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5월의 어느 저녁,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미국인 에버렛 휴스EverettHughes는 어느 독일인 건축가의 집을 방문했다. 때는 1948년, 독일의 다른 많은 지역과 마찬가지로 프랑크푸르트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연합군이 나치에 대항해 공중전을 벌이며 집중 폭격한 대로를 따라 허물어져가는 저택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야말로) 동네 전체가 통째로 파괴되어 있었다. 폭격이 일어나기 몇 주 전 휴스는 일행과 함께 차를 몰고 분화구처럼 땅이 숭숭 팬 도심을 돌아다니며 전쟁의 참화를 비켜간 상점가나 주택가가 있는지 찾아보았다. 얼마 안 가 그들은 탐색을 포기했다. "어딜 가든 지붕이 날아가거나 아예 무너진 집이 최소 한 채는 있었고, 흔히 절반이나 그 이상이 무너진 상태였다." 휴스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 P14

"그래도 부끄러움은 그대로입니다만." 건축가가 말을 이었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식민지를 잃고 국가적 명예를 실추한 참이었어요. 그때 나치 놈들이 나타나서 그 감정을 이용했죠. 게다가 유대인들, 그들이 문제였습니다. (...)이 최하층 인간들은 이가끓고, 더럽고, 가난하고, 지저분한 카프탄(튀르키예, 아랍 등 지중해동부 지방 나라들에서 착용하던 긴 상의 옮긴이) 차림으로 게토를 뛰어다녔거든요. 첫 전쟁 후에 여기로 와서 믿을 수 없는 방법으로 큰돈을 벌었죠. 좋은 자리란 자리는 전부 유대인들이 차지했어요. 의사, 변호사, 공무원 열 명 중 한 명이 유대인이었다니까요."
건축가는 여기서 이야기의 흐름을 놓쳤다. "제가 어디까지말했죠?" 휴스는 그에게 유대인이 "전부 차지했다"는 이야기까지했다고 알려주었다.
"그래요, 그 얘기." 건축가가 말했다. "물론 유대인 문제를 그렇게 해결해선 안 되었죠. 하지만 문제는 문제였으니까 어떻게든 해결해야 했어요." - P16

그러나 휴스는 다른 요인에 주목했다. 그 일에 관련된 자들은 광신자도 아니었고 딱히 독일에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히틀러 시대의 범죄자들은 그저 총통의 명령에 따라 잔악한 짓을 저지른 게 아니었다. 그들은 ‘선량한 사람들‘
의 ‘대리인‘이었다. 프랑크푸르트의 건축가 같은 선량한 사람들은나치의 유대인 박해에 대해 깊이 따져 묻지 않았다. 그들에겐 유대인 박해가 어떤 면에서는 만족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Holocaust‘ ‘유대인 말살Judeocide‘ 등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표현하는 용어가 여럿 나와 있었으나 휴스는 보다 평범한 표현을 선택했다. 그는 유대인 학살을 ‘더티 워크dirty work‘라 표현했다. ‘불결하고 불쾌하지만 점잖은 사회 구성원들이 아주 모를 수는 없는 일‘이라는 뜻이다. 독일에서 ‘열등한 족속‘을 제거하는 것은 나치에 찬동하지 않던 지식인마저 동조했다. 휴스는 ‘유대인문제‘에 관한 건축가의 생각에 대해 프랑크푸르트에서 다른 대화들을 나누며 결론을 내렸다. 휴스는 그 건축가를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자신을 그들(유대인)과 명확히 분리하고 그들을 문제라고 호명했다. 그런 그가 제 손으로는 하지 않을 더러운 일을 다른사람에게 시키고는 또 그 일이 부끄럽다고 표현했다. 이것이 더티 워크의 본질이다. 선량한 사람들은 비윤리적인 행위를 대리인에게 위임한 뒤 책임을 편리하게 회피한다. 더러운 일을 떠맡은 사람들은 무슨 불량배가 아니라 사회로부터 ‘무의식적 위임‘을 받은 이들이다. - P17

이 시급 노동자들은 글로벌 경제의그늘에서열심히 일하고도 그 이윤을 나눠 갖지 못한 지 오래다. 코로나 대유행 중에 이들의 노동은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필수노동‘. 물론‘
필수노동자는 그 이름으로 불리기 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건강보험을 보장받지 못했고, 유급병가를 쓸 수 없었으며, 치명적일 수있는 바이러스에 노출될 상황에서도 개인용 보호 장비를 지급받지 못했다. 그렇긴 해도 필수노동이라는 새 이름은 어떤 근본적인 진실을 드러내 강조했다. 이들 없이는 사회가 돌아갈 수 없다는진실을.
사회에 꼭 필요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필수노동 가운데는 ‘도덕적으로 문제 있다‘고 여겨져 더욱 은밀한 곳으로 숨어든 노동이 있다. 나는 이를 ‘더티 워크‘라고 부른다. 그중 하나는 구치소나 교도소 내 정신병동에서 노동이 이루어진다. 미국의 주들에는가장 큰 정신과 치료 시설이 공공 병원이 아니라 구치소와 교도소인 곳이 많다. 그 안에서는 엄청난 잔혹 행위가 자행되고, 의료진은 교도관의 수감자 학대 행위를 묵인하는 등 일상적으로 의료윤리가 위반된다. 또 하나의 더티 워크는 미국의 끝나지 않는 전쟁에서 드론(무인기)으로 ‘표적살인‘을 수행하는 일이다. 전쟁이 뉴스헤드라인에서 점점 사라지는 동안 드론을 이용한 공습 살인 건수는 꾸준히 증가하는 반면 그에 대한 감시는 소홀하다. - P22

