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 치유할 수 없는 질병
슬라보예 지젝 지음, 노윤기 옮김 / 현암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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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사랑'과 '자유'는 다소 이질적 느낌을 주는 말이지만 인류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 이유가 되기도 한다. '사랑'은 생존과 번영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다.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한 이후 '사랑'이 없었다면 지금까지의 번영은 물론 생존마저 가능했을지 의심해야 할 정도로 인류에게 없어서는 안 될 감정, 또는 '그 무엇'으로 존재해 왔다. 이에 비해 '자유'는 인류 모두에게 주어지는 신(神)의 선물이지 실제 모든 인간이 '자유'를 가진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이처럼 인류에게 고귀한 가치이자 존재의 이유로도 설명되지만 명확한 의미를 설명한 명제는 아직 확립하지 못한 것 같다. 유사 이래 인류는 '사랑'에 대해 수많은 기록을 남겼다. 문자가 발명된 이후 기록된 것만 따져도 학문적으로 정의를 내리지도, 예술적으로 표현하기도 어렵다는 사실만 남겼을 뿐 실체에 접근하지 못한 채 결국 종교의 몫으로 넘어간 것으로 독자는 이해하고 있다. 예수 탄생 이후 '사랑'은 인류 문명의 핵심 키워드의 자리잡았다. 서양 문명의 근원이고 시발점이라는 그리스(아테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수많은 학자들이 사랑의 정의 대신 '종류'로 분류해 남겼다. 서양 문명뿐 아니다. 동양에서도 중국, 인도 문명은 사랑에 대한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렸지만 완전한 '사랑'에 대한 이해로는 판단되지 않는다. 

자유 역시 주로 정치적 의미로 많이 사용돼 왔지만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일은 근대 이후부터이다. 이 책 표제어는 단 한 단어, 바로 『FREEDOM(자유)』이다. 대체 자유란 무엇일까.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철학자'란 별칭을 얻은 동유럽의 세계적 석학 슬라보예 지젝은 이 책에서 말하는 자유는 뭘까? 우선 자유를 수식하는 어떤 낱말이 붙는지에 따라 자유의 의미는 전혀 달라진다. 누군가는 인간의 자유, 사랑의 자유를 위해 평생을 바치기도 하지만 또 다른 편에 있는 이들은 권력의 자유, 자본의 자유를 외치며 사람들을 억압하고 선동한다. 그만큼 자유는 매혹적이고 숭고하면서도 때로는 위험한 개념이라고 이해되는 단어이기도 하다. 저자 지젝은 이 책에서 프로이트와 구조 심리학, 근현대 철학을 망라한 이론으로 신(神)과 자유의지와 욕망의 문제를 분석하여 자유의 가치와 개념을 이야기한다. 이를 통해 개인의 자각과 시민 공동체의 연대를 강력히 촉구한다.

최근 대한민국은 정치적 이유로 '자유'라는 단어가 부쩍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정치 권력에서 자유는 그닥 반갑지 않은 단어일까? 지첵의 이 책이 한국에서 출간을 준비하는 동안 ‘자유’라는 단어는 한국 언론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키워드이었다. 얼마 전 체포된 윤석열 대통령의 연설과 언론을 분석한 기사를 보면 그가 가장 많이 쓴 단어가 '자유'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였다고 한다. 지난 12월 3일 느닷없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이적 집단을 처단하기 위해서였다고 밝혔다. 계엄령일지라도국회나 선관위 등의 헌법기관의 침탈을 해서는 안 된다는 헌법과 관련 법률에 명시돼 있는데도 계엄을 선포하고 국회 의결을 방해하려 했고, 부정선거를 방관한 선관위에 증거 수집차 계엄군을 보내 위협하고 목적 달성을 위해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 

지금은 그날 즉각 계엄해제를 의결한 국회에서의 계엄군을 투입하고도 목적 달성에 실패해 오히려 국회로부터 탄핵소추를 당했다. 이를 두고 헌법재판소에서 일정 기간 탄핵심판을 위한 재판을 속행해 이번 달 최종 선고를 앞두고 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그는 계엄령 선포 이유와 대한민국의 정체성인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있어서 계엄을 선포했다고 변론하고 있다. 잠시 잠잠했던 보수와 진보의 극단의 진영 싸움으로 번지고 있는 형국이다. 그렇다면 윤석열 대통령이 생각하는 자유란 무엇일까? 국민으로서 섣불리 판단하기 어려운 고도의 정치 행위란 주장에는 나름의 논리로 변호인단을 통해 정당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들은 계엄 선포 당일도 그렇지만 지금까지 계엄의 필요성에는 크게 공감하지 않는 모습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인류는 언제나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의 참상 속에서 가장 큰 자유를 실행해 왔다."는 전제들 두고 있다. 상식과 제도와 자유(리버티)가 무너진 사회에서 우리는 자유의 최저치(프리덤)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총을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중이 각성하여 투표장에 들어서는 때는 이미 민주주의가 허물어진 뒤고, 그제야 우리는 투표를 통해 유의미한 자유를 실현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무언가를 하지 않을 수 없을 때 정말로 자율적이다. 혹은, 이미 결정된 사실을 알면서도 무엇을 할지 결정해야 하는 공포스러운 상황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자유는 운명과 일치한다고 저자 지젝은 말한다.

독자는 『아노크라시』의 제목으로 쓰인 책을 얼마 전에 읽은 적이 있다. 낯선 단어이다. 이 표제어는 민주주의 체제의 나라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아노크라시(Anocracy)'는 독자들이 쉽게 접하지 못한 단어라는 점을 인지해서인지 책 본문을 시작하기도 전 가장 앞자리에 단어의 뜻을 새겨넣었다. "아노크라시는 민주주의(데모크라시, Democracy)와 독재(아토크라시, Atutocracy)가 혼합된 상태"를 말한다고 적었다. 인터넷을 통해 이 단어의 쓰임새를 찾아냈다. 2021년 12월 22일자 서울신문 칼럼이다. "옛 소련의 몰락을 학술적으로 예측해낸 것으로 유명한 노르웨이 정치학자 요한 갈퉁은 2016년 12월 언론 인터뷰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선출이 미국의 쇠퇴를 가속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 후 5년이 지난 요즘 미국의 후퇴를 확인시켜주는 사례들이 속출하고 있다. 지난 11월 스웨덴 싱크탱크 IDEA는 미국을 ‘퇴보한 민주주의국가’ 목록에 올렸고 바버라 월터 미국 UC샌디에이고 정치학과 교수는 내년 초 출간하는 책 ‘어떻게 내전이 시작하나’에서 미국 민주주의가 ‘아노크라시(anocracy)’ 수준으로 후퇴했다고 진단했다." 

이 칼럼에서도 아노크라시는 민주주의(democracy)와 독재(autocracy)의 중간쯤으로 러시아·우크라이나·우간다·캄보디아 등이 이에 해당된다고 적시했다. 1946년 유태계 독일 철학자 마르틴 부버가 쓴 ‘유토피아의 협로’를 영문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아노크라시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했다고 한다. 우리말로는 부분적 민주주의, 혼합제, 중간 상태 등으로 번역된다. 시리아·레바논 등 내전국을 연구해온 월터 교수는 아노크라시로 접어든 미국에 내전 발발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도 트럼프 이후의 미국이 ‘초기 충돌’ 단계를 지나 위험 상황으로 진입했다고 분석했다."고 용어 풀이를 덧붙였다. 놀랍게도 오늘날 대한민국의 상황과 재선의 트럼프 행정부를 예견하는 글이 이 칼럼에 올라 있다. 

모든 인간에게 자유가 실현될 때는 근대 이후라고 말했지만 사실 자유란 개념은 인류가 학문을 가질 때부터 존재해 온 개념이기도 하다. 로마제국 시대에도 자유는 있었고, 춘추전국시대에서도 자유는 존재했다. 다만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을 뿐이다.

민주주의(Democracy)는 고대 그리스 어의 민중을 뜻하는 '데모스(demos)'와 지배 또는 권력을 뜻하는 '크라토스(kratos)'의 합성어로서, 민주주의란 곧 '민중에 의한 지배'를 말한다. 즉,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을 위하여 정치를 행하는 제도 또는 그러한 정치를 지향하는 사상을 말한다고 고등학교 다닐 때 배웠다. 이를 토대로 '카키스토'의 뜻만 알면 어떤 단어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단어다. 신조어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답답하다. 제목 밑에 '잡놈들이 지배하는 세상'이란 부제를 달았으니 어떤 뜻인지 윤곽이 잡힌다. 다행히 출판사 측에서 책에 끼워넣은 책 안내서에 친절하게 설명이 돼 있다. 또 '카키스토크라시'란 단어도 있다. 이는 부패한 기업가들과 지도자들이 기울어진 사회의 지형을 형성한 것을 지칭하는 단어다. 아마 도널드 트럼프의 출현이 예견된 것이라고 말하기 위해 생겨난 신조어일지도 모르겠다. 한 저자는 『카키스토크라시』란 책을 썼다. 이미 '잡놈'형 인간이 번창할 환경이 마련되어 있던 미국 사회를 고찰하기 위해서다. 이 책은 또 대한민국 사회가 이러한 미국 사회의 병폐를 빼닮았다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우리 '정상인'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 저자에 따르면 우리는 이미 카키스토크라시 시대를 살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건전한 시민들이 어떻게 해야 '잡놈'들의 지배에 저항하고, 궁극적으로는 그들이 지배하는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지 비전과 논거를 제시하려 한다. 가치 체계가 무너진 세상에서 자유인이고 주권자인 국민이 나서야 한다는 지젝의 주장과 자연스럽게 일치는 것으로 독자에게는 읽힌다. "이미 결정된 사실을 알면서도 무엇을 할지 결정해야 하는 공포스러운 상황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자유는 운명과 일치한다고 저자 지젝은 말한다."

