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의 여왕
가와조에 아이 지음, 김정환 옮김 / 청미래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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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독자는 학교 다닐 때부터 유난히 수(數)에 약했다. 산수를 배울 때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수학'을 배우는 중학교 때부터 시험 성적이 별로 좋지 않았다. 중학교 때까지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었다. 수학과 멀어진 때는 고등학교 때부터였다. 대입 준비도 수학이 적게 반영되는 '문과'를 선택하려 했으나 집안에서 '이과'를 강권하는 바람에 이과반으로 편성됐다. 다른 과목은 별로 다른 것이 없었지만 이과는 수학1에 이어 수학2도 있었다. 당연히 시험 성적은 늘 수학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게 나왔다. 이후 대학은 고집을 꺾지 않고 문과로 택했다.

수학은 그렇게 멀어졌다. 대학은 물론 사회에 나와서도 수학이 필요없었다. 산수 정도만 잘해도 되는 게 사회였다. 직종도 숫자가 필요한 경리, 재정 관련 부서는 피했다. 이 책 『수의 여왕』도 SF소설이니만큼 숫자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천운, 재물운에 쓰이는 '운수'인 줄 알았다. 오해였다는 것은 책을 받아보고서야 확인됐고, 운수(運數)의 수도 숫자를 뜻하는 '셀 수'임을 사전을 찾아보고야 알게 됐다. 주의력 부족이었음을 뒤늦게 후회한들 어쩌랴. 그래도 억지로 이해하다시피 책을 읽고 나서는 생각이 달라졌다. SF소설을 수학을 모티브로 쓰거나 유명 작품도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촘촘히 읽은 게 그나마 위안이 되고 새로운 분야의 독서에의 욕구도 증가했다. 빨리 읽는 것보다 이해하면서 느릿느릿 읽으면 이해하기 쉽고 재미도 한층 더 크다는 점을 확인한 것도 이 책을 읽은 보람 중의 하나다.







이 책은 이렇게 골치 아픈 수학을 갖고 썼지만 이해가 어려운 독자 같은 사람을 위해 저자의 풀어쓰기의 묘미도 애착을 갖게 한 이유이다.

한마디로 이 책은 수학도 재미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보여주는 소설이다. 적어도 독자에게는 그렇다.

사람이 저마다 자신의 운명수를 가지고 태어난다면, 그리고 그 운명수가 무엇인지에 따라서 다른 삶을 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고민거리와 생각거리도 안겨주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운명수로 상대방에게 저주를 거는, 아름답지만 피도 눈물도 없는 메르세인 왕국의 왕비에 대항하여 왕비의 양녀 나쟈가 자신의 잔혹한 운명을 극복하는 환상적인 모험의 이야기이다.

수가 운명을 지배한다는 다소 설득력 떨어지는 명제를 소설, 그것도 SF소설로 엮어낸 저자의 글쓰기 능력과 수학 지식 등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운명수에 관한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나쟈와 요정들의 판타지 대모험 이야기는 그렇게 독자와 가까워졌다.





저주와 마법의 세계에서 요정들의 도움으로 성장해나가는 나쟈의 이야기를 다룬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읽다 보니 학교에서 배웠던 수학 이론(사실 이름이나 대충의 공식과 기호들만 생각나지만)들이 생생하고 재미있게 응용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이 소설은 수학에 대해서 품고 있던 거부감을 없애줄 뿐만 아니라 수학이 재미있고, 흥미로운 지적인 놀이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등장인물들에 대한 묘사도 매우 잘 표현됐지만 저자는 독자 같은 상상력 부족인 분들을 위해 등장인물을 책 앞에 컬러그림으로 배치시켰다. 그림을 그리고 책 앞에 배치한 것은 당연하게 편집진의 의도겠지만. 독자는 이 등장인물들 때문에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공간을 상상해볼 수 있는 멋진 시간이 됐다.





스토리는 수학과 다르게 무척 단조롭다. '단조롭다'는 표현은 수학에 비해서 그렇다는 독자의 판단이다. 8년 전에 일어난 참극으로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언니 비앙카가 행방불명된 이후, 나쟈는 왕국에서 왕비의 눈에 띄지 않도록 숨죽이며 살고 있다. 왕국의 왕비이자, 나쟈의 양어머니는 적수에게 저주를 걸어 없애버린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무시무시한 인물이다. 우연히 이상한 편지를 받게 된 나쟈는 편지에 적힌 곳에서 신비로운 거울을 발견하게 된다. 거울을 자신의 방으로 가져온 나쟈는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고, 자신도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려 거울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거울 속에서는 5명의 요정들이 왕비의 지시에 따라서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태어나는 “운명수”를 분해하는 계산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는 이 세계에서는 금지된 행동으로, 계산을 하는 것 자체가 엄금된 것이었다.

이 요정들은 왕비에게 납치되어 이 일을 억지로 하고 있었다. 요정들은 나쟈에게 자신들이 이 거울의 방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줄 열쇠인 운명수를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태초에 수(數)가 있었다. 모든 존재의 근원, 어머니 수, 즉 수의 여왕인 최고신은 대기(大氣)를 낳고, 신들을 낳고, 대지를 창조하고, 요정을 만들고, 그리고 인간을 만들었다. 어머니 수는 모든 ‘자식’에게 수를 하나씩 부여했다. 생명 그 자체, 우리를 형성하는 운명수를.”


“제가 약한 인간이고 저주에 맞설 수 있는 운명수를 갖지 못한 건 사실이잖아요? 제가 좀더 강하고 더 좋은 운명수를 가졌더라면 공포를 느끼지 않았을 거예요.”


요정들과 함께 성에서 도망친 나쟈는 최초의 1인의 직계 후손들이 살고 있다는 낙원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낙원장과 그녀의 딸 타니아를 만난다.

그들의 도움으로 요정들은 다시 힘을 회복하고, 왕비와 왕국의 비밀에 대해서도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제 나쟈는 다시 한번 왕비에 맞서서 자신의 운명을 극복하고자 한다. 보잘것없는 운명수를 가진, 나쟈는 거대한 운명수의 소유자인 왕비에 맞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수학과 판타지의 만남이라는, 독특한 설정은 독자들이 부담 없이 수학의 세계로 모험을 떠날 수 있도록 해준다. 나쟈와 요정들이 일종의 퀘스트를 하나하나 해결해가는 모습은 흥미를 주고 그뿐만 아니라 그 과정을 거치며 성장해가는 나쟈의 모습은 자그마한 감동마저 선사한다.

이야기 곳곳에 숨어 있는 수학이라는 매개는 자연스럽게 수학의 원리를 떠오르게 하고, 수학을 조금은 다른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이 책에서 저자는 소수, 피보나치 수열, 페르마의 정리, 삼각수, 소인수분해, 메르젠 수 등(일부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수학 용어) 어려운 수학적 개념과 이론을 꺼내놓지만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사건 전개와 해결 과정에 따라 재미있게 풀이해준다. 독자로 하여금 "수학은 아름다운 학문이구나"라는 점을 느끼게 해준다. 수학과 SF소설이 완전 다른 분야가 아니라 재밌게 공유되는 부분도 많다는 점을 인식하게 해줌으로써 교묘하게 수학이 어려운 사람에게도, SF소설이 너무 허황된 만화 같은 수준이다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도 쉽게 다가서도록 바꿔놓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수학이 어려운 독자들도 수학과 판타지를 동시에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한 점이 역력하다. 매력적인 작품이다.


