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지음, 프레드 포드햄 그림, 문형진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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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멋진 신세계』는 발표(1932)된 지 90년이 훌쩍 지난 '디스토피아'를 그린, 고전소설이 됐다. 원작 소설은 대부분의 독자들이 알다시피 저자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는 영국 태생의 소설가이자 비평가이다. 이 소설은 발표 당시 사람들은 헉슬리를 무모한 공상가나 미치광이쯤으로 여겼다고 한다. 아무리 작품의 배경이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된 가상의 미래 세계라고 해도, 내용이 당시 사람들의 상상력을 초월할 정도로 황당무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100년이 채 지나지 않은 지금, 헉슬리의 예언은 더 이상 무모한 공상이 아니다. 인류가 현재까지 이룩해놓은 놀라운 과학적 성과로 비추어볼 때,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어쩌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까운 미래에 있는지도 모른다.  

『멋진 신세계』에서 헉슬리가 창조해낸 미래의 '반 유토피아(디스토피아)'는 국가 권력이 시민들의 정신을 너무나 완벽하고 효율적으로 장악하는 바람에 착취와 성취의 경계가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모호해지는 세계다. 소설 속 세계 국가들의 이상인 사회적 안정은 소비의 증가와 온갖 세련된 기술의 발달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여기에는 피임을 의무화하고 자유로운 성관계를 미덕으로 만든 국가의 인간 독점 생산도 포함된다. 다섯 계급으로 나뉜 사회적 카스트는 자아 만족을 촉진하기 위해 유아기는 물론 태내에서부터 복잡한 조절 단계를 거친다. 지배계층이 그 권력을 유지함으로써, 하층계급이 품을 수 있는 계급 간의 유동성에 대한 욕망은 애초에 제거된다.

세계 국가들의 이상을 모두 잡종 교배한 이러한 철학은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주장한 계급사회와 공리주의적 “행복”의 개념에 모태를 두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성이 개인의 궁극적 표현으로 팔리는 강도를 감안하면 국가 차원의 무조건적인 쾌락 장려는 반직관적이라고 보는 평론가들도 있지만, 금기와 번식에서 풀려난 성은 그 감정적 중요성을 뒤흔들고, 국가 권력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사적인 유대를 제거하는 데 도구가 되어 줄 뿐이다.



결말에서 우리가 “성인 취미”라고 부르는 성과 약물의 무분별한 배양은 이러한 것들을 완전히 무해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 『멋진 신세계』의 순진한 비판자들에게, 질서란 어차피 상품과 서비스의 조직화된 소비로 성문화된 하나의 끝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야망을 완전히 표현하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신념이야말로 세계의 독자들로 하여금 몸서리를 치게 하는 인식일는지도 모른다. 1932년경 세계는 과학의 발전이 사람들의 소비 욕구를 충족시킬 만한 상품의 대량 생산으로 유사 이래 최고의 풍요를 누릴 때다. 정치적으로나, 국가 간 이해 관계에 얽힌 국가의 불안정, 지나친 소비 시대의 부작용 등이 겹쳐 세계 대공황을 가져온 미국 대공황 시대이기도 하다. 최고도화된 과학이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세계였다는 말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소설 속에서 인간은 다섯 계급으로 나뉘어 공장에서 물건을 생산하듯 컨베이어 벨트 속 유리병에서 수정되어 태어난다. 대량 생산-대량 소비 시대를 풍자하고 있다. 특히 사랑, 유대와 같은 감정은 오히려 불결하며 본능적 쾌락과 유희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청결하고 살균된 이 세계는 모두가 행복한 유토피아라는 설정은 유토피아란 이 세상에 없는 상상의 세계란 점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준다. 『멋진 신세계』란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를 그린 것이다. 

『멋진 신세계』는 같은 영국 출신의 소설가 조지 오웰의 『1984』와 함께 디스토피아 양대 고전으로 꼽힌다. 『멋진 신세계』는 풍요로운 자본주의 세계의 무분별한 향락과 사치 등 사회적 관점의 소설인데 비해 『1984』는 공산주의 체제의 국가 권력의 전체주의적 지배 양상을 비판적으로 드러낸 정치적 풍자 소설이다. 『1984』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서방 국가들의 새로운 정치적 적으로 떠오른 나치사회주의 체제의 스탈린의 구 소련을 중심으로 한 국가들과의 냉전 분위기 속에서 출판 후 1년 사이에 영국과 미국에서만 약 40만 부가 팔렸다고 한다. 이후 세계 각국에서 잇달아 번역 출판되었다. 따라서 반공 작품이라고 말할 수도 있으나, 체제를 불문하고 당시의 사회 및 그 연장으로서의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전체주의적 정신풍토를 경고한 작품으로 평가되면서 고전으로 정착했다.



『멋진 신세계』 속의 아이들은 인공수정으로 태어나 유리병 속에서 보육되고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들의 세계는 지능의 우열만으로 장래의 직업과 지위가 결정된다. 과학적 장치에 의하여 개인은 할당된 역할을 자동적으로 수행하도록 규정되고, 고민이나 불안은 정제된 신경안정제로 해소된다. 이에 옛 문명을 보존하고 있는 나라에서 온 야만인은 이러한 문명국에서 살 수 없어 자살하고 만다. 줄거리는 간단하지만 소설이 품고 있는 의미는 크다.

우리는 모두가 똑같이 자유롭고 행복한 세계를 꿈꾼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를 보여 준다. 고난과 슬픔은 없다. 사람들은 행복하고 원하는 것은 뭐든 얻을 수 있으며, 얻을 수 없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나이가 들어도 늙지 않고 병에도 걸리지 않으며 그 누구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세계이다.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보자면 인간 개개인의 개성과 인간성은 배제된 상태다. 책임 없는 쾌락만이 가득하며 호기심은 말살되었다.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고 사유하지 않는다. 마땅히 따르도록 훈련된 것 외에는 사실상 어떠한 행동도 하지 못하도록 길들어진 이들은, 자신들이 자유로우며 최고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믿는다.

이 책 그래픽 노블 『멋진 신세계』는 이 행복하고 멋진 신세계의 단면을 잘라 독자들의 눈앞에 들이밀어 새로운 느낌으로 다시 읽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렇게 잘린 ‘멋진 신세계’의 단면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와 지극히 닮았다. 세뇌하듯 도시 곳곳에서 계속해서 보여 주는 ‘모두가 행복하고 모두가 서로를 공유한다’는 내용의 홀로그램이, 이모지와 SNS의 도상이 화려하고 청결한 도시와 어우러진다. 프레드 포드햄의 각색과 연출은 ‘기술의 발전에 의한 인간성의 상실을 경고하는’ 멋진 신세계의 주제를 직설적으로 보여 준다. 원작보다 직관적인, 그러나 더 날카롭고 강렬한 색채가 호수에 파문을 일으키듯 우리의 마음에도 물결처럼 번진다고 출판사 측은 소개하고 있다.



과연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로울까? 인간성이 말살되어 가는 시대에 인간은 어느 만큼 인간일까? 과연 우리는 안정이라는 이름하에 인간성이 말살된 ‘멋진 신세계’에 살고 있는가, 아니면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야만인’의 세계에 살고 있는가. 끊임없이 투쟁하고 사유하기 위해 읽어야 할 필수 고전을 그래픽 노블을 통해 더 쉽고 강렬하게 접한 것은 독서의 색다른 즐거움을 준다. 독자는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번역판)를 두어 번 읽었지만' 그래픽 노블'로 출간된 『멋진 신세계』는 처음이다. 한마디로 그림으로 『멋진 신세계』를 본다는 것은 읽고 상상하는 것과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무엇보다 강력한 느낌은 디스토피아 사회의 적나라한 치부를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보았다'는 느낌이다. 다행히 원작 『멋진 신세계』를 읽은 지 꽤 오래됐기에 강렬한 인상이 가능했는지도 모르겠다. 줄거리는 그대로 기억되었기에 가독력은 더 높아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만화 안의 글의 내용보다 인물의 말이나 표정, 배경 등에 눈이 더 자주 가는 여유가 있었기에 더 강렬한 인상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독자가 인터넷, 디지털 영상 시대를 살아오면서 시각적 이미지나 동영상에 익숙해졌기에 일어난 현상일지도 모를 일이다. 어떤 원인이 작용했던 독자에게는 신선하고 강렬한 느낌으로 원작이 표현하는 디스토피아의 세상을 잘 표현한 그래픽 노블로 읽힌다. 

독자는 십여 년 전에 우연히 〈가타카〉(1997)란 영화를 발견하고 본 적이 있다. 영화 파일 사이트에서 발견해 본 것이어서 기억에 많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그 영화를 보는 동안 몇 군데에서 『멋진 신세계』를 떠올린 적이 있다. 기억에 따라 여기에 몇 줄 적으려 위키백과를 찾아 영화 소개를 받았다. 이에 따르면 가상의 미래 세계에서 인간은 모두 인공수정으로 태어난다. 정상적인 성관계를 통해 아이를 낳는 것을 이 세계에서는 아주 부도덕한 행위로 여긴다. 인간은 거대한 사회를 돌아가게 하는 하나의 부품으로 수정 단계에서부터 국가의 관리 감독을 받는다. 앞으로 해야 할 역할에 따라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의 다섯 계급으로 분류되는데, 알파는 사회 지도층에 속하는 엘리트, 베타는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중산층, 감마는 하류층 그리고 델타와 엡실론은 몇 가지 유전자 타입을 가지고 양산되는 단순노동 담당자들이다. 이렇게 수정 단계에서부터 계급이 정해진 인간은 태아 상태에서부터 자신의 계급에 맞는 생각과 능력을 갖도록 철저히 세뇌교육을 받는다. 여러 가지 면에서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연상시킨다.



독자가 집에 가지고 있는 소담출판사 간 『멋진 신세계』(2015)에서 한 대목을 여기에 인용한다.  

