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팔십팔만원 세대와 베이비붐 세대 사이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기 어렵다. 특히 빈곤 청년과 부유한 노인이 얼굴을보고 평등하게 의견을 나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뿌리깊은 유교 문화의 문제도 있고, 대개 빈곤 청년과 부유한 노인은 머무는 공간 자체가 분리된다. 갈등의 결은 어떨까? 영호남 사이의 적대감은 일종의 ‘악마화‘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지역갈등의 당사자들은 〈우리〉와<그들>을 구분하고, <그들>을 ‘나쁜 놈들, 교활한 인간들‘로 묘사했다. 그런데 이때 <그들>은 적어도 머리가 나쁘지는 않았다. 지성이라는 면에서는 우리와 같은 존재였다. 냉전 시대 미국과소련, 종교전쟁 시대 구교도와 신교도가 상대를 이렇게 봤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세대갈등은 그와는 다소 다른듯하다. ‘악마화‘라기보다는 ‘비인간화‘에 가깝지 않나 싶다. 세대갈등의 당사자들 역시 <우리>와 <그들>을 구분한다. 그런데 이때 <그들은 사악하다기보다는 차라리 ‘덜 떨어진 인간들‘이다. 제국주의 시대 유럽인이 유색인종을 보던 태도에 가깝다. 젊은 세대는 노인들이 쓰는 거친 언어와 난폭한 행동에 경악한다. 그들은 둔하고, 볼품없고, 촌스럽다. 인권을 비롯해 현대사회 시민이 지녀야 할 기초적인 개념과 소양을 두루 갖추지못한 것 같다. 몰상식한 주제에 억지까지 부린다. <그들>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종종 ‘역겹다‘는 것이다. 노인 세대는 요즘 젊은 사람들이 약하고 얕다고 여긴다. 나는얼마 전 어느 장례식장에서 전직 관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팔십팔만원 세대에 대한 이들의 솔직한 정서는 ‘같잖음‘인듯했다. 정돈된 거대 담론에 익숙한 과거의 엘리트들에게 <그들>의 주장은 일관성이라고는 없이 그저 중구난방이고 엉성해보일 뿐이다. <그들> 중 며칠 굶어본 사람이 없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악마화는 증오로 이어진다. 비인간화의 정서는 경멸이다. 어떤 면에서는 증오가 경멸보다 쉽게 풀린다. <그들>이 굴복하거나 참회하면 된다. 경멸은 그런 식으로는 사라지지 않는다. 상호 경멸이라는 형태로 반목하는 두 집단이 상대를 이해하고 인정하려면 어떤 기적이 일어나야 할까. 최근 갈등의 모양새는 비인간화 위에 악마화까지 덧씌워지는 중 아닌가 하는 우려도든다. - P129
우리는 삼십 년쯤 뒤 한반도가 어떤 모습이길 바라는 걸까? 통일 대통령과 통일 국회가 있기를 바라는가? 평양의 주체사상탑은 그 이름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하나? 젊은 여성이 다 남쪽으로 내려갔다며 북한 총각들이 울분을 터뜨리는 시나리오는 미리 막아야 할까?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가? 평화와 통일, 경제와 공화가 충돌할 때 어떤 가치를 좇아야 하는가? 이런 질문에 답을 해줄 새로운 담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그 담론의 청사진을 여기서 소상히 그려낼 능력은 없다. 다만 두 가지 조건은 갖춰야 하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하나는, 새 담론이 개인의 삶과 연관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한반도가 좋은 미래로 가는 과정은, 내가 좋은 삶을 사는 길이기도해야 한다. 남북 화해 협력은 한반도에서 사는 개개인에게 이익이어야 한다. 또한 특정 계층의 희생을 바탕으로 총합이 더커지는 노선이라면 지름길이라도 거부해야 한다. ‘좋은 삶‘은 경제적 문제인 동시에 도덕적 문제이기도 하다. 세월호가 가라앉았을 때 우리는 좋은 삶을 누릴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북한의 요덕수용소가 있는 한 우리가 좋은 삶을 누리긴 어렵다. 