턴아웃 특서 청소년문학 32
하은경 지음 / 특별한서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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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나에 대한 동경은 어릴 때 특히, 여자아이들은 한 번쯤 가져보는 듯하다. 즐겁게 보여서일지도 모른다. 독자는 남자아이라서 전쟁놀이나 자동차 장난감 등에 더 매력을 느끼고 만화책도 비슷한 주제를 다룬 책을 주로 보았던 기억이 난다. 사실 발레리나의 아름다운 동작은 예술로서의 가치가 엄청나게 높은 것은 확실하지만 직업으로서의 발레리나는 무척 힘든 것 같다. 우리가 예상하기로는 스포츠 선수들처럼 몸을 단련시키고 몸무게만 가볍게 유지한다면 누구나 될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그러나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이 공개되었을 때 놀라고 가슴이 저리는 존경심도 들었다. 유명한 발레리나가 되는 길이 얼마나 험한 길인지를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발레리나가 무대에서 하는 어렵지만 가장 많이 하는 동작 중 하나가 '발끝으로 서기'이다. 토 슈즈가 아무리 좋아도 힘이 송곳처럼 곧추 세운 발가락 한 군데로 모일 때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울지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에 강수진의 발은 고통 그 자체를 드러내주는 바로미터 역할을 독자에게는 했다.

이 소설 『턴아웃』도 발레 용어인 줄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았다. 발레 공연은 서너 번 갔지만 동작을 보고 어떤 동작인지 나타내는 용어까지는 몰랐다. 무용사전에는 '턴 아웃(turn out)'이 발과 다리를 엉덩이 관절(hip joint)에서부터 바깥쪽으로 향하게 하는 것을 일컫는다고 풀이돼 있다. 미국 발레의 창시자 링컨 커스타인(Lincoln Kirstein)은 턴 아웃 동작이 발레의 가독성(legibility)을 더욱 높여주는 결정적인 특징이라고 말했다고 덧붙이고 있다.

 


 

이 소설은 유전자 조작과 나노칩 시술이 성행하는 시대, 가까운 미래를 배경 시점으로 설정하고 있다. 발레리나의 과학 시술(?)을 금지하는 서울시립발레단의 제나, 제나와 절친한 사이였지만 재능의 차이를 느끼고 열등감과 질투에 빠진 소율이 주인공들이다. 두 사람이 꿈을 향해 각자 흔들리며 나아가던 어느 날, 죽은 수석 무용수 송라희가 나노칩 시술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그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녀의 핸드폰에서 의문의 파일이 발견된다. 이 소설의 시작 부분에서부터 언급되는 발레리나의 고통스러운 동작은 소설과 직간접적으로 이용되지만 주제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듯하다.

이 소설은 청소년이 직접 뽑는 비룡소 제2회 틴 스토리킹 상을 수상하면서 전국 청소년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하은경 작가가 청소년을 대상으로 쓴 성장소설이다.

턴 아웃 동작 때의 고통, 그리고 무대에 서기까지의 발레리나들의 눈물 겨운 훈련과 노력 등이 군데군데 등장하지만 근미래를 다루면서 유전자 조작과 나노칩 시술이 성행하는 근미래 배경과 어울려 SF소설로 분류되는 것 같다. 어쩌면 작가의 당초 계획에서 벗어나지 않았을까 독자로서 추측해본다. 예술인들이 빚어내는 신선한 세계관 속 아름다운 예술작품 속에 경쟁의식과 첨단 기술이 들어가며 첨단 기술에 초점이 맞춰졌다기보다 과열된 경쟁 의식에서 비롯된 비극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생동감 넘치는 사건들도 펼쳐진다.

 

 

꿈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 뛰어난 친구에게 느끼는 열등감 등 청소년들의 현실적인 고민과 가까운 미래에 맞닥뜨릴 과학시술(유전자 조작, 나노칩 시술 등)을 등장시킨 것은 주제를 흩어지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진정한 예술에 대한 신념과 같은 생각할거리를 독자들에게 던지는 작품이라고 출판사 측 평을 보면 예술은 첨단 기술이 적어도 당분간 끼어들지 못하게 하는 인간의 극한의 노력으로 얻어낸 산물이라는 점에서 첨단 기술이 끼어드는 것은 경계할 일이다. 특히 인간의 고도의 정신 작업의 산물인 예술에 기계가 끼어든다면 그야말로 예술은 설 자리를 잃고 말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지나친 경쟁 의식도 예술을 발전시키는 데 걸림돌이겠지만, 인간 작업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본능에 가까운 경쟁의식을 없지는 않을 터다. 다만 선의의 경쟁을 유도해야 하는 것이지 승부를 해서 줄세우기 식의 성적을 매긴다면 이 역시 예술의 획일성으로 흐를 수 있기 때문에 지양해야 할 사항이다. 예술에 '경쟁'이 끼어든다면 그것은 이제 예술보다는 기능으로 흐르기 쉽다는 사실을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이 소설에서 조금 더 부각시켜 주기를 마음에서다. 저자가 이를 의식해서 조금 더 스토리를 열등감, 우월감, 경쟁의 승자에 대한 스포트 라이트를 비추는 관행부터 깨야 할 듯하다.

특히 대부분의 유럽 발레단이 발레리나의 유전자 조작이나 나노칩 시술을 허용하지만 한국은 이를 철저히 금지하는 얼마 남지 않은 나라 중 하나라는 설정은 예술 본연의 자세를 견지한다는 의미로 풀이되지 않은가. 그걸 마치 기계에 맡기듯이 방치한 유럽 발레단이 그만한 대우를 받을 수 있을까?

 


 

소설 속 서울시립발레단이 유럽발레단에 비해 호평을 받는 부분도 조금 더 부각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서울시립발레단의 ‘제나’는 과학적 시술 없이도 그 어려운 턴아웃 동작마저 완벽하게 해내는, 발레리나로서의 재능을 타고난 아이다. 천문학자인 아빠처럼 광활하고 먼 우주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네덜란드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출신인 엄마 ‘수연’의 집착과 밀착 코칭을 받으며 발레리나로서 날개를 펼쳐간다. 유전자 조작과 나노칩 시술이 성행하는 시대, 발레리나의 유전자 조작이나 나노칩 시술을 허용하지 않은 한국의 서울시립발레단이 발레리나 제나는 이를 철저히 금지하는 얼마 남지 않은 나라 중 하나다.

그런 서울시립발레단의 ‘제나’는 과학적 시술 없이도 그 어려운 턴아웃 동작마저 완벽하게 해내는, 발레리나로서의 재능을 타고난 아이다. 천문학자인 아빠처럼 광활하고 먼 우주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네덜란드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출신인 엄마 ‘수연’의 집착과 밀착 코칭을 받으며 발레리나로서 날개를 펼쳐간다.

너무나 완벽한 제나의 능력을 질투하고 시기하는 같은 발레단의 단원 ‘소율’은 어느 날 이상한 일을 겪게 된다. 같은 발레단의 ‘라희’가 죽기 얼마 전, 자신에게 의문의 파일 하나를 전달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제나의 메디컬테스트 기록이었다. 소율은 제나의 메디컬테스트 기록을 생명과학 연구원인 사촌 오빠에게 보내며 해독을 부탁한다. 〈지젤〉 오디션에서 주연 지젤 역을 제나에게 빼앗긴 소율은 곧 놀라운 사실을 맞닥뜨리게 된다.

