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장이의 수선집은 동쪽으로 몇 거리쯤 떨어진 곳, 그들의 임시정부청사가 숨어 있는 거리보다 더 어둡고 비좁은 골목길에 있었다. 중국인 주인이 한국어로 정호를 맞이하고 그의 구두를 받아 뒤로 가져갔다. 정호는 양말만 신은 채로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그가상해에 가져온 신발은 그 구두 한 켤레가 유일했다. 심지어 테니스를 칠 때도 그 신발을 신었다.
잠시 후, 구두장이가 밑창을 갈아 손질하고 반짝반짝 윤이 나게닦은 구두를 가져왔다.
"이거 완전 새 신발이 됐군요." 정호가 구두끈을 묶으며 말했다.
"야야" 다음에 또 봐요." 주인이 미소를 지어 보이곤 그에게 허리를 굽혔다. 정호도 마주 인사를 했다.
다음에 또 봐요. 그 말을 곱씹으며 새로 고친 구두를 신은 발이 이끄는 대로 향한 곳은 부둣가였다. 아마도 이제 다시는 이 구두의 밑창을 갈 필요가 없으리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셔츠, 바지, 모자, 지금 그가 가진 조촐한 소지품이 그에게 필요한 전부였다. 하지만 다음이 없다는 걸 알면서 듣는 "다음에 또 봐요"라는 그 말이 얼마나더 애틋한가? 종말에 가까워질수록 얼마나 더 자비와 용서의 마음으로 사람들의 얼굴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는가? 경성에 있을 때, 그의 분노는 천천히 타오르기 시작해 좀처럼 꺼질 줄 모르는 잉걸불과도 같았다. 그러나 이제 그 불씨는 모두 물에 씻겨 내려간듯 깨끗이 사라져 버렸고, 남아 있는 것은 자유로움뿐이었다.
정호는 부두 옆에 늘어선 자동차들을 지나쳐 선창을 따라 걸으며 숙련된 하늘의 선원처럼 날갯짓하며 떠다니는 갈매기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매일 이곳을 찾아와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 하늘의 빛깔, 새들의 울음소리, 그리고 태평양의 파도 위에 부서지는 태양도 하루하루 조금씩 달랐다. 세상이 매일 새롭게 태어난다는 사실은 뼈저리는 아름다움을 그에게 안겨주었고, 다만 그는 그것을 조금만 더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거라 생각하며 아쉬워했다. - P484

나는 진주를 옷 가방에 넣고 물가로 걸어 나왔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원한 청색 파도 사이를 둥실둥실 부유했다. 살아가면서 처음으로, 그 어떤 것에 대한 소망도 동경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마침내 바다와 하나였다. - P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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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건물들 틈새로 마지막 빛살을 쏘아 보내고있었다.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은, 오직 그런 금이 난 곳으로만 내뿜어져 발산되는 진실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았다. "사실 술이나 아편 같은 거라도 없으면 다들 어떻게 버티겠어? 자살하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늘어날걸." 옥희는 감기처럼 흔해진 증상이 된 죽음에 대해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가끔은 사람들이 그냥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서 평범하게 아침을 먹고 이제 목매달아 죽자고 결심하는 것 같아."
정호가 걸음을 멈추고 옥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야,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지." 다소 거친 어조였다. 옥희는 잠시 기분이 상했지만, 정호가 다시 걷기 시작하며 이렇게 덧붙이자 그런 마음은 금세 사라져버렸다. "난 살면서 죽음을 눈앞에 둔 순간이 수없이 많았어. 그럴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 그 죽음이라는 게 몸으로 느껴지더라. 가끔은 묵직한 이불 같지. 배고픔에 시달려 몸속에 남아 있는 힘이라곤 단 한 줌도 없을 때 말이야. 또 가끔은 내내 구석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덤벼드는 사나운 개 같기도 해." 정호는 폭발하듯 빛을토해내며 스러져가는 마지막 햇살에 눈을 가늘게 떴다. - P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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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는 그 매끈한 녹색 조약돌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서로를 간직하려 하는 그 모든 물질적이고 비물질적인 방식들- 단어, 기억, 몸짓, 감정을 담뿍 담은 소중한 무언가가 되었다가 다시 아무 의미없는 물건으로 돌아가는 것들- 이 그의 손바닥에 평온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거웠고, 동시에 깃털처럼 가벼웠다.  - P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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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형태의 그래프를 처음 제시한 사람은 1966년 영국의 의학자이자 역사학자인 토머스 매큐언Thomas McKeown 이다. 그의 의도도 바로 그 점을 설명하려는 것이었다. 매큐언은 감염병을 소멸시킨가장 주요한 동력은 현대의학의 발달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가 주장한 결정적 원인은 사회경제적 환경 개선, 그리고 공중보건조치의 시행이었다. 가령 지난 두 세기 동안 세계적으로 부가 크게 증대됨으로써, 과학기술의 발전이 가져다준 깨끗한 물과 안전한 음식을 누릴 수 있는 인구의 수가 점점 많아졌다. 여기에 가족계획이 보급되고 교육이 개선되면서, 그런 요인들이 감염병 확산을 줄이는 데 백신이나 치료법보다 훨씬 더 크게 기여했다. ‘매큐언 가설McKeown hypothesis‘이라고 불리는 이 이론은 그 후 철저한 검증을 거쳐 입증됐다. 혹시라도 오해가 있을까 봐 밝혀두자면, 이 말은 약을 쓰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의약품은 질병 희생자를 줄이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다만 그 공헌의 정도가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것이다. - P138