저자 : 가와조에 아이


작가. 규슈 대학교 문학부 문학과(언어학 전공)를 졸업하고, 2005년 동 대학 대학원에서 박 사학위(문학)를 취득했다. 전공은 언어학, 자연 언어 처리이다. 국립 정보학 연구소 연구원, 쓰다주쿠 대학교 여성 연구자 지원 센터 특임 준교수 등을 거쳐, 2012년부터 2016년까지 국립 정보학 연구소 사회 공유 지(知) 연구 센터 특임 준교수를 지냈다. 저서로는『게으른 족제비와 말을 알아듣는 로봇』, 『백과 흑의 문─오토 마톤과 형식언어를 탐험하는 모험』,『정령의 상자─튜링머신을 둘러싼 모험』,『컴퓨터는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등이 있다.


역자 : 김정환


건국대학교 토목공학과를 졸업하고 일본외국어전문학교 일한통번역과를 수료했다. 21세기가 시작되던 해에 우연히 서점에서 발견한 책 한 권에 흥미를 느끼고 번역의 세계를 발을 들여, 현재 번역 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 출판기획 및 일본어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경력이 쌓일수록 번역의 오묘함과 어려움을 느끼면서 항상 다음 책에서는 더 나은 번역,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번역을 할 수 있도록 노력 중이다. 공대 출신의 번역가로서 공대의 특징인 논리성을 살리면서 번역에 필요한 문과의 감성을 접목하는 것이 목표이다. 야구를 좋아해 한때 IMBCSPORTS.COM에서 일본 야구 칼럼을 연재하기도 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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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사랑 - 언젠가 너로 인해 울게 될 것을 알지만
정현주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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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사랑』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사랑'을 생각해본다. 인류가 생기면서부터 사랑은 삶의 화두였고, 지속되면서도 계속된 명제다. 즉, 사랑은 인류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남녀간의 사랑은 자손 유지에도 필요하고, 삶의 에너지를 얻고 유지하는 데도 절대적인 힘이 된다. 이웃 사랑은 함께 사는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서로의 안전에 협력 가능하고 삶의 과정을 함께하면서 더욱 돈독해진다. 이밖에도 사랑의 힘은 종교, 이념, 국경 등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을 뛰어넘는 강력한 힘을 인류가 지속하는 만큼 끊임없이 증명하고 있다. 각 분야에서 자신의 노력을 다하는 것도 이 사랑의 힘이 밑바탕이다고 해도 반대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정도로. 그래서 진부한 것처럼 느껴지는 사랑에 대한 담론은 우리 생활을 전반적으로 관여한다. 언제나 가슴 떨리고 또 어떤 순간 놀라운 행복감과 충만함까지 느끼게 되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에 대한 담론은 이제 다른 각도, 다른 표현으로 나타난다. 글로써 나타내도 사람마다 얼굴이 다르듯 표현은 다르지만 사랑 예찬은 계속된다.

20여 년 동안 라디오 작가로 활동했으며, 자신과 라디오를 꼭 닮은 서점 리스본과 2호점 서점 리스본 포르투를 가꾸고 있는 정현주 작가도 동참한다.



그는 어쩌면 한국에서 누구보다도 더 많이, 자주 사람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쓰는 사람이다. 그가 지금껏 써낸 사랑 3부작 시리즈 《그래도, 사랑》 《다시, 사랑》 《거기, 우리가 있었다》 는 지금껏 사랑이 어려웠던, 그리고 지금보다 행복한 사랑을 꿈꾸는 대한민국 100만 남녀들의 일상과 가슴을 파고들며, 수많은 찬사를 받아왔다.

이 책은 그의 사랑 시리즈의 첫 작품으로, 이번에 개정판으로 출간되며 새롭게 옷을 입었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푸르른 하늘과 달과 나무가 공존하는 사막의 어떤 한가운데서 만나는 남녀의 모습을 표지로 구현하며, 텍스트를 읽었을 때 전해지는 저자의 따뜻하고 아름다운 필치를 표현했다. 두 사람이 마주본 모습은 새로운 만남과 시작을 의미한다.

사람과 사랑, 영화와 음악, 책을 두루 아끼는 저자의 다양한 취향과 매력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작품으로 가벼운 듯, 가볍지 않는 매력적인 문장으로 독자들에게 마음의 울림과 여운을 남기는 책이다. 정현주 작가는 두 번째로 쓰는 프롤로그를 통해 “이별하고 울던 날 여기 적힌 몇 줄이 등을 쓸어주는 것 같았다고 다시 사랑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많은 분이 다정한 말을 돌려주셨습니다.”라며 그간 독자들에게 받은 사랑에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청년 세대의 삶이 고달파지면서 '5포 세대'라는 말이 나왔다. 출산이나 결혼은 물론 연애까지도 포기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어려운 시점에서도 이 책은 제목처럼 그래도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랑만이 답이고 힘이라는 의미로 읽힌다. 다만 왜 그런가에 대해서는 저자가 책을 통해 해답을 내놓아야 한다. 연애가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을 경우 대개 '연애 실패'로 단정한다. 왜 실패했나는 이미 관심 사항이 아니다. 자신이 스스로 이 물음에 대한 답하지 않을 경우 어느 누가 나서서 해답을 찾으라고 강요하거나 권유하지 않는다. 때문에 실패한 사랑은 잊혀지기 쉽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사랑에 대한 감정이 새로워진다. 사랑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떨리게 하면서도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준다. 또 사랑 그 자체를 통해서 행복에 가까워진다. 인연을 찾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은 특별한 사람, 나에게 개인적으로 특별한 사람을 찾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주변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특별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오랜 우정을 나누는 친구들도 나름대로의 특별함이 있지만 이성적으로 특별한 사람이라면 단순히 시간에 구애받지는 않는다.



사랑을 포함한 사람 사이의 이야기는 무엇보다 솔직함이 중요하다. 결별 과정에서도 지나치지 않은 솔직함은 상처를 줄일 수 있다.

연애 과정에서 입는 상처는 헤어질 때 특히 심한데 이걸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연애할 때의 기억이 헤어지고 나서도 나를 괴롭힌다면, 좋은 기억을 우선 떠올릴 수 있도록 노력해보자. 연애도 인생에 있어서는 하나의 공부다. 항상 모든 일에는 상실이라는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과거를 그리워하면서 힘들어하기보다 추억을 남겨두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잘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저자는 충고한다. 저자는 또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보다 깊고 우직한 사람이 되어보라고 권유한다.

따뜻한 사랑을 하면서 인생 전체를 따뜻하게 만들어가고 싶다면 느긋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 빈자리를 채우려는 노력도 좋지만 자신이 여유가 있어야 상대에게도 여유를 베풀면서 보다 지속가능한 사랑을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은 독자에게도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길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고통을 이겨내고 강해지면서도 사랑을 품는 것이다. '사랑'. 그래야 상처를 극복하고 마음이 따뜻한 사랑스러운 사람이 될 수 있다. 이 책은 삶과 사랑에 대해 생각하고 행동하고 도전하고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힘과 격려를 준다. 그래서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우리 모두 누리고 살자는 저자의 간곡한 '사랑론'이 의미가 있다.



