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너무 좋아. 미도리."
" ‘너무‘라니, 얼마나?"
"봄날의 곰만큼."
"그게 무슨 말이야, 봄날의 곰이라니?"
"봄날의 들판을 네가 혼자 거닐고 있으면 말이지. 저쪽에서 벨벳같이 부드럽고 눈이 똘망똘망한 새끼 곰이 다가오는 거야. 그리고 네게 말을 건네지. 안녕하세요, 아가씨나와 함께 뒹굴기 안 하겠어요? 그래서 너와 새끼 곰은 부둥켜안고 클로버가 무성한 언덕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온종일 노는 거야. 그거 참 멋지지?"
"정말 멋져"
"그만큼 널 좋아해."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이것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1987)에 나오는 대화다. 이 대화 직후에 미도리가 말없이 ‘나‘의 품에 안겨 오는 것은 당연하다. 이 정도 성의라면 감동받을 만한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너무‘라는 간편하고도 흔해빠진 부사어에 습관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이를 여섯줄의 문장으로 바꿔낸 성의(물론 이것은 사랑의 힘이다)에 있다.
상대방이 자신에게 클리셰(상투어)를 남발한다는 것은 그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 P359

흔히 인문학은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라고들 하는데, 윌리스에 따르면 그것은 곧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무엇을‘ 생각하는가에 대해 ‘선택‘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생각하는 방법이란 곧 선택하는 방법이라는 것. 어떤 현실과 맞닥뜨렸을때 이를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다른 생각을 의식적으로 선택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늘 같은 방식으로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상 생각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늘 같은 방식으로 생각한다고? 그렇다. 월리스는 이를 "디폴트 세팅 (default setting)", 즉 ‘초기설정‘이라고 부른다. 컴퓨터가 그렇듯이 인간에게도 초기설정이라는 것이 있다.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자기중심적인 본성과 자신이라는 렌즈로 만물을 보며 해석하도록 되어 있는 경향이 그것. 타인의 생각이나 감정은 특별히 노력하지 않으면 알기 어렵다. 반면 나 자신의 생각과 감정은 언제나 생생하고 절박하며 현실적이다. 그래서 대체로 우리는 나를 중심에 놓고 세상을 해석한다. - P370

 현대는 밝힘 (enlightenment, 계몽)의시대다. 이성과 진보에 대한 당당하고 명료한 확신. 그렇다면 현대문학은 당당하고 명료한 것을 우울하고 애매하게 만들어버리는 길을 택해야 할 때도 있으리라.
우울하고 애매하게 만들기. 이를 각각 ‘멜랑콜리‘와 ‘아이러니‘라고 부른다. 잃어버린 것을 포기하지 못한 채 상실의 고통과 한 몸이기를 끝내 고집하는 것. 믿는 척하면서 안 믿고, 지는척하면서 이기는 것. 전자는 우리가 무언가 결정적인 것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음을 고독하게 증거하고, 후자는 절대적인 진리라 간주되는 것들이 한낱 상대적인 진리일 뿐임을 경쾌하게 폭로한다. 멜랑콜리는 ‘증상‘이고 아이러니는 ‘태도‘이지만 여하튼 둘 다 ‘방법‘이다. 현대문학, 즉 우울함을 퍼뜨리고 애매함을 창조하는 어떤 방법. 
이제 무진으로 가자. 우울함과 애매함이 지배하는 곳. "무진의 명산물인 안개가 거기에 있다. "밤사이에 진군해온 적군들" 혹은 "여귀가 뿜어내놓은 입김" 같은 안개 속에서 당당하고 명료한 것들은 힘을 잃는다. 그곳에서는 내가 지금 가진 것이 내가 잃은 것과 다르지 않음을 쓸쓸하게 인정하게 된다. 또 그곳에서는 성공과 실패, 진심과 거짓, 욕정과 사랑의 경계가 뒤섞인다. 그러나 안개 속에서만 보이는 이것이 우리의 진실이라면? 진실이란 본래 그렇게 우울하고 애매한 것이라면? 빨려들듯 찾아갔다 도망치듯 떠나오는, 진실의 공간. 무진은 우리에게 왜 문학이 필요한지를 알려주기 위해 거기 있다. 우울하게 애매하게. 무진은 주인공 윤희중의 고향이자 현대문학의 고향이며 나의 고향이다. - P383

확실히 작품은 사람과 비슷하다. 첫인상이 전부는 아니라는점에서 말이다. 더 심각하고 진지하게 말하자면, 한 번 보고는아무것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것은 평론가로서 내가 갖고 있는 ‘직업윤리‘이지만, 창작자들에게 기대하는 ‘작업 윤리‘이기도 하다. 게으르게 만들어진 영화들의 공통점 중하나는 인간을 납작하게 그린다는 것이다. 어떤 영화에 한번보면 다 알겠는 평면적 캐릭터가 나온다는 것은 그 영화를 만든 사람이 타인이란 한 번 보면 대충 다 파악할 수 있는 존재들이라고믿고 있다는 뜻이다. 언젠가 쓴 적이 있지만, 인간의 내면이 얼마나 복잡한 것이며 타인의 진실이란 얼마나 섬세한 것인지를편리하게 망각한 채로 행하는 모든 일은 그 자체로 ‘폭력‘이다. 창작이 폭력이 되어서는 안 된다. - P390