그저 돈을 벌겠다고 기꺼이 비윤리적인 일을 하는 사람은 망신당해도 싸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는 최근 몇 년간 이주민 인권운동가들이 미국 국경에서 비인도적인 이주민 정책을 집행하는 국경 순찰대를 보며 느끼는 것이다. 일부 평화운동가들은 표적살인을 수행하는 드론 조종사들이 손에 피를 묻혔다며 비난한다. 이 활동가들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앞으로 이 책에 등장하는 더티 워커들은 이들이 서비스하는 시스템의 1차 피해자가 아니다. 이들의 행동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다. 이들의 일은 이따금 심한 고통과 피해를 초래한다.
그러나 더티 워크를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비난의 초점을 맞추는 것은 이들의 행위를 지속시키는 권력의 움직임과 복잡한 공모 관계를 감추는 데 유용하다. 또한 누가 그 일을 맡을지 결정하는 구조적 차별이 은폐될 수 있다. 미국 사회에는 원한다면 누구나 할 수 있을 만큼 더티 워크 일자리가 많음에도 더티 워커 계층의 구성은 무작위적이지 않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더티 워크는선택지와 기회가 적은 사람들에게 과도하게 배정된다. 바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궁핍한 시골 지역 주민, 미등록 이주노동자, 여성, 유색인이다. 임금 수준이 낮고 물리적 위험이 많은 일자리가대개 그렇듯, 더티 워크는 기술·자격· 교육 수준이 높고 부유한사람들이 지닌 사회적 유동성과 권력이 없는, 덜 특권적인 사람들에게 주로 돌아간다. - P25

일상의 대화에서 ‘더러운 일‘은 자랑스러워할 수 없는 일 또는 불쾌한 일을 뜻한다. 이 책에서 ‘더티 워크‘는 일상어보다 더 구체적인 뜻을 가진다. 첫째, 다른 인간에게 또는 인간이 아닌 동물과 환경에 상당한 피해를 입히는 노동으로, 이따금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둘째, ‘선량한 사람들‘, 즉 점잖은 사회 구성원이 보기에 더럽고 비윤리적인 노동이다. 셋째, 그 일을 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에게 낮게 평가되거나 낙인찍혔다고 느끼게 함으로써, 아니면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을 스스로 위배했다고 느끼게 함으로써 상처를 주는 노동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선량한 사람들‘의 암묵적 동의에 기반한 노동으로, 그들은 사회질서 유지에 그 일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명시적으로는 그 일에 동의하지 않음으로써 만약의 경우에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 이런 일이 가능하려면 그 더티 워크를 다른 사람에게 위임해야 하는데, 이는 다른 누군가가 매일같이 고역을 치르리라는 것을그들이 알고 위임한다는 뜻이다. - P30

거의 모든 형태의 더티 워크에 나타나는 공통점 하나는 그것들이 숨겨져 있어서 ‘선량한 사람들‘이 더 쉽게 눈감을 수 있고 고민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지저분하거나 끔찍한 것을 목격하지 않으려는 욕망 자체는 전혀 새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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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아스는 썼다. "불쾌한 행위는 사회생활이라는 무대의 뒤편으로 옮겨졌다. (…) 우리가 문명화라 부르는 모든 과정의 특징이 바로 이 격리의 움직임, 혐오스러운 것을 ‘무대 뒤편‘에 숨기는 일임을 우리는 앞으로 거듭 확인하게 될 것이다." - P31

그뿐만 아니라 더티 워크가 눈에 띄거나 눈앞에 들이밀어질 때도 쉽게 다른 사람을 탓하거나 도저히 바꿀수 없는 거대한 외부의 힘을 원인으로 들먹일 수 있다. 그러나 틀렸다. 도저히 바뀌지 않을 것처럼 보일지라도 더티 워크는 정해진 숙명이 아니다. 살아 있는 인간들이 내린 구체적인 결정, 원칙적으로 우리가 도로 물릴 수 있는 결정의 산물이다. 우리 정부가 채택한 정책과 우리 의회가 제정한 법률의 산물이다. 전쟁에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부터 가장 취약한 시민을 어디에 감금할 것인가까지 모든 문제에 대해 우리가 내린 결정의 산물이다. 우리가 더티워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우리 사회의 근간을 드러낸다. 우리의 가치관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떤 사회질서를 무의식적으로 승인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타인에게 어떤 일을 시키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 P35

신체적 증상만 문제였던 것은 아니었다. 해리엇은 어떤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무력감이었다. 이 감각은 어린 시절의 가장 암울한 순간들, 즉 아버지의 변덕스러운 행동을 보고도 힘이 없어나서지 못했던 장면들을 끄집어냈다. 해리엇의 언니는 술에 취한 아버지의 폭언에 가끔 맞섰지만 해리엇은 아버지의 마음에 들려고만 노력했다. 그게 안 되면, 당연히 안 되는 일이었지만, 자기 안으로 움츠러들었다. 그러던 그가 이제 다시 한번 두려움에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환경에 갇혔다. 전환치료병동에서는 위법 행위를 목격하는 것부터가 위험했다. 누가 그 일을 폭로할지 모르는 탓에 교도관들이 바짝 신경을 곤두세웠기 때문이다. 눈앞에서 학대가 발생하는 경우 "정치적으로 가장 안전해지는 방법은 양해를 구하고 화장실에 가는 것"이라고 해리엇은 말했다. "목격자가 되지 마라. 맡은 일이나 하다 가라."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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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젤에게 라파스란 대부분 빛과 냄새로 남아 있다.
햇빛은 바다와 고래 등에서 튕겨 나와, 청새치와 파도와 모래위에서 반짝였다. 헐벗은 뾰족한 바위와 은은한 사막을 스치고지난 그 햇빛은 홍수처럼 이 땅을 가득 채웠다. 노랗고, 파랗고, 투명하고, 하얗고, 사방이 진동하고, 솔직하고도 무뚝뚝하게, 있는 그대로를 드러냈다. 빨갛고 노랗고, 파란 꽃들이 꼭 플라스틱같았다. 빛, 억수처럼 내리쬐었지.
엔젤은 비 오는 날도 무척 좋아했다. 비가 오면 그림자가 모퉁이와 골목길을 따라 신비한 길을 내었다. 그리고 모두는 황혼을 사랑했다. 빛이 정신을 잃고 언덕을 지나 태평양으로 떨어지는 모습. 붉은 태양은 점점 더 빨개지고 주홍빛으로 변하다 마침내는 초록빛이 되어갔다. 하늘은 용암이 검은 바위를 먹어치워 불타오르는 거대한 잇자국을 내듯 녹아내렸다. 때로는 온 도시가 멈추어 서서 서쪽을 바라보았다. 가게 주인들은 안에서 나와거리에 섰다. 가족들은 집에 누워 있던 병자들을 침상이나 휠체어에 태워서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그러면 그들은 하늘을 집어삼키고 있는 그 광기에 굽은 손을 흔들어 보이는 것이다. 갈매기떼와 펠리컨의 소용돌이가 하늘에 폭동을 일으키며 떠다니는 모습은 마치 하느님이 손수 뿌리는 꽃가루 눈송이 같았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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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한 시대를 끝내고 백 년의 삶을묻은 다음 저녁 전에 집에 올 수 있단 말인가? 빅 엔젤은 모두가 몸을 담은 이 더러운 거래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죽음이라. 참으로 우습고도 현실적인 농담이지, 노인들이라면 어린애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 못 하는 촌철살인의 한마디를 갖고 있기 마련이다. 모든 수고와 욕망과 꿈과 고통과 일과 바람과 기다림과 슬픔이 순식간에 드러낸 실체란 바로 해 질 녘을 향해점점 빨라지는 카운트다운이었다.
일흔을 목전에 둔 사람이라면, 본인이야 모든 게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할지라도, 사실상 아무것도 중요하지가 않다. 그걸 어떻게 해야겠다는 필요성도 간절하게 느끼지 않는다. 그러다 갑자기, 생일날에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기껏해야 20년 정도 더살겠군.‘ 그리고 한 해 한 해가 점점 어둡게 저물기 시작하면서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15년 남았군‘ ‘10년 남았나‘ ‘이제 5년정도겠군. 그러다가 아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된다.
"사는 게 뭐 대수라고. 내일이라도 버스에 치여 죽을 수 있어! 언제 골로 갈지는 아무도 몰라." - P151