서울에서 요덕수용소는 팽목항보다 가깝다. 새 담론은 그렇게 개인의 삶과 연결되는 동시에 세계와도 연결돼야 한다. 한반도의 지정학에서 벗어나 다른 지역의 국제분쟁, 빈부 격차, 난민 문제에도 적용할 수 있는 보편 가치, 인권철학이 담겨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 우리의 목소리를 다른 나라에서도 귀기울인다. 협상 당사자로 나서야 하는 정부는 이 문제에서 운신의 폭이 좁다. 시민사회의 역할이다. 우리는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 우리 자신을 보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호랑이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이다. 우리가 마련할수 있는 가장 좋은 재갈은 도덕적 정당성이라고 생각한다. 튼튼한 재갈을 채운 뒤에도 호랑이 등 위에서 한참 힘을 겨뤄야 할듯싶다. - P157
‘남북 관계의 특수성‘ ‘특수한 상황‘ 때문인가, 통일부가 올해 발간한 책자 2021 북한인권 알아가기』에는 그런 표현이 되풀이해서 나온다. 나는 북한 같은 거대한 악 옆에서 사는 사람에게는 특수한 도덕적 의무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특수한 상황 앞에서도 보편 가치를 주장해야 하는 책무다. 1930년대 독일 지식인들에게는 그런 의무가 있었다. 인생이 도덕적 책무로만 구성되는 것은 아니며, 도덕에 짓눌리는게 좋은 삶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도덕적 책무의 우선순위를 따지는 것은 위험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개들을 굉장히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유기견 구조 단체가 아니라 북한 인권 단체를 후원한다. 남에게 강요할 수는 없지만 내게는그런 순서여야 할 것 같다. 북한이라는 나라 옆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과거 군사 독재정권이 북한의 존재를 권력 유지의 도구로 이용하는 바람에 한국의 이념 지형은 몹시 왜곡됐다. 거기 휘둘리지 않는 세계시민이 되어야 한다. 동시에 이 장소, 이 문화, 이 언어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책임감도 필요할 것 같다. 북한을 제일 잘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은 결국 한국인이다. 종전 선언 추진 기사들을 읽으며그런 생각들을 해본다. - P161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후손들의 일손을 왜 우리가 염려해주나. 그들에게는 우리보다 뛰어난 과학기술이 있을 텐데. 우리는 미래의 노동력 부족이 아니라 현재의 행복 부족을 고민해야 한다. 노인이 많아지는 현상을 보고 경제력이니 생산성이니하는 차가운 관념을 떠올리기보다, 그 많은 노인들의 표정을 살폈으면 좋겠다. 한국은 가난한 노인과 자살하는 노인이 엄청나게 많은 나라다. 흔히들 청년 자살이 많아서 한국의 자살률이 높다고 오해하는데, 그렇지 않다. 한국에서 십오~ 이십구 세 청년들은 십만 명당 18.2명이 자살하는 반면, 칠십 세 이상은 십만 명 중 116.2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2014년 세계보건기구 보고서 참고). 육십오 세 이상에서 빈곤층 비율은 OECD 회원국 중 압도적1위다. 아이가 적다는 게 아니라 불행한 노인이 많다는 게 우리의진짜 문제다. ‘그 노인들에게 연금을 주려면 젊은이들이 많아야하고, 그러기 위해 출생률을 높여야 한다‘는 도돌이표 같은 주장에 반대한다. 기업에서 개인까지, 고소득자에서 저소득층까지, 전반적으로 부담의 수준을 높이고 혜택도 많이 받는 사회가되는 게 답이다. 출산이 사회적 책임인 양 몰아가지 말자. 출산이 아니라 세금이 책임이다.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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