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버 부인은 마주 웃었지만 금세 미소가 흐려졌다. 시선을 떨구던그녀는 자신이 걸터앉은 난간의 어떤 부분에 주의가 쏠린 듯하더니, 그쪽에 손을 얹으며 중얼거렸다. "이게 결혼이에요, 레이양. 바로 이런게 결혼이에요."
바버 부인의 손이 닿은 자리는 페인트가 벗겨져 있었다. 속까지 깊게 패여서 이전에 여러 겹 칠해졌던 페인트의 빛깔들과 맨 밑의 희끗한 나무 빛깔까지 다 드러나 보였다. 바버 부인은 그 흠을 어루만지면서 말을 이었다. "만사가 잘 돌아갈 때는 이 속에 숨은 색깔들을 생각하지 않죠. 생각하려고 들면 미쳐버릴 테니까, 맨 위에 있는 색깔만 생각하죠. 하지만 그런다고 이 색깔들이 없어지지는 않아요. 말다툼, 서운한 일 같은 것들 말예요. 그러다가 가끔씩 무슨 일이 벌어져서 이렇게 홈이 파이면, 밑에 있는 색깔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지요." 그녀는 눈을 들더니, 프랜시스의 시선을 의식하고 다시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그러니까 결혼하지 마세요, 레이양. 어느 주부한테든 물어봐요! 그럴 가치가 없다고 할걸요. 당신처럼 독신으로 사는 게 얼마나 행운인지 모를 거예요. 마음대로 쏘다닐 수도 있고...." - P130

그런데 일하다가 서로의 손이 맞닿은 순간, 둘 다 움찔 손을 거뒀다. 둘 사이의 모든 것이 어긋나는 것 같았다. 모조리 잘못되어가는 것 같았다. 아까까지 실컷 웃고 떠들던 것도, 유치한 미용실 놀이도, 옷을몇 벌씩 갈아입던 것도 다 사라져버렸다. 아니, 사라지기만 한 게아니라, 프랜시스의 고백 때문에 의심과 비난의 대상이 되어 더럽혀진 것만 같았다. 지금 묵묵히 가위와 빗을 정리하는 릴리안은 흡사 화가 난 듯 보였다. 지금껏 한결같이 상냥하고 스스럼없는 모습만 보여온 그녀인데. 마음이 멀어지려는 걸까? 둘 사이에 있었던 기묘한 사건들을 돌이켜보는 걸까? 터키시 딜라이트, 신사적인 찬사, 음악당에서 릴리안에게 구애하던 남자를 프랜시스가 쫓아버렸던 것.... 프랜시스가 그 남자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게 정말로 그런 행동이었나? -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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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이 있는 것과 장애가 있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하나같이 외롭고, 혼란스럽고, 겁에 질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리서치를 하는 동안 발견한 가장 놀라운 패턴 중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표면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기형에 가치를 부여하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표면상 바람직한 차이들이 사람들을 겁먹게 만들기도 한다. 많은 예비 부모들이 장애아가 태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재능 있는 아이가 태어나기를 열망한다. 재능 있는 아이들은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성취에서 극도의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 부모의 삶에 경이롭고 새로운 지평을 열어 줄 수 있을 것이다. 흔히 똑똑한 사람이 똑똑한 아들딸을 낳지만 눈부신 재능도 일종의 기형이며 이 책에서 언급한 다른 장애와 마찬가지로 수평적 정체성이다. 지난 100년 동안 심리학과 신경 과학 분야가 획기적으로 발전했음에도 천재나 신동에 대해서는 자폐증과 마찬가지로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이해할 수 있는 범주를 뛰어넘은 아이의 보호자라는 점에서 장애 아동의 부모나 비정상적으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아동의 부모는 모두 같은 처지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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잼 타르트는 집어 들자마자 부스러지고, 롤 샌드위치는 돌돌 말린빵이 풀려서 속에 든 치즈가 비어져 나왔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빵은 맛있었고, 무는 아삭아삭했고, 달걀 껍데기는 묵직한 코트 자락을 훌훌 벗어 던지듯 쉽게 벗겨졌다. 한편에 기대어 놓은 양산은 모든 것을 포도주 빛깔로 물들였고, 바버 부인이 벤치에 모로 앉아 손에 뺨을 괸 자세가 너무나 편안해서 여기가 벤치가 아니라 소파인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손목을 입가에 대고 몸을 앞으로 기울이면서 지난번처럼 자연스럽게 웃음을 터뜨렸다. 깔깔 웃는 그 소리에 근처의 벤치에 홀로 앉아 있던 남자가 이쪽을 돌아보기도 했다. 프랜시스는 오늘 소풍이 어색해지면 어쩌나 걱정했었다. 사실상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사이가 아닌가. 그런데 두 사람은 지난 토요일 오후 어둑한 부엌에서 나누었던 친밀감을 다시 이어가고 있었다. 뜨개질을 하다 말았던 부분의 실을 다시 집어 들듯이.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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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조약이 맺어졌을 땐 공교롭게도 서로 사이가 나빠져 연락이 끊겼는데, 운명이 둘을 다시 붙여놓았다. 운명인지 운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무언가가 지난 9월 어느 날 프랜시스가 폭우를 피해 내셔널 갤러리로 들어가도록 만들었고, 그녀를 플랑드르 전시실에서 끄집어내 이탈리아 전시실로 밀어 보냈으며, 바로 거기서 크리스티나를 마주치게 했다. 그때 크리스티나는 프랜시스와 마찬가지로 쫄딱 젖은 채 복잡한 표정으로 「비너스, 큐피드, 어리석음과 세월을 보고 있었다. 물러날 틈이 없어서 당혹스럽게 그 자리에 서 있던 차에, 크리스티나가 몸을 돌려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그렇게 신기한 우연을 둘 다 모른 척 넘기지는 못했고, 이제는 한 달에 두세 번씩 만나는 친구 사이가 되었다. 프랜시스는 그들의 우정이 마치 오래된 부엌용 비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오래 써서 자신의 손 모양으로 닳아버렸고, 게다가 바닥에 너무 자주 떨어트린 탓에 좀처럼 빠지지 않는 석탄재 찌꺼기가 박혀버린 비누 같았다. - P57

