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플하게 나이 드는 기쁨
마스노 슌묘 지음, 이정환 옮김 / 나무생각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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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심플하게 나이 드는 기쁨』은 표제어에 나타난 대로 '나이듦에 대하여'에 대한 에세이다. 나이듦이란 늙는다는 의미의 다른 표현일 뿐 늙기 전에 갖추어야 할 자신의 마음과 정신, 삶의 자세를 모두가 바라는 '평안한 노후'를 대비하자는 취지일 것이다. 저자는 일본의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선(禪)의 정원 디자이너로 유명한 마스노 슌묘이다. 승려이자 대학 교수이고 디자이너다. 일본의 승려는 우리와는 다르게 별도의 직업을 가질 수 있다고 들은 바가 있는데 이 때문에 다양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저자는 ‘아무것도 없는 정원’을 디자인하기 위해 늘 고심한다고 한다. 그는 정원 디자인을 의뢰받았을 때 늘 염두에 두는 것은 더 이상 버릴 것이 없는 단계까지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의뢰자로 하여금 ‘아무것도 없는 데에서 느끼는 평온함’에 도달하도록 하는 것이 선의 정원이 지향하는 목표라고 밝힌다.

저자에 따르면 복잡함을 덜어내면 편안함이 뒤따른다. 주변 시선을 개의치 않고, 단조로운 가운데 여유가 생긴다. 또한 복잡함을 덜어내면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것이 보인다. 새로운 내가 보이고, 새로운 사람, 새로운 즐거움이 뒤따른다. 생활에서도 마음에서도 불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줄이고 각자 간소하면서도 편안하고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노년을 구상해 보자는 취지로 집필했다. 심플하게 나이 든다는 것은 세상의 분주함에서 한 걸음 물러나서 현재의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는 데서 출발한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책의 서문인 「들어가며」를 통해 "누구에게나 반드시 찾아오는 것이 늙음이다. 그렇다면 굳이 나이 드는 것에 거역하는 것보다 어떻게 하면 더 지혜롭고 즐겁게 나이 들어 갈 것인가에 마음을 기울이는 쪽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행복한 노년을 살기 위해 중요한 것은 무엇이고 덜어낸 것은 무엇인지, 또 빛나는 말년을 보내기 위해 갖추어야 할 사고방식은 어떤 것인지, 이 책이 적어도 그 힌트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썼다.(p.7)



우리도 한동안 '100세 시대'라고 떠들썩했었다. 이 열풍을 앗아간 가장 큰 이유는 코로나 팬데믹이겠지만, 사실 굉장한 뉴스거리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우리보다 이 열풍이 먼저 불었던 나라라면 일본일 것이다. 일본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장수국'으로 손꼽히고 있고 장수시대 열풍도 수십 년 전 겪었다. 책 속에서 저자는 2021년 통계에 따르면 일본인의 기대수명은 여성이 87.6세, 남성이 81.5세다. OECD 회원국 가운데 일본은 최상위에 있는, 그야말로 장수국가라 할 수 있다.(한국인의 기대수명은 2022년 기준, 여성이 85.6세, 남성이 79.9세다.) 

우리 대부분은 인생 50, 60까지 부지런히 달려왔어도 여전히 부양해야 하는 가족들이 있고, 얽히고설킨 인간관계로 편안함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계속 끌려 다니다가 ‘아뿔싸, 늦었구나!’ 할 때가 온다고 저자 마스노 슌묘는 말한다. 저자는 이 모든 게 단숨에 정리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우선 10%씩만 정리해 보자고 책에서 제안한다. 옷장 속에 열 개의 가방이 들어 있다면 그중 한 개씩 버리거나 정리하는 연습을 하자는 제안이다. 처음에는 10%를 덜어냈지만 나중에는 꼭 필요한 것만 남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단조로움 속에서 느긋하게 웃는 것이야말로 누구나가 바라는 노년, '평안함'에 가깝다고 강조한다.

옷장을 조금씩 정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자는 죽기 전에 하는 생전 정리가 아니라 노인이 되기 전에 ‘노전’ 정리를 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신체의 쇠약함을 느끼기 시작한 이후에 “이제 생전 정리를 해야겠다”라고 하면 만족스럽게 정리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늙기 전에, 몸을 수월하게 움직일 수 있을 때 차근차근 정리를 해야 제대로 할 수 있다. 물론 그게 물건이 될 수도 있고, 마음 가는 사람일 수도 있고, 놓지 못하는 미련이나 집착일 수도 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부분은 건강을 위해서도 노전 정리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60세가 넘어서 ‘이제 운동을 시작해보자’ ‘건강을 챙겨보자’ 하면 늦다고 한다. 운동도 습관이 들어야 60대, 70대가 되어서도 꾸준히 할 수 있고, 수영을 하거나 자전거를 탄다고 하더라도 하루라도 일찍 배워 두어야 노년에 가서도 다치지 않고 운동으로 할 수 있다. 이 사실은 사는 동안 운동의 필요성을 느껴 본 사람이라면 누구도 자각했던 사실이다. 독자 역시 이젠 슬슬 노후 자금도 걱정되고 건강도 걱정될 나이다. 아직 일상을 꽉 채우고 있는 것들을 덜어낼 생각은 없지만 계획을 세울 무렵엔 채우기보다는 비움으로 새로운 즐거움들을 찾아가야겠다는 각오를 이 책을 통해 다질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의 표제어 『심플하게 나이 드는 기쁨』으로 정한 이유를 슬며시 꺼내 놓는다. 지금까지는 정신없이 바삐 살아왔지만 이제는 숨을 고르고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 세계적 추세도 복잡함을 덜어내고 간소함의 미덕을 배워야 할 때라는 지적이 많다. 사실 현대인의 스트레스는 복잡하고 속도가 빠른 변화로부터 오는 것이 클 것이다. 이를 일상에서 매일 감내하고 극복해야 하는 현대인들은 스트레스 속에 매일을 살아야 한다. 심지어는 스트레스를 의식하지도 못한 채 일에 몰두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정신적 불안 등 장애 요인을 발견해 당황하는 사례가 셀 수 없이 등장한다. 정신 장애나 심리학이 부각되는 사회다. 그만큼 사회 문제로 떠오른 것이다. 주범은 스트레스 누적으로 인한 신경증세가 단연 압도적이라고 전문가와 언론은 한목소리를 낸다. 이에 저자의 '심플한 삶'과 '평안한 삶'이 함께 나란히 설 수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저자는 나이 드는 것을 서글프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이 있겠지만, 반대로 나이를 먹어야만 얻을 수 있는 귀중한 시간과 삶의 지혜가 있다고 역설한다. 늙음도 얼마든지 즐겁게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제이자 곳곳에 배어 있는 중심 생각이다. 이 책은 모두 4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나이 들면서 새롭게 알게 된 즐거움〉, 2장 〈나이 들어 더 이해되는 인간관계의 행복〉, 3장 〈건강하고 편안하게 살기 위한 지혜〉, 4장 〈소박함 속에서 다시 배우는 풍요로움〉 등이다.



