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 1 (1부 1권) - 왕도(王道), 하늘에 이르는 길
최인호 지음 / 열림원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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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가기를 무척이나 소원하는 나는 우리나라의 산천 여기저기 발자국을 남기지 못한 곳이 많다. "심신이 지쳐있다며 여행가고 싶다"를 외쳐 부르지만 막상 떠나려고 하면 갈 곳을 정하지 못한채 여행사가 이끄는대로 테마여행을 다닌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일까. '조광조'의 유적을 찾아 떠나는 작가의 여정에 난 심히 부끄러워진다. 문화재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 해 보았자 그저 학창시절 수학여행으로 여러군데 돌아다닌 것뿐 스스로 '가야겠다' 생각을 하여 찾아나선 적은 없으니 말이다. 문화재 탐방을 떠난다고 해도 지식이 전무하여 과연 제대로 보고 올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렇듯 저자와 함께 '조광조'의 자취를 찾아다님은 왠지 나도 '조광조'의 모습을 직접 대면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며 그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적려유허비'

능주로 귀양 가서 죽은 조광조를 기념하는 비가 세워져 있는 곳이다. 5백 년 전의 일이지만 그 흔적을 찾기 위해 저자의 발걸음을 바삐 쫓아 가면서 듣게 되는 그는 실패한 정치개혁자가 아닌 올곧은 선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는 '조광조' 과연 이상은 높았으나 행동이 지나치게 성급하였던 것일까. 그러나 이처럼 목숨을 내 놓고 체제 개혁을 단행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조광조의 정치철학이 실패했다고 도덕주의에서 출발하는 그의 정신마저 사장시키기엔 그 죽음이 너무나 처연하다.  

지조있고 의로운 모습, 재물을 탐하지 않고 은둔하여 학문에만 정진하는 모습이 우리들이 생각하는 선비의 모습일 것이다. 이것으로 보자면 조광조는 정치에 입문하여 세상에 발을 내딛였으니 선비의 정신이 탁해졌다며 손가락질 하는 무리들도 있겠으나 탁한 물에서 그 시류에 섞이지 않고 곧은 정치를 펼 수 있다면 이또한 세상에 태어나 큰뜻을 품고 세상에 나아갈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중종의 마음을 얻을 수 없었던 그는 4년여만에 사약을 받는다. 이렇게 짧은 기간밖에 뜻을 펼칠 수 없음을 알았다면 그래도 중종을 도와 체제 변화를 꾀했을 것인가? 죽은 사람에게 대답을 들을 순 없지만 그의 개혁정신을 보건대 아마 '그렇다'일 것이다. 짧은 기간 많은 것을 변화시키려 무리한 행보를 했을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세상을 잘못 태어나 그의 이상을 펼칠 수 없었음에 통탄할 일이니 지금 그가 있다면 많은 업적을 남기며 존경받는 정치가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당파싸움으로 의로운 사람들이 뜻을 펴지 못하고 희생당하던 그 시절. 지금도 그 못지 않게 밥그릇 싸움을 하는 정치상황을 보고 있노라면 지금이 춘추전국시대가 아닌가 하는 작가의 의견에 동감하게 된다. 왜 이렇듯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일까. 그 밑에 숨죽이고 있는 민초들만 불쌍할 뿐이다. 먹고 살 걱정에 허리 펼 시간조차 없는 그들이니 그 누가있어 따뜻하게 어루만져 줄것인가. 하루가 다르게 뻗어 올라가는 빌딩들. 황폐한 황무지 사막같은 이곳에 놓여 숨쉬기조차 곤란한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우리의 모습은 빌딩들에 갇힌 '조광조'의 유적들과 별반 다를바 없는 신세여서 올곧고 강직한 모습을 한 그가 그리워진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당당한 모습, 공자의 사상으로 낡은 정치를 개혁하고자 하였던 선각자, 공자의 사상을 현실정치에 접목시키려고 애쓴 그를 실패한 정치개혁자라 부를 수 있을까. 눈 내리는 날이 오면 그가 마지막 떠나던 날 모습이 생각나 마음이 울적하여 술 한잔 기울이고 싶은 겨울날이 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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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당신에게 - 흔들리는 청춘에게 보내는 강금실의 인생성찰
강금실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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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그녀가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비틀거릴때 H부장이 선물한 시집인 <흔들리며 피는 꽃>에 있는 내용이다. 지금의 내가 처한 상황이 비틀거려야 할 정도로 마음속으로 힘든일도 없는데 왜 이 말이 책을 덮고 나서도 마음에 오래 머무는 것일까. 아마 "강금실"이라고 하면 첫 여성 형사 단독 판사, 첫 여성 법무부 장관 타이틀을 쥔 사람으로서 단단해 보이는 사람이라 이런 약한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책을 읽을수록 그녀도 나와 같이 감정이 있는 희노애락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감히 오르지 못할 저 높은 곳에 있으나 소주 잔이라도 놓고 아무말없이 같은 공간에서 머물러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그런 사람으로 기억 되어진다. 