 그는 동네의 백인 지구에서 자랐다. 학교애들은 리틀 엔젤의 가족이 프랑스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집은 여기가 됐을 수도 있다. 110제곱미터의 네모난 상자 같은 집. 부겐빌레아가 피어 있고, 어린이용 세발자전거와 스쿠터들이 진입로에 버려져 있는 집. 농구 골대가 차고 문에 달려 있는 집. 유사 계급 계층이군, 하고 그의 머릿속 교수가강의를 했다. 하지만 음악은 달랐다.
그는 거리를 걸어 올라갔다. 감시 카메라가 그를 비추는 느낌이 들었다. 창문마다 눈이 달려 있는 것만 같았다. 동네 사람들은크라운 빅토리아 차를 엿보며 ‘돼지 새끼!‘라고 생각하겠지. 그는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축 내려뜨렸다. 그러면 좀 작아 보이거나안 보일 수도 있다는 듯 말이다.
‘저 백인은 누구야?‘
‘아, 저 사람 미국이랑 멕시코 혼혈이다.‘
‘마약 단속 경찰처럼 생긴 놈이군.‘
빅 엔젤과 페를라의 집 현관으로 들어설 때부터,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언제나 사람들의 시선을 느꼈다. 아직도 클럽의 회원권을 얻지 못한 멤버 같았으니까. 하지만 노크를 하거나 초인종을 누를 때마다 그들은 모두 리틀 엔젤을 타박했다. 동생이 집에 들어오는 건데 뭐 하러 노크를 해? 그냥 들어오면 되지. 그래서 그는 남자답게 마음을 먹고 무거운 철망 안전 격자를 열고서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거실에 펴놓은 커다란 탁자 주변을 어슬렁대고 있었다. 야구 모자 안에는 물건 인수증이 들어 있고, 담배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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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화실과 기도 모임의 담장 너머에서는 ‘백색 테러‘가 타이완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장제스와 그 휘하의 패잔병들, 중화민국 행정부, 이들의 가솔까지 도합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도착한 종착지 타이완은 그들을 반기지 않았다. 일본이 떠난 자리를 국민당이 접수했던 2년 전, 타이완에서는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처음에 타이완의 인구 대부분은 다시 중국의 통치를 받게 된 것을 두 팔 벌려 환영했지만, 환호는 곧 분노로 바뀌었다. 중국 본토의 사람들이 장제스 정권에 등을 돌리게 만들었던 "승리의재난"이 타이완에서도 재연되었던 것이다. 만연한 부패, 무능한 통치(고도로 효율적이었던 일본과 비교하면 더욱 두드러졌다), 그리고 조상 대대로 타이완에 거주해온 본성인(本省人)들을 노골적으로 경멸하는 외성인(外省人)들, 그리고 그밖에 국민당이 타이완을 접수하면서 발생한 무수히 많은 폐해들이 1947년 2월 28일 봉기를 야기했다. 그리고 잔혹한 무력 진압이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 P382

장제스가 여든넷, 메이링이 일흔셋이던 1971년, 부부의 유유자적한 삶은산산조각났다.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본토의 중화인민공화국과의관계 회복을 꾀하면서 이듬해 초에 베이징을 방문하겠다고 선포한 것이었다. 그가 파견한 국가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가 베이징에서 대통령의 방중을 대비하던 10월, 유엔은 ‘중국‘ 의석을 중화인민공화국에 배정하고 타이완의 중화민국을 퇴출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서구 정치인들이 부지런히 마오쩌둥의 방 문을 두드리는 동안, 비탄에 빠진 메이링은 신앙에서 안식을 찾으며 「성서」의 구절을 연거푸 암송했다. "우리가 모든 일에 괴로움을 당해도 꺾이지 않으며 난처한 일을 당해도 실망하지 않고 핍박을 받아도 버림을 당하지 않으며 맞아서 쓰러져도 죽지 않습니다."(「고린도후서」 제4장 8-9절/옮긴이)에마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이렇게 적었다. "분별과 정직의 시계추가 조만간 제자리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해......중요한 건 어떤 일이 벌어지느나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야." - P394