아직 상황이 그리 나빠 보이지 않을 때 NPI를 적시에 실행하고 대중의 지지를 얻는 일은 공중보건 당국자와 정치인에게 중요한 과제다. NPI란 불편하고 부자연스러우며 크나큰 희생이 따르기도 하므로, 많은 사람이 피하고 싶어 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특히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더 그럴 수밖에 없다. 유행병이 돌 때 대중에게 현 상황을 정확히 이해시키는 것은 지도자의기초적 책무다. 더 나아가, 대중의 신뢰를 유지하는 것은 그 자체를 하나의 NPI로 볼 수 있다. 이를 다른 조치들의 효과를 높이는 방편으로만 보는 것은 잘못이다. 사회 기능을 저해하되 인명을 살리는개입 조치를 시행하려면 대중의 신뢰가 필요하고, 대중의 신뢰를 얻으려면 모든 정책안의 논리적 근거를 정직하게 알려야 한다. 까다로운 절충이 필요하다는 점도 숨김없이 논하고, 여기에 불확실성이 따른다는 점도 알려야 한다. 이것이 공중보건뿐 아니라 시민의 참여의식을 향상시키는 방법이다. - P149

한 사회가 집단면역을 형성하는 데 필요한 면역자의 비율은 질병의 전염성이 얼마나 높은가에 달려 있다. 질병의 전염성이 낮을수록필요한 면역자의 수는 적어진다. 반대로 RO가 높을수록 유행 확산을 막는 데 필요한 면역자의 비율은 높아진다. 그래서 전염성이 최고 수준인 홍역의 경우, 확산을 막으려면 예방접종률이 무척 높아야한다. 한 지역에 예방접종을 받지 않은 사람의 비율이 6%만 되어도홍역은 확산될 수 있다. 이는 최근에도 많은 인구가 예방접종을 거부한 지역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례다. 다시 말해 홍역 유행을 막으려면 인구의 94% 이상이 자연적으로든 예방접종을 통해서든 면역이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
반면 RO가 상대적으로 낮은 병원체의 경우, 면역자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아도 된다. 그 필요한 비율을 계산하는 식이‘(Ro-1)/Ro‘다. SARS-2의 Ro를 3.0이라 하면 인구의 67%가 면역이 있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하지만 이 값은 다소 과도하게 추정한 값이다. 병원체의 감염재생산수 Ro는 한 인구집단 내의 모든 사람이 타인과 교류할 확률이 같다는 가정에서 계산된 값인데, 실제 세상은 그렇지않기 때문이다. 2장에서 봤듯이, 사회적 인맥 및 교류가 적은 사람도 있고 많은 사람도 있다. ‘인기인‘들이 자연적으로든 예방접종을 통해서든 면역이 되고 나면, 앞의 계산값보다 적은 면역자 수로도 집단면역에 도달하게 된다. - P152