한달을 넘겨 배우는 게 거의 없을 정도로 끈기가 없고 잠이 많은 것을 보면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 낼 것 같은 그녀가 아주 인간답게 다가온다. 그녀가 겪은 서른즈음은 내가 초등학교(그시절엔 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이라 사회적 변화를 몸소 느낄 수 있는 세대는 아니었으나 지금 내가 서른을 넘겨 서른즈음이 어떠했는지 돌이켜 생각해 보니 확신없던 그 시기에 이 책을 읽었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내 앞에 큰 산이 막혀있어 인생의 길이 보이지 않고 구비구비 넘어야 할 산들이 많으나 서른즈음엔 특히나 생각이 많았던 시기였다. 결혼을 해서 안정적인 가정을 이룬 것도 아니었고 직장에서 성공한 삶도 아니었었다. 새로운 분야가 내 길이라고 외치며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세계에 뛰어 들었을때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으나 그 꿈을 이루었다는 자기만족을 위해 한발 내딛였다는 것을 알았을때 내 마음은 또 지옥이었다. 그리고 눈앞에 또 큰 산이 버티고 있었다.  

한고개 넘겼다고 생각하고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드니 또 고개가 보인다. 인생은 무한히 놓여있는 이 고개를 넘어가는 여정이고 단지 받아들이는 마음자세에 따라 그 고갯길이 즐겁기도 하고 험난하기도 한 모양이다. 법조계에 몸 담고 있으면서 타인의 인생에 관계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확신을 가지고 살아온 인생이 어떻게 변화되는지 그녀의 글을 통해 담담히 읽고 있노라면 마냥 부러워만 한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주위에 조력자가 많은 그녀의 삶을 보고 있으면 산사에 있는 듯 나까지 마음이 평온해져 오고 인생무상 먹물옷을 입고 절에 머무르고 싶은 마음까지 들게 된다. 한권의 책으로 나는 마음의 위안까지 얻고 있나 보다.  

마흔쯤 되신 분께 "그 나이 되면 인생이 보이냐?"고 물은적이 있다. 너무 갑갑하고 미래가 불확실하여 어디로 흘러가는지 도통 알 수가 없기에 답답한 마음에 물었는데 "이 나이 되어도 보이는게 없다"는 말을 듣고 망연자실 '북망산에 올라야 인생이 보이겠구나' 생각한 적이 있었다. 마흔즈음엔 어떤 인생을 이야기 하게 될까. 나의 서른즈음은 손아귀에 흘러내리는 모래알 같은 인생을 경험하였다면 그때쯤엔 마음의 평화라도 손에 들어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표지에 있는 미소띤 모습의 그녀는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그 말에 당당히 나서도 될 듯 아주 평온한 모습이다. 찡그리고 화난 얼굴이 아닌 나도 중년의 나이에 그녀처럼 잔잔한 미소가 머무르는 얼굴이 되었으면 하고 소망해 본다. 작은 소망이지만 이루기 참 힘든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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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인희의 북유럽 신화 2 - 죽음의 예언에서 라그나뢰크까지, 영원한 상징의 세계
안인희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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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빛깔이다. 무지개? 어렸을 적 무지개의 일곱빛깔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외울 정도로 되뇌었지만 정작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한 것 같다. 비온 뒤 맑게 개인 하늘에 뜨는 무지개를 왜 못 본 것일까? 지금은 아마 공기오염도가 심각하여 보지 못하겠지만 신들이 살던 그 시대엔 무지개를 선명하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신의 세계인 '아스가르트'로 가는 다리라는 것을 누가 알기나 했을까. 인간은 건널 수도 없지만 막상 건넌다 하여도 파수꾼인 '하임달'에게 꼼짝없이 붙들릴 것이다. 혹 그곳의 1분이 현재의 100년은 아니겠지? 내가 '전설의 고향'을 너무 많이 본 모양이다. 그래도 그곳에 가고자 하는 사람은 잘 알아보고 가기 바란다. 현재에 돌아왔을때 아는 인물이 하나도 없으면 슬플테니까.

