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얼굴에서 나는 보았다. 얼굴이 늘 진실을 말하진 않는다. 안 그런가? 적어도 나에겐 아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하는말을 귀 기울여 듣고, 그들이 쓰는 것을 읽는다. 그것이 우리가 가진 증거이자 우리의 확신을 뒷받침해줄 증거이다. 그러나 말과 표정이 정반대일 때, 우리는 그의 얼굴을 낱낱이 살핀다. 눈빛에 감도는 교활함, 번지는 홍조, 안면근육의 불가항력적 경련. 그러면 우리는 알게 된다. 위선이나 거짓 주장이 밝혀지고, 진실이 우리 앞에 명백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건 달랐다. 더 단순했다. 모순은 전무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알았다. 두 눈, 그 눈에 담긴 빛깔과 표정, 그리고 두 뺨, 병색이 깃든 두 뺨과 그 아래 광대뼈를보고 알았다. 확증은 그의 키에서 얻었다. 그 키에 맞게 자리잡은 골격과 근육이 확실한 증거였다. 그는 에이드리언의 아들이었다. 출생증명서나 DNA 검사 결과 같은 건 필요치 않았다. 나는 보았고, 직감했다. 물론 생일은 딱 맞아떨어졌다. 얼추 그 나이쯤 될 것이다. - P234
하지만 그건 사태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들에게 상처를 주려는 심사에서 나는 이렇게 썼다. ‘사실 마음 한켠으론너희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기길 바라고 있어. 이유인즉 내가 시간이 대대손손 이어지며 복수를 가한다는 걸 굳건히 믿는 인간이라 그래. 그러나 복수의 과녁은 그 조준이 정확해야 하는 법. 너희 둘이 딱 그에 해당된단 말이지.‘ 또 이렇게도 썼다. ‘그러니 너희에게 그런 걸 바랄 수는 없는 노릇. 너희의 양해를구하며 시어를 동원해보자면, 순진무구한 새 생명으로 하여금 자신이 너희의 운우지정으로 인한 결실임을 깨닫는 짐을지운다는 건 불공정한 처사일 테니 말이야.‘ 회한remorse 이란말은 어원적으로 한 번 더 깨무는 행위를 뜻한다. 회한의 감정은 그와 같다. 내가 썼던 말을 다시 읽을 때 나를 깨무는 이가얼마나 그악스러웠을지 상상할 수 있겠는가. 내가 내뱉었는지조차 잊고 있었던 그 말은 가히 고대의 저주처럼 여겨졌다. 물론, 나는 저주 같은 건 믿지 않는다. 그랬었다. 말이 씨가 된다느니 하는 것 말이다. 그런데도 나중에 일어날 일을 명명하는행위 자체 - 콕 집어 나쁜 일이 일어나길 바라자 실제로 똑같이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에는 여전히 몸이 오싹해질 만큼 초자연적인 데가 있다. 저주를 퍼부었던 젊은 시절의 나와 그저주가 실제로 일어나는 것을 목도한 노년의 내가 느끼는 감정은 사뭇 다르다는 사실. 이는 말도 안 될 정도로 서로 무관하다. - P236
인생에 대해 내가 알았던 것은 무엇인가, 신중하기 그지없는 삶을 살았던 내가 이긴 적도, 패배한 적도 없이, 다만 인생이 흘러가는 대로 살지 않았던가. 흔한 야심을 품었지만, 야심의 실체를 깨닫지도 못한 채 그것을 위해 섣불리 정착해버리지 않았던가. 상처받는 게 두려웠으면서도 생존력이라는 말로 둘러대지 않았던가. 고지서 납부를 하고, 가능한 한 모든 사람들과 무난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았을 뿐, 환희와 절망이라는 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소설에서나 구경한 게 전부인 인간으로 살아오지 않았던가 자책을 해도 마음속 깊이 아파한 적은 한 번도 없지 않았던가. 이 모든 일이 따져봐야 할 일이었고 그러는 동안 나는 흔치 않은 회한에 시달렸다. 그것은 상처받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쳤던 인간이 비로소 느끼게된 고통, 그리고 바로 그랬기 때문에 느끼게 된 고통이었다. "나가!" 시속 삼십 킬로미터로 연석 위에 차를 세운 후 베로니카는 일갈했다. 이제야 나는 그 말이 품고 있는 더 폭넓은 울림을 이해했다. 내 인생에서 꺼져버려. 너는 내 인생에서 다시는 상종하고 싶지 않은 첫 번째 인간이야. 네가 만나자고 했을 때 승낙하는 게 아니었어. 점심 약속도 마찬가지고, 널 데리고 내 아들을 보러 간 것은 더더욱. 나가, 나가라고! - P242
"에이드리언 아버님의 친구 분이시라면—" "그리고 어머니의 친구이기도 하고." "그렇다면 이해를 못 하고 계시는 것 같네요." 그래도 그는내가 전혀 감을 못 잡고 있다는 말을 그나마 달리 표현해준 셈이었다. "그런가요?" "메리는 에이드리언의 어머니가 아니에요. 누나예요. 에이드리언의 어머니는 반 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에이드리언은감당을 못 할 정도로 슬퍼했어요. 그래서 그 이후로 지금까지…… 극복을 못하고 있어요." 무심히, 나는 감자칩 하나를 먹었다. 또 하나를 먹었다. 소금간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이래서 통통한 감자칩은 별로다. 감자를 덩이째 씹는 것 같다. 얇게 썬 감자칩은 겉이 더 파삭파삭하면서 소금간도 알맞게 밴다. - P252
거기엔 축적이 있다.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너머에, 혼란이 있다. 거대한 혼란이. -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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