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항선 하나에 두 명의 사냥꾼
고호 지음 / 델피노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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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 소설 『밀항선 하나에 두 명의 사냥꾼』은 전편에 무겁고 음산한 분위기가 흐른다. 불법 체류자들이 밀항하고 마약 거래에도 손을 대는 등 범죄 스릴러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회 풍자하는 소설로 정평이 난 고호 작가의 욕설이나 탄식은 '차지기로' 이미 유명하다. 

“그 새낀 사람을 팔았지만, 난 사람을 구했어!”

"니가 대체 누굴 구했다는 거야?!"

"내 아이! 내 새끼! 뭐? 더 누가 있을 줄 알았어?! 내가 하느님이야? 부처님이야?! 나한테 뭘 더 바래?!"(p.260)

이 책을 펴낸 출판사 델피노 측은 일반적 문학론으로 고호 작가의 소설에 다가간다. "우리가 문학을 통하여 쫓고자 하는 즐거움은 어디에서 비롯될까? 대부분은 어떤 대상에 숨겨진 실체를 파악하고 싶어 하거나, 과거의 감춰진 사실을 알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과 맞닿아 있다. 도대체 한 인물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타인의 행동 뒤에 숨겨진 이유를 추적하거나, 사건의 원인을 집요하게 파헤치면서 우리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거나 엔돌핀을 내뿜는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긴장감과 몰입을 경험한다. 이런 인간의 본능을 누구보다 교묘하게 파고드는 작가가 있다. 바로 고호 작가다."

저자 고호는 이 소설 『밀항선 하나에 두 명의 사냥꾼』은 지금껏 작가 고호만의 개성적이고 독창적 서사와 개성적 문체를 유감없이 발휘하며 독자들을 다시금 매혹시킨다.

이번 작품은 경남 남해군 미조면을 배경으로, 낙향한 경찰대 출신 경감 양태열의 이야기를 중심에 둔다. 이 설정부터 독자들의 호기심은 폭주한다. 경찰대 출신이라는 이력이 무색할 만큼 한적한 시골로 내려온 양태열. 그는 왜 이곳에 오게 되었을까?



그의 과거에는 어떤 사연이 숨겨져 있을까? 독자들의 궁금증으로도 부족해 연이어 발생하는 예기치 못한 밀항선과 교통사고가 사건의 중심에 등장하며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출렁인다. 소설의 첫 장면은 태열의 새 근무지 미조면의 풍경에 시선을 고정한다. 

매미 울음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오후 4시.

끼이익- 하고 마을버스가 서자, 이윽고 차체 밑으로 막 내린 발길들이 어지러이 흩어졌다. 마지막으로 꺾어 신은 나이키 운동화 하나가 마지못해 낯선 흙바닥을 내디뎠다.

"으···"

더운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버스가 떠난 자리에 우두커니 선 태열은 그럼 그렇지, 하는 눈으로 적막강산 같은 주변 풍경을 노려보았다. 저만치 자리한 논 곳곳에 덩그러니 놓인 곤포 사일리지(일명 하얀 마시멜로), 도무지 3층 이상의 건물이 없어 뵈는 사방, 음메- 하고 들려오는 소 울음. 그리고 바닷내음.(p.15)

군(郡) 경찰서 관할 면 경찰로 근무지에 막 내린 태열의 눈에 비친 모습은 한적한 면 소재지 시골의 전형적 모습이다. 바삐 움직이는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여름철임을 감안하면 권태로움마저 느낄 정도의 한가로운 풍경이다. 태열의 눈에도 실망감이 역력하다. 

태열이 버스에서 내려 처음 만난 인물은 길을 묻기 위해 정류장 의자에 앉아 오랜 시간 누군가를 기다리다 실망한 얼굴의 소년이다. 자신을 부르던 말끔한 차림의 청년을 흘끔 쳐다본다. "우체국 가려면 어디로 가야 돼?" 하고 묻는 태열을 힐끔 쳐다본 아이를 태열도 얼굴을 훑어 내린다. "숱이 빽빽하니 짙은 눈썹 밑으로 살짝 오목한 눈두덩이, 까맣고 깊은 눈동자, 볕에 그을린 것이 아닌 날 때부터 빚어진 게 분명한 피부색. 그리고 주름진 남방에 체육복 반바지. 농촌으로 시집온 어느 동남아 여성의 자식이겠거니, 하고 재빠른 판단과 함께 지역의 낙후화가 더욱 체감됐다.(p.16)



이 소설 작품은 〈프롤로그〉와 〈쿠키〉를 뺀 4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 〈카르텔〉, 2부 〈열쇠〉, 3부 〈두 명의 사냥꾼〉, 4부 〈비에씬타〉 등이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독자를 놓아주지 않는다.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고, 쉽게 비밀을 털어놓지 않는다. 오히려 마성의 캐릭터를 통해 사건의 실마리를 더 복잡하게 얽어놓으며 독자들을 미궁 속으로 끌어들인다. 특히 불법 입국자들이 주고받는 중국어 대화와 그들의 밀항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해 극의 현실감을 한층 끌어올린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 설정은 중국어나 그들이 언어 표현 관습에 익숙지 못한 독자들의 궁금증을 한층 끌어올리는 역할을 겸한다.

지금까지 가리봉동의 조선족 이야기가 영화나 소설의 소재로 등장한 적은 꽤 있었지만, 이들의 밀항 과정과 이후의 삶을 정면으로 다룬 소설은 독자의 기억으로는 없었다. 다만 가리봉동의 거주하는 조선족들의 생활 모습이 소설에 담긴 소설이 간혹 있긴 했다. 이 소설은 이러한 새로운 시도를 통해 사회적 약자와 주변부 인물들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낸다. 하지만 이 작품이 단순히 묵직한 주제 의식이나 어설픈 교훈으로 흐르지 않게 하는 점이 더욱 놀랍다. 긴장과 재미, 그리고 리얼리티가 조화를 이루며 독자들을 끝까지 몰입하게 만든다.

필로폰 30kg을 손에 넣고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망설였을 때, "뜬금없이 이 지경까지 와서 신고하자고? 정말? 그럴 수 있어? 그럼 당장 경찰에 전화 쳐."

일반적으로 전화를 '걸다'가 아니라 '치다'는 표현을 썼다.

역시 그 또한 打電話(따띠엔화)라는 중국어의 습관이 남아 있던 것이다.(p.214~215)


전라도 흥덕면 목적지에 도착해서 보수를 올려달라는 서현과의 입씨름 중, 

"할 거야?"

"네,"

"진짜지? 또 말 바꾸면 그땐 곤란해."

"네, 200으로 할게요."

"90이야. 괘씸죄로."

그러면서 숫자 '9'를 만들어 보이던 손가락 모양까지도.


저자 고호는 특유의 리얼한 사투리와 생생한 인물 묘사가 이번 작품에서도 빛을 발한다. 특히 사회의 아웃사이더들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그의 필력은 이미 고정 팬층이 있는 것으로 독자는 알고 있다. 독자 역시 저자의 사투리 구사 능력과 인물 묘사에 크게 신경을 쓰고 정성을 쏟는 점에 이끌리기도 했다. 이쯤 되면 고호의 이름 자체가 곧 흥행 보증수표라 해도 과언이 아닐 수도 있다. 『밀항선 하나에 두 명의 사냥꾼』. 매 장(章)마다 궁금증을 자아내며 독자를 단단히 붙드는 이 소설은,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놓을 수 없는 페이지터너임에 틀림없다. 분량도 장편소설 치고는 긴 편이 아니다. 이 작품뿐만 저자는 전작 『평양에서 걸려온 전화』, 『악플러 수용소』, 『과거여행사 히라이스』, 『기다렸던 먹잇감이 제 발로 왔구나』, 『노비 종친회』, 『도쿄 한복판의 유력 용의자』, 『평양골드러시』 등 수많은 작품을 보더라도 벽돌책에 버금가는 긴 장편은 없는 편이다. 이 책처럼 한 가지 주제를 될수록 절제된 언어와 정곡을 찌르는 적확한 단어, 또 약간은 지나치다 싶지만 결코 선을 넘지 않은 사투리나 욕 등의 사용을 통해 최대한 압축해 오히려 더 많은 암시를 포함시키는 문장력은 작가의 능력이라고 독자는 생각한다. 이 같은 이유로 지금까지 영화화하기로 계약을 체결한 것도 여러 편으로 알려져 있다.


이 소설 작품은 누구보다 화려했던 엘리트 경찰 태열이 시골로 좌천돼 가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곳에서 우연히 불법체류자의 밀항 사건과 맞닥뜨리게 되고, 태열은 그들의 뒤를 쫓는다. 그러다가 발생한 교통사고. 사망자가 속출하자 마을 카르텔이자 도주자였던 환국은 과잉 진압이라며 태열을 몰아세운다. 설상가상 뒤늦게 도착한 또 다른 실세 영춘.

“조용히 덮읍시다. 양 소장.”

"아하, 한 패거리다 이거지."

"덮고 가죠."

"현장을 은폐하자?"

"안 그럼? 다른 수 있어요?"

"사람이 죽었어! 똑똑히 봐! 사람이 죽었다고.!!"

태열이 차 안을 가리키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영춘이 오히려 되묻는다.

"대한민국 법에선 존재하지 않는 존재들이에요. 쟤네가 주민번호가 있기를 해요. 아니면 여권이 있기를 해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왜 신경 쓰죠?"

