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원은, 나였다
곽세라 지음 / 앤의서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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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그 긴긴 겨울 내 마음을 스치고 간 풍경들을 매일 어딘가에 적어야 했다.'나'인 채로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마음이 내 모양을 잃지 않도록 나는 겨울 강의 오리처럼 소심하게 발버둥쳤다. (-4-)



아하하하,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술을 마시길 잘했어. 아주 잘했어. 뒤틀린 마음이 꿈틀거리며 쓰라리게 신이 났다. 먹물색 축포가 터져 내 심장을 시커멓게 뒤덮었다. 브라보! 내가 말했지?언젠가는 세계를 제패할 거라고. 봐, 암 챔피언이 되었어.세계 신기록이라고! (-21-)



물줄기 속에 갇힌 채 나는 또 웃었다. 이유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간호사가 옳았다. 이것은 차원이 달랐다. 의사들의 수술복과 똑같은 푸른색의 스펀지를 물에 적시자 당황스러울 정도로 거품이 솟아났다. 그 거품에서는 굳이 숨기려 들지 않는 소독액 냄새가 났고 정직하게 코를 찔렀다. (-59-)



그래서 ICU 에 있었던 7일과 회복 병동에 있었던 한 달 동안 나를 아는 누구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대신 아빠가 왔다.

수술에서 깨어난지 이틀 째 되던 날이었다. 아빠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91-)



눈으로 훏다가 괴상한 이름 앞에 멈췄다.'용기와 체리파이 클러.'용기와 체리파이라고? 체리를 먹으면서 용기를 내는 모임인가? 밑에 소개들이 보인다.

'말기 암 생존자들의 모임.매일이 첫날이자 마지막 날인 사람들 모이시오.우리끼리 할 이야기가 있을 것 같으니.매월 마지막 수요일 밤 7시 30분.' (-142-)



"당신은 지금 두려워해야 해요.두려워할 충분한 권리가 있어요.죽을 만큼 두려워야 정상입니다. 죽을만큼 아팠잖아요.만약 지금 두렵지 않다면 그때야 말로 진짜 제 도움이 필요하겠죠." (-199-)



일반인은 소화제, 수면제,진통제 없이 하루릉 살아낼 수 있다.하지만 환자는 그렇지 못하다.이 세가지가 잇어야 하루 ,24시간을 견딜 수 있는 생명의 힘,에너지,면역력을 얻을 수 있다. 말기암이라면 더더둑 이 세가지 약에 의존한다. 삶의 마지막 동앗줄을 잡고 서있을 때,뭔가 희망을 얻었다면,그것은 우리 삶에 행복이 될 수 있다.



작가 곽세라. 1972년생이다. 이화여대를 졸업했고, 연세대학교 언론홍보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인도 델리대하교 힌두철학과에서 석사과정을 밟았다. 우리가 말하는 엘리트 코스를 거쳤다. 1999년 느닷없이 인도로 떠난 그녀가, 어느 날, 말기암 환자가 되어 있었다.



몸 속에 21cm의 종양이 발견되었다,5kg에 달하는 종양이었다. 5cm의 종양이면, 4기 말기암 환자에 속한다. 그녀는 그것보다 4배 더 큰 초거대 종양을 몸속에 품고 있었다. 암완자였지만,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병을 알리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 책에서 알 수 없다. 상처와 아픔, 속은 그녀의 자존심이었을 것이다.죽을 수 있는 운명 속에서 웃을 수 있다는 것, 쿠크다스 과자 같은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스스로 내 몸속의 종양을 덜어내기로 하였다. 오직 곁에 아버지가 있었고, 자신을 스스로 다스려야 했다.