동양에서도 '자유로운 삶'의 가치를 이미 2,500년 전부터 설파한 사람이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장자이다. 그는 올바른 삶에는 절대적·객관적·사회적 기준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적용되는 혹은 적용되어야 하는 기준이다. 하지만 좋은 삶에는 애초에 그런 기준이 없다. 기준이 있다면 그것은 상대적·주관적·개인적 기준일 뿐이다. 또 올바른 삶은 자신의 가치와 기준을 누구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하려고 한다. 그래서 올바른 삶의 가치와 기준을 자기에게는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강요하고 또한 무한히 확대 복제하려고 한다. 반면 좋은 삶은 자신의 가치와 기준이 고유하듯이 다른 사람의 가치와 기준 역시 고유하다고 여긴다. 어떤 삶을 원하는가?

앞서 언급한 올바른 삶과 자기 삶의 가치와 기준은 다르다. 올바른 삶은 세상(천하)의 올바른 가치와 기준을 위해 개인의 개별적 가치와 기준은 희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사회의 관습과 도덕 또는 규범과 규칙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자유와 생명은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좋은 삶은 세상의 올바른 가치와 기준을 위해 개인의 개별적인 가치와 기준이 희생당하는 것을 거부한다. 세상을 위해 희생당해도 괜찮은 개인의 살과 생명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을 위하는 삶이 '올바른 삶'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세상을 위해 개인의 삶과 생명을 희생하는 것을 큰 명예이자 영광으로 여긴다. 장자에게는 공자나 묵자처럼 세상 사람들이 숭배하는 이른바 성인군자 혹은 도덕군자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것은 장자가 유가나 묵가의 철학을 비판하는가장 큰 이유이라고 저자는 역설한다. 장자가 공자의 유가에서 말하는 인의 도덕과 삼강오륜 같은 관습, 도덕, 윤리, 규범을 신랄하게 고발하고 비판하는 이유다.

도덕적이고 관습적인 올바른 삶은 소외층 피지배층 등 사회적 약자에게는 희생을 강요하는 지배계층의 논리고 힘있는 자의 기준에서 내세운 사상이고 철학이라고 장자는 꼬집는다. 일반 백성, 여성, 가난한 사람 등의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좋은 삶'이란 자신이 원하는 삶, 즉 다시 자신의 행복과 사랑을 찾는 삶이다. 도덕이나 규범 또는 그 밖의 어떤 것에 종속된 삶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고 바라고 갈망하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좋은 삶이란 장자의 철학은 설득력을 갖게 된다. 이처럼 올바른 삶이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적용되어야 할 보편적·절대적·객관적·사회적 가치와 기준이라면, 좋은 삶이란 자기 자신에게만 적용되는 개별적·상대적·주관적·개인적 가치의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고 장자 연구가들은 강조한다. 장자는 올바른 삶의 가치가 지배하던 시대 좋은 삶의 가치를 역설한 거의 유일한 철학자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민주주의에 해를 끼치는 단어 중 우리가 잘 아는 '독선'과 '편견'이 있다. 두 단어는 정반대의 개념처럼 보이지만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 있다. 잘못 인식된 개념, 즉 편견 자신의 의식에 들어가 고착화되면 그 개념 이외의 어떤 주장이나 의견도 자신보다 못하다고 인식하게 된다. 독선이다. 독선은 독재로 가는 지름길이다.

지젝은 언제나 그래왔듯 권력자들을 통렬히 비판한다. 이 책에서도 신랄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트럼프 재선이나 대한민국 최근 정치 상황은 최근 일어난 일이어서 칼럼니스트나 시사평론가들이 비판을 위해 낸 의견이지만, 이 책은 이런 현상이 미국과 대한민국이란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에서 일어나리라고 상상도 못한 시기에 쓰여졌다. 지젝에 따르면 독재자들은 강박 신경증 환자와도 같아서 자신이 하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발각되지 않도록, 혹은 중요한 질문이 제기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사건과 구설수를 만든다. 그들은 무언가를 타파해야 한다며 ‘거세’를 자신의 공적 이미지로 활용하는데,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 뒤에 숨어 정말로 중요한 행정 절차들을 진행시킨다. 지젝은 또한 이 책에서 불평등의 문제도 지적한다. 돈이 많을수록 사회가 빈곤해지는 부의 역설이 생기는 이유는 인간이 더 많이 가질수록 더 큰 결핍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것은 슈퍼에고의 역설과도 같아서, 사람들은 타인의 명령을 더 많이 따를수록 더 큰 죄책감을 느낀다. 결국 부패 권력은 부를 확대하여 시민을 가난하게 하고, 명령의 범위를 넓혀서 시민을 죄인으로 만든다.

현대사회의 가장 큰 논쟁인 차별의 문제도 현대 심리학 이론을 통해 설명한다. 여성에 대한 차별은 여성이 적절히 통제되지 않으면 과도한 쾌락이 그녀들을 앗아갈 것이라는 두려움에서 비롯된다고 지젝은 지적한다. 인종차별도 마찬가지로 타자의 즐거움에 대한 일종의 질투인데, 타자가 우리 삶의 일부 즐거움을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철학과 사회학, 대중문화를 넘나들며 우리 사회의 현상들을 분석하는 지젝답게 영화 〈매트릭스〉를 이야기하며 묻는다. 당신은 매트릭스의 살아있는 배터리로 계속 머물 것인가? 그는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 진정한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매트릭스〉의 주인공이 그러했듯 아이러니하게도 각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아를 버려야 한다. 그리고 말초적인 욕망 대신 자유의 객관적인 도구가 되어야 한다. 혁명도 마찬가지다. 혁명을 주도하는 운명적인 주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각자가 스스로 혁명 주체이자 도구가 되어야 한다. 지젝이 통렬하게 비판하는 부분을 우리 일반 시민들은 물론 비판의 대상자들도 읽어 실천하기를 독자로서 희망한다. 

자유는 때로 먼 길을 우회하기도 한다. 자유와 죽음, 멸망을 오가는 이 논리가 우리의 현실과는 너무나도 멀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책을 꼭 읽어야 한다. 지젝의 문장은 칸트와 헤겔은 물론 정신분석학, 마르크스주의, 구조주의, 해체주의 등의 토대 위에 얹혀있기 때문에 읽기 쉬운 책은 아니다. 독자로서 번역번을 처음 읽지만 이조차도 쉽지 않다. 아직도 많은 부분은 이해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하지만 끝까지 읽어내는 과정에서 느끼는 점은 우리의 현실과 미국의 현재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내일을 위한 자유의 의미를 끌어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철학, 예술, 현실을 넘나드는 문화의 향연에 참여한 느낌이다.

이러한 위기에 대응할 분명한 해법은 이것이다. 어떤 형태의 권위도 국민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 국민 각자가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포퓰리즘 정치인들은 대중을 이야기하며 음침한 외설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들이 지칭하는 ‘대중’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포퓰리즘이란 본질적으로 권력의 가면이다. 이 새로운 양상의 지배자들은 스스로를 ‘대중의 하인’으로 포장하고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가상의 존재를 불러온다. 이를 통해 자신에게 반대하는 이들을 ‘대중의적’으로 매도할 수도 있게 된다. 포퓰리즘이 처음 등장한 것은 여러 세기 전이었고, 전통적인 권위가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왕이 스스로를 하인이라고 선언하며 권위를 공고히 한 것인데, 프리드리히 대제의 경우 자신을 “왕국의 첫 번째 하인”이라고 선언했다. 이처럼 주인들은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스스로를 하인으로 포장했다.(p.431~432) - 「마치는 말」 중에서


저자 :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


오늘날 가장 논쟁적인 철학자이자 ‘동유럽의 기적’이라 불리는 세계적 석학.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에서 태어나 류블랴나대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파리8대학교에서 정신분석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컬럼비아대학교, 프린스턴대학교, 파리8대학교, 런던대학교 등 대서양을 넘나들며 세계 주요 대학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슬로베니아 류블랴냐대학교 사회학연구소에서 선임연구원, 버크벡연구소 인류학 소장을 역임하고 있다.