이 4개의 장에는 각각 11~15개 항목의 소제목으로 나뉘어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구분되어 있다. 책을 읽어본 독자로서 이 책은 워낙 쉽게 기술돼 한 번 쭈욱 훑어만 봐도 이해되고 기억에 오래 남을 정도다. 장을 나누는 것은 형식상의 문제이지 나누지 않을 경우 너무 길게 늘어나는 듯한 느낌을 받을까 우려해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독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쉽게 이해되는 까닭은 일본인과 한국인의 정서가 같은 동양인으로 비슷한 점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일본도 우리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니면 역자가 훌륭하게 번역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역자 이정환은 일본어 번역에는 많이 알려진 번역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일본어뿐만 아니라 일본인의 의식과 우리나라 사람의 의식을 잘 알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훌륭한 번역은 그만큼 독자들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다음으로는 저자가 승려이고 대중에게 삶의 태도나 지혜를 전수하는 일을 한다는 데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일본어로 된 훌륭한 책은 일본인에 대한 민족적 반감보다는 친근감이 드는 경우가 많다. 

나이가 들면서 새롭게 알게 되는 즐거움은 무엇일까? 1장의 표제어다. 독자는 1장의 여러 항목 중 「새로운 자신을 만난다」에 주목한다. 이 제목의 글에서 저자는 나이를 먹으면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다고 전제하며 글을 이끌어간다. "신체는 근력이 쇠약해지고 정신적으로도 집중력이 떨어진다. 젊은 시절에는 간단히 할 수 있었던 일들이지만 나이를 먹으면 그게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것들도 많이 있다." 저자의 논리는 급반전한다. "하지만 그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포기한다는 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포기한다’는 것은 ‘명확하게 판별할 줄 안다’는 것이다. 현재의 자신의 모습을 명확하게 판별하는 것! 나이를 먹어서 할 수 없게 된 것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이제 포기하자.’, ‘이것까지는 아직 할 수 있으니까 시도해보자.’라는 식으로 현재 자신의 능력을 판별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새롭게 할 수 있는 것’들이 보인다."(p.38)



2장 〈나이 들어 더 이해되는 인간관계의 행복〉에서는 「대접을 하며 활력을 되찾는다」가 눈길을 잡아 끈다. 타인을 집으로 초대하면 집안의 활기가 넘칠 수 있다는 말이다. 사실 도시 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은 집으로 사람을 초대하는 일에 익숙지 않다. 그러다 보니 독자도 집으로 사람을 초대한 일이 별로 없었음을 되새겨본다. 겨우 집 사서 이사한 후 동료나 친구들을 초대해 '집들이'와 가까운 동료들과 '2차'로 집에 '초대' 아닌 '습격'한 일은 있었지만 말이다. 저자도 그 점을 의식했을까? 한 사례를 80대, 남편과 사별한 여성 S로 들고 있다. 젊은 나이에 혼자 살면서 이성을 초대하거나 아무 관계도 없는 사이의 사람을 초대할 일은 없을 터다. 책에는 다음과 같이 에피소드가 소개된다. "지인을 집으로 초대하는 습관은 S씨에게 재미있는 변화를 안겨주었다. 그중 하나가 복장에 신경을 쓰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는 양말이 약간 낡았어도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혹시라도 갑자기 지인을 집으로 초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단정한 차림을 갖추게 되었다. 나아가 집 안도 몰라볼 정도로 깨끗해졌다. 정성을 들여 청소하게 되었고 차를 내놓는 식탁은 늘 깨끗하게 정돈하게 되었다. 누군가를 집으로 초대하는 것은 일상에 활력을 준다. 식사 준비를 할 때에도 ‘다음에 지인들을 초대하면 이런 요리를 해줄까?’ 하는 식으로 생각하고, 제과점 등에서 맛있는 과자를 발견하면 자연스럽게 지인들의 얼굴을 떠올릴 것이다."(p.97)

같은 장의 「혼자 여행을 떠나본다」는 무척 인상적이다. 어쩌면 독자도 이 항목의 일들을 오래 기억에 남겨 한 번쯤은 꼭 해보고 싶은 일이다. 혼자 하는 여행은 자신이 가고 싶을 때 가고 싶은 장소로 떠날 수 있고 여행지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어서 좋다는 장점을 먼저 이야기한다. 혼자 하는 여행은 굳이 계획을 짜지 않아도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정하면 된다는 의미에서 매우 자유롭다는 잇점이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혼자 전철이나 버스를 타고 다니다 보면 여행지에 관한 기대감이나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 등, 일상생활에서는 맛보기 어려운 감정이 넘쳐 흐른다고 저자는 제안한다. 익숙하지 않은 탈것들을 타보고 익숙하지 않은 경치를 만나면 마음은 고조되는 까닭이다.

 

3장에서는 일찍 일어나는 습관, 소식(小食), '신체의 말'에 귀 기울이기, 바른 자세, 호흡, 웃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인생 마무리 방법 등 적지 않은 분야에서 부딪치는 삶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다. 저자의 제안대로 실천만 한다면 '삶의 지혜'로 바꿔도 상관없을 일이다. 이 가운데 소식은 일본인들의 '장수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고 독자는 알고 있다. 또 육류보다는 가급적 채소와 생선을 주로 먹기를 권장하는 의사의 처방과도 잘 어울린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배가 부를 때까지 먹지 않는다'는 점이다. 때문에 60이 넘을 경우 소식을 권장한다고 저자는 밝힌다. 또 곧고 바른 자세를 유지할 것을 주문한다. 이밖에도 호흡, 웃음 등 많은 참고 사항을 말한다.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


저자 : 마스노 슌묘(ますの しゅんみょう, 升野 俊明)


1953년 가나가와 현 출생으로, 겐코지建功寺의 주지스님이자 정원 디자이너로 활동 중이다. 또한 다마미술대학 환경디자인과 교수,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 특별교수로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다. 선禪 사상과 일본의 전통 문화를 바탕으로 한 ‘선의 정원’ 창작활동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일본 예술 분야에서 뛰어난 활동을 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예술선장 문부대신 신인상’을 정원 디자이너로서는 최초로 수상하였으며, 독일연방공화국 공로훈장인 공로십자훈장,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 공로상 등 다양한 상을 수상하였다. 2006년에는 <뉴스위크> 일본판 ‘세계가 존경하는 일본인 100인’에 선정된 바 있으며, 주요 작품으로 도쿄 캐나다 대사관과 세룰리언타워 도큐호텔의 ‘일본 정원’ 등이 있다. 국내에 번역된 책으로는 『불필요한 것과 헤어지기』『일상을 심플하게』『오늘, 마음 맑음』 등이 있다.


역자 : 이정환


경희대학교 경영학과와 인터컬트 일본어학교를 졸업했다. ㈜리아트 통역과장을 거쳐, 현재 전문 번역가 및 동양철학, 종교학 연구가, 역학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돈의 맛』 『2억 빚을 진 내게 우주님이 가르쳐준 운이 풀리는 말버릇』 『지적자본론』 『나는 내가 아픈 줄도 모르고』 『구마 겐고, 건축을 말하다』 『사소하지만 강력한 말의 기술』 『오다 노부나가 카리스마 경영』 『적을 경영하라』 등이 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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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떠러지 끝에 있는 상담소 - 우리 모두는 내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이지연 지음 / 보아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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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아웃, 우울증, 화병, 불안, 집착, 열등감 등 여섯 가지 실제 사례를 소설로 재구성했다. 상담심리사와 치유 과정을 함께하며 마음을 바꾼 후 삶이 바뀐 사람들의 이야기가 잘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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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떠러지 끝에 있는 상담소 - 우리 모두는 내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이지연 지음 / 보아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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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 『낭떠러지 끝에 있는 상담소』는 이 책 속표지 맨앞에 '일러두기'처럼 적혀 있는 심리상담소의 이야기를 모티프로 각색하고 창작한 이야기다. 저자 이지연은 "평소 사람의 마음, 뇌과학, 첨단기술에 관심이 많아 우리 누구나 갖고 있는 마음과 감정을 소재로 이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저자는 책의 뒷 부분 〈작가의 말〉을 통해 "누구나 저마다 삶의 서사를 갖고 있고, 그 이야기에서 주인공이다"고 전제하고 "이 소설을 통해 고군부투하며 살아온 자신의 삶을, 그리고 그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조용히 들여보며 어루만지는 시간이 되기"를 독자들에게 당부하고 있다. 