“하지만 난 안락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참된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그리고 선을 원합니다. 나는 죄악을 원합니다.”

“사실상 당신은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는 셈이군요.” 무스타파 몬드가 말했다.

야만인이 도전적으로 말했다. “나는 불행해질 권리를 주장하겠어요.”

“늙고 추악해지고 성 불능이 되는 권리와 매독과 암에 시달리는 권리와 먹을 것이 너무 없어서 고생하는 권리와 이(?)투성이가 되는 권리와 내일은 어떻게 될지 끊임없이 걱정하면서 살아갈 권리와 장티푸스를 앓을 권리와 온갖 종류의 형언할 수 없는 고통으로 괴로워할 권리는 물론이겠고요.”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런 것들을 모두 요구합니다.” 마침내 야만인이 말했다.(p.362~363)


원저 :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


광범위한 지식뿐 아니라 뛰어나고도 예리한 지성과 우아한 문체에 때로는 오만하고 냉소적인 유머 감각으로 유명한 영국 출신의 소설가이자 비평가. 1894년 7월 26일 서리 지방 고달밍에서 토머스 헉슬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이튼 칼리지와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했다. 지적 정보와 함께 재치와 풍자로 가득 찬 다양한 방면의 저술 활동으로 유명한 헉슬리는 20세기 관념소설의 큰 줄기를 이룬 대표적 작가다. 소설가로서 널리 알려지기는 했으나 그 외에도 수필, 전기, 희곡, 시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멋진 신세계』는 그가 1932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한 미래 과학 문명의 세계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야만인 청년을 통해 두 세계, 즉 유토피아 세계와 원시적인 세계를 제시한 작품으로 문명 비판적 풍자와 도덕적 교훈이 잘 맞물려 현대 문명사회를 희화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진보주의에 대한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1958년, 『멋진 신세계』의 예언적 주제들을 심도 있게 검토한 『다시 찾아본 멋진 신세계』를 발표했다. 활동 후반기에는 힌두 철학과 신비주의에 깊이 끌렸으며 이 경향이 작품들에 반영되었다. 미국에 정착해서 살다가 1963년 11월 22일 캘리포니아에서 사망했다.

1916년 시집 『불타는 수레바퀴』를 출간한 이래 몇 권의 시집을 더 냈으나, 1921년 『크롬 옐로우』가 인정을 받은 후부터 일생동안 소설 창작에 심혈을 기울이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그의 대표작이라고 여겨지는 『연애대위법』(1928)은 다양한 1920년대 지식인들을 풍자적으로 묘사한 작품으로, 이 소설로 그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 밖에도 과학문명에 지배되어 가는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이 돋보이는 『멋진 신세계』(1932), 열여덟 살 때 완전히 실명했다가 차차 시력을 회복한 경험을 바탕으로 평화운동을 추구하는 작가 자신을 그린 『가자에서 눈이 멀어』(1936)를 발표했다. 이는 헉슬리의 ‘후기파’ 성향을 지닌 첫 소설로서, 그의 작품 세계에서 분기점 노릇을 한다. 또한 폭력의 부정을 역설한 『목적과 수단』(1937), 제3차 세계대전을 가상해서 쓴 『원숭이와 본질』(1948) 등의 저서가 있다.

또 1945년 《영원의 철학》을 통해 그때까지 서구 지성사에 전해오던 ‘영원의 철학’이라는 개념을 핵심적으로 통합하여 종교와 영성에 대한 이해를 혁명적으로 바꿔놓았다. 주요작품으로는 『어릿광대의 춤(Antic Hay)』, 『하찮은 이야기(Those Barren Leaves)』, 『연애대위법(Point Counter Point)』,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가자에서 눈이 멀어(Eyeless in Gaza)』, 『목적과 수단(Ends and Means)』, 『원숭이와 본질(Ape and Essence)』, 『루당의 악마(The Devils of Loudun)』, 『천재와 여신(The Genius and the Goddess)』, 『아일랜드(Island)』 등이 있다.


글그림 : 프레드 포드햄


1985년 영국에서 태어났다. 대학을 졸업한 후 화가와 강사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던 그는 우연히 이란 출신 만화가이자 감독인 마르잔 사트라피의 만화를 본 이후부터 일러스트레이터의 꿈을 키우게 됐다. “가볍고 재미있으면서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라고 말한 그는 현재도 [가디언], [피닉스] 등을 통해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 나가고 있다. 그린 책으로는 『해 질 녘』, 『존 블레이크의 모험』 등이 있다.


역자 : 문형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주립 대학교에서 연주학과 실용음악을, 노스텍사스 대학교에서 연주학과 서양종교학을 공부했다. 미국에서 11년간 거주하며 플런트, 이스트랜싱, 달라스 지역의 한국학교에서 강사 및 통번역가로 활동하였으며 현재는 숭의여자대학교 공연예술학과 겸임교수로 재직중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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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허영을 위한 퇴근길 철학툰 : 근현대 편 지적 허영을 위한 퇴근길 철학툰
이즐라 지음 / 큐리어스(Qrious)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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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철학을 뜻하는 영어 'philosophy'는 그리스어의 '필로소피아(philosophia)'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다. 필로는 '사랑하다' '좋아하다'라는 뜻의 접두사이고, 소피아는 '지혜'라는 뜻이다. 필로소피아는 지(知)를 사랑하는 것, 즉 '애지(愛知)의 학문'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한자로 쓰는 '哲學'의 '哲'이라는 글자도 '賢(어질다)' 또는 '知(알다)'와 같은 뜻이라고 고등학교에서 배웠다. 이처럼 철학이란 글자의 뜻으로 보아서도 단순히 '지'를 사랑한다는 것일 뿐, 그것만으로는 아직 무엇을 연구하는 학문인지 알 수 없다. 철학 이외의 학문은 대부분 명칭에서 내용을 알 수 있다. 이름만으로는 그 내용을 전혀 알 수 없는 학문은 독자가 알기로는 없는 듯하다. 독자의 부족한 지식의 범위 내에서 판단하자면 유일하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경제학이라고 하면 경제현상에 관해서 연구하는 학문이고, 물리학이라고 하면 물리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경제학이나 물리학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그것이 무엇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학문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철학의 경우는 그 이름만 듣고는 내용을 이해할 수 없는 이름을 붙였을까? 많은 백과사전은 철학이라는 학문의 대상이 결코 일정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풀이한다.

무엇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학문인지도 모른 채 시작한다면 학문은 어려울 것이다. 대체적으로 구체적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학문은 과학·수학 등이고 그렇지 않고 인간의 삶이나 삶의 지혜에 대해 공부하는 학문은 철학 혹은 인문학이라고 표현하지만, 그것마저도 정확한 표현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철학은 어렵다"라는 인식은 고대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싶다. 이를 테면 '나'는 누구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등 쉽게 답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인간은 '생각'을 통해 알아내려 했다. 과학적인 인식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고대에도 자연과학이라는 연구와 학자가 있었다고 한다. 자연 현상에 대한 공부의 이유는 인간이 먹는 식량 수확과, 자연 재해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해와 달, 별, 그리고 비와 바람 등에 대한 연구가 벼와 밀 등의 수확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어서일 것이다.



이런 자연 과학에 비해 철학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무엇을 위해 철학을 공부해야 하는가? 앞서 언급한 대로 인간, 삶, 지혜 등에 대한 공부는 뚜렷하게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데도 많은 학자들은 손에 잡히지 않는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평생을 생각하고 연구했을까? 그리고 수천 년 간 철학은 이어져 오고 있다. 오늘날 우리 인간의 삶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학문의 두 가지 분야를 독자에게 꼽으라고 말하면, 독자는 과학과 인문학을 꼽을 것이다. 여기에서 과학은 기본적으로 물리학, 화학, 생물학, 지구과학, 우주과학, 의학 등이 해당되고, 인문학은 철학, 문학, 역사학 등을 포함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인식이 달라졌지만 지난 세기 우리 산업화 시대에는 철학이나 역사학, 인문학은 푸대접이었다. 산업화에는 문과보다는 이과, 인문학보다는 경제학이나 공학 등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적 요구가 이런 상황이니 대학 역시 인문학보다는 공학이나 경제학과 관련된 학과가 훨씬 많았다. 대학 졸업하면 바로 사회에서 이용할 수 있는 학문이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추세는 서양 문명,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에 자연스럽게 미국의 학문으로부터 영향 받은 바가 크다. 미국의 학문도 사실 모두 유럽의 문명을 그대로 답습했다. 철학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보니 서두가 길어진다. 이 책 『지적 허영을 위한 퇴근길 철학툰』(근현대편)은 우리가 어렵다고 인식하고 있는 철학과 철학자들의 생애를 바탕으로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쓰인 책이다. 표제어가 받아들이기엔 거리낌이 있다. '지적 허영'이라는 말 때문이다. 저자 입장에서 겸손한 표현을 한 것이겠지만 자칫 철학이라는 학문이 지적 허영을 채우기 위한 학문으로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철학은 오히려 지적 내실을 기하는 학문이지, 결코 허영심을 채우는 학문은 아니기에 그렇다. 독자도 철학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 이런 책이 나오면 관심을 먼저 갖는다. 쉽게 설명이 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지적 허영심을 채우려고 하는 학문은 아닌 것이다. 만약 그런 인식으로 철학 공부를 한다면 어쩌면 철학의 문앞에 다다르기도 전에 돌아설 것이다. 다만 철학의 체계를 배우기엔 이 책처럼 좋은 책도 드물 것이라고 독자는 생각한다. 철학도 학문으로 주욱 이어져 왔기에 분명히 흐름이 있을 터, 그 흐름을 알기에는 그림을 보며 배우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될 것이란 기대가 작용한 때문이다.



