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역시 당신 심장과 똑같은 것을 내 가슴속에 감추고 있어.
지구상에 진정으로 살아 있는 유기체가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은이미 오래전의 일이야. 우리는 모두 기계야. 그럼에도 우리 자신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지. 그런 환상을 품도록 우리 뇌가 프로그래밍되어 있기 때문이야. 땅콩 자동판매기와 당신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면, 그건 당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뿐이야. 꿈에서 깨어나야 해.」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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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시작하며

내가 어렸을 적에 아버지는 나를 재우기 전에 언제나 이야기를들려주셨다. 그러면 나는 밤에 그 이야기에 관한 꿈을 꾸었다.
그 뒤로 나는 세상살이가 너무 어려운 것으로 보일 때마다 짤막한 이야기를 짓곤 했다. 내가 겪는 문제의 요소들을 무대에 등장시켜 이야기를 짓고 나면 이내 마음이 평온해졌다.
초등학교 시절에 다른 아이들은 나에게 이야기를 지어 달라고부탁하기가 일쑤였다. 그러면 나는 대개 이런 식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가 너무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어......>
세월이 흐르면서 그 이야기들은 갈수록 환상적인 것으로 변했다. 그러다가 그것들은 하나의 게임이 되었다. 사람들에게 어떤 문제를 제기하고 뜻밖의 해법을 찾아내게 하는 게임 말이다.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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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 컬렉션은 1924년 마지막 황제 푸이가 자금성에서 쫓겨날때까지 그의 손에 있었다. 이듬해 베이징에 고궁 박물원이 설립되었고, 천 년 동안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았던 컬렉션이 마침내 전시되었다. 그러나 1931년 일본군이 만주를 침략하자 컬렉션은 안전을 위해 2만 개의 나무 상자에 담겨서 상하이로 보내졌다. 그 다음에는 난징의 창고에 보관되었다가, 1937년 일본군이 남쪽의 그 수도마저 점령할 위기에 처하자 상자들은 배에 실려 양쯔강 상류로,
기차에 실려 친링산맥 너머로, 트럭에 실려 한중으로 보내졌다. 선박이 침몰하고 건물이 폭파되는 등 제임스 본드 영화에 나와도 될법한 사건들이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컬렉션은 단 한 점도 다치지 않고 모두 안전한 곳에 도착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컬렉션은 여태 상자에 담긴 채 난징으로 돌아왔다. 그러던 1947년 공산당이 난징에 바싹 다가오자, 장제스는 타이완으로 도망치면서 그중 최고의 작품들을 챙겨 간 뒤 타이베이 산허리를 파낸 터널에 보관했다.
이후 작품들은 그곳에 죽 갇혀 있었다. 딱 한 해만은 예외였는데, 1961년 봄부터 일 년간 약 200점의 그림과 유물이 범관의 「계산행려도」와 곽희의 「조춘도」도 포함되었다 미국에서 열린 「중국미술의 보물들」 순회 전시회에 나선 것이었다. 퐁은 <중국 미술에 대한 현대 서양의 연구는 오직 그 전시 하나로부터 탄생했다고 말했다. 원자폭탄의 아버지인 J.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전시를 보고 퐁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만일 우주선 하나에 담을수 있는 만큼만 남기고 지구를 통째 파괴해야 한다면, 이 그림들 중몇 점도 그 우주선에 들어가야 할 겁니다.> 4년 뒤, 장제스는 마침내 타이베이에 새 고궁 박물원을 열었다. 그는 비록 중국의 위대한 도시들과 인구와 땅을 잃었지만, 황실 컬렉션이라는 위대한 보물 하나만큼은 간직했다. - P270

