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rnal de deuil. Tagebuch der Trauer, franzosische Ausgabe (Paperback) - 26 octobre 1977 - 15 septembre 1979
롤랑 바르트 / Editions du Seuil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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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하나의 사건이 되는, 다가오고 있는 모험이 되는 때가 있다.그런 때 죽음은 운동을 일으키고, 흥미를 자극하고, 긴장감을 깨우고, 행동을 하게 하고, 마비를 일으킨다.하지만 죽음이 더는 사건이 되지 못하는 그런 알이 온다.그때 죽음은 그저 일정한 시간의 연장,딱딱하고, 뻔하고, 특별한 것도 없고,지루하고,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일 뿐이다.진정한 슬픔은 그 어떤 네러티브의 변증법보다도 강력하다.(-60-)


오늘 - 내내 침울하던 중에 - 오후가 끝나갈 즈음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슬픔의 순간, 너무도 아름다운 헨델의 오페라<세멜레 Semele> 3악장을 듣다가 눈물을 터뜨리다.마망이 말하던 단어 ("나의 롤랑, 나의 롤랑") (-130-)


자기만의 고유한 슬픔을 지시할 수 있는 기호는 없다.
이 슬픔은 절대적 내면성이 완결된 것이다.그러나 모든 현명한 사회들은 슬픔이 어떻게 밖으로 드러나야 하는지를 미리 정해서 코드화했다.
우리의 사회가 안고 있는 패악은 그 사회가 슬픔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165-)


내가 너무도 사랑했었고 너무 사랑하고 있는 이들이, 내가 죽고 또 그들보다 오래 살았던 이들마저 죽고 난 뒤에는, 이 세상에서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말거라면,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나는 죽어서도 계속 디억되어야 할 필요가 있고,내가 살았던 흔적을 세상에 남겨둘 필요가 있을까? 마망에 대한 기억이 아놔 그녀를 알았던 이들이 죽은 뒤에도 세상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면,내가 죽은 뒤에도 기억되어 차갑고도 위선적인 역사의 어딘가에서 계속 살아남게 된다는 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는 나 혼자서만 '기념비'가 되고 싶지는 않다.(-204-)


1년 반 동안 내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잘 아는 건 오로지 나 자신 뿐이다.그동안 나는 당연히 해야만 하는 임무들을 미루기만 하면서, 꼼짝도 않고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은 채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슬픔의 자기 순환적인 길 안에 갇혀 있었다.그러나 나는 언제나 한 권의 책을 씀으로써 하나의 작별을 마무리짓곤 했었다.그것이 나의 방식이었다. -집요함,은밀함- (-241-)


인간은 언젠가 죽음과 마주할 때가 있다.내가 죽거나 아니면,누군가가 죽을 때이다.죽음은 항상 내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일상적이면서, 어색함과 만날 때가 있다.나의 죽음과 자의 가족의 죽음,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죽음을 목도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단어가 3인칭 대명사처럼 남의 일인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경험이다.죽음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가치이며, 언어로 형용하기 힘든 감정이기도 하다.죽음과 슬픔에 대해서 내면 속의 영혼의 울림이라 부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죽음을 목도한 자신의 슬픔과 외로움과 불안은 그 어떠한 언어로서 표현되지 못하고,부유하게 되는 이유였다.사람이 이상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스스로 감정을 삭히면서 살아가는 것은 죽음이 우리 앞에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이질적이면서,응시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인간은 반드시 죽음을 겪어야 하는 존재이고, 그것을 똑바로 보아야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고차원적인 생각과 사회를 추구하면서, 인간은 나의 죽음 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죽음도 챙겨야 하는 순간이 찾아오면서, 인간은 점점 더 죽음에 갖혀버린다.그 죽음의 대상이 내가 직접 본적도 없고,소통해 존적도 없는 사람인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이 책은 나에게 겸손함과 위로와 안타까움을 동시에 체험하게 해주었다. 누군가의 애도 일기는 그것을 쓰는 사람의 기억의 실체이고, 감정이 있으며, 일기를 쓰는 목적이 있다. 그리고 그 끝마무리는 희극이 아닌 비극이 될 수 있다. 그건 이 책을 읽는 것은 좋지만, 스스로 애도 일기를 쓰면 안되는 또다른 이유이다.내 안의 슬픈 감정과 아쉬움이 머물러 있는다는 것은 유쾌하지 못하고,거기에서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면서, 삶에 대한 의미조차 내려놓게 된다.그 어떤 노력도 죽음앞에선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게 되면,우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마망의 죽음으로 인해 거기에 속박되는 삶을 살았던 롤랑바르트의 삶이 마망 알리에트 벵제의 삶을 따라가게 된 것은 불가피한 선택과 결정이었다.견디지 못하고, 넘어서지 못하는 것,그것이 그의 마지막 저작물 ,애도 일기>에 기록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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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 일기 (리커버 에디션)
롤랑 바르트 지음, 김진영 옮김 / 걷는나무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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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하나의 사건이 되는, 다가오고 있는 모험이 되는 때가 있다.그런 때 죽음은 운동을 일으키고, 흥미를 자극하고, 긴장감을 깨우고, 행동을 하게 하고, 마비를 일으킨다.하지만 죽음이 더는 사건이 되지 못하는 그런 알이 온다.그때 죽음은 그저 일정한 시간의 연장,딱딱하고, 뻔하고, 특별한 것도 없고,지루하고,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일 뿐이다.진정한 슬픔은 그 어떤 네러티브의 변증법보다도 강력하다.(-60-)