철학책은 문자로 된 책을 대해서는 홀로 공부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철학사를 공부하려 하다가는 고대 철학의 범주에도 벗어나기 전에 어쩌면 생을 마감할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안다는 것은 모순적 행위이다. 내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안다는 것 자체가 다른 사람도 내 생각을 알고 있다는 전제가 되기 때문이다. 전제가 모순된다면 평생 공부해도 지혜에 다다르기에는 어림없을 터다. 이럴 때 이 책이 필요성이 커진다. 이번 출간된 책은 '근현대편' 개정판이다. 이전에 고대·중세편에서 18명의 철학자들을 먼저 다뤘다. 이번 근현대편에서는 21명의 철학자들이 나온다. 저자 이즐라는 자신이 철학자라고 고집하지 않는다. 오히려 철학 무용론을 주장한다는 분이다. 그런데 어떻게 철학 책을 내게 됐을까? 

저자는 ‘책을 읽으면 금세 잊어버리는데, 독서나 지식 같은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라는 의문을 품고 ‘우리 삶에 철학이 쓸모 있을까’ 하는 고민도 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철학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고 깨닫게 됐다. 저자는 이 책을 읽고 난 뒤 철학자의 사상이 기억나지 않거나, 조금만 읽다가 책을 덮어버리게 되더라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읽는 행위 자체가, 지식을 만나고 지성을 채우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허영심 가득한 독서라도, 나만의 의미를 길어 낼 수 있다는 이유다. 정답 없는 사유가 삶과 인간, 세상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해준다고 저자는 믿는다고 밝힌다. 저자는 색다른 인문학, 뭔가 다른 철학책을 원한다면 『지적 허영을 위한 퇴근길 철학툰』으로 시작해도 좋다고 자신 있게 내민다. 저자가 이 책을 쓰기 위해 관련 책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사다가 읽었다고 책 뒷 부분 〈작가의 말〉에서 털어놓는다. 다 읽지도 않을(못할) 책을 잔뜩 샀다. 책을 쓴다는 이유로. 그 자체로 허영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집에 책이 많으면 누가 자신을 판단할 때 '지식인' 혹은 '지식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주기를 바라면 그것은 '허영심' 맞다. 책을 많이 사는 것과 많이 읽는 것은 다르다. 의미도 다르고 동기도 다르다. 읽지 않을 것을 알고 누군가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허영심에 다름 아니다. 앞에 '지적(知的)'이란 수식어를 붙여도 허영심엔 변함 없다. 그러나 책을 쓰기 위해 읽기도 하고, 인용도 한다면 그것은 지적 탐구심이지 지적 허영심은 아닐 터, 저자의 행위는 지적 탐구라고 독자는 말하고 싶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책은 근현대 서양 철학자 21명이 등장한다. 독자의 빈약한 지식으로는 21명 가운데에도 모르는 철학자가 있지만 아무튼 대표적 철학자들이 주로 쓰였을 것이다. 유명한 철학자들은 깊은 사유도 있겠지만 그것을 책으로 남겨야 그의 철학을 이해하게 된다. 쉽게 표현하면 알려지게 된다. 책이 아니면 누가 무슨 철학을 하고 어떤 사람인가를 알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책만이 오롯이 그의 철학이나 사유를 담아낼 그릇이었다. 오늘날엔 영상이나 기타 다른 방법으로 남길 수 있지만 근대라는 서양 세계에는 책이 가장 유용하고 좋은 전달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어떤 생각을 갖고 있고 그의 사유의 내용은 무엇인지 모두 저서로 남은 것이다. 가끔은 강연 자체가 남은 것도 있지만 현대, 그것도 최근 21세기에 들어서서 가능한 일이다. 

이 책의 21명의 철학자들의 철학 내용을 살펴보면 당시의 유럽 사회의 문명과 사상을 엿볼 수도 있다. 또 그들의 생애에 대해 연구하면 어쩌면 그의 철학의 원천과 원동력을 추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21명의 철학자, 22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 명이 각 한 장을 차지하고 있다. 22장이 된 것은 칸트가 유일하게 2개 장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각 장의 제목은 철학자의 대표 사상, 또는 철학의 성격 등을 내포하고 있다. 주의 깊게 살펴볼 것을 독자는 권유하고 싶다.

1장 「철학책은 왜 읽는 걸까?」-르네 데카르트, 2장 「어떤 철학자를 가장 좋아하세요?」-바뤼흐 스피노자, 3장 「낙관주의자, 그리고 비관주의자」-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 4장 「인식과 존재의 상관관계」-조지 버클리, 5장 「관용에 관하여」-볼테르, 6장 「욕망과 현실 사이」-데이비드 흄, 7장 「여긴 어디? 나는 누구?」-장 자크 루소, 8장 「나는 내가 천재인 줄 알았다」-임마누엘 칸트 Ⅰ, 9장 「먼저 인간이 되어라」-임마누엘 칸트 Ⅱ, 10장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건」-게오르크 헤겔, 11장 「별은 어둠 속에서 빛난다」-아르투어 쇼펜하우어, 12장 「이성에게 자유를, 감성에게 포용을」-존 스튜어트 밀, 13장 「왜, 아직도 마르크스를 찾을까?」-카를 마르크스, 14장 「철학도 예술일 수 있을까?」-프리드리히 니체, 15장 「철학의 쓸모」-존 듀이, 16장 「언어가 뭐기에」-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17장 「형이상학에 대한 형이상학적 끌림」-마르틴 하이데거, 18장 「실수해도 괜찮아」-칼 포퍼, 19장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뭘까」-장 폴 사르트르, 20장 「악이란 무엇인가?」-한나 아렌트, 21장 「아는 것이 힘? 아는 것이 힘!」-미셸 푸코, 22장 「나는 나를 해체할 권리가 있다」-자크 데리다 등이다.



철학에 관심을 가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독자로서는 이 책에 나온 철학자들의 사상이 대부분 삶의 방향을 정하는 데 절실한 말들이어서 놀랍다. 대부분의 철학자 이름은 수없이 들어 알고 있지만 처음 듣는 이름도 있다. 조지 버클리와 자크 데리다이다. 책에 따르면 조지 버클리는 영국의 철학자이자 성직자이다. 17∼18세기 영국 고전경험론을 대표한다. 신흥 자연과학의 유물론과 동시대의 무신론·이신론·자유사상에 대하여 그리스도교를 변호하는 호교론(護敎論)에 있다고 주장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인지원리론(1710)』이 있으며, 그후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복음(福音)을 전하기 위하여 버뮤다섬[島]에 이상적인 칼리지를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아메리카로 건너갔으나 그 계획은 실패했다. 또 카뮈와 사르트르의 영향을 받으며 철학을 공부하는 동안에 반유태주의와 유태 민족주의에 대해 똑같이 반감을 갖게 된 자크 데리다는 자신의 소속 또는 자기 동일성으로 인한 실존적 고통은 ‘고유한 것의 해체’라는 철학적 형태를 취했다. 주저는 『기하학의 기원』(1962)다. 두 사람은 독자가 잘 알지 못하는 철학자여서 이 책을 읽으며 수확한 철학자와 이들의 철학 사상이다. 

독자의 관심을 가장 끄는 철학자는 카를 마르크스다. 독자가 대학 다닐 때만 하더라도 카를 마르크스는 금지인물이었고, 그의 저서는 금서였다. 공산주의 혁명 사상을 이론적으로 확립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북한과 이념적 차이로 분단된 후 전쟁과 냉전 시대를 거쳐 아직까지 공산주의에 대해 비체험적 두려움을 갖고 있는 독자로서는 구 소련이 붕괴되며 무너질 줄 알았던 공산주의 체제가 세력을 많이 잃었지만 아직도 굳건하고 냉전의 연장선 상에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대척점에 서 있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의 중요한 철학자이고 그의 저서는 유효하다고 하는 데서 다시 관심권 안에 두게 되었다. 이 책에서는 카를 마르크스를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세상을 바꾸려 했던 열성적 혁명가"로서 소개하고 있다. 책에 따르면 영국의 공영방송 BBC는 설문조사를 통해 지난 1,000년 동안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책으로 『자본론』을, 가장 위대한 사상가로 마르크스를 꼽은 적이 있다. 그림 속 화자는 "마르크스가 그렇게 대단해?라고 생각하지만 아인슈타인, 뉴턴, 다윈, 칸트를 제치고 수많은 사람이 마르크스를 가장 위대한 사상가로 꼽는 이유는 무엇일까?라고 생각에 잠긴다. 그림 속 화자는 "사르트르의 말처럼 마르크스주의를 낳은 상황이 극복되지 않았기 때문일까?라고 고뇌하는 모습을 보인다.



저자는 그림과 말풍선, 지문을 통해 마르크스의 출생과 학업, 그리고 철학 공부, 철학 동지(헤겔) 등을 설명한다. 그의 철학적 사유는 헤겔과 맥락이 같고, 〈유물론〉을 제시한 루드비히 포이어바흐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인간 중심의 포이어바흐를 지지하면서도,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사변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 속에서 행동하는 인간의 실천적인 문제라고 지적한다. 마르크스는 이론의 힘과 현실성을 실천의 문제로 보았고, 자신의 사상을 행동하는 철학으로 정립시킨다. 이후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과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을 비판적으로 종합하여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역사관을 제시한다. 그는 〈공산당 선언〉에서 "인간의 역사란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마르크스는 그림 속 말풍선에서 "이를 이해하려면 먼저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책의 지문에 따르면 '생산력'은 사회의 물질적 발전 정도로 생산 수단에 따른 생산 수준을 뜻하고, '생산관계'는 생산 수단의 소유관계를 비롯하여 생산 과정에서 맺어지는 모든 관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계급은 생산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주인과 노예, 귀족과 농노,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특정 시대의 사회는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일치한다. 하지만 생산력은 도구와 기술의 발전으로 나날이 증가하는 데 비해, 생산관계는 구조적으로 조직화되어 굳어져 있다. 이러한 모순이 심화되어 임계점에 다다르면 생산관계에서 변화가 일어나 다음 시대의 역사적 단계로 넘어간다는 이론이다. 마르크스는 분업을 통한 생산력의 발전이 중세 체제를 붕괴시키고 근대 자본주의를 불러왔다고 보는 것이다. 이에 따라 마르크스는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비롯한 물질적, 경제적 구조를 토대(하부구조)로 보았고, 그 위에 위치한 정치, 문화, 종교, 법, 예술은 상부구조로서, 하부구조에 의해 규정된다고 생각했다. 즉 마르크스의 생각은 인간의 의식이 사회적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가 인간의 의식을 결정한다는 주장이다. 저자는 이처럼 마르크스의 이론의 초기부터 결론에 이르는 지문과 그림을 통해 설명해준다. 마지막 페이지에서 저자는 다시 처음의 생각으로 빠져든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이 마르크스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그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냉철한 분석 때문이라기보다 고통받는 사람을 위해 불꽃처럼 투쟁했던 마르크스의 뜨거움 마음에 인간적으로 공감하기 때문은 아닐까?하고 깊은 생각에 빠진다.


