대본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울화통이 치민다. 아마 내가 가진자가 아닌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약자이기 때문에 세상을 옹졸하게 밖에 바라볼 수가 없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트에 누워서 의사의 메스를 기다리는 환자는 '나'가 될 수도 있고 누구든 될 수 있는 문제이기에 추리소설이라고 하기엔 이처럼 매정한 사회에 왜 나는 괴리감마저 느끼게 되는 것일까?  

결말은 없다. 선이 이기고 악이 지는 구도 따윈 없다. 악이 졌다고 생각되는 '나'만 있을 뿐이다. 모든 일이 풀어지고 다 잘 되었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다. 사람냄새가 나지 않는 공간에 따뜻한 피가 흐르기를 바랄뿐이다. 가슴 섬뜩한 책을 읽어서 일까 따뜻한 커피 한잔이 생각나는 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태양의 노래
덴카와 아야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06년 11월
평점 :
절판


 울컥하고 가슴속에서 뭔가 나를 울린다. 책을 읽고 눈물을 흘려본지가 언제였더라. 심장이 따스해져 오는 느낌에 밤 늦은 시간 책을 읽는 이 시간이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책 표지가 노랗다. 태양의 빛을 온전히 받고 있는 소녀의 모습, 노래를 듣고 있는 이 소녀의 모습에 마음까지 따스해졌으나 '태양과 마주하고 싶던 바램'을 담은 듯 하여 이젠 가슴이 아파올 뿐이다.  

'색소성 건피증'이라는 말을 '가오루'의 입을 통해 듣고 나 역시 생전 처음 듣는 희귀병에 마음이 산란해진다. 죽음 앞에 어찌 이렇게 담담할 수 있는지. 그래 알고 읽는 거니까 어떻게 될지 결말을 대충 유추할 수 있으니까 오히려 내가 더 담담하게 대할 수 있음에도 '가오루'의 남은 시간들에 내 자신이 더 조바심을 내고 안달하게 되었다. 아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녀가 결코 원하지 않는 동정심을 가진 것이다. '가오루' 곁에는 마지막까지 함께 해 주는 사랑하는 사람 '코지'와 부모님이 있음에도 왜 난 그녀가 안되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일까. 내가 결론내린 행복의 조건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행복하게 늙어가야 하는 조건을 '가오루'가 그렇게 원하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이기에 나는 그녀가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미리 판단해 버린 것이다.  

얼마나 독선적인 생각인가? 태양을 마주할 수 없었지만 모두의 마음의 태양이 된 '가오루'가 왜 행복하지 않았겠는가. 최고의 성공한 삶을 누릴 수 있지만 그것을 놓아버려야 하기에 오히려 내가 물욕에 차서 그녀를 가엾게 여긴 것 뿐이다.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인생길에 죽음을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은 작은 행운일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변화하는 하루들을 느끼면서 얼마나 미안했을 것인가. 얼마남지 않은 생이기에 아끼는 사람들에게 아픔을 남겨줘야 하는 시간들은 그녀에게 가슴 휑한 외로움의 시간들일 것이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생을 정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 보내야한다는 생각으로 묵묵히 책을 읽어가던 내가 어릴때부터 함께한 친구 '미사키'를 결혼할 사람인 '교스케'에게 인계해주는 장면에서 눈물을 흘려버렸다. 언제나 함께 하리라고 믿은 친구가 떠나가는 모습은 꼭 아버지가 결혼을 앞둔 딸을 사위에게 '"잘 부탁한다"는 당부와 함께 손을 건네주는 장면 못지 않게 마음이 아려온다. 자신이 떠날 생각만 했었지 아마 누군가를 떠나 보내야하는 일은 전혀 생각도 못했나 보다. 당황하면서도 의연하게 보내주려 애쓰는 모습은 "행복하게 해 주지 않으면 죽, 죽....." 말을 잇지 못하는 '가오루'처럼 나도 목이 메어 온다.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라도 혼내주러 올 거예요" 라는 말을 뱉으면 꼭 금방 죽을 듯 하여 '죽음'이라는 단어조차 입에 담는 것이 두렵기만 한 모습에 '가오루'에게 어떤 위로의 말도 할 수 없는 난 가슴만 먹먹해져 올 뿐이다. 