그러면서 서울 시절 태열의 뇌물 수수 혐의까지 들춰내며 압박해온다. 그 순간! 차 밑에서… 기적(?)처럼 기어 나오는 생존자!(p.60~61)

여자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듯 중국어로 알아듣지 못할 말을 남긴 채 죽고 만다. 최악 중의 최악이다! 모두가 패닉에 빠진 순간, 죽은 여자의 옷섶에서 띠리링- 메시지 알림.

그녀는 단순한 밀입국자가 아니다! 누군가 그녀가 한국에 올 걸 이미 알고 있고, 둘은 어딘가에서 접선을 약속했다.


그 상황에서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영춘의 반문을 통해 저자는 자본주의 사회의 배금주의와 황금만능주의가 욕망과 함께 승수작용을 일으킴을 분명히 보여준다.

“세상의 모든 갈등은 100% 돈이야 돈. 여기 가면… 뭔가 큰 게 기다리고 있을 것 같지 않아?”

세 사람은 죽은 여자를 대신할 대타를 구하기에 이르고, 마침 돈이 급했던 승무원 서현이 그 위험한 판에 발을 들인다. 그리고 서서히 드러나는 마약, 그리고 1천억 원. 유혹에 넘어간 태열은 화려한 미래를 꿈꾸지만, 그것도 잠시 곧 배신을 당하고 급기야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만다. 역추적으로 밝혀낸 거대한 음모와 마주하게 된 태열. 모든 것은 처음부터 짜여진 판이었다. 배신과 음모, 진실과 위장이 교차하는 서스펜스가 매혹적이리만큼 긴장감 있게 전개된다. 이 소설 작품의 주인공은 태열과 진가림이란 여인이다. 진가림은 중국 길림성 안도현의 한 마을에 사는 여성이다. 곳곳에 오성홍기(중국 국기)가 붉은 지붕들 사이에 나부끼는 이 작은 시골 마을에는 조선족들이 모여 살고 있다. 지나는 노인에게서 말끝마다 특유한 억양의 '~마'가 심심찮게 들리는 까닭도 그래서이다. 어려운 생활을 벗어나 돈을 벌기 위해 한국 밀항을 꾀하는 여성이 〈프롤로그〉 부분 장면이다. 아이와 이별하는 모습은 절체절명의 상황에 처한 여인의 아이를 뒤로 하고 한국을 향해 떠난다.


권력자를 이용하는 법은 간단하다. 그들로 하여금 빚을 지게 하면 된다. 그럼 그 빚은 현물로 돌려받는 대신, 그들의 지위를 이용해 아주 손쉽게 해낼 수 있는 행동을 이끌어 내면 충분하다. 그렇다고 둘의 관계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채무 관계는 끝났어도 또 다른 유대관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세상 모든 정경유착의 운행 원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p.167)


저자 : 고호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는 데는 자음과 모음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 평소 지론이다. 그런 고민이 만들어낸 세계로는 『평양에서 걸려온 전화(드라마 계약 체결)』, 『악플러 수용소』, 『과거여행사 히라이스』, 『기다렸던 먹잇감이 제 발로 왔구나(드라마 계약 체결)』, 『노비 종친회』, 『도쿄 한복판의 유력 용의자』, 『평양골드러시(드라마 계약 체결)』, 『레디 슛(드라마 계약 체결)』 등이 있으며, 사회적 이슈를 문학적으로 녹이는 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사단법인 이효석문학선양회와 황토현 문학상, 의정부전국문학상, DMZ문학상, 중원문학상, 교육부장관상, 통일부장관상 등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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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모르고 있는 내 감정의 속사정 - 화내고 후회하는 당신을 위한 심리 처방전
미즈시마 히로코 지음, 박미정 옮김 / 생각의날개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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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살면서 순간 욱하는 화를 참지 못하고 상대를 몰아붙이는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누구나 겪는 이 욱하는 심정은 대부분 시간이 지나면 후회감으로 되돌아온다. "나는 왜 순간적으로 흥분하고 항상 후회하는 걸까?" 이 책 『나만 모르고 있는 내 감정의 속사정』은 우리 안에 있는 감정 가운데 특히 '화'와 '분노'로 표현되는 감정을 주로 다룬다. 감정은 누구나 갖고 있지만 똑같은 상황에서 어떤 사람은 화를 내고, 어떤 사람은 꼭 참고 넘어간다. 그렇다면 순간적으로 화내는 것은 왜 늘 후회를 남기는가? 욱하는 감정을 참아내는 방법이 있을까? 사람은 누구나 감정적인 면과 이성적인 면을 갖고 있다고 한다. '감정적'인 심리상태는 인간관계나 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고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그렇다면 감정을 조절하거나 자제하는 데 어떤 훈련이 필요할까? 이 책에서는 무슨 일에든 쉽게 감정적이 되거나, 혹은 반대로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억누르며 감정적이지 않은 척하는 사람들의 감정의 속사정과 메커니즘을 분석한다. 저자 미즈시마 히로코는 이 분석을 토대로 감정에 쉽게 휘둘리지 않고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저자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게이오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후, 같은 대학 대학원 의학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게이오대학 의학부 신경정신과에서 근무를 했으며, 현재는 대인관계 치료 전문 클리닉 원장과 모교 의학부 신경정신과 교수를 역임하고 있다. 저자는 〈서문〉을 통해 "감정적으로 되면 인간관계나 일만 그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도 엉망진창이 되고 만다"며 "감정적으로 되는 순간, 마음의 평안 또한 순식간에 깨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를 테면 집안 꼴이 엉망이라며 아내에게 화를 자주 내어 집에서도 편히 쉴 수 없다면 확실히 삶의 질은 크게 떨어진다. 게다기 이런 태도로 계속 가족들을 대하면 가족에게도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항상 불평만 늘어놓는 사람과는 살고 싶지 않다"며 아내가 느닷없이 이혼 서류를 내밀지도 모른다고 주의를 준다.

한편으론 "나는 감정을 잘 참으로니까 문제 없어"라고 자신하는 사람도 주의할 것을 주문한다. 이들은 감정적이지 않는 게 아니라 다만 감정적인 게 귀찮은 상황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는 척'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덧붙인다.



저자의 지적대로 자기 안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참다 보면 스트레스가 쌓이기도 하지만, 계속 참고 살다가는 상대방에게 진심으로 다가가기도 힘들어진다고 경계한다. 결국 감정을 잘 다스릴 수 있다는 사람도,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려고 애쓴다는 점에서 이들 모두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감정적이 될 것 같은 상황을 이들은 가급적 피하려고만 들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이 점이 '감정적'으로 반응하게 되는 일의 본질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한번 감정적이 되면 자신을 컨트롤하기 어렵고, 그렇기 때문에 항상 감정적으로 되지 않기 위해 애써야 한다면 감정에 인생을 빼앗기는 일과 무엇이 다르겠느냐고 저자는 반문한다.

감정적으로 되는 경우든 감정적이지 않은 척하는 경우든 어느 쪽도 득이 될 것이 없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쉽게 감정적으로 되거나, 반대로 감정적이지 않은 척을 하는 걸까? 이 책에서 저자는 이러한 의문들을 상세하게 풀어가면서 감정에 쉽게 휘둘리지 않기 위해 다음 네 가지 방법을 함께 익혀 나갈 것을 제시한다.


① 욱하는 반응을 감정적으로 발전시키지 않는 법

② 감정을 참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되지 않는 법

③ 감정적인 상대방에게 상처받지 않는 법

④ 감정적인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습관


저자는 대인관계요법을 전문으로 하는 정신과 의사로서 애티튜디널 힐링(AH) 봉사활동 등을 통해서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을 많이 만나온 사람으로서, 한 가지 분명하고 짚고 넘어가자고 말한다. "우리가 감정적이 되는 것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책에 따르면 감정적으로 되는 것은 감정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다. 시중에 다양한 감정컨트롤법이 소개되어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사람들은 감정적이라는 상태가 주는 나쁜 이미지 때문에, 감정 그 자체를 성가신 존재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감정의 입장에서는 매우 억울한 부분이다. 감정에는 아무런 죄가 없다. 오히려 감정을 소중히 하는 것은 감정적으로 되지 않기 위한 하나의 커다란 전제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감정적인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다양한 심리 서적을 읽고 여러 방법을 시도해 본 사람도 그 정도가 가볍다면 어떻게든 해결이 되었겠지만 감정이 어느 선을 넘어서면 어떻게 해볼 도라기 없다. 또한 '감정을 놓아 버리자', '감정이 지나가기를 기다리자', '신경 쓰지 말자'는 말을 들어도 '그게 그렇게 쉽게 될 거면 이 고생을 안 하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 대목에서 집필 취지를 밝힌다. "이 책은 그런 사람들에게 감정적인 심리 상태의 구조를 상세하게 설명해 줌으로써, 걸핏하면 감정적이 되어 손해 보는 인생을 살지 않도록 도와줄 것이다."(p.10)

이 책은 모두 6부(Part)로 나뉘어져 있다. 1부 〈사람은 왜 감정적이 되는 걸까?〉, 2부 〈‘감정적’인 사람은 ‘자존감’이 낮은 사람〉, 3부 〈서로의 영역을 알면 상처받을 일이 없다〉, 4부 〈‘옳음의 줄다리기’에서 손 떼기〉, 5부 〈쉽게 감정적이 되지 않기 위한 7가지 습관〉, 6부 〈감정적인 사람과 잘 지내는 법〉 등이다. 