저자 : 이즐라


쓸데없이 이런저런 것이 궁금해서, 끌리는 대로 이런저런 책을 읽고, 조심스럽게 이런저런 만화를 그린다. 최근에는 뇌의 신비에 깊이 빠졌다. 진작 빠질 걸 그랬다. 내 뇌는 어딘가에 빠지는 걸 좋아하나 보다. 또 무언가에 빠지고 싶다. 지은 책으로는 『지적 허영을 위한 퇴근길 철학툰』, 『지적 허영을 위한 퇴근길 철학툰 - 고대·중세 편』이 있다.

leezla@naver.com

https://www.instagram.com/chosik_leezla




<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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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원, 은, 원
한차현.김철웅 지음 / 나무옆의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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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 작품 『은원, 은, 원』은 두 가지 점에서 미스터리하다. 하나는 소설 작품을 두 사람이 공동집필하는 게 가능한가?다. 독자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소설 한 작품을 공동 집필했다고 밝힌 것은 여간해선 드문 일이다. 독자 기억으로는 2년 전쯤 미국의 소설 작품을 형제 공동 이름으로 발표한 것을 본 적이 있을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논문이나 논저, 연구서 등은 공동 저자가 가능하지만 소설 작품은 허구를 바탕으로 사실처럼 형상화해 보여주는 것인데 허구(상상)가 공동일 수 있을까 하는 점에서다. 부부라 할지라도 시나 소설 등 문예 작품 공동 저자로 명기한 것은 없었던 것 같다. 물론 모든 작품의 사실 여부는 독자가 모르지만···. 또 하나는 소설 내용처럼 진짜 인간(이런 표현은 쓰기 싫지만 복제 인간에 반대되는 개념을 말할 땐 불가피하다)과 복제 인간과의 사랑 여부다. 복제 인간이라도 피복제된 사람의 기억이나 감정, 이성적 판단이 다르지 않을까? 외모나 혈액형 등은 같을 수 있어도 감정이나 기억을 다스리는 뇌의 복제도 가능한가?라는 의문에 부닥친다. 물론 이 미스터리도 독자의 과학·의학 지식의 부족에서 비롯된 의문이니 독자를 비난한다 해도 할 말은 없다. 독자의 의문에 "소설에서는 가능한 일이지만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이야기"라고 주장하며 독자의 의문을 일축한다면 그것은 무책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소설가 한차현과 영화인 김철웅이 공동 집필한 'SF 연애소설'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작품 『은원, 은, 원』의 남여 주인공들이 처음 서로를 알게 되는 공간은 물류센터의 야간 아르바이트 현장이다. 남자 주인공 차연은 홀로 사는 반지하 방을 나와 두 시간을 전철과 버스로 달려 일터 현장에 도착한다. 산더미처럼 출력된 송장을 일일이 확인한 뒤 헤아리기조차 어려운 물품 중 해당 품목을 ‘피킹’하는 시급 일용직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스물아홉 살의 청년이다. 

그 앞에 나타난 여자 은원은 한 인터넷쇼핑몰에 소속된 서른다섯 살의 팀장이다. 신자유주의와 플랫폼노동 시대의 일면을 응축한 공간에서 시작되는 그들의 소소하고 잔잔한 연애담은 순진한 느낌마저 든다. 저녁시간에 구내식당에 가는 대신 직접 싸온 바나나를 까먹으며 휴게실에서 스티븐 킹의 소설을 읽던 그에게 다가온 은원은 차연이 무심히 건넨 바나나에 은원은 도시락으로, 이후엔 즉석 식품 세트로 화답한다. 두 사람은 인연을 이어가던 중, 은원이 자신의 마음 한구석을 점차 잠식해가는 것을 느끼던 차연은 용기를 끌어모아 그녀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어느 날 은원의 갑작스러운 실종으로 소설은 기이한 미스터리로 변신한다. 그리고 차연이 은원을 되찾고서 은원의 속사정이, 그녀의 정체가 드러난 뒤 『은원, 은, 원』은 누아르 색채를 띤 SF 분야로 확장된다. 이 책에 대해 출판사 측은 소설가 한차현은 그의 열다섯 번째 장편소설 『은원, 은, 원』을 김철웅 감독과 공동 기획·집필함으로써 한 편의 스타일리시한 영화 안으로 들어가는 듯한 몰입도 높은 서사를 보여준다고 소개한다. 

출판사에 따르면 한차현은 20년 넘게 소설을 쓰는 동안, 혁명을 꿈꾸는 유전자합성인간, 외계인으로 변신하는 교회 목사, 남성용 정조대에 갇혀 고생하는 여관 여행자, 자신의 허벅지살을 도려내어 그것으로 만두를 만들어 파는 분식점 사장, 가글액으로 외계 좀비를 물리치는 고등학생 등 독특한 인물들을 형상화해온 작가다. 이번 출간한 소설 『은원, 은, 원』에서도 첨단 과학기술에 기반한 인물 ‘은원’을 내세웠다. 또 다른 주인공이자 이야기의 중심인 ‘차연’ 역시 한차현의 소설에 반복해 등장하는 이름으로, “슬프고 음울한”, 그리고 “절절한”(작가의 말) 이 소설을 힘 있게 이끌어가는 캐릭터로 빛난다. 첨단 기술을 소재로 하기에 기존의 연애소설과 결을 달리하는 이 소설은 존재의 근원, 관계의 근원, 끌림의 근원에 질문을 제기하는 작품이다.(독자는 비로소 이 소설의 표제어에 대해 이해한다) 마치 평행우주를 보는 것처럼 과거, 현재, 미래를 섞어놓은 입체적 시간 구성은 이 작품을 더욱 역동적으로 만든다고 출판사 측은 설명한다.

두 사람은 만난 지 600일 기념으로 제주도 여행을 다녀온 뒤 연락이 되지 않았다. 은원은 다니던 회사에도 출근하지 않았고, 은원이 살았던 집으로 찾아간 차연의 눈에는 은원의 일상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갑자기 은원이 사라진 것이다. 차연은 은원의 유일한 친구 성이연을 찾아갔다가 의외의 인물을 만난다. 그리고 모든 기억을 잃은 은원을 병원에서 다시 마주친다.



차연은 은원을 찾아다니던 중 만났던 실종수사전담팀 경찰들이 차연을 위로하느라 했던 말을 기억한다. “대한민국은 실종 공화국이에요. 시간당 18세 미만 미성년자 3명, 성인 5.3명이 실종이나 가출로 신고 접수됩니다. 매일 미성년자 71명과 성인 127명의 실종신고가 발생한다는 것이지요. (중략) 천만다행으로, 그들 중 거의 95프로가 일주일 안에 실종해제 처리되곤 해요. 결국은 아무 탈 없이 귀가한다는 의미예요. 세상 모든 실종은 세상 사람들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이유를 갖고 있지요. 그러니 너무 걱정 마세요. 제 말씀은, 걱정을 너무 심하게 하지는 마시라는 겁니다.”(p.72)

그러나 차연은 더 우울해진다. 은원에 대해 아는 것이, 누군가 은원에 대해 물었을 때 대답할 것들이 뜻밖에 많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600일. 햇수로 3년. 그 누구보다 은원에 대해 많이 이해하고 있다고 자신했는데.

은원은 정말 은원일까. 기억만이 사라졌을 뿐 예전 은원과 같은 사람일까. 차연이 혼란스럽다. 또는 두렵다. 은원을 다시 만난 이후로 하루 또 하루, 어느 결에 나쁜 풀처럼 싹트고 자라고 번진 혼란이다. 곁에서 걱정해주고 격려해주는 친구들이 눈치챌까 봐 혼란스러운 두려움이다. 차이. 보이지 않는 차이. 은원을 다시 만나, 많이 반갑고 조금 서먹한 속에서, 어딘지 이상하다는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p.133)