 


 

제나는 숙련된 발레리나도 완벽하게 해내기 어려운 턴아웃을 흠잡을 데 없이 해내는 천재 발레리나지만, 마음속으로는 엄마의 강요로 선택한 발레가 아닌 별과 우주를 동경하고 있다. 제나와 달리 오직 발레만을 사랑하지만 타고난 재능과 환경의 차이로 영원히 2인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열등감에 괴로워하는 소율. 서로 다른 상황에 처해 있지만, 결국 똑같이 진심으로 원하는 꿈을 마음속에 품고 있는 십대들이이다. 두 사람은 부모에게 강요당한 꿈이 아닌, 남을 이기기 위한 꿈이 아닌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한 길을 찾아나간다. 이 여정 끝에는 궁극적으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과연 제나는 엄마의 그늘에서 벗어나 나 자신을 찾을 수 있을까? 소율은 ‘제나를 이기기 위한’ 발레가 아닌,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발레를 향해 갈 수 있을까? 『턴아웃』은 하루하루 자신의 진정한 꿈이 무엇인지, 또 자신이 누구인지 답을 찾아나가는 청소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줄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마치 발끝으로 땅을 딛고 높이 뛰어오르는 발레리나처럼.

"〈백조의 호수〉 3막이다. 제나는 숨을 크게 내쉬고 나서 무대로 뛰어들어갔다. 흑조 오딜이 왕자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장면이다. 홀릴 듯한 미소를 지으라고 서 단장이 수십 번 가까이 다그쳤던 장면이었다. 토슈즈를 신은 발끝이 심상치 않았다. 뭔가 이물질이 들어 있는 것처럼 걸리적거린다. 미소를 잃지 않으려 애쓰며 푸에테 동작을 시작했다. 한쪽 다리로 중심을 잡은 채 다른 쪽 다리를 놀리며 서른두 번의 회전을 시도하는 순간이었다. 발끝이 아팠다. 유리 조각이 순식간에 엄지발가락 한 마디를 관통하더니 두 번째 마디를 푹 쑤셨다. 아프다……. 아프다……. 너무 아파 쓰러질 것 같다."(p.7~8)

 


 

저자는 「창작노트」에서 "이 글은 가까운 미래 청소년들의 꿈에 대한 이야기이다. 유전자 조작 시술이 만연한 사회, 예술에 대한 신념이 다른 소녀들이 끊임없이 고민하며 자신의 꿈을 찾아가는 이야기라고 할까. 문제는 최고의 발레리나 주인공 때문에 글을 쓰는 내내 고민에 빠졌다. 과학 시술로 이미 최고 발레리나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데, 굳이 다른 꿈을 찾으려고 할까? 그러나 발레리나의 꿈이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나 타인의 강요에 의해 만들어진 꿈이라면, 그건 가짜일지도 모른다고. 과학의 힘을 빌어 맞춤형 아기가 태어나는 현실은 솔직히 좀 섬뜩하다. 그 맞춤형 아기가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처럼 창조주를 원망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는 건 큰 축복이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생긴다면, 꼭 밀고 나가라고 말해주고 싶다. 재능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때로는 자신의 꿈이 너무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에 좌절할 때도 있겠지만,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행복한 자신과 마주할 거라고 믿는다."(p.230)

 

저자 : 하은경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이야기를 쓰는 작가이다. 추리문학의 세계에 새로운 도전장을 내밀고 뚜벅뚜벅 성실하게 걷고 있다. 장편동화 『안녕, 스퐁나무』로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을 받았으며, 『추리왕 강세리』, 『마지막 책을 가진 아이』, 『백산의 책』, 『나는 조선의 가수』, 『나리초등학교 스캔들』, 『아버지를 구해야 해』, 『공주의 배냇저고리』(공저), 『달려라, 바퀴』(공저) 등을 썼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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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율하는 나날들 - 조현병에 맞서 마음의 현을 맞추는 어느 소설가의 기록
에즈메이 웨이준 왕 지음, 이유진 옮김 / 북트리거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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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조현병 환자 당사자가 자신에게 맞는 진단을 받기까지의 여정과 정신의학의 바이블이라 일컫는 DSM의 역할과 한계를 정신질환자의 시선에서 명확히 짚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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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율하는 나날들 - 조현병에 맞서 마음의 현을 맞추는 어느 소설가의 기록
에즈메이 웨이준 왕 지음, 이유진 옮김 / 북트리거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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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조율하는 나날들』은 미국의 한 소설가가 조현병이라는 파멸적인 정신질환으로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저자 에즈메이 웨이준 왕은 예일대에 입학했으나 정신병동에 입원했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한다. 이후 스탠퍼드대를 들어가 졸업 후 스탠퍼드대 뇌 영상 연구원으로 일했고, 2016년에는 『천국의 국경』으로 소설가로 데뷔해 문학잡지 〈그랜타〉에서 선정한 ‘40세 미만 미국 최고의 젊은 소설가 21인’에 뽑혔다. 그가 어떻게 정신질환이 확인됐고, 어떤 사회적 대우를 받았으며, 실제 이 병에 대한 의사들의 치료 체계 등을 상세히 기술해 놓는다. 자신의 정신질환으로 아스러진 일상의 조각들을 그러모아 꿰매고 엮은 나날들이 눈앞에 아른거릴 정도로 독자에게는 생생하게 전달된다.

조현병(schizophrenia)이란 망상, 환청, 와해된 언어, 정서적 둔마 등의 증상과 더불어 사회적 기능에 장애를 일으킬 수도 있는 정신과 질환을 말한다.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정보에 따르면 조현병은 일부 환자의 경우 예후가 좋지 않고 만성적인 경과를 보여 환자나 가족들에게 상당한 고통을 주지만, 최근 약물 요법을 포함한 치료법에 뚜렷한 발전이 있어 조기 진단과 치료에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한 질환이다. 다소 생소한 ‘조현병(調絃病)’이란 용어는 2011년에 정신분열병(정신분열증)이란 병명이 바뀐 것이다. 정신분열병(정신분열증)이란 병명이 사회적인 이질감과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편견을 없애기 위하여 개명된 것이다.

조현(調絃)이란 사전적인 의미로 현악기의 줄을 고르다는 뜻으로, 조현병 환자의 모습이 마치 현악기가 정상적으로 조율되지 못했을 때의 모습처럼 혼란스러운 상태를 보이는 것과 같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현재 조현병의 명확한 원인이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일반적으로 조현병은 뇌에 이상이 생겨서 발생하는 생물학적 질환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다른 고혈압, 당뇨병 등의 만성질환들과 마찬가지로 조현병의 원인을 한 가지로 설명하기는 어려우며, 생물학적인 원인 및 유전적인 원인, 스트레스 등 심리학적 원인들 또한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저자는 30페이지에 달하는 「진단: 이것은 어떻게 생겨났고, 나는 무엇을 하는 것일까?」란 서문을 통해 양극성장애를 진단받고 8년 만에 조현정동장애라는 새로운 진단을 받기까지의 여정, 정신질환자로서 아이를 낳고 기른다는 것에 대한 서글픈 고뇌, 병에 따라 계급이 결정되는 정신병동의 현실 등 정신질환이 저자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생생한 고통의 흔적들을 남겼다. 또한 개인적 서사에서 한발 더 나아가 정신질환자에 대한 비자발적 치료 논쟁, 조현병과 범죄 사건, 정신질환을 겪는 학생을 위한 대학 시스템 부재, 정신의학의 바이블 DSM에 따른 진단과 그 한계 등 정신질환에 대한 다양한 사회적 이슈와 지식을 본인이 직접 경험한 맥락에서 부드럽게 녹여 내고 있다. 이 책은 그동안 숱하게 배제되고 소외된 정신질환자의 목소리를 크고 또렷하게 들려줌으로써 정신질환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혀 준다. 내면의 고통이나 삶의 장애물로 신음하는 사람들이라면, 정신질환에 맞서는 저자의 단단하고 의연한 태도를 목격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고 표현하고 포용하는 법을 체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진단」이란 챕터 외에 「악령 들린 자들의 병리학」, 「고기능」, 「예일대는 널 구해 주지 않아」, 「아이를 갖는다는 것」, 「병동에서」, 「슬렌더맨, 아무석도 아닌 자, 그리고 나」, 「현실, 영화」, 「존 도, 정신증」, 「지옥의 나날들」, 「추락의 욕구」, 「치마요」, 「경계 너머로」 등의 챕터가 더해진다. 조현병의 발병 원인이 한 가지가 아니며 완치도 불가능하지만 약을 통해 증상을 통제하면서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조현병은 뇌에서 발생하는 질병이며 세간의 편견과 달리 다중인격·인격분열과 연관이 없고, 〈뷰티풀 마인드〉 주인공 존 내시가 그랬듯 망상과 환각이 주요 증상이다. 또한 조현병은 자펙스펙트럼장애처럼 조현병스펙트럼장애의 한 유형이고 다른 유형으로는 조현정동장애, 망상장애 등이 있다고 한다.