태양과 함께 할 수 없는 '색소성 건피증'은 그녀에게 다른 삶을 살아가게 해 주었지만 밤하늘에 울리는 그녀의 노랫소리로 인해 많은 사람이 삶에 희망을 느꼈듯 나도 그 노래를 가슴으로 들으며 태양의 따사로움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내 귓가에 들려오는 이 노래소리가 '희망의 메세지'로 남아 나만을 위한 노래라고 착각하게 만들어 그녀의 사랑을 받은 '코지'가 한없이 부러운 시간들이었다. 그녀의 노랫소리가 들린다면 아마 누구든 태양을 가슴에 안은 듯 마음이 행복으로 충만해 질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오의 무전 여행 - 세상을 바꾼 혁명가의 젊은 시절
샤오위 지음, 강성희 옮김 / 프리미어프레스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국어 선생님께서 "아직 정신이 미숙한 여러분은 '태백산맥'을 읽지 마세요"라는 말씀을 하셨다. 입시 준비를 하느라 교재 외에 읽을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책 한자 읽지 않던 시절이었다. 시험이 끝나고 읽게 된 "태백산맥"은 그리 유쾌한 책은 아니었다. 책을 덮었다가 읽기를 반복하는 시간들을 거치면서 우리나라의 역사를 되짚어 보고 죽어간 사람들 때문에 마음이 아파왔었다. "마오의 무전여행"은 "태백산맥"과 다른 내용이긴 하지만 역시 '사상'적인 괴리감에  쉽게 읽어지지 않은 책이었다.  

역사적으로 마오쩌둥은 산적인가? 영웅인가? 역사는 승자가 쓴 글이므로 부풀려지고 덧붙여지게 마련이라 그저 산적과 영웅 둘을 나누는 경계선은 그들의 끼어듦이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라는 말에 공감이 간다. '사상'이 녹아든 책은 일단 거부부터 하기 마련인데 최대한 마오쩌둥에 대해 담담히 풀어낸 샤오위의 글은 한 시대를 살고 간 인물이기에 그저 외면하며 도리질 치며 보지 않겠다고 하기엔 어린애 같은 행동이라 그저 인간과 역사에 대해 알고자 하는 욕구로 책을 들게 한다.  

샤오위와 마오쩌둥이 함께 떠나는 여행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 한달여간의 긴 여행 '거지여행'이라 이름붙은 이 여행의 목적은 한계에 부딪쳤을때 어떻게 헤쳐나가는지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 서로의 생각들을 토론하고 기록하며 함께 하는 시간들은 샤오위의 기억속에 오래도록 남아 '마오의 무전여행'이라는 제목을 붙이면서 마오쩌둥과 함께 한 시간을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지만 순수하고 열정이 가득한 한 혁명가의 숨겨진 이야기라는 느낌이 안드는것은 왜일까 이미 내가 마오쩌둥의 일생이 어떠했는지 알고 있어서일까 냉철하고 감정이 없는 잔인한 독재자로 불리운 마오쩌둥의 무전여행이 담담하게 읽혀지지 않는다.   

절친한 친구인 샤오위와 마오쩌둥의 '사상적 대립'은 각기 다른 길로 인도하지만 그 시대가 만든 길이기에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된 두사람의 "무전여행"은 그래서 슬프게 다가온다. 우리나라가 짊어지고 있는 문제이고 21세기를 살아가지만 끝나지 않은 역사를 외면할 수 없기에 이 논제는 늘 가슴아프게 하고 말하기조차 거부하게 만든다. 정치적 격변기에 살아보지 않은 내가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그저 입으로 전해지고 글로 쓰여진 책을 통해 알아갈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샤오위의 글은 사실에 입각하여 쓰여져 역사를 알아가는데 큰 도움이 된다. 

지금 세계는 변해가고 있다. 시대도 참 많이 변했다. 예전에는 이런 책을 읽기조차 두려워 하던 시절이 있었을 것인데 언제 그랬냐 싶게 자유롭게 탐독할 수 있는 시절이 왔으니 말이다.  '공산주의'라는 말조차 꺼내기 거북해지고 어린시절 반공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해 행해온 많은 일들은 이제 옛추억이 되어 버렸다. 언제 그랬냐 싶게 까마득한 옛일이 되어 가고 있다. 역사의 한부분이긴 하지만 슬픈 모습이기에 담담히 읽혀지지 않는 "마오의 무전여행"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현명하게 세속적인 삶
복거일 지음 / KD Books(케이디북스) / 2006년 12월
평점 :
품절


살아오면서 음식만 편식해서 섭취한 것이 아니었다. 복거일님이 누군지도 모르고 집어든 책 다수가 아는 작가임에도 난 처음 대면하였다. 왜이리 부끄러워 지는 것일까? 어떤 세속적인 삶이 놓여져 있을까 궁금하지만 지식조차도 먹고 싶은 것만 섭취한 내가 정면으로 대면할 수 있을지 살며시 책장을 넘겨본다. 