이 소설은 마음을 바꿔 삶이 바뀐 사람들의 이야기다. 독자들은 치유의 현장에서 사람들의 아픈 마음을 치료하는 상담심리사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다양한 마음의 모습들을 들여다볼 수 있다. 병든 마음을 치료하고 무너진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과정은 쉽지 않다. 우리가 흔히 병든 육체를 치료하는 의사는 쉽게 구할 수 있지만, 병든 마음을 치료하는 '정신 건강'은 돈으로도 살 수 없다는 말을 실감케 하는 책이다. 

이 소설을 읽기에 앞서 저자는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라고 질문한다. 돈, 명예, 성공, 가족, 일 등 저마다 다를 것이다. 그렇지만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마음이 무너지면 삶에 대한 의욕을 잃고 결국 삶도 무너지게 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이 때문에 살면서 물질적인 풍요로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이 내 의지를 벗어나 무너지지 않도록 잘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 사회에는 남보다 앞서고 빠르게 달려야 한다는 경쟁심과 욕망, 물질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우리는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시간이 없다. 이는 우리를 병들게 하고 삶에서 진정 중요한 것을 외면하게 한다. 내면에 쌓이는 부정적인 감정은 마치 언젠가는 폭발하는 화산처럼 폭발할 기회를 노리다 반드시 고개를 들어 예기치 못한 일을 감행하기도 한다. 저자는 마음을 다스리고 마음을 다치지 않게 돌봐야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각인하고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문한다. 이 소설 집필의 취지이기도 하다.



이 소설엔 모두 여섯 가지의 사례가 등장한다. 「세상에서 고립된 아이' 현수」 「여자가 되어 엄마를 간직하고 싶은 청년' 세훈」 「기댈 곳을 찾아 헤매는 어른아이, 미희」 「돈과 결혼한 여자, 희진」 「신데렐라가 되고 싶은 남자, 희준」 「거울을 보지 않는 상담사, 유경」 등 6개 에피소드를 통해 마음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치유를 통해 무너진 삶을 일으켜 세우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번아웃, 우울증, 화병, 불안, 집착, 열등감 등 부정적 감정에 대한 '심리학적 고찰'이 되는 셈이다. 저자는 심리상담의 결과를 갖고 독자들이 더 쉽게 이해하고 혹시 모를 마음의 병을 예방하고, 치유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실제 사례를 소설로 재구성(각색·창작)한 리얼리티 심리 소설이다. 쉽게 말하면 실화 소설이라는 것이다. 이 소설에는 우리 누구나 갖고 있는 감정을 대변하는 6명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삶이 무너져 마음의 낭떠러지 끝에 서 있지만, 치유의 과정을 통해 마음을 회복하고 삶이 바뀐다. 

저자는 〈작가의 말〉에서 아픈 마음을 낫게 하기 위해서는 힐링을 넘어 반드시 치유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힐링은 외부로부터 받는 위안이기에 수동적이지만, 치유는 능동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밝힌다. 마음의 치유를 위해서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어루만지기, 자신의 열등한 부분을 받아들이기, 자신의 마음을 어루만지기, 퇴행을 극복하기,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통합하기 등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자신의 노력을 요청하고 있다. 이 소설은 치유의 현장에서 사람들의 아픈 마음을 치료하는 직업을 가진 상담심리사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다정한 마음의 모습을 들여다본다. 병든 마음을 치료하고 무너진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겨운 과정에서 독자들의 카타르시스를 이끌어낼 감동적 사연도 자주 등장한다. 

특히 표제어에 등장한 '낭떠러지 상담소'의 상담심리사 역시 소설 속 한 사람의 실제 사례로 등장해 마음의 병을 앓는 '환자와 함께하는 치유자'라는 인식을 독자들에게 심어줄 수 있어 호응도 배가된다. 마음의 병을 앓아본 사람이 환자들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아주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일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사례자 '유경'이 상담심리사이자, 그 자신 역시 심리적으로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 앞에서 사례적으로 살펴본 부정적 감정 중의 하나인 '열등감' 때문이다. 이는 소설 속 마지막 사례 「거울을 보지 않는 상담사, 유경」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유경은 미국으로 떠나기 전 유학원에서 상담도 받고 책을 찾아보면서 미국에서 심리학을 공부하기 위한 정보를 수집했다. 마침 준호가 유학 중인 시카고에 꼭 만나고 싶어 했던 밥 교수가 교수로 있는 대학이 있었다. 유경은 일단 가격이 저렴한 시카고에 있는 칼리지 대학에 들어가서 2년 과정을 마치고, 밥 교수가 있는 대학으로 편입을 목표로 준비했다. 유경은 결혼식을 마치고 지원한 칼리지 대학에서의 비자가 허락되어 미국으로 향했다. 엄마가 남겨주신 소중한 돈은 학비의 일부로 보태 유용하게 쓰였다."(p.304) 

유경은 학업과 결혼생활을 병행하면서 결국 노력 끝에 7년째 되었을 때 한국으로 귀국했다. 유경은 귀국 후 한국상담연구소에 상담심리사로 취업해 자신이 그렇게 바라던 상담사로서의 첫발을 내딛었더, 그리고 기관에서 상담사로서 크게 인정을 받고 5년째 되던 해 독립해 '마음서고 심리상담소'를 차렸다. 부유한 집안의 며느리, 해외 유학을 다녀온 유능한 상담사, 능력 있는 남편의 아내라는 겉으로 내세우기 좋은 모습만을 자신으로 인정하고 싶은 것이다. 

심리상담소장 유경은 어느 날 딸이 선물한 거울을 보며 지난 과거를 돌이켜본다. 문득 거울 속에 비친 현재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거울을 본 것은 준호와 결혼하고 나서 처음임을 자각한다. 유경은 준호와의 결혼으로 완전히 새로운 인생의 장이 펼쳐졌다. 자신의 초라하고 어두운 과거를 완전히 지우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리고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미국 유학생활을 할 때도, 한국에 귀국해 상담사 일을 할 때도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과거를 일절 말하지 않았다. 유경은 내담자들에게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마주하고 자신의 어둡고 열등한 면도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고 늘 말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그렇지 못했다고 깨닫게 된다. 겉으로 드러난 자신의 현재 모습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과거의 어두운 모습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고 싶었다.