문제에 대한 가장 좋은 해결책들은 대개 아주 심플합니다. 좋은 사랑 또한 그렇다고 믿어요. 너무 많은 생각은 사랑을 망칠 뿐이에요. 사랑은 생각이 아니라 행동 속에서 커가는 것 아닐까요. 사랑에 답이 어디 있겠어요. 선택이 있을 뿐.

「사랑은 어려운 말로 시작되지 않는다」 중에서


흐름에 맡기는 것도 현명한 방법이지만 나중이 되면 너무 늦을지도 모르죠. 가장 솔직한 자신을 만나고, 만약 이것이 사랑이다 싶으면 용기를 내면 좋겠어요. 마음을 말해보세요. 고백을 하세요. 그러지 않으면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잃게 될 거니까.

「우정을 잃을까봐 사랑을 감췄다면」 중에서


마음을 열고 또 다른 우주를 만나게 되길 빌어요. 마주 보기 전에는 알지 못했고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되기를. 상대와 나눌 더 좋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하여 하루가 더 부지런해지기를. 그리하여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멜빈처럼 되기를. ‘당신은 나를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해.’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하는, 그런 사랑」 중에서



[우리도 사랑일까?]의 주인공처럼 살았던 시절도 있었으나, 어느새 [아무르]의 주인공처럼 늙기를 바라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것도 언젠가는 낡은 것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낡은 것이 갖는 아름다움도 알게 되었어요. 마냥 새로운 것만 따라가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냐고 묻는다면 저는 ‘아니요’라고 대답할 겁니다. 시간을 두고 지켜온 것만이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이 따로 있습니다.

「시간이 흘러 낡아지는 것과 깊어지는 것」 중에서


사랑이란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가 사는 집을 닮았습니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맞는 집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아요. 살면서 하나씩 나에게 맞게 바꿔가야 하죠. 특별히 불편한 부분이 있다면 고쳐야 하는 게 당연하고요. 그래야 그 집에 오래 살 수 있습니다. 괜찮다, 괜찮다 하면서 머리를 속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마음은 머리 몰래 병이 듭니다.

「그곳이 전쟁터라고 해도 같이 있고 싶은 것」 중에서


필요한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용기와 자신감, 시간이 갈수록 보면 볼수록 더 매력적인 사람이 되려는 노력이겠죠. 그 안에서 행복하여 새장 문을 열어두어도, 새가 떠나지 않도록 품이 넓고 향기로운 사람이 되려는 노력 말이에요.

「행복한 새는 날아가지 않는다」 중에서



저자 : 정현주


사람과 사랑에 대한 글을 쓰는 다정한 사람. 20여 년 동안 라디오 작가로 활동했으며, 자신과 라디오를 꼭 닮은 서점 리스본과 2호점 서점 리스본 포르투를 가꾸고 있다. 별명은 정서점. 친구와 가족, 영화, 음악, 사진과 그림, 아름다움과 다양한 빛깔을 담은 것이라면 무엇이든 사람들과 나누고, 함께 이야기하기를 즐겨한다. 사랑 또한 늘 빠지지 않는 대화의 주제다. 그렇게 세상에서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 다양한 사랑의 모습은 그녀의 라디오를 통해 사람들에게 마음과 이야기로 전해지며, 누군가의 새로운 사랑이 되기도 했다. 어쩌면 누구보다 사랑에 대해 잘 알고, 또 많이 쓴 사람. 사랑에 대한 다양한 모습을 담은 그녀의 첫 사랑 에세이 《그래도, 사랑》은 사상으로 행복하고, 아파본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잊을 수 없는 책이 되었다. 사랑 연작으로 《다시, 사랑》 《거기, 우리가 있었다》가 있다. MBC 〈별이 빛나는 밤에〉 〈꿈꾸는 라디오〉, KBS 〈최강희의 야간비행〉 〈장윤주의 옥탑방 라디오〉 등과 함께했다. 지은 책으로 《스타카토 라디오》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 등이 있으며 공저로 《픽스 유》가 있다. 고려대학교와 동대학원에서 국문학을 전공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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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리는 말투에는 비밀이 있다 (10만 부 기념 한정판 리커버 에디션) - 사람의 마음과 인생의 기회를 사로잡는 대화법
장차오 지음, 하은지 옮김 / 미디어숲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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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주체는 인간이다. 인간은 저마다의 삶을 위해 각자 다른 환경에서 저마다의 삶을 살아간다. 누구는 잘 살고, 못 사는 차이는 있지만 능력의 차이나 불합리한 사회 구조 탓이지 사람 자체가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있다 할지라도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데 그 사람이 감당할 만큼의 차이이다. 빈부의 차이는 능력이나 세상 시스템의 차이에서 비롯되지 '사람됨'의 차이가 아니다. 능력의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거기에 맞추며 사는 데까지 인위적으로 구별할 수 없다. 사람됨의 차이가 없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인권이 있다는 말과 동의어로 받아들여도 무방할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부딪치며 사는 데는 능력의 차이가 문제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안전과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함께 사는 것이 유리함을 알고 집단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사람이 모여 살다보면 의견의 차이가 생기기 마련이다. 서로 자신의 주장을 옳다고 얘기를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함께 의견을 나누면서 가장 좋은 방법을 그들 스스로 찾아낸다. 그때 필요한 것이 대화(말)이고 관계이다. 같은 직장이나 일상에서 사람을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은 ‘대화력’이란 말은 당연히 설득력을 갖게 된다. 뛰어난 능력, 화려한 외모, 성실함을 갖춘 사람일지라도 우리는 잘못된

말투 하나로 한순간 관계를 망치거나 일을 그르치는 경우를 종종 경험한다.



말에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이 있다. 인생을 바꾸는 결정적인 순간에도 대체로 인간관계와 말투에 따라 성패가 좌우될 때가 많다.소통이 잘 되는 말투를 가진 사람끼리는 서로 결합해 예상 밖의 성공적인 결과를 이끌어내는 경우를 우린 자주 발견한다. 특히 현대에는 소통이 예전처럼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직접 대화나 편지뿐만 아니라 전화, 이메일 등 코드화된 소통수단을 사용할 정도로 발달됐다. 전달 수단만 달라졌을 뿐 소통이 인간 관계와 협력에 가장 우선되는 수단이다. 글로 써도 '말투'처럼 고유의 문체가 있고 이를 코드로 바꾼 컴퓨터를 통한 이메일에도 마찬가지다.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로 활동하는 이 책 『끌리는 말투에는 비밀이 있다』의 장차오 저자는 10여 년에 걸친 말투 연구 끝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인생의 기회를 만드는 ‘끌리는 말투’를 찾아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인간관계에서 첫째로 해야 할 일은 호감을 사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첫 만남에서 좋은 인상을 남기고, 불쾌한 대화도 유쾌하게 바꾸는 ‘끌리는 말투’의 비밀을 저자에게 배워보자. 이 책에는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다양한 대화 사례가 담겨 있다. 나쁜 말투와 평범한 말투, 끌리는 말투가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볼 수 있게 구체적인 예시로 보여준다.