오늘 - 내내 침울하던 중에 - 오후가 끝나갈 즈음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슬픔의 순간, 너무도 아름다운 헨델의 오페라<세멜레 Semele> 3악장을 듣다가 눈물을 터뜨리다.마망이 말하던 단어 ("나의 롤랑, 나의 롤랑") (-130-)


자기만의 고유한 슬픔을 지시할 수 있는 기호는 없다.
이 슬픔은 절대적 내면성이 완결된 것이다.그러나 모든 현명한 사회들은 슬픔이 어떻게 밖으로 드러나야 하는지를 미리 정해서 코드화했다.
우리의 사회가 안고 있는 패악은 그 사회가 슬픔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165-)


내가 너무도 사랑했었고 너무 사랑하고 있는 이들이, 내가 죽고 또 그들보다 오래 살았던 이들마저 죽고 난 뒤에는, 이 세상에서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말거라면,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나는 죽어서도 계속 디억되어야 할 필요가 있고,내가 살았던 흔적을 세상에 남겨둘 필요가 있을까? 마망에 대한 기억이 아놔 그녀를 알았던 이들이 죽은 뒤에도 세상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면,내가 죽은 뒤에도 기억되어 차갑고도 위선적인 역사의 어딘가에서 계속 살아남게 된다는 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는 나 혼자서만 '기념비'가 되고 싶지는 않다.(-204-)


1년 반 동안 내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잘 아는 건 오로지 나 자신 뿐이다.그동안 나는 당연히 해야만 하는 임무들을 미루기만 하면서, 꼼짝도 않고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은 채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슬픔의 자기 순환적인 길 안에 갇혀 있었다.그러나 나는 언제나 한 권의 책을 씀으로써 하나의 작별을 마무리짓곤 했었다.그것이 나의 방식이었다. -집요함,은밀함- (-241-)