이런 부분은 혼란은 물론, 섬뜩함마저 풍긴다. 독자들에 따라 느낌이 다르겠지만 인공지능(AI), 로봇, 더 나아가 복제 인간까지 이르는 상상으로도 공포감을 자아낸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시간, 공간, 질서 등이 한꺼번에 무너지고 차원이 다른 세상으로 자신을 잊은 채 떨어진다는 상상은 죽음의 공포보다 무섭다. 'AI에 지배당하는 인간'의 시대도 끔찍하지만 복제 인간의 세상은 어쩌면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산업화 시대 아날로그 감성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갑자기 근미래로 순간 이동하는 듯한 느낌이다. 십여일 후 은원이 나타난다. 그런데 은원에게는 병이 있었다. 〈베르니크 코스타로프 증후군〉이다. 독자로서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병명이다. 베르니크 코스타로프 증후군을 앓으면, 기억상실증이 발병한다고 작품 속에 나와 있다. 뇌신경 이상 등 알 수 없는 이유로 별다른 전조증상 없이 갑자기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해리성 기억상실증이 발생한다고 한다. 은원의 오른손, 검지와 엄지 사이, 초승달과 별 무뉘 타투가 과거와 달라 보인다. 초승달이 커졌고 별의 위치가 다르다. 차연은 혼란스럽고 당황스럽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병에 대해 설명하는 은원의 어머니와 고모. 어머니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인은 언젠가 은원이 보여주었던 폰 사진 속 어느 얼굴을 닮았다. 어머니와 고모가 찾아온다. 아니 연락이 와 만난다. 이들의 말에 따르면 은원에게 어느 날 갑자기 개인 고유의 과거 정보들을 대부분 회상 못 하는 해리성 기억상실증이 발병했는데 이 증상이 1년에 한 번 또는 7~8년에 한 번 예고도 없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갑자기 정신을 잃었죠. 기절한 채로, 계속 잠들어 있다가, 사흘 전에 의식이 돌아왔어요." 두 사람은 은원의 첫 발병 이야기부터 가장 최근의 일까지 자세히 들려준다. 차연은 기억을 되돌려 은원과 제주 다녀오던 날 은원의 미심쩍은 행동을 기억해낸다. 작은 변화거리가 필름 돌아가듯 머리를 스치자 '전조 증상'이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은원의 고모가 다시 묻는다. “은원이가 행복하기를 바라나요. 장차 어떠한 경우건, 은원이를 여전히 은원이로서 이해해주고 아껴줄 수 있나요." 차연은 다시 기억을 잃은 은원이 일상을 되찾는 것을 기꺼이 돕겠다고 나선다. 병원에 있는 은원을 다시 만난 차연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은원을 다시 만나 두 사람이 함께했던 과거에 대해 하나하나 찬찬히 들려준다. 그렇게 새로운 시간을 쌓아가고, 공유된 추억을 만들어간다.



이후의 줄거리는 이 작품이 소설이기에 더 이상 쓰기에는 스포일러가 될 듯하다. 줄거리는 줄이고, 대신 소설의 성격과 주제에 대해 출판사 측의 말을 빌어 몇 마디 덧붙인다. "소설 『은원, 은, 원』은 잃어버린 사람, 잃어버린 기억, 잃어버린 정체성을 찾아 시간을 넘나들며 방황하는 이들의 초상을 보여준다. 복제인간이라는 SF 소재가 이 작품에서는, 우리와 먼 시간 공간이 아닌 바로 지금 이곳에서 현실적으로 펼쳐진다. 잃어버린 것, 사라진 것을 되찾는 데 결정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은 혼란과 두려움 가운데 남은 기억의 힘이다. 그 힘으로, 사라진 연인의 빈자리를 버텨내고, 사라진 연인의 흔적을 추적하고, 사라진 연인의 기억이 되살아나도록 격려한다. 끄떡없이 매몰차고 거대한 줄로만 알았던 비가시권의 권력도, 그 휘하의 사람들도 기억의 서사가 불러온 감동의 물결에 휩싸인다. 그리고 유일한 존재라고 믿었던 연인을 실제로 상실했음에도, 다시 관계 그려가기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우리가 사랑한 것의 근원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저자 : 한차현


고전적인 서사의 안정감과 신세대다운 위트를 이색적으로 조화시켰다는 평을 받으면서 평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아온 작가다. 1970년 서울 동대문에서 태어났다. 1998년 단편소설 「청계산의 남자」를 발표하며 월간문학 소설부문 신인상(제84회)을 받아 등단했다. 1996년 한국외국어대학교 동양학부를 졸업하고 출판사, 잡지사 등에서 일했으며,1999년 장편 소설 『괴력들』을 발표한 이후 『여관』 『왼쪽 손목이 시릴 때』『영광 전당포 살인사건』 등 장편 소설과 소설집 『대답해 미친 게 아니라고』『사랑이라니 여름 씨는 미친 게 아닐까』『내가 꾸는 꿈의 잠은 미친 꿈이 잠든 꿈이고 네가 잠든 잠의 꿈은 죽은 잠이 꿈꾼 잠이다』를 줄기차게 써냈다. 젊은 소설가 모임 '작업'의 동인이다. 그 외 소설『슬픔장애재활클리닉』이 있다. 황소자리 O형 개띠. 삶이란 즐거움의 완성임을 20대에 깨달았지만, 평소의 소설 쓰기와 음주 음악 음행이 그 진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아직 불확실한 편이다. "속 편한 놈"이란 소리를 어째 나이 들수록 듣게 되는데, 더 많이 더 깊이 더 천천히 느끼는 삶을 살아가고자 노력할 뿐. 2021년 8월 인왕산이 잡힐 듯 보이는 종로구 옥인동 노란 집에서 아내 문은, 딸 교원과 함께 소설 쓰며 술 마시며 안주 만들며 음악 들으며 영화 보며 화분 키우며 고양이털과 싸우며 대충 잘 사는 중.


저자 : 김철웅


1993년 충무로 촬영부로 상업영화 현장 입문. [하피] 조감독, [예스터데이] 제작팀, [동승] 메이킹 등 다수의 상업영화 스태프 경험. 2010년 시나리오 [꾼]으로 제1회 NHN(네이버) 게임문학상 은상 수상. 2018년 중국 동영상플랫폼 아이치이(愛奇藝, iQIYI) 웹영화 [여의주방] 각본 각색. 그간 13편의 독립(단편)영화를 제작하고 22편의 장편 시나리오를 작업했지만 업계 전문용어로 엎어지거나 주목받지 못함.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연출지부 소속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워(?) 그 신분을 숨기며 살고 있다. ‘1분에14타’, ‘MC편도준’ 등의 닉네임으로 영화 관련 커뮤니티나 팟캐스트에 자주 출몰했음. 현재 안양과 상암동을 오가며 여러 가지 빅픽처를 구상 중.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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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평화론 - 전쟁과 폭력의 시대에 다시 읽는
이문영 지음 / 미래의창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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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톨스토이 평화론』은 명확하게 두 가지 목적을 갖고 쓰였다. '왜 평화는 오지 않는가?', 그리고 '왜 지금 톨스토이인가?'이다. 저자 이문영은 「전쟁과 폭력의 시대에 다시 읽는 톨스토이 평화론」이라는 제목의 책의 〈서문〉에서 “러우전쟁 후 많은 강연을 하고 방송에 출연했다. 한국 언론이 말해주지 않는 것, 그래서 우리가 몰랐던 전쟁의 이면을 주로 다뤘다. 전쟁에 대한 반대는 사실에 근거해야 하며, 그럴 때만 힘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라고 집필 취지를 밝히고 있다.

세계사를 통틀어 가장 문제적이고 논쟁적인 인물 중 하나인 톨스토이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하 '러우전쟁') 지지자와 반대자 모두 자신의 뜻을 알리는 방편으로 톨스토이를 손에 들었다. 푸틴과 지지자는 톨스토이를 앞세워 전쟁의 권위를 세우려 하고, 비판자는 톨스토이를 내세워 전쟁의 정당성을 허문다. 『전쟁과 평화』가 침략자의 최애 소설인 동시에 반전(反戰)의 확고부동한 기호로 함께 쓰이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전쟁 지지와 반대로 갈라진 톨스토이 후손들은 저마다 '톨스토이의 유산'을 근거로 내밀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가능할까? 저자의 답변은 명확하다. 

"비밀은 '두 톨스토이'에 있다. '우리가 몰랐던 톨스토이' 또는 톨스토이 대 톨스토이의 대결'이라는 이 책의 주제도 이와 관련된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그의 생애는 '두 톨스토이'들의 공존으로 요약할 수 있다. 성자 톨스토이 vs 사상가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를 쓴 톨스토이 vs 『부활』의톨스토이, 애국자 톨스토이 vs 아나키스트 톨스토이···. 몇 가지만 추려보아도 설득력 있는 답변을 낼 수 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저자는 이 책의 본문에서 여러 차원의 두 톨스토이를 두루 다루지만, 여기 〈서문〉에서는 애국심을 두고 대결하는 두 톨스토이에 대해 말한다고 밝힌다. 한편 러우전쟁은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본격적으로 침공하면서 발발했다. 이젠 2년 4개월째로 접어들고 있다. 이는 제2차 크림반도 전쟁으로 명명된 러우전쟁이 당초 짧은 기간 내에 러시아의 일방적 승리로 일찍 종결되리라는 예상을 뒤엎고 우크라이나의 선전과 러시아의 연이은 패배와 졸전으로 장기화되었다.



저자에 따르면 러우전쟁이 2014년 크림반도가 러시아에 합병되었을 때 이미 파국의 씨앗이 뿌려졌음을 감안하면 10년 차로 해도 무방하다. 크림과 전쟁 모두 톨스토이와 이리저리 연이 깊다. 젊은 시절 톨스토이는 피 끓는 애국청년이었다. 그가 조국 수호를 외치며 지원한 대표적 전쟁이 바로 '크림전쟁'이었고, 그를 전국구 스타로 만들어준 소설이 바로 이를 다룬 「세바스토폴 이야기」였다. 소설을 관통하는 주된 파토스는 애국주의로, 이는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략을 다룬 『전쟁과 평화』도 마찬가지다. 크림전쟁 당시 영국-프랑스-튀르크 연합군과 싸우던 알렉산드르 2세는 「세바스토폴 이야기」를 번역해 러시아인의 애국심을 널리 유럽에 알리라 명했다. 이와 비슷하게, 히틀러와 싸웠던 2차 세계대전 당시 스탈린은 『전쟁과 평화』를 널리 보급해 러시아 군인의 애국심을 진작시키라는 특명을 내렸다.