유경은 상담심리사로서 다른 환자들과의 상담 치유를 하는 것처럼 자신이 부정하고 지워버리려 했던 마음 한구석에 처박아버린 어린 유경에 대한 기억을 꺼내 어루만졌다. 한없이 외롭고 고통스러웠던 자신의 어둡고 열등한 자아를 꼭 껴안아 주었다. 그러자 꼭꼭 숨기고 싶던 자신의 모습이 오히려 없어서는 안 될 존재처럼 소중하게 느껴졌다. 유경은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가장 어렵고 또 가장 필요한 일임을 새삼 깨달았다.(p.307)

책에 따르면 인간은 이성보다 감정의 지배를 받는 존재다. 그리고 감정은 우리 삶뿐만 아니라 사회,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남보다 앞서고 빠르게 달려야 한다는 경쟁심과 욕망, 물질에 대한 집착이 우리 개인은 물론 사회적 정서를 집어삼키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조현병에 의한 살인, 은둔형 외톨이, 왕따, 우울증, 공황장애 등이 해가 갈수록 증가하며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근본을 들여다보면 공통적인 원인을 발견할 수 있다.

「세상에서 고립된 아이, 현수」의 주인공 현수는 어렸을 때 엄마가 집을 나가고 아빠와 둘이 사는 고2 학생이다. 아빠는 현수를 방치해 현수는 학교와 집에서 문제아이자 외톨이다. 현수는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전혀 없어 세상과 격리된 채 게임을 친구로 삼아 컴퓨터만 끼고 산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때로 폭력을 행사하고 문제를 일으킨다. 현수는 세상과 전혀 소통할 수 없어 은둔형 외톨이가 되어 간다. 현수는 학교에서 퇴학을 당할 뻔하지만, 그의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으로 학교에서 마지막 기회를 주어 상담소로 오게 된다.

「여자가 되어 엄마를 간직하고 싶은 청년, 세훈」의 주인공 세훈은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어렸을 때 부모가 이혼을 해서 엄마의 정이 몹시 그리운 애정결핍의 청년이다. 감성적이고 정서적으로 여자인 세훈은 여자가 되고 싶지만, 완벽주의에 보수적인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힌다. 이로 인해 아버지와 사이가 극도로 좋지 않다. 더욱이 아버지는 성전환을 하려는 그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그를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시킨 적이 있다. 자신의 문제를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세훈은 내면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대상이 필요해 상담소를 찾게 된다.



「기댈 곳을 찾아 헤매는 어른아이, 미희」의 주인공 미희는 알코올 중독자이고, 사이비 종교에 심취해 있는 40대 주부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에 의해 잘난 여동생과 모든 것을 비교당하며 살아온 미희는 항상 주눅이 들어 있고, 매사에 결정을 잘 내리지 못해 자신의 문제를 다 해결해줄 것처럼 보이는 그 무엇인가에 의존하며 산다. 그것이 처음에는 마시면 모든 것을 잊게 해주는 술이었고, 그다음으로 찾은 것이 사이비 종교다. 이로 인해 미희의 남편은 인내심의 한계에 부딪혀 이혼을 고민하며 마지막 기회를 준다는 심정으로 미희를 데리고 상담실을 찾아온다.

「돈과 결혼한 여자, 희진」의 주인공 희진은 미모의 여성으로 아버지 사업이 망해 가난에 시달리다 돈이 많은 집안에 시집을 간 신데렐라 여성이다. 그러나 외부에서는 전혀 모르는 자신을 무시하는 시댁, 남편의 폭력 등 불행한 결혼생활로 인해 불면증과 우울증으로 시달리다 탈출구의 방편으로 상담소를 찾아와 상담을 시작한다. 「신데렐라가 되고 싶은 남자, 희준」의 주인공 희준은 외도로 이혼을 하고, 이혼녀인 여자친구와 결혼을 생각했지만 여자친구가 의사와 재혼을 하는 바람에 독신이 된다. 그러나 명문대 출신의 약사인 여자친구를 잊지 못해 공허함과 외로움으로 상담실을 찾게 된다.

「거울을 보지 않는 상담사, 유경」의 주인공 유경은 앞의 5명의 내담자들을 상담해주는 심리상담센터의 소장이자 상담사다. 앞서 언급한 대로 지금은 10명의 상담사를 둔 상담센터의 소장이자 부유한 집안의 며느리이지만, 그녀에게는 상담사가 된 기구한 사연이 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어느 누구에게도 밝힌 적이 없는데, 그녀의 에피소드에서 그것이 밝혀진다.

각자의 사연을 가진 내담자들은 어떻게 자신의 무너진 마음과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세상으로 나아가게 되는지 차분한 마음으로 읽을 것을 먼저 읽은 독자로서 권유한다. 차분하지 않다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내담자들의 가족이 내담자로 인해 받은 상처와 고통을 어떻게 치유하고 그들과 관계를 회복하게 될지 깨닫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선생님, 남편이 술을 마셔서 그랬어요. 술을 마시지 않으면 저에게 그러지 않아요.”

희진은 매 맞는 아내들이 자신은 폭력의 희생양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할 때 하는 변명을 똑같이 내세웠다. 희진은 자신이 선택한 결혼생활이 실패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술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희진을 바라보며 유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어서 유경은 지금 희진이 어떤 생각과 감정이 드는지를 물었다. 그러나 희진은 한참 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유경은 희진이 건네는 침묵의 답변에 함께 침묵했다. 이윽고 희진이 입을 열었다.

“정말 믿어지지가 않아요. 지금 이 모든 것들이요.”

희진의 말은 내담자들이 자신이 믿고 있었던 진실, 신념들이 깨졌을 때 내뱉는 말이었다. 유경은 내담자들이 자신의 왜곡된 신념들을 재정의하는 과정을 수없이 보았다. 희진도 이제 그 과정의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어떤 점이 믿어지지 않나요?”

혼란스러움에 빠져 있는 희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유경은 희진이 말한 믿어지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제가 가정폭력의 피해자라는 사실이요. 남편은 내가 얼마나 돈에 집착하는지를 알기 때문에 돈으로 자신의 폭력을 무마했던 거예요. 왜 요즘 한창 난리 난 가스라이팅 있죠. 생각해보니 저는 지금까지 가스라이팅을 당해온 거 같아요.”

희진은 마침내 자신의 돈에 대한 집착이 자신의 삶에서 많은 것들을 잘못 선택하도록 했음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희진은 현재 비극적인 영화 속의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여주인공이나 마찬가지였다. 유경은 희진의 앞으로의 삶이 해피엔딩으로 끝나기 위해서는 그녀가 올바른 선택을 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pp.186-187) 「돈과 결혼한 여자, 희진」 중에서


저자 : 이지연


이화여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졸업. 고전 마니아. 시공간을 뛰어넘어 살아남은 고전처럼 좋은 책을 쓰고 싶은 꿈을 갖고 있다. 평소 사람의 마음, 뇌과학, 첨단기술에 관심이 많아 우리 누구나 갖고 있는 마음과 감정을 소재로 이 소설을 쓰게 되었다. 이 소설은 마음이 무너진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며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독자들에게 질문을 건네고 있다. 또한 우리 누구나 살면서 마음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되지만, 그때 어떻게 그 순간들을 건너가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삶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있다. 앞으로도 한 번뿐인 삶에서 가치 있는 것들을 추구하는 과정을 소설을 통해 독자들과 함께 나누려고 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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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세계사 - 생명의 탄생부터 세계대전까지, 인류가 걸어온 모든 역사
허버트 조지 웰스 지음, 육혜원 옮김 / 이화북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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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인류의 세계사』는 『타임머신』, 『투명인간』, 『우주전쟁』 등 세계적인 명작을 남긴 허버트 조지 웰스가 저술한 역사서다. 이 책은 웰스가 자신만의 통찰력으로 저술한 역사서이지만 인류의 기원부터 현대까지 인류가 지구상에서 해온 일을 일목요연하게 풀어쓴 명저로 손꼽히고 있다. 웰스는 이 책이 출간된 해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등 수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개인적으로 독자도 어렸을 때 완역판은 아니지만 발췌본으로 나온 『타임머신』, 『투명인간』 등을 읽은 기억이 있다. 오웰의 과학적 상상력은 독자들을 과학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데 월등한 기여를 함으로써 'SF 문학(과학 소설)의 창시자'로 불리운다. 이 책은 역사, 철학, 종교를 아우르는 인류사의 치열한 고민들을 담아냄으로써 아인슈타인에 의해 인류 문명의 발전을 이해하기 위한 역사책으로 추천되기도 했다. 특히 이번 개정판에는 200여 개의 이미지 자료와 지도를 수록하며 세계사의 결정적 순간들을 모두 담아냈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독자도 이 책을 받아든 순간 사진과 그림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금세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생동감 있는 이미지를 보고서다. 높은 해상도의 사진과 그림들은 살아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주고, 독자들에게는 역사적 사실을 다시 한 번 사실로 각인시키는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다. 아마 발전된 편집 능력과 인쇄술의 혜택도 작용했을 것이다. 