이 컬렉션은 타이완 내에서도 여행하지 않는다. 최고의 작품들을 미국으로 보내기로 한 결정이 중국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들 중 475점을 보내기로 했다-- 사람들의 화를 그토록 부추긴 것은 그 때문이었다. 메트 대여가 예정된 품목 중에는 고궁 박물원이 컬렉션에서도 특히 귀한 작품만을 엄선하여 작성한 <제한 목록>에 포함된 것도 27점 있었는데, 이 목록에 포함된 작품들은 보통 매 3년마다 40일씩만 전시된다. 미국 사람들에게 박물관은 주로 대중을 위해서 전시를 여는 교육 기관이지만, 중국 사람들에게박물관은 문화적 보물을 안전하게 지키는 창고다. 중국의 미술 애호가들도 물론 감상을 즐기지만, 그림의 아름다움은 역사적 가치에 비해서는 부수적인 것으로 여긴다. 그러니 범관의 그림을 해외로 보낸다는 것은 말하자면 미국이 독립 선언문이나 헌법 원본을 해외에 빌려주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 P271

고궁박물원의 작품 안내문에 적힌 작가명, 제작 연도 등은 18세기에 작성된 내용이다. 이후 연구에서 그중 많은 내용이 부정확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는데도 박물원은 바꾸지 않고 그대로 두고 있다. 타이완의 한 예술학자는 내게 말했다. 작품 귀속을 바꾸기 시작하면, 컬렉션의 가치를 훼손한다는 비난이 쏟아질 테니까요. 어떤 작품이 실은 범관의 작품이 아니라고 선언한다면, 입법원이 얼마나 히스테리를 부릴지 상상해 보세요!」 박물원 학자들은 그 대신 은밀한 방식으로 귀속을 바로잡는다. 가령 중국에서는 중요한 그림일 경우 가을에 전시하는 전통이 있는데, 따라서 만일 당신이 봄에 범관을 본다면 박물원 측이 실은 그 작품을 범관의 작품으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셈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특징적양식을 따르지 않았습니다>라는 문구도 재귀속을 암시한다.  - P272

타이완에서는 1949년 장제스와 함께 건너온 사람들과 그 후손들로 인구의 약 20퍼센트를 차지하는 <외성인>들(<1949년 사람들>이라고도 부른다)과 그보다 훨씬 더 전에 그곳으로 건너온 선조를 둔 <본성인>들 사이에 알력이 심하다. 두 집단 모두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본토에서 비롯한 같은 한족이기 때문에, 이 긴장은 언뜻 이해되지 않는다. 한편 타이완섬의 토착 원주민 인구는 아주적다. 그러나 장제스 세력이 정복자의 분위기로 건너왔고, 1949년부터 잔인한 <장 왕조가 끝난 1987년까지 본토에서 건너온 국민당이 나라를 다스렸기 때문에, 본성인들은 더 많은 토지와 부를 갖고 있는데도 하층 계급 취급을 당했다.
자신들이 계속 중국 본토까지 다스린다고 주장하면서 입법원에 본토의 모든 구역들에 해당하는 대표자를 두었던 장제스 정부는 부패 정부였다. 그러나 지난 9년 동안 타이완은 놀라운 유연성을 발휘하여 제대로 기능하는 민주주의 국가로 변신했고, 이제 교육수준이 높은 인구(문해율이 90퍼센트가 넘는데 문자 언어에서는 놀라운 수준이다)와 막대한 국가자산(세계에서 1인당 현금 보유량이 가장 큰 나라에 속한다)과 개방적인 선거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입법원은 이제 자신들이 중국 전체를 대변한다고 공언하지 않는다. - P283