각 부에는 6~11개의 장(章)을 두어 주제에 알맞게 설명을 해준다. 이를 테면 1부에는 「‘감정’이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 걸까?」 「사람은 ‘감정적’이 되어 자신의 마음을 지키려고 한다」 「왜 한 번 실수를 하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되는 걸까?」 등 11개 장에서 왜 사람들이 감정적이 되고 후회하게 되는가?에 대해 설명한다. 2부 「자존감 이란 무엇인가」「자존감이 낮은 사람이 자주 하는 말」 등 9개 장을 통해 감정적인 사람의 낮은 자존감에 대해 밝힌다. 3부는 「서로의 영역 존중하기」「‘나의 옳음’과 ‘타인의 옳음’은 다르다」 등 7개 장에서 타인의 의견과 내 의견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해 줄 것을 주문한다. 또 4부에서는 「‘감정적’이 되는 이유는 ‘옳음’에 집착하기 때문이다」「서로의 ‘옳음’이 다를 때 대처하는 법」 등 8개 장에서 나와 상대의 '옳음'이 다를 때 대처하는 법을 강조한다. 5부는 7개 장에 걸쳐 감정적이지 않게 되는 7가지 습관을 제시한다. 마지막 6부에서는 「‘폭언을 하는 상사’가 두렵다면?」「갑작스러운 ‘언어폭력’에 대처하는 법」「SNS상에서 문제 해결법」「감정적인 진상들에게 대처하는 법」 등 6개 장에서 '막무가내' 감정을 건드리는 사람에 대처하는 법 등을 설명하고 있다.



1부 「사람은 ‘감정적’이 되어 자신의 마음을 지키려고 한다」라는 장(章)을 살펴본다. "아픔을 느끼는 감각이 신체를 지켜 주듯이, 사람은 분노를 느낌으로써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자기 마음을 지키고자 한다. 이에 따라 감정적이 된다는 건 어긋난 방식이긴 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방어하는 방식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감정적으로 방어하는 방식은 효과적이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을 한층에 위험에 빠트릴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처음에는 단순히 '예정의 어긋남'과 '충격'에 따른 단순한 반응이었겠지만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감정적으로 됨으로써 되레 스스로를 괴롭힐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상대방으로부터 무시를 당하거나 반격을 당할 수도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부적절한 자기 방어를 '어긋난 방어'라고 한다. 이 말보다 '과잉 방어'란 말이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라고 덧붙인다. 과잉 방어란 방어할 목적으로 행하는 일이 과도하게 격해지는 것을 뜻하는 반면, 어긋난 방어는 과도한 것이 아니라 단지 방향이 다른 것을 의미한다. 결국 자신을 지키기 위해 했던 일이 전혀 자신을 지키는 일로 연결되지 않음을 뜻한다는 점에서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저자에 따르면 감정적으로 대응하게 되는 원인은 주로 영역 개념이 부재한 데서 비롯한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옳다는 것을 타인에게 인정받으려 하고 그것이 관철되지 않을 때 감정적으로 흥분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옳고 그름의 기준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일이자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는 행위다. 자신의 옳음을 상대방이 인정해주지 않으면 본인이 상처를 입는 것도 그렇지만 이는 옳음을 강요당한 상대방의 입장에서도 불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일은 너와 나 사이의 경계가 모호하고 서로간의 거리 두기가 어려울 때 발생한다. 저자는 감정적이 되어 일을 그르치는 일이 없기 위해서라도 영역 개념을 확실히 해둘 것을 강조한다. 자신과 타인의 경계를 명확히 인식하고 거리 두기를 통해 영역의 개념을 확실히 확립할 수만 있다면 서로 간에 생길 수 있는 불필요한 마찰이나 갈등은 현저히 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저자는 5부 〈쉽게 감정적이 되지 않기 위한 7가지 습관〉에서 감정적으로 되지 않으면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감정 활용법을 7가지로 열거한다. 음주나 과로, 혹은 호르몬의 불균형과 같이 자신의 몸 상태를 미리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친구 노트'를 활용해 친구의 입장에서 상처 받은 자신을 다독이기, 혹은 무엇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아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초점을 맞추며 생활하기 등 일상에서 놓치기 쉬운 구체적인 실천 방안들을 제시한다. 저자는 지금 할 수 있는 일에는 최선을 다해 방법을 모색하되 자신이 어떻게 해도 안 되는 일은 순순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감정적으로 되지 않으면서 마음의 평화를 얻는 길이라고 조언한다. 화를 참지 못해 일을 그르치거나 화를 낸 자신에게 상처를 받는 등 손해가 막심한 삶을 살고 있다면, 이 책은 당신 안에 내재된 강인함을 일깨우며 힘든 상황에서도 묵묵히 헤쳐 나갈 수 있는 삶의 지혜를 선사할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습관①〉 자신의 몸 상태를 파악한다

〈습관②〉 ‘상대방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습관③〉 ‘친구 노트’를 쓴다

〈습관④〉 주어를 ‘나’로 바꾸어 생각한다

〈습관⑤〉 ‘해야 할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것’에 초점을 맞춘다

〈습관⑥〉 그 자리에서 벗어난다

〈습과⑦〉 ‘마음의 셔터’를 내린다



타인이 내린 평가는 언뜻 자기 영역을 침범한 것처럼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상대방의 영역 안에서 내린 평가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애초에 ‘영역 침범 자체가 일어날 수 없다’는 생각을 갖는 것이다. 이것은 참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참는다는 것은 피해를 당해도 모른 척 방관하는 것으로 마음속에 부정적인 에너지만 쌓일 뿐이다. 한편 ‘상대방의 영역 안에서 내린 평가’에 불과하다는 입장은 상대방이 애초 내게 피해를 줄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 정도 말은 참을 수 있어’가 아니라 ‘상대방이 자기 영역에서 제멋대로 생각하고 있으니 그냥 무시하자’고 생각하면 기분전환도 되고 다른 일을 도모할 수도 있을 것이다.(pp.133-134)


‘내 말이 옳다는 걸 증명하고 싶은데 다들 진지하게 들어 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면 방어기제가 작동해 한층 더 ‘감정적’이 되어 버린다. 결국 ‘감정적’으로 된다는 것은 자신의 ‘옳음’을 둘러싼 ‘어긋난 방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어긋난 방어’는 문자 그대로 ‘어긋나’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자신이 옳다고 믿는 걸 인정받기가 어렵다. 자기 말이 옳다고 ‘어긋난 방어’를 계속반복하다 보면 사태는 점점 악화될 것이다. 상대방과의 관계도 악화될뿐더러, 무엇보다 스스로 무력한 존재가 될 것이다.(pp.151-152)


저자 : 미즈시마 히로코(水島 廣子)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게이오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후, 같은 대학 대학원 의학박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게이오대학 의학부 신경정신과에서 근무를 했으며, 현재는 대인관계 치료 전문 클리닉 원장과 모교 의학부 신경정신과 교수를 역임하고 있다. 또한, 애티튜디널 힐링 저팬(AHJ) 대표로도 활동하고 있다. 2000년 6월부터 2005년 8월까지 일본 중의원 의원으로써 아동학대 방지법 개정을 비롯해 다수의 법안 수정에 힘썼다.

주요 저서로는 『분노가 단숨에 사라지는 책』, 『가까운 사람의 공격이 단숨에 사라지는 책』, 『나는 절대 외모에 집착하지 않는다』, 『질투가 단숨에 사라지는 책』, 『여자의 인간관계』 등이 있다.


역자 : 박미정


대학원에서 미학을 전공하고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감정도 습관이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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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엑시트 - 불평등의 미래, 케이지에서 빠져나오기
이철승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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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뉴스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이 책 『오픈 엑시트』는 저자 자신의 경험 이야기를 꺼내면서 시작한다. "휴일에 어쩌다 함께 식사하게 되면 아버지는 넋두리처럼 회사 생활의 고단함을 늘어놓으셨다. 아침마다 회사에 가는 게 싫을 때가 있지만 가야 하는 게 이 직업이다. 너희믄 회사 다니지 말로 다른 일 해라." 하지만 형들은 모두 기업에 취직했고 나만 다른 길을 걸었다. 당신 말년에 내가 출근하지 않고 병상을 찾으면 우려 섞인 말을 건네셨다. 출근 안 해도 되냐고. "수업 없어서 괜찮아요." 하면 씁쓸히 웃으며 되받으셨다. "출근 안 해도 돈 주는 직업이 있는 줄 몰랐다." 은퇴한 아버지는 회한 섞인 말을 종종 하셨다. "몇 번 나와서 내 사업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너희들 잠든 걸 보면 차마 그러지 못했다······"(p.5)