장징궈는 1950년대 초 아버지의 명을 따라서 새 근거지 타이완을 사수하기 위한 ‘백색 테러‘를 주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정권 승계 후에는 ‘민중친화적‘이라는 평판을 얻는 데에 성공했다. 주민들과 전혀 접촉이 없었던아버지와 달리 그는 서민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노력했다. 끊임없이 각지를 시찰하면서 도로변의 조그만 가판대에서 밥을 먹고, 주변 사람들과한담을 나누었다. 겉모습에서도 그는 위풍당당하고 강인한 아버지의 외양을 따르는 대신 소탈한 모습을 선택했다. 정치적으로는 장제스가 죽자마자 그의 정책 대부분을 사실상 완전히 개정했다. 장제스는 타이완의 경제발전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지만, 장징궈는 그것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었다. 그의 통치 아래 타이완은 ‘타이완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압도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장징궈의 재임 기간 동안 타이완의 경제 성장률은 두 자릿•수를 기록했고, 1977년부터 6년 안에 국민소득은 세 배가 되었다. 상당한수준의 자유화도 뒤따랐다. 사상 처음으로 타이완 국민들에게 여행을 목적으로 한 자유로운 출국이 허가되었다. 본토 출신의 국민당 노병들은 고향에 가서 가족과 상봉할 수 있게 되었다. 봉쇄되었던 해안가와 산지 역시대중에게 개방되었다.
장징궈 정부는 청렴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장징궈와 그의 가족은 그 어떤 재산도 축적하지 않았다. 또한 장징궈는 공공심이 투철한 다수의 인재들을 곁에 두었다. 공직을 맡아서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국가를 위해서 봉사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이들이었다. 부패의 부재, 근면성실하게 나라에 대한 의무를 다한다는 정신은 타이완의 성공을 견인했다. 일당 독재 체제 아래 공산당 및 중화민국으로부터의 타이완 독립을 주장하는 세력의 활동은 여전히 금지되었지만, 제재는 지나치지 않았고 장징궈는 많은 이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타이완을 민주화의 길로 이끌었다.
1985년, 장징궈는 세 아들 중 누구도 총통직을 물려받지 않을 것이라고선언함으로써 그의 가족에게 정권이 이양되리라는 항간의 예측을 공개적으로 부인했다. - P426

장징궈의 통치 아래 타이완은 이전과 아주 다른 모습으로 변화했다. 경제적 번영이 타이완 사회에 새로운 차원의 열망을 불어넣었다.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사회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매년 30만 명에 달하는, 여행또는 유학을 가서 세계 다른 나라들을 목격한 사람들이 주축이 되었다. 당의 공식 입장에 반하는 내용을 담은 출판물이 우후죽순처럼 간행되었다.
민주화를 향한 거스를 수 없는 시류 속에서, 1987년 장징궈는 계엄령을 해제했고, 새로운 정당의 설립과 언론의 자유를 허가했다. - P428

장례식 이튿날, 당시 타이완의 총통 천수이볜이 메이링의 맨해튼 저택을 방문해서 애도를 표하고 경의의 뜻을 담아서 그녀의 친척들에게 타이완국기를 수여했다. 2000년에 선출된 천수이볜은 타이완 역사상 첫 반국민당 계열 총통이었다. 메이링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역사의 산증인이었다. - P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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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징웨이는 항일 전쟁에 비관적이었다. 그는 또한 전투의 패배를 장제스의 탓으로 돌렸다. 눈 깜짝할 만큼 짧은 시간에 상하이 및 기타 주요 도시들과 광활한 영토를 상실한 것은 장제스의 "부패하고 사악한.....1인독재의 결과라고 했다. 왕징웨이가 보기에 장제스는 경쟁자들을 끊임없이의심하고 그들을 부당하게 대하는 인물이었다. 많은 이들이 이러한 견해에 공감했다. 미국 주재무관 조지프 스틸웰은 1938년 충칭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장제스는 "모든 것을 부하들에게 비밀로 하고 싶어한다. 그들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불신 탓에 그는 자신의 군대를 효율적으로 만들지도 못했다."
왕징웨이는 중국을 보존하는 유일한 길은 일본과의 ‘평화‘를 모색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1938년 말, 그는 충칭을 빠져나와 하노이를 거쳐서 상하이로 향했고, 도중에 장제스의 첩보원들에 의한 수많은 암살 시도가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다수의 총상 때문에 그는 결국 6년 후때 이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1940년 3월, 일본의 점령지인 난징에서 그가 이끄는 괴뢰정권이 수립되었다.
왕징웨이는 쑨원의 본래 후계자였고, 쑨원이 소리 높여 외친 ‘대(大)아시아주의‘는 지금 점령국 일본의 구호였다. 이러한 사실은 자신이 쑨원의 진정한 계승자라는 왕징웨이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고, 장제스는 전에 없던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장제스는쑨원에게 공식적으로 ‘국부‘ 칭호를 수여했다(그러나 이 논리는 어딘가가 이상했다. 쑨원은 중국을 향한 일본의 호전적인 야망을 거부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부추겼기 때문이다.