 

 

우리 개개인을 악기라고 한다면 함께 모여 사는 이 사회를 오케스트라라고 말할 수 있다. 제대로 조율되지 않은 악기와 같은 조현병 환자들은 그럼에도 오케스트라 일원으로서 다른 악기들과 함께 연주하기 위해 현을 조율하려는 나날들을 보낼 수밖에 없고, 그 애쓴, 처절한 흔적들이 이 책에 녹아 있다. 이 책은 단순히 질병에 대한 개인적 경험을 보여 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조현병을 앓는 가족을 살해한 엄마와 동생의 사건을 조명하고, 조현병을 가진 소녀가 괴담을 믿음으로써 다른 친구를 칼로 찌른 사건을 살펴보면서 정신질환을 충분한 숙고 없이 범죄의 원인으로 환원하려는 태도가 얼마나 무책임하고 안일한 행동인지를 꼬집는다. 그리고 예일대 재학 중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이유로 결국 퇴학당한 경험을 들려주면서 정신질환을 겪는 학생들에 대한 불합리한 처우를 고발한다. 또한 정신병동에서 환자들의 행동과 말이 의료진에 따라 곡해되고 달리 해석될 수 있음을 보여 주며, 한국에서도 논란이 많은 정신질환자의 비자발적 치료에 관한 공론장을 제공한다.

직접적이고 꾸밈없으면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이 책은 조현병을 포함해 정신질환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견을 바로잡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함과 동시에, 정신질환자가 스스로를 잘 돌보면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생생하게 들려준다. 「예일대는 널 구해 주지 않아」에서는 예일대 재학 중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이유로 결국 퇴학까지 당한 일화를 들려주며 현재 정신질환을 겪는 학생들이 궁지에 몰린 현실을 직면하고 고민하게 만든다. 「아이를 갖는다는 것」에서는 양극성장애를 가진 아이들의 캠프에 보조 교사로 참여한 경험을 토대로, 정신질환자로서 아이를 갖는다는 것에 대한 뼈아픈 고민을 들려준다. 「병동에서」에서는 병에 따라 계급이 정해지는 정신병원 속 사회와 외부인은 알 수 없는 폐쇄병동의 민낯을 드러낸다. 「슬렌더맨, 아무것도 아닌 자, 그리고 나」에서는 두 소녀가 ‘슬랜더맨’이라는 괴담을 신봉하여 다른 친구 한 명을 칼로 찌른 사건을 파헤친다.

 


 

저자는 자신이 어렸을 적 경험한 비슷한 사례를 들려주면서 범죄의 원인을 단순히 정신질환으로 환원하려는 시각을 경계하면서도,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다층적인 시각에서 재구성하여 탐구한다. 「현실, 영화」에서는 〈루시〉 같은 공상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 정신증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현실에 어떤 파장이 일어나는지를 보여 준다. 「존 도, 정신증」에서는 SNS에서 한 남자의 수배 글을 본 뒤 과거 연인에게 강간당한 트라우마가 환각·사고장애·망상·긴장증·사회인지 결함의 형태로 나타나는 과정을 세심하게 그린다. 「지옥의 나날들」에서는 자신이 이미 죽었다고 믿는 코타르 증후군을 겪으며 죽음이라는 희망조차 가질 수 없었던 지옥 같은 나날들의 이야기를 회고한다. 「추락의 욕구」에서는 창밖으로 뛰어내려 삶을 마감한 사진가 프렌체스카 우드먼의 삶과 작품을 통해, 뛰어내리는 사람들과 그 행위의 의미에 대해 다룬다. 「치마요」에서는 조현병에서 한발 더 나아가 ‘만성 라임병’이라는, 주류 의학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진단을 통해 몸과 마음, 고통을 당사자의 입장에서 이해하고자 한다. 「경계 너머로」에서는 조현병을 어떤 유용한 능력에 접근하는 도구로 바라보면서 철학, 종교, 영성을 통해 새로운 통찰을 얻고자 한다.

저자는 지금도 조현병 환자로서 생활하고 있고 경미한 정신증은 이따금 경험하지만, 자신의 조현병이 아예 사라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털어놓는다. 비교적 최근에 발병한 다른 병들은 잘못된 시선으로 여겨지며 도대체 나란 사람이 얼마나 다양한 종류의 증상을 경험할 수 있는지 궁금하게 만드는 것과 달리, 조현병은 너무나 오랫동안 나의 일부였기에 내 삶에서 사라질 수 있을 것 같지 않다고 말한다. 사실 의학계에서도 뇌질환의 상당 부분은 아직도 치료약은커녕 진단도 제대로 된다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신의 영역'으로 불리고 있다.

 


 

책 출판사 측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경우 지난 10여 년간 꾸준히 상승세였던 정신질환 진료 환자 수가 코로나19를 거치며 더욱 큰 폭으로 늘어났다. 특히 취업 한파를 넘어 취업 빙하기가 도래했다는 말이 나올 만큼 20대 환자 수의 증가 폭이 가장 큰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정신질환은 우리 사회를 진단하는 척도가 되어 가면서 그 관심과 중요도가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실제로 방송에서 연예인들이 공황장애·우울증 등 정신질환을 겪은 경험을 토로하는 장면을 자주 목격할 수 있으며, 시청자는 그들의 병에 공감하고 연민의 시선을 건넨다. 하지만 같은 정신질환인데도 어떤 병을 앓고 있다고 하면 거리를 두고 외면하고 비난함으로써 그 병의 이름조차 거론하지 못하게 만든다. 바로 조현병이 처한 한국 사회의 현주소다.

