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사고를 일으키는 의사들
대니엘 오프리 지음, 고기탁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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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이 책 『의료 사고를 일으키는 의사들』은 표제어는 사뭇 도발적이고 충격적이다. 표제어로만 봐서는 의사들의 실수나 과실로 환자가 오히려 더 큰 고통을 당하거나 심지어 사망에 이르는 피해를 받는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내부 고발자의 폭로성 발언이나 양심 선언일 것 같다는 느낌도 있다. 저자 대니엘 오프리는 뉴욕 대학교 의과 대학 교수로 일하며 뉴욕 벨뷰 병원에서 25년 간 환자들을 돌보고 있는 현직 의사다. 현직 의사가 의료진의 실수로 사망하는 숫자가 전체 미국인 사망자의 3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충격적 사실을 접하는 순간을 적었다. 책의 첫 문장은 "이게 정말 사실인가요?"로 시작한다. 저자에 따르면 2016년 어느 봄날 오후 비컨 출판사(이 책의 출판사)의 편집자가 저자에게 '믿을 수 없다'는 메일을 보내왔다. 메일에는 〈영국 의학 저널〉에 소개되며 여러 주요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한(동시에 의료계에 건전한 비평을 불러일으킨) 한 기사가 첨부되어 있었다.* 이 기사는 의료 실수가 미국의 전체 사망 원인 중 세 번째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정말?" 당황스러울 정도로 저자는 답변이 궁했다고 털어놓는다. 반신반의했다. 의료 실수가 정말 유방암이나 뇌졸중, 알츠하이머병, 고통사고, 당뇨병, 폐렴 같은 병을 제치고 3위라고? 저자는 미국에서 가장 큰 병원 중 하나인 밸뷰 병원에서 25년째 일하는 내과 전문의로서 오늘날 의료계에서 행하는 나름 합당한 한 단면을 보고 있다고 말한다. 21세기 '선진' 사회에 만연한 비만이나 당뇨병, 심장병, 고혈압, 암 같은 질병으로 고통받는 수많은 환자를 만났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덧붙인다.

따라서 만약 의료 실수가 세 번째로 높은 사망 요인이라면 저자 역시 수시로 그런 사례를 접했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데 생각이 미친다. 지인이나 가족을 통해 이야기를 듣지 않았을까? 심장병과 암에 이어서 세 번째로 마치 출근부에 도장을 찍듯이 빈번하게 사람을 죽인다면, 의료 실수는 저자가 의료 현장에서 일상적으로 겪는 일 중의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저자는 판단한다. 

* M. A. Majary and M. Daniel, 「Medical Error-the Third Leading Cause of Seath in the US,」 British Medical Journal(BMJ) 353


저자는 이날 이후 이 문제에 대해 천착한 듯하다. "의료 사고는 정당한 의학적 치료의 〈부작용〉이었을까? 아니면 명백한 부주의로 인한 결과였을까? 의료 실수 때문에 출혈이나 신부전, 혈전을 겪는 환자들은 어떤가? 얼마나 많은 환자가 치료 과정에서 위해를 당했을까? 일이 잘못되었을 때 의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의료 사고를 일으킨 의사들은 소송을 통해 징계받았는가? 환자들은 충분한 보상을 받았는가? 소송하지 못한 환자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의료 실수를 줄이고 환자의 안전을 개선하기 위해 무엇을 더 해야 할까?" 온갖 생각이 떠오른다.

책에 따르면 의료 실수에 관련된 자료는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다. 1년에 약 4만 4,000명에서 9만 8,000명이 의료 실수로 사망하는 것으로 추산하는 의료 협회의 1999년 최초 보고서부터 1년에 25만 명 이상이 상망한다고 주장하는 〈영국 의학 저널〉의 분석에 이르기까지, 마치 의료 실수 때문에 공중 보건에 비상사태가 초래되기 직전인 것처럼 보일 정도다. 설령 수치가 완전히 정확하지 않더라도ㅡ이들 보고서는 방법론에 문제가 제기되었다ㅡ연구자들은 의료 실수가 발생하는 빈도가 절대 낮지 않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자료가 틀렸을까? 아니면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일까?"

저자는 '세 번째 사망 원인'이라는 주장이 어쩌면 과장된 표현일 수 있지만 어쨌든 의료 실수를 둘러싼 공개된 통계와 현장에서 일하는 임상의들의 경험 사이에는 명백히 커다란 틈이 존재한다. 게다가 일상적인 환자들의 경험도 방식은 다르나 통계 자료와 견해를 달리한다. 깊은 생각과 고민 끝에 현역 내과 의사로서, 그리고 때때로 환자가 되기도 하는 한 사람으로서 저자는 이 문제의 진상을 밝혀야 할 의무감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공식적인 자료에 근거한 추론과 내가 경험하는 현실은 완전히 상반되어 보였다. 즉 둘 중 하나는 틀린 주장을 펴고 있다는 뜻이었고, 나의 목표는 누가 틀렸는지 알아내는 것이다."(p.13)


이 책은 앞서 언급한 이러한 질문에 대해 원인과 해결책을 찾으며, 크게 두 가지 비극적인 의료 사고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현대 의료 체계에서 반복되는 가장 가혹한 실수의 희생자인 '제이'와 '글렌'은 각각 급성 골수 백혈병과 화상 진단을 받았지만 그 과정에서 의사의 잘못된 진단, 간호사의 미온적인 대응, 그리고 감염 합병증을 비롯해 중환자실이나 대형 병원으로 빨리 이송하지 못한 점 등 각 단계별 의료 실수들이 점점 합쳐져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되는 엄청난 의료 사고로 이어진다. 문제는 그 이후에도 심각하다. 서로 책임을 전가하려는 의사들뿐 아니라 병원 측도 제대로 된 정보를 유족에게 전달하지 않는다. 남편과 아빠를 잃은 이 두 가족은 의료 소송에만 5년 이상이 걸렸다. 이들의 이야기는 의료 실수의 복잡성에 더해서 언제든 의료 실수가 일어날 수 있음을 전형적으로 보여 준다. 

저자 오프리는 제이와 글렌의 사례 외에도 다른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다. 그가 해부하는 의료 사고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실수부터 참혹한 의료 재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우리 의료 시스템은 현재도 완벽하고, 앞으로도 항상 완벽하겠지만 저자는 예방 가능한 위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며 이 주제가 오늘날의 의학적 담론에 활력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모두 17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점보제트기 추락 사고」 2장 「불확실의 바다」 3장 「진단과 누락」 4장 「발열」 5장 「진단적 사고(思考)」 6장 「추락」 7장 「공식적으로」 8장 「죽음이 남긴 것」 9장 「시간에 쫓겨서」 10장 「편견」 11장 「법정에서 봅시다」 12장 「더 나은 방법이 있을까?」 13장 「답을 찾아서」 14장 「우리 뇌에 맞추어」 15장 「심판」 16장 「환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17장 「바로잡다」 등이다. 의료 지식이 높은 독자들은 제목만 보면 내용의 전개가 대략 짐작할지도 모르지만 일반 독자들은 제목만으로 어떤 내용이 펼쳐질지 종잡기 어렵다. 의료 실수는 그 틈을 파고들기도 한다. 