인간은 언젠가 죽음과 마주할 때가 있다.내가 죽거나 아니면,누군가가 죽을 때이다.죽음은 항상 내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일상적이면서, 어색함과 만날 때가 있다.나의 죽음과 자의 가족의 죽음,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죽음을 목도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단어가 3인칭 대명사처럼 남의 일인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경험이다.죽음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가치이며, 언어로 형용하기 힘든 감정이기도 하다.죽음과 슬픔에 대해서 내면 속의 영혼의 울림이라 부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죽음을 목도한 자신의 슬픔과 외로움과 불안은 그 어떠한 언어로서 표현되지 못하고,부유하게 되는 이유였다.사람이 이상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스스로 감정을 삭히면서 살아가는 것은 죽음이 우리 앞에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이질적이면서,응시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인간은 반드시 죽음을 겪어야 하는 존재이고, 그것을 똑바로 보아야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고차원적인 생각과 사회를 추구하면서, 인간은 나의 죽음 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죽음도 챙겨야 하는 순간이 찾아오면서, 인간은 점점 더 죽음에 갖혀버린다.그 죽음의 대상이 내가 직접 본적도 없고,소통해 존적도 없는 사람인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이 책은 나에게 겸손함과 위로와 안타까움을 동시에 체험하게 해주었다. 누군가의 애도 일기는 그것을 쓰는 사람의 기억의 실체이고, 감정이 있으며, 일기를 쓰는 목적이 있다. 그리고 그 끝마무리는 희극이 아닌 비극이 될 수 있다. 그건 이 책을 읽는 것은 좋지만, 스스로 애도 일기를 쓰면 안되는 또다른 이유이다.내 안의 슬픈 감정과 아쉬움이 머물러 있는다는 것은 유쾌하지 못하고,거기에서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면서, 삶에 대한 의미조차 내려놓게 된다.그 어떤 노력도 죽음앞에선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게 되면,우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마망의 죽음으로 인해 거기에 속박되는 삶을 살았던 롤랑바르트의 삶이 마망 알리에트 벵제의 삶을 따라가게 된 것은 불가피한 선택과 결정이었다.견디지 못하고, 넘어서지 못하는 것,그것이 그의 마지막 저작물 ,애도 일기>에 기록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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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네 산골 일기 - 청년사 풀꽃문고 5
송성일 지음, 류준화 그림 / 청년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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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언덕이 '웃갓재'고 ,저쪽 제일 깊은 골짜기가 '호장골' ,저쪽이 '밤골',그리고 저기가 '쑥디',음....저 아래 마을 입구가 '비나리 거리'고 저쪽은 '참샘골'이야.그리고 저기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집이 마을회관이고, 우리 집은 저기 '큰골' 웃마(웃마을)에 있어. 자 ,이제 우리가 살 집을 빨리 가서 보자." (-23-)


"니 어데서 왔는데?"
"멧 학년이고?"
"니 우리 동네에서 살라꼬 왔나?"
"니 혼자가? 언니나 동생도 없나?"
"너거 집 저 웃마에 있는 새집 맞제?"
친구들이 나에게 몰려들어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사투리로 갑자기 여러가지를 물었습니다. (-29-)


"고추를 심을라 카나 말라 카나,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 인자 밭으로 나오면 우짜노?" (-56-)


"아이고 ,저 논밭을 다 아떡하누?"
"안 그래도 농사지어 밥 먹기 힘든데 가뭄에, 홍수에, 태풍에.....참 하늘도 무심하시지.." 
아빠는 뉴스를 보다가도 비가 얼마나 오는지 보러 비바람 치는 마당에 계속해서 나갔다 들어왓습니다.집 앞 개울에 물이 얼마나 차올랐는지도 확인했습니다. (-91-)


"아빠는 농사지어서 망하지 않을 자신 있어?"
"응?"
나의 질문에 당황했는지 아빠는 잠시 대답할 말을 찾아 우물쭈물햇습니다. 하지만 금방 자신만만한 표정을 되찾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화야, 아빠가 최선을 다해서 우리 가족 밥 먹고 살 수 있게 할 거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 알았어?" (-137-)


"비나리 주민 여러분 이장이시더, 오늘 영민이 할아버지 상여가 아침 여덟 시에 나갈 예정이오니 주민 여러분께서는 아침 여섯 시 삼십분까지 돌아가신 어른 댁으로 모여 주이소,아,아....그라고 마을 청장년은 새마을 지도자하고 곳집에 가시갔고, 상여 좀 실어 오시면 고맙겠니더,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152-)


"아빠 , 그럼 동제는 또 뭐야?"
"화야, 동제란 말이다,정월 대보름날 저녁에 당나무 아래서 지내는 제사를 말하는 거야."
"근데 당나무가 뭐야?"
"아이고 답답해라.화야, 마을 입구에 서 있는 큰 느티나무도 모르니? 그게 바로 당나무야." 
"그게 당나무인 줄은 아는데 왜 당나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거야."
아빠는 나의 계속되는 질문에 답답해 못 참겠다는 표정을 짓고 침을 튀겨 가며 말했습니다.
"화야, 당나무는 마을을 지켜 주는 마을 수호신이 깃든 나무를 말하는 거란다." (-173-)


내가 아는 사람이 쓴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의미가 다르다.책은 그 사람의 삶이 녹여져 있고, 그 삶의 경험이 녹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친숙함과 그 사람의 익숙한 말과 언어와 마주하게 된다.특히 이 책은 그 분의 목소리를 느낄 수 있고, 상상하면서 ,감정을 상상하면서 읽어가게 되었다.