조현병은 100명 중 1명꼴로 발생하는 비교적 흔한 질환이지만, 흉악 범죄의 원인이라는 편견 탓에 조현병 환자는 제때 치료를 받기가 어렵다. 대검찰청 자료에 따르면, 비정신장애인의 범죄율이 1.4%인 반면, 정신장애인의 범죄율은 0.1%에 불과하다. 조현병 환자의 범죄율만 따지면 0.1%보다 훨씬 낮은 셈인데, 일부 언론의 왜곡된 보도가 우리 기억에 얼마나 삐뚤게 각인되어 있는지 알 수 있다. 오히려 정신질환자들의 범죄 원인은 특정 병을 죄악시함으로써 의료적 개입을 차단해서 결국 당사자가 그 병에 잠식되도록 방치하는 사회 풍토에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당사자의 경험을 전해 들음으로써 간접 체험을 하는 것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고통과 감정의 세계를 언어화한다는 것은 일반인에게도 버거운 작업이며, 특히 파멸적인 질병인 조현병을 겪는 사람에게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저자는 '고기능 조현병 환자'로서, 동시에 뛰어난 '소설가'로서 이 드물고 어려운 일을 해냄으로써 의료계에 새로운 진단과 치료에 대한 영감을 불러일으킬지 모를 정도로 해박한 지식과 경험을 잘 표현할 정도로 맑고 집중력 있는 정신의 소유자로 독자에게는 이해된다. 저자가 이 번에 출간한 책은 조현병 당사자만이 알 수 있는 고통과 현실을 마치 소설 속 장면처럼 촘촘하고 생생하게 묘사하는 한편, 정신질환을 진단하는 기준점이라고 할 수 있는 DSM(미국정신의학회가 작성한 정신질환의 진단 기준) 등 정신의학 지식을 분석적이고 적확한 언어로 설명하고 그 쟁점을 고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저자 : 에즈메이 웨이준 왕(Esme Weijun Wang)

미국 중서부에서 2세대 대만계 미국인으로 태어났다. 예일대에 입학했으나 정신질환을 이유로 퇴학당했다. 이후 스탠퍼드대를 졸업하고 스탠퍼드대 뇌 영상 연구원으로 일했다. 미시간대에서 순수예술 석사학위를 받고 현재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소설을 쓰며 살고 있다. 2016년 NPR ‘최고의 책’으로 선정된 소설 『천국의 국경』을 썼다. 2017년 문학잡지 〈그랜타〉에서 선정한 ‘40세 미만 미국 최고의 젊은 소설가 21인’에 뽑혔고 2018년 화이팅 작가상을 수상했다. 2016년 그레이울프 프레스 논픽션상 수상작이자 첫 에세이인 이 책에서 그녀는 정신질환 중에서도 특히 치명적이라고 알려진 조현병에 관해 당사자만이 들려줄 수 있는 내밀한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전한다. 이 책은 〈타임〉, 〈NPR〉, 〈시카고 트리뷴〉 등 주요 매체 20여 곳에서 2019년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는 기염을 토했다.

 

역자 : 이유진

이화여대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에서 번역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대학 졸업 후 광고 기획자와 마케터로 일하며 상품과 고객 사이에서 소통한 경험이 있다. 지금은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며 저자와 독자 사이에서 즐거운 소통을 이어 가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우리의 인생이 겨울을 지날 때』, 『걸을 때마다 조금씩 내가 된다』, 『섹스하는 삶』, 『공격성, 인간의 재능』, 『엄마는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우리가 밤에 본 것들』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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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범 지음 / 북스고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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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패병가상사(勝敗兵家常事)"란 말이 있다. 싸움에서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는 것처럼 일에도 성공과 실패가 있다는 뜻으로 쓰인다. 『당서(唐書)』의 「배도전(裵度傳)」에 나오는 말이다. 당 황제가 싸움에 지고 온 배도에게 "한 번 이기고 한 번 지는 것은 병가에서 늘 있는 일이다(一勝一敗 兵家常事)"라고 한 말에서 유래되었다는 게 정설이다. 전쟁에 패하여 낙심하고 있는 임금이나 장군을 위로하기 위해 고전 역사서에 자주 인용되는 말이다. 또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도 자주 인용되는데 이 말은 역사학자들이 하는 말은 아니다. 고대 로마에서 전해지던 라틴속담이라고 한다. 그리고 "실패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운다"는 격언도 있다. 이는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가 "실패는 다음에 더 잘 할 수 있는 기회다"라고 한 데서 인용돼 쓰이고 있는 말이다. 이처럼 성공과 실패는 역사에 모두 기록된다. 그러나 승자의 역사가 정식 기록으로 남기 때문에 패자의 기록은 무시되기 일쑤다. 그러나 이 역시 귀중한 기록이며 이로 인해 똑같은 실수를 두 번 다시 하지 않는다는 선에서 귀중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이 책 『어쩌면 당신이 원했던 세계사를 흔든 패전사 이야기』는 한마디로 전쟁에서 진 패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전쟁·전투에 대한 해석이다.

저자 윤영범은 최초의 인류가 등장했던 250만 년 전부터 인류는 갈등의 역사를 써 내려왔다고 전제한다. 인류가 발전하고 진화하는 동안 다양한 이유로 끊임없이 싸워왔고, 싸움과 더불어 전술과 무기도 비약적으로 발전해 왔다. 어디선가는 하루 만에 수만 명의 목숨이 허무하게 사라지기도 했고 또 다른 어디선가는 영웅의 탄생을 축하했다. 이 책이 쓰여진 취지이다. 이 책은 역사 유튜브 채널 〈패전사의 세계사 속 승리 뒤에 감춰진 25가지 패전쟁 이야기〉를 담았다. 세계사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제 1·2차 세계대전 중 유럽에서의 전투와 태평양 전선의 패배한 전투 이야기를 유튜브 〈패전사〉만의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냈다.

 


 

또 이념과 사상의 갈등 한가운데 있는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 크고 작은 근현대 전쟁의 패배한 전투 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게 풀어냈다. 승자의 역사 뒤에 가려진 패배한 전쟁 이야기를 통해 역사의 흐름을 파악하고, 오답의 역사 속에서 우리만의 정답을 찾는 지혜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저자는 기대한다. ‘역사는 반복된다’라는 말이 있다. 역사 속 승리는 우리에게 가슴 벅찬 감동을 선사하지만, 단순하고 어이없는 이유로 실패했던 패배의 역사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모든 역사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한두 가지 이유만으로 전쟁의 승패가 결정되지 않는다. 치밀하게 준비한 전투에도 미처 예측하지 못했던 변수들이 존재하고, 그 속의 인물들이 한 선택과 운까지도 전투의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하며 그 누구보다 앞에 서서 자신을 희생하는 영웅들이 있는가 하면, 자신만의 생각에 갇혀 고집을 부리며 전투를 패배로 이끄는 무능력한 인물들도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패배한 전투의 순간들을 이 책은 담고 있다. 1부에서는 제1·2차 세계대전과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한 전투를, 2부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근현대 전쟁까지 패배한 전투 이야기를 담아 시간순으로 구성하였다. 전쟁마다 전투가 일어나게 된 배경과 전개 과정을 짚어 주고, 당시 시대적 상황뿐만 아니라 주요 인물들과 얽힌 뒷이야기까지 한 편의 영화처럼 흥미롭게 풀어냈다. 패배의 순간에서 거대한 역사로 넘어가는 생생한 장면들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세계사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는 유튜브 채널 ‘패전사’에서 소개했던 내용뿐만 아니라 아직 소개하지 않은 이야기도 함께 담았다. 누구라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쉽게 풀어냈다. 나라와 국민의 모든 것을 걸고 싸우는 전쟁은 패배하면 모든 것을 잃는다. 예전 같으면 죽음 아니면 노예로 전락한다. 그러나 요즘엔 나라가 없어져도 국민은 살아남아 다시 재기할 여지가 있다. 전쟁에서 결과적으로 패전했더라도 한 번쯤 더듬어 분석하고 교훈을 얻어낼 수 있는 것은 많다는 말이다.