의료 실수로 인한 '사망'은 의료 실수 때문에 피해를 보는 환자들의 일부 사례에 불과하다. 의료 실수 때문에 출혈이나 신부전, 혈전을 겪는 환자들은 어떤가? 사망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이런 부작용은 매우 심각한 위해다. 여기에 더해서 이제는 진단 실수와 진단 지연도 의료 실수로 간주되면서 '예방 가능한 위해'의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p.25) 


의료계가 의료 실수를 검토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M&M이라는 친숙한 이름으로 잘 알려진 '질병률과 사망률 회의'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의료계와 함께해 왔다. 질병률과 사망률 회의는 과거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부정적인 의료 결과에 대한 공식적인 평가를 제공하고 있다고 저자는 밝힌다. 하지만 의료 실수를 분석하는 과정에 우리 '의료계 영웅'들의 견고한 개인주의가 스며들면서 무엇이-더 흔하게는 '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는지 파악하고, 그 부분을 개선하는 방식이 보편적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의료 실수는 발전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단순한 부산물로 간주되는 정도였다는 주장이다. 모든 문제는 의료 연구가 끊임없는 진전을 이어감에 따라 저절로 해결될 일이었다고 결론을 내린 듯하다. 

이에 따라 의료 피해에 대한 고찰이 의료 연구의 활발한 분야가 아니었다는 점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의료계의 연로한 기득권층은 고귀한 의술-대규모로 진행되는 과학적 연구로 강화된-이 의료계의 성스러운 직무에 모범적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오히려 이런 맹점을 가장 먼저 지적한 사람들은 사실상 전공의들이었다. 저자는 이들 전공의들의 노력은 의료 사고 대안의 틀만 갖춰진 채 지속적인 연구가 명맥만 이어왔을 뿐 적극적인 노력은 없었다는 주장으로 이해된다. 

저자에 따르면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연구자들은 비로소 대대적으로 의료 피해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은 실질적으로 환자의 안전을 향해 있지 않았고, 아직은 그런 용어조차 만들어지 않은 상태였다. 그보다는 미국의 의료 실수 실패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의사들이 소송을 통해 징계를 받았는가? 환자들은 늘어난 의료비를 감당할 만큼 금전적으로 충분한 보상을 받았는가? 소송하지 못한 환자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이와 같은 의문들은 답을 얻을 수 없었다. 이후 문제에 대해서는 피해자든 실수한 의사든, 병원 측이든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이런 문제들을 엄밀하게 조사한 최초의 연구 중 하나는 하버드 의료 행위 연구였다*고 한다. 연구자들은 1984년에 만 1년 동안 뉴욕주에 있는 51개의 병원을 조사했다고 저자는 밝힌다. 저자는 당시 하버드 연구자들은 치부가 공개되더라도 그들 병원이 있는 매사추세츠주가 아닌 뉴욕주의 문제로 비치기를 바랐던 것으로 추측한다. 그들은 무작위로 3만 121개의 차트를 선별했고, 그들이 치료 과정에서 의도되지 않은 상해로 규정한 이상 반응 횟수를 기록했다. 해당 연구에 따르면, 입원 치료의 3.7퍼센트가 의료 상해로 드러났고 그중 14퍼센트는 치명적이었다는 것. 이 같은 연구 결과를 뉴욕주의 모든 거주자에게 적용한다면 1984년 한 해에만 병원 치료의 결과로 거의 10만 건에 달하는 의료 상해(1만 3,451명의 사망자와 2,550건의 영구 장애를 포함하여)가 발생했음을 의미한다고 저자는 추산한다.

해당 연구자 중 한 명인 소아외과 의사 루치안 리프는 환자들을 상대로 자행되는 엄청난 규모의 위해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에 따라 그는 외과용 메스를 내려놓은 채 이러한 자료를 연구하는 데 남은 경력을 바쳤다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1994년 리프는 의료 실수 연구의 초점을 기존의 의료 소송 체계가 아닌 의료 행위를 전반적으로 더 안전하게 만드는 목표로 재설정하는 중대한 논문을 발표한다. 리프는 우선은 자료 수집 단계에서 상해를 입힌 실수뿐 아니라 모든 실수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었다. 의료 전문가들은 실수가 환자의 상해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안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리프의 논문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는 의료 실수가 일반적으로 개인의 실패뿐 아니라 시스템의 실패에서 기인한다는 내용이었다. 즉 의료 실수의 직접적인 원인이 간호사가 잘못된 약을 투약하는 사례처럼 사실상 인간의 행위인 경우에도 우리는 언제나 그와 같은 실수를 가능하게 만든 시스템상의 중첩된 오류를 발견할 수 있었다는 점을 증거로 내세웠다. 원인을 찾아들어가서 의료 실수의 범위가 의사의 잘못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간호사 등 의료진 모두에게 실수의 범위를 늘려 잡은 것이다. 이렇게 간호사의 실수가 있었음을 확인했다면 단순히 간호사의 실수로만 그치지 않고, 왜 간호사가 그런 사소한 실수를 했는지에 대한 근무 환경과 시스템까지도 모두 실수의 범주에 포함시킨다는 말이다. 리프는 이 같은 연구 결과를 토대로 "실수는 인간보다 시스템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프는 의료 사고의 범주를 넓히면서 유명한 말도 남겼다. "인간은 실수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전제하기보다 실수하지 않을 거라고 전제하는" 의료 체계의 근본적인 실수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한 점이다. 

* T. A. Brennan et al., 「Incidence of Adverse Events and Negligence in Hospitalized Patients-Results of the Harvard Medical Practice Study I,」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 324(1991): 370~376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현대 의료 체계에서 반복되는 가장 가혹한 실수의 희생자인 제이와 글렌의 경우를 철저하게 조사하고 연구하면서 이 책에 그 과정을 밝히고 있다. 결코 적지 않은 분량의 책을 쓴 것은 저자의 노력의 결과물인 것이다. 저자는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며 확증으로 단언할 수 있는 것을 찾아들어가 대안까지 제시하는 현직 의사로서의 면모도 보여준다. 이에 앞서 객관적 연구 자료를 통해 의료 실수를 줄이고, 이를 위해 어떤 시스템이 갖춰져야 하는지까지 제시하고 있다. 서두에 독자가 느꼈던 의료 실수의 객관적 자료와 통계를 바탕으로 수많은 고민과 생각의 결과를 하나씩 하나씩 찾아들어가 정확하게 문제점을 짚어내 대안까지 제시하는 모습은 의학이 왜 과학인지, 과학이지만 그들의 능력을 왜 인술(仁術)이라고 하는지 공감할 수 있다. 


의료 소송은 완벽과 거리가 멀다. 관련 비용과 수고, 엄중함 때문에 의료 실수를 겪은 환자 중 오직 소수만이 선택하는 방법이다. 심지어 의료법도 일관성이 거의 없다. 배심원이 다르면 비슷한 사건이라도 얼마든지 상반된 결과가 나올 수 있으며, 환자에 대한 배상금도 그때마다 막대한 차이를 보인다. 이외에 자기방어적 의료 조치ㅡ실제든 망상이든 간에 소송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의사들이 시행하는 모든 추가적인 검사와 치료ㅡ라는 부작용도 존재한다.(p.305)


저자 : 대니엘 오프리(Danielle Ofri, MD)