『인류의 세계사』의 이번 개정판은 200여 개의 시각 자료와 지도를 수록하며 세계사의 결정적 순간들을 모두 담았다. 인류의 위대한 모험을 함께하는 우리 모두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는 이 책은 역사적 사건들이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고, 세계사의 흐름이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 소설처럼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조지 오웰, 버트런드 러셀 등 수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준 책으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역사를 바라보는 웰스의 객관적인 통찰력으로, 초판 출간 당시 나치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다는 사실은 역사서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에피소드이자 증거로 역할을 해내고 있다.



「허버트 조지 웰스, 아인슈타인을 설득하다」란 제목의 개정판 책의 〈서문〉에서 앞서 언급한 세 명의 저명 인사에 미친 영향을 그들의 입을 통해 들어보는 기회가 제공된다. 〈서문〉에 따르면 『동물 농장』의 저자 조지 오웰은 그에게 큰 영향을 받았는데 웰스를 "너무 제정신이어서 현대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도 허버트 조지 웰스의 작품을 사숙하며 소설과 과학을 익혔다고 말했다. 로켓 공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로버트 고다드는 웰스의 『우주전쟁』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우주개발에 뛰어들었다. 그는 인류 발전에 끝없는 비전을 제시했으며 '어두운 진실'을 예언했다.

〈서문〉을 쓴 사람은 웰스는 아니지만 이번 개정판의 편집자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는 '어두운 진실'의 이야기도 여기에 실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한 달 전인 1939년 헝가리 태생의 미국 물리학자 실라르드 레오(1898~1964, 헝가리는 우리처럼 성이 앞에 오고 이름이 뒤에 온다)는 헝가리 태생의 미국 물리학자다. 1933년에 핵 연쇄 반응을 발견하여 핵 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는 길을 열었고, 1939년에는 아인슈타인과 함께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아인슈타인-실라르드 편지를 보내 핵무기 개발을 비밀리에 건의하여 맨해튼 계획을 추진한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그 역시 아인슈타인처럼 유대인이다. 베를린-카를로텐부르크 공과대학교에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막스 플랑크, 막스 폰 라우에 등의 물리학 강의를 들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부터 아인슈타인과의 인연이 있었다고 한다. 실라르드는 1933년 나치의 유대인 사냥에서 벗어나 런던으로 건너왔다. 바로 그 무렵 그는 핵에너지의 실용화 가능성을 부정하는 어니스트 러더퍼드의 글을 타임스에서 읽고 그의 속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바로 1년 전에 실라르드는 H. G. 웰스의 1914년 과학 소설 『해방된 세계』에서 인위적 핵붕괴를 이용하는 "원자탄"에 대한 공상과학적 묘사를 읽고 웰스의 상상력에 공감하였다. 그해 1933년에 실라르드는 핵 연쇄 반응 제어를 설계하고 이듬해에 이에 관한 특허를 출원하였다. 이렇게 해서 핵 연쇄 반응의 평화적 이용과 전략적 이용의 길이 열렸으나, 이러한 실라르드의 공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고 한다.



책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실라르드는 독일에서 망명한 유대인 과학자로서 히틀러의 위험성을 잘 알았다고 한다. 그는 아인슈타인에게 원자폭탄이 생겨나는 것은 시간문제이니, 최소한 히틀러보다는 빨리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원자폭탄의 개발이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실라르드의 설득에 아인슈타인도 결국 원자폭탄의 가능성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낸다. 역사적인 맨해튼 계획의 시작이었다. 오웰은 당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예언가'로 불릴 정도로 통찰력과 영향력을 지닌 사상가였다. 하지만 세상은 그의 상상력을 뛰어넘었다. 자신이 예측한 년도에 우려했던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원자폭탄이 실제로 사용되는 것을 목격하자 말년에는 비관주의자가 되고 만다. 

"우리가 전쟁을 끝내지 않는다면 전쟁이 우리를 끝낼 것이다. 모두들 그렇게 말하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동감하지만 아무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미래를 만들어나가고 있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자의 운명은 그 미래에 압도당할 운명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그는 자신의 책 개정판에 〈서문〉을 추가한다. "더는 할 말이 있는가? 이제는 내 묘비명밖에 없다. 내가 말했잖아, 이 바보들아.(I told you so. You dammed fools.) 

아인슈타인은 인류 문명의 발전을 이해하기 위한 역사책으로 이 책을 추천했다.(Education and World Peace, A Message to the Progressive Education Association, 23 November 1934) 아인슈타인은 〈추천사〉에서 저자 "웰스는 역사를 살아가는, 살아가야만 했던 '사람'에 집중했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이 생각햇던 사상, 철학, 종교와 치열한 고민들을 담았다. 웰스가 과학 소설로 유명했듯 세계사 역시 소설을 읽듯 단숨에 읽을 수 있게 썼다. 세계사의 단편이 아닌 전체적인 흐름 자체를 담았다"고 평가했다. 이후 웰스는 3권 분량의 『세계사 대계(The Outline Of History)』를 집필하여 당시 200만 부가 팔리며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른다. 역사에 더욱 몰두한 그는 내용을 다듬고 간추려 이 책 『인류의 세계사』를 출간했는데 대중을 상대로 한 최초의 한 권짜리 역사 책이었다고 이 책의 〈서문〉은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모두 10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생명의 탄생」 2장 「인류의 기원」 3장 「문명의 발생, 고대 국가의 출현」 4장 「고대 철학과 사상」 5장 「천년 제국, 로마인 이야기」 6장 「중세 유럽과 아시아」 7장 「종교개혁과 패권 다툼」 8장 「시민혁명과 산업혁명」 9장 「제국주의와 세계대전」 10장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 등이다. 한국어 번역판이어인지 「한국사 세계사 비교 연표」가 눈에 띈다. 400페이지에 가까운 분량으로 고등학교 때 배운 세계사 교과서가 생각나기도 한다. 역사에 통찰력을 갖고 있는 웰스지만 이 세계사 책은 서양 중심에 치우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세계의 중심이 된 가장 발전된 문명은 유럽 중심의 세계관이었으니 그랬을 것이란 추정은 가능하다. 아예 동양사를 뺀 것은 아니지만 다루는 페이지도 적을 뿐 아니라 저자 웰스가 연구하고 탐구한 느낌은 별로 없는 것은 독자가 동양인이고, 역사 지식이 부족해서일까? 기술 내용으로 독자가 판단하기엔 깊은 연구는 없었던 듯한 느낌이다. 연대순으로 본 「한국사 세계사 비교 연표」는 원래 초판에 실린 것인지 후에 번역 개정판에 우리 출판사 측에서 붙여 넣은 것인지는 독자로서는 알 수 없다. 세계 속의 한국을 들여다보는 일은 꼭 필요한 일인 것 같아 편집진에게 감사해야 할 일일지도 모르겠다. 