보헤미안으로서 살아간다는 것,20여년 동안 여행가로 살아가는 저자는 풍부하고,다채로운 영혼의 울림으로 , 삶의 여정을 떠나게 되었다. 떠나고, 만나고,이별이 반복되었던 삶이 하루 아침에 멈춰 버렸다.말기암 환자로서,자신이 견뎌온 1000일 간의 고통의 순간들이 이 책 한 권에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고, 기록되어 있었다. 누군가 암으로 고통받고 있는 이들을 위해서,그들 또한 나처럼 고통스럽게 하루를 살아가고 있을 거라고, 희망은 누군가가 아닌,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이 책은 담담하게 말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그 최악의 순간을 견디고,이겨내고,지나왔기에 ,자신의 경험을 쓰게 되었고,한 권의 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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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로초를 찾아 떠난 100세 노인
이수민 지음 / 서랍의날씨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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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 노인이 주는 인생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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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로초를 찾아 떠난 100세 노인
이수민 지음 / 서랍의날씨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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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노인은 3평 남짓한 방바에 살았는데 이곳에서 누워 있거나, 떄때로 공원에 가서 햇빛을 쐬거나, 30년 전에 주운 고물 텔레비전 소리를 듣는 게 인생의 전부였다. 노인의 삶은 건조하고 지루하고 고독했다. (-11-)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이제 새것이라.> 자네도 자네가 꿈꾸는 새 인생을 시작해 보게.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재능을 주셨다네. 그만한 조직을 이끌고 부하를 다스리는 시력이 있다는 것을 보면 자네는 통솔력이 있는 사람이야. (-45-)



"<그가 너로 인하여 기뻐하시며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자네는 이렇게 소중한 존재란 말일세." (-81-)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아라.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인생엔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 모두 번갈아 일어난다는 말이라네. (-124-)



제가 병원에서 신세 한탄만 하고 아무 생각없이 시간을 낭비했다면 지금의 병원 생활은 저에게 암흑 같은 시간으로 기억되었을 거예요.,하지만 병워 밖 일상생활 속에서 여러 경험을 통해 성장하듯이, 더는 이곳에 와서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배우며 성장한 것 같아요. (-153-)



노인은 거울 앞에 섰다. 거기엔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 전혀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

윤기 나는 까만 머리(스타일까지 바뀐),안경 없이도 성경책을 볼 수 있게 된 두 눈,주름이 없어진 , 팽팽하고 탄력 있는 피부. (-185-)



진나라 진시황은 영원한 삶을 얻기 위해서,불로초르 구하러 ,서복을 중국 동쪽 바다로 보내지만 실패하였고,진시황이 세상을 떠나 얼마뒤 진나라는 역사 속의 나라로 바뀌게 된다. 현대그룹의 정주영은 650년 된 산삼을 사서, 그 자리에서 먹었다 한다. 돈과 권력을 가진 이들이 얻고 싶어하는 영원한 생명은 아직도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으며,장수를 꿈꾸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죽어서 ,자신이 벌어놓은 재물과 재산을 가지고 싶은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소설 『불로초를 찾아 떠난 100세 노인』은 현직교사가 쓴 소설이며,우리 삶에서 가장 주요한 것이 무엇인지, 꿈을 잃어버리고, 고독한 인생을 살고 있었던 , 3평짜리 방에서 살고 있는 100세 노인이 목사를 만나면서,강한 울림으로, 새로운 인생, 우리가 추구하는 영원한 삶을 되돌아 볼 수 있었다.



나이가 들어가면, 몸에 노화가 찾아온다.무릅관절에 무리가 가며, 허리와 어깨가 아프다. 목디스크가 생겨나고, 척추에 이상이 나타난다. 미래보다 과거의 좋았던 날을 추억하며 살아간다. 이 소설에서,100세 노인이 처한 현실을 본다면,내 주변에 나이가 먹어서 ,홀로 고독하게 살아가는 독거노인의 살을 놓치지 않게 된다. 우리 삶이 결국 아픈 삶으로 연결되는 이유, 항상 내 신세에 한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국엔 꿈을 서서히 잃어버리면서,자신감 또한 잃어버리며 살아간다.