저자 이철승은 자신의 과거이기도 한 아버지의 회사 생활의 일부를 들여다보고 있다. 고용주의 비위 맞추려 시도 때도 없이 호출당하고 행사에 참여하는 걸 귀찮아 했다고 「왜 우리는 탈출하고자 하는가」란 제목의 「프롤로그」에서 밝히고 있다. 자신의 과거이자 아버지가 직장 생활하던 때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표제어 '오픈 엑시트'는 독자의 짧은 영어 실력으로는 '열린 탈출구', 혹은 '개방된 탈출구' 정도가 아닐까? 사회 비평 혹은 사회과학 서적으로 분류될 이 책에서 왜 개인적 경험을 책의 「프롤로그」를 끼워넣었을까? 사례를 전제로 우리 사회 현실을 비판하자면 객관적 자료나 통계가 더 설득력을 높일 수 있을 텐데. 독자의 의문은 금세 풀렸다. 우리의 산업화 시대 직장을 다니셨던 아버지는 사실 충분히 객관화된 사실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우리가 뒤늦게 산업화에 뛰어들기 전에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 혼란, 전쟁과 후유증 수습 등으로 혼란의 연속이었다. 더욱이 전쟁을 치렀던 남북의 분단은 해방 이후 강대국들이 한반도의 영토를 마음대로 분리 통치하기로 약속한 데 따른 것이다. 36년간의 일제 강점기가 끝나자마자 이념 대립으로 한반도는 허리가 잘렸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장기 집권 꿈을 학생과 시민들의 분연한 의지로 끊어냈지만, 정국의 혼란이 가시기도 전 다시 군부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 당시 박정희 장군(소장)은 정권을 탈취한 뒤 '개발 독재' '철권 통치'를 시작했다. '먹고살기'가 먼저라는 명분이다. 밥 굶기를 밥 먹듯이 하던 시절이니만큼 가장 시급한 문제는 먹고사는 일이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 세력은 국민들의 바람을 잘 궤뚫고 있었다. 그리고 경제개발만이 자신들의 쿠데타를 정당화할 명분이라는 점을 잘 간파했다. 사실 폐허에서 새로운 나라로 거듭나려면 당연히 먹고사는 일이 시급하다. 헌법에 정해진 대로 당초 약속했던, 재집권의 경우까지 8년에 한하던 대통령의 임기를 무기한으로 늘리는 개헌을 시도했다. 비상계엄령과 함께 시작된 장기집권 계획의 꿈은 경제 개발 성과로 가릴 수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이른바 '유신'이다. 헌법도 유신헌법으로 바뀌고 임기 6년제의 간접 선거에 의한 대통령도 연임 횟수를 규정하지 않음으로써 '종신 대통령'의 기초를 다졌다. 민주화를 위한 모든 행위(학생 운동, 노동 운동 등)는 법으로 금지되었다. 이때 비상계엄령에 준한 대통령의 '긴급조치권'도 추가되었다. 위반할 경우 최고 사형을 언도받을 수 있는 엄청난 법적 제도도 마련됐다. 

이렇게 다져진 유신체제는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위세가 대단했고, 수많은 희생자를 낳으면서도 일정 기간 유지가 가능했다. 민주화 운동 인사들은 긴급조치권으로 구속 체포해 최고 사형까지 시키는 데다, 남북 대치 상황에서 더 급한 경제 발전에 주력한 후 어느 정도 나라의 체제가 갖추어지면 민주화에도 동의하겠다는 절대 정권의 말을 믿도록 국민들은 순치되어 갔다. 배고픈 사람들은 민주화보다 산업화가 먼저였으니 당연히 민주화를 추구하던 몇몇 인사들이 희생양이 되었다. 이 책 저자의 아버지 세대의 일이다. 아버지의 직장인으로서의 삶이 산업화 시대의 희생적 삶의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객관적 설득력을 얻을 수 있는 이유다.

저자 이철승은 한국 사회에 불평등과 세대론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언론과 학계, 정계, 일반 대중에게까지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킨 사회학자이다.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로 이 책은 전작 『불평등의 세대』와 『쌀 재난 국가』에 이은, 〈불평등 3부작〉의 완결작이다. 저자는 『불평등의 세대』에서 386세대가 구축한 세대 네트워크를 분석함으로써 동시대 세대 간, 세대 내 불평등의 구조를 파헤쳤으며, 이어 『쌀 재난 국가』에서는 그러한 불평등 구조의 기원을 동아시아의 쌀 경작 문화권에서 발달한 ‘벼농사 체제’라는 앵글을 통해 추적했다. 완결작이 된 이 책은 새롭게 떠오르는 불평등의 축으로 인공지능, 저출생/고령화, 이민을 꼽으며, 이 세 가지 구조적 변동과 그 힘들이 동아시아의 ‘소셜 케이지(social cage)’라는 기존의 제도 및 구조와 충돌하는 와중에 생성되는 새로운 불평등의 구조를 분석하고, 개인적 혹은 집합적 대안으로서 ‘엑시트 옵션(exit option)’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기존 케이지*의 룰과 관습으로는 이 세 가지 구조적 변동에 대응할 수 없을 것이다. 당면한 미래에 이 세 가지 변동이 가져올 충격과 재구조화 속에서 개인과 기업은 어떤 적응 전략을 짜고, 국가는 어떤 정책적 대응을 해야 할까? 시민사회는 어떻게 사회와 공동체를 방어할 수 있을까? 한국의 정치는 이러한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할 능력을 갖출 수 있을까? 우리는 이 불평등의 미래에서 새로운 기회를 발견할 수 있을까? 저자 이철승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지난 수년간 한국 사회에서 거의 논의되지 않고 있던 구조 개혁의 문제를 ‘기업’을 분석 단위로 삼아 ‘개인의 엑시트 옵션’이라는 수준에서 논의한다. 기업이라는 소셜 케이지를 분석 대상으로 삼은 것은 “노동하는 인간이 인간 사회의 본질이라는 오랜 믿음 때문”이며, 구조 개혁의 문제를 개인 수준으로 낮춘 것은 “엑시트 옵션의 궁극적 행사 주체가 개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 수준의 엑시트 옵션은 구조적 문제이기도 하다. 저자는 “한국 사회가 이렇게 머리끄덩이를 움켜쥐고 오도 가도 못 하게 서로의 발목을 잡으며 밀어내기 싸움에 목매는 이유는 바로 구조적으로, 엑시트할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적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이에 따라 저자는 제로섬게임에 올인하고 있는 한국 사회가 이 처절한 아귀다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개인들이 쉽게 엑시트할 수 있는 사회, 특히 중하층의 엑시트 옵션을 확대할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책 『오픈 엑시트』는 이미 그 싹을 틔운 불평등의 미래에 직면해 노동시장의 구조 개혁, 한국 사회의 구조 개혁을 예비하는, 지금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예기치 않은 선거를 앞두고(책이 출판될 때는 2025 대선이 치러지기 이전이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독자들에게 특별한 시사점을 제공하는 책이 될 것이다.

* 케이지라는 개념을 처음 사용한 것은 막스 베버다. 베버는 그의 명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1992, 1930)의 결론 부분에서 '쇠 우리(iron cage)라는 비유적 개념을 사용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자본주의와 근대적 관료제의 기술 통제하에서 고유의 자율성을 잃고 그 규칙과 규범에 종속된다. 이 속박의 '안정성'과 결박의 '견고함'을 강조하기 위해 베버는ㅡ케이지도 강한 결박의 개념인데ㅡ앞에 '쇠(iron)'를 붙였다.((p.23, 저자 주)


이 책은 「소셜 케이지와 탈출 옵션」이라는 제목의 〈이 책의 구성〉과 〈결론〉을 제외하곤 모두 4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케이지에서 나가기 - 엑시트 옵션의 확장〉, 2장 〈케이지 업데이트 - 인공지능과의 협업〉, 3장 〈케이지 재생산 - 벼농사 체제와 저출생〉, 4장 〈케이지 열기 - 이민과 불평등〉 등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표제어 『오픈 엑시트』는 제목이 뜻하는 바 ‘이탈 혹은 탈출’과 ‘안착 혹은 속박’에 관한 사회방법론을 이용한 서사다. 소셜 케이지는 사회마다 전승되어온 문화적 구조의 유산으로, 작게는 가족에서부터 마을, 일터, 국가까지 아우르며 개인이 현재의 공동체에서 이탈(exit)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도록 만드는 생태적·사회적·경제적·정치적 그리고 문화적 인센티브 메커니즘과 제도의 총체다. 특히 이 책에서 저자는 동아시아 벼농사 체제에서 진화해 오늘날 한국 자본주의의 소셜 케이지로 발달한 (학벌-내부 노동시장-연공제로 착종되어 뒤엉킨) 기업의 제도들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아, 그 제도들이 인공지능, 저출생/고령화, 이민이라는 거대한 변동의 물결에 맞닥뜨렸을 때 어떤 문제들이 발생하는지에 논의를 집중한다.

이를 테면 동아시아 소셜 케이지의 특징은 협업과 위계, 경쟁을 바탕으로 강력한 내부 규율과 상호 감시 기제가 작동하며, 진입도 어렵지만 빠져나오기(exit)도 힘든 사회적 연결망이자 협동 노동조직이다. 이 소셜 케이지에 한 번 들어서면 조직 안에서는 장기간 고용이 보장되지만, 더 높은 자리와 보상이 주어지는 권력과 부를 향해 구성원 전체가 긴밀하게 협력하면서도 치열하게 경쟁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이 집단주의적이고 위계적인 협업 시스템은 세대 간, 세대 내 네트워크를 통해 기술 및 도구의 표준화와 평준화를 ‘빠르게’ 확산시킴으로써, 역시 ‘빠르게’ 서구 산업자본주의를 따라잡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며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냈다고 저자는 판단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적응하고 키워왔던 소셜 케이지는 오늘날에도 잘 작동하고 있는가?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지적한다. 이 책은 이렇게 위기에 봉착한 동아시아의 소셜 케이지를 어떻게 재구조화할지에 대한 고찰이다.


