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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문소

미국인은 리머스에게 다시 커피 잔을 건네주면서 말했다.
「돌아가서 한숨 주무세요. 그 사람이 나타나면 전화로 알려 드리겠습니다.」리머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검문소 창문 너머로 텅 빈거리를 내다보았다.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다른 시간에올지도 모릅니다. 그가 오면 본부로 연락해 달라고 경찰에부탁해도 됩니다. 본부에서 이곳까지 넉넉잡고 20분이면 달려올 수 있을 겁니다.
「이제 곧 어두워질 거요.」 리머스가 말했다.
「하지만 영원히 기다릴 수는 없잖습니까. 벌써 예정보다아홉 시간이나 지났어요.」 - P7

카를은 차단기를 지나 그들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해냈다. 이제는 도로 한복판에 있는 인민경찰과 경계선만 지나면 안전하다.
그 순간 카를이 무슨 소리를 듣고 위험을 느낀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고는 자전거 핸들 위로 몸을낮게 구부리고 맹렬히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아직 다리 위에 혼자 서 있는 보초가 있었다. 그는 돌아서서 카를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예기치 않게 서치라이트가 켜졌다. 눈부시게 새하얀 빛이 카를을 포착했다. 카를은 자동차 헤드라이트불빛에 갇힌 토끼 같았다. 위아래로 요동치는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칠게 명령을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리머스앞에서 두 경찰관이 무릎을 꿇고 모래주머니 틈새로 그쪽을내다보면서 능숙한 솜씨로 자동 소총을 재빨리 장전했다.
동독 보초는 조심스럽게 그들을 피해 자기 구역 쪽으로 총을 쏘았다. 첫 번째 총알은 카를을 앞으로 홱 밀어붙인 것 같았고, 두 번째 총알은 그를 뒤로 잡아당긴 것 같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그는 아직 움직이고 있었다. 아직 자전거 위에 앉아서 보초 옆을 통과했다. 보초는 여전히 그에게 총을 쏘고있었다. 그때 카를이 축 늘어지면서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들은 쓰러진 자전거가 달각거리는 소리를 또렷이 들었다. 리머스는 카를이 죽었기를 신에게 기도했다. - P17

「문트를 처치하는 일이라면 기꺼이 하겠습니다.
「정말로 그런 기분을 느끼고 있나?」 관리관이 은근하게 물었다. 그러고는 생각에 잠긴 눈으로 잠시 리머스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래. 자네는 정말로 그런 기분인 것 같군. 하지만 그 기분을 말로 표현해야 한다는 느낌이 들면 안 돼. 우리세계에서는 미움이나 사랑 같은 감정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뜻일세. 어떤 소리는 개가 들을 수 없듯이•••••• 결국 남는 것은 일종의 구역질뿐일세. 자네는 두 번 다시 그런 고통을 초래하고 싶지 않을 거야. 미안하지만, 카를 리메크가 총에 맞아 쓰러졌을 때 자네가 느낀 것도 그런 구역질이 아니었나? 문트에 대한 미움도 카를에 대한 애정도 아닌, 무감각한 몸뚱이를 한 대 맞은 것처럼 구역질 나는 충격이 아니었나는 말일세. 듣자니까 자네는 밤새도록 거리를 헤매 다녔다더군. 베를린 시내를 그냥 정처 없이 쏘다녔다고. 그게 사실인가?
「산책을 한 건 맞습니다.
「밤새도록?」
「네」 - P31