반면, 노년의 톨스토이는 전쟁 반대, 병역 거부를 목놓아 외쳤다. 『부활』을 팔아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을 도왔고, 『전쟁과 평화』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라 도발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톨스토이는 내 나라, 내 민족만 귀히 여기는 '애국심은 곧 전쟁'이며, '만악(萬惡)의 근원인 국가'의 기본 동력으로 생각했다고 저자는설명한다. 1904년에 터진 러일전쟁은 톨스토이의 탈애국, 반국가 사상의 진정성을 시험하는 대사건이었다. 그는 사랑을 실천하는 기독교도와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도를 전쟁터로 내몬 차르와 천황을 매섭게 질타하며, 러시아도 일본도 아닌 민중의 편에서 '무조건적인 전쟁 중단'을 호소했다고 강조한다. 크게 보아 전쟁에 대한 톨스토이의 변화의 방향은 당연히 젊은 톨스토이에서 노년의 톨스토이 쪽으로다. 하지만 톨스토이 인생의 장면 장면, 두 톨스토이는 그렇게 깔끔하게 나뉘지 않았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크림전쟁의 톨스토이는 애국과 조국 수호를 강조하면서도 전쟁에 대한 근원적 회의를 감추지 못햇다. 「세바스토폴 이야기」, 『전쟁과 평화』에는 전쟁의 부조리, 그 의미 없는 잔폭에 대한 깊은 환멸과 날 선 통찰이 도처에 존재한다. 한편, 러일전쟁의 톨스토이는 애국주의에 결연히 맞서면서도 자기 조국의 패배에 완전히 무감하지는 못했다. 가장 아끼던 작품인 『전쟁과 평화』에 대한 애착도 죽는 순간까지 온전히 내려놓지 못했다."(p.8)



저자는 이번 러우전쟁이 젊은 톨스토이와 러일전쟁의 늙은 톨스토이 사이의 이러한 공존 또는 대결은 그로부터 150여 년 지나 벌어진 크림합병과 러우전쟁을 둘러싼 현재의 풍경 속에 다시 되풀이되고 있다고 본 것이다. 저자의 지적은 톨스토이에 대한 연구자로서의 면모를 함께 보여준다. 2014년 푸틴이 크림을 합병한 당시, 톨스토이의 증손자인 블라디미르 톨스토이는 이를 적극 지지했다는 것. 그는 '150년 전 크림의 세바스토폴 요새에서 러시아를 위해 싸운 톨스토이의 후손으로서 너무 당연한 것 아니냐'는 입장을 보였다고 한다. 그는 당시 푸틴의 문화 고문이기도 했다. 2022년 러우전쟁을 '집단적 서방'과의 한판 승부로 규정한 푸틴은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작품으로 『전쟁과 평화』를 꼽았고, '2028년을 톨스토이 탄생 200주년으로 기념하는 법령'에 서명했다. 침공을 고작 3주 앞둔 때였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이 같은 푸틴의 행위는 전쟁의 부조리를 담아내면서도 애국심에 호소한 전쟁을 쓴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왜곡하는 일로 폄하될 가능성이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독자에게는 읽힌다. 그러나 전쟁이 터지자 러시아 국회부의장을 역임한 톨스토이의 또 다른 증손자 표트르 톨스토이는 이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단 사실도 저자는 밝혀냈다.

정반대의 현상도 벌어졌다는 점을 저자는 밝혀내고 있다. 푸틴의 전쟁에 반대하는 러시아인은 너도나도 톨스토이를 손에 들었다. 모스크바 시민 콘스탄틴 골드만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들고 반전 시위를 벌이다 구금되었고, 크라스노다르에 사는 알렉세이 니키틴은 "애국심은 노예근성이다!-레프 톨스토이"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이다 체포되었다고 저자는 전한다. 또 모스크바 시의원 파벨 야릴린, 사업가 올렉 테리파스크는 톨스토이의 러일전쟁 반대 문구를 인용한 SNS 포스팅으로 벌금형을 받거나 기소되었던 사실도 적시하고 있다.

이와 함께 전 세계에 퍼진 톨스토이의 후손들도 움직였다. 톨스토이의 유지를 받든 자손 중에 앞서 거론한 블라디미르나 표트르 같은 사람만 있을 리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2022년 4월 톨스토이 직계자손 112명이 전쟁 반대 연명 서한 'Peace Now, Stop the War'를 발표하고, 이를 푸틴에게 발송했다고 강조한다.



이처럼 톨스토이는 러우전쟁 지지자와 반대자 양편 모두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푸틴의 행보는 노년의 톨스토이가 부르짖은 평화와 정확히 대척점에 위치한다고 저자는 전제한 뒤 톨스토이가 살아 있었다면 그에게 불벼락을 내렸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당장 전쟁을 멈추라"고 호통치며,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푸틴의 '『전쟁과 평화』 넘버원' 운운에 대해서는 '내 이럴까 봐 쓰레기통에 버리라 한 것 아니더냐'라며 톨스토이가 펄펄 뛰었을 것이라는 표현과 함께 저자의 견해를 밝히기도 한다. 저자가 '전쟁 반대'의 편에서 톨스토이에 가깝게 다가가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런 판단은 독자 개인의 느낌이지만 앞으로도 저자의 글에 관심을 크게 가질 만한 요인을 제공한다. 독자 역시 전쟁을 직접 겪어보지 못한 세대로서 '전쟁은 무조건 반대'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어서다. 

여기서 저자는 톨스토이의 내면의 격렬한 싸움을 이해하는 듯한 말을 한다. "두 톨스토이가 생애 마지막까지 그의 내면에서 격투했다 한들, 당사자에게 그것은 고통이고 한계였다"는 말이다. 젊은 톨스토이를 온전히 비워내는 것, 그것이 참회 이후 절대평화주의를 지향했던 톨스토이의 필생의 과제였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그럼에도 두 톨스토이의 족적은 톨스토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러시아 문명 속에 자리 잡았다. 그것도 그 문명을 대표하는 가장 거대하고 가장 강력한 상징으로. 러우전쟁을 둘러싸고 푸틴과 톨스토이가 각기 다른 좌표로, 그러나 러시아 문명이라는 하나의 자장 속에 이어졌다 갈라서기를 거듭하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저자는 풀이한다. 

러우전쟁 발발 후 우크라이나 문화부 장관 올렌사드르 트카첸코는 이 전쟁을 '역사와 문화를 둘러싼 문명 전쟁'으로 규정하고, 러시아 문화유산과 완전히 절연할 것을 촉구했다고 저자는 전한다. 우크라이나 작가 협회 펜 우크라이나(PEN Ukraine)는 러시아 책에 대한 전 세계적 보이콧을 호소했다. 톨스토이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우크라이나 교육부는 학교 커리큘럼에서 『전쟁과 평화』를 삭제했고, 톨스토이의 여러 고전이 재활용 파쇄기에 갈려 일회용 컵 홀더와 계란판이 되었다. 키이우 도심의 '톨스토이 광장' 역은 '우크라이나 영웅 광장'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나라 전역에서 톨스토이 동상이 철거되었다. 저자가 전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의 러시아에 대한 깊은 불신과 증오심이 반영되는 일 같아 뒷맛이 개운치는 않다. 그러나 피침략국 우크라이나 입장은 독자로서도 충분히 이해할 수도 있다. 피해 당사국으로서 뭔들 못하겠는가.



이 책은 2부 8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부 〈톨스토이와 평화: 성자와 전사 사이〉, 2부 〈톨스토이와 아시아 평화〉이다. 1부에는 1장 「참회와 파문」, 2장 「반국가와 탈애국」, 3장 「톨스토이와 세계평화」, 4장 「The Last Station: 위대한 고통의 인간」으로 구성돼 있다. 이어 2부에는 5장 「톨스토이와 인도」, 6장 「톨스토이와 중국」, 7장 「톨스토이와 일본」, 8장 「톨스토이와 한국」으로 톨스토이가 아시아 각국의 반전, 평화주의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나를 살펴본다.

이 책은 이렇게 우리가 몰랐던 톨스토이, 특히 성자 톨스토이와 전사 톨스토이의 대결과 공존을 ‘평화’라는 키워드로 다루고 있다. 독자도 톨스토이를 읽기 전에 이런 사전 정보가 있었다면 그의 작품이 얼마나 큰 고통과 고뇌 속에서 탄생했는지 절절히 느끼며 감동을 더했으리란 뒤늦은 아쉬움도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톨스토이, 즉 불세출의 작가이자, 사랑과 용서, 개인의 도덕적 수양을 설교하는 성자(聖者) 톨스토이 뒷모습은 대문호와 귀족 계급의 엄숙함과는 거리가 멀다. 탈국가, 탈민족을 외치던 근대의 이단아, 적그리스도라 불릴 정도로 파격적인 신앙을 설파하며 기성 권력과 맹렬히 싸운 전사 톨스토이의 모습은 생경하지만 가슴 깊숙한 곳에 자리 잡는다. 다시 그의 작품을 재독, 삼독할 터인데 그때마다 느낌이 다를 것이란 생각에 오히려 설레기도 한다. 전사 톨스토이는 국가로 대표되는 모든 제도화된 폭력의 거부, 정당방위조차 허용하지 않는 견결한 비폭력주의를 주장했다. 이러한 절대평화주의는 전투적이고 ‘불온한’ 평화주의로, 안전한 이상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그를 대문호라고 칭하는 이유가 충분하게 납득이 된다.

이 책은 독자에게 성자 톨스토이와 전사 톨스토이의 두 모습을 보여줬다. 두 모습의 톨스토이가 우리가 흔히 비유하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이중인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는 사실은 독자들에게 대문호의 자질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대문호 톨스토이는 어느 하나를 제외한 톨스토이가 아니다. 이에 따라 저자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성자 톨스토이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평화를 위해 싸운 전사로서의 톨스토이가 부각되고 그의 삶의 의미로 더해져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공감하고 동의한다. 말 그대로 ‘비타협적’으로 싸웠던 톨스토이, 그 결과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파문당하고, 비밀요원에게 끊임없이 감시당하고, 혹독한 검열로 자기 땅에서 어느 책 하나 온전히 출판할 수 없었던 저항자 톨스토이에 대한 이야기로 보완될 필요가 있다. 그 이야기의 출발점은 톨스토이의 지난한 투쟁이 발원하는 지점, 바로 그의 평화사상이다. 저자가 쓴 이 책은 이를 다루고 있다.