우리는 모두 끌리는 사람, 옆에 있고 싶은 사람, 대화하면 기분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마음은 그러한데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저자가 밝힌 끌리는 말투의 비밀을 내 것으로 만들어보자. 끌리는 말투는 당신을 좀 더 능동적이면서 매력적인 사람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우리는 종종 바른말이라고 생각을 해서 한 말로 오히려 반박을 당하며 상처를 받을 때가 있다. 진심으로 의견을 낸 것인데 예기치 못한 반박을 당하는 것은 기분을 상하게 하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해결책을 찾지 못할 땐 의외로 힘든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그냥 넘어갈 걸...' 하는 후회와 자책에 휩싸일 때도 있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매우 실천적인 해답을 준다. 구체적으로 말투를 고치는 것이다.

저자는 학창 시절 시험 치기 전 한 번 훑어보고 실제로 실전에 사용할 수 있게 정리돼 있어 매우 유용하다고 독자는 생각한다. 즉 대인 관게, 화술, 설득 등 다양한 방법의 '말하는 방법'을 모아 요점만 제대로 짚어논 참고용으로 읽어도 굉장한 발전을 가져올 것이라고 믿는다. 책의 구성부터 일목요연하다.


1부 좋은 인상을 남기는 말투는 따로 있다 : 대화의 물꼬를 잘 틀어라

2부 말하기가 달라지면 관계가 편안해진다 : 생각지도 못한 각도에서 이야기하라

3부 똑똑하게 할 말 다하면서 원하는 바를 얻는 비밀 : 공감과 반대 의견을 절묘하게 활용하라



첫 만남에서 좋은 인상을 남기는 법


1. 유머가 있어야 한다.

농담을 통해 그 사람의 교양과 지성, 약자에 대한 인식 등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거나 비하하는 유머는 안 하는 것이 좋다. 대신 세심하고 따뜻한, 배려와 관심이 담긴 유머를 구사할 수 있으면 좋다.

2. 상대를 '공부'해야 한다.

인간관계를 잘 하고 싶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관찰'이다. 누군가를 만나기 전에 그 사람에 대해 미리 공부했다가 대화를 나눌 때 이를 적절히 활용하면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다.

3. 두 번째 만남을 노려라.

첫 만남에서 좋은 인상을 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행동을 했는지 기억해두자. 옷차림이나 인상을 기억해두는 것도 좋다. 두 번째 만남에서 관찰했던 바를 (메모를 해두었다) 말한다면 깊은 인상을 줄 수 있다.



상대를 기분 좋게 하는 '칭찬'의 기술


1. 좋은 칭찬은 진심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틀에 박힌 칭찬은 하지 않는 것이 낫다. 성공한 영업사원들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꾸밈없이 적극적이고 호탕하게 상대를 높여주면 관계를 돈독히 할 수 있다.

2. 좋은 칭찬은 상대를 편안하게 한다.

심하게 과한 칭찬을 받으면 그 칭찬의 수준에 도달할 수 없다는 부담감을 느껴 칭찬한 사람과 거리를 두게 된다.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매번 내가 필요할 때마다 지체 없이 도움을 주잖아요."

이렇게 칭찬을 하면 지체 없이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끼게 된다.

좋은 칭찬은 상대의 도움이 얼마나 적절하고 고마웠는지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3. 좋은 칭찬은 센스가 있어야 한다.

생동감 있고 유머러스하며 '기교'가 있는 칭찬이 좋다. 이거 어떻게 하는 건가요?

- 의미를 담은 작은 선물을 곁들이기

- 상대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 매슬로우의 욕구(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 애정과 소속의 욕구, 존경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

- 함축된 의미가 많은 칭찬을 하기 - 무턱대고 하는 칭찬보다는 구체적인 이유를 들어서 칭찬하면 더 감동이 있다.



상대가 좋아하는 화제를 찾아라


1. 상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라.

사람들의 대화 장면을 보면 서로 자기 이야기만 하고 있는 모습을 꽤 자주 볼 수 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순식간에 관심사의 주제가 바뀌는 수가 많다. 상대방이 관심 갖고 있는 것에 대해 궁금해하고, 충분히 얘기를 나눈 후에 주제를 바꾸는 게 좋다.

2. 상대가 자부심을 느끼는 일에 관해 이야기하라.

자신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는 것보다 남을 더욱 높여주고 그들이 자부심을 느끼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독려하는 사람과 대화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보편적이면서도 독창적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지극히 평범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도 인생에서 역경과 고난을 극복한 이야기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그런 부분을 적절히 화제에 끌어들이면 좋다.

3. 상대가 좋아하는 화제 속에서 기회를 찾아라

상대방이 좋아하는 화제를 내가 모르는 분야여도 연결고리를 찾거나, 상대에게 도움이 될 만한 요소를 찾는 것은 쉽다. 주로 들으면서 대화를 끌어가며 연결고리를 찾도록 더욱 주의를 기을여야 한다.



위로를 하려면 상대의 마음을 끄집어내라


1. 아픔을 호소할 때

'내가 더 비참하다'는 식의 반응은 상대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다. 고통을 느끼는 것은 그 사람이 상황을 그렇게 해석한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질문을 던져 스스로 생각해보고 고통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좋다. 은연중에 상대에게 나을 보고 배우라는 뜻을 내비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끌리는 말투를 쓰는 사람은 상대에게 '사실 발 아래에는 늪이 없어요. 그리고 당신은 매우 훌륭한 사람이에요' 라고 일깨워주어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게 해준다.

2. 속상하다고 고민을 털어놓을 때

상대가 다른 누군가 때문에 속상하다고 고민을 털어놓을 때 그 사람을 같이 험담하는 것은 낮은 수준의 대화법이다. 여러 상황을 골고루 살피고 갈등을 겪고 있는 사람들 모두 좋은 사람이며 세상 모든 일은 해결할 방법이 있다는 점을 짚어주는 것이 좋다.

3. 동료가 상사에게 혼났을 때

끌리는 말투는 상대의 부정적인 정서를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에너지로 바꾼다. 또 상대를 칭찬하면서 상사는 욕하지 않음으로써 상황을 긍정적으로 마무리 짓는다.



과거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기회는 늘었지만 좋은 인상을 남기고 진정한 관계로 남는 경우는 오히려 드물다. 이해관계에 얽혀 가면을 쓴 채 이야기하다 보면 관계는 공허함만 남기기 일쑤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는 ‘감정의 줄다리기’가 많이 등장한다. 무슨 언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이 ‘감정의 줄다리기’ 성격이 달라질 수 있다. 감정을 어느 방향으로 이끄는지가 곧 어떤 인생을 살아가느냐를 결정하기도 한다.

책에 따르면 끌리는 말투는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며 나의 생각과 감정을 전하는 것이다. 말하기는 단순히 기술이 아니라 배려인 이유다. 아무도 상처 입지 않고 나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지만,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상대의 기억 속에 좋은 인상으로 오래 남는다. 3초 안에 상대의 관심을 어떻게 끌 수 있는지, 화가 난 내 감정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지, 내성적인 사람과 이야기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 다양한 유형의 사람과 여러 가지 상황에서 끌리는 말투를 구사할 수 있는 기술을 알려준다.