왕징웨이가 난징에서 취임 선서를 한 날, 칭링은 충칭으로 가서 장제스에대한 연대를 표해야겠다고 즉흥적으로 결정했다. 메이링은 이전에 칭링에게 충칭 방문을 제안한 바 있었고 여기에 아이링도 굉장한 열의를 보였다. 칭링은 자매들을 기쁘게 해주고 싶었고, 동시에 쑨원의 부인이 왕징웨이정권에 반대한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고자 했다. 세 자매는 이튿날 전시수도 충칭으로 향했다.
칭링은 여왕과 여신, 유명 여배우가 동시에 받을 법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 P296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에서는 중국을 동정하는 여론이 전에 없이 거세졌다. 미국인들이 보기에 이 가련하고 신비로운 나라는 일본이라는 무시무시한 악당에 맞서서홀로 지난 4년 반을 싸우고 있었다. 메이링은 그 영웅적인 나라에서 온 대표였고, 아름다운 여성, 그것도 ‘상아색 비단 살결‘의 얼굴을 지닌 여성이었다(그녀는 얼굴 생김새만 빼면 미국인 여성과 다를 바 없었다). 미국인들의 환영은 굉장했다. 1943년 2월 메이링은 워싱턴 DC에 도착해서 공식 순회를 시작했고, 엘리너 루스벨트 영부인이 친히 기차역으로 나와서 그녀를 맞이했다. 영부인은 메이링의 팔짱을 끼고서, 역 바깥에서 대통령 전용차를 타고 기다리고 있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안내했다. 메이링은 뉴욕의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는 1만7,000명, 로스앤젤레스의 야외 공연장 할리우드 볼에서는 3만 명의 인파 앞에서 연설했고, 가는 도시마다 열광적인 군중의 환영을 받았다. 2월 18일 미국 의회에서 연설했을 때에는(이는 대단한 영예였다), 고혹적인 치파오를 차려입은 아담한 그녀가 장엄한 국회의사당 안에서 수많은 쟁쟁한 인사들 사이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경외심을 불러일으켰다. 흠잡을 데 없는 미국식 영어로 진행된 그녀의 연설은 많은 유력 인사들을 눈물짓게 했다. 기립 박수는 4분이나 이어졌다.
이 모든 것들은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완벽주의자인 메이링은 지칠 때까지 연설문을 수정하고 또 수정했다. 몇몇 행사에서는 진이 빠진나머지 거의 실신할 뻔했다. 메이링이 뉴욕의 차이나타운에서 촬영한 뉴스 영화를 본 장제스는 그녀가 아파 보이고, 상황에 대처하느라 허덕이는것 같다며 걱정했다. 메이링은 미국을 방문하기 전에도 고혈압과 암으로 추정되는 결과적으로는 아니었다) 위장병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공식순회 전에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그리고 조금은 여가를 즐기기 위해서) 메이링은 3개월 먼저 미국으로 건너와서 뉴욕장로교 병원에 입원했다. 요양후에 그녀는 미국의 대중 앞에 최상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었고, 그들의 환심을 사서 중국에 대한 미국의 원조 규모를 증대시켰다. 순회는 대성공이었다. - P308

이 시기에 메이링은 남편이 형부 쿵샹시를 소환한 일로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쿵샹시는 1944년 중반 부총리 겸 외무부 장관 자격으로 공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미국에 왔다가 병 치료를 이유로 계속 머무르고 있었다. 1945년 봄, 연루된 채권액수가 1,000만 달러 이상인 비리 사건이 터졌다. 쿵샹시는 그중 300만 달러 이상을 착복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국민당 당원들은 위아래 할 것 없이 분노로 들끓었고, 장제스는 어쩔 수 없이 조사를 지시했다. 그는 쿵샹시에게 전보를 연달아 보내서 귀국하여 조사에 응하라고 촉구했고, 전보가 거듭될수록 표현의 수위도 점점 높아졌다. 결국 쿵샹시는 7월에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해임되었고, 유용한 공금의 일부를 토해내야 했다.
장제스는 처남 쑹쯔원을 후임 국무총리로 삼았다. 이로 인해서 쑹쯔원과 쿵씨 가족의 관계가 틀어졌다. 이때부터 쿵샹시는 기회만 있으면 쑹쯔원을 비방했고, 아이링은 말년에 가서야 동생과 반쪽짜리 화해를 했다.
아이링은 장제스의 처사에 분노했다. 그녀가 보기에 이것은 자신의 남편, 더 나아가 그녀 자신에 대한 부당한 대우였다. 남들이 없는 자리에서 아이링은 동생에게 하소연을 쏟아냈다. 에마는 집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챘다. 중국과 연관이 있는 미국인들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그녀는 쿵샹시 가족을 몹시 싫어했고, 자신의 친구 메이링이 지나치게 "쿵샹시부인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다른 누구라도 그녀의 곁에 있으면 좋겠다"고 일기에 적은 바 있었다. 메이링은 전적으로 언니의 역성을 들었고, 남편의 전보를 무시했다. 그녀는 에마에게도 그를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8일, 소련이 일본에 전쟁을 선포했다. 10일, 일본이 항복 의사를 발표했고, 전 세계에서 축하 행사가 이어졌다. 뉴욕에 머무르고 있던 메이링은 승리의 순간을 남편과 함께 나누기 위해서 귀국을 서두르는 대신, 타임스퀘어로 차를 몰았다. 그곳에서 메이링은 구름처럼 모여든 떠들썩한 인파에 갇혀, 사람들이 기뻐하며 큰 소리로 웃고 성조기를 흔드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이 공간과 일체감을 느꼈고, 중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하나를 선택하라면 아이링과 함께 뉴욕에 머무르는 쪽이 훨씬 더 메이링의 마음에 들었다. - P318

1945년 8월 10일, 충칭에 있던 장제스는 일본이 항복 의사를 표명했음을 이례적인 방식으로 알게 되었다. 일본 정부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영어로 항복 의사를 밝혔다. 메이링은 뉴욕에 있었기 때문에, 장제스의 곁에는 라디오 방송을 듣고 뉴스를 모니터링할 영어 구사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그는 그 정도로 고립된 존재였다). 장제스의 일기에 따르면, 오후 8시경 장제스의 처소 근처에 위치한 미군 본부에서 커다란 함성이 터져나왔고, 이어서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장제스는 전령(그의 친척)을 보내서 "무슨 일로 소란인지 물었다. 중국 전역 최고 사령관 장제스는 그렇게 역사적인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장제스가 보인 반응은 희열이 아니라 극도의 긴장감이었다. 중국 통치를 두고 마오쩌둥과 결판을 내야 할 순간이 마침내 도래했다. 스탈린이 4,600킬로미터를 웃도는 기나긴 전선을 넘어서 150만 명의 병력을 중국 북부에 투입한 것이 바로 얼마 전이었다. 장제스가 즉시 대응하지 않으면 소련군이 점령한 영토(최종적으로는 소련이 유럽 중부와 동부에서 점령한 전체 면적보다 컸다)가 마오쩌둥 측에 넘어갈지도 몰랐다. 전쟁 전에는 공산당군의 규모가 매우 작았으나, 이제는 100만 명이 넘어 국민당군의 3분의 1에 육박할 정도였다. 장제스는 즉각 병력을 재배치하고자 했다. 그날 저녁, 멕시코 대사를 응접하던 그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늘어놓는 대사 때문에 지휘관들에게 전보를 보낼 틈이 나지 않아서 신경이 몹시 곤두섰다.
미국은 중국의 평화를 원했다. 그들은 마오쩌둥을 충칭으로 초청해서 평화 협상을 진행하라고 장제스를 압박했다. 장제스의 암살 사주 경력을 익히 알고 있던 마오쩌둥은 장제스의 영역에 발을 들일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마오쩌둥이 협상 게임에 임하기를 원했다. 마오쩌둥이 군사적으로 장제스를 이기리라는 확신이 없던 그는 마오쩌둥에게 세번이나 전보를 보내서 충칭으로 가라고 명했다. 마오쩌둥은 마지못해 8월28일 자신의 근거지인 옌안을 떠나, 미국 대사 헐리와 함께 미국 비행기를타고(미국인들이 또한 그의 안전을 보장해주었다) 충칭으로 갔다. 8월 31일자 일기에서 장제스는 마오쩌둥이 "호출에 응하여 왔다"는 점이 흡족했으며, 자신의 "도덕적 권위와 강력한 아우라"에 "주님의 뜻"이 더해진 것이 주효하게 작용했다고 적었다. 그는 자신이 마오쩌둥을 다룰 수 있다고 확신했다. - P320