 


 

저자는 「패배로 배우는 전쟁 세계사」란 제목의 프롤로그에서 "인류의 역사는 갈등과 전쟁의 역사라는 것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인류가 진화하는 과정에서 어디선가 누군가는 항상 싸우고 있었다"고 전제하며 "싸움과 더불어 무기와 전술도 같이 진화해왔다"고 언급한다. 저자는 전쟁이라는 폭력적이고 극단적인 수단을 혐오한다고 이야기하면서도 막상 전쟁이 시작되면 서로에게 한없이 무자비하고, 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역사는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한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늘 책에서나 역사에서나 승리한 전쟁을 주로 이야기하고 즐겨 배우지만, 패배한 전쟁에 대해서는 잘 돌아보지 않는다. 당연히 승자의 기록에서 자신과 자신들의 나라 운명에 더 긍정적인 요인들이 들어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대로 패전에서 새겨둘 교훈은 훨씬 더 많다는 게 패자의 논리가 아니다. 승자의 논리라는 점이 패전사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결정적 이유라고 독자는 생각한다.

저자 역시 패전의 이야기를 모아 사람들에게 알리기 시작한 것은 패배한 전쟁을 분석해서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고 털어놓는다. 인류 역사의 한 부분인 전쟁사는 분명 흥미로운 분야지만 이 책은 전쟁을 찬양하거나 동경하는 책은 아니다라는 점도 덧붙인다. 저자는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모습이 발현되기 마련이라고 생각한다. 이때 리더십괴 용기를 가지고 냉철한 상황 판단과 임기응변을 통해 위기를 돌파하거나,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인물들이 있다. 반면에 말도 안 되는 똥고집을 부리며 전투를 패배로 이끄는 무능력한 인물도 있다. 전쟁터와 다름없는 현대 사회에서도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존재한다. 역사 속 인물들의 성공과 실패에서 우리가 배울 점이 분명 있으리라고 저자는 생각한다. 저자의 이 책 발간 취지로 프롤로그에 쓴 말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전쟁 모두는 20세기의 전쟁들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전쟁인 1·2차 세계대전 및 가장 진화한 무기, 가장 잔인한 무기 등이 모두 20세기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물론 인명 피해로만 본다면 더 많은 인명을 앗아간 전쟁의 20세기 이전에도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가장 참혹하고 잔인한 전쟁의 참상을 정확하게 표현해 내려면 20세기에 일어난 전쟁일 것이다. 책의 가장 첫 머리에 등장하는 전쟁은 「갈리폴리 전투」이다. 책에 따르면 제1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이 독일과 동맹을 맺고 있던 오스만 제국을 통과하여 러시아와 연락을 취하려고 갈리폴리(겔리볼루) 반도 상륙을 감행한 전투를 말한다.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영국과 오스만 제국이 교전국이 되자, 영국은 지중해의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해서 갈리폴리의 제압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15년 2월 19일과 25일, 3월 25일에 걸쳐 영국·프랑스의 연합함대가 다르다넬스 해협의 오스만 연안의 방비시설을 포격하였으나, 포대로부터의 맹렬한 반격과 기뢰 등으로 3척의 전함이 격침되고, 3척은 대파되었다. 연합군은 영국의 로드 해밀턴 장군 지휘하에 4월 25일 갈리폴리 주변의 각지에 상륙하였으나, 독일의 L.산다스 장군이 지휘하는 오스만군의 선전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 전투로 연합군 전사상자가 무려 25만 2,000명에 이르렀으며, 오스만군 사상자도 25만 1,000명이나 되었다. 이 작전의 실패 이후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상륙작전은 상륙군에 불리하고, 극히 어렵다는 정설이 생겼다고 한다.

저자는 이 전투를 저자는 영국의 무모한 계획과 연합 해군의 '삽질'로 다르다넬스 해전의 실패 원인으로 꼽았다. 오스만군은 영국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치밀하게 방어준비를 해 두었고 전투 의지 또한 강했다. 이후 영국은 절치부심하여 해군 단독 작전이 아닌 육군과 연계한 대규모 상륙작전 계획을 다시 세웠다. 상륙 병력은 영국 본토에서 파견된 육군 보병사단과 영국 해병대, 프랑스군 등이 동원되었다. 특히 영연방의 일원으로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파견된 ANZA군 등 8만여 명의 육군 병력이 상륙 작전에 동원되었다. 한편 오스만 제국에서는 갈리폴리 전투를 이끈 영웅이 탄생했다. 당시 오스만군 지휘관은 촉망받던 장교 무스타파 케말 대령이었다. 그는 전쟁 후 오스만 제국을 무너뜨리고 지금의 튀르키예 공화국을 세워 국부가 되는 인물이다.

 


 

이어 소개된 전투는 독자에게는 이름이 다소 생소하다. 「솜 전투」로서 저자는 전투 제목 밑에 부제로 '지옥문이 열리다'로 달아 놓았다. 솜 전투는 1916년 7월부터 11월까지 프랑스의 솜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로, 약 100만 명이라는 어마어마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전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전투이자, 1차 세계대전 중에서도 최악의 전투로 불린다. 전투가 시작된 7월 1일 단 하루에만 5만 8,000여 명의 영국군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그중 1만 9,000여명이 전사하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이 숫자가 어느 정도인가 하면 10년 간 이어진 베트남 전쟁에서 5만 8,000여 명의 전사자가 나왔는데, 솜 전투에서는 그중 3분의 1에 달하는 인원이 하루 만에 전사한 것이다. 하루 만에 이 정도 사상자가 나온 전투는 기원전 216년에 카르타고 명장 한니발의 작전에 말려들어 로마군이 전사했던 칸나이 전투 말고는 솜 전투가 유일하다고 저자는 기록한다.

책에 따르면 1차 세계대전은 독가스, 전차, 기관총 등을 사용하며 총력전, 참호전의 양상을 보이는 최초의 '세계대전'이다. 팽창할 대로 팽창한 유럽 제국주의 열강들의 갈등으로 1914년부터 1918년까지 벌어졌다. 사망자만 1,000만 명이 넘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접한 대규모 살육전이었다. 이 시기에는 산업혁명 이후 기술 혁신으로 대량 인명 살상이 가능한 각종 신무기가 등장했고, 주요 참전국인 독일, 영국, 프랑스, 러시아조차도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인명 피해 수치를 기록했다.

이후 네 달간 더 이어진 솜 전투로 그들은 혹독한 피의 대가를 치렀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 약 42만 명, 프랑스군 약 20만 명, 독일군 약 50만 명으로 총 100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나왔다. 연합군은 전략적 가치도 별로 없는 개흙밭을 겨우 10km 정도 전진했고 고작 이 반경 10km 안에서 100만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들은 참호 안에 숨어 있는 적들을 효과적으로 죽이기 위해 독가스와 화염방사기 같은 끔찍한 무기 사용도 서슴지 않았다. 또한 착검한 채 돌격하여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육박전을 벌이며 매일 서로를 죽였다.

 


 

2차 세계대전과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등 굵직하고 우리와 직간접으로 엮인 전쟁을 모두 이 책은 담고 있다. 그러나 많은 독자들이 잘 알고 있는 내용이라고 본다. 독자로서는 무릇 세계 최강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지구 방위군'이라는 별칭인 미국의 특수부대에 관한 이야기 하나가 눈길이 갔다. 네이비 실(Navy SEAL)은 미국의 대표적인 특수부대이자. 수많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가끔은 과장되기도 하지만 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완벽하게 임무를 완수하는 최고의 특수부대로 묘사된다. 물론 네이비 실이 현재 세계 최고의 특수부대인 것은 맞다고 저자도 밝힌다. 'SEAL'이란 부대명 자체가 '특수전'을 수행하는 부대란 의미다. 육·해·공(Land, Sea, Air)을 모두 아우른다는 의미다. 천문학적인 비용과 시간을 들여 탄생한 미국의 특수부대원은 개개인이 인간병기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최고 수준의 장비와 지원을 받으며 각종 비밀스러운 임무들을 수행하는데 그만큼 위험에 자주 노출되기도 한다.