오늘날 의료계에서 가장 중요한 목소리를 내는 내과 의사 중 한 명으로, 의사와 환자 사이에 존재하는 유대감과 장벽에 대해, 그리고 무엇보다 의사들이 그들의 권한과 한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뉴욕 대학교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교 의과 대학원에서 약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뉴욕 대학교 의과 대학 교수로 일하며 뉴욕 벨뷰 병원에서 20년 넘게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감정이 의료에 가하는 영향에 관해 연구와 저술을 이어 오며 의사의 감정이 의료에 미치는 영향을 파헤친 『의사의 감정』을 발표했다. 또한 『벨뷰 문학 평론』의 창립자이자 편집장으로 활동하며 『뉴욕 타임스』, 『뉴잉글랜드 의학 저널』, 『랜싯』에 정기적으로 글을 쓰고 있다. 의학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뛰어난 공헌으로 미국 의학 작가 협회로부터 맥거번상을, 골드 재단으로부터 국가 휴머니즘상을 받았다. 미국 여러 의과 대학과 레지던트 과정에서 그의 책과 글을 교육 과정에 활용하고 있으며 특히 『외래 의학을 위한 벨뷰 가이드』는 최고의 의학 교과서상을 수상했다. 〈의료 실수〉라는 만연한 문제의 원인을 능숙하게 진단한 『의료 사고를 일으키는 의사들』에서는 모든 환자가 이해할 수 있는 체계적 분석을 넘어서 의료 서비스를 정상화하는 방법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역자 : 고기탁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를 졸업하고, 펍헙 번역 그룹에서 전문 번역가로 일한다. 옮긴 책으로 앤드루 솔로몬의 『부모와 다른 아이들』, 에번 오스노스의 『야망의 시대』, 프랑크 디쾨터의 인민 3부작인 『해방의 비극』, 『마오의 대기근』, 『문화 대혁명』, 토마스 프랭크의 『민주당의 착각과 오만』, 헨리 M. 폴슨 주니어의 『중국과 협상하기』, 윌리엄 H. 맥레이븐의 『침대부터 정리하라』, 캐스 R. 선스타인의 『TMI: 정보가 너무 많아서』, 『동조하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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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떠 있는 것 같아도 비상하고 있다네 세트 - 전2권 쓰는 기쁨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유영미 옮김 / 나무생각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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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프리드리히 니체의 이름을 들먹이면 아는 체한다. 그만큼 대한민국의 독자들에게 니체는 잘 알려져 있다. 학교에서 그의 철학을 많이 가르쳐서 알게 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독자 생각으로는 코로나 팬데믹 덕분이다. 코로나 펜데믹이 세상에 막 알려질 무렵 전 세계가 비상이 걸렸다. 감염병 발생지가 어디든간에 감염병 발생, 특히 호흡기 관련 감염병이라면 전염성이 강하기에 우선 국경부터 틀어막는다. 그만큼 세상이 개방되고 가까워졌다는 이야기다. 말 그대로 하루면 지구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갈 수 있는 세상이다. 니체가 왜 코로나와 관계가 있을까? 독자의 판단이지만, 독자 역시 재택 근무가 늘어나면서 회사를 직접 출근하지 않은 날이 많았다. 나중에는 일주일에 하루만 회사에 나가기도 했다. 출퇴근 시간과 준비하는 시간 등에 하루의 상당 부분 사용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간이 많이 남아 밖에 나다니는 것이 제한돼 있어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졌다. 직장 생활한다는 핑계로 멀리했던 책을 손에 잡았다. 잘 들르지 않던 온라인 서점을 찾았다.

처음에는 조금 낯설고 서먹서먹했지만 이내 평정을 찾았다. 카테고리를 먼저 익히니 이용법에 금세 익었다. 처음 들어갔을 때 깜짝 놀랐던 것은 '니체'의 책이 많았다는 점이다. 니체의 저서 번역본은 물론, 우리나라 철학자가 쓴 니체의 해설서, 또 주석서, 에세이 등 다양하게 니체는 대한민국 독자들에게 읽히고 있었다. 왜 니체가 인기(?)가 좋을까? 오랜만에 서점에 들른 독자가 섣불리 판단 내릴 문제는 아니었다. 베스트셀러 중 한 권을 선택해 주문했다. 니체 관련 책은 아니었다.

며칠 후 신문에 니체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일간지 일요판 '책 소개' 면이었다. 니체의 책이 가장 크게 지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책에 관한 이야기였으나 기사 중에는 니체가 가장 많이 찾는 책 중의 하나라는 내용이 있다. 책을 담당하는 기자가 쓴 글이다. 그렇게 말한 근거도 '서점 집계'로 표현하고 있었다. 결국 그 책을 온라인 서점으로 달려가 주문했다. 니체는 그렇게 독자와 가까워졌다. 그러나 번역본은 물론 우리나라 학자가 쓴 '니체 철학'마저 쉽지 않았다. 우리 학자로서는 굉장히 쉬운 말로 쓰고 있는 것 같지만 한두 문장을 지나면 앞 문장의 말과 연결이 안 되는 듯한 느낌이었고, 에세이마저 단숨에 내리 읽기는 힘들었다. 

"니체는 어렵다." "그런데도 코로나 펜데믹을 맞아 대한민국 독자들은 니체를 가장 많이 읽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기사가 다시 떠올랐다.


몇 년 후 니체의 아포리즘과 통찰에 관련된 국내 저자가 쓴 에세이를 읽었다. 그 내용에는 그 책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내가 누구인지 밝혀두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 같다. 사실 사람들은 내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을 수 있다···. 나는 철학자 디오니소스의 제자이다. 나는 성인이 되느니 차라리 사티로스이고 싶다.” 그는 책의 서문을 그렇게 썼다. 그는 자신을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제자로 규정했다. 그리고 반인반수의 사티로스(Satyros)가 되기를 원했다. 사티로스는 얼굴은 사람이지만 몸은 염소이며, 머리에 작은 뿔이 난 디오니소스의 시종이다. 주신을 모시는 시종답게 술과 여자를 좋아하며, 과장된 표현과 몸짓으로 우스꽝스러움을 자아내는 급이 뚝 떨어지는 잡신이다. 이 말을 한 사람은 누구일까?

디오니소스의 제자이며 디오니소스의 시종을 희망한 이 사람은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다. 그리고 이 책 이름은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이다. 제목과 서문도 파격이지만, 본문은 한 술 더 뜬다. 『이 사람을 보라』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네 개의 질문을 던지고 차례로 응답한다.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가?”,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가?",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왜 하나의 운명인가?”

고등학교 교과서를 제외하고는 코로나 펜데믹 이전까지 철학 책을 읽은 적이 독자의 기억에는 없었다. 고등학교 때도 학과목 이름이 〈국민윤리〉였지 〈철학〉이란 단어를 쓰지 않았었다. 교과서 안에 서양철학자와 동양철학자 등의 이름이 나온 것을 보고서야 '철학' 과목인 줄 인식했다. 고등학교 교양과목이었을 뿐 입시에도 들어가지 않은 과목이었기에 그나마 수업 시수가 적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마디로 철학과는 먼 삶을 살아왔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나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자 너무 오랫동안 책을 읽지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인지했다. 간단한 말로 시간이 많아서 철학 책을 다시 손에 들었던 것이다.


이 책 『그냥 떠 있는 것 같아도 비상하고 있다네』는 니체 '시' 필사집이다. 다시 말해 니체의 철학이나 에세이도 아니고 아포리즘을 다룬 것도 아니다. 니체가 직접 쓴 시 가운데 100편을 선별해 필사집으로 묶었다. 니체가 근대 이후 가장 위대한 철학자란 말은 들었지만 시인으로서 니체를 생각하진 못했다. 가끔 철학서에서 인용된 시를 본 적이 있고, 에세이에서도 니체의 시 일부를 인용하고 있던 것을 본 기억이 있지만 니체가 이렇게 많은 시를 썼다는 사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았다. 니체를 읽었지만 겉만 읽었다는 뒤늦은 자책감도 들었다. 

