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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오기傳 - 활자 곰국 끓이는 여자
김미옥 지음 / 이유출판 / 2024년 5월
평점 :
네 살부터 공장에서 놀았다. 서너명의 공장 직원들이 일했다. 과자를 바이스에 넣고 손잡이를 돌리면 과자 가루가 기계로 떨어져 야단을 맞았다. 나를 번쩍 들어서 마당에 데려다 놓으면 울고불고 쳐들어가니 그들이 생각한 것은 내게 공구를 들려주는 일이었다. 그런데 니퍼나 펜치를 손에 들려주면 마당 화초들의 모가지를 댕강 잘랐다. (-13-)
싸움의 기술 중 최고는 '선빵'이었다.나는 종종 구슬치기를 하다 맞장(?) 을 떴는데, 맞은 아이 엄마가 집에 와서 울부짖었다.
"아줌마 막내 아들이 우리 아들을!"
힘이 더 센것은 아니고 다만 도구(?)를 들고 선빵을 날렸을 분이었다. (-20-)
"발랑깝져가지고!"
어떤 변명도 하지 않았다. (-28-)
엄마는 내가 일본 출장을 가면 자신의 소학교를 찾아달라고 했다. 행정 구역이 바뀌고 정확하지 않은 발음 때문에 매번 실패로 돌아갔다. 생각지도 않았던 졸업장을 찾아준 이가 MBC의 조정선 PD,일명 '조 PD''였다. (-34-)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시골에서 보낸 어린 시절, 나를 눈여겨본 선생님 덕이 학교 도서관의 자물쇠를 담당하게 되었다. 말이 도서관이지 빈 교실 하나를 책으로 채워 넣은 곳이었다. (-41-)
남자는 수시로 내게 공학이론을 들이댔는데, 벽에 망치질을 요청하면 '무게 중심 이론'에 따라 집이 무너질 수 있다고 신중한 자세를 취했다.나는 두말하지 않고 망치질을 해서 액자를 달었다. 보일러가 고장이 나자 남자는' 압력과 공기 조절의 상관이론'을 들이 밀며 전문가의 영역이라고 했다. 나는 코드를 빼서 다시 꽂았고 보일러는 잘 가동되었다. (-46-)
전학을 자주 다니니 가는 곳마다 기싸움이 있었다. 못사는 티가 줄줄 흐르니 만만하게 보는 것들이 있었고 응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학 오자마자 짝꿍의 멱살을 잡는 나를 선생들은 포기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꼬마 깡패의 시험 성적이 상위를 보이자 구원될 영혼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51-)
초등학교에 다니기도 전부터 마찌꼬바의 기계가 장난감이었고, 피댓줄의 뒤틀림에 의혹을 가졌으며, 저 쪼꼬만 공장이 나의 것이 될 것임을 의심치 앉았다. (-71-)
돌아오는 길에 술이 깼다. 소주를 사서 집으로 돌고 갔다. 늦었지만 그의 질문에 혼자 대답했다.
'내 꿈은 평범해지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꿈도 평범해지는 것이었다. 아버지처럼 쓰러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85-)
2022년 한국근대문학광의 근대서지학회의 『100편의 소설, 100편의 마음』이 출간되었다. 「혈의 누」 에서 「광장 」까지 희귀한 초판본들이어서 바로 구매했다. 그러나 「혈의 누」 초판은 소장한 기관도 개인도 없었다. 수록된 책들은 지질 문제로 누렇게 변색되었으나 정겨웠다. (-94-)
내가 처음으로 잡도리한 건'3인칭'이 고교생이 되어 내게 '미옥씨'라고 불렀을 때였다. 지금 생각하면 자유분방한 집안 풍토였는데 그때는 콩가루 집구석이라고 생각했다. (-107-)
그러나 나는 돈에 미쳐 있었다. 아버지를 돈 때문에 잃었는데 엄마마저 잃을 수는 없었다.