이에 따라 이 책은 수천 년에 걸쳐 진화해온 동아시아의 소셜 케이지가 새롭게 닥쳐오는 거대한 구조적 변동과 충돌하는 와중에 생성되는 새로운 불평등의 구조를 분석하고, 이를 ‘이탈 혹은 탈출’과 ‘안착 혹은 속박’의 메커니즘을 통해 흥미진진하게 펼쳐 보인다. 먼저, 인공지능 기반 자동화는 그동안 동아시아 생산 시스템이 점유해왔던 제조업 분야의 많은 부분을 대체할 것이다. 그렇다면 동아시아의 소셜 케이지는 어디로 갈 것인가? 인공지능이 외부에서 밀려든 충격으로 인해 우리의 소셜 케이지를 업데이트하는 문제라면, 저출생은 소셜 케이지 내부의 룰에 대한 여성들의 저항의 목소리로부터 시작되었다. 가족 구성을 거부하거나, 가족을 꾸리더라도 출산과 육아를 거부하거나 연기함으로써 가부장제가 강제하는 현모양처 이데올로기와 단절하고 커리어와 여가를 지키려는 시도에 다름 아니다. 이 경우, 출산을 택하지 않은 것은 개인 수준에서는 봉건적 가족제도로부터의 엑시트지만, 사회 전체적으로는 저출생 현상으로 나타난다. 사회가 구성원의 새로운 가치와 운동에 그 룰을 맞추지 못해 스스로를 재생산 실패(사멸)로 몰고 가는 이 상황, 게다가 그러한 실패가 사회의 하층에서 더욱더 가속화되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이민은 다른 사회의 케이지를 엑시트하여 우리의 케이지로 진입하고자 하는 인간의 이주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200만을 넘어 300만 명에 육박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한국인들의 협업 케이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채, 한국인들이 기피하는 산업으로 유입되어 그들만의 지역적·산업적 게토를 만들고 있다. 이 눈에 보이지 않는 배제와 분리의 장벽들이 심화되면 미래의 한국 사회는 어떤 모습이 될까?


저출생도 문제지만, 출산의 계급화는 그에 못지않은 사회문제다. 상층과 정규직은 더 적은 수의 자식에게 교육 자본과 자산을 몰아주기 위해 출산을 자제한다면, 중하층과 비정규직은 아이들을 키울 경제적 능력이 부족해서 출산을 자제한다. 이러한 경향은 경제적 불평등이 경제활동의 궁극적 목적인 개인과 가구의 생물학적 재생산을 충족시키지 못할 정도로 심화되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결혼과 출산이 상층과 정규직의 전유물이 되어가는 사회는 장기적으로 도태될 수밖에 없다. 그 도태를 강제하는 힘은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올 것이다.(pp.221-222)


인공지능 기반 자동화가 노동시장을 재편하고, 인구구조의 변화가 국가와 사회의 근간인 재생산 위기를 초래하며, 이주자들이 이미 우리의 일부로 자리 잡은 상황에서 이 책 『오픈 엑시트』는 개인과 기업, 국가와 시민사회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모색하면서, 저자 특유의 독창적인 시각과 다양한 데이터 분석을 바탕으로 그에 대한 실천적 통찰을 제공한다. 저자 이철승은 단순히 문제를 지적하고 현상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양한 사례를 들어 ‘엑시트 옵션의 확대’라는 해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 차원의 전략이지만, 발전한 자본주의사회에서는 가장 강력하고 치명적인 해법일 수도 있다.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일자리를 찾고, 스킬(숙련)을 쌓고, 그 스킬을 자유롭게 옮기거나 전환해서 새로운 먹거리를 창출하고, 동시에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는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야말로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회학자의 책무라고 여겨 이 책을 썼다고 소회를 풀어놓는다. 다 같이 한 조직에, 현 조직에 매달려 서로의 다리에 족쇄를 채우고 제로섬게임에 올인하는 이 닫힌 세계에서 벗어나 개인의 자유로운 엑시트 옵션을 탐색하는 이 책은, 우리가 함께 설계해야 할 미래의 방향을 제안하는 한국 사회의 구조 개혁에 관한 흥미로운 사유서다.


MAGA(Make America Great Again)을 외치며 중하층 백인을 결집하는 트럼프의 정치도 이러한 문화주의 우파를 자양분으로 성장했다. 따라서 이민 이슈는 좌파정당뿐만 아니라, 우파정당 내부에도 균열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균열은 미국과 유럽에서 국제주의와 세계화를 추진해온 전통 우파가 사그라들고, 신극우파가 출현하여 우파정당을 장악하게 된 구조적 배경이기도 하다. 서구에서 2000년대 이후 극우정당에 의한 의회와 행정부의 장악은 한두 나라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며, 그 궁극적 원인은 세계화와 이민이다.(p.299)


저자 : 이철승


서강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복지국가, 노동시장 및 자산 불평등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에서 복지국가와 불평등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2005). 유타 대학교 사회학과 조교수, 시카고 대학교 사회학과 조교수를 거쳐 시카고 대학교 종신교수로 2017년까지 근무했다. 2011년부터 2017년까지 American Journal of Sociology 부편집장으로 일했다. 2011년과 2012년 전미사회학협회 불평등과 사회이동, 정치사회학, 발전사회학, 노동사회학 분야에서 최우수 및 우수 논문상을 수상했다.

American Sociological Review, Social Forces, Sociological Theory, World Politics, Comparative political Studies에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고, 『한국사회학』 『경제와사회』 『동향과전망』 『한국정치학회보』 『비판사회정책』 등에 「세대 간 자산 이전과 세대 내 불평등의 증대」 「한국 복지국가의 사회경제적 기초」 「한국 노동운동과 복지국가의 미래 전략」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2019년 번역?출간된 When Solidarity Work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6(『노동-시민 연대는 언제 작동하는가』, 박광호 옮김, 후마니타스)으로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저술 부문)을 수상했고, 같은 해 『한국사회학』에 발표한 「세대, 계급, 위계―386세대의 집권과 불평등의 확대」로 2020년 한국사회학회 최우수논문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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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 사고를 일으키는 의사들
대니엘 오프리 지음, 고기탁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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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이 책 『의료 사고를 일으키는 의사들』은 표제어는 사뭇 도발적이고 충격적이다. 표제어로만 봐서는 의사들의 실수나 과실로 환자가 오히려 더 큰 고통을 당하거나 심지어 사망에 이르는 피해를 받는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내부 고발자의 폭로성 발언이나 양심 선언일 것 같다는 느낌도 있다. 저자 대니엘 오프리는 뉴욕 대학교 의과 대학 교수로 일하며 뉴욕 벨뷰 병원에서 25년 간 환자들을 돌보고 있는 현직 의사다. 현직 의사가 의료진의 실수로 사망하는 숫자가 전체 미국인 사망자의 3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충격적 사실을 접하는 순간을 적었다. 책의 첫 문장은 "이게 정말 사실인가요?"로 시작한다. 저자에 따르면 2016년 어느 봄날 오후 비컨 출판사(이 책의 출판사)의 편집자가 저자에게 '믿을 수 없다'는 메일을 보내왔다. 메일에는 〈영국 의학 저널〉에 소개되며 여러 주요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한(동시에 의료계에 건전한 비평을 불러일으킨) 한 기사가 첨부되어 있었다.* 이 기사는 의료 실수가 미국의 전체 사망 원인 중 세 번째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정말?" 당황스러울 정도로 저자는 답변이 궁했다고 털어놓는다. 반신반의했다. 의료 실수가 정말 유방암이나 뇌졸중, 알츠하이머병, 고통사고, 당뇨병, 폐렴 같은 병을 제치고 3위라고? 저자는 미국에서 가장 큰 병원 중 하나인 밸뷰 병원에서 25년째 일하는 내과 전문의로서 오늘날 의료계에서 행하는 나름 합당한 한 단면을 보고 있다고 말한다. 21세기 '선진' 사회에 만연한 비만이나 당뇨병, 심장병, 고혈압, 암 같은 질병으로 고통받는 수많은 환자를 만났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덧붙인다.

따라서 만약 의료 실수가 세 번째로 높은 사망 요인이라면 저자 역시 수시로 그런 사례를 접했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데 생각이 미친다. 지인이나 가족을 통해 이야기를 듣지 않았을까? 심장병과 암에 이어서 세 번째로 마치 출근부에 도장을 찍듯이 빈번하게 사람을 죽인다면, 의료 실수는 저자가 의료 현장에서 일상적으로 겪는 일 중의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저자는 판단한다. 

* M. A. Majary and M. Daniel, 「Medical Error-the Third Leading Cause of Seath in the US,」 British Medical Journal(BMJ) 353


저자는 이날 이후 이 문제에 대해 천착한 듯하다. "의료 사고는 정당한 의학적 치료의 〈부작용〉이었을까? 아니면 명백한 부주의로 인한 결과였을까? 의료 실수 때문에 출혈이나 신부전, 혈전을 겪는 환자들은 어떤가? 얼마나 많은 환자가 치료 과정에서 위해를 당했을까? 일이 잘못되었을 때 의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의료 사고를 일으킨 의사들은 소송을 통해 징계받았는가? 환자들은 충분한 보상을 받았는가? 소송하지 못한 환자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의료 실수를 줄이고 환자의 안전을 개선하기 위해 무엇을 더 해야 할까?" 온갖 생각이 떠오른다.