1989년 국제적 명성을 안긴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을 세상에 내놓은 이후, 급진적 정치이론, 정신분석학, 현대철학에서의 독창적 통찰을 바탕으로 인문학, 사회과학, 예술, 대중문화를 자유롭게 꿰어내며 전방위적 지평의 사유를 전개하는 독보적인 철학자로 자리매김했다.

저서로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새로운 계급투쟁』 등이 있고, 공저로 『거대한 후퇴』, 『지속 가능한 미래』, 『나의 타자』 등이 있다.


역자 : 노윤기


건국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공기업에서 국제관계와 기업 홍보 업무를 보았으나 좋은 책을 읽고 소개하는 번역가의 업에 매료되어 바른번역글밥아카데미를 수료하고 번역가가 되었다. 옮긴 책으로는 『군중의 망상』 『이 진리가 당신에게 닿기를』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과 즐겁고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는 법』 『옥스퍼드 튜토리얼』 『구글은 어떻게 여성을 차별하는가』 『남자의 미래』 『단순한 삶의 철학』 『커피의 모든 것』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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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노씨 핫플레이스 드로잉
티노씨(김명섭)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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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독자가 중학교 다닐 때 미술 선생님이 생각난다. 미술 수업에 들어오신 선생님이 교실 안에 있는 달력을 그려보라고 학생들에게 제안했다. 저마다 준비해온 연필과 색칠 도구로 열심히 그리고 완성했다. 학생들이 그리는 그림을 하나씩 돌아다니며 도움말도 주고, 평가도 하면서 수업이 진행됐다. 그때 독자는 미술 선생님의 칭찬을 받았다. "나날이 발전하는구나"라는 짧은 한마디였다. 초등학교 때도 그림을 잘 그린다고 칭찬을 들었는데 중학교에서 또 그런 평가를 받으니 기분이 좋을 뿐 아니라 화가가 될까? 하는 생각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러나 집안에서는 반대였다. 예술가들은 배고프기 때문에 결코 권유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그림에 대한 꿈은 쉽게 가시지 않아 결국 미술부 특별활동을 하던 친구에게 부탁해서 방과 후 한 시간씩 들러 연습을 하는 특별활동 미술실에 간 적이 있다. 물론 미술 선생님의 허가도 받았다.

그때 화가가 되기 위한 길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처음 가본 미술실은 흔히 데생 연습을 하는 조각상(흉상)을 하나 탁자 위에 올려 놓고 학생들이 열심히 그리고 있었다. 누구 하나 떠드는 사람 없이 연필 사각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살금살금 돌면서 그들이 그린 그림을 살폈다. 놀라울 정도로 빨리 그럴 듯하게 그리는 학생이 있었고, 어떤 학생은 아직 크기와 분할에만 치우쳐 스케치 북에 연필 선 몇 개만 그려져 있는 학생도 있었다. 

이후 집에 와 조각상이 없기에 교과서에 나오는 사진 한 장을 대상으로 삼아 미술 시간에 그리듯 열심히 그렸다.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여 그렸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사용하지 않은 지우개로 지웠다 다시 그리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꽤 오랜 시간 그렸지만 도무지 완성할 수가 없었다. 명암은커녕 얼굴 부위의 크기도 맞지 않고 비례마저 제대로 맞추지 못해 결국 낙서에서나 보는 흉칙스러운 모습에서 그치고 말았다. 후에 미술반 친구에게 물어보니 학기 초부터 몇 개월간 연습을 해왔다고 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말 그대로 수없이 반복함으로써 터득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훌륭한 화가는 선 긋기만 오만 번 이상 연습한다고 들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이후로 그림 그리는 일은 점점 멀어졌고, 그냥 즐기는 것은 좋은 그림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도움의 말도 들었다.

독자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데생, 스케치, 드로잉, 크로키, 소묘 등 그림의 기초 과정에서 배우고 반복하는 일이라는 점을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어서다. 이 책 『티노씨 핫플레이스 드로잉』의 주제는 세계 여행지 드로잉이다. 이 책은 세계 유명 여행지에서 강한 인상을 남긴 장소를 그림(드로잉)으로 남기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드로잉 기법을 가르치는 입문서에서 실전까지 겸한 취지로 발간됐다. 이를 위해 저자 티노씨는 드로잉에는 모두 8가지 재료(연필, 샤프펜슬, 색연필, 콩테, 마카펜, 라이너펜, 오일파스텔, 수채물감)를 사용한다고 밝힌다. 일반적으로 드로잉을 하는 사람들이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재료들이다. 흔히 사용하는 4B연필 외에 색채가 가능한 마카펜, 색연필, 오일파스텔, 수채물감 등의 사용법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책에는 단풍나무 풍경 드로잉에서 붉은색 안료를 사용해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해 내는 드로잉 기본기를 다지는 사례도 실었다.

드로잉의 사전적 의미는 '선묘(線描)'라고 한다. 연필, 펜, 목탄, 크레용 등으로 그린 그림을 말한다. 또는 제도 도면. 워터칼라 드로잉(water-colour drawing, 수채화)과 같이 명암, 채색 등 격식에 박힌 표현도 드로잉의 범주에 속한다고 풀이하고 있다. 유채기법에 의한 페인팅에 대치되어 사용되는 예도 있다고 덧붙인다. 요즘은 영어로 쓰이는 말을 발음 그대로 쓰지만 옛날에는 우리 미술계에서는 '소묘'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고 사전은 밝히고 있다. 앞서 독자가 언급한 '데생'이란 말은 프랑스말로 영어로는 드로잉을 말한다고 한다. 드로잉은 프랑스어 데생의 번역어이며 데생은 '그린다'는 뜻의 프랑스어 '데시네(dessiner)'에서 나온 말이다. 즉 드로잉이나 소묘는 같은 의미의 단어라는 뜻이다. 

세계미술사전은 더욱 자세하게 드로잉을 설명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표현이나 형태를 준비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로 선을 사용해 이미지를 그려내는 기술로서, 건축, 조각, 회화, 공예 등 모든 예술의 기초를 형성한다. 밑그림이라고도 하며, 프랑스어로는 건축의 도면, 도안 등의 뜻도 포함한다. 제작의 목적이나 동기에 따라 크로키, 스케치, 에스키스, 바탕그림, 에보슈, 카르통, 에튀드 등의 명칭이 쓰이기도 한다.

미술대사전은 드로잉의 역사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고대 이집트 공예가들은 질그릇 조각 위에 붓으로 독자적인 스케치를 했다. 그러나 고대와 중세에는 스케치를 단순히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여겼고 또 당시의 엄격한 관습이 예비 창조의 범위를 제한하였기 때문에 거의 그려지지 않아, 중세에 소묘의 기능은 주로 공방용의 패턴들에 한정되었다. 지오토Giotto(1266~1337) 이후 자연주의의 발생은 좀더 복잡한 밑그림 기술을 요하게 되었고, 14세기 이후 출현한 최초의 독립적인 소묘는 흰색으로 강조점을 둔 에칭으로, 섬세한 모델링을 위해 바탕칠이 된 종이 위에 그려졌다. 당시 사용되었던 다양한 소묘 기법은 첸니니Cennino Cennini(c.1360~1440)가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그는 도제 훈련에 있어서 소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소묘를 회화에 입문하는 ‘개선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소묘가 예술의 표현수단으로써 최초로 독자적인 위치를 확립한 것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1452~1519)의 작품에서였다. 그의 수많은 소묘들은 예술적이고 과학적인 창조물들을 광범위하고 풍부하게 보여준다. 예비 스케치를 새로운 실험 분야로 본 그의 개념은 라파엘로Raffaello(1483~1520)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소묘의 발전은 18세기에 들어와 거장들의 위조품 드로잉들이 나돌 만큼 수장가들의 수집 대상이 되었다. 19세기에는 앵그르Jean-Auguste Dominique Ingres(1780~1867)를 비롯한 신고전주의자가 소묘의 중요성과 기능을 강조한 것에 비하여 색채를 강조한 낭만주의자들과 인상주의자들은 비교적 소묘를 부수적인 것으로 이용하였다. 반 고흐Vicent van Gogh(1853~1890)는 큰 갈대펜을 사용하여 선의 표현적 특질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었으며, 로댕Auguste Rodin(1840~1917)은 20세기 소묘의 개념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대담한 소묘에서부터 모델의 움직임을 포착하기 위한 자유로운 기법을 보여주었다. 이때부터 데스피오Charles Despiau(1874~1946), 마이욜Aristide Maillol(1861~1944) 등과 같은 많은 조각가들도 훌륭한 소묘를 제작하였다. 마티스Henri Matisse(1869~1954),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 클레Paul Klee(1879~1940) 등을 비롯한 근현대 미술의 거장들도 독창적인 소묘들을 통해 드로잉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였다. 20세기의 소묘는 추상화의 경향에 따라 점차 주관적이고 내면적인 성격이 강조되었다.