고궁 박물원을 보완할 타이완만의 장소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타이완인으로 정체화해야 합니다. 학교에서는 우리에게 우리는 위대한 중국 문화의 일부라고 가르치지만, 사실 나는 그 문화에 진정으로 소속되었던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의식을 고취시켜야 하고, 그들이 본토로부터 문화적 자유를 추구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천이 이처럼 지금 논의하는다른 주제를 그보다 더 근본적인 독립의 문제와 연결 지어 이야기하는 것은 타이완의 긴장된 정치 상황 탓에 여기서는 어디서나 전형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다. 「타이완 지도부는 본토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는 창의적으로 애매한 표현을 쓸 수밖에 없다고말합니다만, 베이징을 헷갈리게 하려는 그 애매함이 실상 적들보다는 타이완 국민들을 더 헷갈리게 만듭니다. 중국이 무력을 쓴다면, 우리는 반격할 겁니다. 우리는 중국의 경제 지구들을 신속하게 파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본토의 군사 전문가들에게 위협을 가하는 방식으로는 이길 수 없겠지만, 우리 무력으로써 본토 경제학자들에게 두려움을 심는다면 그곳 지도부가 분열되도록 만들수 있고 그래서 우리가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계획을 본토에 똑똑히 알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고유의 문화적 정체성을 기르는 것도 이런 정책의 일환입니다. 그러나 고궁 박물원은 이 목적을 떠맡지 못합니다.」 - P284

어느 겨울날 저녁, 퐁은 내게 말했다. 「지금 중국에 고급 중국 문화가 얼마나 있습니까? 전부 서양 문화뿐이죠 중국인들은 지난 150년 동안 너무 많은 것을 잃고 잊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아직까지 살아남은 것들을 너무나 귀하게 여기게 되었지만, 자신의 유산을 자랑스러워하는 것과 그것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은 서로 다른 일입니다.」 - P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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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보다 좀 더 연배가 높은 윗세대의 진보적 백인 예술가들은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서서 지칠 줄 모르고 싸웠다. 평등한 사회를이루기 위해서 꾸준히 노력했다. 그들은 가령 나딘 고디머, 아톨 퓌하르트, J. M. 쿠체처럼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남아공 작가들에 준하는 남아공 예술가들이었지만, 작가들과는 달리 이들은 노벨 평화상이든 다른 어떤 상이든 후보로 오르거나 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해외에서는 비교적 무명이었다. 그들의 영웅주의는 지금도 활발하게 토론되는 주제이고, 그들이 생산한 작품의 질도 마찬가지다. 시각 예술은 늘 글보다 간접적인데, 이 사실이 예술가들에게 자유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한편 그들이 천명하는 이상을 살짝 흐려 보이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아파르트헤이트가 해체된것은 주로 경제적 이유 때문이었으나, 진보적 백인 예술가들도 분명 깊은 인류애와 도덕적 정의감으로 잔인한 나라를 부드럽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하지만 요즘 그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했던 체제를 짐짓 경멸하고는 그 경멸을 마케팅한 위선자들이라는 이유로종종 비난받는다. 남아공 백인들은 진보주의자라는 딱지에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딱지 못지않게 당혹해한다. 백인의 진보주의란 어쩐지 의무감에서 나온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의무감이란 예술의 대립항이기 때문이다. - P216

지난 1980년대, 해외로 쫓겨난 ANC 멤버들이 기획하고 유엔이힘을 실어 주었던 문화적 보이콧은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의 겉보기정통성을 훼손하는 데 기여했다. 보이콧에 따라, 외국 예술가나 운동선수나 학자는 남아공에 가지 말 것을 요청받았다. 거꾸로 남아공인들은 해외 전시회나 대회에 참가하지 말 것을 요청받았다. 이런 문화적 보이콧은 아파르트헤이트의 몰락을 앞당기는 데 일조했다. 물론 그로 인한 고립이 남아공 흑백 예술가 모두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기는 했지만, 그 와중에도 뜻밖의 희망은 있었다. 보이콧이없었더라도 어차피 흑인 예술가들은 유럽의 영향으로부터 대체로단절되어 있었을 것이다. 반면 백인 예술가들은 보이콧이 없었다면 국제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을 텐데, 보이콧 때문에 이제 그것은 아주 부유해서 제 돈으로 여행 다닐 수 있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꿈꿀 수 없는 가능성이었다. 메릴린 마틴은 내게 <문화적 보이콧은 미국과 유럽에 이어져 있던 탯줄을 자르도록 도와주었습니다>라고 말하며, 오늘날 남아공 예술계의 독립성과 생명력은 그 고립이낳은 직접적 결과라고 주장했다. 윗세대의 선도적 예술가 중 하나인 수 윌리엄슨은 이렇게 말했다. 「물론 문화적 보이콧은 어떤 면에서 우리가 자해를 행한 셈이었죠. 하지만 우리가 결국 남아공인이라는 정체성을 제고하는, 뜻밖의 긍정적 영향도 낳았습니다.」 - P217