책에 따르면 의료 실수에 관련된 자료는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다. 1년에 약 4만 4,000명에서 9만 8,000명이 의료 실수로 사망하는 것으로 추산하는 의료 협회의 1999년 최초 보고서부터 1년에 25만 명 이상이 상망한다고 주장하는 〈영국 의학 저널〉의 분석에 이르기까지, 마치 의료 실수 때문에 공중 보건에 비상사태가 초래되기 직전인 것처럼 보일 정도다. 설령 수치가 완전히 정확하지 않더라도ㅡ이들 보고서는 방법론에 문제가 제기되었다ㅡ연구자들은 의료 실수가 발생하는 빈도가 절대 낮지 않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자료가 틀렸을까? 아니면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일까?"

저자는 '세 번째 사망 원인'이라는 주장이 어쩌면 과장된 표현일 수 있지만 어쨌든 의료 실수를 둘러싼 공개된 통계와 현장에서 일하는 임상의들의 경험 사이에는 명백히 커다란 틈이 존재한다. 게다가 일상적인 환자들의 경험도 방식은 다르나 통계 자료와 견해를 달리한다. 깊은 생각과 고민 끝에 현역 내과 의사로서, 그리고 때때로 환자가 되기도 하는 한 사람으로서 저자는 이 문제의 진상을 밝혀야 할 의무감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공식적인 자료에 근거한 추론과 내가 경험하는 현실은 완전히 상반되어 보였다. 즉 둘 중 하나는 틀린 주장을 펴고 있다는 뜻이었고, 나의 목표는 누가 틀렸는지 알아내는 것이다."(p.13)


이 책은 앞서 언급한 이러한 질문에 대해 원인과 해결책을 찾으며, 크게 두 가지 비극적인 의료 사고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현대 의료 체계에서 반복되는 가장 가혹한 실수의 희생자인 '제이'와 '글렌'은 각각 급성 골수 백혈병과 화상 진단을 받았지만 그 과정에서 의사의 잘못된 진단, 간호사의 미온적인 대응, 그리고 감염 합병증을 비롯해 중환자실이나 대형 병원으로 빨리 이송하지 못한 점 등 각 단계별 의료 실수들이 점점 합쳐져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되는 엄청난 의료 사고로 이어진다. 문제는 그 이후에도 심각하다. 서로 책임을 전가하려는 의사들뿐 아니라 병원 측도 제대로 된 정보를 유족에게 전달하지 않는다. 남편과 아빠를 잃은 이 두 가족은 의료 소송에만 5년 이상이 걸렸다. 이들의 이야기는 의료 실수의 복잡성에 더해서 언제든 의료 실수가 일어날 수 있음을 전형적으로 보여 준다. 

저자 오프리는 제이와 글렌의 사례 외에도 다른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다. 그가 해부하는 의료 사고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실수부터 참혹한 의료 재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우리 의료 시스템은 현재도 완벽하고, 앞으로도 항상 완벽하겠지만 저자는 예방 가능한 위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며 이 주제가 오늘날의 의학적 담론에 활력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모두 17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점보제트기 추락 사고」 2장 「불확실의 바다」 3장 「진단과 누락」 4장 「발열」 5장 「진단적 사고(思考)」 6장 「추락」 7장 「공식적으로」 8장 「죽음이 남긴 것」 9장 「시간에 쫓겨서」 10장 「편견」 11장 「법정에서 봅시다」 12장 「더 나은 방법이 있을까?」 13장 「답을 찾아서」 14장 「우리 뇌에 맞추어」 15장 「심판」 16장 「환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17장 「바로잡다」 등이다. 의료 지식이 높은 독자들은 제목만 보면 내용의 전개가 대략 짐작할지도 모르지만 일반 독자들은 제목만으로 어떤 내용이 펼쳐질지 종잡기 어렵다. 의료 실수는 그 틈을 파고들기도 한다. 

의료 실수로 인한 '사망'은 의료 실수 때문에 피해를 보는 환자들의 일부 사례에 불과하다. 의료 실수 때문에 출혈이나 신부전, 혈전을 겪는 환자들은 어떤가? 사망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이런 부작용은 매우 심각한 위해다. 여기에 더해서 이제는 진단 실수와 진단 지연도 의료 실수로 간주되면서 '예방 가능한 위해'의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p.25) 


의료계가 의료 실수를 검토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M&M이라는 친숙한 이름으로 잘 알려진 '질병률과 사망률 회의'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의료계와 함께해 왔다. 질병률과 사망률 회의는 과거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부정적인 의료 결과에 대한 공식적인 평가를 제공하고 있다고 저자는 밝힌다. 하지만 의료 실수를 분석하는 과정에 우리 '의료계 영웅'들의 견고한 개인주의가 스며들면서 무엇이-더 흔하게는 '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는지 파악하고, 그 부분을 개선하는 방식이 보편적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의료 실수는 발전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단순한 부산물로 간주되는 정도였다는 주장이다. 모든 문제는 의료 연구가 끊임없는 진전을 이어감에 따라 저절로 해결될 일이었다고 결론을 내린 듯하다. 

이에 따라 의료 피해에 대한 고찰이 의료 연구의 활발한 분야가 아니었다는 점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의료계의 연로한 기득권층은 고귀한 의술-대규모로 진행되는 과학적 연구로 강화된-이 의료계의 성스러운 직무에 모범적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오히려 이런 맹점을 가장 먼저 지적한 사람들은 사실상 전공의들이었다. 저자는 이들 전공의들의 노력은 의료 사고 대안의 틀만 갖춰진 채 지속적인 연구가 명맥만 이어왔을 뿐 적극적인 노력은 없었다는 주장으로 이해된다. 

저자에 따르면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연구자들은 비로소 대대적으로 의료 피해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은 실질적으로 환자의 안전을 향해 있지 않았고, 아직은 그런 용어조차 만들어지 않은 상태였다. 그보다는 미국의 의료 실수 실패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의사들이 소송을 통해 징계를 받았는가? 환자들은 늘어난 의료비를 감당할 만큼 금전적으로 충분한 보상을 받았는가? 소송하지 못한 환자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이와 같은 의문들은 답을 얻을 수 없었다. 이후 문제에 대해서는 피해자든 실수한 의사든, 병원 측이든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이런 문제들을 엄밀하게 조사한 최초의 연구 중 하나는 하버드 의료 행위 연구였다*고 한다. 연구자들은 1984년에 만 1년 동안 뉴욕주에 있는 51개의 병원을 조사했다고 저자는 밝힌다. 저자는 당시 하버드 연구자들은 치부가 공개되더라도 그들 병원이 있는 매사추세츠주가 아닌 뉴욕주의 문제로 비치기를 바랐던 것으로 추측한다. 그들은 무작위로 3만 121개의 차트를 선별했고, 그들이 치료 과정에서 의도되지 않은 상해로 규정한 이상 반응 횟수를 기록했다. 해당 연구에 따르면, 입원 치료의 3.7퍼센트가 의료 상해로 드러났고 그중 14퍼센트는 치명적이었다는 것. 이 같은 연구 결과를 뉴욕주의 모든 거주자에게 적용한다면 1984년 한 해에만 병원 치료의 결과로 거의 10만 건에 달하는 의료 상해(1만 3,451명의 사망자와 2,550건의 영구 장애를 포함하여)가 발생했음을 의미한다고 저자는 추산한다.

해당 연구자 중 한 명인 소아외과 의사 루치안 리프는 환자들을 상대로 자행되는 엄청난 규모의 위해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에 따라 그는 외과용 메스를 내려놓은 채 이러한 자료를 연구하는 데 남은 경력을 바쳤다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1994년 리프는 의료 실수 연구의 초점을 기존의 의료 소송 체계가 아닌 의료 행위를 전반적으로 더 안전하게 만드는 목표로 재설정하는 중대한 논문을 발표한다. 리프는 우선은 자료 수집 단계에서 상해를 입힌 실수뿐 아니라 모든 실수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었다. 의료 전문가들은 실수가 환자의 상해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안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리프의 논문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는 의료 실수가 일반적으로 개인의 실패뿐 아니라 시스템의 실패에서 기인한다는 내용이었다. 즉 의료 실수의 직접적인 원인이 간호사가 잘못된 약을 투약하는 사례처럼 사실상 인간의 행위인 경우에도 우리는 언제나 그와 같은 실수를 가능하게 만든 시스템상의 중첩된 오류를 발견할 수 있었다는 점을 증거로 내세웠다. 원인을 찾아들어가서 의료 실수의 범위가 의사의 잘못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간호사 등 의료진 모두에게 실수의 범위를 늘려 잡은 것이다. 이렇게 간호사의 실수가 있었음을 확인했다면 단순히 간호사의 실수로만 그치지 않고, 왜 간호사가 그런 사소한 실수를 했는지에 대한 근무 환경과 시스템까지도 모두 실수의 범주에 포함시킨다는 말이다. 리프는 이 같은 연구 결과를 토대로 "실수는 인간보다 시스템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프는 의료 사고의 범주를 넓히면서 유명한 말도 남겼다. "인간은 실수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전제하기보다 실수하지 않을 거라고 전제하는" 의료 체계의 근본적인 실수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한 점이다. 