서울대 철학과 출신이었던 송성일님은 도시에서의 정해진 스케줄의 삶을 접고 농촌으로 귀농하게 되었다.도시의 삶과 농촌의 삶이 다르다는 것은 학교에서 또래 친구들의 질문에서 정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나와 남이 정확하게 구별짓는 도시의 삶과 달리 사촌에 팔촌까지 알고, 숟가락 숫자까지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 농촌의 삶이며,그들의 삶의 원칙과 절차이기도 하다.그래서 농촌에서의 삶이 익숙하지 못하고, 자꾸만 농촌 인구가 줄어드는 이유이다. 이러한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익숙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이질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일찌감치 농촌에 정착하게 되었다.사회적 인프라가 열악한 곳에, 문화를 심었으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과 사회적 안목을 채워 나가게 된다.지역 주민들의 시큰둥한 모습들이 조금씩 조금씩 바뀌게 된 이유는 저자 송성일님의 남다른 노력 때문이다. 더군다나 오지 중의 오지 봉화군 명호면 비나리 마을에 경북에 없는 유일한 미술관이 있으며, 그 미술관을 비나리 미술관이라 부르고 있다.이 곳에 비나리 미술관이 있는 이유는 송성일님의 아내이자 이 책의 그림과 삽화를 그린 아내 류준화 때문이다. 시골에 살면서도 자신의 에술적인 감각을 내려놓지 않겠다는 의지가 반영되고 있으며, 농촌에 살면서도 예술적인 감각을 잃지 않는 그러한 모습들이 잘 드러나고 있다.


그렇게 농촌은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농촌에 대한 편견이 지워지고 있었으며, 힐링의 공간, 열악한 농촌 환경에 대한 변화 모색,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도농복합적인 농촌의 모습을 갖춰 나가게 되었다.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곳, 그 과정에서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였으며, 도시에서 경험했던 것들, 자신의 직장 경험들을 도시의 사회적인 변화로 엮어 나가게 된다. 즉 농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가치를 잃어버리지 않고 보존하면서, 자신의 남다른 삶을 비나리 마을에 뿌리 내리게 되었으며, 마을 사람들과의 삶에 있어서 동화되는 삶을 추구하게 된다.남다른 삶을 살아가지만, 지역 사회에 이바지 될 수 있는 삶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였으며, 지역 발전, 잘사는 농촌이 되기 위해 애쓰는 그러한 모습들이 이 책에 기록되어 있으며, 청년 농민으로서,일꾼이 되기 위한 과정들이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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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나쁜 곤충은 없다 - 플라스틱 먹는 애벌레부터 별을 사랑한 쇠똥구리 까지 우리가 몰랐던 곤충의 모든 것
안네 스베르드루프-튀게손 지음, 조은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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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거처로 삼고 있는 호모 사피엔스,즉 인간은 지구의 정복자라고 말하면서, 지구 대륙 전역에 걸쳐서 살아가고 있는 생명체이다.그러나 인간이 생각하는 기준을 곤충 시회로 보면, 코웃음 칠 가능성이 크다. 호모 사피엔스 이전에 지구에는 곤충이 있었고, 호모 사이엔스가 멸종한다 하여도 곤충은 살아남을 것이기 때문이다.그만큼 자연환경에 순응하고, 적응력이 빠르며., 번식력이 상당히 높기 때문에,곤충은 인간의 다양한 분야에 많은 아이디어와 과학지식을 얻을 수 있는 창고이다.하지만 곤충 사회는 인간 사회와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도덕적으로 선과 악을 구별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곤충은 생존을 위해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먹이로 삼는다.번식력이 뛰어난 곤충은 근친상간은 물론이거니와 수컷보다 암컷이 절대적으로 많은 기형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다.그래서 이 책 제목이 <세사이 나쁜 곤충은 없다>였다.즉 이 책은 곤충의 삶과 생테계를 면밀하게 살펴 보고 있다.