코로나 발생 직후에 한참 쏟아져 나온 철학 책은 대부분 '니체'였다. 니체의 철학을 해석하고 설명해주는 책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철학적 접근이었다. 번역하는 분들도 모두 철학자이고 니체를 전공했던 분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그 분들 중에서도 "니체는 쉽지 않다"고 미리 경계하는 분들도 있다. 어설프게 그의 명언 몇 개에 정신을 쏟다보면 그의 위대한 철학에는 접근도 하지 못하고 손에서 책을 놓게 될 것이란 경고에 가까운 말을 하기도 한다. 이 시집의 내용은 어떨까? 이 책에 「삶을 놀이로서 즐긴 철학자 시인」이란 제목의 〈추천사〉를 쓴 시인 장석주는 "니체는 살아 있음을 긍정하는 철학자다. 그는 누구보다 생의 즐거움과 행복을 사랑하고, 생명을 쇠락으로 이끄는 것들을 거부한다. 그리고 삶을 무한 긍정한다."고 썼다. 시인은 이어 "매사에서, 큰일에서나 작은 일에서나, 언젠가 때가 되면 나는 단지 긍정하는 자가 되고자 한다." 그리고 아모르 파티(Amor fati): "이것이 삶이더냐?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을 외치면서 생을 품는다고 니체의 시 세계로의 안내문을 쓰고 있다. 

〈추천사〉에 따르면 신의 돌연한 죽음으로 유럽의 가치 체계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 최초로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한 철학자! 니체는 유럽 문명에 곧 황혼이 드리울 것을 알아차렸다. 이 황혼이야말로, 유럽 문명을 덮을 긴 밤, 긴 어둠을 예고한다. 삶이 뒤집히고 유례없는 허무주의의 그림자가 유럽을 뒤덮을 걸 앞서 내다본 니체는 자신도 그 그림자를 밟고 서 있을 운명이라는 걸 알았다.



니체는 신이 죽었다는 소문이 퍼졌을 때 아침놀이 밝아오는 예감을 느끼고 받아들인다고 시인 장석주는 설명한다. 허무주의가 빗장을 열고 들어와 세상을 덮치자, 예언자 니체는 허무주의의 그림자, 어둠이 잉태한 여명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오 사람아,

귀 기울여 들어보아라

깊은 밤이 뭐라고 말하는가

나는 잠들었다가

깊은 꿈에서 깨어났다

세상은 깊다

낮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깊다

세상의 고통은 깊다

쾌학은 마음의 근심보다 더 깊다

고통이 말한다

꺼져버려! 

- 「취가」 중에서


니체는 사람들에게 권유한다. 오 사람아, 귀 기울여 들어보아라, 깊은 밤은 뭐라고 말하는가? 세상은 깊다. 그렇다면 세상의 고통도 깊을 것이라고. 니체는 그것이 우리 실존의 조건임을 알았지만 그것에 체념하고 순순히 그 고통의 아가리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사람들에게 시를 통해 말한다. 니체는 어떤 경우에도 시에서 우리를 가르치려고 들지 않는다. 다만 우리 스스로 공감하고 깨닫기를 갈망한다고 시인은 지적한다.

장석주 시인에 따르면 니체는 철학자로 유명하지만 사실 그 어떤 유명한 시인보다 더 삶의 심연을 궤뚫어 본 시인이다. 그에게 시와 철학은 한 나무에서 뻗어 나온 두 가지였다. 니체는 삶을 궤뚫고 비극적 조건을 끈질기게 응시한 뒤 몇 개의 지헤를 거둔다. 그리하여 삶과 죽음, 절망을 견디는 강인함, 행복과 불행, 고독 속에서 빚는 자유, 놀이로서의 삶, 선악의 피안을 두루 사유하고, 수직적 높이의 숭고함을 찬양한다.

그의 시에서 너무나 많은 인생을 배웠다고 시인은 털어놓는다. 시인이 니체에게서 늘 감탄한 것은 그가 마치 한 쌍이 아니라 여러 겹의 생을 살아낸 사람 같다고 느낀다고 이야기한다. 니체는 고독 속에 칩거하여 인생을 궁구하고, 생의 환희를 찾아내서 기쁜 목소리로 노래한다고도 평한다. 니체의 시구들은 촌철살인의 진리를 담아낸다고 말한다. "춤추는 별을 탄생시키기 위해 사람은 자신 안에/ 혼돈을 품고 있어야 한다."(p.162, 「춤추는 별을 탄생시키기 위해」), "자, 무수한 등을 타고 춤추어라/ 파도의 등을 타고, 파도의 심술을 견디며 춤추어라"(p.188, 「북서풍에게」), "강인함을 잃지 마라, 내 용감한 심장이여!/ 이유는 묻지 마라!"(p.172, 「해가 저문다」),, "가라, 꺼져버려라/ 너희 침울한 눈빛의 진리여/ 나는 덜 여물어 떫고 성급한 진리가/ 내 산마루에 머무는 걸 보고 싷ㅍ지 않다!"(p.244, 「가장 부유한 자의 가난에 대하여」) 같은 구절을 읽을 때, 나는 전율을 느낀다. 

시인은 또 니체는 높은 산꼭대기를 사랑한 철학자, 삶을 높이로서 즐긴 시인, 하늘과 벼락을 사모한 철학자라고 설명한다. "니체가 사랑하고 좋아한 것은 "숲과 바다의 동물들처럼/ 한참 동안 넋을 잃고 한눈을 파는 것/ 사랑스런 혼란 속에 쪼그려 앉아 사색에 잠기는 것/ 그리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지는 것/ 나 자신에게로 이르는 것"(「고독한 자」)이다고 강조한다.



번역자 유영미는 니체와의 만남은 다른 철학자들과의 만남과는 사뭇 다르다고 〈옮긴이의 글〉에서 적고 있다. 이에 따르면 망치를 든 철학자라는 별명답게, 그의 글 하나하나가 우리의 가슴을 쿵쿵 울려대고 나태한 정신을 흔ㄷ르어 깨운다. 영원한 젊음과 용기로 무장한 정신이 새로운 삶, 세로운 유희로 주저 없이 나아가게 한다. 사유의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 그것이 바로 니체다.

역자는 세상과 타협하기보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도전하는 니체의 시(詩)에서도 그 모습이 빛난다고 말한다. 알프스의 산속에서, 이탈리아의 햇살 아래서 빚어낸 그의 사색은 시의 형태로도 고스란히 전달된다고 밝힌다. 사유의 깊이가 워낙 심오하다 보니 다소 어려운 시도 있고 단번에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 시도 있다. 니체의 초기 시들은 약간 서정적이라고 역자는 풀이한다. 냉소적인 시도 있고,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삶에 대한 애정이 엿보이는 시도 있다. 삶과 사상이 깊이 연결되어 있던 철학자니만큼 니체의 삶과 철학을 알면 니체의 시도 자연스럽게 이해될 것이라고 역자는 조심스럽게 귀띔한다. 하지만 배경 지식이 없다고 크게 걱정하지 말라고 역자는 독자들을 안심시킨다. 니체를 좋아해서 젊은 시절 비 내리는 일요일이면 니체를 열 시간씩 탐독하곤 했던 헤르만 헤세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역자는 전한다.

"음악은 다만 우리의 영혼만을 요구한다." 시 또한 음악과 가까운 장르이니, 일단은 헤세가 그랬듯 우리의 영혼만 가지고 니체를 읽어도 충분하리라고 역자는 속내를 드러낸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삶의 자리가 다르니만큼, 니체 시를 통해 받아들이는 메시지들도 다른다는 말이다. 아무쪼록 삶을 변화시키는 한 구절, 용기와 힘을 주는 한 구절을 만날 수 있기를 역자는 바란다. 그리하여 삶을 뜨겁게 사랑하라고 말한 니체의 노래를 같이 부를 수 있기를 역자는 기대한다.