이 밖에도 회화 기법의 하나로 스케치와 크로키도 설명한다. 스케치(sketch)는 프랑스어의 크로키(croquis)와 같은 것이다. 사생화·약도·초벌그림 등 즉사적(卽寫的) 데생의 일종으로서 목적에 따라 정밀하게 사생하는 경우도 있고 대략을 그리는 경우도 있다. 화고(畵稿, 그림의 원고)로써 외워서 그리는 경우도 있는데, 대략 그리는 경우 임시 스케치의 수법을 사용한다. 스케치 재료는 옛날에는 피엘 노아르(黑石)나 실버 포인트(銀筆)를 사용했으나, 현재는 연필·색연필·목탄·콘테·파스텔 등의 사용이 일반화되어 있으며, 단색으로 대상의 형태나 특징을 선묘(線描)하기도 하고, 명암을 그려넣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에 수채화물감을 칠하면 연필을 정착시키는 효과가 있어 담채를 칠하는 경우도 많다.

또 크로키(croquis)는 초안(草案), 스케치, 밑그림 등의 뜻이다. 화가가 본대로 느낀 대로 연필, 콘테, 펜 등으로 단시간에 그린 것으로서, 세부 묘사에 사로잡히지 않고 대상의 가장 중요한 성질이라든가, 톤을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영어의 스케치가 이에 상당하는 말이지만, 일반적으로 크로키는 빠르게 그리는 것을, 스케치는 대상에 대한 더 정확한 묘사법이라고 보면 될 듯하다. 독자가 중학교 때 학생들이 스케치 북에다 그린 석고 흉상은 데생, 드로잉, 소묘이다. 이에 구별하여 움직이는 물체, 즉 말이 달리는 모습이라든지 운동 선수가 취한 한 동작의 특징을 빠르게 잡아내어 간략하게 그려내는 것을 크로키라고 한다는 뜻이다. 

이 책 『티노씨 핫플레이스 드로잉』에서 저자는 원근감과 입체감이 살아 있는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스케치부터 완성까지 4단계로 나누어 각 단계의 과정 그림과 함께 친절한 드로잉 가이드를 제시한다. 다양한 강의 경험과 드로잉 노하우를 바탕으로 한 저자 티노씨의 친절하고 체계적인 가이드를 따라 그림을 그리다 보면 멀어져 가는 풍경이나 웅장한 건물을 멋지게 표현할 수 있다.

이 책의 모든 그림에는 티노씨Mr.Tino의 유튜브 강좌로 연결할 수 있는 큐알코드가 수록되어 있다. 실시간 생방송으로 시연한 티노씨의 드로잉 영상을 유튜브로 함께하며 소실점과 눈높이를 잡고 구도를 스케치하는 것부터 각 소재에 따른 표현과 기법, 보조도구를 사용하여 효과를 높이는 법까지 차근차근 따라 그려 멋진 그림을 완성할 수 있다.

세계 여행과 드로잉이라는 두 가지 테제를 결합시킨 미술 기본 입문서라고 보면 될 듯하다. 이 책은 세계 여행지로는 북아메리카부터 아프리카까지 누구나 한번쯤 가 보고픈 세계 각국의 여행 명소를 저자 티노씨의 가이드를 따라 직접 그려 볼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1부 〈여러 가지 재료를 사용한 기초 드로잉〉과 2부 〈대륙별 핫플레이스 드로잉〉으로 구성되었다. 2부에서는 1장 「북아메리카」, 2장 「아시아」, 3장 「유럽」, 4장 「오세아니아/아프리카」로 묶었다. 독자들은 세계인들이 자주 찾는 핫플레이스의 풍경과 건축물을 다양한 기법과 표현법으로 하나하나 그리다 보면 어느새 나만의 드로잉으로 지구촌 한 바퀴를 여행할 수 있다.

이 책에는 산이나 폭포 같은 유려한 자연 풍경은 물론이고 골목, 카페, 광장, 사원 등 다양한 건축물과 공간이 등장한다.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이나 이탈리아의 피렌체 대성당과 같은 유명한 랜드마크부터, 전라북도 남원의 서도역처럼 우리 주변의 소박한 여행지까지 고유한 특징과 서로 다른 매력을 지닌 각양각색 명소들을 눈에 담으면서 그림을 통해 문화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맘껏 표현해 볼 수 있다. 특히 저자의 설명은 풍경이나 건축물을 드로잉 할 때는 구도와 비례, 원근법을 표현하는 기술이 필요하다고 강조해 독자들의 이해와 실전을 돕고 있다. 이 책은 눈높이와 소실점의 이해는 물론 형태 잡는 법, 투시도법, 원근법 등을 포함한 드로잉 기법을 상세하게 설명한다는 말이다.

책은 또한 4단계로 나누어 드로잉 진행 과정을 각 그림과 함께 친절하게 설명합니다. 구도 잡기부터 디테일한 묘사까지 각 단계의 진행 그림과 설명을 보면서 핫플레이스 드로잉 방법을 쉽게 터득하고 구현해 볼 수 있다.

미국 국회의사당의 경우 '드로잉 포인트'를 제시한다. "미국 국회의사당 특유의 하얀색을 강조하기 위해 양옆의 나무들을 진하게 그려준다. 세로선만으로도 복잡한 건물의 구도를 그릴 수 있다."(p.46) 이어 단계별 드로잉 가이드를 ① 중앙의 케이크 형태 구조물 위치를 잡고, 양쪽 나무들의 외곽 형태만을 그린다. ② 하늘은 위쪽을 더 어둡게 하여 문지르고 건물의 외곽을 지우개로 선명하게 지운다. ③ 하얀 건물을 강조학 위해 나무들을 더욱 어둡게 그린다. ④ 건물의 많은 창문들은 연필을 두껍게 하여 세로선만으로 깔끔하게 표현한다. 

본격적으로 핫플레이스 드로잉을 시작하기 앞서 다양한 미술 재료들로 기본기를 훈련하는 코너도 마련해 두었다. 똑같은 단풍나무를 여덟 가지 재료(연필, 샤프펜슬, 색연필, 콩테, 마카펜, 라이너펜, 오일파스텔, 수채물감)를 사용해 그려 봄으로써 이후 본격적인 드로잉에서 훨씬 다채롭고 풍부한 텍스처와 깊이를 가진 그림을 완성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재료를 활용한 기초 드로잉 후에는 본격적으로 대륙별로 핫플레이스를 소개한다. 핫플레이스 각각의 기본 정보와 함께 그림별로 '드로잉 포인트'와 4단계 드로잉 가이드가 주어지며, 실시간 생방송으로 시연한 티노씨의 드로잉 영상 유튜브 큐알코드도 제공된다. 이 책의 모든 그림을 저자가 직접 그려 가며 세세한 부분까지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유튜브 강좌이기 때문이다. 따라하는 것만으로 드로잉 초보라도 어렵지 않게 핫플레이스 드로잉을 완성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는 출판사 측의 이야기다.

해외 여행을 몇 차례 다녀온 독자로서도 가본 적 있는 명소가 나올 때는 눈길을 한 번 더 주지만, 못 가본 곳은 이색적으로 느낄 만큼 드로잉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다. 아름다운 자연 풍경과 유적지의 웅장한 건축물, 독특하고 이색적인 거리와 가옥 등을 대할 땐 새로운 해외 여행을 꿈꾸며 책에 몰입하고 그림의 능력도 키울 수 있어 다음 여행 때는 간단한 도구를 챙겨 드로잉에 도전해 볼까 하는 생각을 갖게도 한다. 


이 책을 보면서 우선 점찍어 둔 한 곳을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며 그림 구상과 함께 돌아볼 여행지를 생각해 본다. 말레이시아 사바주의 주도인 코타키나발루이다. 이 도시는 말레이시아 동부 보르네오섬 최대의 도시이다. 이곳은 '황홀한 석양의 섬'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으며 바닷가에서 보는 낙조는 그리스 산토리니, 남태평양 피지와 함께 세계 3대 해넘이로 꼽힌다. 적도가 가까운 곳이라 날씨가 변덕스럽지 않고 사시사철 깨끗한 하늘과 주홍빛 노을을 볼 수 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드로잉 포인트'는 마카펜은 부드러운 색 변화 단계를 나타내기가 어렵기 때문에 여러 번 겹쳐 칠하여 노을의 느낌을 표현할 것을 주문한다. 이 그림 역시 4단계 드로잉 포인트를 덧붙인다. ① 실루엣으로 표현될 배경의 나무와 섬, 사람들만을 스케치한다. ② 노랑색, 주황색, 분홍색 등 밝은 색 마카펜으로 바탕을 먼저 칠한다. ③ 갈색, 고동색, 붉은색 등 좀 더 어두운 색감들을 덧칠하여 구름 부분을 그린다. ④ 감정 색감의 마카펜, 붓펜을 이용하여 나무와 바탕의 넓은 부분을 그리고 라이너펜으로 얇은 나뭇가지를 그려 완성한다. 