이들 최강 부대도 실패한 작전이 있다고 저자는 책에 쓰고 있다. 이에 따르면 2003년 이라크에서 다시 전쟁이 발발하면서 아프가니스탄을 향한 관심은 줄어들고 있었다. 아프가니스탄 미군 병력은 감소하고 있었으며, 이때다 싶었던 탈레반은 다시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골칫거리는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접경 지역의 탈레반이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에 배치되었던 미 해군의실 10팀은 오사마 빈 라덴의 측근인 아흐마드 샤라는 고가치 표적의 제거 임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CIA가 아흐마드 샤의 위치를 알아내자 본격적으로 실 팀의 작전이 시작된다. 적진 후방에 소규모로 파견된 특수부대 정찰팀의 통신 장애가 온다. 험악한 산악 지형 탓이다.

그러다 나무를 베기 위해 산에 올라온 성인 남성 2명과 어린이 1명에게 정찰팀의 은신처가 발각된다. 정찰팀은 미군 교전수칙에 따르면 이들을 풀어줘야 하고, 풀어줄 경우 정찰팀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게 뻔했다. 결국 정찰팀의 투표로써 이들은 풀려난다. 정찰팀이 걱정했던 사실이 곧바로 현실이 되고 만다. 총격전이 시작되고 대부분의 대원들이 사살 위험에 처했다. 산악 위로 쫒겨 올라가 천신만고 끝에 구조 요청을 보내는 데 성공한다 3명의 대원이 전사했고 오직 러트렐 중사만 심한 부상을 당한 채로 이동해 위기를 벗어났지만 벼랑에서 떨어져 기절한다.

 


 

이 작전의 비극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동료들이 적에게 포위됐다는 소식을 들은 이들은 구출 작전을 위해 16명의 실 팀 대원들이 제 160 특수작전항공연대 소속 MH-47 특수전 치누크 헬기 2대에 분승해 구조를 간다. 지원병력을 태운 블랙호크 헬기 4대, 호위용 아파치 헬기 2대도 따랐다. 그러나 호위 헬기들은 속도와 고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크리스텐스 소령은 급한 마음에 호위기들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구조지역으로 진입키로 결정한다. 하지만 영악하게도 탈레반은 미군이 동료들을 구출하러 올 것을 예상하고 산 중턱과 언덕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치누크 헬기에 대공 사격을 가한다. 이때 탈레반이 쏜 RPG 로켓 1발이 접근하던 치누크 헬기 1대의 후방 로터에 명중했고, 비틀거리던 치누크는 벼랑 끝에 불시착했다. 그러나 갑자기 기울어지며 그대로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지면서 폭발하고 말았다. 호위기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결국 기체가 그대로 폭발하면서 탑승했던 16명의 특수부대원 전원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벌어진다. 미군 특수부대 역사상 최악의 참극이 발생한 것이다.

 

"한편 중상을 입은 러트렐은 자포자기한 상태였지만 그에게는 다른 동료들과 다르게 행운이 따라 주었다. 절벽 아래로 떨어져 기절한 러트렐을 발견한 사람은 모하메드 굴랍이라는 아프가니스탄인이었다. 그는 러트렐을 안심시키고 자신의 마을로 데려가 치료해 주고 보살펴 주었다. 굴랍은 '내 집에 들어온 손님은 끝까지 지킨다.'라는 파슈툰왈리 부족의 오랜 전통에 따라 마을에 드어온 러트렐을 탈레반으로부터 보호해 준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러트렐과 정찰팀은 민간인에게 발견되는 바람에 이 지경이 되었지만, 러트렐은 또 다른 민간인 덕분에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중략) 이 작전 내용을 바탕으로 영화 〈론 서바이버〉가 제작되었다."(p.234)

 

저자 : 윤영범

 

대학에서 디자인을 공부했지만 그는 어릴 적 꿈이었던 영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공부를 시작해 방송 PD에 입문했다. 원래부터 밀리터리, 영화광이어서 액션과 전쟁 영화를 좋아하는 그는 전쟁 영화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역사에도 관심을 가졌다. 영상을 만드는 직업적인 특성에 개인적인 관심사를 결합하여, 승리의 역사 뒤에 감춰진 패전사 이야기를 소개하는 유튜브 채널 ‘패전사’를 운영하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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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기쁨 - 흐릿한 어둠 속에서 인생의 빛을 발견하는 태도에 관하여
프랭크 브루니 지음, 홍정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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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법은 없습니다." 의사로부터 이런 말을 듣는다면 어떤 병이든지 마치 사형선고를 재판장으로부터 받는 것처럼 절망적이지 않을까? 이 책 『상실의 기쁨』의 저자 프랭크 브루니는 〈뉴욕타임스〉에서 20년 이상 간판 칼럼니스트로 명성을 쌓았고 백악관 담당 기자, 이탈리아 로마 지국장을 역임하고 음식 평론가로도 활동하며 주목받는 글을 써왔다. 왕성한 저널리스트로서의 생활이 마감되는 선고를 의사로부터 들었다. 이 선고 뒤 "흔히 죽음은 밤손님처럼 찾아온다고들 한다. 죽음보다 덜한 도둑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라고 소회를 털어놓는다. 자신의 시력을 앗아간 불행도 잠이 든 사이에 그렇게 다녀갔다고 한다. 이럴 때 우리들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고 표현하며 예기치 못한 불행을 비유한다. 프랭크 브루니는 여전히 왕성하게 일하던 쉰두 살의 어느 날, 느닷없이 닥쳐온 뇌졸중으로 시신경에 혈액 공급이 끊겨 점점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어가게 된다. 의사는 왼쪽 시력마저 위험할 수 있다고 경고하는데, 이런 와중에 오랜 연인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졌다는 이유로 이별하고, 아버지는 알츠하이머병에 걸리게 된다. 거듭되는 불행들을 계기로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신했지만 그동안 놓쳤던 것이 무엇인지 흐린 오른쪽 눈을 가지고 찾아보는 기회를 비로소 갖게 됐다고 한다.

“차라리 그냥 머리에 총을 쏘세요.” 브루니는 진심이었다. 시력 상실이 주는 혼란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치료약 개발을 위한 임상 시험으로 다달이 오른쪽 눈에 주사를 꽂아 위약을 투여하고, 잊을 만할 때마다 해야 하는 세 시간 동안의 고통스러운 시력 검사를 감내하면서 지쳐가고 있었다. 그러다 이윽고 일주일에 두 번씩, 여섯 달 동안 허벅지와 배에 스스로 주사를 놓아야 하는 순서가 오자 항복하고 싶어졌다. 어쩌면 죽는 게 나아 보였다. 하지만 결국 주사기를 들었다. 기꺼이 바늘꽂이가 되었다.