제인 알렉산더는 추방자 혹은 부랑자인 흑인 남자들의 모형을 실물 크기로 제작한다. 석회로 모형을 뜬 뒤 넝마를 입힌 작품들은 으스스하고, 쓸쓸하고 매혹적으로 인간적이다. 그녀는 내게 애석하기는 해도 슬프지는 않다는 듯한 느낌으로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남아공에는 나 같은 작가들을 위한 자리는 없을 거예요. 모두가흑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세상, 낙원처럼 보이는 세상을 원하죠. 흑인 예술가들은 소련 예술가들이 레닌을 묘사했던 방식으로자신들의 지도자를 묘사하고 있고, 백인 예술가들은 기회 균등 조치에 따라 뒷전으로 물러나야 할 겁니다. 예전에 잠깐 유색인 학교에서 가르쳤던 적이 있어요. 그 사람들과 교류하고 싶은 마음도 한 이유였죠. 그런데 어느 날 유색인 교사가 와서 내 자리를 원한다고 말했고, 나는 그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었어요. 아마 십 년 후에는 내 작품들이 창고에 처박혀 있을 거예요. 당신이 볼 때는 투쟁에 공감하는 듯한 작품들이더라도.」 나는 그녀에게 현재의 정치 상황, 타협의 정신, 백인들이 들이는 노력, 변화의 추동력에 관해서 말했다. 그녀는 조용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많은 백인들이 불평등을 최대한 빨리 시정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이 일을 한시바삐 끝내고 싶기 때문이에요」 - P221

이런 환경에서 백인들의 역할은 좀 곤란한 데가 있다. 요하네스버그 예술 재단을 운영하는 백인 관장 스티븐 섹은 이렇게 말했다.「두 단계 과정입니다. 식민주의자들이 파괴하고, 후원자들이 재건을 돕죠 요즘은 흑인의 <진정한> 정체성을 되찾는 것이 유행이 되었어요. 마치 백인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흑인들의 작품에 진정성이 더 있었던 것처럼. 최근에 몇몇 흑인 학생들이 색채 이론 수업을 열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들은 유화 화가가 되고 싶어 합니다.
그 대신 그들에게 구슬 공예를 가르친다면, 그건 그들의 정체성을회복하는 일일까요, 아니면 모든 사람에게는 제자리가 따로 있다고 말하는 궁극의 아파르트헤이트식 조치일까요?」 백인들은 가르치려 드는 태도로 흑인 작가들의 작품을 낮잡아 보면서도 동시에그것을 감상적으로 다룸으로써 미화하는 경향이 있다. 흑백을 불문하고 대부분의 작가들은 비하하는 뉘앙스가 있지만 상업적으로는 성공한 용어인 타운십 예술이라는 말을 싫어한다. 이 말에는 분리된 예술, 좀 더 원초적인 환경에서 태어난 예술이라는 뉘앙스가담겨 있다. 그런데 작가들이 이것보다 더 싫어하는 용어는 과도적예술이라는 표현이다. 언론에서 종종 쓰이는 이 말에는 논리적 수순으로 볼 때 흑인 전통 예술은 결국 백인 예술로 대체될 것이라는 뉘앙스가 담겨 있다. - P224