저자 : 티노씨(김명섭)


일러스트를 전공하고 다양한 화풍의 그림을 그렸다. 현재 보타니컬아트 작가 활동과 연필 드로잉 강의를 하고 있다. YouTube로 연필 드로잉 온라인 실시간 강의를 하고 있으며, “친절한티노씨” 온라인 카페를 운영하여 그림을 배우고 즐기시는 분들과 소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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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의 역사 - 이해하고 비판하고 변화하다
니알 키시타이니 지음, 도지영 옮김 / 소소의책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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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뉴스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경제학' 관련 책을 읽다보면 독자는 늘 "경제학은 왜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는가?"라는 의문이 먼저 든다. 인간은 경제 활동을 시작한 것은 인류의 탄생부터라고 말하는데도 말이다. 사실 인류의 경제 활동은 숲에서 열매를 따고 동물을 사냥한 원시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이 책 『경제학의 역사』는 기록한다. 즉 경제활동을 학문으로 탐구하는 것은 근대에 들어서이지만 경제활동은 인류의 탄생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말이다. 저자 니알 키시타이니는 이 책에서 "인류에게 가장 큰 문제는 충분한 음식을 구하는 일이었다"며 "인간의 경제활동의 시작이고, 음식을 구하는 일은 곧 희소성이라는 기본적인 경제 문제였다고 주장한다. 이후 필요에 맞춰 자연을 활용하고 문명이 발달하면서 경제생활이 더욱 복잡해졌고 경제사상 또한 새롭게 형성되고 발전해왔다고 설명한다. 

이 책은 경제의 역사라는 주제에서 서술되었으며 경제학에서 중요한 개념과 원리, 이론을 정립한 경제학자들을 만날 수 있다. 특히 화폐의 발명, 자유무역, 산업혁명, 자본주의의 등장, 세계대전, 대공황, 금융시장의 성장 등과 같은 역사적 대전환점이 경제학에 어떤 영향을 끼쳤고, 오늘날 직면한 경제 문제의 본질과 해법, 경제학 원칙이 우리가 속한 사회와 국가, 개인의 삶에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 다양한 사례를 통해 확인할 기회를 제공한다.

이 책은 인간이 생존에 필요한 옷과 음식, 집을 어떻게 찾아내거나 생산했으며 그것들을 어떻게 나누어 가졌을까?를 연구한 결과이다. 이런 질문이 인간의 역사가 곧 경제활동의 발전 과정임을 분명하게 말해주기 때문이다. 책에 따르면 약 1만 년 전, 첫 번째 경제 혁명인 농업이 시작되면서 일정한 크기의 땅에 더 많은 사람이 살 수 있게 되었고,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었다. 그러면서 복합경제를 갖춘 문명이 생겨났고, 사람들은 인간이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경제’를 연구하는 경제학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그리스 최초의 시인 헤시오도스는 ‘신이 인간이 먹을 음식을 계속 숨기신다’라고 썼는데, 희소성이라는 경제학의 기본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경제사상을 처음 탐구한 사람들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였다고 저자는 판단한다. 그들은 삶을 관통하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했다. 오늘날까지 우리가 씨름하는 문제이다. 인간 사회가 잘살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사람들이 행복과 만족을 느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사람을 진정으로 번영하게 하는 건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으로부터 경제학이 시작되었다.

이 책은 서양 경제사를 중심으로 탐구했기에 로마 제국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또 로마 제국이 몰락한 후에는 기독교 수도사가 경제사상을 발전시켰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은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로 저자는 서술한다. 중세의 경제생활은 주로 지역에서 이루어졌고 돈보다 종교와 개인적인 친분을 바탕으로 하는 유대 관계가 중심이었고, 성직자들은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행위가 절도와 같다고 여겼다. 흑사병의 발생 이전까지 유럽에서는 인구가 증가하고 새로운 기구가 발명되어 농산물과 가공품 생산이 늘어났으며 마을공동체 간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금융도 번성했다.

흑사병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는16세기 말부터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등 유럽의 주요 국가가 대외무역을 장악하기 위한 경쟁을 펼치면서 사상가들은 중세의 종교에서 이성과 과학으로 눈을 돌렸다. 이들은 중상주의자로 불렸는데, 도덕보다 자원과 돈을 강조했으며 부를 추구하는 행위가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는지 아닌지를 걱정하지 않았다. 또 18세기 프랑스에서는 경제적 가치의 원천을 농업으로 여긴 중농주의자가 등장해 장인과 상인에게 특권을 주는 경제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했으며, 이후 강력한 혁명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되었다.

18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유럽의 산업혁명은 눈부신 기술 발전으로 많은 사람들의 생활 방식을 바꿔놓았지만 노동 문제, 사회적 불평등, 인구 과잉 등 수많은 사회적·경제적 문제를 야기했다. 몇몇 사람은 부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가난한 사람이 많았으며,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들었지만 생활환경은 암울했다. 사람보다 이익을 우선하는 무자비한 경제의 희생양이 늘어나면서 자본주의 체제가 비판의 도마에 오르고 새로운 세상을 제안하거나 공동체를 실험하는 사상가들이 나타났다.

이 책 『경제학의 역사』는 파트 구별 없이 모두 40장(章)으로 나눠 경제학사(經濟學史)를 기술한다. 저자는 '서문'에 해당하는 1장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에서 '경제학'의 어원과 풀이에 집중한다. 이를 통해 경제학은 어떤 것인가를 독자들에게 여러 명제를 동시에 제공한다.

1장에서 저자가 내세우는 경제학의 풀이에는 여러 개의 가설이나 학설 등의 명제에 해당한다. ① 경제학은 사회가 자원을 사용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② 경제학은 삶과 죽음을 다루는 학문이다. ③ 경제학은 사람이 생존하고, 건강하게 살고, 교육받는 방법을 찾는 걸 돕는 학문이다. ④ 경제학은 '희소성의 학문'이다.(영국 경제학자 리오넬 로빈스) ⑤ 고대 그리스의 경제학은 가정에서 자원을 관리하는 법에 관한 학문이었다. ⑥ 경제학은 경제 내에서 인간의 행동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⑦ 정확한 관찰에 현명한 판단이 더해지면 경제학은 변화를 일으키는 힘이 된다. ⑧ 오늘날 대학에서 연구하는 경제학은 수천 년에 이르는 인류 문명사에서 비교적 최근에 나타난 학문이다. ⑨자본주의든 아니든, 모든 사회는 희소성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경제사를 서술하기 위해선 경제활동이 시작된 곳, 문명이 시작된 곳에 대한 인간의 삶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필요하다. 무엇을 먹고, 어떻게 필요한 것을 만들어냈고, 어떤 가치를 매겼는가 등 인간의 모든 활동을 경제활동의 시작으로부터 본다는 시각이다. 이에 따라 이 책에서 저자는 첫 번째 경제사상가들을 그리스 철학자들에게서 찾는다. 인류가 최초의 문명을 건설하려고 수천 년간 몸부림친 끝에 그리스 철학자들의 사상이 꽃을 피웠다고 설명한다. 이에 따르면 그리스 사상가들이 등장하기 훨씬 전, 인류는 자신의 필요에 맞춰 자연을 활용하는 법을 배우면서 경제생활의 씨앗을 뿌렸다. 예를 들어 처음으로 불을 피웠을 때 인류는 불을 이용해 무언가를 새로 만들 수 있었다. 찰흙으로 항아리를 빚고, 식물과 동물을 익혀 먹었다. 그 후 지금으로부터 1만 년 전, 첫 번째 경제 혁명이 일어난 것은 앞서 언급한 대로다. 사람들이 식물을 기르는 법과 동물을 길들이는 법을 발견해 농업이 시작된 것이다. 일정한 크기의 땅에 더 많은 사람이 살 수 있게 되었고,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었다. 

이러한 농경 사회의 초창기에 현재의 이라크 땅인 메소포타미아에 복합경제를 갖춘 문명이 생겨났다. 여기서 '복합'이라는 단어가 지니는 중요한 의미는 이제 사람들이 자기가 먹을 음식을 직접 생산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서양의 역사 흐름에 맞추어 다소 다른 모습을 보이지만 경제활동 측면에서 분석해보면 인간의 생산과 노동, 그리고 편리한 도구 발명 등 획기적인 발전을 시작하는 제1차 산업혁명 시대부터라고 보는 것은 거의 일치한다. 생산을 위한 각종 기계는 인간의 노동을 덜게 해주는 1차적 호평에도 불구하고 자본이 없이 노동력만을 갖고 살아가는 일반 피지배 계층의 서민들에게는 생업을 잃어버리는 충격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대량생산 대량소비가 가능해짐으로써 자본을 투자한 자본가는 더욱 부자가 되고,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동자·농민들은 음식이나 주거, 의류 등 점점 더 상대적 빈곤감을 가져다 주었다. 이로 인해 신분계급 사회, 봉건 사회, 근대 사회에서는 극심한 자본주의의 폐해를 그대로 드러내는 결과로 나타났다. 일부 학자들은 공동 생산, 공동 소비의 원시공산주의의 경제이론을 적용해 이른바 공산주의 이론을 밑바탕으로 빈부의 격차을 해소해야 한다는 이론이 서구를 휩쓸었다. 