유럽 중심의 역사서지만 세계 인류의 역사 속 활동은 감탄을 자아낸다. 그것은 웰스에 대한 역사 통찰력이 작용한 탓으로 이해된다. 웰스는 아인슈타인의 〈추천사〉에서 말한 역사를 살아갔던 ‘사람’에게 집중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역사의 흐름에서 기점이 되었던 사건들은 물론 당시 시대를 살아갔던, 살아가야만 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삶 자체에 집중한다는 것이 역사를 보고 이해하는 올바른 관점이 아닐까 하는 자각심도 생긴다. 한다. 웰스의 역사 관점은 역사란 무엇이고, 인류의 역사는 어떤 것이었는지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 것이 분명한 이상 역사서 기술의 한 모델로서 충분한 자격을 갖고 있다는 평가에 독자는 공감한다.



세계사 책 가운데 생명의 기원이나 인류의 기원을 함께 다룬 것은 독자로서는 이 책 『인류의 세계사』이 처음이다. 세계사는 유사 이후의 인류의 발전 과정을 통해 문명 발전에 초점을 두고 기술하기 때문에 확실한 기록이나 남아 있는 유적을 통해 과거사를 파악하고 있다. 문자나 그림 등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은 시대의 상황을 고고학이나 인류학 등을 통해 가설을 인정하고는 있지만 과학적 사실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실정이다. 이런 가운데 이 책은 생명의 탄생과 인류의 기원에 대해서 언급한다. 이 점은 세계사를 기술하는 책에서는 흔히 있던 일이 아닌데 웰스는 과감하게 이를 세계사 시작 단계에 끼워넣음으로써 인류의 발전을 조망하고 있다. 현재 인류의 기원은 현생 인류가 어디에서부터 왔는가? 하는 것은 단일 지역 즉, 아프리카에서 기원했다는 설과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기원했다는 설로 나뉘는 상황이다. 또 생명의 기원설도 아직은 확실히 밝혀내지 못한 상태라고 한다. '생물학의 뉴턴'으로 불리는 찰스 다윈은 1831년에 비글호를 타고 5년 간 세계 일주를 할 때 라이엘의 지질학 원론을 탐독함으로써 광범위한 지질학적, 식물학적, 동물학적 자료를 수집했다고 알려져 있다. 다윈은 아메리카 대륙을 남하함에 따라 극히 가까운 종들이 조금씩 바뀌어 가는 것을 보았다. 또한 다윈은 육지에서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동태평양의 갈라파고스(Galapagos) 제도의 섬들에서 참새와 비슷한 되새류가 30여 종이나 있음을 보았다. 이들은 육지에서 보았던 되새류와 비슷하기는 하나, 부리 모양이 달랐으며 섬끼리도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다윈은 어떻게 30여 종의 비슷한 새들이 격리된 섬에서 살게 되었는가에 대한 의심을 갖게 되었으며, 이것이 우연이기보다는 아마도 아주 오래전에 한 종류의 새가 이 섬으로 날아온 후 세월이 지나면서 서로 다른 형태로 변했으리라고 추측했다. 다윈의 진화론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비록 짧지만 매우 조리 있고 설득력을 가진 생명과 인류의 기원을 생명체-바닷속-어류-육지 등의 진화론에 맞춰 생명이 인류로까지 진화하는 단계를 독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비록 과학계 정설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추정하는 바에 웰스는 공감했던 듯하다. 웰스는 이 책을 통해 과학의 세계에 통찰력과 상상력을 불어넣어 현실화되는 과정을 추적하는 세계사 기술을 시도함으로써 설득력 있는 역사 기술의 한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 더욱이 이 책은 그가 상상력으로 그려낸 과학의 세계가 굵직한 인류 문명사와 잘 맞아 떨어지는 점을 보고 '예언자'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통찰력을 가진 인물임을 확인하게 해준다.



고의로 전쟁을 일으키며 사람의 생명을 놓고 도박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생명을 걸지 않는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끔찍한 전쟁이 끝났지만, 그 어떤 것도 종결되지 않았고 시작되지도 않았으며 해결된 것도 없었다. 모든 전쟁을 끝내고자 전쟁을 시작했지만 전쟁을 끝내기 위한 또 다른 전쟁이 생겨났을 뿐이다.(p.365)


저자 : 허버트 조지 웰스(Herbert George Wells)


과학 소설(SF)로 유명한 영국의 소설가이자 문명 비평가이다. ‘타임머신’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작가로, 과학 소설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손꼽히고 있다. 또한 역사, 정치, 사회에 대한 여러 장르에도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1866년 영국 켄트주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이혼과 아버지의 파산으로 학업을 그만두고 포목점과 약국의 수습 점원으로 일하며 생계를 꾸렸다. 미드허스트 문법학교의 보조 교사로 채용된 데 이어 사우스켄싱턴 과학사범학교에 국비 장학생으로 입학하며 뒤늦게 학업에 정진하지만 생물학과 동물학 외의 다른 과목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해 과정 도중 학교를 떠난다. 이후 다시 공부를 시작해 런던대학을 졸업한 후 유니버시티 코레스폰던스 칼리지에서 생물학 강사로 재직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한다.

학창 시절 『사이언스 스쿨 저널』에 연재한 단편소설 「크로닉 아르고 호」를 퇴고하여 『타임머신』으로 출간하였다. 『타임머신』의 큰 성공 이후 『모로 박사의 섬』, 『투명 인간』, 『우주 전쟁』, 『세계사 대계』 등을 연이어 발표하며 ‘SF의 창시자’로 자리매김하였다. 이와 동시에 정치학과 사회문제 분야까지 두루 아우르는 글을 저술했으며 당대 최고의 지식인 중 한 사람으로 꼽혔다. 다양한 주제와 장르를 다룬 200여 권에 달하는 저서를 남겼다.


역자 : 육혜원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독일 베를린자유대학교에서 정치학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화여자대학교, 고려대학교, 경희대학교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왜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셨을까?』, 『보편주의』, 『좋은 삶의 정치사상』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니체』, 『미래전쟁』, 『영웅본색』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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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 워크 - 가정과 자유 시간을 위한 투쟁의 역사
헬렌 헤스터.닉 서르닉 지음, 박다솜 옮김 / 소소의책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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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애프터 워크』는 「가정과 자유 시간을 위한 투쟁의 역사」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다. 표제어에 쓰인 워크(work)에 대한 풀이다. 즉 이 책은 집안일(가사)로 여념이 없는 여성의 노동 시간과 관련한 투쟁의 역사를 살펴본다는 의미다. '가정'이라 하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식구들이 함께하며 쉬고, 먹고, 놀고, 자는 곳이라는 이미지로 뇌리에 박혀 있다. 어디든 인간이 머무는 곳은 청소라는 '일'이 따르게 마련이다. 일을 하기 위해 모인 회사도 마찬가지다. 일하는 동안 생긴 잡동사니나 휴지, 쓰레기를 치워야 다음날 깨끗한 곳에서 또 일을 할 수 있다. 일터에서 발생되는 '청소일'은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청소일 하는 사람에게 별도의 경비를 지급하며 처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정에서의 일은 다르다. 육아, 가정 교육, 놀고 먹는 데도 당연히 청소라는 뒷처리가 필요하다. 조상들이 해왔던 것처럼 으레 여성(주로 어머니)의 몫이다. 사실 청소나 빨래는 그렇다쳐도 육아나 가정 교육은 아이의 장래로 봐서나, 집안의 미래로 봐서나 굉장히 중요한 몫이다. 아이가 젖을 떼고 걸을 때쯤 되면 더 많은 시간이 육아에 필요해진다. 늘 움직이려는 아이를 에기치 않은 사고나 문제로부터 보호하려면 뒤를 따라다녀야 할 지경이다. 어느 집안이나 겪는 일이다. 이것도 여성의 몫이다.