「앨릭, 당신은 뭘 믿어요? 웃지 말고 말해 주세요.」리즈는 대답을 기다렸다. 마침내 리머스가 말했다.
「나는 열한시 버스를 타면 해머스미스까지 나를 데려다줄 거라고 믿어. 그 버스를 모는 사람이 산타클로스라고는믿지 않아
리즈는 이 대답을 잠시 생각하는 눈치더니 다시 물었다.
하지만 뭘 믿으세요?」
리머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은 틀림없이 뭔가를 믿고 있을 거예요.」 리즈는 고집스럽게 말했다. 하느님 같은 것•••••• 나는 알아요, 앨릭. 당신은 이따금 그런 표정을 지어요. 특별히 할 일이 있는 사람처럼 말이에요. 마치 신부님처럼••••••. 웃지 마세요. 그건 사실이니까
리머스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당신이 오해했어. 나는 미국인과 퍼블릭스쿨을 좋아하지 않아. 군대 행진도 좋아하지 않고, 군인답게 행동하는 사람들도 좋아하지 않아 그는 웃지도 않고 덧붙여말했다. 그리고 인생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좋아하지않아」 하지만 앨릭, 그렇게 말하기보다는 차라리••••••.」 이 말을 덧붙였어야 하는데 깜박 잊었군 리머스가 리즈의 말을 가로막았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 편이 낫다고 나한테 충고해 주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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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은 차단기를 지나 그들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해냈다. 이제는 도로 한복판에 있는인민경찰과 경계선만 지나면 안전하다.
그 순간 카를이 무슨 소리를 듣고 위험을 느낀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고는 자전거 핸들 위로 몸을낮게 구부리고 맹렬히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아직 다리 위에 혼자 서 있는 보초가 있었다. 그는 돌아서서 카를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예기치 않게 서치라이트가 켜졌다. 눈부시게 새하얀 빛이 카를을 포착했다. 카를은 자동차 헤드라이트불빛에 갇힌 토끼 같았다. 위아래로 요동치는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칠게 명령을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리머스앞에서 두 경찰관이 무릎을 꿇고 모래주머니 틈새로 그쪽을내다보면서 능숙한 솜씨로 자동 소총을 재빨리 장전했다.
동독 보초는 조심스럽게 그들을 피해 자기 구역 쪽으로 총을 쏘았다. 첫 번째 총알은 카를을 앞으로 홱 밀어붙인 것 같았고, 두 번째 총알은 그를 뒤로 잡아당긴 것 같았다. 그래도어떻게든 그는 아직 움직이고 있었다. 아직 자전거 위에 앉아서 보초 옆을 통과했다. 보초는 여전히 그에게 총을 쏘고있었다. 그때 카를이 축 늘어지면서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들은 쓰러진 자전거가 달각거리는 소리를 또렷이 들었다. 리머스는 카를이 죽었기를 신에게 기도했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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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저블 ㅡ (프리즘 양에게) 레티시어! (그녀를 포옹한다.)프리즘 양 ㅡ (열정적으로) 프레더릭! 마침내!
앨저넌 ㅡ 세실리! (그녀를 포옹한다.) 마침내!
잭 ㅡ 그웬덜린! (그녀를 포옹한다.) 마침내!
브랙널 부인 ㅡ 조카야, 너는 경박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구나.
잭 ㅡ 그 반대죠, 오거스터 이모. 저는 평생 처음으로 진지해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어요.

(모든 인물 동작 정지.)

(막) -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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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애(benevolentia)란 우리가 불쌍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친절하려고 하는 욕망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명료한 지적이지만,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느낌도 든다. 스피노자의 정의를 따르면, 누군가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박애의 감정은 생길 여지도 없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누군가를 불쌍히 여긴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겠다. 다행히 스피노자는 우리의 이런 궁금증을 미리 짐작하고있었다. "자신과 유사한 어떤 것이 어떤 정서에 자극되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것과 유사한 정서에 의해 자극된다."라고 그는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다. 사회적으로 천대받아 얼어 가던 과거를 간직하고 있는 장 발장에게 부모를 잃고 오갈데가 없어진 코제트는 ‘자신과 유사한‘ 존재였다. 그러니 코제트의 비참은 바로 장 발장의 내면에 트라우마로 각인되어 있던 비참의 느낌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배고픔을 겪어 본 사람만이 자신과 유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자기 밥을 나누어줄 수 있고, 가혹한 추위 속에서 생사의 기로에 서 있던 사람만이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옷을 벗어 줄 수 있는 법이다.  - P121

사랑은 함께 있을 때는 기쁨을, 반대로 떨어져 있을 때는 슬픔을 가져다주는 감정이다. 이에 반해 연민은 남의 불행을 먹고사는 서글픈 감정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불행에서 벗어나는 순간, 우리에게 연민의 감정은 씻은 듯이 사라질 수밖에 없다. 결과론적 이야기이지만, 결국 연민을 계속 품고 있으려는 사람은 상대방이 계속 불행하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연민의 감정은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연민에 대한 스피노자의 정의에서 잿빛 아우라가 퍼져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연민(commiseratio)이란 자신과 비슷하다고 우리가 상상하는 타인에게 일어난 해악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한마디로 연민이라는 감정은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간단히 정의한 것처럼 "타인의 불행에서 생기는 슬픔"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슬픔은 극복하고 기쁨은 회복하려고 한다. "타인의 불행에서 생기는 슬픔"도 슬픔은 슬픔이다. 그러니 어떻게 극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호프밀러라는 젊은 장교가 계속 에디트라는 불행한 여인을 찾아가는 이유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연민은 결코 사랑으로 바뀔 수 없다. 왜 그럴까? 타자의 불행을 감지했을 때 출현하는 감정이기에, 연민의 밑바닥에는 다행히 자기는 그런 불행을 겪지 않았다는 것, 나아가 불행한 타자를 도울 수 있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 P130