특히 제정 러시아 말기에는 아직도 농노(농사 노예)제도가 유지되고 지배계급의 부정부패가 만연해 공산주의(마르크스주의)의 토양이 점점 강렬하게 형성되고 있었다. 서서히 공산주의 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노동자·농민(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사회주의 사상이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있었다. 제정 러시아 말기에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할 상태도 되지 않는 러시아는 유럽 대부분의 국가가 참여한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러시아 혁명을 일으켜 소비에트 공산사회주의 국가가 출현했다. 첫 번째 세계대전 이후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속속 자국의 정치적 통제권을 되찾았다. 그러는 중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둘러싼 논쟁이 더욱더 격렬해졌다. 또한 1930년대의 대공황이 세계 경제에 파문을 일으키면서 20세기 경제정책 사상의 거두인 케인스의 이론이 확립되었고 정부의 시장 개입에 따른 경제 발전의 여러 사례가 수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경제는 1970년대 중동의 정치적 위기와 유가 상승으로 인한 충격을 받았지만 1980년대 중반부터 2007년까지 대안정기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2008년에 금융위기가 발생하면서 심각한 경기 침체에 빠져들었다. 신중함을 버린 무모한 자본주의가 낳은 결과였다.

이처럼 이 책은 원시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경제활동을 개괄하면서 각 장마다 일상적인 예시를 들어 경제학에서 중요한 개념과 원리를 명확히 이해하게 해준다. 제번스가 제시한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p.100~108)은 캐러멜을 하나씩 더 먹을 때마다 느끼는 만족감을, 피구가 창시한 ‘후생경제학’은 이웃집의 시끄러운 트럼펫 연주자(p.127~135)를, 케인스가 말하는 ‘정부의 시장 개입’은 욕조에 물 채우기(p.244~252)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현대 경제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애덤 스미스는 경제학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것은 ‘사익 추구와 좋은 사회가 양립할 수 있는가?’였다. 애덤 스미스는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일 때 사회가 잘 작동한다고 주장했다. 항상 서로에게 잘해주려 애쓰기보다 자신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면 결국 더 많은 사람이 혜택을 입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애덤 스미스는 경제학에서 가장 유명한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또한 그는 다른 무엇보다 시장을 우선해야 하며, 정부는 가능한 한 개입을 줄이고 기업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야 한다고 했다.(p.54~62)

이 책은 경제학이 던지는 크고 작은 질문이 큰 줄기를 이루면서 그 해법을 하나하나 이해해나가는 즐거움이 가득하다. ‘생일에 20파운드를 받았다면 어디에 쓸 것인지 어떻게 결정할까?’ ‘왜 어떤 사람은 신경 써서 돈을 저축하고, 또 어떤 사람은 반려견에게 대궐 같은 집을 사주는 데 돈을 물 쓰듯 할까?’부터 그 범위를 좀 더 넓혀 ‘새로 생겨난 부는 노동자와 고용주에게 각각 어떻게 분배해야 할까?’, ‘자본가가 얻는 이익은 어디에서 올까?’, ‘상품의 가격은 어떻게 정해질까?’, ‘사람들의 욕구는 어디서 생겨날까?’,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면 왜 자유가 파괴될까?’ 등과 같이. 사실 수학이나 문학과 비교하면 경제학은 상대적으로 신생 학문이다. 그리고 경제학의 많은 부분이 자본가에게 중요한 대상인 구매, 판매, 가격 등을 다룬다. 이 책의 많은 부분도 그런 경제학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이전에 나타났던 경제사상도 살펴본다. 이 책은 경제에 대한 생각의 변화를 살펴보고, 경제 자체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도 알아본다.

특히 이 책은 빅 푸시 정책으로 경제 발전에 성공한 한국의 이야기도 소개한다.(p.199~207) 한국 정부가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은 ‘재벌’에 특정 산업을 발전시키라고 지시하며 낮은 금리로 자금을 대출해준 뒤 외국 기업과의 경쟁력을 갖춰 수출을 독려한 결과 놀라운 경제적 성과를 거두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부 국가에서는 빅 푸시 정책이 실패했는데, 한국이 남달랐던 부분은 신규 산업이 타성에 젖지 않도록 정부가 철저히 확인했다는 점을 꼽았다.

영국의 경제학자 앨프레드 마셜은 경제학자에게는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경제학자는 과학자처럼 세상을 설명하지만 주변의 고통받는 사람을 위한 연민의 정을 반드시 갖추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 외에도 이 책의 저자는 경제학자가 갖추어야 할 능력을 하나 더 꼽는다. 자신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눈, 자신의 관심사만 생각하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는 습관적인 방식 너머로 문제를 바라보는 능력. 경제학의 역사를 공부하면 그러한 능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과거의 경제사상가들이 당시의 환경 속에서 고유한 관심사를 어떻게 사상으로 발전시켰는지 배움으로써 우리 또한 현재 처한 환경에서 관심의 대상에 관한 생각을 어떻게 발전시켜나가야 할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제사상과 역사를 함께 살피는 일은 대단히 흥미롭고, 또한 더 많은 사람이 잘사는 세상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하다.

이 책에서 우리가 만난 여러 경제학자는 각자 살았던 시대가 마주한 문제에 대응해 서로 다른 이론을 내놓았다. 경제학에는 수학처럼 영원히 옳기만 한 하나의 ‘정답’은 없다. 역사 속 학자들이 내놓은 각기 다른 답을 살펴봄으로써 새로운 영감을 얻어 극심한 불평등이든 금융위기든, 혹은 지구 온난화 문제든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이론을 내놓을 수 있다. 올바른 답을 얻는다면 더 많은 사람이 풍족하게 살아가는 기회를 얻을 것이고, 잘못된 답을 얻는다면 많은 사람이 고통받을 것이다. 필요한 음식과 의약품을 구하지 못하면 사망하는 사람도 생길 것이다. 이것은 전문 경제학자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맡겨진 과제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이후 경제학은 사실의 세계와 이론의 세계를 모두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경제학이 발전하면서 역사적 사실과 통계를 샅샅이 훑는 경제학자보다 새로운 이론을 정립한 경제학자가 큰 명성을 얻게 되었다. 경제학자는 수학과 사랑에 빠졌고, 경제에 관한 구체적인 사실보다는 일반적 개념에 기반을 둔 온갖 정교한 이론을 정립하는 데 수학을 사용했다. 물론 모두가 여기에 동의하지는 않았다. 현재까지도 경제학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경제학이 연구하는 주제가 현실과 다소 동떨어져 있으며, 경제와 관련해 진짜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사실을 탐구하기보다는 수학 문제를 푸는 게임이 되어버렸다고 불평하기도 한다.

더욱이 오늘날 경제학은 삶의 거의 모든 분야에 적용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인간의 행동 이론, 경매 이론 설계, 지구 온난화 문제 등을 포함해 사법 체계, 테러리즘, 심지어 양치질과 일본의 스모 경기까지 경제 이론으로 분석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매우 바람직한 발전이라고 생각하는 경제학자가 많다. 경제학이 인간의 온갖 행동을 설명해주는 아주 효과적인 분석 기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1880년대에 독일어권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경제학의 정수를 찾는 싸움이 벌어졌다. 경제학은 무엇보다 역사와 구체적 사실에 기반을 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제학자들과, 관념적인 이론을 탐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제학자들이었다. 결국 양쪽 생각에 모두 일리가 있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폴브레에 따르면 미래의 노동력인 자녀를 키우는 데 드는 비용 대부분을 부담하는 건 바로 여성이라고 한다. 일반 경제학에서 여성이 부담하는 양육 비용을 무시하는 건 여성이 아이를 돌보고 돈으로 보수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남성이 가정부에게 임금을 주고 청소, 요리, 자녀 돌봄을 맡기면 가정부의 노동은 그 나라의 국민소득에 포함된다. 그런데 그 남성이 가정부와 결혼하면 가정부는 이제 남성이 가장인 가구의 구성원이 된다. 아내가 되어서도 청소와 요리를 계속하지만, 이제는 임금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아내의 노동은 국민소득에 포함되지 않는다. 전통 경제학의 관점에서 ‘비생산적인 가정주부’가 된 것이다.(p.319) - 「35 사라진 여성」 중에서


저자 : 니알 키시타이니(Niall Kishtainy)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후 영국 정부와 유엔 아프리카 경제위원회에서 정책자문관으로 활동했다. 이후 런던 정치경제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경제사와 경제사상사를 가르쳤고 경제학과 도시, 사상의 역사 등 다양한 주제로 글을 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몇 분 만에 배우는 경제학(Economics in Minutes)』, 『경제의 책(The Economics Book)』, 『무한 도시(The Infinite City)』 등이 있다.