낮에 그 집을 다시 찾아갔다. 햇빛아래 그 집은 여전히 불에 타 유리창이 전부 깨진 상태였다. 사람이 살지 않은지 오래된 집이었다. (-118-)
소녀가 된 쪼깐이는 어느날 닭장에서 훔친 계란 몇 알을 들고 면사무소를 찾아갔다. 면서기에게 '풍양 조씨, 쪼간입니다.'공손하게 말하고 계란을 올려놨다. 꼬마 같은 소녀가 나이배기라는 것에 놀라고 영민함에 놀라고, 면서기는 여러 번 놀랐다. 한문의 뜻을 물어 흡족한 이름을 지었으니 '조조간 趙早揀'이었다. 이를 조 早에 가릴 간 揀 이었으니 팔삭둥이에 어울렸다. (-138-)
두 할머니의 갈등은 인생관과 가치관, 나아가 정치관과 이데올로기의 충돌이었다. 외할머니 강도귀달 씨 집안의 내밀한 교훈은'아무도 믿지 말자' 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어린 시절 집안의 몰락을 두 눈으로 지켜보았다. 혈육이 굶고 병들어 죽어도 아무도 도와주는 이가 없었다. (-151-)
"너는 꾸준 데가 있구나. 갑자기 다가와서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을 믿지 말거라.그런 사람이 등에 칼을 꽂는 사람이다.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 사람이 진자 사람이란다."
조조깐 할머니는 아들의 장례를 치르던 밤 옆에 누운 내게 이렇게 말했다. (-155-)
경기고 외곽 신도시 그 동네 초입에 있던 공주미용실을 내가 어찌 잊겠는가. 개발이 진행되던 신도시에서도 그 동네는 낙후되어 있었다. 공주 아줌마는 방 한 칸을 빌려 이사를 왔다. 그 방에서 동네 여자들의 머리를 만지기 시작 했는데, 솜씨도 좋고 가격도 저렴해서 인기를 끌었다. 이른바 야매 미용실이었다. (-170-)
내 얼굴에서 경멸을 읽은 남자가 관심을 보였다, 모작한 점에 붉은 채색을 하자 그림이 되었다. 내 표정을 보고 남자기 빙글거리며 보이지?"
남는 주문 받아 그림을 그리는 늙은 복학생이었다. (-193-)
나는 흔쾌히 모시겠고 했다. 내게 제사는 맛있는 음식을 왕창 해서 두고두고 먹는 즐거운 행사였다. 다른사람이 참석하는 것도 아닌 고독한 영혼을 위하여 제사 음식을 만들어 먹다니 , 꿩 먹고 알 먹고 긍정적인 제안이었다.
그리하여 그 '외로운영혼'에 대한 인수인계가 있었는데 바로 굿이었다. 시어머니의 단골 만신집에서 행사가 개최된다는 통보를 받고 그날 조퇴를 했다. (-211-)
"대학까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가난한 엄마는 막내딸이 돈을 벌어 오빠들의 공부를 지원해야 한다고 제안을 거절했다. 나는 툇마루에 앉아 그녀들의 대화를 들었다. 그때 나는 슬펐지만 세상에 대한 안도감을 느꼈다. 누군가 나를 알아준다는 것, 나를 선택하는 이가 있다는 것, 그것으로 충분했다. (-225-)
『케테 콜비츠 평전』의 마지막 책장을 덮고 일어나 창밖을 보니 세상이 하얗다. 책을 읽는 사이 눈이 내렸다. 베를린에 있는 소박한 그녀의 묘지를 잠시 생각했다.
눈이 오던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가고 싶어진다. 예전 직장 생활을 할 때 연가를 내고 가끔 현충원에 갔다. 텀블러에 커피를 내려서 들고 가곤 했다. (-247-)
2023년 6월 14알 토요일 춘천 '파피루스 책방'에서 강연이 있었다. 문화 예술의 대가들이 모인 자리라 원고가 필요없었다. 즐거운 야단법석에 웃음소리가 한여름의 밥을 채웠다. 먹거리가 풍성했고 책방 주인은 춤을 추었는데 꿈을 꾼 듯 하다. (-265-)
2024년 6월 대구광역시 몬스터 크래프트 비어 (대구 중구 종로 45-4 2층) 에서 김미옥 대구 북토크가 있었다. 그 때 당시 나는 대구에 사는 지인의 연락이 왔음에도 대구에 가지 않았다. 김미옥 북토크 현장에 가지 않아도 ,아직은 미옥씨를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정작 대구에서 두리번 두리번 거렸다고 했다. 나의 실수로 인해 오해가 생기고 인연이 끊어지는 것을 원치 았았다.