이 책에는 구체적인 대화 사례와 호감을 살 수 있는 사소하지만 중요한 방법이 소개되어 있다. 우리 속담에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했다. 비슷한 말이라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듣기 좋은 말이 되기도, 불쾌한 말이 되기도 한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친구 사이에서 어떻게 말을 주고받아야 할지 명쾌하게 솔루션을 제시한다. 생각만 해도 신나는 일이잖은가.



저자 : 장차오


중국에서 언어 표현의 고수로 통하는 그는 커뮤니케이션 강사로 왕성하게 활동하며 특히 라인(LINE)에서 가장 인기 있는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대인관계에서 일어나는 99%의 문제는 서로 감정이 통하지 않아서 일어난다고 말한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는 먼저 감정이 통해야 하며 감정이 통하면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지기 마련이다. 그때 필요한 것이 끌리는 말투이다. 중국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대표작으로 『감정 대화(高情商溝通力)』, 『감정이 통하는 만남(高情商交際學)』 등이 있으며, 10년 넘게 영업에 관해 고민하고 연구한 결과를 담은 『똑똑한 사람이 영업도 잘한다(銷?就是要情商高)』 등이 있다.


역자 : 하은지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한중과 국제회의반을 졸업했다. 졸업 후 대기업에서 인하우스 동시통역사로 일했으며, 국내 유수 기업에서 출강 및 번역, 통역 업무를 담당했다. 현재 번역 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에서 중국어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 『하버드에서 배우는 내 아이의 표현력』, 『혹등고래 모모의 여행』, 『정서적 협박에서 벗어나라』, 『마음을 숨기는 기술』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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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로 산다는 것 - 가문과 왕실의 권력 사이 정치적 갈등을 감당해야 했던 운명
신병주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0년 10월
평점 :
품절



독자로서는 역사 특히 한국사를 공부한 것은 고등학교 때까지였다. 그것도 대입을 위해 필요한 과목이었기 때문이다. 대학 교양학부에서도 역사 과목은 배제되었고 자연스럽게(?) 사학(史學)과는 멀어졌다. 그러다 사극이 열풍을 일어나는 때가 있었다. 방송국마다 앞다투며 사극을 방영해 이때부터 역사와 친해졌다. 사극을 무척 재밌게 만들어서 그랬겠지만 학교에서 공부한 정사(正史)가 아닌 야사(野史)를 중심으로 드라마 작가들의 상상력을 보태 현대적으로 해석한 탓도 있을 것이다. 특히 궁중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드라마에 반영해 인기가 대단했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아무튼 사극으로 역사와 친해진 뒤 가끔씩 정사보다는 야사에 나오는 이야기를 소설로 쓴 책, 비사(秘史)를 밝히는 책은 무척 재밌었기 때문에 꽤 흥미를 갖고 읽기 시작했다. 많은 책을 읽지는 못했지만 드라마가 화제가 되거나, 역사 문제를 화제로 삼는 자리에서 조금씩은 대화에 낄 정도는 됐던 것 같다. 이후엔 대화에 낄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아서 더 자주 읽기도 했다. 대개 왕 중심의 정사보다는 왕비나 궁녀 중심의 야사가 인기를 더 끌었다. 그래서 지금도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얘기를 꺼내 우리 역사를 설명해주는 프로그램을 보면 새로운 사실을 들은 것처럼 생경한 얘기로 들릴 때가 많다. 그나마 조선왕조 518년 동안 27대 왕의 명칭을 무조건 외웠던 고등학교 역사 수업 덕분에 책을 볼 때마다, 역사 프로그램을 시청할 때마다 많은 도움이 됐다.



조선왕조 때는 왕비가 되는 가장 일반적인 코스가 남편이 세자인 시절 세자빈으로 간택된 후 세자가 왕이 되면 왕비가 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세자빈으로 들어오는 경우 대개 10세를 전후한 나이에 삼간택의 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정작 이 코스를 거쳐 왕비가 된 인물은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 송씨, 연산군의 왕비 폐비 신씨, 인종의 왕비 인성왕후 박씨, 현종의 왕비 명성왕후 김씨, 숙종의 왕비 인경왕후 김씨, 경종의 왕비 선의왕후 어씨 등 6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고 이 책에 더 큰 재미를 더해준다. 조선에 27명의 왕이 있었는데 이처럼 정통 코스를 거친 왕비가 소수에 불과한 이유는 무엇일까? 『왕비로 산다는 것』의 신병주 저자가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저자에 따르면 왕비의 인생은 화려하다기보다 살얼음판 같았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가문과 왕실의 권력 사이에서 그리고 가문과 왕실을 둘러싼 정치적 상황 속에 자신의 운명을 맡겨야 했기 때문이다. 계유정난, 단종의 폐위, 두 차례의 반정 등 왕위 계승을 둘러싼 정치적 변수들이 다양하게 등장하고, 장자가 아닌 차남이나 손자의 즉위, 여기에 더하여 후궁 소생의 왕들이 즉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양녕대군의 세자빈과 같이 세자가 교체되는 바람에 대군 부인으로 강등된 사례도 있고, 인수대비로 널리 알려진 성종의 어머니는 남편 의경세자가 요절하는 바람에 세자빈의 지위를 잃기도 했다. 소현세자의 세자빈 강씨는 남편의 의문사로 세자빈 지위를 박탈당한 것은 물론 사약까지 받았다. 혜경궁 홍씨 역시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세자빈의 지위를 잃었다.



세자빈이 되어도 왕비가 되는 길은 순탄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현종의 왕비 명성왕후 김씨는 세자빈, 왕비, 그리고 아들 숙종이 왕이 되면서 대비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만큼 세자빈에서 왕비까지 가는 길도 순탄하지 않았던 것이다. 왕비 집안에 대한 정치적 견제도 심했다.

태종이 원경왕후의 처남들을 처형한 사례나 태종이 왕비의 부친인 심온을 처형한 사례와 같이 왕비가 된 순간 가족들의 안위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도 여러 차례 발생했다. 왕비가 된 후에도 정변으로 폐위되는 경우도 많았다.

세종의 집권으로 단종이 왕위에서 물러난 정순왕후는 폐비가 된 후, 현재의 창신동 인근에서 옷감에 물들이는 작업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폐위된 지 230여 년 만인 숙종 때에 복권되기는 했지만, 20대 이후의 전 생애를 일반인으로 살아갔던 정순왕후의 삶은 무척이나 힘들었을 것이다. 연산군과 광해군의 폐위로 폐비가 된 폐비 신씨와 폐비 유씨의 삶도 남편의 몰락과 함께 참담함을 거듭했다.



왕비는 시대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세자 생산의 여부에 따라 달라지는 운명을 감내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자신의 정치력을 관철시킨 왕비도 있었다. 원경왕후는 남편 태종 이방원을 왕위에 올리는 데 일조하기도 했고 정희왕후는 남편 세조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지만 훗날 성종을 대신해 수렴첨정(미성년의 왕이 즉위하였을 때 대왕대비 혹은 왕대비가 왕과 함께 정치에 참여하던 제도)을 했다. 이후 성격은 다르지만 문정왕후, 인순왕후의 수렴첨정이 이어진다.