 


 

사흘 뒤 나는 왼쪽 허벅지에 주사를 놓았고 그로부터 나흘 뒤에는 배의 오른쪽에 놓았다. 이때는 조금 더 따끔했다. 그다음에는 다시 양쪽 허벅지에 번갈아 놓았다. 2주 만에 45분이 5분으로 줄었다. 그로부터 몇 주 지나 다시 2분으로, 심지어 1분으로 단축되었다. 나는 거의 자동 운전 모드로 순식간에 일을 마쳤다. 치실을 쓸 때처럼 꼼꼼했지만 단시간 내에 끝냈다. […] 이상하게도 나는 주사 놓는 시간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 시간들은 내가 정복한 두려움이었다. 그 시간들은 삶에 독특한 리듬을, 특별한 투지를 부여했다. 내 친구들은 소울 사이클 수업을 마스터했다. 나는 주사기를 마스터했다.(p.132)

시시각각 조여오는 목숨, 긴박한 시간은 무심한 듯 흐르지만 조금이라도 좋아질 기미는 없고... 저자는 치료 과정의 고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글로 옮겼다. 저자는 어떤 경험을 뒤로 미루는 것은 종종 그것을 결코 경험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시간에 관해 늘 응석을 부리고 어리석으며 교만하기 때문이란다. ‘나중에’, ‘다음에’, ‘시간이 나면’이라는 말로 마주할 수 있는 기쁨과 기회, 혹은 겪어야 할 절망의 순간조차 늦추곤 하지만 늘 그렇듯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기자로서 오랫동안 쌓아온 탄탄한 커리어, 어떠한 주제로도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10년 된 남자친구, 주말마다 디너 파티에 참석할 만큼 충분한 인맥들까지. 프랭크 브루니 역시 지금 누리는 부러울 것 없는 일상과 여유가 이렇게 갑자기 끝나리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자신의 불행을 대비할 수 있는 지혜가 있다면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할 리도 없다. 사전에 예감하고 대비한다면 최소한 급작스러운 불행은 얼마든지 예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막을 수는 없을지라도 대비하는 시간을 가진다면 충격이나 고통을 훨씬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독자도 든다.

 


 

저자는 직업적으로 성공한 사람이었다. 비록 어떤 원대한 야망들은 실현되지 않았고, 주위 친구들처럼 미친 듯이 돈을 많이 벌어서 집을 두 채씩 갖고 있거나 신형 자동차를 몇 대씩 사들일 형편은 아니었지만 내 삶에 만족했다고 지난 삶을 털어놓는다. 30여 년간 언론계에 종사했고 그중 20여 년 이상을 〈뉴욕타임스〉에서 일하면서 세상의 많은 것을 보았고 사치스러운 모험들도 감행했다. 칼럼을 쓰고 텔레비전에 정기적으로 출연하며 이따금 부업으로 강연도 했다. 동네 식료품점에 갈 때면 사람들이 알아보고는 듣기 좋은 말을 했다. 그럴 때마다 저자는 언제나 입고 있는 헐렁한 티셔츠에 그보다 더 헐렁한 운동복 바지나 늘상 매달고 다니는 약 8킬로그램에 달하는 여분의 살이 몹시 의식되기도 했다. 하지만 대개는 이러한 만남이 자랑스러웠다. 성공적인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이 흔히 그렇듯이 말이다.

그러나 치료를 받으면서 자신의 병세가 조금도 나아지기는커녕 점차 악화되어가자 저자는 기꺼이 교훈이 되기로 했다고 말한다.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밝혀가면서 이 책을 집필한 이유는 어느 누구도 상실과 고통 그리고 괴로움 없이, 상처받지 않은 채 인생을 살아낼 수는 없다는 본질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저자는 이렇게 공평하고도 존엄한 삶의 이치에 경의를 표하며, 자신의 불행만 조명하는 대신 느닷없는 고통들을 겪으면서도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함께 소개한다. “슬픔과 공포에 굴복할 것인가, 아니면 의식적이고 구체적인 걸음을 내디딜 것인가.” 〈워싱턴포스트〉는 이러한 질문을 던지면서 “이 책은 인간에게는 평생 동안 끊임없이 변화의 역량이 있음을 상기시킨다”라고 강조했다. 저자는 “우아함을 잃지 않고 우리를 빛과 어둠 사이의 순례길로 안내하며(〈오프라데일리〉)” 예기치 않은 삶의 시련과 고통, 하루하루 덮쳐오는 노화,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죽음을 유머를 잃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위한 사색을 펼친다.

 

 

이 책의 표제어는 자체가 모순이다. '상실'(잃어버림)의 '기쁨'이란 조화되지 않는 의미의 단어들이다. 자신의 것을 잃어버린 뒤에 기쁨이 온다면 당초 갖거나 소유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저자는 '시각'을 잃어버린 뒤에 '기쁨'을 찾았다고 책의 제목을 이렇게 붙였으리라 생각하니 큰 깨달음이 있으리란 독자로서의 기대감은 있다. 물론 남의 슬픔이나 좌절이 독자들의 기쁨이나 기대감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것을 어떻게든 벗어나지 못했더라도 더 이상 상실한 것에 대한 미련도 버리고, 기대도 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기쁨도 기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저자는 치료를 통해 깨닫음에 대해 이렇게 쓴다. "나의 슬픔을 드러내면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불행을 열어 보여주었다. 내가 마음을 열면 세상도 내게 열린다. 저자는 지금까지 자신의 삶이 얼마나 풍요로운지 새삼 깨달았고 마침내 멈춰 서서 돌아볼 줄 알게 됐다. 비로소 삶을 재정비하는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불행을 계기로 저자는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다고 믿는다. 과거에 하지 않았던 질문을 하고, 완전히 새로운 정서적 해협을 항해하고, 친구들과 지인들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고, 낯선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당대의 주목받는 정치인이나 연예인과 매일 만나다시피 하고 그들을 기사화하며 살아왔던 저자는 이제는 장애나 질병을 겪고 있거나 황혼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게 된다. 마치 늘 가던 길만 다녀 15년이 지나도 그 아름다움을 알지 못했던 센트럴 파크처럼 언제나 주위에 있었지만 제대로 살펴보지 않았던 이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인생의 지혜를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저자의 깨달음은 한참 잘 나갈 때 없었던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다. 소외된 사람들, 불행을 겪고 있는 사람들, 선천적 또는 후천적 장애인들... 우리 주위에 언제나 있고 앞으로도 있을 사람들이다. 그들이 육체의 눈으로 보이지 않던 그들이 시력을 잃은 후에 보인 것이다. 저자는 그들과 함께하겠다는 결심이 섰고,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상실의 기쁨'이 될 수 있다.

 


 

저자의 깨달음으로 불행한 사람, 소외된 사람들만 보인 것이 아니다. 평소에 아무 감흥도 없이 그저 지나가는 풍경쯤으로 보였던 주위의 모든 자연물과 인공물도 천천히 바라보면 모두 눈물 나도록 고마운 것들이었다. 자신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그것들은 그 자리에 항상 있으면서 저자에게 많은 것을 베풀었단 사실도 뒤늦게 깨닫게 된 것들이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센트럴 파크의 경이로움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도 누누이 열거해온 것이니까. 말하고 싶은 것은 이렇듯 빛나는 것이 아주 가까이에 있었지만 나는 다른 데 열중해 있거나 정신이 팔려서 또는 심지어 게을러서,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센트럴 파크는 그 완벽한 상징이었다. 많은 사람이 공공장소로서 모두에게 공짜인 센트럴 파크의 진가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특별한 것이 되기에는 너무나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센트럴 파크는 귀중한 것이 되기에는 너무나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래서 센트럴 파크는 다음에 즐겨도 상관없는 것이었다. 다음 날, 또는 다음 주, 아니면 다음 달에."(p.280)

저자는 이 책에서 자신보다 일찍 청각장애인이자 시각장애인으로서 10년 이상 라인댄스 수업을 맡으며 “어둠에 굴복하는 대신 춤을 추기”를 선택한 70대의 매리언, 시각장애인으로 컬럼비아주 연방 순회 항소 법원의 판사를 25년 이상 맡아온 일흔다섯의 테이틀처럼 각자의 ‘상실’을 딛고 ‘가시덤불’을 껴안고 기쁨이 이끄는 대로, 행운에 집중해서 살아온 이들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후안 호세가 10대 후반에 ‘마흔에 시각장애인이 된다’라는 말을 들었고, 현재 유엔에서 멕시코 상임 대표를 맡아 직업 외교관으로 일하고 있다는 말도 책에 썼다. 이처럼 "눈에 해변의 모래가 몽땅 들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며 오랫동안 그를 괴롭혀온 시력 상실에 대한 ‘공포’는 결과적으로 무엇도 극복할 수 있는 ‘의지’가 되었다.