저자 :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년 10월 15일 독일 뤼첸 근처 뢰켄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1900년 8월 25일 바이마르에서 사망했다. 1849년, 니체가 다섯 살이 되던 해 아버지의 사망으로 어머니와 여동생, 하녀 등 여성으로만 둘러싸인 유년 시절을 보냈으며 신체적으로 쇠약하여 일생을 잔병치레로 고통받았다. 1864년 본 대학에서 신학과 고전 문헌학을 전공하다가 스승인 리츨 교수를 따라 1865년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겨 문헌학 전공으로 학문을 이어나갔고 1869년에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독일 지성사에서 가장 논란이 많고 영향력 있는 철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니체는 시인이자 음악가이기도 했다. 개신교 목사의 아들이자 모범생으로, 학교의 수석 학생으로, 마침내 바젤 대학의 최연소 교수로 젊은 나이에 성과에 대한 압박과 고통을 견뎌냈다. 따라서 늘 ‘내면의 혼돈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를 깊이 고민했다. 저서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비극의 탄생』 『디오니소스 송가』 『이 사람을 보라』 『바그너의 경우』 『즐거운 지식』 『도덕의 계보학』 『우상의 황혼』 『선악의 저편』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아침놀』 『반시대적 고찰』 『생성의 무죄』 『힘에의 의지』 『우리 문헌학자들』 등이 있다. 


역자 : 유영미


연세대학교 독문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쓰는 기쁨: 슬퍼하지 말아요, 곧 밤이 옵니다》 《카이로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감정사용설명서》 《가문비나무의 노래》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 《예민함이라는 무기》 《부분과 전체》 《혼자가 좋다》 《불행 피하기 기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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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자유 - 일의 미래, 그리고 기본 소득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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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까지만 해도 4차 산업혁명이나 인공지능의 시대가 곧 시작해 우리의 삶이 확 바뀔 거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이 잦아들면서 사람들에게 크게 와 닿지 않는 말잔치에 불과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2020년 팬데믹을 계기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정보통신 기술과 스마트폰이 없었다면 이처럼 빠르게 언택트 방식으로 전환하지 못했으리라는 것이다. 인류 문명이 제아무리 번성한다 한들 인간 또한 자연선택이 지배하는 생태계의 환경 앞에서는 취약한 존재다. 다만 인간에게는 놀라운 공학 기술을 창조할 수 있는 뛰어난 지적 능력이 있으며 그로부터 비롯된 성취가 과거, 현재, 미래의 연속선상에서 우리가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도록 이끌었다고 『우리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의 저자 김명철은 강조한다. 이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스스로를 성찰하고 바꿔 더 나은 존재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기술이 바꿔놓을 미래에 대해 공부하고 지구와 공존하는 방법을 마련하기 위해 책을 읽고 다큐멘터리를 보고 전문가의 강연을 듣는다.

우리 상상력의 무한함을 이끌어내 높은 문명을 이룩한 인류는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발전해갈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깊은 사유를 계속할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4차 산업혁명이 불가피하게 앞당겨지는 역설적인 현실 앞에서 대안은 무엇일까?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배터리, 자율주행, 웨어러블 로봇, 3D 프린팅, 레이저, 나노 로봇, 생물 모방 기술 등 7개 분야에 대해 조목조목 따져가며 기술 혁명의 방향에 모두 관심을 쏟고 있는 형국이다. 

특히 AI와 빅데이터, 대체에너지 확장 정책은 거대한 도시를 어떻게 바꾸고 인구 감소에 대해 어떤 묘안을 내놓을지 우려스러운 눈초리를 언제 어디서나 마주한다. 대한민국을 비롯한 세계의 모든 나라들과 인류는 자국 이익 우선이라는 대전제를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극한의 대결로 '인류 멸망' 임계치에 다다른 듯한 크고 작은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 


사람들이 살기에는 더없이 편리한 세상이 되었지만 그사이 지구는 이상 신호를 보내왔다. 벌목과 개간으로 숲은 사라지고 플라스틱과 각종 쓰레기로 바다는 오염되었다. 자동차와 난방 기구, 공장에서 쏟아낸 미세먼지는 대기의 질을 떨어뜨렸고 이산화탄소는 지구를 온도를 높였다. 온난화는 극지의 얼음을 녹이고 사막화를 가속했으며 지엽적인 폭우를 쏟아부었다. 올해 유럽의 폭우와 폭염은 유럽이 열대성 기후로 변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암울한 기후 변화 현상을 보여준다. 또 얼마 전에는 숲을 파괴하고 야생동물들의 터전에까지 난입한 인간의 욕망이 인류 사회에 코로나 바이러스를 퍼뜨렸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선진국 대도시에서 더 큰 피해를 낳았다. 인구밀도가 높은 거대 도시가 바이러스나 기후 변화의 역습에 훨씬 취약하다는 사실은 우리의 경각심을 일깨워준다. 환경과 자원을 무작정 섭취하고 약탈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으로 빌려 쓰고 가능한 한 원상태를 보존해야 한다.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행복을 추구함에 있어서 자연과의 공존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점을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인류 번영의 사회보다는 인류 멸망의 사회로 변해가는 듯한 모습에서 인구와 관련된 노동 문제는 어떻게 변화할까? 이 문제는 4차 산업혁명은 인류의 '노동'을 크게 줄이는 방향으로 발전돼 갈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에 기후 문제만큼이나 시급한 대안이 필요하다. 이 책 『모두를 위한 자유』에서 저자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인류 번영을 지속하는 노동 정책, 나아가 기업과 노동자와의 관계, 그리고 국가의 책임 등을 촘촘히 살핀다. 저자는 독일은 아돌프 히틀러가 외쳤던 기적의 무기로는 세계를 정복하지 못했지만, 사회적 시장 경제라는 경제 기적의 무기로는 세계를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저자는 책의 〈서문〉을 통해 나치의 하켄크로이츠가 메르세데스 벤츠 로고로 대체되고, 나치의 상징색인 갈색이 가톨릭의 검은색으로 바뀐 것에 불과할지 몰라도 독일의 성실함과 유능함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고 말한다. '모두를 위한 번영'은 독일의 무한한 노동력과 능력에 대한 믿음일 뿐 아니라 지금까지 실현 불가능이라 여겨졌던 인류의 꿈을 표준적으로 실현한 것이기도 했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저자는 이제 모든 것이 모두에게 충분할 만큼 존재했다고 선언하고 필요한 것은 커다란 파이 한 조각을 살 수 있을 만큼의 성실함뿐이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저자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는 〈디지털 변화 3부작〉 중 마지막에 해당하는 『모두를 위한 자유』를 집필했다. 전작 『사냥꾼, 목동, 비평가』에서는 사회적 변화에 대한 일반적 개요를 설명하고, 그다음 『인공 지능의 시대, 인생의 의미』에서는 말 그대로 인공 지능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담았다면, 이번 『모두를 위한 자유』에서는 '노동의 미래에 대한 성찰'을 심도 있게 다룬다. 컴퓨터와 로봇, 인공 지능이 주도하는 급진적인 기술 진보는 우리를 제2차 기계 시대로 진입시키며, 노동 시장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흔들고 있다. 제4차 산업혁명을 말하는 것이다. 저자 프레히트는 현대인이 더 이상 생존을 위해서만 일하지 않는다고 진단한다. 오히려 사회적 소속감을 추구하려고, 즉 임금 노동 사회의 일원으로 존재하려고 노동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임금 노동 및 성과 사회가 점차 〈의미 사회〉로 전환되면서, 물질적 번영과 양적 성장보다는 일의 질과 조건, 자유로운 삶을 중요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 책은 오늘날 완전하게 달라진 노동 개념이 우리의 일상과 사고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더 나아가 사회 전체에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면밀히 보여 준다. 특히 진보적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무조건적 기본 소득을 탐구하며, 이 거대한 사회 시스템의 재편이 왜 불가피한 과제인지를 논리적으로 설득해 나간다. 이 책은 일이 아닌 삶 전체에 충만한 의미를 부여하고, 느끼며, 교류하는 미래를 상상하게 한다. 변화의 시대에 누가 살아남을지에만 몰두하는 세상에서, 도태되어도 마땅한 존재는 없음을 알리는 〈의미 사회〉 개념은 강렬하다. 혁신이란 말이 많아질수록 사유가 얕아지는 역설을 꾸준히 비판한 저자는, 복지 개념에 머물러 있는 기본 소득을 몇 단계 확장해 '지속 가능한 미래'를 현실로 만든다. 인공 지능에 익숙해질수록 초라해지는 자신을 마주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노동의 공허함을 극복하는 사회적 의미를 찾게 하는 희망의 설계도다.