시간은 완벽하지 않다. (시간의흐름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을 남겨둔다.) 그렇다면 시간과 관련해서는 이런 일을 해야 하리라. 변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 변해가는 것을 받아들이고, 변하지 않으면 좋을 것들이 변하지 않도록 지켜내고, 변해야 마땅한데 변하지 않고 있는 것들이 변할수 있도록 다그치기. 이 과분한 지면을 이제 반납하고, 그 일을 하러 가야겠다. - P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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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셜은 각각의 특별한 경향들과 그것들이 각각 작용하는 시간대를 구분하고자 했다. 시간은 "경제적 문제를 야기하는 주요 원인이다. (...) 그리고 그것은 불가피하게 제한된 능력을 가진 인간이 차근차근 문제를 해결해 나가도록 만든다. 따라서 우선 복잡해 보이는 문제를 하나 둘 쪼개보고, 한 번에 하나씩 면밀히 살펴본 다음, 그 과정에서 얻은 해결책들을 문제 전체에 대한 완전한 해결책을 얻기 위해 통합해야 한다." 이런 분석 방법에 기초해 마셜은 한 가지 독창적인 분석 체계를 고안했다. 그는 다른 모든 요인들은 ‘울타리 pound‘에 가둬놓고 각각의 요인들을 하나씩 차례대로 끄집어내 집중적으로 분석했다. 그는 이 울타리를 ‘다른 조건이 같다면‘을 의미하는 라틴어 ‘세테리스 파리부스ceteris paribus‘라 불렀다. 즉, "다른 경향들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런 경향들이 미치는 예상치 못한 영향들은 잠시 동안 무시한다. 문제가 좁혀지면 좁혀질수록, 그것을 좀 더 정확하게 다룰 수 있는 개연성은 그만큼 커진다." - P313

만일 마셜의 수확 체증 법칙이 옳다면, 큰 것이 아름답다는 말이 될것이다. 그런데 정말 큰 것이 아름답다면, 경쟁이라는 것은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규모 기업이 항상 소규모 기업을 집어삼킬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만일 ‘철수 여객 운송‘이 작은요트들로 사업을 계속 고집한다면, 머지않아 커나드Cunard (퀸 메리 2호를 보유한 영국의 선박 해운 회사)에 흡수될 것이다. 그리고 독점이 각 산업을 지배할 것이다. 누구보다 앞장서 경쟁을 옹호했던 마셜은 이런 이론적 모순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물론 그는 간단히 이 모순을 극복했다. 마셜은 기업들이 영원히 생존할 수 있다고 보지 않았다. 그의 경제생물학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즉, 그는 여기에서 다시 생물학에 의지해 유기적 은유organic metaphor를 빌려다 쓴다. 기업가들은 신생 기업을 잉태하고 낳을 것이다. 그리고 이 기업에 양분을 공급하고, 때에 따라 어르고 달래 성인으로 키운다. 그러나 얼마 뒤에 이들 기업가들은 늙어 죽는다. 이들의 대를 잇는 관리자들은 흔히 그렇듯이 전임자들보다 능력이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다른 기업가들이 낳은 새로운 기업들이 이 기업의 경쟁 업체로 성장할 것이다. - P320