인간은 지극히 이기적이며, 자연을 훼손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지구의 숨은 토양을 개발하고, 그 지구가 만든 자원을 야금야금 캐 먹고 살아왔다.그 과정에서 곤충이 오랜 시간동안 생성했던 생테계 구조를 파괴한 것은 물론이다.그러나 곤충은 게의치 않는다.인간의 환경오염보다 더 극한 기후와 날씨에도 견뎌 왔고, 생존을 위한 생테계를 스스로 만들어 왔기 때문이다.인간이 수렵생활을 접고 농사를 짓고 있지만, 곤충은 인간의 활동 이전에도 농사를 지어왔으며, 인간의 농사짓기의 지혜는 곤충의 생테계를 공부하면서 터득하고 있었다.어쩌면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다양한 인간 행위와 생테계 파괴에도 불구하고, 무척추 동물 곤충이 필요한 이유이다.여기서 인간의 농사는 인간의 생존을 위한 목적을 지니고 있지만, 곤충이 추구하는 농사는 균류를 배양하기 위한 농사였다.식물과 곤충은 동거동락하면서,그 과정에서 나온 배설물을 균류로 바꿔 나가는 것,그 혜택을 인간이 고스란히 배워 나가고 있었다.


곤충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인간의 과학 지식의 대부분은 곤충의 삶과 지햬를 통해서 얻어왔기 때문이다.비단을 짜고, 꿀을 얻을 수 있었고, 종이를 만들어서 글을 쓸 수 있었던 이유도 곤충의 전방위적인 활동 때문이다.그 하나 하나 살펴 본다면,인간이 결코 곤충의 삶을 가벼이 여길 수 없는 또다른 이유가 된다.살아가면서, 곤충이 가져오는 무한대의 유익함을 우리 스스로 가벼이 여길 수 없는 이유는 곤충의 생테계가 파괴되면,그 파괴로 인한 문제들을 고스란히 인간의 몫으로 되돌아 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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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은 1%의 기적 - 치열하게 살아온 전여옥의 인생후반전
전여옥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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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절로 감탄사다 나왔다.그는 정말 아주 조심스럽게 나이들어 있었다.60을 넘겼건만 배는 여전히 납작했고 적당히 잡혀있는 주름살과 혈색 좋은 피부는 참 배우답게 늙었ㄷ아는 생각이 들게 했다.그리고 여전히 남성적인 매력을 짙게 풍기고 있었다.저렇게 팽팽한 피부와 날렵한 몸매를 가지려면 의느님의 힘도 있었겠지만 그에 못지 않게 피나는 절제가 있었을 것이다. (-34-)


값을 치르니 2,300원 남짓이었다. 정말 가성비 짱이지 않나? 우중충한 외관과 달리 호텔은 깔끔하고 깨끗했다. 나는 백팩을 던져놓고 침대에 누웠다.여행이란 참으로 좋은 것이다. 
자유롭다.
홀가분하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한 시간 정도 쉰 뒤 미친듯이 걷고 또 걸었다.타이페이 시내를 종횡무진 했다. (-44-)


둘째,자기 신뢰를 강화하는 것이다.즉 ,나를 우선시하고 나의 장점을 발견하고 나를 격려하는 일이다.내 비록 그녀를 질투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내가 더 낫다는 걸 사실로 만들며 질투의 감정을 극복하는 것이다.질투하는 건 사실이지만 생각해보니 굳이 질투할 거리도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질투라는 감정을 매우 성숙하게 정리 정돈하는 방식이다. (-92-)


"다시 결혼을 하면 이 남자와 할까 하고요."
호랭이 담배 먹던 시절 이야기다.요즘은 남자들도 가족사진을 회사 책상에 올려놓고 있다."무슨 일이 있어도 생존해야 한다"는 전의를 불태우기 위한 실탄이라고도 한다.외국에서는 가족의 일 특히 아이들의 일은 그 어떤 경우보다 우선이 된다.
"아이 학부모 참관일이에요."(-153-)