의기양양해진 장제스는 국민 정부 주석의 전용기를 새로 구매했다. 최첨단 C-54 모델이었다. 1944년 메이링과 아이링이 리우데자네이루로 갈때에 이 모델 한 대를 전세내어 타고 갔는데, 보는 사람마다 크게 감탄했었다. 트루먼 대통령이 선물한 C-47 모델 전용기를 사용한 지 겨우 1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장제스는 스스로를 위해서 C-54 모델을 새로 주문했다. ‘차이나-아메리카‘라고 불린 새로운 수송기는 장제스의 취향을 잘 아는 이들의 감독하에 단장되었다. 비용 180만 달러는 재무부에서 마지못해지불했다. 국민정부가 마주한 위기 상황을 고려할 때, 이러한 낭비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마치 상사를 따라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일본이 점령했던 도시와 마을을 접수하기 위해서 파견된 국민당 관료들은 조금의 제약도 없이 실컷 자신들의 욕구를 채웠다. 이들은 오랫동안 결핍에 시달려왔고, 기회가 도래하자 주택과 자동차, 그리고 다른 귀중품들을 빼앗았다. 누구든 국민당관료들이 탐내는 것을 소유하고 있다면 ‘부역자‘로 지목되어서 소유품을 몰수당할 위험이 있었다. 관료들은 스스로를 승자로 인식하여 종종 공개적으로 지역민들을 멸시했고, 외세의 지배하에 살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망국의 노예‘라고 칭했다. 중국 대부분의 지역에서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국민당을 "해방자"라고 환영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들을 "강도", "메뚜기떼"라고 욕했다. 삽시간에 장제스와 그의 정권을 향한 열광과 흠모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강렬한 혐오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유력지「대공보」는 국민당의 인수 작업을 "승리의 재난"이라고 표현했다. 대중적인 인기 측면에서, 장제스는 영광의 정점에 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 P324

갈공산당과의 전쟁에서 장제스의 상황은 그보다 나았다. 그의 군대는 1년이넘도록 거의 모든 전선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가장 관건이 되는 전장은 소련과 국경을 맞댄 만주 지역이었다. 공산당이 이 지역을 손에 넣으면, 그들은 긴요한 소련의 무기와 군사 훈련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이었다. 장제스의 군대가 공산당군을 몰아내기 직전까지 갔던 1946년 6월, 장제스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 추격을 중지하고 휴전을 명한 것이다. 국공 내전의종식을 꾀하고자 중국을 방문한 조지 마셜 장군의 압박 때문이었다. 휴전은 4개월간 지속되었다. 휴전 덕분에 마오쩌둥의 군대는 소련과 그 위성국가 북한, 외몽골과의 접경 지역에 독일 면적보다 넓은 근거지를 탄탄하게 구축했고, ‘스탈린의 전폭적인 원조를 최대한으로 누릴 수 있었다. 그중에는 결정적으로 철도의 보수가 포함되어 있었고, 이로써 중화기와 대규모 병력의 신속한 수송이 가능해졌다. 장제스의 처참한 오판은 전쟁의 결과를 바꾸어놓았다. 1947년 봄이 되자 전세는 역전되었다. - P325

메이링은 남편을 위해서 한 가지 임무는 기꺼이 수행했다. 1947년 말, 그녀는 칭링을 초대해서 상하이 근방의 명승지인 항저우로 나들이를 갔다.
장대하고 고요한 호수 주위를 거닐던 도중, 메이링은 공산당이 내전을 끝내는 데에 합의하기 위해서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칭링에게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노골적인 질문을 받은 칭링은 당황했다. 자매들은 정치적 견해 차이에 대해서는 늘 언급을 피해왔다. 칭링은 마오쩌둥이장제스를 무찌르도록 있는 힘껏 돕는 한편으로 메이링에게 민물 새우 같은 맛있는 음식을 보냈고, 메이링은 진저케이크와 치즈비스킷으로 답례하고는 했다. 칭링은 아이링의 아픈 눈을 위한 치료법을 제안했고 쑹쯔량의 딸에게 책을 보내주기도 했다. 사방에서 벌어지는 격렬한 전투는 그들의 삶과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메이링의 질문은 냉혹한 현실을 절감하게 했다. 게다가 그때까지 칭링은 다른 가족들이 간악한 무리로취급하는 공산당의 정식 당원이 아니라 그들의 입장에 동조하는 지지자일 뿐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었다. 메이링의 질문은 가식은 여기까지라고, 형제자매들 모두 칭링이 자신들을 파괴하려고 드는 조직의 핵심 인사임을알고 있다고 알리는 신호였다. 칭링은 허둥지둥하며 이전과 똑같은 거짓시늉을 되풀이했다. 자신은 공산당과 아무 관계가 없으며, 따라서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칭링은 동생과 헤어져 상하이로 가는 바로 다음 열차를 탔고, 상하이에 내린 즉시 동생과 나눈 대화를 공산당에 보고했다. 당의 눈을 피해서 가족들과 거래를 하고 있다는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 P330