* T. A. Brennan et al., 「Incidence of Adverse Events and Negligence in Hospitalized Patients-Results of the Harvard Medical Practice Study I,」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 324(1991): 370~376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현대 의료 체계에서 반복되는 가장 가혹한 실수의 희생자인 제이와 글렌의 경우를 철저하게 조사하고 연구하면서 이 책에 그 과정을 밝히고 있다. 결코 적지 않은 분량의 책을 쓴 것은 저자의 노력의 결과물인 것이다. 저자는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며 확증으로 단언할 수 있는 것을 찾아들어가 대안까지 제시하는 현직 의사로서의 면모도 보여준다. 이에 앞서 객관적 연구 자료를 통해 의료 실수를 줄이고, 이를 위해 어떤 시스템이 갖춰져야 하는지까지 제시하고 있다. 서두에 독자가 느꼈던 의료 실수의 객관적 자료와 통계를 바탕으로 수많은 고민과 생각의 결과를 하나씩 하나씩 찾아들어가 정확하게 문제점을 짚어내 대안까지 제시하는 모습은 의학이 왜 과학인지, 과학이지만 그들의 능력을 왜 인술(仁術)이라고 하는지 공감할 수 있다. 


의료 소송은 완벽과 거리가 멀다. 관련 비용과 수고, 엄중함 때문에 의료 실수를 겪은 환자 중 오직 소수만이 선택하는 방법이다. 심지어 의료법도 일관성이 거의 없다. 배심원이 다르면 비슷한 사건이라도 얼마든지 상반된 결과가 나올 수 있으며, 환자에 대한 배상금도 그때마다 막대한 차이를 보인다. 이외에 자기방어적 의료 조치ㅡ실제든 망상이든 간에 소송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의사들이 시행하는 모든 추가적인 검사와 치료ㅡ라는 부작용도 존재한다.(p.305)


저자 : 대니엘 오프리(Danielle Ofri, MD)


오늘날 의료계에서 가장 중요한 목소리를 내는 내과 의사 중 한 명으로, 의사와 환자 사이에 존재하는 유대감과 장벽에 대해, 그리고 무엇보다 의사들이 그들의 권한과 한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뉴욕 대학교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교 의과 대학원에서 약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뉴욕 대학교 의과 대학 교수로 일하며 뉴욕 벨뷰 병원에서 20년 넘게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감정이 의료에 가하는 영향에 관해 연구와 저술을 이어 오며 의사의 감정이 의료에 미치는 영향을 파헤친 『의사의 감정』을 발표했다. 또한 『벨뷰 문학 평론』의 창립자이자 편집장으로 활동하며 『뉴욕 타임스』, 『뉴잉글랜드 의학 저널』, 『랜싯』에 정기적으로 글을 쓰고 있다. 의학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뛰어난 공헌으로 미국 의학 작가 협회로부터 맥거번상을, 골드 재단으로부터 국가 휴머니즘상을 받았다. 미국 여러 의과 대학과 레지던트 과정에서 그의 책과 글을 교육 과정에 활용하고 있으며 특히 『외래 의학을 위한 벨뷰 가이드』는 최고의 의학 교과서상을 수상했다. 〈의료 실수〉라는 만연한 문제의 원인을 능숙하게 진단한 『의료 사고를 일으키는 의사들』에서는 모든 환자가 이해할 수 있는 체계적 분석을 넘어서 의료 서비스를 정상화하는 방법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역자 : 고기탁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를 졸업하고, 펍헙 번역 그룹에서 전문 번역가로 일한다. 옮긴 책으로 앤드루 솔로몬의 『부모와 다른 아이들』, 에번 오스노스의 『야망의 시대』, 프랑크 디쾨터의 인민 3부작인 『해방의 비극』, 『마오의 대기근』, 『문화 대혁명』, 토마스 프랭크의 『민주당의 착각과 오만』, 헨리 M. 폴슨 주니어의 『중국과 협상하기』, 윌리엄 H. 맥레이븐의 『침대부터 정리하라』, 캐스 R. 선스타인의 『TMI: 정보가 너무 많아서』, 『동조하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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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떠 있는 것 같아도 비상하고 있다네 세트 - 전2권 쓰는 기쁨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유영미 옮김 / 나무생각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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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프리드리히 니체의 이름을 들먹이면 아는 체한다. 그만큼 대한민국의 독자들에게 니체는 잘 알려져 있다. 학교에서 그의 철학을 많이 가르쳐서 알게 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독자 생각으로는 코로나 팬데믹 덕분이다. 코로나 펜데믹이 세상에 막 알려질 무렵 전 세계가 비상이 걸렸다. 감염병 발생지가 어디든간에 감염병 발생, 특히 호흡기 관련 감염병이라면 전염성이 강하기에 우선 국경부터 틀어막는다. 그만큼 세상이 개방되고 가까워졌다는 이야기다. 말 그대로 하루면 지구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갈 수 있는 세상이다. 니체가 왜 코로나와 관계가 있을까? 독자의 판단이지만, 독자 역시 재택 근무가 늘어나면서 회사를 직접 출근하지 않은 날이 많았다. 나중에는 일주일에 하루만 회사에 나가기도 했다. 출퇴근 시간과 준비하는 시간 등에 하루의 상당 부분 사용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간이 많이 남아 밖에 나다니는 것이 제한돼 있어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졌다. 직장 생활한다는 핑계로 멀리했던 책을 손에 잡았다. 잘 들르지 않던 온라인 서점을 찾았다.

처음에는 조금 낯설고 서먹서먹했지만 이내 평정을 찾았다. 카테고리를 먼저 익히니 이용법에 금세 익었다. 처음 들어갔을 때 깜짝 놀랐던 것은 '니체'의 책이 많았다는 점이다. 니체의 저서 번역본은 물론, 우리나라 철학자가 쓴 니체의 해설서, 또 주석서, 에세이 등 다양하게 니체는 대한민국 독자들에게 읽히고 있었다. 왜 니체가 인기(?)가 좋을까? 오랜만에 서점에 들른 독자가 섣불리 판단 내릴 문제는 아니었다. 베스트셀러 중 한 권을 선택해 주문했다. 니체 관련 책은 아니었다.

며칠 후 신문에 니체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일간지 일요판 '책 소개' 면이었다. 니체의 책이 가장 크게 지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책에 관한 이야기였으나 기사 중에는 니체가 가장 많이 찾는 책 중의 하나라는 내용이 있다. 책을 담당하는 기자가 쓴 글이다. 그렇게 말한 근거도 '서점 집계'로 표현하고 있었다. 결국 그 책을 온라인 서점으로 달려가 주문했다. 니체는 그렇게 독자와 가까워졌다. 그러나 번역본은 물론 우리나라 학자가 쓴 '니체 철학'마저 쉽지 않았다. 우리 학자로서는 굉장히 쉬운 말로 쓰고 있는 것 같지만 한두 문장을 지나면 앞 문장의 말과 연결이 안 되는 듯한 느낌이었고, 에세이마저 단숨에 내리 읽기는 힘들었다. 

"니체는 어렵다." "그런데도 코로나 펜데믹을 맞아 대한민국 독자들은 니체를 가장 많이 읽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기사가 다시 떠올랐다.


몇 년 후 니체의 아포리즘과 통찰에 관련된 국내 저자가 쓴 에세이를 읽었다. 그 내용에는 그 책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내가 누구인지 밝혀두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 같다. 사실 사람들은 내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을 수 있다···. 나는 철학자 디오니소스의 제자이다. 나는 성인이 되느니 차라리 사티로스이고 싶다.” 그는 책의 서문을 그렇게 썼다. 그는 자신을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제자로 규정했다. 그리고 반인반수의 사티로스(Satyros)가 되기를 원했다. 사티로스는 얼굴은 사람이지만 몸은 염소이며, 머리에 작은 뿔이 난 디오니소스의 시종이다. 주신을 모시는 시종답게 술과 여자를 좋아하며, 과장된 표현과 몸짓으로 우스꽝스러움을 자아내는 급이 뚝 떨어지는 잡신이다. 이 말을 한 사람은 누구일까?

디오니소스의 제자이며 디오니소스의 시종을 희망한 이 사람은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다. 그리고 이 책 이름은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이다. 제목과 서문도 파격이지만, 본문은 한 술 더 뜬다. 『이 사람을 보라』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네 개의 질문을 던지고 차례로 응답한다.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가?”,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가?",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왜 하나의 운명인가?”

고등학교 교과서를 제외하고는 코로나 펜데믹 이전까지 철학 책을 읽은 적이 독자의 기억에는 없었다. 고등학교 때도 학과목 이름이 〈국민윤리〉였지 〈철학〉이란 단어를 쓰지 않았었다. 교과서 안에 서양철학자와 동양철학자 등의 이름이 나온 것을 보고서야 '철학' 과목인 줄 인식했다. 고등학교 교양과목이었을 뿐 입시에도 들어가지 않은 과목이었기에 그나마 수업 시수가 적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마디로 철학과는 먼 삶을 살아왔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나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자 너무 오랫동안 책을 읽지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인지했다. 간단한 말로 시간이 많아서 철학 책을 다시 손에 들었던 것이다.


이 책 『그냥 떠 있는 것 같아도 비상하고 있다네』는 니체 '시' 필사집이다. 다시 말해 니체의 철학이나 에세이도 아니고 아포리즘을 다룬 것도 아니다. 니체가 직접 쓴 시 가운데 100편을 선별해 필사집으로 묶었다. 니체가 근대 이후 가장 위대한 철학자란 말은 들었지만 시인으로서 니체를 생각하진 못했다. 가끔 철학서에서 인용된 시를 본 적이 있고, 에세이에서도 니체의 시 일부를 인용하고 있던 것을 본 기억이 있지만 니체가 이렇게 많은 시를 썼다는 사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았다. 니체를 읽었지만 겉만 읽었다는 뒤늦은 자책감도 들었다. 