 


 

뇌졸중 이후 저자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곱씹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 어머니에게 배운 대로 행동했다. 수차례 발을 헛디뎠고 적잖이 넘어졌지만 어떻게든 눈이 나아지기 위해 노력했다. 매번 어머니가 골랐을 만한 길을 택했다. 수차례의 항암치료로 머리카락이 빠지자 재미 삼아 가발을 수집하고 끝까지 가족들을 위한 식사를 직접 차려내길 고집했던 저자의 어머니는 점점 수척해졌다. 결국은 음식 포장해오는 것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고 좋아하는 TV 드라마를 끝까지 보지 못한 채 잠들기가 일쑤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엄청난 의지력과 행운으로 첫 손녀가 태어나는 것을 볼 정도로 사셨다. 그러자 어머니는 두 번째 손주가 태어나는 것도 봐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 결심을 이뤘다. 어머니는 손자가 태어나고 일주일 뒤에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손자의 이마에 입 맞출 수 있을 만큼 오래 살았다. 달달 떨리는 연약한 두 팔로 아기를 안을 수 있을 만큼 오래. 이런 어머니에게서 적잖은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추측해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저자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자주 던진다고 했다. 우리가 인생의 고비에 지지 않고, 버티고, 이겨내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다정하고 위트 있는 문체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저자는 끊임없이 이러한 질문들을 던졌다고 말한다. 즐거웠던 순간들은 돌아보면 너무나도 짧고, 그때는 이것이 얼마나 소중한 시기인지 결코 알지 못한다. 커리어를 잇는 일도, 부를 쌓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에는 차오르는 희열과 감동을 느꼈던 ‘즐거운 기억’만이 우리를 지탱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한 경험을 쌓는 것조차 개인에게 과도한 부담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만약 타인의 어깨에 진 짐을, 그들이 억누르는 두려움을, 그들이 감추는 흉터를 잠깐만이라도 알아봐준다면 우리는 각자가 경험하는 불운과 모욕감에 덜 사로잡힐 것이라 저자는 확신한다. 이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스스로의 세계를 확장시키고 동시에 자기 자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견고한 힘이 된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이뿐만 아니다. 저자에게 아버지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의 온도를 결정적으로 몇 도 낮춰주는 존재”였다. 그는 모기지나 세금 같은 복잡한 문제에 섬세한 조언을 해주는 역할부터 삶의 이정표마다 축하를 잊지 않는 역할까지 해내는, 경외의 대상이자 바위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저자의 시력이 나빠질 즈음 여든을 넘긴 아버지는 노인성 치매를 진단받았다. 아버지는 더는 ‘나의 바위’가 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닥친 일을 이해할 수조차 없었다. 이후 코로나로 봉쇄가 시작되고 여든넷의 아버지는 집에 머물러야 했다. 아버지의 기분 전환을 위해 저자는 아버지의 차를 몰고 과거로 여행을 떠났다. 아버지가 자랐던 집, 부모님이 처음 살았던 집, 규모를 키워 이사한 다음 집을 순례했다.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어머니가 10대 때 살던 집에 가보고 싶어 하셨다. 고등학교 때 어머니를 데리러 가고 데려다주었던 곳이었다. 저자는 아버지가 그 집을 보며 어머니와 함께한 순간을 재현하는 장면을 보았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이 모든 순간을 저자는 글로 그려냈다. 그것은 일생 가장 중요한 느낌이었다.

시력 상실을 계기로 새로운 모험을 갈망했던 저자는 듀크대학교 교수직을 제안받으면서 15년 동안 살던 맨해튼의 아파트를 정리하고 한적하고 오래된 나무들이 많은 채플힐로 이사했다. 등이 굽은 채 휠체어를 탄 노인들의 모습을 여러 번 바라보며 처음에는 슬픔을 느꼈지만 점점 이전에는 알 수 없었던 어떠한 평화를 느꼈다. 왠지 지금이 더욱 살아 있고, 삶에 더 조응하고 있고, 삶을 잘 음미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그렇게 마치 시력을 잃지 않은 사람처럼 낙관적인 태도를 고수하던 저자는 책의 마지막 챕터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상황이 생각보다 점점 나빠지고 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삶의 요구와 기쁨으로부터 물러나기를 거부하고”, “수없이 많은 닫힌 문을 밀어젖히고 통과”하고 있는 저자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 우리 자신은 조금도 통제력이 없으면서도 막대한 통제력이 있다”는 삶의 역설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고 밝힌다. 마침내 걸음걸이가 느려졌을 때, 시간이 다 되었을 때, 지난 세월을 돌아봤을 때 정말로 원했지만 아직 하지 못한 일은 없다고 생각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모든 사람이 죽음에 임박해서야 느끼는 감정을 저자에게는 미리 보였다. '상실의 기쁨'이다.

 


 

아버지와 함께 지내는 동안 나는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스무 해 넘는 세월 동안 아버지의 약해진 정신이 아버지에게 비범한 친절을 베푼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별다른 기복 없이 평범하고 좋았던 결혼 생활을 평생의 로맨스 가운데 가장 위대한 로맨스로 받아들였다. 아버지는 이 동화 같은 이야기의 모든 장과 중요한 장면을 원하면 언제든 다시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슬픔에 대한 답이었다. 나는 우리가 차에 앉아 있던 그 시간에 아버지가 그 장면 중 하나를 재생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가 인생의 말년에 나를 충분히 편안하게 여기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을 충분히 편안하게 여기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가 느끼는 감정이 비애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감사였다.(p.298)

 

저자 : 프랭크 브루니(Frank Bruni)

30년 이상 저널리스트로 명성을 쌓아온 프랭크 브루니는 25년 동안 《뉴욕타임스》 간판 칼럼니스트로 일하며 백악관 담당 기자, 이탈리아 로마 지국장을 역임하고, 음식 평론가로도 활동했다. 그동안 아동 학대와 미국 대선, 국제 정세부터 미트로프를 묶을 때 기왕이면 토르티야 칩을 쓰면 좋은 이유에 관해서까지 다정하고 위트 있는 시선으로 여러 분야를 종횡무진하며 주목받는 글들을 써왔다.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신했던 저자는 쉰두 살이 되던 어느 날, 느닷없이 뇌졸중으로 인해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어간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오랫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간과해왔던 소중한 것들을 돌아보는 기회를 갖게 된다. 나아가 자신이 마주한 신체적, 정서적, 사회적 현실을 깊게 성찰하는 동시에 아버지의 알츠하이머병, 친구의 파킨슨병, 오랜 연인과의 이별 등을 통해 앞으로의 인생을 위한 지혜와 품위를 배운다. 저자는 시력 상실을 겪은 지 4년 뒤인 2021년에 듀크대학교의 교수직을 수락하며 15년 동안의 맨해튼 생활을 정리하고 한적하고 조용한 채플힐로 사는 곳을 옮겼다. 현재 공공 정책과 언론 미디어에 대한 강의를 맡고 있으며, 《뉴욕타임스》 오피니언 기고가로서 주간 뉴스레터와 에세이를 싣고 있다. 아울러 반려견 리건과 매일 산책하면서 일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기쁨과 경이를 충만히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역자 : 홍정인

연세대학교 심리학과와 이화여자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 한영번역학과를 졸업하고 번역가로 활동중이다. 공역서로 『제인 구달 평전』과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가 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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