그동안 ‘왕’과 ‘참모’라는 키워드로 조선시대를 다루었다면 이제는 ‘왕비’라는 키워드로 조선시대를 들여다보자. 같은 조선도 왕비라는 키워드로 살펴본다면 또 다른 측면이 보인다. 왕비로 조선을 봤을 때 공주, 대군, 폐세자 등 『왕으로 산다는 것』과 『참모로 산다는 것』에 등장하지 않았던 인물들이 나온다. 그동안 야록, 설화 등 신변잡기적 내용으로 접했을 법한 이야기를 조선시대 최고 전문가 신병주 저자가 들려주는 〈조선왕조실록〉에 근거한 팩트로 살펴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드라마, 영화 등 사극의 대부분이 궁중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만큼 사소한 배경과 인물 관계도, 명칭까지 이 〈왕비로 산다는 것〉 을 읽으면 이해가 쉽다. 크고 작은 작품 속 인물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그 관계도가 일목요연하게 재정리된다. 무엇보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굵직한 역사적 사건 속에서 정설과 팩트에 근거하여 왕비를 다룸으로써 그녀들의 실제를 객관적으로 보게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독자 역시 역사 지식은 물론 역사를 보는 안목도 한 단계 업그레이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나라는 왕이 다스렸지만, 그 왕의 통치를 뒤에서 조정한 이들이 왕의 최측근 여인들인 왕비다. 조선시대 군왕 다음으로 막강한 권력을 지녔던 왕비들의 삶은 어떠했을까에서 시작한 궁금증은 이 책을 놓는 순간 말끔히 놓을 수 있다. 저자는 한문 투성이인 조선왕조실록 뿐만 아니라 야사까지 통달하지 않고는 이 책을 쓸 수 없을 것이란 생각에 저자의 역사 지식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왜 '조선시대 전문가'로 불리워지는지 이해가 된다.


‘1부 새 왕조의 혼란 속 왕비들’에서는 집안의 든든한 후원으로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는 데 힘이 되어주었던 신덕왕후를 시작으로 건국 이후 자리를 잡아가는 조선에서 하나의 역할을 했던 왕비들을 다룬다. 원경왕후는 태종 이방원을 왕위에 오르게 만든 정치적 동반자였다.

즉위 후 처가의 권력이 부담으로 다가오자 태종은 처남인 민무구, 민무질을 처형하는 등 원경왕후 가문을 철저히 탄압한다. 강인한 성격의 원경왕후였지만 이후 죽을 때까지 형식적으로만 왕비의 자리를 유지한다.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은 따르는 세력들이 많아 신권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다. 왕권 강화에 주력했던 태종에 의해 심온은 사사되고 이 일로 소헌왕후의 가문은 몰락하는 비극을 맞는다.

소헌왕후는 가문의 몰락이라는 아픔을 조용한 내조로 극복하며 자신의 길을 묵묵히 지켜나갔다. 한편 최고의 성군이었던 세종에게 며느리 간택 문제는 큰 골칫거리였다. 폐출될 수밖에 없었던 문종의 두 세자빈 휘빈 김씨와 순빈 봉씨까지 다루었다.



‘3부 연속되는 폐비와 반정의 시대’는 성종의 왕비로서 적장자 아들까지 낳았지만 화려한 지위에서 결국은 나락까지 떨어진 폐비 윤씨로 시작한다. 그리고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 이후 연속적으로 폐위를 당하는 신씨와 단경왕후로 이어진다. 폐비 신씨는 연산군의 왕비라는 이유로 폐위되었지만 어진 덕이 있어 폭군 옆에서 그나마 이성적으로 내조했던 왕비로 기록되어 있다. 폐비 신씨의 조카이자 중중이 왕위에 오르면서 왕비가 된 단경왕후는 아버지 신수근이 연산군의 최측근이라는 이유로 7일 만에 폐위된다. 반정이 일어나던 위기 속에서 지혜를 발휘하며 중종을 지켜낸 조강지처였지만 정치적 희생물이 된 것이다. 폐위 이후에도 중종과 단경왕후가 서로를 그리워했다는 일화는 여럿 전해진다. 단경왕후가 폐위된 후 그 자리에 오른 장경왕후가 25세에 승하하고 중종의 다음 왕비가 된 인물은 문정왕후였다. 문정왕후는 아들

명종 대신 수렴청정을 하며 그 시대 최고의 권력자로 군림한다. 그리고 사망 때까지 20년간 동생 윤원형, 정난정 등과 함께 국정을 좌지우지하며 외척정치를 이어갔다.



‘4부 왜란과 호란, 혼란기의 왕비들’은 임진왜란 시대 선조의 왕비 의인왕후에서 시작한다. 후사를 얻지 못해 늘 조연에 그쳤던 의인왕후는 자식이 없었지만 다른 왕실 소생을 매우 아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녀가 가장 아꼈던 인물은 광해군으로 피난생활까지 함께하며 굳건한 동반자 관계를 유지했다. 인목왕후는 선조의 계비이자 즉위 후에도 광해군이 가장 경계했던 적자 영창대군의 어머니다. 광해군은 끝내 영창대군을 증살시키고 이후 인목왕후를 서궁에 유폐한다. 광해군 시대 핍박의 상징이기도 했던 인목왕후는 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의 예우를 받으며 대비로서의 지위를 완전히 회복한다. 연산군의 왕비였던 폐비 신씨와 마찬가지로 광해군의 왕비였던 폐비 유씨 또한 공식적으로는 조선의 왕비로 기록되지 않는다. 광해군 폐위 직후 유배지에서는 폐세자의 탈출사건이 일어난다. 하지만 탈출에 실패하면서 폐세자는 사사되고 폐세자빈 박씨는 목을 매어 죽고 페비 유씨는 그 충격으로 생을 마감한다. 왕비 개인에게는 비극적인 가족사였다.

‘5부 당쟁과 명분의 수단이 된 왕비들’는 예의 해석을 두고 한 논쟁이었지만 결국은 서인과 남인의 권력 다툼이었던 예송논쟁의 중심 장렬왕후에서 시작한다. 장렬왕후는 15세의 나이에 인조의 계비로 간택되어 겨우 26세에 대비의 자리에 오른다. 효종, 현종, 숙종까지 3대에 걸쳐 대비로 산 그녀였기에 상복 문제의 중심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의문투성이 소현세자의 사망 이후 시아버지 인조에게 사약을 받은 비운의 세자빈 소현세자빈 강씨와 사극의 단골 주인공 인현왕후도 다루었다. 인현왕후의 가문은 당시 서인 세력의 핵심이었다. 숙종 시대는 남인과 서인의 정치적 대립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붕당정치가 가장 격화되던 시기였다.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하고 장희빈을 중전으로 책봉한 사건과 다시 인현왕후가 복위된 사건은 이 세력다툼과 무관하지 않았다.



‘6부 노론과 소론 사이 지켜야 했던 자리’에서는 53년을 영조와 함께했던 영조의 조강지처 정성왕후와 15세의 나이에 66세의 영조의 계비가 된 정순왕후를 다루었다. 나이답지 않은 현숙함으로 왕비로 간택된 정순왕후 김씨(단종의 왕비는 정순왕후 송씨)는 야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사도세자의 충격적인 죽음에 관여하기도 하고 정조의 급서 이후 어린 순조 대신 수렴청정을 하며 경색 정국을 이끌어간다. 혜경궁 홍씨로 알려져 있는 헌경왕후는 《한중록》의 저자이자 사도세자의 세자빈이다. 헌경왕후는 10세라는 어린 나이에 왕실 어른들의 사랑을 가득 받으며 세자빈이 되었지만 노론과 소론의 당쟁이 얽힌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아들 정조마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헌경왕후는 자신의 남편을 죽인 시아버지 영조를 원망하는 대신 아들 정조를 위해 그를 이해하려는 현명한 태도를 취한다.