SARS-2처럼 무증상 전파가 일어나는 병원체의 경우는 국경 봉쇄가 더욱 어렵다. 그런 병원체의 은밀한 특성을 생각해보면, 이치에도 맞아 보이고 널리 사용되는 국경 봉쇄라는 방책이 대체로 별효과가 없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한 예로, 2009년 3월 멕시코에서 처음 발생한 H1N1 범유행 때 중국에서 입국자에 대해 발열 검사와 의무 격리를 시행한 효과를 분석한 연구가 있다. 그에 따르면, 국경 통제는 유행 확산 시점을 기껏해야 4일도 안 되는 기간만큼 늦춘 것으로 나타났다. 더군다나 정책 결정자들이 국경 봉쇄를 생각할 무렵이면, 아니 전염병 유행을 인지할 무렵이면, 바이러스는 이미 그 나라 땅에 들어와 있는 게 보통이다. 그리고 일단 지역사회 전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외부 유입을 더 막는 것이 큰 효과가 없다. 그 후로는 외부유입 감염자가 기존 감염자에 비해 극히 적은 비율인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한 연구에서 범유행 시작 30일째에 항공기 운항을 전면 취소하는 경우(엄청나게 빠른 대응인 셈이다) 일어날 결과를 형식적 모형으로 예측해보니, 설령 전체 항공편의 99.9%를 취소한다고 해도 전파력이 중간 정도인 (Ro=1.7) 전염병의 발병 정점을 겨우 42일 늦추는 것으로 나타났다.  - P165

완벽한 검사란 있을 수 없어서, 모든 검사는 양성으로 잘못 판정하거나(거짓 양성) 음성으로 잘못 판정하는(거짓 음성) 결과가 나온다. 인구집단의 해당 속성 보유율 자체가 낮은 경우는 상황이 더 복잡해진다. 예를 들어 어떤 임신 검사가 있는데, 거짓 양성이 나오는 비율이 5%라고 하자. 다시 말해 임신이 아닌데 임신이라고 잘못 판정하는 경우가 5%라는 뜻이다. 만약 임신한 여성 100명의 집단을 검사한다면, 그중엔 어차피 임신하지 않은 사람이 없으므로 이 오류율은 문제가 되지 않아서 100명 모두 임신으로 정확히 판정된다. 하지만 만약 6세 소년 100명의 집단에 똑같은 검사를 적용한다면, 그중엔 임신한 사람이 있을 수가 없으므로 100명 중 5명이 임신으로 잘못판정된다.
이렇게 어떤 검사가 해당 속성이 있는 사람을 양성으로 옳게 판정하는 비율이 어느 정도 되지만 동시에 해당 속성이 없는 사람을 양성으로 잘못 판정하는 비율도 어느 정도 된다면, 그 검사의 정확도는 인구집단의 해당 속성 보유율, 즉 기저율base rate에 따라 달라진다. 기저율이 아주 낮은 경우, 거짓 양성 비율이 조금만 되어도 엄청난 착시효과가 나타나기 쉽다. 예컨대 바이러스 유행 초기에 항체 검사를한다면, 인구집단 내에 실제로 항체를 보유한 사람은 아주 적을 테니 양성 판정 결과 중 다수는 거짓 양성이 된다. 그래서 검사 결과만놓고 보면 바이러스의 확산 현황을 과대평가하게 된다(엄청나게 우수한 검사가 아니라면). - P177