그리고 마셜은 ‘수요 법칙 Law of demand‘을 발표했다. 즉, "판매되는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가격은 낮아져야 한다. (...) 가격이 떨어지면 수요가 증가하고, 가격이 상승하면 수요가 감소한다."
물론, 마셜은 수요를 결정하는 것은 가격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는 수요에 영향을 미치는 몇 가지 다른 요인들을 지적했고, 다만 분석을 위해 이것들을 세테리스 파리부스의 울타리 안에 가둬놓았다. 이런 요인들 가운데 그가 가장 비중 있게 다룬 것들은 (1) 소비자의 기호, 관습, 그리고 선호, (2)소비자의 소득, (3) 경쟁 상품의 가격 등이었다. - P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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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어머니 하시는 분들이 힘드실 것 같다. 그런데도아침에 인사를 해주시면 기분이 좋다."
"나는 오늘 꿈이 하나 더 생겼다. 녹색 어머니를 하는 것이다. 가만히 보니까 남자도 할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때가되면 나도 아이들한테 인사를 잘 해줘야겠다."
로운이가 본 녹색 어머니들도 나의 지인처럼 반갑게 아이들을 맞이해주었나 보다. 어른들의 격려가 좋은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만들었나 보다. 어른들이 어린이를 보듯이, 어린이도 어른을 본다. 이웃과 이웃으로서.
이따금 어린이한테 잘 해주고 싶어도 주변에 어린이가없어서 그럴 기회가 없다고 아쉬워하는 분들을 만난다. 우리가 실제로 이웃을 못 만나서 ‘이웃 어른‘이 될 기회가 적어진다면 동네의 범위를 점점 더 넓게 잡자. 길에서 카페에서 식당에서 만나는 어린이 이웃을 환대하면 좋겠다. 그냥어른끼리도 되도록 친절하게 대하면 좋겠다. 어딘가에 ‘세상이 이런 곳이구나‘ 하고 가만히 지켜보는 어린이가 있다는 걸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어린이가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가올 세상이 달라질 거라는 당연한 사실을사람들이 많이 생각해보면 좋겠다.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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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용서의 윤리학을 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적과 제대로 싸울 줄 알아야한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 애초 존경할 만한 적만을 상대하라는 것. 그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 즉 내가 고귀해지기 위해서다. 언뜻 명장(名將)들의 결전 같은 것을 떠올리게 하지만 이것은 물론 실제 전쟁이 아니라 정신의 전쟁에 대한 이야기다.
존경할 만한 적과 정신의 전쟁을 치르며 고귀해지는 길이 있다면, 적에 대한 증오로 세월을 허비하느라 공허해지는 길도 있다. 후자에 대한 니체의 설명은 심오한데, 잘 알려진 대로, 이 대목이 니체 사상의 핵심 중 하나다.

반대로 원한(ressentiment)의 인간이 적을 상정하는 방식을 상상해보자. 바로 여기서 원한의 인간이 행위하고 창조하는 방식이 드러난다. 그는 ‘악한 적‘, 그러니까 ‘나쁜 놈‘
을 상정한다. 그런 인간을 기본 개념으로 삼고, 그로부터어떤 잔상(after-image)이자 상대 (counterpart)인 다른 존재를 도출해내는데, 그것이 바로 ‘착한 놈‘이다. 바로 자기 자신말이다!

도덕에도 계보가 있는데 기독교 도덕에 이르러 우려스러운 역전이 일어났다는 맥락에서 발설된 말이다. 적을 ‘악‘으로 규정해야만 자신을 ‘선‘이라 믿고 자족할 수 있는 이들의 근본 감정은 "원한‘이고, 그것은 언제나 반작용에 불과한, 반동적인 행위만을 낳기 때문에 열등하고 위험하다는 것. 굳이 니체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타인을 부정해야만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삶은 비극적이다.  - P349

"적에 대한 사랑"이라는 말의 깊이를 다 헤아릴 수는 없으되, 니체로부터 몇 걸음 걸어 나와서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내가 겨우 할 수 있는 말은 이것이다. 어떤 이를 비판할 때 해서는 안 되는 일 중 하나는 상대방을 비판하기 쉬운 존재로 만드는 일이다. 그에 대한 나의 비판이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가 그의 다른 글에 이미 존재할 때, 그것을 못 본 척해서는 안 된다. 그런 비판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비판당하는 적은 황당한 불쾌감을, 비판하는 나는 얄팍한 우월감을 느끼게 될 뿐, 그 이후 둘은 ‘이전보다 더 자기 자신인‘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요컨대 진정한 비판은 적의 가장 복잡하고 심오한 부분과 맞서는 일이다. 그럴 때 나의 비판 또한 가장 복잡하고 심오한 수준에 이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의 말대로 적을 대하는 태도는 나 자신을 대하는 태도와 연결돼 있다. 적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적을 사랑하면서 고귀해질 것인가. 적을 조롱하면서 공허해질 것인가. 수많은 매체가 생겨나고, 수많은 비판들이 쏟아진다. 좋은 비판과 나쁜 비판이 있다. 전자는 어려워서 드물고 후자는 쉬워서 흔하다.
(2013.6.23) - P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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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간식 시간에 어린이들과 요구르트를 마셨다. 우리는 빨대를 쓰지 않고 덮개를 뜯어내고 마시기로 했다. 잘 뜯어지지 않아서 애를 먹는 어린이도 있었지만, 그래도 열두 살답게 어찌어찌 해결했다. 다들 조그만 통 조그만 구멍에 입을 대고 달짝지근한 요구르트를 홀짝, 또는 호로록 소리를내며 마셨다. 한 어린이가 말했다.
"이상하게 요구르트를 마시면 일곱 살이 된 것 같아요."
일곱 살이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이다. 5학년인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한 옛날이다. 어른한테는 ‘언제 이만큼 컸나. 세월 빠르다‘ 하고 느낄 만한 시간이 어린이 자신한테는 추억을 쌓기 충분한 세월이다. 똑같이 입술을 오므리고 요구르트를 마시고 있자니, 나도 일곱 살이 된 것 같았다. 동그랗게 모여 앉아 어린이 네 명과 어른 한 명이 모두 일곱 살이 되었다. 무언가 공평해졌다. - 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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