‘7부 근대의 격동기, 마지막 궁중의 모습’에서는 세도정치기와 일제강점기로 정리되는 무력했던 조선의 마지막을 함께 했던 왕비들을 다루었다. 순조의 왕비 순원왕후는 세자 시절 순조의 스승이었던 김조순의 딸이었다. 김조순은 19세기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전성기를 연출한 대표적인 인물이 된다. 순원왕후는 손자인 헌종과 자신이 직접 헌종의 후계자로 지명한 철종 2대에 걸쳐 수렴청정을 하며 권력을 강화해갔다.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 신정왕후는 흥선대원군의 아들인 12세의 명복(고종)이 왕이 되는 데 일조한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 척결이라는 공통의 목표로 흥선대원군과 손을 잡은 것이다. 이후 조선의 왕비 중 최장수로 83세에 승하한다.

조선이 왕비 중 가장 극적인 삶을 살다간 인물 하면 명성황후일 것이다.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사사건건 맞서가며 근대의 격동기 속에서 결국 일본에 의해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비운의 왕비였다.



이 책은 그동안 ‘왕’과 ‘참모’라는 키워드로 조선시대를 다루었다면 이제는 ‘왕비’라는 키워드로 조선시대를 들여다본 책이다. 같은 조선시대이지만 왕비를 중심으로 살펴볼 때 『왕으로 산다는 것』과 『참모로 산다는 것』에 등장하지 않았던 또 다른 측면이 보인다. 야록, 설화 등 신변잡기적 내용으로 접했을 법한 이야기를 조선시대 최고 전문가 신병주 교수를 통해 《조선왕조실록》에 근거한 팩트로 살펴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드라마, 영화 등 사극의 대부분이 궁중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만큼 사소한 배경과 인물 관계도, 명칭까지 이 『왕비로 산다는 것』을 읽으면 이해가 쉽다. 크고 작은 작품 속 인물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그 관계도가 일목요연하게 재정리된다. 무엇보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굵직한 역사적 사건 속에서 정설과 팩트에 근거하여 왕비를 다룸으로써 그녀들의 실제를 객관적으로 보게 한다는 것이다.


저자 : 신병주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및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를 거쳐 현재 건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를 전공하고 있으며, 역사를 쉽게 전달해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KBS 〈역사저널 그날〉, KBS라디오 〈글로벌 한국사, 그날 세계는〉을 진행했으며, JTBC 〈차이나는 클라스〉 ‘조선시대의 전염병과 리더십’, ‘연산군과 광해군’ 편에 출연했다. 현재 KBS라디오 〈신병주의 역사여행〉을 진행하고 있으며, 한국문화재재단 이사, 문화재청 궁능활용 심의위원, 외교부 의전정책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참모로 산다는 것》, 《조선 산책》, 《왕으로 산다는 것》, 《책으로 읽는 조선의 역사》, 《조선과 만나는 법》, 《조선평전》,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조선을 움직인 사건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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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 바다로
나카가미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 무소의뿔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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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현대문학의 이단아 나카가미 겐지(1946~1992)는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비교적 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인 열여덟 살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 일본 문단의 대단한 주목을 받으며 일본의 문학상을 휩쓸 정도로 역량 있는 작가로 떠올랐다. 그가 문단에 데뷔하기 전부터 쓴 단편소설의 면모를 살펴보면 '고뇌하는 젊음'이 담겨 있다. 2차 세계대전 패전 후 일본 사회 분위기에 대한 젊은이의 반항적 고뇌나 행동들은 숨 죽인 일본 사회에 경각심을 주기에 충분할 정도로 적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그가 자신의 눈으로 본 친구, 가족의 죽음, 어른의 외도, 첫사랑, 첫 경험의 기억들이 파편처럼 펼쳐져 있다. 이 시기 한 남자의 머릿속엔 온통 '집착에 가까운 성욕'이 지배한다. 그러나 글은 외설스럽지 않다. 이단아 취급을 했지만 문장은 좋았다는 평가였나 보다. 문체가 뒤죽박죽이라고 혹평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마치 춤을 추듯 생생함이 느껴진다고 호평도 많았다고 한다. 젊은 작가는 눈에 보이는 것을 생생하게 되살려 내는 재주가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 시기에 작가가 쓴 단편소설 모음집인 이 책 『18세, 바다로』를 지금 읽어도 신예 작가의 신선함과 패기가 돋보인다.



술과 재즈, 주체할 수 없는 성욕,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분노, 편협해지고 무감각해지는 사회 속으로의 동화가 두려워 자꾸만 뒤돌아 도망쳐버리고 싶어지는 젊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이 단편집을 독자도 처음 읽는다. 글만 처음 보는 게 아니라 이 반항적인 작가를 사후(1992년 졸)에도 몰랐으니 일본 문학에 문외한이라 해도 할 말이 없다. 구태여 변명하자면 일본 문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추리소설 때문이었고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걸출한 작가는 다른 작가를 굳이 찾지 않아도 될 만큼 독자를 매혹시켰다.

이 책에 실린 7편의 단편들을 읽으며 독자의 20대 때를 떠올려보고 작품에 몰입되면서 '반항아'라는 문단의 평을 이해할 수 있다. 정치 사회적으로(일본도 그랬겠지만) 우리나라는 만만찮게 혼란스럽고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독자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경제 활동에 뛰어들어야 했고 사회나 국가를 위해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뒷전이었다. 그렇다고 기성세대에 대한 저항감과 새 시대를 위한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마저 외면하진 않았다. 아무튼 이 소설들을 읽으면서 작가와 작품 주인공들의 심리를 충분히 이해가 된다. 또 주인공들의 자유와 방황의 느낌과는 사뭇 다르지만 그 속에서 순수함을 벗어버리는 과정에서 느끼게 되는 혼란과 정제될 수 없었던 내적 고통이란 감정이 비슷하게 전해져 왔다.



전후 어수선한 분위기 때문에 젊음이 비틀린 것인지, 그 나이의 젊음이 원래 그런 것인데 사회적 분위기가 부추긴 건지는 중요하지 않다. 반항이 광기처럼 휘몰아치는 젊음의 정신적 배출구가 없을 땐 극한 상황에 이른 인간은 대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함께 멱을 감던 친구의 죽음, 배다른 이복형이 정신질환에 시달리다 자살해버린 이야기, 아픈 엄마 몰래 내연녀를 두고 있었던 아버지, 학교에서 벌어지는 데모 때문에 학교를 한 바퀴 도는 것으로 만족감을 느끼며 섹스에 몰입하는 주인공, 담배와 수면제, 진통제에 취해사는 젊은 친구와 여자친구의 동반자살, 합의되지 않은 첫 경험 등 되돌아보면 무척 우울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은 약간은 기괴하고 심하게 우울한 이야기가 소재들이다. 재즈와 약, 술, 성욕에 집착하는 일들이 계속해서 반복된다. 지금은 나이가 훨씬 들어 사회와 나의 관계나 인생관, 가치관이 확고한 상태에서 받는 느낌은 약간 다르지만 당시의 젊음의 입장에서는 본능적인 것만 몰두하게 되는 주인공들의 행동에 공감이 되기도 한다. 작가는 주인공들을 통해 전후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쟁의 그늘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의 자포자기한 심리를 꾸짖었는지 모르지만 독자들은 '공범 의식'으로 크게 공감했을 거란 추측도 어렵지 않다.