100세 노인은 나이와 인생 경험이 세상에 의미 있는느 일을 할 수 없다는 최악의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주인공이 어느 순간 꿈을 찾아나서면서,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자신의 운명이 바뀌게 되는데, 이별에 익숙하고,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이들과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에 고통의 나날을 보내는 것이다. 100세 노인은 104세 노인을 보며,자기 스스로 삶의 의지를 피력하게 된다.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스스로 바뀌어야 하는 이유, 불로초는 내 삶 속 무의식에 있으며,내가 바뀌게 되면, 불로초를 찾아내지 않더라도, 스스로 행복한 삶, 건강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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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한의사로 성공하기
전대성 지음 / 군자출판사(교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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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왜 처음 한의사가 되고 싶었는가?

당신이 꿈꾸는 한의원이란 어떤가?

처음 졸업을 하고 꿈꾸었던 이상적인 한의사에 우리는 얼마나 가까워져 있는가? (-3-)



한의원은 사람 냄새가 나는 한의원이 되어야 한다. 원장이 생각나서라도 찾는 한의원이 되어야 한다. 원장이 가장 기억이 남는 환자가 있듯이, 환자들 또한 아플 때 제일 먼저 원장의 얼굴이 떠올라야 한다. (-61-)



처음 입원실을 오픈하던 2019년에는 입원실 한의원이 상당한 메리트가 있었으나 2020~2022년이 되면서 전국에 수많은 입원실들이 우후죽순 생기면서 입원실 한의원의 메리트가 사라지게 되었다. 또한 정책의 변화로 인해 상급 병실료가 없어지고, 자동차보험 환자들의 입원일수가 줄어들면서 많은 입원실 한의원들이 경영적으로 힘든 위기를 맞게 되었다. (-111-)



한의원을 하다 망할 수도 있다.그런데 입원실을 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들이 있다. 당직 부분, 차트 쓰는 방법,대규모 직원 관리 등 무엇이든 외부에서 바라보는 것과 직접 뛰어드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189-)



본업인 한의학과 연관된 것은 아니었지만, 건설회사를 차려야 겠다고 결심하고, 당시 주치의로서의 인맥을 통해 이란 왕실에 건의하게 되고,한국의 인재들을 채용하여,한국인 450명, 이란인 2,000명을 채용하는 큰 건설회사를 창업하게 되고,전기발전소 등을 수주하며 매출을 올리게 된다. 또한 많은 이란 왕족들을 치료해 주면서 감사의 의미로 받은 진귀한 유물 등을 처분하여 1,300억원이나 되는 거금을 모교에 기부했다. 그러면서도 본인이 입고 있는 옷은 무려 45년 동안 입고 있는 허름한 옷이라고 하는 이야기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243-)



어릴 적 축농증, 비염으로 고생한 적 있다. 눈물이 쏙 빠지도록 , 침을 맞았고, 한의원에 가서 비염을 고쳤고, 한의학의 도움을 경험한 바 있다. 서양의 의술과 달리,한의학은 내 몸의 양생을 우선한다.건강한 몸을 위해서, 면역력을 증진시키고,자연 치유로 건강한 몸상태를 유지하는 게 한의학의 목적이다. 하지만,한의사가 해마다 수요에 비해 많이 배출되면서,한의사 또한 오갈 곳이 없는 상황에 놓여지고 있으며,별도로 개원한다 하더라도,성공했다 말하기 힘든 이유다.



한의사가 되어서,한의원을 직접 운영하게 된다면,명심해야 하는 것이 나만의 무기를 가지는 것이다. 더 나아가,네임밸류가 우선되어야 하며, 전국을 대상으로 영업을 제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서,.한국의 소문난 한의원은 공진단 하나 제조로 예약이 밀린 곳이 있다. 여기서 무기란 서양 의술로 해결할 수 없는 질병을 한의학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예컨데, 오십견이 있어서,만성적인 어깨 통증을 가지고 있는 환자에게,맞춤형 한방 치료를 한다면 손님의 입소문으로 여기저기 손님이 모여들 수 있다.아이를 낳지 못하는 가임기 여성, 성대결절로 고생하는 이들이 한의원을 주로 찾는 핵심 고객들이다.