담담하게 자신의 마음을 펼쳐 보이는 글들 속에 고개 끄덕여 들여다 보는 나도 어지간히 세속적인 모양이다. 하지만 "세상이 어지러운 속에서 다른 사람들이 도덕과 규칙을 가볍게 어기는 상황이라 혼자 그것들을 지키는 것은 짐이 되고 때론 손해가 되는 것임을 알지만 그래도 도덕과 규칙을 지키는 것이 어기는 것보다 낫다"는 이야기는 많은 규칙들을 내심 모른체하며 어기면서 살아온 나에게 조금의 면죄부를 주는게 아닐까. 하지만 담담히 풀어놓은 일상의 이야기들과 사회적 문제들 끝에 생각의 꼬리를 남겨두는 이유는 "현명하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해답을 보여주려 함인 듯 하다. 쉽지 않게 다가오는 논제들이다. 3부까지 이루어진 짧은 글들을 읽노라면 가슴속에 잔잔한 파문이 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1. 나무타기의 비결 

내가 살아가면서 나이 들어 늙을 것이라는걸 알고 있음에도 꼭 그 시기가 오지 않을 것처럼 맹렬하게 살아가다 보면 어느새 머리는 하얗게 눈으로 덮히고 인생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젊음'이란 무엇을 시작해도 될 패기가 있고 꿈이 있으나 황혼의 나이에 이르면 제 2의 인생을 살기조차 두려워지고 점점 위축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회한의 시간을 갖기조차 힘들지만 '하산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할 시기이기도 하다. 오지 않을 것 같아 외면했던 시간이지만 정면으로 부딪쳐 올라가기보다 힘든 내려오는 길에 발을 헛딛지 않게 조심스레 내려오기 위해선 누구보다 세속적으로 살아온 자신의 인생과 대면해야 하기에 더 어려운 시간들이 될 것이다. 부모로서 '나', 자식으로서 '나', 사회적 존재로서 '나'는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모습들 속에 무엇을 찾을 수 있는지 성찰해야할 시기인 것이다.  

2. 예술은 사소한 것이다. 

예술가만큼 세속적인 논제에 크게 부딪치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예술을 택하자니 현실을 버려야 하고 현실을 택하면 예술을 버려야 하는 삶에서 현실에 적용할 물질적 수단을 지니지 못한 예술은 그래서 버려야 하는가? 하지만 비극과 재앙, 불행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예술은 한줄기 빛으로 위안으로 다가올 수도 있기에 어느쪽에 서야하는지 무엇을 위해 애써야 하는지  현실에선 정확한 해답을 찾을 길이 없다. 마음의 안식을 줄 고향냄새가 물씬 나는 풍경화 한점 들여놓을 여력이 안되는 삶이고 보면 고향을 찾아 발길을 옮기는 것조차 힘들어지는 현실이다. 도시가 생겨나고 먼길 오고가는 기차가 생기면서 먹고 살기 힘들어 마을을 떠날 수 밖에 없어 평생을 태어나 자라고 늙어 내 몸을 쉬게할 고향산하를 떠나야 함에는 그림같은 전원생활은 요원하고 그저 세속적인 아주 각박한 삶만 놓여있을 뿐이다. "사회참여"의 논쟁들 속에 그래서 예술은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는가 보다.   

3. 비명과 수의 

살아남아서 자식들을 남기기 위해 사는 삶은 힘들기도 하지만 작은 행복을 느끼는 시간들이다.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출가하여 손주를 보는 단란한 삶이지만 더 살고자 하는 몸부림은 행복하기에 더 놓기 힘든법이다. 세속적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키우는 자녀들도 지극히 세속적일수 밖에 없지만 내 한몸 묻힐 땅도 없는 세상에 좋은 옷입고 떠난들 기쁘게 그 길을 갈 수 있을까. 평소에 즐겨입는 옷을 입고 떠나도 될 길이지만 좋고 비싼 수의를 입혀드려 다음생을 위하는 자식들 마음이야 누가 세속적이라고 할 것인가. 하지만 살아가는 동안 100원하나 허투루 쓰지 못했던 삶이고 보면 죽어 가는 길은 화려하다 할 밖에. 이것이 세속적이라 말할 사람 누가 있을까 가는 길 검소하게 보내면 그게 더 세속적이라고 손가락질 하는 세상이고 보면 말이다. 