하지만 진짜는 분명 있다.그 숫자가 적을 뿐이다. 진짜 사나이가 있듯이 세상에는 우리가 가려내고 판단해야 할 진짜가 있다.그리고 진짜들이 세상을 이끌어간다. 만일 진짜가 방기되는 조직이나 그룹이라면 그들 전체가 가짜인 사기성 집단인 경우가 많다. (-201-)


내가 겪은 진보주의자는 우리나라 경제를 말아먹은 (안타깝지만 내가 보기엔 그렇다) 전 정책실장 같은 무지개를 좇는 소년이었다. 자유보다 평등을 우선한다.나라가 개인의 삶을 책임져주는 복지지상주의를 추구한다.현실에 발을 딛고 또박또박 걸어가기보다는 하늘을 날고 싶어 하고 뜬그룸 잡는 이야기를 시도 때도 없이 한다.그런데 그것이 전부다. 
물론 진보의 가치를 절대 평가절하하는 것이 아니다.진보는 진보의 역할이 있다.약자에 대한 배려, 시대적 변화를 받아들이는 복지개념,인권 중시 등 우리 사회에서 소중하게 여겨지는 신념과 가치를 지키는 일 말이다. (-242-)


전여옥은 역시 전여옥이었다. 2004년 17대 국회의원이 되었고, 2008년 18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2012년 19대 국회의원은 박모 대통령과의 갈등 및 부지기수의 문제들 때문에 국회의원이 되지 못하였고, 그 이후 야인생활을 꽤 오래 해 왔었다. 그동안 드문불출하였던 전여옥이 다시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은 박모 대통령 탄핵인용 직후였다. 자신의 정적이 불행의 늪으로 빠져들 쯔음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서 네티즌들과 소통을하고 있으며,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노무현 정권과 이명박 정권까지,그 시간동안 정치를 해왔던 전여옥의 힘은 <일본은 없다>라는 베스트셀러 책과 도쿄특파원으로서 일했던 시간이다. 그러나 익히 그의 삶의 발자취를 알고 있다시피,그녀는 도덕적 흠이 상당히 많은 사람이며, 대중의 신뢰를 잃어버리게 된다.지금도 여전히 진보를 비판하는 입장에 서 있으며, 과거와 다른 자유로운 횡보를 보이고 있지만, 과거처럼 수많은 안티와 싸우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그래서 이 책을 읽은 이유는 그녀를 비판하는 입장에서 그녀의 지난 날을 느껴보고 싶어서이다.


이 책은 에세이집에 가깝다.자신의 소소한 일상들을 쓰고 있다.이제 환갑이 넘은 나이, 그녀는 인생의 후반기를 지나가고 있었다.기자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그 안에서 사람을 관찰하는 힘과 안목이 이 책에 있다. 그 가운데서도 자신이 보았던 매력적인 사람, 일상속의 다양한상황들을 놓치지 않고, 관찰해 나가고 있다. 매력적인 사람들 앞에서라면, 유심히 관찰하고 있으며, 자신의 인생 후반기의 삶에 있어서 주춧돌을 놓기 위한 하나의 포석이 되고 있다. 또래의 사람들과 소통하면서,자신의 영향력을 십분 발휘하는 노련미, 언제 어디서든 홀로서기를 할 수 있고, 연하의 친구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너그러움도 이 책속에 기록되어 있었다. 낯선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에게 서슴없이 다가가는 관대함, 소소하게 스쳐지나가는 인연들을 놓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전여옥은 전여옥이다. 정치에 대한 비판을 내려놓지 않고 있다.진보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을 보면,자칭 보수주의자라 부르는 전여옥 또한 거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과거 그녀가 망언을 쏟아냈으며,야인 생활을 하면서도, 보수 정치인을 비판하였던 그녀의 위선과 모순 또한 존재하기 때문에 그녀또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왔지만,여전히 정치의 변방에 머물러 있으면서, 누군가 자신을 써주길 바라는 그녀의 모습들이 때로는 안타까움 그 자체인 것 같은 느낌을 이 책을 통해서 지울 수가 없었다.하지만 이 책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 단 하나, 사람에게 신뢰와 믿음을 얻으려면 나 스스로 진짜가 되어야 한다는 그 사실을 전여옥 스스로 일깨워 주고 있다. 위선적인 사회 속에서 진짜가 나타날 때 그 사람의 파급력과 영향력은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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