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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자들
고은지 지음, 장한라 옮김 / 엘리 / 2024년 8월
평점 :
나는 어릴 적부터 여섯 가지 언어를 일고 쓸 수 있었다. 붓이건 잔가지건 뭉뚝한 내 손가락이건, 도구를 찾아내서 그걸로 기름종이나 흙이나 공기 중에 글자를 썼다. 선 하나가 다른 선에 닿을 때면 심장이 손끝에 연결되며 의미를 전해주었다. 다섯 살 때는 온 동네에 말을 남기고 다니는게 재미있었다. 나무에는 나무라고 새겼다. (-13-)
이제 4학년이 되어 성호와 결혼하기로 한 인숙은 바로 그 강둑에서 성호의 발치에 드런무워 있었다. 돌 같은 빛이 모든 걸 회색빛으로 만들었다. 성호의 손가락이 잔디 틈에 자리를 잡았다. 인숙은 시위에 동참하자고 말했다."뭐라도 해야 해."
군사정권과 독재아의 시대에 ,납치와 고문의 시대에, 그녀의 수줍음은 얼마나 부지불식간에 잊혔는지, 스물 세살인 성호는 국가에 관해서라면 허무주의자였지만 사랑에 관해서라면 실용주의자였다. (-32-)
교도관은 수갑을 풀고 검지로 손바다에 글자를 썼다. 교도관은 남자가 시작한 것을 이어가며 죽음이라 적었다.
교도관이 손바닥을 내어주었다.
남자가 교도관의 손바닥에 삶이라 적었다.
교도관이 인간을 적었다.
남자가 삶을 적었다.
교도관이 아버지를 적었다.
남자가 삶을 적었다.
배신자. (-61-)
북한 사람들은 여전히 일제강점기의 끔찍한 기억을 품고 살아가고 있어요. 그 사람들도 역사상 최악의 융단폭격을 당한 피해자들이에요.네이팜까지 다 합해서 보면 미국은 2차 대전 때 태평양 작전에서 썼던 것보다 더 많은 폭탄을 북한에다 떨어뜨렸어요.물론 북한은 식민지에서 벗어난 나라예요. 당연히 세상을 안 믿겠죠.(-93-)
인숙은 후란이 손을 문지르고 귀를 주물러주었다. 병원에 오고 나서야 인숙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이 후란의 몸을 만졌다. 집이었다면 이렇게 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인숙은 멈추지 못하는 것 같았고 , 후란도 거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인숙이 말했다."어머님 귀가 뻣뻣하네요.귀가 부드러워져야 속도 부드러워지는데요." (-151-)
시간은 멈추기 전까지는 끔찍했다가, 그다음에는 무시무시해졌다. 우리 어머니의 맨 아래 서랍장도 다 찰 때까지는 끔찍했다. 불에 그을린 제복, 병원 담요, 어머니에게 맞지 않는 한복 두 벌, 그 다음에는 무시무시해졌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이가 들면서 각자의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일은 끔찍했다. (-184-)
들판 너머로 북한 경비병들이 국경을 서성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첫 번째 경비병이 말햇다."저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과거를 보는 것 같아요. 가끔은 과거가 이쪽을 보며 미소 짓곤 해요.어떨 때는 이쪽으로 총을 겨누고요."그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낡은 세상에 갇혀 있지 마세요.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는 거예요.우리는 옜날에 하던 식으로 일하지 않아요.옛날이랑 똑같은 사람들도 아니고요. 저기 밖으로 나가서 하려던 말을 해보시죠. 그러면 알게 될 겁니다. 개만도 못한 취급을 맏을 거니까요." (-225-)
로버트 뒤쪽에 비친 이미지가 시위대 사진과 2제곱미터짜리 감방에 열 명씩 꽉꽉 채워 갇힌 정치범들 사진으로 바뀌었다. 이것이 로버트가 상상한, 우키시마호가 빙 둘러 항구로 향하기 전 일본 북부 지역인 오미나토의 모습이었다."우리는 이제 돌이켜보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기회를 깨닫게 됩니다.두려움 때문에 안주합니다.불안정한 부패가 벌어집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지탄해왔던 실수를 바로 우리가 저지르는 것입니다." (-238-)
제니는 처음 찾아왔을 때처럼 편안하게 머물렀다. 아이들이 도착하고 얼마 안 되어 나는 성호더러 새 엔진을 단 제니의 승합차를 차고에가 세워두라고 했다. 아이들과 함께 살면서 처음 10년 동안, 매일 아침 나는 하루를 바닷가로 데리고 가서 제니가 쉴 수 있게 해주었다. 제니가 아래층으로 내려올 때면 부엌 조리대에서 커피를 타주었다. (-262-)
작가 고은지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에서 태어났다.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워싱턴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2024년 젊은사자상 소설 부문을 수상한 『해방자들』은 코리안 디아스포라diaspora의 아픔과 희망을 깊숙하게 담고자 한다.
남한과 북한이 분단 된지 , 70년이 넘었다.전세계 유일한 분단국가이며, 코리안 디아스포라diaspora 가 현존하고 있다.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이산가족 찾기가 바로 그런 대표적인 예이며, 코리안 디아스포라diaspora 와 코리안디스카운트 discount가 혼재되어 있는 대한민국 문화와 정서가 느껴지고 있다.
그 나라의 언어는 그 나라의 과거와 문화 속에 엮여 있다. 대한민국 국민이 쓰는 언어 속에 갈등과 반목, 불안과 공포가 내재되어 있는 결정적인 이유는 ,일제강점기와 6.25 한국 전쟁이 있기 때문이다. 세대마다 생각과 가치관, 이념, 인생관이 다른 것은 필연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소설 『해방자들』은 대한민국을 해방해 줄 해방주체로, 미국,중국,러시아, 읿본을 손꼽는다. 하지만 그들은 남한과 북한이 해방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해방자가 아닌 위선자였으며, 모순과 배신으로 채워진 이들이다. 인숙과 성호는 바로 그것을 겪으며 살아온 세대였으며, 1960년대 이후 군사정권과 독재자 시대를 온몸으로 느낀 세대였다.
순수했던 시대가,전쟁으로 하루 아침에 야만의 시대로 변질되었다. 전쟁은 북한과 남한을 지리적으로 ,심리적으로 분리했으며,그들의 가치관 마저 왜곡시켰다. 베트남전에 사용되었던 네이팜탄이 북한에 먼저 투하되었다. 유언 하나 남기지 못하고,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죽어간 이들이다. 그들 속에 인숙과 성호의 부모가 있었으며, 고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 간 이민 1세대였다.그들은 고국의 아픔을 관찰하고 있었다. 1980년 일어난 군부독재 정권의 현주소, 이후 대한민국에거 나타다고 있는 여러가지 사회적 갈등과 고문의 흔적들, 있어서는 결코 안되는 인적 재난들이 코리안 디아스포라diaspora에 압축되어 나타나고 있었다.모순과 위선, 갈등과 반목, 하나하나를 고은지 작가의 시선에서 바라보고 있었으며,한국 전쟁이 품고 있는 사회적 문제의식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