이 책은 인간에게 일은 무엇이고, 어떤 의미인지를 탐구한다. 일의 성격과 규정을 명확히 파악해둬야 일에서 파생되는 각종 문제의 해결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 임금노동에 스스로 복종하는 사회구조를 만들어왔다. 그 안에서, 일하는 시간을 줄이고 삶의 질을 높이고자 하는 탈노동의 요구는 역사적으로 볼 때 근대 이후의 일이다. 노동에 관련된 문제가 발생될 때는 늘 하던 대로 남성 위주의 산업과 일자리에만 집중해왔다. 그도 그럴 것이 생계를 위한 임금 문제나 일자리 문제 등은 가정의 문제일 뿐 아니라 사회적 문제이고, 국가적 문제와 직결되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는 흔히 가사노동으로 대표되는 ‘사회 재생산 노동’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육아나 교육 등은 관련 기관에 돈을 주고 전문적인 보호를 받으면 된다. 물론 국가가 챙겨줘야 할 일이다. 그러나 나라가 가난할 때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라 가정의 문제는 임금 노동이란 개념에서 아예 빼버린 것이다.


이 책 『애프터 워크』는 탈노동 프로젝트에 관한 것을 다룬다. 가정에서의 일, 즉 가사는 모두 이에 포함된다. 당연히 노동 문제를 다루며 정책을 만들 때 포함되어야 하는데도 이는 사회에서 문제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탈노동 프로젝트'의 중심 개념은 가사도 우리가 말하는 노동 문제에 포함해 함께 다뤄야 한다는 주장이다. 공동 저자 헬렌 헤스터와 닉 서르닉(이하 저자)은 가정이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의 변화를 살펴보고 우리의 미래를 내다보는, 더없이 소중하고도 긴급한 이야기를 이 책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요리, 청소, 육아, 돌봄 등과 같은 무보수 가사노동이 어떻게 이전의 전통 사회보다 현대 생활에서 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는지를 역사적으로 살펴보고, 그와 관련된 장벽과 난관, 불평등 문제를 꺼낸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재생산 노동 담론'에서 가장 필요한 네 가지 요소, 즉 기술의 발전, 사회적 기준 강화, 가족 형태의 변화, 주거 공간의 실험에서 제기된 다양한 주장과 시도를 사례로 들면서 지금보다 더 자유롭고 자기 주도적인 삶을 위한 실천적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인간에게 일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일은 어떤 형태로 우리를 속박할까? 이를 살펴보는 것은 일을 임금으로 환산해 가족의 생계를 위한 돈으로 지급하는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분석이기도 하다. 현대 사회에서 일은 직장에서 필요한 일을 혼자, 또는 공동으로 함으로써 사전 계약된 임금을 받는다. 구석기나 신석기 시대인 유사 이전의 역사로 되돌아가보면 공동으로 사냥한 후 각자에게 배분된 몫을 받아 각 가정으로 돌아가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원리로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인 현대의 사회 시스템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생존하기 위해, 즉 임금을 받기 위해 스스로 노동(일)에 복종한다. 그것은 또한 다른 사람이나 조직에 시간을 팔아넘기고 통제권까지 넘겨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는 길바닥에 나앉아 배를 곯고 빈곤하게 살게 될까봐 두려워서 일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처럼 굉장히 체계적으로 짜여진 대한민국 사회에서 일에 대한 불안감이 그 어느 때보다도 팽배해지고 있다. 일자리 부족 현상이다. 훨씬 많은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일자리가 없다는 것은 크게 보자면 사회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는 심각한 문제이다. 더욱이 많은 이들이 인공지능과 자동화 같은 혁신적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인간의 일자리가 급격히 줄어들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고 있다. 또 실제 적용되는 많은 예를 우리는 듣고 보고 있다. 



이런 까닭에 더 적게 일하고 시장에 대한 의존을 줄이려는 새로운 탈노동 사회로의 길을 모색해야 할 때라는 게 공동 저자(이하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에 따르면 급격한 사회 변화 속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임금노동이 아니라 미래의 노동자를 키워내고, 현재의 노동인구를 재생시키고, 일하지 못하는 사람을 부양함으로써 사회 자체를 재생산하고 유지시키는 ‘사회 재생산’이라는 일이다. 하지만 재생산 노동, 즉 육아, 돌봄 등 잡다하고 단순해 보이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집안일 등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활동은 탈노동 담론에서 ‘진짜’ 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묵살되어 왔다. 오랫동안 가사노동에는 금전적 이득과 구별되는 프레임이 씌워져 있었다. 돌봄 노동은 가족에 대한 사랑의 노동으로, 가정은 외부 세계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는 휴식의 공간으로 간주되고 여성이 주도적 역할을 맡아왔다.

그럼에도 고착화되고 그릇된 편견이 지배하는, ‘기계가 아니라 살갗을 만지는 일’은 그 규모와 중요성이 나날이 커져가고 있다. 실제로 가정 내에서 이루어지는 무보수 재생산 노동의 양은 어마어마하다. 2014년 한 해 동안 영국에서는 장기 무보수 돌봄 노동에 81억 시간이 소요되었고, 미국인들은 알츠하이머를 앓는 가족을 무보수로 돌보는 데에만 180억 시간을 썼으며, 국제노동기구(ILO)에서는 데이터를 보유한 64개국에서 하루 동안 이루어지는 무보수 노동시간이 164억 시간에 달한다고 추산한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국민 전체 노동시간의 45~55퍼센트가 무보수 재생산 노동에 사용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주로 서방세계에 속한 고소득 국가들에 초점을 맞추었다. 저자는 이번에 출판한 한국어판 〈서문〉을 통해 대한민국의 현실에 대해 더욱 우려를 표하고 있다. 과로에 반대하고 자유 시간의 젠더 불평등을 강조하는 측면에서는 이 책이 한국에 유독 적합하다고 지적한다. "한국은 긴 근로시간으로 악명이 높다. 2022냔 힌 헤 동안 한국의 노동자는 평균 1,901시간을 일했는데, 이는 독일 노동자가 일한 시간보다 560시간이나 길었다. 한국 노동자의 주당 근로시간은 세계에서 가장 긴 수준이다. 기업 측에서는 법적으로 허용되는 주당 근로시간을 주 52시간에서 주 69시간으로 늘리라는 압박을 가했으나, 노동조합과 청년들의 저항으로 겨우 저지되었다.



