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망스가 느낀 감정을 회한이라고 해도 좋고 양심의 가책이라고 해도 좋다. 이런 감정을 품는 순간이 오면, 그 누구도 다시는 봄날을 기대하기 힘든 잿빛 가을의 저주에 갇히게 된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그저 슬픔만이 남을 테니까 말이다. 바로 이것이 스피노자가 말한 회한이라는 감정이다.
회한(conscientioe)이란 희망에 어긋나게 일어난 과거 사물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스피노자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희망에 어긋나게‘와 ‘과거 사물‘이라는 말이다. 자신은 애인이 위험에 빠지기만 하면 언제든 도울 수 있다고 확신에 찬 사람이 있다고 하자. 심지어 그는 애인이 위험에 빠지기를 기다릴 정도다. 위험에 빠진 애인을 구하는 자신의 멋진 모습을 꿈꾸면서 말이다. 불행히도 정말로 애인이 위험에 빠졌다. 예기치 않게 사기 사건에 말려든 애인에게 경제적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자신이 지금까지 모아 둔 돈으로 충분히 애인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웬걸, 그는 애인을 구하지 못했다. 애인에게 경제적 지원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는 얼음처럼 굳어버렸던 것이다. 그 결과 애인을 더 이상 쳐다볼 수 없는 난처한 상황에 빠지게 된 것이다. 정말 슬픈 것은 자신이 얼마나 속물이었는지를 자각했다는 점일 것이다. 이런 자각에 눈을 뜬 이상 그가 어떻게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애인을 계속 만날 수 있겠는가. - P140
엎질러서는 안 되는 물동이를 엎질렀다는 슬픈 느낌, 이것만큼 회한의 감정에 대한 좋은 비유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우리는 더 이상 어쩔 수가 없다. 그렇지만 회한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다시그 순간으로 되돌아가기를 소망한다. 순간의 결정이 이다지도 평생 자신을 따라다니며 삶을 슬픔에 물들게 할지는 몰랐던 것이다. 여기서 회한의 감정이 가진 한 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그때는 내가 너무 미성숙했다." "그때는 내가 너무나 나약해서 용기가 없었다." 이렇게 무기력과 비겁의 경험을 배경으로 회한은 꽃피는 법이다. 역설적으로, 회한에 빠진 사람은 이제 자신이 무기력과 비겁에서 벗어났다고 확신한다. 과거에는 무기력하고 비겁해서 물동이를 들지 못하고 물을 엎었지만, 지금은 충분히 성숙하고 강해져서 물동이를 계속 들고 있으리라는 확신이 드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비슷한 선택의 순간이 다시 찾아왔을 때, 이번에는 진짜로 물을 엎지 않을 수 있을까? 아이러니한 것은, 그가 정말로 성숙하고 강해졌다면 결코 회한의 감정이 그를 유령처럼 따라다니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만일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당당히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과거지사는 하나의 전설처럼 웃음을 자아내는 에피소드로 기억될 테니까 말이다. 결국 회한에 빠진 사람은 아직도 성숙하지 못하고 용기가 부족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회한이라는 슬픈 감정을 떨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중에 회한이 없도록 지금 과감하게 선택하고 당당하게 실천하는 것이다. "10년 뒤에도 나는 이렇게 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도 나는 이렇게 할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지금의 무기력과 비겁에맞서 싸운다면, 어느 사이엔가 과거의 회한은 밝은 태양에 녹아내리는 눈처럼 사라지게 될 것이다. - P146
당황(consternatio)이라는 감정은 인간을 무감각하게(stupefactum) 만들거나 동요하게(fluctuantem) 만들어 악을 피할 수 없도록 만드는 두려움이라고 정의된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당황의 감정을 정의하면서, 스피노자는 이 감정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무감각하게 된다는 것은 악을 피하려는 그의 욕망이 경이로움에 의해 제약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동요하게 된다는 것은 악을 피하려는 욕망이 다른 악을 고려하는 소심함에 의해 제약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말이다. 정말 예상치도 못한사태에 당황하고 있는 멜러즈의 마음 상태를 정확히 포착하는 설명 아닌가. 여자를 피하겠다는 욕망도 새롭게 꿈틀대는 욕망에 대한 놀라움으로 제약되니, 멜러즈는 ‘무감각해지게‘ 된 것이다. 동시에 여자를 피하겠다는 욕망은 여자를 피했을 때 발생하는 악을고려할 수밖에 없으니, 멀레즈는 ‘동요하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당황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정신 상태, 요즘 말로 멘붕 상태의 감정에 다름 아니다. 그렇지만 당황은 단순히 멘붕 상태에만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상대방, 그리고 미래에 대한 극심한 두려움을 수반하는 감정이다.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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