점점 더 많은 노동자가 점점 더 완벽해지는 기계 덕분에 소외된 노동에서 해방되는 것을 한탄해야 할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상황은 오히려 정반대다. (중략) 완전 자동화된 기계 속에는 무한한 노동력이 응축되어 있기 때문에 노동자는 예전보다 훨씬 더 적게 일해도 되고, 그로써 〈해방된 노동 시간〉을 이용해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p.220)


저자는 1960년대 서구의 모든 산업국에서 궁핍의 경제는 끝났다고 선언한다. 저자에 따르면 인간이 문명을 만든 이후 모두에게 풍족했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러다 현대에 들어 산업국에서 기술 진보와 끊임없는 생산성 증대가 그것을 가능케했다. 이제 분배의 문제만 남았다. 원칙적으로 모두에게 충분할 만큼 생산된다면 각각의 사람에게 얼마가 돌아가야 할까? 여기서 한 가지가 궁금하다. 풍요 사회는 모두에게 풍족할 만큼 재화만 생산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그 성공의 토대가 무엇인지 묻는다. 답은 분명하다.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 할 것 없이 가능한 한 오랫동안 많은 일을 했다. 이제 그런 노동이 불필요해진다면 사람들은 앞으로도 계속 스스로를 생업 노동 사회의 일부로 정의해야 할까? 저자의 답변은 '그렇지 않다'이다.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스스로를 망가뜨린 노동에 종지부를 찍었고, 대신에 서비스 부문에서 무한 반복되는 무수한 노동을 만들어냈다. 한마디로 혹독한 노동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노동으로 대체된 것이다. 이처럼 디지털 혁명은 과거의 산업 혁명이 일으킨 그 어떤 변화보다도 훨씬 더 큰 격변을 일으킨다. 프레히트는 지금까지 노동 시장의 변화가 주로 생산 기계로 인해 이루어졌다면, 이제는 전적으로 새로운 정보 기계가 핵심 동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이로써 제1차 기계 시대에는 설득력이 있던 경제 이론과 추론이 제2차 기계 시대에는 그렇지 않게 된다. 임금 노동이 점점 불필요해지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앞으로도 계속 스스로를 생업 노동 사회의 일부로 정의해야 할까?

노동은 오랫동안 인간 존재의 핵심 요소로 간주되어 왔다. 즉, 삶의 지침을 제공하고, 사회적 지위를 부여하며, 성취 지향적 사회를 유지시키는 수단이었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근간을 형성해 온 것 역시 노동이었다. 하지만 그 노동의 개념이 달라지고 있다. 프레히트에 따르면, 급속한 기술 발전이 전통적 의미의 노동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 자동화와 인공 지능은 단순히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는 수준을 넘어, 임금 노동 자체의 필요성을 재검토하게 만든다.


이 전환점에서 우리는 여전히 노동을 삶의 중심축으로 삼아야 하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에 직면한다. 저자는 과거에는 노동이 천시되었고, 그것이 노예나 하층민의 몫이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와 같은 역사적 맥락에서 본다면, 기계가 인간을 대신하는 상황은 어쩌면 진보적인 결과일 수도 있다. 기술이 인간을 노동의 의무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준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직면한 도전은 단순한 노동 시장의 재편이 아니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전반적인 사회적, 경제적, 윤리적, 철학적 방향성을 재설정하는 거대한 임무를 수행해야만 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인간이 더 이상 생존을 위한 노동에 얽매이지 않고, 구성원들이 스스로 의미를 창출하며 살아가는 사회, 즉 〈의미 사회〉를 제안한다. 이는 노동의 불가결성은 점차 약화되고, 자유로운 삶과 자기실현에 대한 욕구는 강해지고 있는 이 시대에 반드시 필요한 개념인 듯하다. 기술의 진보는 인간 소외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성 회복의 계기로 이해되어야 한다. 심각한 위기가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으로 바라보려는 이런 시도를 통해, 인간은 단순한 노동력 공급자를 자처하는 대신 자기 주도적 존재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저자 프레히트의 논리다. 

저자는 우리 삶에서 노동을 줄이고도 모두가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시스템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천명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묻는다. '오늘날 우리는 실제로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21세기에 번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노동에 대한 요구가 아닌 삶의 의미가 사회 중심에 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비정규직 노동자의 증가와 연금 제도의 불안정성 속에서, '무조건적인 기본 소득'은 필연적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무조건적인 기본 소득은 인간이 생업 노동에 매이지 않고, 자유와 진정한 자아실현을 추구할 수 있도록 기반을 구축하는 제도다. 온전한 시민의 위상을 지키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최소한의 생계 보장이다.


저자는 이에 따라 노동 여부와 무관하게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것이야말로 국가의 핵심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확언하며, 무조건적 기본 소득은 단순한 분배 정책이 아니라 사회적 기본권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호소한다. 이제는 기본 소득의 도입 여부가 아니라, 어떤 기본 소득을, 언제 도입하는지를 심층적으로 논의해야 한다고 말이다. 이때 특히 〈국가〉의 역할을 강조한다.

더 나아가 저자는 무조건적인 기본 소득은 역사상 유례없는 갑작스러운 구상이 아니며, 경제적 관점에서도 허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당연히 반기를 드는 사람들도 존재하는데, 이에 대해 프레히트는 인간학적으로, 사회 복지적 차원으로, 경제적으로 반론을 펼쳐나가면서, 현실적인 실현 방안을 제시하고 실현 가능성을 검토한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디지털 혁명을 두려움의 눈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기회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일의 미래와 기본 소득〉에 관한 성찰은 디지털 혁명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을지를 우리 스스로 고민하도록 이끌어 준다.

이 책은 모두 5장(章)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노동 세계의 혁명」, 2장 「노동이란 무엇인가?」, 3장 「오늘날의 노동과 사회」, 4장 「무조건적 기본 소득」, 5장 「의미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등이다. 


저자 :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Richard David Precht)


현대 독일 철학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철학자. 1964년 독일에서 태어나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중산층 가정에서 유년을 보냈다. 졸링겐 지역의 유서 깊은 김나지움인 슈베르트슈트라세에서 대학 입학 자격 시험을 통과한 후 교구 직원으로 대체 복무했다. 이후 쾰른 대학교에서 철학, 독일 문화, 예술사를 공부했다. 1994년 독일 문화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1991년부터 1995년까지 인지 과학 연구 프로젝트 조교로 일했다. 현재 뤼네부르크 대학교, 베를린 한스 아이슬러 음악 대학에서 철학 및 미학과 초빙 교수로 재직 중이며 독일어권의 가장 개성 넘치는 지성인들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2007년 발표한 『나는 누구인가』가 100만 부 판매, 32개 언어로 번역 출간되며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로 자리 잡았다. <철학하는 철학사> 시리즈는 35만 부, 『사냥꾼, 목동, 비평가』 23만 부, 『의무란 무엇인가』 14만 부 등 프레히트의 책은 현재까지 총 300만 부 이상 팔렸다. 그는 2012년부터 독일 공영 방송 ZDF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철학 방송 「프레히트」를 진행하면서 철학적 주제를 바탕으로 한 대중서 집필에 열중하고 있다.