그리스 로마 신화라면 '제우스'신을 비롯하여 여러 명의 이름을 들어봤으나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은 생소하기 그지 없다. '오딘, 토르, 프라야, 로키' 등 어떻게 이렇게 아는 이들이 없을까. 여기에 등장하는 신들 중 '오딘'은 그 서열이 '제우스'쯤 된다. 모든 세상을 굽어보고 모르는 것이 없으니 따분하기 이를데 없는 신들의 세계일 것 같으나 말썽꾼 불의 신 '로키'로 인해 사건이 끊이지 않아 골치를 썩는다. 로키로 인해 다른 신들이 세상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니 영화로 본다면 아마 '로키'는 비중있는 조연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로장생의 비법이라도 알아 낼 수 있다면 물불 가리지 않고 덤벼들 사람들 많을 것이다. 물론 나도 죽음에 대한 공포때문에 거기에 기꺼이 동참한다. '신'의 영역에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탐나기도 하지만 영원성을 지닌 생명 때문에 그 능력을 갖고 싶어하게 되는 듯 하다. 하지만 이들 신들도 나이를 먹고 소멸을 한다. 믿기지 않는가? 태초에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그들도 소멸하는 것이다. 인간과 다르게 아주 아주 더디게 나이를 먹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들도 신들의 최후인 '라그나뢰크'를 예견하면서도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신'이 못하는 일도 있다니 참 아이러니 하지 않는가. 물론 죽음 너머의 삶도 알고 있는 그들이고 보면 그리 두렵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바네 신들과의 전쟁에 이겨서 얻은 기득권을 놓아버리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방대한 양으로 인해 몇편의 내용을 기억하기도 힘들었으나 북유럽 신화는 가족의 테두리 안에서 내용이 전개되는 듯 하여 그 울타리 안에서 더 가깝게 다가오는 듯 하다. 물론 저자의 반복적인 설명으로 이해력이 높아지기도 했지만 이 반복성으로 인해 글의 흐름을 방해하여 책 읽기의 즐거움을 잠시 늦추게 되기도 했다. 북유럽 신화를 찬찬히 읽다 보면 '반지'를 주제로 다루는 내용이 간간히 등장하게 된다. 욕망을 대변하는 '반지'의 존재로 인해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기도 하나 '지니고 있으면 죽게 된다'는 저주에도 불구하고 반지를 갖기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모습은 지금의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헛웃음이 나오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물질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나 보다. 이 저주 받은 반지가 어떻게 영웅 지구르트의 손에 가게 되는지 궁금한 분이라면 빨리 이 책을 펴보길 권한다. 시공을 초월한 장소에 내가 서 있음을 느낄 땐 이미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있을 것이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릴은 없지만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만드는 신들의 이야기에 푹 빠져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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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시에서 길을 만나다
로저 하우스덴 지음, 정경옥 옮김 / 21세기북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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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밑줄 긋고 여기서 상징하는 바는...." 하시던 국어선생님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즐거웠던 기억보다 입시의 압박으로 인해 괴로웠던 기억이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터라 '시'라고 하면 대학을 가기 위해 시험을 치르고자 공부했던 영역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사는 것이 바빠서 먹고 살기 힘들다는 변명을 하면서 문학분야로는 등한시 하며 살아온 세월이었으므로 '시'를 접한다는 것은 어쩌면 양어깨를 강하게 내리 누르는 부담을 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시'를 읊는 사람들은 어쩐지 나와 다른 세상을 사는 듯 하여 '시'와 함께 하는 삶은 왠지 감히 건드려선 안되는 신성한 성역 같은 느낌도 든다. 시인들이 바라보는 세계는 내가 사는 세상과는 달라 보인다. 같은 꽃을 바라보고 있어도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운 단어들을 나열하는 그들이고 보면 세상이 얼마나 빛나 보일까 싶은 생각이 들지만 인생의 고통 또한 시로써 표현하는 것을 보니 희노애락의 모든 것들이 '시'속에 녹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게 해준다. '시'를 읽다보면 작가가 나타내고자 한 바가 무엇일까 머리아프게 생각해도 도무지 알 수 없는 것들이 태반이다. 내가 이해했다고 하는 '시'들도 어쩌면 작가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인생을 주제로 한 10편의 시를 보여주고 친절하게도 작가가 표현하고자 한 바가 무엇이었는지 해설을 첨부한다. 그렇다고 쉽게 다가오지 않을까 생각한다면 안될말이다. 해설조차도 어렵게 다가온다. 어쩌면 '시'를 표현한 사람들의 살아온 인생을 함께 알지 못함에 많은 것을 알아차리기 힘들지도 모른다. 단편적인 모습만으로 '시'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하지만 내가 느낀 그대로 그 '시'를 받아들인다면 내가 처한 상황이 힘들어 죽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다시 살아가고자 하는 의욕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시'들중 내게 그나마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시'는 네루다의 "내 양말에게 바치는 송시"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어찌 다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읽으면 읽을수록 그 깊이를 알 수 없게 되어 버린다.