아이링은 메이링에게 돌아가지 말라고 조언했다. 메이링이 뉴욕을 떠나겠다는 분위기만 풍겨도 그녀는 "난리를 쳤다." 아이링에게 장제스는 그들 가족에게 온갖 몹쓸 짓을 저지른 데다가 끔찍할 만큼 무능한, 그들의 헌신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이링은 동생을 걱정했고, 동생이 죽으러 가는 것이나 다름없는 귀국길에 오르는 꼴을 두고볼 수 없었다. 공산당은 타이완으로 진격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스탈린의 지원을 등에 업고, 타이완의 국민당 내부에 간첩들을 전략적으로 배치해둔 공산당의 타이완 점령은 성공할 가능성이 컸다. 총통이 타이완 탈출을 완고히 거부하는 상황에서, 아이링은 메이링이 그와 함께 죽기를 원하지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어려움에 처한 남편을 버리는 것이 아내로서 얼마나 지탄받는 일인지도 그녀는 고통스러울 만큼 잘 알았다. 또한 메이링이 장제스를 떠나면 그가 절대로 그녀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종국에는 장제스가 용서하지 않았던 수많은 이들의 전철을 메이링이 밟게 되리라는것도 예상하지 못했을 리 없다. 아이링은 평소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가졌지만, 이때는 그녀답지 않게 어찌 할 바를 몰랐다. - P336

마오쩌둥은 기차역으로 나와서 칭링을 마중했다. 어린이들이 그녀에게 꽃다발을 건넸다. 소련식 환영 행사였다. 쉰여섯의 나이에 (그녀는 마오쩌등보다 11개월 연상이었다) 칭링은 마오쩌둥 정부의 부주석이 되었다.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한 1949년 10월 1일, 칭링은 그의 바로 뒤에서 톈안먼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자매들이 쫓겨난 망명자 신세이던 그때 칭링은 인생의 정점에 서 있었다. - P343

엄밀히 말하면 칭링은 중국공산당 당원이 아니었다. 1930년대에 그녀는 코민테른에 가입했지만, 코민테른을 직접 관할하고 있던 소련은 칭링이 조직 바깥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는 편이 낫다고 보았다. 1943년 코민테른이 해체된 이후 칭링은 중국공산당과 소련을 자신의 ‘조작‘으로 간주했지만 정식으로 당원이 된 것은 아니었다. 공산당의 중국에서 그녀는 정책결정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러나 불만은 없었다. 정치적으로 출세하겠다는 야망도 없고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던 그녀는 중국복리회를 자기 나름대로 꾸려가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칭링이 가족의 재산을 송두리째 공산당에 넘길 때에 함께 기증한 쑹씨 가족의 옛집이 중국복리회의 새로운 거처가 되었다. 중국복리회는 여성 및 아동 전담 병원, 유아원, 소련식 ‘소년궁小年宮:어린이를 위한 놀이 시설과 교육 시설을 갖춘 일종의 청소년 수련관/옮긴이)‘을 운영했고, 어린이 극장도 열었다. 그러나 주된 업무이던 기아구호는 중단해야 했다. 중국공산당의 공식 입장에 따르면, 중화인민공화국에 배를 곯는 사람은 없었다. 미국의 국제 방송국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에서 칭링이 굶주리는 이들을 돕고 있다고 보도하자, 그녀는 즉시 저우언라이에게 편지를 보내서 이 "파렴치한 사실 왜곡"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겠다고 나섰다. - P345

칭링의 집에서는 진짜 가족 같은 분위기가 흘렀다. 즐겁게 웃고 떠드는 날도, 샐쭉하니 토라져서 씩씩대는 날도 있었다.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유독 일반 대중에게까지 퍼졌다는 점이 평소와 달랐다. 국가 지도자들의 사생활은 이중삼중의 베일에 싸여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다른 고위 간부가 불륜을 저질렀다고 해도 그 소문은 당의 핵심 집단 내에서 퍼질 뿐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았다. 널리 소문이 퍼진 것은 칭링뿐이었다.
이 소문과 쑨원의 탄생 기념 행사에서 배제된 사건은 칭링을 불안하게했다. 이러다가 자신의 생존에 없어서는 안 될 쑨원 부인 칭호를 박탈당할수도 있겠다는 깨달음이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이전에 장제스 치하에서도 비슷한 소문이 있었지만, 그때는 그녀가 공개적으로 소문을 반박할 수있었다. 몇몇 신문이 그녀의 입장을 실어주었고, 그것도 여의치 않다면 전단지로 만들어서 상하이의 고층 건물 옥상에서 뿌리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칭링은 국가 부주석임에도 자신의 목소리를 전할 수단이 없었다. 대중 앞에 나서서 자신을 변호할 길이 없었던 그녀는 오로지 당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그녀가 쑨원을 향한 정절을 충실히 지켰더라도, 당에서 그녀를 쑨원 부인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 섬뜩한 현실 앞에서는 칭링도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복종을 표현할 방법을 찾아냈다. 1957년 4월, 마오쩌둥 정부의 2인자 류사오치가 상하이에 와서 아내 왕광메이와 함께 칭링을 방문했다. 명석하고 우아한 왕광메이는 명문가 출신으로 공산당 집권 이전에 베이징의 가톨릭계 대학교에서 물리학 학위를 받은 수재였다. 부부는 칭링과 사이가 좋았다. 칭링은 류사오치 부부의 방문을 당이 보낸 화해의 신호로 해석했고,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류사오치에게 공산당 가입을희망한다고 말했다. 왕광메이는 입당하고자 하는 칭링의 간절함을 눈치챘다. 류사오치는 무척 기뻤지만, 이것이 "아주 중대한 일인 만큼 마오 주석에게 보고하겠다고 신중을 기하여 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정권의 3인자 저우언라이를 데리고 다시 상하이를 방문했다. 두 사람은 칭링에게 당 외부에서 당의 혁명 사업을 돕는 편이 더 낫겠다며, 당에 가입하지않더라도 모든 주요 사안을 수시로 알려줄 테니 의사 결정에 참여해도 좋다고 전했다. 칭링은 고개를 끄덕였다.  - P350