역자 : 박종대


성균관대학교 독어독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쾰른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사람이건 사건이건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이면에 관심이 많고, 환경을 위해 어디까지 현실적인 욕망을 포기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 자신을 위하는 길인지 고민하는 제대로 된 이기주의자가 꿈이다.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의 『세상을 알라』, 『너 자신을 알라』, 『사냥꾼, 목동, 비평가』 , 『의무란 무엇인가』, 『인공 지능의 시대, 인생의 의미』를 포함하여 『1일無식』, 『콘트라바스』, 『승부』, 『어느 독일인의 삶』 ,『9990개의 치즈』,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등 1백 권이 넘는 책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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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 한 줄만 내 마음에 새긴다고 해도 - 나민애의 인생 시 필사 노트
    나민애 지음 / 포레스트북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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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지용부터 나태주, 이병률, 황인찬까지 시간과 세대를 넘나드는 우리 시인들의 작품 77편을 주제별로 엮은 이 책은 시 해설집이다. 뿐만 아니라 시의 세계로 안내하며, 상처를 치유하는 위로의 마음으로 독자들에게 다가가 속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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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 한 줄만 내 마음에 새긴다고 해도 - 나민애의 인생 시 필사 노트
    나민애 지음 / 포레스트북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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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뷰어스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이 책 『단 한 줄만 내 마음에 새긴다고 해도』는 문학평론가 나민애의 시평(詩評)을 묶은 시 해설집이다. 저자는 10년이 넘도록 매주 한 편씩 대중들에게 시를 소개하는 칼럼을 연재하며 대중 독자들과 함께 시를 읽는 기쁨을 나눴다. 우리 시 가운데 유명한 시 77편과 나민애의 해설이 담겨 있다. ‘서울대 강의평가 1위 선생님’으로 알려진 나민애 교수는, 오래도록 시를 사랑해 온 ‘시 큐레이터’로도 유명하다. 독자로서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안 사실이지만 저자 나민애는 ‘풀꽃 시인 나태주의 딸’이라고 한다. 시인 나태주의 시를 좋아하는 독자로서 부끄러운 일이지만 독자가 사회 생활을 핑계로 시를 얼마나 안 읽었는지 반성하는 계기도 되었다.

    독자 중에는 모든 칼럼을 오려서 꽁꽁 묶은 종이 뭉치를 가져온 사람도, 손으로 시와 해설을 베껴 적으며 자신만의 필사 노트를 완성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한국인들이 시를 안 읽는다는 신문 기사를 얼핏 본 기억이 있는데 시 평론가를 감동시킬 열성 시 독자들이 있는 점으로 보아 그리 걱정할 단계는 아닌 듯싶다. 저자는 「다만 의미를 찾고 싶을 뿐」이라는 제목의 〈서문〉을 통해 시 독자들 중 누군가는 시를 읽으며 울었고, 누군가는 시를 적으며 위로받았다고 했다. 이런 마음을 전달받은 저자는 ‘곁에 두면 좋은 시’ 77편을 고르고, 감각 있는 해설을 추가해 ‘인생 시 필사 노트’를 만들었다.

    이 책은 정지용부터 나태주, 이병률, 황인찬까지 시간과 세대를 넘나드는 시인들의 작품 77편을 주제별로 엮었다. 이 책은 마치 〈시 플레이리스트〉 같다는 출판사 측의 말도 귀담아 들을 만하다. ‘위로가 필요할 때’ ‘사랑 곁에 머물고 싶을 때’ ‘마음이 쓸쓸할 때’처럼 감정의 결에 따라서 골라 읽을 수 있게 구성했다. 저자의 덧붙인 해설은 독자들이 오래도록 그 마음에 머물도록, 그렇게 사유의 폭을 넓혀가도록 도울 것으로 믿는다.

    이 책은 모두 5부로 이뤄져 있다. 1부 〈처음 맛보는 시〉, 2부 〈작은 위로가 필요한 날〉, 3부 〈사랑을 곁에 두었다〉, 4부 〈가을이나 바람처럼 쓸쓸한 것들〉, 5부 〈나에게 말을 건네는 시〉 등이다.


    “꽃이 피어도 즐길 시간 없고 꽃이 진대도 느낄 여유 없는 당신에게.”라는 부제를 갖고 있는 1부에서는 윤진화의 「안부」, 이성복의 「서시」, 신미나의 「이마」, 박성우의 「첫눈」 등이 눈에 띈다. 

    "달이 '지는' 것, 꽃이 '지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합니다.

    왜 아름다운 것들은 이기는 편이 아니라 지는 편일까요.

    잘 늙는다는 것은 잘 지는 것이겠지요."(p.20)

    시인이 '아름다운 세계를 꿈꾸는 당신'에게 묻는 안부에 대해, 저자는 “시의 끄트머리를 잡고 일어섰다”고 말했다. 저자는 "시는 3분 만에 읽을 수 있을 만큼 짧지만, 그 안에는 누군가를 일으켜 세울 만큼 강하고 선명한 힘이 담겨 있다."고 설명한다. 시는 처음이라 낯설어도 괜찮다. 어떤 순간에 어떤 시를 읽으면 좋을지 친절하게 안내해 주기 때문이다. 저자의 해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나만의 ‘시 플레이리스트’가 완성되어 있을 것이라는 말도 귀에 쏘옥 들어와 박힌다.

    “불빛은 강물을 찰바당찰바당 건너오고

    눈발은 팔랑팔랑 팽나무 가지를 흔들어 깨운다.”(박성우 「첫눈」 중)

    저자는 많은 '첫' 번째 일들은 일생에 단 한 번만 존재하는데, '첫눈'이라는 말은 매년 쓸 수 있다."며 말하고 박성우 시인의 「첫눈」은 이 느낌을 고요하게 간직한다고 말한다. 그날 첫눈이, 작은 요정처럼 강물에게 가서는 가만히 녹아들었다. 첫눈이, 말없는 팽나무를 찾아가 손을 얹었다. 그리고 팽나무에 스며들었다고 밝힌다. 이 시를 읽으면 언제든 첫눈을 만날 수 있다. 그것은 아직도 '찰바당찰바당'거리는 강물에 있고, '팔랑팔랑'대는 팽나무 가지 사이에 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출판사 측에 따르면 나민애 저자는 어린 시절부터 ‘단어의 중요성’과 ‘말의 감각’을 자연스럽게 배웠다. 시인인 아버지가 시에 쓰일 하나의 낱말을 찾기 위해 너덜너덜해진 사전을 붙잡고 몇 날 며칠 고민하던 모습을 곁에서 쭉 지켜봐 왔기 때문이다. 시는 그렇게 고르고 고른 말들의 결정체였다. 그런 시인의 언어를 손끝으로 따라 써보는 것이 ‘시 필사’다. 문장의 호흡, 단어의 떨림, 쉼표 하나의 여운까지 온몸으로 느끼는 과정은, 섬세하면서도 단정한 글쓰기를 익히는 데 더없이 좋은 훈련이 된다.