역자 : 도지영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정치외교학과 경제학을 전공했으며,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통상을 전공했다. 현재 번역 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에서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필립 코틀러의 아시아 마켓 4.0』『127가지 질문으로 알아보는 중국경제』『돈의 힘』『GO PRO 네트워크 마케팅 프로가 되는 7단계』『자수성가한 괴짜 슈퍼리치가 알려주는 진짜 돈 버는 방법』『아는 사람의 힘』『데일 카네기 성공대화론』『트럼프, 강한 미국을 꿈꾸다』『CEO 시진핑』『심플하게 말하기』『중국 외교 읽기』『진정성 리더십』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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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활의 역사 - 중세부터 현재까지 혼자의 시간을 지키려는 노력들
데이비드 빈센트 지음, 안진이 옮김 / 더퀘스트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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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버시의 역사를 통해 개인과 세상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다. 프라이버시는 ‘혼자 있을 권리’라는 새로운 개념을 이끌어냈으나 현대에 들어서면서 국가와 충돌할 경우 사생활이 함부로 이용되는 것을 막는 노력은 언제나 경계 밖에 있다는 점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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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활의 역사 - 중세부터 현재까지 혼자의 시간을 지키려는 노력들
데이비드 빈센트 지음, 안진이 옮김 / 더퀘스트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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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이 책 『사생활의 역사』의 표제어로 쓰인 '사생활'은 영어로 '프라이버시(privacy)'로 표현되는 단어다. 이 단어는 사전적 의미로 "가족을 비롯한 사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개인적인 일이나 관계를 말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의 저자 데이비드 빈센트도 「혼자 있을 권리의 시작, 중세 시대」란 제목의 1장(章)에서 '사생활(프라이버시)'이 개인에게 국한된 개념은 아니라는 걸 분명히 밝힌다. 이에 따르면 프라이버시의 어원인 '프리바투스(privatus)'라는 라틴어에는 공권력의 통제를 받는 집단의 문제와 가정이라는 사적인 공동체의 문제가 구분된 합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이런 구분이 무시될 때가 있었다. 그 시작은 변호사인 새뮤얼 워런과 루이스 브랜다이스가 1890년 《하버드 로 리뷰》에 〈프라이버시의 권리〉를 발표하며 프라이버시를 '혼자 있을 권리'로 정의하면서부터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 '사생활'이 법적 보호를 받아야 할 정도로 사회 문제가 된 것은 중세 시대부터라는 것이 학자들의 일반적 의견이다. 14세기 중세 런던의 빽빽한 거리에서 벌어진 분쟁은 수도 없이 많았다. 런던에서는 12세기부터 방해죄가 존재했는데 여기에는 사적인 방해와 공적인 방해가 모두 포함된다고 저자는 풀이하고 있다. 사적으로나 공적으로 방해를 받은 사람은 누구든지 재판소에 소를 제기할 수 있었다. 재판소 심리에서 쟁점이 된 것은 '사적인 가정생활이 보호받아야 한다'였다.(p.14)

두산백과에 따르면 프라이버시란 개인이 사생활에 대한 부당하거나 원치 않는 타인의 개입을 받지 않는 상태를 일컫는다. 이는 서구 근대 역사의 산물로, 프라이버시에 대한 요구는 17세기에 처음 관찰되었고 18세기에 프라이버시 권리의 제도화를 위한 초석이 마련되었다. 영국의 1689년 권리장전과 프랑스의 1789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의 선언이 선언한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 신체·안전의 자유 등에는 프라이버시의 개념이 함축되어 있다.

19세기 중산계급 가정의 형성은 프라이버시의 발전에 있어 중요했다. 중산계급 가정을 통해 ‘사생활’에 대한 개념이 구체화되었고 실재하는 것이 됐다. 금전적 여유가 되는 중산계급에게 가정 생활은 매우 실재적이고 실질적인 것으로 여겨졌고, 신보다는 가족과의 밀접한 관계를 삶의 중심에 두었다. 가정의 영역을 보호하고 유지해 나가고자 하는 의지는 남성 가장의 관리 하에 개인적 지식을 공유하는 것으로 이어졌으며, 사회적·정치적 실권자가 그것에 개입할 권리는 없었다.

20세기에 이르러 프라이버시는 공적 영역으로 확대됐다. 아동 방치의 증가는 국가가 가족의 사생활에 개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미국에서는 1908년 어린이 법안과 1918년 산모와 아동 복지법이 제정됐다. 가정에서 일어나는 아동 성적 학대는 1908년 '근친상간처벌법'의 제정으로 공권력의 개입을 받게 됐다. 가족의 생활 환경 또한 1919년 도시계획법, 1923년과 1924년 주거법에 의해 정부의 관여 대상이 됐다.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프라이버시는 사적 열망에서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로 재정비 되어갔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문은 그 누구도 프라이버시에 대한 임의적인 간섭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선언했고, 유럽연합의 기본권 헌장의 제8조항은 모든 개인은 자신의 사생활, 가정 생활, 개인적인 서신을 존중 받을 권리가 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부터 기술의 급격한 발전과 함께 프라이버시는 위기를 맞기 시작했다. 1969년 제리 로젠버그*의 《프라이버시의 죽음》은 국립 컴퓨터 시스템이 개인과 단체의 정보를 무한으로 저장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고 경고했다. 1973년에는 스웨덴의 정보보호법을 시작으로 프라이버시의 위기에 대응한 법적 조치가 취해졌다. 1983년 인터넷의 등장 그리고 1993년 범세계통신망의 등장과 그에 따른 개인 컴퓨터의 보급과 함께 다시 한 번 프라이버시의 위기가 제기됐으며, 2006년 데이비드 홀츠만은 《프라이버시 로스트》를 통해 빠른 기술 발전의 속도에 힘입어 법 체계가 따라가지 못할 만큼 빨리 무너지고 있는 프라이버시의 위기를 경고했다.


*로젠버그(Rosenberg) : 미국(유대계)의 부부. 줄리어스 로젠버그(Julius Rosenberg), 에셀 로젠버그(Ethel Rosenberg) 모두 뉴욕에서 출생했다. 남편은 전기 기술자, 아내는 타이피스트였다. 결혼(1939) 후에 뉴욕에서 기계상을 경영했다. 1950년 이들 부부는 원자 폭탄 설계의 스파이(원자 폭탄 설계의 비밀을 소련에 제공) 용의자로서 연방 검찰청에 체포되고, 에셀의 친동생의 밀고라는 유일한 증거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3년간의 옥중 생활에서 부부는 최후까지 자기의 무죄를 주장하고 세계의 각층인으로부터 구명 운동도 있었으나, 결국 전기의자에서 처형되었다. 두 부부 사이에 10세와 6세의 두 아들을 남겼는데 부부를 위해 최후까지 용감하게 싸운 변호사 블로크(Emmanuel H.Block)는 그 후 원인 불명의 사망을 했다. 부부의 옥중 서간 『죽음의 집의 편지(사랑은 죽음을 넘어서) Death House Letters(1953)』는 각국어로 번역됐다.(인명사전, 2002)

반면 폐쇄적인 가정의 영역과 그 안에서 일그러지는 인간을 우려하는 관점은 사생활에 대한 사회의 개입을 옹호했다. 1967년 에드먼드 리치는 현대 사회의 가정이 고립돼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로 인해 가정은 바른 사회의 기본 단위이기보다는 우리 모두의 불만족의 근원이라고 주장했다. 개인의 정신적, 감정적 건강을 위해 개인의 삶이 은밀하고 폐쇄적인 가정 생활에 지배되지 말아야 한다는 시각이 프라이버시를 주장하는 측과 대립을 이루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서문〉을 통해 프라이버시의 역사는 소음과 침묵의 기이한 혼합물이라고 정의한다. 또 프라이버시의 개념에 대한 문헌은 많지만 확정된 결론은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저자는 이 책에서 오랫동안 이어진 프라이버시의 발전에 관한 설명을 제사함으로써 보다 명확한 시간적 관점을 제공하고자 한다고 저술 취지를 설명하고 있다.

책의 출간에 맞춰 내놓은 출판사 소개글에는 사회적인 동시에 지극히 개인적인 인간의 프라이버시는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해왔을까?에 대한 의문을 던지고, 이 책이 중세부터 현대까지 변화무쌍했던 프라이버시의 역사를 흥미롭게 추적하는 책이라고 밝힌다. 이에 따르면 ‘혼자 있는 시간’이 다양하게 실천되어온 모습을 신선하게 풀어낸 『낭만적 은둔의 역사』의 저자인 역사학자 데이비드 빈센트가 이 책에서는 적극적으로 사생활을 지킨 개인의 노력을 이야기한다. 조용한 고독이 필요해진 시대, 혼자인 삶이 많아지는 시대에 사람들에게 품격 있는 인생의 레퍼런스가 되는 내용이다.