전대성 원장은 세 아들의 아빠이자. 12년 넘게 부산에서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다. 응급환자를 위해서, 한의원에 응급실,입원실을 두었다. 교통사고 환자들의 통증 치료에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자신의 무기를 갖2추기 위해서,한의학 공부 뿐만 아니라.,영업이나 재테크 관련 공부도 병행하고 있댜.



하나의 전문적인 기술만으로 대한민국에서 살아남기 어렵다는 걸 이 책은 잘 드러내고 있다. 경희대 출신 모 한의사는 우연히 이란 왕실의 초대를 받아서, 왕실 가족 주치의가 되어서, 건설업 창업이 돈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이란인과 한국인을 다수 채용하여,사업가가 될 수 있었다. 본업이었던 한의사로서의 일이 건설과 사업역량을 십분 활용하여, 나름대로 돈을 모아서,모교인 경희대에 1300억원을 기부한 사실은 한의사로서 성공하기 위한 모범 사례였으며, 고객에게 어떻게 입소문이 되느냐에 따라서, 누구와 인연이 되느냐에 따라서 성공과 실패의 갈림길에 놓일 수 있다.  한의원을 개업할 때 입지도 중요하다. 하지만 일을 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게 우선이다. 현실적인 감각과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기회가 나타나고 그 기회가 한의사로서의 운명 바뀐다.돈이 모여드는 곳에 성공이 있다. 고객과의 '공감'과 '교감'으로 다가가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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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 (양장)
에른스트 H. 곰브리치 지음, 백승길.이종숭 옮김 / 예경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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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서 제일 큰 장애물은 개인적인 습관과 편견을 버리려고 하지 않는 태도이다.친숙하게 해석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매도되곤 한다. 우리는 작품에 표현된 이야기를 많이 알면 알수록 그 이야기는 언제나 그랬듯이 예전과 비슷하게 표현되어야 한다는 확신에 집착하게 된다. 특히 성경을 주제로 한 작품에서는 감정이 격앙되기 쉽다. (-29-)

기원전 4세기 최대의 미술가인 프락시텔레스는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의 매력과 감미롭고도 사람의 마음을 파고드는 특성으로 명성을 얻었다. 많은 시인들이 노래로 찬양했던 그의 가장 유명한 걸작품은 사랑의 여신인 젊은 아프로디테가 목욕탕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103-)

그리스도 탄생 이후 수백 년 동안 헬레니즘 미술과 로마의 미술은 오리엔트 미술을 그 본거지에서조차 완전히 밀어내고 대신들어앉았다. 이집트인들은 그때까지도 그들의 시신을 미이라로 매장했으나 이집트 식으로 그들의 형상을 거기에 덧붙이는 대신에 그들은 그리스 초상화의 온갖 기교를 알고 있는 미술가로 하여금 초상을 그리게 했다. (-124-)

불교는 그림에 대해서 완전히 새로운 접근 방법을 도입시켜 미술가의 업적을 매우 존중하게 했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나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중국 사람들은 그림을 그리는 일로 천한 이로 생각하지 않고 화가를 영감을 받는 시인과 동등한 위치에 놓은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150-)

예술가들이 그들에게 흥미가 있는 그런 것을 그리기 위해서 표본이 되는 서적을 때때로 참조하지 않게 된 것은 13세기에 들어와서였다. 오늘날 우리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거의 상상하기 힘들다. 우리가 생각하는 미술가는 스케치북을 들고 앉아 기분이 날 때는 언제나 실물을 스케치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중세 미술가들의 훈련이나 양성 과정은 지금과는 대단히 달랐다. (-196-)

도나텔로는 생존할 당시에 굉장한 명성을 얻었다. 백 년전의 조토와 같이 그는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로 불려다니며 그 도시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도판 152는 <성게오르기우스>보다 약 110년 뒤 시에나 성당의 세례만을 위해서 만든 청동 부조이다. (-230-)