반면 노엘은 무덤조차 없었다. 그건 또 다른 의미로 힘들었다. 노엘은 전쟁 마지막 해에 이집트에서 출항한 배가 어뢰에 격침당해 지중해에서 실종되었다. 정확히 어떻게 죽었을까? 익사했을까? 첫 폭발에 휘말려 죽었을까? 당시에는 그의 행방에 대해 이견이 분분했다. 노엘이 물에 얼굴을 박은 채 둥둥 떠 있는 모습을 보았다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목숨엔 아무 지장 없이 부상만 당한 채 보트로 끌어 올려졌다고 주장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보트는 발견되지 않았다. 적군에게 붙잡힌 걸까? 어쨌든 그의 시신은 영영 나타나지 않았고, 당시에는 죽었다고 알려졌던 병사들이 몇 달이 흘러, 전쟁이 끝나고도 한참뒤에 전쟁신경증에 걸린 상태로나마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너무나 많이 전해졌기 때문에, 프랜시스의 어머니는 노엘이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매달렸다. 그 과정에서 무시무시한 순간들을 겪어야 했다. 뜬금없는 시간에 누군가가 현관문을 두드렸을 때, 길거리에서 노엘과 어렴풋이 닮은 소년을 마주쳤을 때…. 프랜시스는지금까지도 그 시절을 돌이키면 몸서리가 쳐졌다. 가엾은 가엾은 노엘. 그 애는 온 가족의 귀염둥이였다. 노엘을 떠올리면 그가 죽은 열아홉 살 때의 모습이 아니라 조약돌처럼 매끄럽고 동그란 분홍빛 맨발을 드러낸, 줄무늬 파자마 차림의 남자아이가 떠올랐다. 이스트본의 바닷가에서 그 애가 파도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울던 일이 기억났다. 그때 프랜시스는 노엘을 겁쟁이라고 놀렸다. 그 놀림을 취소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텐데. - P86

"아니, 그런 말씀 마세요."
"왜요?"
"언젠가는 분명 제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실 테니까요. 그러면 실망하실 테고요."
프랜시스는 고개를 저었다. "상상도 안 되는 걸요. 그리고 지금 저는 당신이 그 어느 때보다도 좋아요! 우리 친구 할까요?"
바버 부인이 깔깔 웃었다. "좋아요. 친구 해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들은 테이블 너머의 서로를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때 둘 사이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 무언가가 살아움직이고 활력이 도는 듯한... 프랜시스는 이 느낌을 빗댈 만한 적절한 표현을 요리에서밖에 찾을 수 없었다. 달걀흰자가 뜨거운 물속에서 진줏빛으로 변하는 듯한, 우유 소스가 냄비 안에서 걸쭉해지는 듯한, 미묘하면서도 확실하게 감지할 수 있는 어떤 변화. 바버 부인도그걸 느꼈을까? 분명 느꼈을 것이다. 그녀는 의아한 눈빛을 띠면서 미소를 굳히더니, 미간을 찡그렸다가 다시 폈다. 그러고는 시선을 내려뜨리고 또 웃음을 터뜨렸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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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 준비가 끝났다. 스테판 브라이트비저 Stéphane Breitwieser는 박물관에 들어서며 여자친구 앤 캐서린 클레인클라우스Anne-Catherine Kleinklaus의 손을 꽉 움켜잡는다. 둘은 안내 데스크로 걸어가 상냥하게 인사를 건넨다. 누가 봐도 귀여운 연인이다. 현금으로 입장권을 두 장 사서 들어간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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