2부에서 다룬 아시아 평화와 평화론자에 끼친 영향에서 우리의 작가 춘원 이광수가 등장한다. 또 같은 시기 활동한 일본의 작가들도 몇 명 나온다. 자세히 읽기는 했지만 독자의 이광수에 대한 편견 때문에 여기에 적기는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해 저자가 쓴 부분을 일부 발췌해 옮긴다. 독자들의 양해 바란다.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에 미친 영향도 있다.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의 핵심은 이런 법적인 조치들에 대한 거부와 불복종, 그로 인해 초래되는 모든 폭력적 처벌을 감수하는 것이었다. 그 토대에는 ‘오직 신의 법칙만을 따르는 기독교인은 국가가 정한 법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러나 ‘악을 악으로 물리쳐서는 안 된다’는 톨스토이의 가르침이 깔려 있다. 이후 간디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시민불복종 운동, 즉 국가법에 대한 비폭력적 저항은 이렇게 톨스토이의 『하느님 나라』에서 얻은 각성으로부터 발화한 것이다.(p.147)


한국 근현대작가를 통틀어 춘원 이광수만큼 러시아와 인연이 깊은 사람도 드물다. 그는 문학비평가 김윤식이 ‘히스테리아 시베리아카(hysteria siberiaca)’라 부른, 병적일 정도의 러시아 사랑을 평생 간직했다. 『유정』이 보여주듯이 시베리아를 창작의 모티프로 자주 활용했으며, 작품 번역이 가능할 정도의 러시아어를 구사했다고 한다. 러시아 망명자들의 도시 하얼빈이나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랑하고, 1913년에서 1914년 사이 시베리아 바이칼주의 치타공화국에서 7개월간 살기도 했다. 러시아와의 이런 인연은 바로 이광수의 지극한 톨스토이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p.233)


누구도 감히 저항할 수 없는 강고한 국가주의, 애국주의, 민족주의의 흐름 속에 홀로 반국가, 반애국, 탈민족을 외치는 것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일을 감행하는 것, 그 결과를 감당하는 것, 양자 모두 도저한 윤리적 결단이다. 헤아릴 수 없는 논란과 의혹과 박해 속에서, 무엇보다 고통 속에서 톨스토이는 둘을 모두 해냈다.(p.249)


저자 : 이문영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 노어노문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러시아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교수로 재직중이다. 지은 책으로 『톨스토이와 평화』 『평화를 만든 사람들: 노벨평화상 21』(공저), 『폭력이란 무엇인가: 기원과 구조』(공저), 『러시아학 입문』(공저), 『중앙아시아의 문명과 반(反)문명』(공저) 등이 있다. 논문으로는 「바흐찐의 대화주의와 contradictio in adjecto」, 「Русская массовая музыка, русский рок и их освоение в Корее(러시아 대중음악과 록, 그리고 한국에서 수용상황 연구)」, 「포스트-소비에트 시기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의 관계」 외 다수가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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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움직인 열 가지 프레임 - 현대 문명의 본질과 허상을 단숨에 꿰뚫는 세계사
수바드라 다스 지음, 장한라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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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 사는 사람들은 서양인과 비서양인으로 구분되어지는 시대다. 그것은 마치 문명인과 비문명인으로 구분되어지는 것과 같다. 세계의 모든 것이 이분법으로 나뉘어진 상태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다인종, 다원화 등 다양화된 세계에서 살면서 왜 거의 모든 것들이 이분법으로 이루어졌을까? 이유를 찾으려면 인종 차별의 역사와 현실, 문명을 이루는 과학의 발전과 이용, 문명인이 말하는 문명과 비문명의 구분을 말한 곳으로 가야 한다. 또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 파헤쳐야 한다. 잘 다음어진 구분이라면 인정하고, 잘못된 방법의 구별으로 판단되면 개선해야 한다. 

이 책 『세계를 움직인 열 가지 프레임』은 서양, 즉 유럽 그중에서도 서유럽으로 가야 의문이 풀린다. 시대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결국 그리스서양 세계를·로마를 만나게 된다. 그들은 그리스를 중심으로 에게해를 장악한 무역으로 발달된 문명의 시작이며, 유럽의 대부분을 하나로 제국으로 묶은 로마 제국 시대로 시간을 되돌려야 한다. 그들의 표현대로 유럽은 문명화된 최고의 통치 방법이 있고, 과학적 원리를 탐구해 자국의 국민들에게 편리함과 풍요로움을 제시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을 곁으로 치워놓고, 직접 역사를 탐구해 들어가면 많은 주장이 그들의 시각대로, 그들의 입맛대로 꿰맞춘 것임을 알게 된다. 힘으로 바다를 장악해 무역로를 독점함으로써 막대한 부를 쌓았고, 그 돈으로 문명의 발전을 이루었다. 그리스 시대의 문명은 신(神)의 도움으로 이룬 것이기에, 엄청난 건축물인 신전을 세우고 그들을 기렸다. 그들의 신은 그들만을 위한 것이었다. 

서양을 하나의 제국으로 열린 로마 제국은 전쟁을 통한 피의 댓가이다. 삶의 풍요로움을 이루기 위해 식량은 물론 바닷길을 장악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인지한 로마는 그들의 앞바다 지중해를 장악하고 제국이 완성되기까지 수백 년이 걸렸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격언대로다. 

특히 로마는 황제 체제와 공화제를 왔다갔다 하면서 통치술을 발전시켰으며 결국 막강한 권력의 황제정으로 자리를 잡았다가 500년을 버티지 못하고 멸망(서로마)했다. 당시 로마는 많은 부분을 그리스 문화를 따랐다. 다만 전쟁을 위한 길과, 제국을 다스리기 위한 법은 매우 합리적으로 제정됐다고 많은 학자들이 인정한다. 지금의 서구에도 그대로 이어져 내려온 것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혹자는 로마 제국은 무력을 뺀다면 '길'과 '법'의 나라라고 한다. "모든 길은 로마로···."와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라." 등의 격언도 그로 인해 생긴 것들이다. 이 책의 저자 수바드라 다스는 서양인(서구 백인)들이 오랜 시간 지켜온 신념으로 공유되는 10가지 핵심 가치의 이면을 살펴보며, 역사와 우리의 생각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파헤친다.



저자는 과학은 가치중립적인 이성의 최고봉이고, 교육은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교양의 중심이라고 배웠다고 말한다. 저자도 '물론'이라고 말하듯이 책을 읽고 있는 독자도 마찬가지다. 또 시간은 효율적으로 활용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자원이며, 글은 모든 생각과 사건을 표현할 수 있는 마법의 도구로 배운 것도 사실이다. 과거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이런 시각은 변하지 않고 이어져 내려온다. 교육과 시간의 중요성은 서양뿐만 아니라 동양 등 타지역도 마찬가지지여서 교육을 통해 이런 것들은 우리의 보편적 생각으로 자리 잡았다. 이를 갖추는 것을 문명화의 기본으로 간주해 왔다. 이에 따라 이를 갖추지 못한 사회, 사람은 자연스럽게 야만적이고 미개하다고 간주된다. 저자의 질문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우리 머릿속에 깊이 박힌 ‘과학’, ‘교육’, ‘글’, ‘시간’ 등의 개념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우리가 세운 문명화의 기준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누가 확립했으며, 결정적으로 누가 이익을 보고 있는가? 

이 책은 현대 문명을 지탱하는 열 가지 핵심 개념의 생성 과정을 탐구하며, 서구 권력이 어떻게 자신들의 틀을 활용해 세계를 문명과 야만으로 나누고, 억압과 착취의 역사를 펼쳤는지 살펴본다. 멋지고 당연해 보이는 가치들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태동과 함께 모양을 갖추고 발전하며, ‘서양’이 세계를 지배하는 과정의 결정적 도구로 활용되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들이 짜놓은 권력 게임의 중심엔 ‘문명과 야만’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 책은 현대 문명을 지탱하는 10가지 핵심 가치의 생성 과정을 탐구하며, 서구 권력이 어떻게 자신들의 프레임을 활용해 세계를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으로 나누고, 억압과 착취의 역사를 펼쳤는지 파헤친다.

과학을 독차지한 자들은 누구인가? ‘고전’은 누가 결정하며, 어떻게 제국주의의 비전이 되었나? 피라미드는 외계인이 지었다는 말에 숨겨진 뜻은? 시간은 왜 우리를 걷잡을 수 없이 조여오는가? 잉카제국의 문자 ‘키푸’가 역사에서 삭제된 이유는 무엇인가? 등의 질문을 던지며 서구 세계가 만든 거대한 억압과 착취의 구조가 역사에, 그리고 우리 머릿속에 얼마나 깊이 각인되어 있는지 하나씩 밝혀낸다.



저자의 집필 취지에 따라 이 책은 모두 10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누구의 말도 그대로 믿지 말라: 과학」, 2장 「아는 것이 힘이다: 교육」, 3장 「펜은 칼보다 강하다: 문자」, 4장 「정의의 여신은 눈을 가리고 있다: 법」, 5장 「민중에게 권력을: 민주주의」, 6장 「시간은 돈이다: 시간」, 7장 「국가는 당신을 원한다: 국민」, 8장 「예술을 위한 예술: 예술」, 9장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죽음」, 10장 「우리는 한배를 타고 있다: 공동선」 등이다. 각 장의 제목을 나열했지만 대부분 누구나 들어봤을 법한 이러한 말들은 믿어 의심치 않은 지혜로 우리 사회에서 수용되고 있다. ‘과학의 합리성’, ‘교육의 힘’, ‘시간의 중요성’, ‘글의 영향력’ 등을 대표하는 보편적인 신념들은 현대 문명의 성취이자, 우리 사회의 핵심 가치로 지금도 공유된다. 하지만 이를 순수하게 옳은 것으로만 생각해도 될까? 오히려 너무 당연하게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그 안에 깃든 역사적 의미를 들여다보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아닐까? 저자의 비판적 시각은 얼마나 정교하고 깊게 탐구된 것인지 책을 읽으면서 판단하면 될 일이다.