    또한 시 속 감정을 곱씹으며 쓰는 필사는, 말로 표현하지 못한 감정을 정리하는 데 도움을 준다. 내가 이미 느끼고도 미처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을, 시인은 단 한 줄의 문장으로 건네준다. 시를 따라 쓰는 동안 우리는 감각적인 문장을 배우는 동시에, 더 깊어진 ‘나’를 만나게 된다. 이 책에는 〈정지용문학상 수상작〉, 〈현대시학 작품상〉, 교과서·모의고사 수록작부터, 황인찬·육호수·진은영 등 MZ세대에게 사랑받는 시인의 작품까지 폭넓게 구성했다. 저자 나민애가 아버지 나태주의 시를 매우 쑥스러워하며 해설한 것도 있다. 

    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


    꽃 한 송이 피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중략)

    나는 지금 그대를 사랑합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p.142, 나태주 「시」 중에서)


    이 「시」에 해설을 쓰려고 했을 때 저자의 고민이 많았던 듯하다. "동아일보에 매주 한 편의 시를 소개하는 칼럼을 썼다. 10년 가까이 쓰다 보니 힘들었다. 이제 그만해야겠다고 말했더니 왜 내 시는 다루지도 않고 코너를 끝내느냐고, 나태주 시인이 항의한 적이 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작품을 소개하는 것은 쑥스럽고 점잖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500명이 넘는 시인을 소개하면서 가족이라는 이유로 나태주 시인을 빼놓기는 섭섭해 이 시를 실었었다.

    사람들은 아버지의 시 중에서 어떤 걸 제일 좋아하느냐고 질문하곤 한다 시인 나태주에 대해서는 「대숲 아래서」, 우리를 위해서는 「행복」, 그리고 아버지 인생 그 자체로는 이 작품을 떠올리게 된다고 기술한다. 꽃 곁에 있으면 향기가 묻고, 햇살 곁에 있으면 온기가 전해지기 마련이다. 맑고 고운 시를 읽다 보면 마음에 새살이 차오르는 느낌을 받는다. 그 느낌은 사라지지 않고 우리를 어느 방향으로든 나아가게 해준다. 여기 나태주 시인의 「시」 역시 좋은 차오름을 경험하게 해준다.

    내가 알기로 이제 이 시인의 소원은 단 한 가지밖에 없다. '세상이 덜 아팠으면 좋겠다'는 것. 너무 큰 소원을 위해 여든이 넘은 시인은 종종걸음으로 뛰어다닌다. 나는 자주 보지도 못한다. 바쁜 시인의 퉁퉁 부은 발을 위해 신발이나 사서 보내야겠다.(p.144~145)

    역시 혈육의 정은 무엇보다 진하다는 말은 진리인 듯하다. 자신의 아버지를 평소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시인으로서, 가장으로서, 또 시인의 독자들에게, 모든 동시대 사람들에게 고통없는 세상을 만들지 못해 위로라도 보내는 시인의 아쉬움을 담고 있다. 그나마 한 모퉁이에서 한 사람의 고통이라도 덜어보겠다고 애태우며 여든이 넘도록 동분서주 뛰어다니는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한없는 딸의 애정이 한 자 한 자에 깊이 배어 오롯이 전해지는 느낌이다.


    시의 소재는 크게 보면 자연과 인간이다. 이 가운데 인간에 관한 것이라면 늘 빠지지 않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이란 단어는 누구나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단어이다. 인간의 감정 중에서도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또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가장 아름답고 순수하게 맺어주는 감정의 발로 아닐까? 그래서 고대 서양에서 시인들은 '사랑'을 노래해 왔다. 사랑은 신(神)의 능력을 제외한다면 가장 강력한 인간의 능력이라고 본다. 물론 동양도 마찬가지지만 서양에 비해서는 드러내놓고 사랑을 예찬하지는 않았다. 아마 남녀 간의 사랑을 신이 내린 축복으로 생각하고 신성시 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아무튼 사랑은 인간이 문명을 이루고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간 본연의 감정이 아닐까? 그리스·로마 시대는 신들도 사랑을 한다. 고대 서양에서는 신을 인격화했다. 사랑의 신도 있다. 사랑 때문에 신들도 다툰다. 서양 사상의 기원이 되는 예수 이후의 시대에 생겨난 기독교는 '사랑'을 최우선 인간의 의무이자 본성이라고 가르쳤다. 로마는 '사랑'의 종교 기독교도의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결국 '국교'로 인정한 후 신들의 세상이 하나님이란 유일신의 나라로 바뀌었다. 그리고 사랑은 서양 사상의 가장 중심 사상으로 자리잡았다. 이 책 3부에 있는 「사랑」이란 양애경의 시가 독자의 눈길을 끈다.

    둘이 같이 가고 있는 줄 알았는데

    문득 정신 차려 보니

    혼자 걷고 있습니다

    (중략)

    뒤를 돌아보니 

    참 많이도 왔습니다


    인연이 끝나고 계속 앞으로 걸어간다고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p.178)


    저자는 이 시의 해설을 이렇게 썼다. "이 시의 제목은 「사랑」이지만 본문에는 '사랑'이라는 말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도 시를 읽으면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분명, 사랑에 대한 시가 맞다. 시인이 말하기를 사랑이란 둘이 함께 걸어가는 것을 뜻한다. 그와는 반대로, 둘이 걷다가 어느새 혼자 걸어가게 되는 것을 일러 우리는 '이별'이라고 부른다. 사랑과 이별의 이야기를 길 걷는 두 사람의 일로 바꾸니 그 뜻이 참으로 잔잔하다. 잔잔함 속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별 또한 사랑의 일부라는 이 시의 메시지에 있다. 헤어진다고 해서, 이 길을 혼자 걷는다고 해서, 사랑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사랑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시의 화자는 혼자 걷고 있지만 언젠가는 다시 만날지 몰라서 사랑의 길을 쉽게 이탈할 수 없었다. 이렇게 사랑의 여운을 혼자 걷는 것도 '사랑'이다. 다시 만날 수 없대도 사랑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사랑하면서 걸었던 길을 왔던 만큼 되짚어 가야만 사랑은 비로소 끝이 날 수 있다. 그러니까 외롭게 돌아가는 마음의 복귀까지도 '사랑'이다.

    세상에는 이별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지만 성급해지지 말 것을, 이 시는 당부한다. 헤어지면 둘이 같이 만든 길을 혼자서 지워야 하니까 당연히 힘이 든다. 힘들면 원망이 생겨 난폭해지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돌아가는 길까지 사랑의 일부라고, 이 시는 이야기한다. 사랑은 소중한 것. 그렇다면 예의를 갖추어 가는 길까지 정중하게 배웅해 주어야 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생의 가장 비참한 순간은 가장 괴로운 순간이고, 가장 살고 싶은 순간이다. 그때에는 할 수 없는 일이 많지 않을 것이다. 죽을 힘을 다해서 몸부림칠 수밖에 없다. 시인은 물고기가 펄떡거리는 그 새벽을 활기찬 시장이라거나 용솟음치는 생명력이라고 표현하지 못한다. 바닥을 치는 온몸의 두드림에서 자기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다.(p.300, 「육탁」 중에서)


    저자 : 나민애


    1979년 충남 공주 출생.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여 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교수로 재직 중이며, [동아일보]의 「시가 깃든 삶」 주간 시평을 연재하고 있다. 2007년 [문학사상] 신인평론상을 통해 등단했으며 저서로는 『제망아가의 사도들』 『내게로 온 시 너에게 보낸다』 『책 읽고 글쓰기』 『반짝이지 않아도 사랑이 된다』 등이 있다. 우리 시대의 정신과 감수성에 맞는 시를 찾고 소개하는 ‘시 큐레이터’로 활동 중이다. 나태주 시인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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