"연민이라는 것은 양날을 가졌답니다. 연민을 잘 다루지 못하겠으면 거기서 손을 떼고, 특히 마음을 떼야 합니다. 연민은 모르핀과도 같습니다. 처음에는 환자에게 도움이 되고 치료도 되지만 그 양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거나 제때 중단하지 않으면 치명적인 독이 됩니다. 처음 몇 번 맞을 때에는 마음이 진정되고 통증도 없애 주죠. 그렇지만 우리의 신체나 정신은 모두 놀라울 정도로 적응력이 뛰어나답니다. 신경이 더 많은 양의 모르핀을 찾게 되는 것처럼 감정은 더 많은 연민을 원하게 됩니다. (••••••) 소위님,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연민은 무관심보다도 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우리 의사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고, 판사나 법 집행관, 전당포 주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연민에 굴복한다면 이세상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연민이라는 거. 아주 위험한 겁니다!"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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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팔십팔만원 세대와 베이비붐 세대 사이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기 어렵다. 특히 빈곤 청년과 부유한 노인이 얼굴을보고 평등하게 의견을 나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뿌리깊은 유교 문화의 문제도 있고, 대개 빈곤 청년과 부유한 노인은 머무는 공간 자체가 분리된다.
갈등의 결은 어떨까? 영호남 사이의 적대감은 일종의 ‘악마화‘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지역갈등의 당사자들은 〈우리〉와<그들>을 구분하고, <그들>을 ‘나쁜 놈들, 교활한 인간들‘로 묘사했다. 그런데 이때 <그들>은 적어도 머리가 나쁘지는 않았다. 지성이라는 면에서는 우리와 같은 존재였다. 냉전 시대 미국과소련, 종교전쟁 시대 구교도와 신교도가 상대를 이렇게 봤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세대갈등은 그와는 다소 다른듯하다. ‘악마화‘라기보다는 ‘비인간화‘에 가깝지 않나 싶다. 세대갈등의 당사자들 역시 <우리>와 <그들>을 구분한다. 그런데 이때 <그들은 사악하다기보다는 차라리 ‘덜 떨어진 인간들‘이다. 제국주의 시대 유럽인이 유색인종을 보던 태도에 가깝다.
젊은 세대는 노인들이 쓰는 거친 언어와 난폭한 행동에 경악한다. 그들은 둔하고, 볼품없고, 촌스럽다. 인권을 비롯해 현대사회 시민이 지녀야 할 기초적인 개념과 소양을 두루 갖추지못한 것 같다. 몰상식한 주제에 억지까지 부린다. <그들>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종종 ‘역겹다‘는 것이다.
노인 세대는 요즘 젊은 사람들이 약하고 얕다고 여긴다. 나는얼마 전 어느 장례식장에서 전직 관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팔십팔만원 세대에 대한 이들의 솔직한 정서는 ‘같잖음‘인듯했다. 정돈된 거대 담론에 익숙한 과거의 엘리트들에게 <그들>의 주장은 일관성이라고는 없이 그저 중구난방이고 엉성해보일 뿐이다. <그들> 중 며칠 굶어본 사람이 없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악마화는 증오로 이어진다. 비인간화의 정서는 경멸이다. 어떤 면에서는 증오가 경멸보다 쉽게 풀린다. <그들>이 굴복하거나 참회하면 된다. 경멸은 그런 식으로는 사라지지 않는다. 상호 경멸이라는 형태로 반목하는 두 집단이 상대를 이해하고 인정하려면 어떤 기적이 일어나야 할까. 최근 갈등의 모양새는 비인간화 위에 악마화까지 덧씌워지는 중 아닌가 하는 우려도든다. - P129