15세기 중엽에 독일에서는 미래의 미술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미술 뿐만 아니라 인쇄술의 발명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친 대단히 중요한 미술 기법이 발명되었다. 이로써 그림을 인쇄하는 것이 책을 인쇄하는 것보다 수십 년 앞서게 되었으며 성인들의 성상과 기도문이 들어 있는 작은 책자들은 인쇄되어 순레자들과 신도들의 신심을 위해서 배포되었다. (-281-)

우리는 레오나르도가 스푸마토 기법을 아주 세심하게 사용하고 있음을 본다. 얼굴을 그리거나 낙서를 해본 사람이라면 우리가 표정이라고 부르는 것이 주로 두 가지 요소,즉 입 가장자리와 눈 가장자리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가 부드러운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게 함으로써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남겨둔 부분들이 바로 입과 눈 부분이다. (-302-)

그대 하늘에서는 전쟁이 터졌습니다. 천사 미가엘이 자기 부하 천사들을 거느리고 그 용과 싸우게 된 거입니다.그 용은 자기 부하들을 거느리고 맞서 싸웠지만 당해내지 못했습니다.그래서 하늘에는 그들이 빌붙일 자리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345-)

교회의 형태 자체가 새롭고 흔히 볼 수 없는 설계에 바탕을 두고 있다. 즉 르네상스 방식인 원형의 대칭적 설계가 유럽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이 새로운 교회의 형태는 높고 위풍당당한 원개를 지닌 십자형이어야 했다. 신랑인 커다란 장방형의 공간에서는 신도들이 지장없이 한데 모일 수 있었고 주제단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388-)

루벤스의 유명한 많은 제자와 조수들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사람은 안토니 반 다이크다. 그는 루벤스보다 스물 두 살이 아래였으며 푸생과 클로드 로래의 세대에 속했다. 그는 비단옷이건 인간의 육체이건 간에 사물의 질감과 표면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로벤스의 모든 기법을 곧 터득했으나 기질과 분위기는 그의 스승과 대단히 달랐다. (-405-)

렘브란트의 자유로운 제작 태도는 우리들로 하여금 그가 인뭉군을 배치하는 데 얼마나 많으 예술적 지혜와 기술을 사용했는지 잊제 만든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예술을 둘러싸고 있는 이 군중들만큼 교묘하게 균형이 잡혀 있는 예는 다른 데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427-)

18세기에 영국의 제도와 영국인의 취향은 이성의 법칙을 갈망했던 유럽의 모든 사람들이 찬미하는 모델이었다. 왜냐하면 영국에서는 미술이 신처럼 군림한 통치자들의 권력과 영광을 과시하기 위해 이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가스에게 만족했던 대중이나 레이놀즈와 게인즈버러에게 초상화를 그려 받기 위해서 포즈를 취했던 사람들은 모두 보통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브라스에서도 역시 베르사유 궁전의 중후하고 장엄한 바로크 양식이 18세기 초에 오면 바토의 로코코 밋굴작품과 같은 보다 섬세하고 친근한 감각 효과에 밀려 유행에서 벗어났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470-)

인상주의 그림을 감상할 때 몇 걸음 뒤로 물러나서 보면 이러한 혼란스러운 색점들이 갑자기 우리의 눈앞에서 제자리를 차지하고 생기를 띠게 되는 기적과 같은 기쁨을 맛보게 된다는 사실을 대중들이 알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이러한 기적을 성취하고 화가가 실제로 겪었던 시각적 경험을 관객에게 전달해주는 것이 인상주의자들의 진정한 목표였다. (-522-)

표면적으로 볼 때 19세기 말은 대번영의 시기였으며 이러한 번영에 스스로 만족한 시기였다. 그러나 스스로를 아웃사이더라고 느낀 미술가와 작가들은 대중의 마음에 드는 예술의 목적과 방법에 대해 점차 불만을 갖게 되었다. 건축은 그들에게 가장 손쉬운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 건축은 공허한 틀에 박힌 형태로 발전되어왔다. (-535-)