코로나 발생 직후에 한참 쏟아져 나온 철학 책은 대부분 '니체'였다. 니체의 철학을 해석하고 설명해주는 책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철학적 접근이었다. 번역하는 분들도 모두 철학자이고 니체를 전공했던 분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그 분들 중에서도 "니체는 쉽지 않다"고 미리 경계하는 분들도 있다. 어설프게 그의 명언 몇 개에 정신을 쏟다보면 그의 위대한 철학에는 접근도 하지 못하고 손에서 책을 놓게 될 것이란 경고에 가까운 말을 하기도 한다. 이 시집의 내용은 어떨까? 이 책에 「삶을 놀이로서 즐긴 철학자 시인」이란 제목의 〈추천사〉를 쓴 시인 장석주는 "니체는 살아 있음을 긍정하는 철학자다. 그는 누구보다 생의 즐거움과 행복을 사랑하고, 생명을 쇠락으로 이끄는 것들을 거부한다. 그리고 삶을 무한 긍정한다."고 썼다. 시인은 이어 "매사에서, 큰일에서나 작은 일에서나, 언젠가 때가 되면 나는 단지 긍정하는 자가 되고자 한다." 그리고 아모르 파티(Amor fati): "이것이 삶이더냐?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을 외치면서 생을 품는다고 니체의 시 세계로의 안내문을 쓰고 있다. 

〈추천사〉에 따르면 신의 돌연한 죽음으로 유럽의 가치 체계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 최초로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한 철학자! 니체는 유럽 문명에 곧 황혼이 드리울 것을 알아차렸다. 이 황혼이야말로, 유럽 문명을 덮을 긴 밤, 긴 어둠을 예고한다. 삶이 뒤집히고 유례없는 허무주의의 그림자가 유럽을 뒤덮을 걸 앞서 내다본 니체는 자신도 그 그림자를 밟고 서 있을 운명이라는 걸 알았다.



니체는 신이 죽었다는 소문이 퍼졌을 때 아침놀이 밝아오는 예감을 느끼고 받아들인다고 시인 장석주는 설명한다. 허무주의가 빗장을 열고 들어와 세상을 덮치자, 예언자 니체는 허무주의의 그림자, 어둠이 잉태한 여명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오 사람아,

귀 기울여 들어보아라

깊은 밤이 뭐라고 말하는가

나는 잠들었다가

깊은 꿈에서 깨어났다

세상은 깊다

낮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깊다

세상의 고통은 깊다

쾌학은 마음의 근심보다 더 깊다

고통이 말한다

꺼져버려! 

- 「취가」 중에서


니체는 사람들에게 권유한다. 오 사람아, 귀 기울여 들어보아라, 깊은 밤은 뭐라고 말하는가? 세상은 깊다. 그렇다면 세상의 고통도 깊을 것이라고. 니체는 그것이 우리 실존의 조건임을 알았지만 그것에 체념하고 순순히 그 고통의 아가리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사람들에게 시를 통해 말한다. 니체는 어떤 경우에도 시에서 우리를 가르치려고 들지 않는다. 다만 우리 스스로 공감하고 깨닫기를 갈망한다고 시인은 지적한다.

장석주 시인에 따르면 니체는 철학자로 유명하지만 사실 그 어떤 유명한 시인보다 더 삶의 심연을 궤뚫어 본 시인이다. 그에게 시와 철학은 한 나무에서 뻗어 나온 두 가지였다. 니체는 삶을 궤뚫고 비극적 조건을 끈질기게 응시한 뒤 몇 개의 지헤를 거둔다. 그리하여 삶과 죽음, 절망을 견디는 강인함, 행복과 불행, 고독 속에서 빚는 자유, 놀이로서의 삶, 선악의 피안을 두루 사유하고, 수직적 높이의 숭고함을 찬양한다.

그의 시에서 너무나 많은 인생을 배웠다고 시인은 털어놓는다. 시인이 니체에게서 늘 감탄한 것은 그가 마치 한 쌍이 아니라 여러 겹의 생을 살아낸 사람 같다고 느낀다고 이야기한다. 니체는 고독 속에 칩거하여 인생을 궁구하고, 생의 환희를 찾아내서 기쁜 목소리로 노래한다고도 평한다. 니체의 시구들은 촌철살인의 진리를 담아낸다고 말한다. "춤추는 별을 탄생시키기 위해 사람은 자신 안에/ 혼돈을 품고 있어야 한다."(p.162, 「춤추는 별을 탄생시키기 위해」), "자, 무수한 등을 타고 춤추어라/ 파도의 등을 타고, 파도의 심술을 견디며 춤추어라"(p.188, 「북서풍에게」), "강인함을 잃지 마라, 내 용감한 심장이여!/ 이유는 묻지 마라!"(p.172, 「해가 저문다」),, "가라, 꺼져버려라/ 너희 침울한 눈빛의 진리여/ 나는 덜 여물어 떫고 성급한 진리가/ 내 산마루에 머무는 걸 보고 싷ㅍ지 않다!"(p.244, 「가장 부유한 자의 가난에 대하여」) 같은 구절을 읽을 때, 나는 전율을 느낀다. 

시인은 또 니체는 높은 산꼭대기를 사랑한 철학자, 삶을 높이로서 즐긴 시인, 하늘과 벼락을 사모한 철학자라고 설명한다. "니체가 사랑하고 좋아한 것은 "숲과 바다의 동물들처럼/ 한참 동안 넋을 잃고 한눈을 파는 것/ 사랑스런 혼란 속에 쪼그려 앉아 사색에 잠기는 것/ 그리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지는 것/ 나 자신에게로 이르는 것"(「고독한 자」)이다고 강조한다.



번역자 유영미는 니체와의 만남은 다른 철학자들과의 만남과는 사뭇 다르다고 〈옮긴이의 글〉에서 적고 있다. 이에 따르면 망치를 든 철학자라는 별명답게, 그의 글 하나하나가 우리의 가슴을 쿵쿵 울려대고 나태한 정신을 흔ㄷ르어 깨운다. 영원한 젊음과 용기로 무장한 정신이 새로운 삶, 세로운 유희로 주저 없이 나아가게 한다. 사유의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 그것이 바로 니체다.

역자는 세상과 타협하기보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도전하는 니체의 시(詩)에서도 그 모습이 빛난다고 말한다. 알프스의 산속에서, 이탈리아의 햇살 아래서 빚어낸 그의 사색은 시의 형태로도 고스란히 전달된다고 밝힌다. 사유의 깊이가 워낙 심오하다 보니 다소 어려운 시도 있고 단번에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 시도 있다. 니체의 초기 시들은 약간 서정적이라고 역자는 풀이한다. 냉소적인 시도 있고,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삶에 대한 애정이 엿보이는 시도 있다. 삶과 사상이 깊이 연결되어 있던 철학자니만큼 니체의 삶과 철학을 알면 니체의 시도 자연스럽게 이해될 것이라고 역자는 조심스럽게 귀띔한다. 하지만 배경 지식이 없다고 크게 걱정하지 말라고 역자는 독자들을 안심시킨다. 니체를 좋아해서 젊은 시절 비 내리는 일요일이면 니체를 열 시간씩 탐독하곤 했던 헤르만 헤세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역자는 전한다.

"음악은 다만 우리의 영혼만을 요구한다." 시 또한 음악과 가까운 장르이니, 일단은 헤세가 그랬듯 우리의 영혼만 가지고 니체를 읽어도 충분하리라고 역자는 속내를 드러낸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삶의 자리가 다르니만큼, 니체 시를 통해 받아들이는 메시지들도 다른다는 말이다. 아무쪼록 삶을 변화시키는 한 구절, 용기와 힘을 주는 한 구절을 만날 수 있기를 역자는 바란다. 그리하여 삶을 뜨겁게 사랑하라고 말한 니체의 노래를 같이 부를 수 있기를 역자는 기대한다.


저자 :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년 10월 15일 독일 뤼첸 근처 뢰켄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1900년 8월 25일 바이마르에서 사망했다. 1849년, 니체가 다섯 살이 되던 해 아버지의 사망으로 어머니와 여동생, 하녀 등 여성으로만 둘러싸인 유년 시절을 보냈으며 신체적으로 쇠약하여 일생을 잔병치레로 고통받았다. 1864년 본 대학에서 신학과 고전 문헌학을 전공하다가 스승인 리츨 교수를 따라 1865년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겨 문헌학 전공으로 학문을 이어나갔고 1869년에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독일 지성사에서 가장 논란이 많고 영향력 있는 철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니체는 시인이자 음악가이기도 했다. 개신교 목사의 아들이자 모범생으로, 학교의 수석 학생으로, 마침내 바젤 대학의 최연소 교수로 젊은 나이에 성과에 대한 압박과 고통을 견뎌냈다. 따라서 늘 ‘내면의 혼돈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를 깊이 고민했다. 저서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비극의 탄생』 『디오니소스 송가』 『이 사람을 보라』 『바그너의 경우』 『즐거운 지식』 『도덕의 계보학』 『우상의 황혼』 『선악의 저편』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아침놀』 『반시대적 고찰』 『생성의 무죄』 『힘에의 의지』 『우리 문헌학자들』 등이 있다. 


역자 : 유영미


연세대학교 독문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쓰는 기쁨: 슬퍼하지 말아요, 곧 밤이 옵니다》 《카이로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감정사용설명서》 《가문비나무의 노래》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 《예민함이라는 무기》 《부분과 전체》 《혼자가 좋다》 《불행 피하기 기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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