2024년 어느날 평론가 김미옥은 두 권의 책을 동시에 출간하였다.첫번 째 책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이었으며, 두번째 책이 『미오기傳』이다. 첫번째 책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은 일사천리로 읽자 마자 후기를 남겼지만, 두번째 책 『미오기傳』은 4월에 읽었지만, 지금까지 목혀 놓았다. 활자곰국 끓이는 여자 미옥씨가 있다면, 활자곰국 끓이는 남자도 있다.처음 읽었을 때 그 느낌과 두번째 읽엇을 때 그 느낌이 잘라 질거라고 생각하였으며, 나의 14,000번째 서평으로 『미오기傳』을 선택하였다.
작가 김미옥은 살아온 삶이 독특하다. 어릴 적 오빠 세명과 치열하게 싸우며 성장했다. 반골기질에 마이너 기질까지 가지고 있었으며,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의 갈등 속에서 컸으며, 성장하였다. 매사 선빵(?)을 날려서 누군가를 울렸다. 작은 공장을 운영하였던 아버지 덕분에, 어릴 적부터 기계를 장난감처럼 사용하였고,소소한 기계 문제는 스스로 해결하였다. 용접도 혼자서 할 수 있었으며, 결혼 후에도 집안에 소소한 일은 혼자 뚝딱 처리한다.
이 책에 나오는 미옥씨의 별명만 해도 얼추 100개는 넘을 듯 하다. 그리고 전학(?) 다닌 곳도 얼추 100곳은 넘을 듯 하다. 전근대적 여성관을 가진 신여성(?)으로서, 똑똑하면 피곤하고,살기 힘들다는 그 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앞만 보는 직진형이었으며, 문과생이면서,공순이 기질을 가지고 있다. 전쟁고아처럼, 오빠들은 미옥씨의 머리를 소꼽놀이하며 실험했다. 본인 스스로 '그렇게 생겨먹은 인간;아라고 말하고 있으며, 친할머니 풍양조씨 조조간와 진주강시 은열공파 강도귀달의 소녀(?)로서 튼튼하게 성장하였다.
뼈대 있는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미옥씨, 아빠는 김해김씨였고,엄마는 밀양 박씨였다. 두 사람 사이테 태어난 막내딸 미옥씨는 평범하게 살고 싶은 아이였다. 세상은 미옥씨를 곱게 두지 않았다. 국민학교를 나오자 공장으로 일하고, 독립하였고,자취생활을 했다. 입주가정교사가 되어서, 엄마의 빚을 갚아야 하는 가장으로 살아온 지난날의 슬픔이 존재한다. 자신의 삶을 위로하고,치유하기 위해서, 어려서 문예부장으로 성장하면서 도서관에 먼지 풀풀 날렸던 문학 전집을 하나하나 섭렵하면서 성장하였다.
뉴스를 보면 , 어떤 나쁜 일이 있으면,그 일과 관련된 사람의 가정환경을 문제시한다. 나쁜 가정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은 나쁜 일을 한다는 공식이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숨어 있다. 하지만, 미옥씨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자신의 의도뫄 무관하게 힘든 삶을 살았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았다. 삼일을 굶은 적도 있었다 한다. 언제나 미옥씨에게는 최후의 수단, 선빵(?)이 있었기 때문이다. 딱지치기,구슬치기 할때도,자신의 상식 밖에서 어떤 일이 발생할 때,그 최후의 수단을 사용했다. 최근 페이스북에서 일어났던 어떤 일조차도 선빵(?)으로 마무리했다.
미옥씨는 영악하다. 그리고 똑똑하다. 하지만 자신이 타인의 도움으로 지금껏 살아온 것을 잊지 않았다. 책 한 권에 수십 만원 하는 책조차도 필요하다 싶으면 주저 없이 구매한다. 타인의 도움으로 성장했으니, 그 이자라도 갚아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사회에 기부를 하며 살아갔다. 미옥씨의 삶의 철학은 분명하다. 나쁜 환경에서 살아온 과거는 어쩔 수 없다. 부모 잘못 만나는 것도,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선천적인 환경은 바꿀 수 없지만, 후천적으로 성격, 성질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미옥씨다. 사람을 안고 가야 한다는 그 삶의 철학은 어떤 순간이라도 미워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무슨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용서하겠다는 너그러움도 있다. 독서의 힘이며,실사구시의 정신을 놓치지 않는다. 살면서 수많은 욕설과 잔소리를 들으며 살아온 미옥 씨,스스로 돈을 사랑하는 유물론자이지만, 정신적인 영혼은 자유로운 삶이고자 하였댜. 평범해지고 싶어하는 미옥 씨를 응원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