저자는 인도의 성인이라고 추앙받는 간디의 에피소드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에 따르면 간디는 청년 시절 영국인들만큼 서구화되었고, 더 나아가서는 '문명화'되었다고 말한다. 젊은 시절 각 잡힌 양복을 입고, 바이올린을 배웠으며, 런던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식민지를 문명화한다는 임무에 딱 맞는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교육을 마치고 간디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발을 들였던 그 순간부터 마주했던 인종차별을 겪는다. 인종차별은 위대한 영혼의 지도자 간디에게도 넘지 못할 벽이었다. 대영제국은 식민지 사람들을 문명화하기 위해 정의, 평등, 자유, 민주주의, 자치를 가르치지만 어디까지나 백인 시민에게만 이런 기준을 적용하는 위선을 드러낸다. 인도로 돌아온 간디는 여성과 달리트(일반적으로 '불가촉천민'이라는 경멸적인 표현으로 부른다. 힌두교 카스트 제도의 밑바닥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이다)에게도 평등한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그는 문명적인 사회에서는 가능하다고 배웠던 모든 신념에 관한 진실을 밝히는 데 생을 바쳤으며, 진정한 평등과 자유를 위해 목소리를 냈다. 간디의 삶은 서양 문명이 우리의 생각만큼 우리의 생각만큼 좋지 않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이쯤되면 '문명'이란 개념에 대해 의심해 볼 만하다. 저자는 책의 〈서문〉을 통해 "문명화되었다는 말은 진보와 발전이라는 개념을 포함한다"고 전제한 뒤 "온갖 복잡한 기반 시설과 세련됨을 갖춘 도시는 시골이나 야생보다 더 발전되고 문명화된 곳이라는 말을 듣는다. '야만인'이나 '미개인'과는 달리, 문명화된 사람은 합리적이고, 교육을 받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법을 준수하는 사람이라고 배운다. 제일 중요한 점은 역사에서 문명화는 유사체(類似體)적인 개념이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문명화된 그 모든 것들의 반대편에는 동전의 양면처럼 비문명적인 사물과 사람이 있다는 의미다."라고 지적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를 구분하는 방법은 단순했다. 그리스어를 구사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미개인'이었다. 고대 로마인 입장에서는 'civis'라고 일컬을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도시 거주자였다. 시골에서 거주하며 일하는 사람들과는 구분되었다. 저자가 이런 사례를 언급한 까닭은 고대 그리스인과 고대 로마인 모두 다 지금 우리가 '문명'이라 여기는 것의 문화적 조상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저자는 계몽주의 시대부터 20세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문명이라는 말은 새롭고 보다 구체적인 의미를 띠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책은 바로 이 의미를 탐구하고 '문명'이라는 말이 어떻게 해서 '서양'이라는 말과 결국은 사이 좋게 더불어 안착했는지 역사적 기원을 추적한다고 쓰고 있다. 

실마리는 '서양'이라는 말 속에, 그리고 서양과 비서양의 구분은 단 한 번도 순수하게 지리적인 문제가 아니었다는 사실 속에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유럽의 작은 왕국에서, 북아메리카의 탁 트인 평원을 거쳐, 오스트레일리아를 지나, 전 세계 소수 민족 거주지까지, 서양 문명의 심장부 곳곳을 살펴본다면, 이 모두가 지닌 단 하나의 공통점은 자명하다는 것이다. "서양이란 바로 백인이 있는 곳이다." 서양 문명이 의미를 띠게 되면서, 오늘날 우리가 서양 문명과 연관 짓는 관행과 가치들(몇 가지만 언급해 보자면, 민주주의, 정의, 과학의 합리성 등이다)은 점점 커져가는 유럽 제국의 야망과 권력에 발맞춰 나타났다. 어디가, 또 무엇이 문명화되었는가를 결정한 것은 바로 식민지 통치자들이었으며, 이들은 자신들만의 프레임 속에서 문명을 규정했다. 그리하여 유럽 바깥에, 그러니까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있는 정착형 식민지, 사실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서구인들이 건설한 이곳들은 현재 서양의 문명 세계를 이루는 곳들이라 여겨지고 있다. 그들이 스스로 내린 정의를 살펴보면, 이런 장소들은 단순히 더 강력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지적으로나, 나머지 지역보다 더욱 발전한 곳들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다루는 10가지 프레임은 현실을 누르고 브랜딩이 성공한 사례라는 얘기에 가깝다고 단언한다. '서양'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서양 문명은 단순한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문명화라는 사명'은 식민지를 건설한 국가들의 비전이자 변명이었다는 것. 유럽의 강대국들은 세계의 나머지 지역을 단순히 자기들 것으로 삼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들이 만든 문명이라는 틀을 이용해 완전히 재구성했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단순히 이런 관념 뒤에 자리 잡은 거짓을 폭로하는 데서 그치기보다는 애초에 우리가 어떻게 해서 이런 관념들이 사실이라고 제풀에 속아 넘어갔는가를 이해해보기 위해 10가지 프레임을 추출해냈다는 주장이다. 

우리가 지닌 서양이라는 관념 속에 널리 퍼져 있는 "서양은 나머지 세계와 확실하게 구분되며, 이들보다 확실하게 우월하다는 생각"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고 밝힌다. 

"서양 문명은 항상 그럴듯한 말을 늘어놓았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서양 문명은 자신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럴듯한 존재라고 주장했고, 또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문명화된 서구와 비문명적인 '타자' 사이에 그어진 선은 우리가 어떻게 그리겠다고 결정하는가에 달려 있다. 이 책은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보는지를 얘기한다. 또 이렇게 세상을 바라보는 아주 특수한 시각에서 제외된 사람들에 관한 책이며, 그렇게 제외되었던 사람들을 다시 포함한다면 세상이 어떻게 보일지를 담은 책이다. 이 책은 한편으로 독자에게 더욱 현실감 있게 다가온 이유가 우리 대한민국이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시대를 지나왔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을 겪고 남북으로 갈라진 채, 미국으로부터 들어온 서구 문물을 바탕으로 사회 체계가 형성되었기에 우리 고유의 민족혼이나 정체성에 상처가 깊다는 점에서 이 책의 증언들이 사실적이라고 인정할 수 있게 한다. 선진 문명이란 명목으로 무비판적으로 수용된 서구 세계의 사상과 가치관은 한국 사회에 뿌리 깊이 박혀 있고,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건 아쉽지만 부정할 수 없다. 이 책은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 세계의 프레임마저 그대로 내면화하여 우리의 정체성마저 잃어버린 것이 아닌지 질문을 던지며, 이제 프레임에서 완전히 벗어나 다른 세상을 상상할 수 있는 힘을 되찾자고 제안한 저자의 열정에 응원할 수 있다.



배냉 왕국이 파괴되기 전에도 약탈은 자행되고 있었다. (···) 이 가운데 최고봉은 대략 천 개쯤 되는 황동판으로, 유럽 전역의 박물관에 퍼져 전시되었다. 이를 배냉 장식판이라고 총칭한다. 1897년 런던만 따져보더라도, 배냉에서 가져온 약탈품은 왕립 식민 협회, 왕립 지리 학괴, 포레스트 힐의 호니먼 박물관, 그리고 당연히 대영박물관에 전시되었다. 이곳에는 오늘도 여전히 100개 정도가 전시되고 있다. 박물관 지하에 있는 아프리카관 소장품의 일부다. 판에 끼워져 가로 여덟 줄과 세로 일곱 줄로 이뤄진 바둑판 모양으로 전시되어 있어, 마치 우주를 자유자재로 떠다니는 것만 같다. 이런 식으로 전리품 또는 식민지 시기의 노획물과 약탈품을 지구에 유의미하게 연결되지 않은 것인 양 전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전시 방식은 서양이 이 사물들의 함의와 맥락을 무시한 채 바라본다는 점을 뚜렷하게 드러낸다.(p.301) 


저자 : 수바드라 다스(Subhadra Das)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과학사와 철학사를 전공했고, 동 대학교 박물관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특히 과학적 인종주의와 우생학의 역사가 오늘날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연구한다. 팟캐스트, TV, 라디오 등에서 대중과 활발히 접촉하며, 권력이 조작하고 숨긴 역사를 알리기 위해 힘쓰고 있다.

첫 책 『세계를 움직인 열 가지 프레임』은 세계사를 연대, 사건, 인물과 같은 기존의 주제가 아닌 개념과 생각을 중심으로 풀어내며 역사 분야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서구 중심주의’라는 그 역사적 중요성에 비해 진부하고 낡은 것이라 간주되던 메시지를 ‘프레임’과 연관시키며, 서구 세계가 만든 거대한 억압과 착취의 구조가 역사에, 그리고 우리 머릿속에 얼마나 깊이 각인되어 있는지 통렬하게 밝혀내어 찬사를 받았다.


역자 : 장한라


서울대학교에서 인류학과 불어불문학을 전공했으며,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에서 그리스 · 로마 고전을 읽고 비평했다. 교보문고 보라(VORA) 에디터로 활동했다. 국제학술대회 통역과 사회과학 분야 논문 번역을 맡으며, 서울대학교 교수 및 명예교수의 영어 코치를 담당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동물들의 위대한 법정』 『남달라도 괜찮아』 『말의 무게』 『나는 여자고, 이건 내 몸입니다』 등이 있으며, 함께 쓴 책으로 『너와 나의 야자 시간』 『게을러도 괜찮아』 등이 있다.

구입한 물건을 오래 쓰고, 되도록 음식은 남기지 않고 다 먹고, 일회용품을 사용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환경을 생각하며 살아가고 싶다. 글을 쓰거나 옮기며 여행 생활자로 지내고 있다. 곳곳을 돌아다니며 채집한 경험의 기록을 『열두 달 초록의 말들』로 한데 모았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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