짧고 긴 이야기들은 두서없이 일기식으로 나열되어 있으나 전체적인 내가 본 세 단락의 맥락은 이렇다. 오로지 작가의 생각과는 다른 나만의 생각이지만 지극히 세속적인 내 모습에 실망한 시간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게 살고 있고 조금 현명하게 세속적으로 살고자 노력해야 하는 현실이 서글퍼지기도 했지만 평생을 도덕과 규칙속에 살아가야 하는 '나'이고 보면 100% 지키고 산다는 약속도 할 수 없음에 그저 현명하게 살고자 노력할 뿐이다. 저자처럼 삶을 반추하며 자신에게 던질 물음이 많아질 나이가 되면 이 물음표에 답도 그땐 쓸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쓰여질 답들을 위해 하루하루 도덕과 규칙을 지키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옛말씀에 도덕적 삶은 자체로 보답이라고 하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사 스튜어트 아름다운 성공 - 살림의 여왕, 그녀의 10가지 성공 법칙
마사 스튜어트 지음, 김종식 옮김 / 황금나침반 / 2006년 12월
평점 :
품절


 모든 일에 자신감이 있으면 이렇게 환하게 웃을 수 있는 걸까? 그녀의 당당한 모습은 감히 내가 범접할 수 없는 빛에 휩싸여 눈뜨고 바라볼 수가 없을 정도다. 어린시절 모델로 활동한 사항을 빼면 다른이들과 다른 특이한 점이 없어 보여 어쩌면 비슷한 조건에서 같이 출발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현재 "마사 스튜어트 리빙 옴니미디어"를 설립한 백만장자의 기업가가 되어 있다. 단지 여러가지 일을 다양하게 해 보고 실패를 경험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열렬하게 연애하듯이 한 열정이 지금의 그녀를 낳은 것이다. "마사 스튜어트 리빙"의 출간이후 200만 부가 넘는 독자를 확보하고 유명세를 타고 있는 그녀이지만 이 책을 통해 독자를 끌어들이는 시도는 미흡해 보인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자신의 빅 아이디어를 이용해 최고의 전문가가 되기 위하여 탐독한 그녀의 책을 통해 얻은 정보들에 감사하고 박수를 보낼지 모르지만 난 그녀가 전하는 메시지의 반도 와 닿지 않으니 이게 무슨일인지 모르겠다. 그냥 이 삶에 안주하고 싶은 것일까.

성공한 사람들의 삶을 엿보고 그네들의 성공스토리를 듣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이다. 삶에 활력을 주고 나 자신을 채찍질 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것을 주려함인가? 두서없이 나열된 그녀의 말들은 어느 한곳에 집중하기 힘들고 너무나 많은 정보의 범람에 난 그냥 물 속으로 가라앉아 가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10가지 성공법칙을 따가가다 보니 그녀 주위에 많은 사람들의 예를 통해 아주 많은 정보를 주기 위해 노력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물론 "마사 스튜어트 리빙 옴니미디어"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 또한 절절하게 느낄 수 있기도 하다. 그녀의 열정이 부럽지만 '그녀의 삶만 볼 수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독자에게 받은 무수히 많은 편지들로 인해 힘을 얻고 더 발전하고 있는 마사 스튜어트의 모습은 분명 고객과 가장 가까이에서 고객이 원하는 "마사 스튜어트 리빙 옴니미디어"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모습일 것이다. 이것은 내가 따라갈 수 없는 그녀의 열정적인 모습이다. 

책을 읽고 있노라면 유독 눈에 띄는 단어가 있다. "빅 아이디어"다. 다른 글씨들과 다르게 희미하게 인쇄되어 있음에도 주위와 다르기에 확연히 눈에 띈다. 이 책의 키워드다. 살림살이 같은 평범한 일에서조차 무심히 넘기지 않고 빅 아이디어를 얻어 크게 자라난 마사 스튜어트와 비교해 난 제자리에서 아직 움츠러들어 뛸 생각조차 않는 멈춰진 인생을 살아간다는 자괴감을 느끼게 한다. 이렇게 비교분석을 통해 나를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시간들이었다면 좋았을텐데 내가 바라보기엔 너무 먼 당신이다. 어쩜 남편이 이 글을 본다면 "좀 더 노력해 볼 생각없냐?"고 따지고 들 것 같아 보여주기도 두려울 듯 한 내용들이다. 이정도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련들이 있었을 것인가. 실형을 선고받고 수개월 수감생활을 한 그녀이고 보면 분명 시련의 시기도 있었지만 결코 좌절하지 않고 더 멀리 뛰기 위해 자신을 낮춘 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멋진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 석자를 남겨야 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어깨 쫙 피고 당당히 걸어가도 된다. 나같이 삶에 안주하고 더 높은곳에 가고 싶다는 소망만 가진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성공법칙 10가지를 알려주다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살아가면서 빅 아이디어를 계속 창출해 내 사업을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꼭 읽어야할 필독서이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듯이 아주 큰 아이디어라도 자만하여 크게 시작하면 안된다고 경고하고 있으니 작은 삽 하나 들고 원예사업을 시작하더라도 주춧돌 세우기를 탄탄히 하라는 그녀의 말을 귀담아 듣길 바란다. 그러면 당신의 삶은 멋진 사업가로서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