처음에 바이러스는 대중교통 종사자든 유명인이든 가리지 않고골고루 생명을 앗아가는 듯했다. 하지만 얼마 안가 자연히, 경제·사회적 약자의 희생이 두드러졌다. 퀸스 중부 등에 있는 이주 노동자 거주 지역은 특히 타격이 컸다. 서로 인접한 네 지역, 즉 코로나Corona, 엘름허스트, 이스트 엘름허스트, 잭슨하이츠는 ‘진원지 내의 진원지‘로 떠올랐다. 네 지역은 총인구 60만 명 중 4월 8일 기준 확진자가 7260명에 달했다. 이에 비해 총인구가 그 3배인 맨해튼은확진자가 1만 860명이었다. 과거에 역병이 돌 때도 그랬지만, 달아날 수 있는 사람은 달아났다. 3월 한 달 뉴욕시의 휴대전화 데이터를 대규모로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시 전체 인구가 4~5% 감소했는데 부촌 몇 곳의 인구는 50% 이상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122 인구 유출이 시작된 시점은3월 초, 각종 NPI가 공식적으로 시행되기 전이었다. 부촌 주민들은대부분 인근의 뉴욕주 북부나 코네티컷주로 대피했고 애리조나주, 미시간주, 캘리포니아주 남부까지 이동한 이들도 많았다. 1233월 31일, 쿠오모 주지사는 "바이러스 뒤꽁무니 쫓기도 이제 지긋지긋합니다. 지금까진 따라잡느라 바빴습니다. 따라잡기에만 매달려선 이길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그때 뉴욕주확진자는 7만 6946명이었다. 125 4월 6일에는 뉴욕시에서만 확진자가 7만2181명, 사망자가 2475명에 이르러 미국 전체 코로나19 사망자의 25%를 차지했다. 주 전역에 발령된 자택대피령은 4월 29일까지 연장됐다. 마침내 4월 15일을 정점으로, 뉴욕의 발병자 수가감소세에 들어섰다. 3주 전부터 시행한 NPI의 효과가 나타난 것으로, 코로나19의 확산 특성 및 임상적 진행 속도(감염 후 증상 발현까지 최고 2주, 중증으로 발전하기까지 약 1주)와 맞아떨어지는 결과였다.
4월 말 무렵, 곡선이 평탄화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여파는 엄청났다. 뉴욕주 전역에서 시행한 항체 검사 결과, 뉴욕시 거주자의21.2%가 1차 파동에서 코로나19에 감염된 것으로 나타났다.  또 연구 결과, 뉴욕시에서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이 미국 전역에 걸친 코로나바이러스 확산 사태의 시발점을 제공한 것으로 드러났다.  -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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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모든 일 - 점진적으로 강화된 마름에 대한 강조,
미의 기준이 매릴린 먼로에서 케이트 모스로 이동한 것, 이와더불어 식사장애가 부상한 것이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는 사실, 즉 신체 사이즈를 줄이는 것과 자아 자체의 소형화에 대한강조가 여자들이 삶의 다른 영역들에서 성취를 이뤄내기 전까지는 그렇게 열기를 띠지 않았다는 사실은 되새겨볼 가치가 있다. 1970년대 말, 내가 거식중에 휘말리기 시작한 무렵, 여자들에게는 교육과 피임, 낙태의 가능성이 열려 있었고, 삶의 대부분 영역에서 널리 차별에 대한 보호도 받고 있었다. 같은 시기에 의사들은 식욕을 억제하는 암페타민을 한 해에 100억 알씩 처방했고 다이어트 기업 웨이트워처스의 지사가 49개 주에생기고 회원 수가 300만 명에 달했으며 다이어트 식품 업계가식품 산업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부문으로 다른 모든 범주를 가볍게 넘어서려던 시점이었다. 수전 팔루디가 1991년에 출간한 책에서 예리하게 묘사했듯,
이렇게 나란히 전개된 두 가지 상황은 페미니즘의 강한 힘에대한 반격이 미학적으로 표출된 양상이었다. 점점 더 많은 여자들이 세계 내에서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할 권리를 요구하고있던 때에, 남자들이 주도하며 동시에 전통적 권력 구조를 강력히 지지하고 있던 (그리고 여전히 그러한) 문화가 여자들에게 ㅊ반대의 메시지를 날린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여자들이 정신적으로 더 큰 존재가 되자, 육체적으로는 더 작아지라는 말을 듣게 된 것이다. 한때 남자들이 장악했던 영역(각급 학교, 스포츠, 직장, 침실)에서 여자들이 적극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하자, 여성을 어린애로 취급하고 수동적이고 연약하며 위협적이지 않은 존재로 묘사하는 여성성의 이미지들이 그들을 막아섰다. 로절린드 카워드가 여성의 욕망에서 썼듯이 "여성의 몸은 이 사회가 메시지를 쓰는 장소" 이며, 페미니즘에 대한 사회의 반응은 미국의 평균적 모델의 점점 줄어드는 실루엣에 점점 더 명료하게 새겨졌다. 너무 많이 갈망하지 마라, 너에게 주어진 한계선 밖으로 나가지 마라. - P70