표현주의 미술에 대해서 사람들이 당황하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자연의 형태가 왜곡되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결과가 아름다움과는 멀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만화가라면 사람의 추함을 보여주는 것도 당연시될 것이다. 그것이 그의 직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지한 미술가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사물의 외관을 변형시킬 때 그것을 추하게 만들기보다는 이상화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잊는다면 혹독한 반발을 살 것이다. (-564-)

슈비터스나 그외의 다다이스트들이 이것저것 갖다 붙여놓은 방법에 대해서 관심이 되살아난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이러한 것들 때문이다. 마대의 거칠음, 프라스틱의 매끈거리는 표현, 녹슨 쇠의 우둘투둘한 표면은 모두 새로운 방법으로 개발될 수 있는 것이다. (-605-)

책 『곰브리치 서양미술사』에 대한 책요약은 이동진 유투브가 더 친절하게 ,디테일한 것까지 꼼꼼하게 소개되어 있어서, 독자들에게 도 유용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 요약본은 미술 전문가 가 요약한 것이 있고, 역사가들이 요약한 자료가 잇다.이 두가지 자료를 비교하면, 미술가들은 예술적인 안목과 통찰을 우선하고 있다.역사가는 미술의 흐름에 대해서,시대적인 관점,시간적인 관점을 살펴본다는 것이다.

익히 알다시피 에른스트 H. 곰브리치는 2001년 세상을 떠났으며, 책 『곰브리치 서양미술사』은 1930년대부터 쓰여졌다. 빈대학에서 예술사와 고고학을 공부했던 에른스트 H. 곰브리치가 이집트 미술을 서양미술사의 시작으로 보고 있으며, 이집트 미술에 이어서,로마,그리스로 이어지는 미술의 형태는 어떻게 변했고,그것이 순환되었는지 미술적인 이해를 돕고 있다. 헬레니즘 미술이나,발크,고딕, 르네상스 미술도 마차가지다. 우리가 흔히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라파엘로, 그 시대의 미술적인 대부로 손꼽히지만, 놓칠 수 없는 이가 위대한 혁명가로 부르는 조토 디 본도네였다.그가 추구하였던 미술적 직감은 중세 미술의 흐름과 변화를 이끌었으며,중세 미술이 저물어감으로서, 근현대의미술로 바뀌게 되었다.

미술은 어제나 위기와 기회가 반복되었다. 그리스 시대의 미술은 조각과 회화, 신에 대한 이미지 형상화가 주를 이룬다.오리엔탈리즘 시대의 미술은 목적을 달리하게 되었고, 소재의 다양화 뿐만 아니라 미술의 정형화를 꽤하였다. 기존의 미술 적품을 모방하고 ,빼끼는 데서 벗어나 자신만의 개성이 두렷한 미술을 추구하기까지 오랜 세월을 한께 했다. 독일의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발전함으로서,미술의 전환기가 나타났으며,미술의 사조의 의미있는 변화가 감지되었다. 글을 모르는 이들에게 미술의 효용가치가 거질 수 있었다. 기독교 뿐만 아니라 종교의 확산은 성경과 기독교 미술이 함께 쓰여졌다,.

사진이 등장한다는 것은 미술의 강점,사실적 묘사가 실물을 그대로 복제되는 사진에 경쟁이 될 수 가 없었다.아무리 사실적으로 자화상, 초상화를 그련려낸다 하더라도, 사진은 작은 것 하나 사소한 것 하나 놓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 속에서,전통적인 회화기법이 쇠퇴하였고,질감과 색채,색조를 적절하게 섞어낸 인상주의 사조가 나타났다.노르웨이 출신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 의 절규가 세상에 알려지고, 파블로 피카소나 조르즈 브라크의 입체주의적인 작품이 우리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앞으로 이러한 변화는 우리가 세상을 떠난 이후 20~21세기 미술사를 재평가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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