화가 샘 늘렝게트와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내 작품을 보고묻습니다. <어떻게 타운십에서 그렇게 행복한 작품을 그립니까?>타운십에 전쟁만 있는 건 아닙니다. 음악, 결혼식, 파티도 있습니다. 바로 옆 골목에서 사람들이 죽어 나가도요. 폭력이 발생하면, 외부인들은 그것만 보죠. 그건 잘못입니다. 나는 현실의 비율을 예술에도 반영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30퍼센트가 폭력이라면 70퍼센트는 즐거운 축제 같죠. 요전 날 아침에 일어나서 집 밖으로 나갔다가 시체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분명 현실의 일부이고, 따라서 내 예술에도 반영됩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원래 가려고 했던 곳으로 외출했습니다. 그렇게 삶의 균형을 맞춥니다.」 - P228

모든 사람들이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동등하게 중요하다고단언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할 말이 있고 그 말들이 모두 동등하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협화음을 끌어낼 따름이다. 천 개의 목소리를 동시에 들으면서 개개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우리는 취사선택해야만 한다. 새로운 남아공은 열한 가지 언어를 공식 언어로 쓸 것이라는 결정이 발표된 날로부터 일주일 뒤, 노벨상에 두 차례 후보로 올랐던 인권 운동가 헬렌 수즈만을 만났다. 수즈만은 내게 <통역 과정에서 얼마나많은 것이 사라질지 생각하면 끔찍해요>라고 말했다. 다양성 인정이 아무리 시급한 과제이더라도, 중앙 정부가 당연히 갖춰야 하는 모종의 통일성까지 포기해서는 안 된다. - P236

내가 저녁 식사에서 나눴던 대화는 메트가 고궁박물원의 중국미술 작품들을 빌려서 뉴욕에서 열 전시회 이야기였다. 전시는 예정일이 채 두 달도 안 남은 상태였다. 그 전시는 양측이 5년 넘게벌여 온 신중한 협상의 결실이었고, 양국 간 최고 수준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협력을 뜻하는 작업이었다. 전시는 원래 섬세한 국제 외교를 필요로 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중에서도 이 전시는 특별한 정치적 의미가 있었다. 미국이 한편으로는 중국의 비위를 맞추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의 인권 유린을 가볍게 꾸짖는 이 시점에, 또한 중국이 꼭 자기 나라에서 이탈한 지방의 한 성처럼 여기는 타이완을 무력으로 통합하겠다고 으름장 놓는 이 시점에, 이 전시는 타이완의 존재감과 차츰 커져 가는 자결의 의지를 미국 관람객들에게 상기시킬 것이었다. 1996년 3월 19일 화요일로 예정된 개막일은 타이완에서 첫 대통령 자유선거가 치러질 날로부터 겨우나흘 전이고, 타이완이 그처럼 자유를 과시하는 데 대해 본토는 벌써부터 귀가 먹을 듯 시끄럽게 칼을 덜그럭거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 전시는 서양에서 열린 중국 미술 전시들 중 역사상 최대 규모일 것이었다. 중국 미술 역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여 주는 작품들이 소개될 것이었다. 그 역사를 대여해 주는 것이 중국이 아니라타이완인 것은 1949년 장제스가 타이완으로 달아나면서 최고로귀한 유물, 회화, 서예, 도자기, 옥, 청동 작품들을 싹 쓸어 갔던 사정 때문이다. 중국은 그 작품들을 도난당한 것으로 여기고, 응당 베이징으로 돌려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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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머니가 나를 욕실로 데리고 들어가 욕조 마개를 막은 다음 수돗물을 제일 세게 튼다. 욕조 물이 차오르자 흰 욕실이 어딘가 변해서 눈앞을 가린다. 전부 다 보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 P23

이제 태양이 기울어서 일렁이는 물결에 우리가 어떻게비치는지 보여준다. 순간적으로 무서워진다. 나는 아까 이집에 도착했을 때처럼 집시 아이 같은 내가 아니라, 지금처럼 깨끗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고 뒤에서 아주머니가 지키고 서 있는 내가 보일 때까지 기다린다. 그런 다음 머그잔을 물에 담갔다가 입으로 가져온다. 물은 정말 시원하고 깨끗하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 나는 머그잔을 다시 물에 넣었다가 햇빛과 일직선이 되도록 들어 올린다. 나는 물을 여섯 잔이나 마시면서 부끄러운 일도 비밀도 없는 이곳이 당분간 내 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주머니가 나를 끌어당겨 풀밭에 다시 안전하게 올려놓은 다음 혼자 내려간다. 양동이가 옆으로 잠시 떴다가 가라앉아서 꿀꺽꿀꺽 반가운 소리를 내며 물을 삼키더니 수면 밖으로 나와 들어올려진다. - P30