 일반적으로 나와 같은 세대의 여자들은 성장하는 동안에 허기를 어떻게 이해해야하는지에 대해 별로 배우지 못했고, 자신의 욕구를 평가하고적절하게 반응하는 방법에 관한 논의도 거의 하지 못했으며, 뷔페처럼 펼쳐진 가능성들과 어떻게 협상해야 하는지에 대한귀한 모범을 본 일도 극히 드물었고, 그 가능성들을 받아들여포용하는 방법에 대한 모범은 더욱더 드물게 보았다. 너무 많이 먹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일반적으로 금기이며, 자신의몸과 체중에 대한 어머니의 염려는 훈계라는 외피에 싸여 딸에게 전해진다. 항상 양이 가장 적은 걸 골라 데이트하러 가기 전에는 그 사람 앞에서 너무 많이 먹지 않도록 항상 미리 식사를 하고 가라. 그거 먹지 마. 금방 네 엉덩이로 갈 테니까. 성적 갈망은 침묵에 부쳐지는 게 그나마 가장 나은 경우이고, 최악의 경우에는위험과 죄악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파멸의 위험을 지닌 가마솥으로 제시된다. 나와 같은 연령대 여자들의 기억 은행에는 험악하게 노려보는 어머니의 이미지, 신랄한 힐난의 메아리(그 옷 벗어! 매춘부 같아 보이잖아!), 약탈적인 남자아이들의욕망에 관한 위협조의 잔소리 조각들이 잔뜩 들어 있다. 그리고 야망의 세계는 여러 면에서 아직 파악되지 않은 미지의 영토였고, 그 세계에서 요구되는 특성과 기술-강한 자아, 경쟁심, 지적 자신감은 여자아이들의 기를 때로 적극적으로 꺾었고(자랑하지 마, 자만하지 마, 너무 똑똑하게 굴지 마) 모범을 보여주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 P76

선택지들이 폭발적으로 열어젖혀진 세계에 이처럼 복잡하게 뒤엉킨 유산이 전해졌으니 모든 예스는 과거의 노와 충돌할소지가 다분했고 여기엔 당연히 엄청난 혼란이 따른다. 욕구의 밑바닥에 깔린 질문들도 어마어마하다. 무엇이면 만족하겠는가? 당신이 필요로 하는 건 도대체 어느 만큼이고, 무엇인가? 진정한 열정은, 아름다움 혹은 날씬함이라는 외적 목표 뒤에 감춰진 진짜 허기는 무엇인가? 비교적 최근까지도 여자들은 이런 질문을 탐색해보라는 권고를 받은 적이 없었거나, 적어도 깊이 있고 일치되는 견해에 따라 사회가 지지하는 방식으로 권고받은 적은 없었다. 우리는 한 세대에 걸쳐 열어젖혀진 문들과 기존 사회구조의 몰락이 자극하고 장려한, 이른바 포스트 페미니즘적 욕구를 품게 되었지만, 이런 욕구를 갖는 일에대해 항상 명백하고 확고한 지지나 허가를 받는 것도 아니고, 전통적으로 욕구에 늘 따라붙던 경각심과 경고가 완전히 제거된 것도 아니며, 욕구를 지지해줄 심층적 권리 의식도 아직 갖지 못했다.
자유는 권력과 같지 않다. 이걸 짚고 넘어가는 게 중요하다. 선택할 자유도 실질적인 경제적 힘과 정치적 힘의 중량이 어떤 식으로든 밑받침해주지 않으면 오히려 안정을 깨뜨리는 느낌, 지속되지 않을 것 같은 느낌, 얄팍하고 힘없는 느낌을 줄수 있다.  - P77

이름 붙이지 못한 허기는 무시무시한 허기가 되고 자기 불신의 근원이 된다. 이는 욕구가 지닌 또 하나의 황금률이다. 우리는 논의하거나 탐색할 수 없는 것은 두려워하게 되고, 금지된 것에는 끌리는 동시에 겁을 먹게 된다.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이해에 대해 은밀함으로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정교한 순화의 형식을 택하는 것으로도 반응했던 것 같다. 욕구를 지하로 몰아가 더 안전한 곳들로, 덜 두려운 경로로 빼돌린 것이다. 가족의 스타일과 다르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고, 가족들이 가치를 두지 않는 것들에 갈망을 느끼는 것은 그들과 나를 더욱 소원하게 만드는 무서운 일이었기에, 나는 인정에 굶주린 수많은 고분고분한 여자아이들이 배우는 것을, 그러니까 남들이 내게 원하는 것을 원하는 방법을 배웠다. 배경 속으로 녹아들기. 잘 살펴보기. 남들이 무얼 기대하는지 판단하고 그에 따라 반응하기.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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