『사생활의 역사』라는 제목답게 책은 중세 시대와 풍요로운 19세기를 거쳐 1, 2차 세계대전과 70년대 이후 대두된 디지털 혁명, 2000년대의 소셜미디어까지 개인과 세상의 관계를 흥미진진하게 설명한다. 프라이버시의 개념은 오래된 역사만큼 다채롭게 변화해왔다. 중세부터 근대까지 프라이버시의 개념이 개인을 중심에 둔 문화와 관습의 차원이었다면 2000년대 이후로는 시민의 권리로 확대되는 양상을 띤다. 한 예로, 14세기 런던에서는 ‘방해죄 재판소’에서 각종 사생활 침해에 대한 개인과 개인의 소송이 줄을 이었다. 700년 전에도 방해받지 않는 삶에 대한 갈망은 지금과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혼자 있을 권리’가 좌절될 때 개인은 적극적으로 맞서 왔으며 이는 조지 오웰의 예언적 소설 『1984』와 에드워드 스노든 사건을 거쳐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 책은 모두 5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앞서 살펴본 1장, 2장 「군중 속에서 나를 지키다」, 3장 「19세기의 풍요가 불러온 감시자들」, 4장 「전쟁이 개인의 사생활에 끼친 영향」, 5장 「조지 오웰, 스노든, 다음은?」 등이다. 저자는 연대순으로 프라이버시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지만 "인간은 필연적으로 은둔과 고독을 추구한다."는 기저 인식을 바탕에 두고 있다. 또 인간은 외롭다고 토로하면서도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 외로움을 갈망하는 모순적 존재다. 이러한 복잡한 인간의 내면이 사생활을 절실하게 지키려는 노력으로 이어졌고, 이는 프라이버시의 역사 속에 고스란히 새겨졌다. 사생활이 타인에게 노출되는 것을 격렬하게 싫어하여 줄소송을 감행했던 14세기의 이사벨이나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그런 점에서 같은 생각과 같은 행동을 한다고 볼 수 있다는 게 저자의 논리 전개에 나타나고 있다. 이 책을 완독하면 사적인 시간과 공간이 몇 배 더 소중해지고 더욱 간절해질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고대 사회에서는 개인의 사생활이 공동체의 규범과 가치에 의해 제한되었다고 한다. 신(神)의 존재를 믿는 시대에 개인의 프라이버시란 하찮거나 숨겨야 할 나쁜 비밀로 간주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프라이버시가 정식으로 사회 문제로 부각되는 시기는 인간 중심의 세상 즉, 르네상스와 근대 이후부터라고 추론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근대에 들어서야 개인의 독립성과 자율성이 강조되었다는 말과도 같다.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개인의 사생활은 더욱 중요하게 여겨졌고, 이는 법적, 사회적 차원에서 보호받기 위한 다양한 제도와 관행으로 발전했다. 이는 서양의 시대 구분에 따른 경우이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논어』에 이미 "군자는 혼자 있을 때일수록 개인의 몸과 마음 가짐을 바로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2,500년 전의 일이다. 프라이버시를 강조하는 말은 아니지만 자신을 다스리는 일을 한시도 게을리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대목이어서 프라이버시와는 다소 결이 다르지만 사생활도 중요한 덕목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같은 가르침의 전통은 개인의 사생활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문화적 기반을 마련했다고 이 책은 설명하고 있다.

책의 성격상 프라이버시의 역사적 쓰임새에 대해 상당 부분 기술했지만 집필 의도는 마지막 장에 집중되어 있다고 독자는 이해한다. 4장 「전쟁이 개인의 사생활에 끼친 영향」은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대적 현상과 분석을 통해 프라이버시의 역사를 기술했다면 5장 「조지 오웰, 스노든, 다음은?」은 현대 사회의 사생활도 아직 완전하게 보장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개인의 사생활은 자본과 계급, 사회 환경에 밀접하게 연결돼 있으며, 이는 소셜미디어와 같은 새로운 매체에서도 여전히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소셜미디어는 개인의 정보와 사생활을 공유하는 플랫폼이지만, 동시에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할 수 있는 위험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이중적인 성격은 현대 사회에서 국가와 사생활의 개념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프라이버시 보호 문제가 세계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원인은 첫째, 프라이버시가 일종의 인권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프라이버시가 언론의 자유와 같은 다른 소중한 가치와 충돌할 때 프라이버시의 힘은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둘째, 디지털 혁명으로 이는 개인의 정보 통제에 대한 새로운 도전을 가져왔다. 디지털 혁명의 영향은 처음부터 막연하면서도 광범위하게 인식됐다. 이전의 기술 혁명에서도 각자의 방식으로 개인정보 관리를 국제화했다는 점에서는 유사성이 있었지만 그런 발전만으로는 단일하고 포괄적인 결과를 만들어내기에 충분하지 않았다고 저자는 강조한다.(p.240) 개인의 정보가 온라인에서 쉽게 유통되는 시대에 사생활의 개념을 재정의하는 계기가 됐다. 이처럼 사생활의 역사는 개인과 사회 간의 복잡한 관계를 반영하며, 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해왔다. 5장 발제문에서 저자는 프라이버시의 종말은 1960년대 중반 시작되었다고 전제한다. 1960대 중반부터 미국의 의회 청문회가 사생활 침해에 대한 대중의 우려에 바탕해서 열렸다. 1969년 경제학자인 제리 로젠버그의 책 『프라이버시의 죽음』이 출판되었다. 이 책은 국가 컴퓨터 시스템이 개인들의 다양한 활동에 관한 정보를 부지불식간에 저장하고 서로 결합하여 버튼 하나만 누르면 찾아낼 수 있는 무한에 가까운 능력을 갖추게 될 것이라는 주장을 담았다. 개인의 공간과 정보 통제의 중요성은 여전히 현대 사회에서 중요한 이슈로 남아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논의되어야 한다고 저자는 역설하고 있다. 사생활의 역사는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초가 될 것이란 믿음에 기초해서다.

1970년 영국에서 국가시민자유협의회 후원으로 작성된 디지털 데이터뱅크에 관한 보고서는 사회가 벼랑 끝에 서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보고서는 즉각적이고 급진적인 조치가 취해지지 않을 경우 프라이버시의 종말이 예견된다고 밝혔다. 컴퓨터의 정보 처리 및 저장 능력이 감시 체제의 중심부가 되어 사회를 투명하게 바꿔놓을 것이고 그런 사회에서는 개인의 가정, 개인의 재무 상태, 개인의 인간관계가 수많은 임의의 관찰자에게 그대로 노출될 것이라는 얘기였다.(p.217)

- 「조지 오웰, 스노든, 다음은?」 중에서


프라이버시 위원회 보고서, 일명 ‘영거 보고서’를 발표한 노동당 정치인 케네스 영거 경은 ‘혼자 있을 권리’라는 대담한 선언이 영국에서 새로운 법률 제정의 토대가 될지 회의적이었지만, 개혁을 위한 구체적인 권고 사항은 모두 감시를 피하고 사생활이 함부로 이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개인을 고려한 것이었다.(p.227)

- 「모두가 프라이버시의 죽음을 외치다」 중에서


저자 : 데이비드 빈센트(David Vincent)


유럽의 역사학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갖는 석학. 영국 노동 계층 연구를 시작으로 점차 주제를 확대하여 개인 삶의 다양한 면모를 사회학적, 역사학적으로 탐구하며 저술과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대중의 문해력에 대한 변천사, 개인과 국가의 관계 변화, 중세 이후 변화되어온 프라이버시의 개념, 팬데믹 이후 사회 변화 등 개인의 삶에 밀접한 요소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한다. 그의 연구는 정치 제도와 커뮤니케이션 시스템 등 거대 담론과 개인의 감정과 일상 사이를 오가며 연결 고리를 찾는 것으로서, 결과물은 책과 강연 등으로 보통의 역사가와 달리 적극적으로 대중에게 알리고 있다. 영국의 공립 방송통신대학교인 개방대학교(Open University)에서 오랜 기간 연구와 교육을 이어온 이유와도 무관하지 않다. 영국 왕립 역사 학회와 왕립 예술 학회의 회원이며, 옥스퍼드 대학교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예술, 사회과학 및 인문학 연구 센터에 연구 교수로 재직했다. 국내에 소개된 책으로는 《낭만적 은둔의 역사》가 있다.


역자 : 안진이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대학원에서 미술 이론을 전공했고,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영혼의 순례자 반 고흐》 《헤르만 헤르츠버거의 건축 수업》 《고잉 솔로: 싱글턴이 온다》 《타임 푸어》 《마음가면》 《포스트자본주의: 새로운 시작》 《지혜롭게 나이 든다는 것》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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