마당을 비추는 커다란 달이 진입로를 지나 저 멀리 거리까지 우리가 갈 길을 분필처럼 표시해 준다. 킨셀라 아저씨가 내 손을 잡는다. 아저씨가 손을 잡자마자 나는 아빠가 한 번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런 기분이들지 않게 아저씨가 손을 놔줬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힘든 기분이지만 걸어가다 보니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나는 집에서의 내 삶과 여기에서의 내 삶의 차이를 가만히내버려 둔다. 아저씨는 내가 발을 맞춰 걸을 수 있도록 보폭을 줄인다. 나는 작은 주택에 사는 아주머니를, 그 여자가 어떻게 걷고 어떻게 말했는지를 생각하다가 사람들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 P70

"넌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 아저씨가 말한다. "절대 할필요 없는 일이라는 걸 꼭 기억해 두렴. 입 다물기 딱 좋은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 - P73

달이 다시 나오자 아저씨가 램프를 끄고, 우리는 달빛 속에서 사구를 내려왔던 길을 쉽게 찾아 따라간다. 사구 꼭대기에 도착해서 신발을 신으려 하자 아저씨가 나를 말리며직접 신겨준다. 그런 다음 자기 신발을 신고 끈을 묶는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멈춰 서서 바다를 돌아본다.
"보렴. 저기 불빛이 두 개밖에 없었는데 이제 세 개가 됐
구나."
내가 저 멀리 바다를 본다. 아까처럼 불빛 두 개가 깜빡이고 있지만 또 하나가, 두 불빛 사이에서 또 다른 불빛이꾸준히 빛을 내며 깜빡인다.
"보이니?" 아저씨가 말한다.
"네." 내가 말한다. "저기 보여요."
바로 그때 아저씨가 두 팔로 나를 감싸더니 내가 아저씨 딸이라도 되는 것처럼 꼭 끌어안는다. - P75

자갈 진입로에서 자동차가 브레이크를 밟는 소리와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어느새 나는 내가 제일 잘하는일을 하고 있다.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나는 선 자세에서 곧장 출발하여 진입로를 달려 내려간다. 심장이 가슴속이 아니라 내 손에 쥐어져 있는 것 같다. 나는 내 마음을 전하는 전령이 된 것처럼 그것을 들고 신속하게 달리고 있다. 여러 가지 일들이 마음속을 스친다. 벽지에 그려진 남자아이, 구스베리, 양동이가 나를 아래로 잡아당기던 그 순간, 길 잃은 어린 암소, 젖은 매트리스, 세 번째 빛, 나는 내여름을, 지금을, 그리고 대체로 지금 이 순간만을 생각한다. - P96

 나는 손을 놓으면 물에 빠지기라도할 것처럼 아저씨를 꼭 붙든 채 아주머니가 목구멍 속으로 흐느끼다가 울다가를 반복하는 소리를 듣는다. 꼭 한 명이아니라 두 명 때문에 우는 것 같다. 나는 차마 눈을 뜰 수가없지만 그래도 억지로 뜬다. 킨셀라 아저씨의 어깨 너머 진입로를, 아저씨가 볼 수 없는 것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아저씨의 품에서 내려가서 나를 자상하게 보살펴 준 아주머니에게 절대로,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고 얘기하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지만, 더욱 심오한 무언가 때문에 나는 아저씨의 품에 안긴 채 꼭 잡고 놓지 않는다.
"아빠." 내가 그에게 경고한다. 그를 부른다. "아빠."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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