그저 하찮게 여기는 물건인 양말에게 송시를 바치다니. 왜 하필 양말이냐고 물을 사람은 많을 것이다. 나또한 그러했으니. 하지만 내가 소유한 모든 물건들이 당연히 내것이 아님을 생각해 본다면 이해못할 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태어났고 죽을때조차 내가 가져갈 수 있는건 옷 한벌일 것이다. 그런 나에게 양말은 소중히 생각해야할 소유의 개념이 아닌 나의 곁에 있어주는 귀중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비록 '시'를 읽으며 특별히 좋아하는 양말을 옆에 두고 읽지 못했지만(그렇게 해 보라고 했는데) 내 식으로 이해한 이 시의 존재감은 다 느꼈다고 말해두고 싶다. 작가의 의도와는 다르다 해도 말이다.   

'시'를 보면 그 시대의 모습이 보인다고 한다. 아니 어떤 문학작품속에서도 그 시대의 잔상은 남아있을 것이다. 아주 오래전 '시'들을 지금 현재 내가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무한히 축복할 일이나 내 그릇이 이들을 담아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 못했음에 서글퍼진다. '시'는 멀리 해야할, 마음먹고 읽어야할 분야가 아닌 것이다. 내가 말하는 모든 단어와 문장들이 하나의 '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비록 아름답게 표현하거나 애절한 마음을 담고 있지 않다고 말할지라도 말이다. 이 책에 보여지는 '시'들은 인생을 노래한다. 모든이의 삶에 녹아있는 인생을 노래하는 것이다. 한줄의 '시'로 인해 내가 가진 기존의 질서를 깨고 뛰쳐나갈 수도 있음을 깊이 공감한다. 분출할길 없는 내안의 모순 덩어리들을 뱉어낼 수 있다면 주위에서 현혹하며 사회에 편승하기 원하며 하게 되는 모든 언어들에 거부하며 내가 생각했던 인생의 행보를 완전히 바꿀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러지 못했다. "10편의 '시'들로 과연 그리 될수 있느냐?"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 한줄의 문장만으로 인생은 충분히 바뀔 수 있으므로. 그러나 난 현재에 만족하고 그저 이 '시'들을 마음이 아닌 머릿속에 담아버렸다. 나중에 왜 그랬을까 후회할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저 '시'를 몇편 읽은 것만으로 만족하려고 한다. 앞으로 많은 '시'들이 내 인생을 바꿔주길 기대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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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인희의 북유럽 신화 1 - 신들의 보물에서 반지전설까지, 시대를 초월한 상상력의 세계
안인희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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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빛깔이다. 무지개? 어렸을 적 무지개의 일곱빛깔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외울 정도로 되뇌었지만 정작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한 것 같다. 비온 뒤 맑게 개인 하늘에 뜨는 무지개를 왜 못 본 것일까? 지금은 아마 공기오염도가 심각하여 보지 못하겠지만 신들이 살던 그 시대엔 무지개를 선명하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신의 세계인 '아스가르트'로 가는 다리라는 것을 누가 알기나 했을까. 인간은 건널 수도 없지만 막상 건넌다 하여도 파수꾼인 '하임달'에게 꼼짝없이 붙들릴 것이다. 혹 그곳의 1분이 현재의 100년은 아니겠지? 내가 '전설의 고향'을 너무 많이 본 모양이다. 그래도 그곳에 가고자 하는 사람은 잘 알아보고 가기 바란다. 현재에 돌아왔을때 아는 인물이 하나도 없으면 슬플테니까.  