우리는 삼십 년쯤 뒤 한반도가 어떤 모습이길 바라는 걸까? 통일 대통령과 통일 국회가 있기를 바라는가? 평양의 주체사상탑은 그 이름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하나? 젊은 여성이 다 남쪽으로 내려갔다며 북한 총각들이 울분을 터뜨리는 시나리오는 미리 막아야 할까?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가? 평화와 통일, 경제와 공화가 충돌할 때 어떤 가치를 좇아야 하는가?
이런 질문에 답을 해줄 새로운 담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그 담론의 청사진을 여기서 소상히 그려낼 능력은 없다. 다만 두 가지 조건은 갖춰야 하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하나는, 새 담론이 개인의 삶과 연관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한반도가 좋은 미래로 가는 과정은, 내가 좋은 삶을 사는 길이기도해야 한다. 남북 화해 협력은 한반도에서 사는 개개인에게 이익이어야 한다. 또한 특정 계층의 희생을 바탕으로 총합이 더커지는 노선이라면 지름길이라도 거부해야 한다.
‘좋은 삶‘은 경제적 문제인 동시에 도덕적 문제이기도 하다.
세월호가 가라앉았을 때 우리는 좋은 삶을 누릴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북한의 요덕수용소가 있는 한 우리가 좋은 삶을 누리긴 어렵다. 서울에서 요덕수용소는 팽목항보다 가깝다.
새 담론은 그렇게 개인의 삶과 연결되는 동시에 세계와도 연결돼야 한다. 한반도의 지정학에서 벗어나 다른 지역의 국제분쟁, 빈부 격차, 난민 문제에도 적용할 수 있는 보편 가치, 인권철학이 담겨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 우리의 목소리를 다른 나라에서도 귀기울인다. 협상 당사자로 나서야 하는 정부는 이 문제에서 운신의 폭이 좁다. 시민사회의 역할이다.
우리는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 우리 자신을 보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호랑이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이다. 우리가 마련할수 있는 가장 좋은 재갈은 도덕적 정당성이라고 생각한다. 튼튼한 재갈을 채운 뒤에도 호랑이 등 위에서 한참 힘을 겨뤄야 할듯싶다. - P157

‘남북 관계의 특수성‘ ‘특수한 상황‘ 때문인가, 통일부가 올해 발간한 책자 2021 북한인권 알아가기』에는 그런 표현이 되풀이해서 나온다. 나는 북한 같은 거대한 악 옆에서 사는 사람에게는 특수한 도덕적 의무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특수한 상황 앞에서도 보편 가치를 주장해야 하는 책무다. 1930년대 독일 지식인들에게는 그런 의무가 있었다.
인생이 도덕적 책무로만 구성되는 것은 아니며, 도덕에 짓눌리는게 좋은 삶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도덕적 책무의 우선순위를 따지는 것은 위험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개들을 굉장히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유기견 구조 단체가 아니라 북한 인권 단체를 후원한다. 남에게 강요할 수는 없지만 내게는그런 순서여야 할 것 같다.
북한이라는 나라 옆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과거 군사 독재정권이 북한의 존재를 권력 유지의 도구로 이용하는 바람에 한국의 이념 지형은 몹시 왜곡됐다. 거기 휘둘리지 않는 세계시민이 되어야 한다. 동시에 이 장소, 이 문화, 이 언어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책임감도 필요할 것 같다. 북한을 제일 잘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은 결국 한국인이다. 종전 선언 추진 기사들을 읽으며그런 생각들을 해본다. - P161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후손들의 일손을 왜 우리가 염려해주나. 그들에게는 우리보다 뛰어난 과학기술이 있을 텐데. 우리는 미래의 노동력 부족이 아니라 현재의 행복 부족을 고민해야 한다. 노인이 많아지는 현상을 보고 경제력이니 생산성이니하는 차가운 관념을 떠올리기보다, 그 많은 노인들의 표정을 살폈으면 좋겠다.
한국은 가난한 노인과 자살하는 노인이 엄청나게 많은 나라다. 흔히들 청년 자살이 많아서 한국의 자살률이 높다고 오해하는데, 그렇지 않다. 한국에서 십오~ 이십구 세 청년들은 십만 명당 18.2명이 자살하는 반면, 칠십 세 이상은 십만 명 중 116.2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2014년 세계보건기구 보고서 참고). 육십오 세 이상에서 빈곤층 비율은 OECD 회원국 중 압도적1위다.
아이가 적다는 게 아니라 불행한 노인이 많다는 게 우리의진짜 문제다. ‘그 노인들에게 연금을 주려면 젊은이들이 많아야하고, 그러기 위해 출생률을 높여야 한다‘는 도돌이표 같은 주장에 반대한다. 기업에서 개인까지, 고소득자에서 저소득층까지, 전반적으로 부담의 수준을 높이고 혜택도 많이 받는 사회가되는 게 답이다. 출산이 사회적 책임인 양 몰아가지 말자. 출산이 아니라 세금이 책임이다.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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