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조약이 맺어졌을 땐 공교롭게도 서로 사이가 나빠져 연락이 끊겼는데, 운명이 둘을 다시 붙여놓았다. 운명인지 운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무언가가 지난 9월 어느 날 프랜시스가 폭우를 피해 내셔널 갤러리로 들어가도록 만들었고, 그녀를 플랑드르 전시실에서 끄집어내 이탈리아 전시실로 밀어 보냈으며, 바로 거기서 크리스티나를 마주치게 했다. 그때 크리스티나는 프랜시스와 마찬가지로 쫄딱 젖은 채 복잡한 표정으로 「비너스, 큐피드, 어리석음과 세월을 보고 있었다. 물러날 틈이 없어서 당혹스럽게 그 자리에 서 있던 차에, 크리스티나가 몸을 돌려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그렇게 신기한 우연을 둘 다 모른 척 넘기지는 못했고, 이제는 한 달에 두세 번씩 만나는 친구 사이가 되었다. 프랜시스는 그들의 우정이 마치 오래된 부엌용 비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오래 써서 자신의 손 모양으로 닳아버렸고, 게다가 바닥에 너무 자주 떨어트린 탓에 좀처럼 빠지지 않는 석탄재 찌꺼기가 박혀버린 비누 같았다. - P57
반면 노엘은 무덤조차 없었다. 그건 또 다른 의미로 힘들었다. 노엘은 전쟁 마지막 해에 이집트에서 출항한 배가 어뢰에 격침당해 지중해에서 실종되었다. 정확히 어떻게 죽었을까? 익사했을까? 첫 폭발에 휘말려 죽었을까? 당시에는 그의 행방에 대해 이견이 분분했다. 노엘이 물에 얼굴을 박은 채 둥둥 떠 있는 모습을 보았다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목숨엔 아무 지장 없이 부상만 당한 채 보트로 끌어 올려졌다고 주장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보트는 발견되지 않았다. 적군에게 붙잡힌 걸까? 어쨌든 그의 시신은 영영 나타나지 않았고, 당시에는 죽었다고 알려졌던 병사들이 몇 달이 흘러, 전쟁이 끝나고도 한참뒤에 전쟁신경증에 걸린 상태로나마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너무나 많이 전해졌기 때문에, 프랜시스의 어머니는 노엘이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매달렸다. 그 과정에서 무시무시한 순간들을 겪어야 했다. 뜬금없는 시간에 누군가가 현관문을 두드렸을 때, 길거리에서 노엘과 어렴풋이 닮은 소년을 마주쳤을 때…. 프랜시스는지금까지도 그 시절을 돌이키면 몸서리가 쳐졌다. 가엾은 가엾은 노엘. 그 애는 온 가족의 귀염둥이였다. 노엘을 떠올리면 그가 죽은 열아홉 살 때의 모습이 아니라 조약돌처럼 매끄럽고 동그란 분홍빛 맨발을 드러낸, 줄무늬 파자마 차림의 남자아이가 떠올랐다. 이스트본의 바닷가에서 그 애가 파도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울던 일이 기억났다. 그때 프랜시스는 노엘을 겁쟁이라고 놀렸다. 그 놀림을 취소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텐데. - P86
"아니, 그런 말씀 마세요." "왜요?" "언젠가는 분명 제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실 테니까요. 그러면 실망하실 테고요." 프랜시스는 고개를 저었다. "상상도 안 되는 걸요. 그리고 지금 저는 당신이 그 어느 때보다도 좋아요! 우리 친구 할까요?" 바버 부인이 깔깔 웃었다. "좋아요. 친구 해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들은 테이블 너머의 서로를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때 둘 사이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 무언가가 살아움직이고 활력이 도는 듯한... 프랜시스는 이 느낌을 빗댈 만한 적절한 표현을 요리에서밖에 찾을 수 없었다. 달걀흰자가 뜨거운 물속에서 진줏빛으로 변하는 듯한, 우유 소스가 냄비 안에서 걸쭉해지는 듯한, 미묘하면서도 확실하게 감지할 수 있는 어떤 변화. 바버 부인도그걸 느꼈을까? 분명 느꼈을 것이다. 그녀는 의아한 눈빛을 띠면서 미소를 굳히더니, 미간을 찡그렸다가 다시 폈다. 그러고는 시선을 내려뜨리고 또 웃음을 터뜨렸다. - P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