1958년 마오쩌둥은 그 이름도 웅장한 ‘대약진(大躍進)‘을 개시했다. 군사 사업의 모든 영역을 초고속으로 건설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그러기위해서는 철강이 필요했고, 경제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던 마오쩌둥은 전국 인민에게 철강을 만들라고 명했다. 토법고로(法高라고 불리는 가정용 용광로가 중국 전역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칭링 역시 자신의 직원들과 함께 정원에 용광로를 만들었다. 이 거대하고 흉물스러운 장치를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그녀는 수려한 고목을 몇 그루나 베어야 했다.「인민일보」는 그녀가 붉게 녹인 쇠를 손수 집게로 들어올려 청년들의 망치질을 도왔다고 보도했다. 칭링은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저항하지 않았다.
중국 전역에 대기근이 들었다. 대약진 운동으로 인한 인적, 물적 자원의막대한 낭비가 주된 원인이었다. ‘기근은 1958년부터 1961년까지 4년간 이어졌다. 4,000만 명이 넘는 중국인들이 굶어 죽었다. 특권층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칭링의 주변에도 배를 곯는 이들이 있었다. 직원들의 식사를 보충하기 위해서 칭링이 애완용으로 기르던 염소를 도축하라고 명한 적도있었다.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의 폭정을 목격한 일부 공산당 원로들은 반발했다. 대표적인 인물은 국방부 장관 펑더화이였다. 그는 1959년 7월 공개적으로 비판당했다(그는 이후 감금 상태에서 사망했다). 펑더화이를 존•경했던 칭링은 큰 충격을 받았다. 오랫동안 신임해온 비서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녀는 속마음을 드러냈다. "신경이 곤두서 있고, 밤이면 악몽을 꿔"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편지는 읽고 나면 태워버리렴." - P354

1966년 문화 대혁명이 시작되자 칭링은 더 이상 집 밖의 현실을 외면할 수없게 되었다. 문화 대혁명은 마오쩌둥이 일으킨 가장 큰 숙청 사업으로, 주요 표적은 마오쩌둥의 뒤를 이어서 국가 주석이 된 류사오치였다. 그가 대약진 이후 돌연 마오쩌둥을 공격하고 마오쩌둥의 초고속 군수 사업화를 중단시킨 것(덕분에 대기근도 끝이 났다)이 원인이었다. 마오쩌둥은 자신의 계획을 방해한 류사오치를 증오했고, 그가 감옥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도록 만들었다. 류사오치의 아내 왕광메이는 "미국중앙정보국(CIA)과 국민당의 간첩이라는 황당무계한 죄명을 뒤집어쓰고 감옥에 갇혔다. 중국 전역에서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류사오치의 추종자로 몰려서 고초를겪었다. 이들에게는 ‘주자파走資派‘, ‘마귀‘ 등 기괴하고도 무시무시한 꼬리표가 붙었다. 총리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의 충실한 종노릇을 해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다.
칭링은 이번에도 쑨원 부인이라는 신분 덕택에 최악을 모면했다. 실제로 마오쩌둥이 홍위병으로부터 보호할 것을 특별히 명한 인물들의 명단에서 그녀는 첫째 줄에 위치했다. 칭링 역시 곤욕을 치렀지만, 다른 이들이 겪은 것에 비하면 그저 성가신 일에 불과했다. - P360

사실 그 어떤 정책도 장칭이 주도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마오 주석의 개였습니다. 그가 누구를 물라고 명령하면 가서 물었죠." 장칭은 1930년대에 상하이에서 배우로 활동하다가 몇몇 좌파 예술가들과 함께 옌안으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마오쩌둥의 눈에들었다. 1938년 마오쩌둥은 (세 번째) 아내를 버리고 장칭과 결혼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마오쩌둥은 장칭이 악의에 가득 찬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기꺼이 그 악의를 이용했다. "장칭은 전갈보다도 독이 가득한사람이라네." 마오쩌둥은 집안사람에게 이렇게 말하며 새끼손가락을 전갈의 꼬리 모양으로 까딱까딱 움직였다. 장칭은 마오쩌둥의 명에 따라서 문화 대혁명을 진두지휘했고, 남들이 꺼리는 일을 도맡았다. 그녀가 모두에게 미움받고 있음을 마오쩌둥도 알았다. 불치병을 앓던 말년의 그는 쿠데타가 일어날까 두려워하며 정적들을 향해 거듭 메시지를 보냈다. ‘내 아내와 그 패거리는 당신들 마음대로 처리해도 좋다. 단, 내가 죽을 때까지는 기다려달라‘는 것이었다.
장칭과 사인방이 수감되자 칭링은 기뻤다. 그녀는 흥분하여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은 이 요사스러운 여자에게 지나치게 인정을 베풀고 있어! 글쎄 그 여자가 날씨가 너무 춥다면서 가발을 되돌려달라고 요청했다지 뭐니!" 사인방의 재판이 진행되고 있던 1980년, 칭링은 안나 왕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장칭이 저지른 최악의 악행은 모든 일이 남편 마오쩌둥의지시였다고 주장하여 그의 명예를 더럽힌 것이라고 말했다. "정신 나간 여자 같으니라고!" 마오쩌둥의 부주석은 소리쳤다.  - P368

그해 6월 25일, 김일성이 이끄는 북한군이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지원 아래 남한을 침공했다. 한국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틀 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타이완에 대한 ‘불개입‘ 방침을 뒤집고 타이완 방어에 뛰어들었다.
이로써 타이완의 미래가 보장되었다. 미국의 원조가 도착하기 시작하면서 장제스는 위기를 넘겼다. 메이링은 한없이 고양되었다. 타이완의 날씨("끔찍해, 지독스럽게 덥고 후텁지근하고")와 피부병("땀띠랑 두드러기가 잔뜩생겼어")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생기가 넘쳤다. "새로운 기획을 추진하고사업을 확장할 생각에 머릿속이 바빠", "올해 [1951년]가 가기 전에 본토를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어." - P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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