출판사측에 따르면 나카가미 겐지는 일찍 세상을 떠나 그 작품 세계를 완전히 꽃피우지는 못했지만, 살아 있는 동안 압도적이고 강력한 작품 활동을 했다. 1974년, 사생아로 태어난 주인공의 복잡하게 얽힌 가족 관계와 고향의 강렬한 토속성을 소재로 쓴 「곶」을 발표, 이듬해에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다. 그는 문단의 이단아이자 아이돌 같은 존재로 부상한다. 한국을 사랑해서 서울 이야기 글을 쓰기도 했다고. 나카가미 겐지가 쓴 초기 작품들 때문에 '일본 현대 문학의 이단아'라고 불리우기까지 했다. 그의 작품 세계를 다 펼치기도 전에 아쉽게도 고인이 되었다고 한다.

'초기 작품'만이 가질 수 있는 거칠고도 강렬한 색채에 대한 기대감이 컸는데 그보다 18살의 높게 밀어붙이는 파도처럼 솔직한 욕구분출을 글자 그대로 토해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휩쓸리고 쓸려가고 밀려가는 감정의 기복 또한 날것처럼 녹아 있다.

이 책 『18세, 바다로』는 그 이전, 그가 대학 진학을 목표로 고향을 떠나 도쿄에 올라왔음에도 입시는 치르지 않고 문학과 재즈와 술에 탐닉하는 한편,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로 넘어가는 시대적 고뇌를 부둥켜안은 상태에서 동인지와 문학지에 시와 에세이를 발표하던 시절에 쓴 단편들을 묶은 소설집이다. 그야말로 작가의 문학 세계의 태동을 알리는 초기 작품들이기에 소중한 가치를 지니는 작품들인 것이다.



「18세」 1965년에 발표된 비틀스의 ‘미쉘’ 가사로 시작되는 이 단편은, ‘미쉘’의 가사와는 달리 조금도 조화롭지 못하다. 현재의 나른함과 과거 어린 시절의 위태로움과 죽음에의 공포가 교차하는가 하면, 모순과 거짓말로 치장된 어른들의 세계를 향한 저항의 외침과 ‘무슨 짓을 해봐야, 착하게 굴어봐야 소용없다’는 젊음의 무력감으로 낮게 가라앉아 있다.

「JAZZ」 끝없이 빠져드는 늪 같은 재즈에 몸을 맡기고 건강한 몽상에 젖는 젊은이들의 초상을 그린, 산문시에 가까운 작품이다. 재즈의 선율을 따라 미친 듯이 춤추는 언어는 이해해야 할 것이 아니라 감응해야 하는 것으로 존재한다.

「다카오와 미쓰코」 유일하게 스토리가 있는 작품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수면제에 절어 사는 다카오는 돈이 떨어지자 미쓰코와 ‘동반자살미수업’이란 일을 해서 돈을 벌려고 한다. 그러나 그 끝은 말 그대로 ‘동반자살’이었다. 작품 안에서 제시되는 ‘블랙 유머’ 같은 아이러니한 죽음이 화자인 젊은 보스를 짓누른다.

「사랑 같은」 스물한 살 대학생의 일상에 파고든 강박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가 ‘황금 손가락’으로 구현된다. 학교가 데모에 휩싸여 학생으로서의 일상은 무너졌는데, 굳이 문 닫힌 학교에 오가면서 일상의 굳건함을 믿으려는 주인공의 사유가 장황하게 연출되다, 그토록 강박적으로 수용하려 했던 ‘황금 손가락’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한낱 상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반전의 해학성에 화자는 눈물까지 흘리며 킬킬 웃는다.



「불만족」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배경으로 정처 없이 걸어가는 나의 독백과 다른 나인 ‘나’와의 대화로 구성된다. 나는 ‘나’를 주인공으로 해학적이고, 비 내리는 아침 같은 하얀 색채를 지닌, 저항으로 가득한 소설을 쓰려는가? 하고 자문하지만, 빗소리에 섞여 ‘언어는 무의미하다’는 중얼거림이 낮게 깔린다.

「잠의 나날」 불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온 나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불 축제는 어엿한 사내가 되기 위한 통과의례 같은, 남자들의 축제다. ‘충분히 분별력 있는 어른도 아니고, 그렇다고 소년도 아닌 스물세 살’의 나는 고향을 떠나기 전에 제 손으로 목숨을 끊은 형의 죽음을 재연하면서, 형을 증오하고 그의 죽음에 안도했던 열두 살 당시의 거짓 없는 감정과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았던 열여덟 살 때의 자신을 반추한다.

「바다로」 바다 앞에 무릎 꿇은 나는, 원점이며 피이며 광기이며 유일한 타자인 바다, 나 자신인 바다와의 거대한 합일을 이루고 정화된다. 작가의 내발적인 힘과 시대 사조와의 다툼이, 이 「바다로」라는 작품을 구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다툼의 소리가 순수하게 울리는 점이 「바다로」의 매력일 것이다.



저자 : 나카가미 겐지


1946∼1992. 일본 현대문학의 대표 작가. 와카야마현에서 태어나 복잡한 가정에서 자랐다. 《문예수도》 동인으로 생계를 꾸려가며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76년 「곶」으로 제74회 아쿠타가와상을, 1977년 『고목탄』으로 마이니치 출판문화상과 예술선장 신인상을 받았다. 작품으로 장편 『땅의 끝, 지상의 시간』 『봉선화』 『기적』 『찬가』, 소설집 『열아홉 살의 지도』 『화장』 『중력의 도시』 『천년의 유락』 등이 있다.

나카가미 겐지는 「서울 이야기」라는 중편소설을 쓸 만큼 한국에 각별히 관심이 있어 6개월가량 한국에 머물며 글을 쓰기도 했고, 윤흥길의 작품에 반해 그의 소설을 일본과 해외에 소개하기도 했다. 『18세, 바다로』는 나카가미 겐지가 열여덟 살에서 스물세 살 때까지 쓴 ‘너무도 잔혹한 젊음’을 표현한 작품이다. 이 소설집에 수록된 〈다카오와 미쓰코〉는 1979년 〈18세, 바다로〉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역자 : 김난주


일본문학 전문번역가. 경희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수료했다. 1987년 쇼와여자대학에서 일본 근대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오오츠마여자대학과 도쿄대학에서 일본 근대문학을 연구했다. 옮긴 책으로 『다시, 만나다』 『당신의 진짜 인생은』 『아주 긴 변명』 『인어가 잠든 집』 『태엽 감는 새 연대기1,2,3』 『서커스 나이트』 『저물 듯 저물지 않는』 『무코다 이발소』 『목숨을 팝니다』 『바다의 뚜껑』 『겐지 이야기』 『박사가 사랑한 수식』 『반짝반짝 빛나는』 『키친』 『냉정과 열정 사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여름의 재단』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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