이 책은 ‘사회 재생산 노동’으로 일컬어지는 가사노동을 둘러싼 여러 담론과 논쟁, 그리고 열정적인 투쟁과 획기적인 실험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불평등하고 억압적인 현실에서 벗어나 개인의 자유로운 활동을 극대화하는 실천적 대안을 내놓는다. 물론 그 핵심은 가사노동을 어떻게 줄일 것인가이다. 자본주의 체제하의 노동 문제를 다방면으로 연구해온 저자는 이 책에서 모든 사람이 일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성차별적인 가사노동을 공평하게 분담할 수 있는 효율적인 대안을 제시하기를 꾀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지난 몇 세기에 걸친 변화를 추적, 많은 사례를 바탕으로 재생산 노동의 핵심 사안을 흥미롭게 풀어놓는다.

탈노동 관점에서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기술의 발전’이다. 냉장고, 식기세척기, 진공청소기, 오븐 등 각종 가전제품이 집 안에 가득 들어차 있는데도 가사노동의 총량이 줄어들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의 스마트 홈 기술은 가정을 해방적으로 변혁시킬 수 있을까? 이러한 가정 기술을 둘러싼 여러 논의와 주장에 뒤이어 저자들이 주목하는 것은 청결, 안락함, 육아, 그리고 전반적인 분주함에 대한 사회적 기준이 어떻게 강화되고 표준화되었느냐이다. 이에 대해서는 가정 내 청결, 말쑥한 몸단장, 육아 등의 규범이 점점 더 많은 것을 요구하면서 보편화된 결과 노동시간이 그 기준을 만족시키고 더 많은 결과물을 내는 데 투입되었다고 말한다.

이와 함께 가족 형태가 변화하면서 어떻게 생계 부양자/가정주부 모델이 남녀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강압적인 제약을 가하고 있는지, 관습적 단위인 ‘가족’이 언제까지 가사노동과 돌봄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지, 그 해법이 무엇인지도 깊이 생각해볼 대목이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주거 공간에 대한 흥미로운 건축적 제안과 소규모의 실험 사례를 소개하면서 주거 환경에 대한 인식 변화가 새로운 상상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앞서 논의된 내용을 바탕으로 세 가지의 핵심 원칙, 즉 공동 돌봄, 공공 호사, 시간 주권의 개념을 설명하고 실천적 방법을 제시한다. 탈노동 사회로 가는 길은 결코 순탄할 수 없다. 끊임없는 환경 변화와 서로의 이익이 상충하는 장애물이 동반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말하듯, 그것은 한없이 프로메테우스적인 과정의 일부이고 궁극적으로는 시간을 해방시키고, 인류의 발전을 이끌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악명 높은 근로시간, 최하위권의 워라밸 지수, 만성적 과로와 젠더 불평등, 가사노동의 불균형으로 인한 여성의 상대적 박탈감 등이 심각한 지경에 이른 대한민국 사회에서 이 책은 무척이나 도발적이고 유용하게 읽히면서 많은 물음표를 던진다.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는 결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일이 끝난 뒤(애프터 워크)’, 또 일해야 하는 세상에서 살 것인가, 아니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주도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세상에서 살 것인가. 지금 우리는 이 두 갈래의 길 앞에 서 있다.

이에 따라 이 책은 우리의 자유 시간을 잡아먹는 재생산 노동을 어떻게 개선해나가야 하는지를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다루기 위해 네 가지 요소를 끄집어낸다. 그것은 바로 ‘기술의 발전’, ‘사회적 기준 강화’, ‘가족 형태의 변화’, ‘주거 공간의 실험’이다.

다음으로는 기술의 발전에 따른 사회적 규범과 기준, 기대가 어떻게 강화되었는지를 살펴본다. 혁신적 기술은 또 다른 일을 만들어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더 많은 결과물을 기대케 했다. 이로써 노동의 양이 줄어들 희망은 사라졌고, 개인의 자유 시간은 지속적으로 침해받고 있다. 이에 대해 저자들은 우리 모두가 따르고자 하는 규범을 함께 결정하고 스스로 법을 제정하는 수단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책은 가정 내의 사회적 관계, 특히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회 재생산의 주체인 핵가족에도 주목한다. 사회 재생산 노동의 관점에서 핵가족은 비효율적인데다 각종 젠더 불평등의 온상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핵가족 형태는 여전히 우리 시대의 문화적 상상을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다. 그렇다면 핵가족은 어떻게 탄생해 오늘날 가장 보편적인 가족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을까? 또한 관습적 가족의 일원이 아닌 사람들은 언제까지 사회적으로 외면당할 것인가? 이렇듯 핵가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의 불합리한 문제와 제약, 그리고 변화하는 양상을 면밀히 짚어본다.

가정 공간을 어떤 형태로 조직하면 가정 내 무보수 노동과 돌봄 노동이 겪는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지도 면밀히 들여다본다. 20세기의 흥미로운 건축적 제안과 소규모 실험, 즉 러시아 혁명 직후의 열린 공간인 ‘주택 코민’, 프랑크푸르트 주방, 붉은 빈, 드롭 시티, 랜다이크 운동 등은 생활공간과 대항적인 사회적 상상에 중요한 사례가 될 수 있다. 이 책은 재생산 노동을 둘러싼 네 가지 요소의 분석을 기초로 탈노동 미래를 위한 실천적 방법을 제시한다. 공동 돌봄, 공공 호사, 시간 주권이다. 이 개념들이 어떻게 결합되는지를 설명하면서 우리 모두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무엇이 더 필요한지를 유연하게 생각하고 끊임없이 자유의 영역을 넓혀나가야 한다고 덧붙인다.


저자 : 헬렌 헤스터(Helen Hester)

영국 웨스트런던 대학교에서 젠더, 기술, 문화정치를 가르치고 있다. 테크노페미니즘, 사회 재생산, 노동 이론 등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며 국제 작업 그룹 ‘라보리아 큐보닉스(Laboria Cuboniks)’의 일원이다. 지은 책으로 『노골적인 것을 넘어 : 포르노그래피와 성의 이동(Beyond Explicit: Pornography and the Displacement of Sex)』, 『제노페미니즘(Xenofeminism)』, 『포스트 워크(Post-Work)』 등이 있다.


저자 : 닉 스르닉(Nick Srnicek)

영국에서 활동하는 캐나다 출신의 연구자이다. 현재 런던대학 킹스칼리지에서 디지털 및 플랫폼 경제, 인공지능의 정치경제, 노동거부의 정치, 마르크스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다. 좌파 가속주의자의 대표 주자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기술적 발전을 전유해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사회적 변화와 급진적 해방을 추구하는 데 관심이 있다. 수평적이고 직접적인 자율성에 무조건 호소하지 않고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조정을 강조하면서도 전 지구적으로 실현 가능한 현실적 대안을 추구한다. 주요 작업으로는 『플랫폼 자본주의』가 있으며, 알렉스 윌리엄스와 함께 『가속주의자 선언』을 발표하고 『미래의 발명: 탈자본주의와 노동 없는 세계』를 펴냈다.


역자 : 박다솜

서울대학교 언어학과를 졸업했다. 책 『멍든 아동기, 평생건강을 결정한다』, 『만만찮은 여자들』, 『불안에 대하여』, 『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 『관찰의 인문학』, 『죽은 숙녀들의 사회』, 『여자다운 게 어딨어』, 『스피닝』 등을 번역했다. 배우자와 아이, 고양이와 함께 행복해지는 길을 부지런히 찾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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