그리스 로마 신화라면 '제우스'신을 비롯하여 여러 명의 이름을 들어봤으나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은 생소하기 그지 없다. '오딘, 토르, 프라야, 로키' 등 어떻게 이렇게 아는 이들이 없을까. 여기에 등장하는 신들 중 '오딘'은 그 서열이 '제우스'쯤 된다. 모든 세상을 굽어보고 모르는 것이 없으니 따분하기 이를데 없는 신들의 세계일 것 같으나 말썽꾼 불의 신 '로키'로 인해 사건이 끊이지 않아 골치를 썩는다. 로키로 인해 다른 신들이 세상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니 영화로 본다면 아마 '로키'는 비중있는 조연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로장생의 비법이라도 알아 낼 수 있다면 물불 가리지 않고 덤벼들 사람들 많을 것이다. 물론 나도 죽음에 대한 공포때문에 거기에 기꺼이 동참한다. '신'의 영역에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탐나기도 하지만 영원성을 지닌 생명 때문에 그 능력을 갖고 싶어하게 되는 듯 하다. 하지만 이들 신들도 나이를 먹고 소멸을 한다. 믿기지 않는가? 태초에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그들도 소멸하는 것이다. 인간과 다르게 아주 아주 더디게 나이를 먹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들도 신들의 최후인 '라그나뢰크'를 예견하면서도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신'이 못하는 일도 있다니 참 아이러니 하지 않는가. 물론 죽음 너머의 삶도 알고 있는 그들이고 보면 그리 두렵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바네 신들과의 전쟁에 이겨서 얻은 기득권을 놓아버리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방대한 양으로 인해 몇편의 내용을 기억하기도 힘들었으나 북유럽 신화는 가족의 테두리 안에서 내용이 전개되는 듯 하여 그 울타리 안에서 더 가깝게 다가오는 듯 하다. 물론 저자의 반복적인 설명으로 이해력이 높아지기도 했지만 이 반복성으로 인해 글의 흐름을 방해하여 책 읽기의 즐거움을 잠시 늦추게 되기도 했다. 북유럽 신화를 찬찬히 읽다 보면 '반지'를 주제로 다루는 내용이 간간히 등장하게 된다. 욕망을 대변하는 '반지'의 존재로 인해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기도 하나 '지니고 있으면 죽게 된다'는 저주에도 불구하고 반지를 갖기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모습은 지금의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헛웃음이 나오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물질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나 보다. 이 저주 받은 반지가 어떻게 영웅 지구르트의 손에 가게 되는지 궁금한 분이라면 빨리 이 책을 펴보길 권한다. 시공을 초월한 장소에 내가 서 있음을 느낄 땐 이미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있을 것이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릴은 없지만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만드는 신들의 이야기에 푹 빠져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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