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이스라엘에 와서 재판을 기꺼이 받으려 했다는 것은 예루살렘에서 드러난 사실이라기보다는 증명된 것이었다. 물론 피고 측 변호사는 무엇보다도 피고가 납치되었고 따라서 "국제법에 저촉되는 방식으로 이스라엘로 데려왔다"는 점을 강조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해야 법정이 그를 처벌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점에 대해 도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검사나 재판관들이 그러한 납치가 ‘국가에 의한 행위‘였다는 점을 결코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그 점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국제법의 훼손이 아르헨티나와 이스라엘 두 국가에만 관계될 뿐 피고의 권리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훼손은1960년 8월 3일에 있었던 "양국은 아르헨티나 국가의 기본적 권리를침해한 이스라엘 시민들의 행위로 인해 야기된 사건이 해결된 것으로 간주한다"는 공동선언을 통해 ‘해결‘되었다고 주장했다. 법정은 이들 이스라엘인들이 기관원인지 민간인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결정했다. 피고도 또 법정도 언급하지 않은 점은,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 시민이었더라면 아르헨티나는 자신의 권리를 그렇게 쉽사리 포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는 거기서 가짜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국가의 보호를 받을 권리를 스스로 부인하는 결과를 낳기는 했지만, 적어도 그는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이름(그의 아르헨티나 신분증에는 남 티롤 지방에 있는 볼차노에서 1913년 5월 23일에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었다)으로 거기서 살았다. 비록 그는 자신이 ‘독일 시민권자임을 천명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는 결코 망명자에게 해당하는 의문의 여지가 있는 권리를 주장하지는 않았는데, 만일 그렇게 했더라도 그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아르헨티나가 많이 알려진 나치스 범죄자들에게 망명을 사실상 허용하기는 했지만 인류에 대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정치범이 될 수 없다‘는 국제협약에 조인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일로 인해 아이히만이 무국적상태가 되거나 또는 독일국적을 법적으로 박탈당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서독으로 하여금 해외거주 시민에 대해 제공하는 통상적 보호책에 대해 보류하게 만드는 좋은 구실을 만들어 주었다.  - P333

 다른 말로 하면 수많은 법적 논쟁에도 불구하고, 납치가 빈번히 이루어진 체포의 한 양상이라는 인상을 결국 사람들이 갖게 된 수많은 전례들에 근거하여, 예루살렘 법정이 아이히만에대한 재판을 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니라 아이히만이 사실상 무국적 상태였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이 비록 법률 전문가는 아니지만 이 점을 잘알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오직무국적 상태로서만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몰살당하기 전에 먼저 그들의 국적을 상실해야만 한 것이다. - P334

그가 이스라엘에 와서 제시한 두 번째 이유는 더 극적이었다. "1년 반쯤 전 [즉 1959년 봄]저는 독일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지인으로부터, 어떤 죄책감과 같은 느낌이 독일 청년 일부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죄책감 콤플렉스와 같은 사실이 제게는 말하자면 마치인간을 태운 우주선이 달에 처음으로 도착한 것과 같은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저의 내면생활의 핵심 속의 한 점이 되었고, 그 주위로 많은 생각들이 결정체처럼 얽혔지요. 이것이 바로•••••• 수색대가 제게 접근했다는 것을 알고도•••••• 제가 도망가지 않은 이유입니다. 제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독일의 젊은이들 사이에 있는 죄책감에 대한이 대화를 한 후에 저는 잠적할 권리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이것도 또한 제가 이 심문이 시작될 때 서면 진술서에서•••••• 제자신을 공개처형하라고 제안한 이유입니다. 저는 독일의 청년들로부터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제가 뭔가를 하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이 젊은이들은 무엇보다도 지난 전쟁에서 있었던 사건들에 대해, 그리고 자기의 아버지들이 한 일들에 대해 결백하기 때문이죠." ‘지난 전쟁‘을 그는다른 맥락에서는 ‘독일제국에 강요된 전쟁‘이라고 여전히 부르고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공허한 말에 불과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왜 그는 자기 자신을 버리고 독일로 자발적으로 돌아가지 않았는가? 이 질문을 그가 받았을 때 그는 자신의 생각에 독일 법정이 자기와 같은 사람들을 다룰 때 필요한 ‘객관성‘을 아직도 상실한 채 있다고 대답했다.  - P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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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 수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길 수 있다고 믿어야소금도 하지만 했다. 왜냐하면 나 혼자 힘으로 이겨내는 방법밖에는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즈음부터 나는 밤늦게 아무도 없는 산길을 천천히 걷기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돌아서서 불빛 속으로 뛰어가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고 어둠 속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었다. 걸으면서나는 어둠을 하나하나 들여다봤다. 어둠은 나를 삼켜버릴 정도로 무서웠다. 하지만 매일 그 아이를 만나는 일은 그보다 더 무서웠다. 어둠을 이겨내지 못하면 그 아이를 이겨낼 수 없을 것이라는 절박감이 나를 그렇게 내몰았다.
가장 견디기 힘든 경우는 어둠 속에서 멀리 불빛이 보일 때다. 그 불빛이 얼마나 정겨운지 당장이라도 뛰어가고 싶어 견딜수가 없었다. 하지만 꾹 참았다. 참아야만 했다. 왜 어둠 속을 걸어야만 하는가? 그런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상하다. 왜 그런 생각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왜 그래야만 하는지도 모르고 어둠 속을 걸어가야만 했던 그중학교 2학년생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리다. - P199

밤이 얼마나 지났는가, 아직 절반도 못 되었네.
뭇별들이 눈부시게 빛을 내누나.
깊은 산 그윽한 골짜기 어둡기만 한데
그대는 어이해 이 고장에 머무는가.
夜如何其夜未央 繁星燦爛生光芒
深山幽邃杳冥冥 嗟君何以留此鄉

김시습은 이 시에서 ‘‘杳冥冥묘명명‘이라고, 그러니까 ‘어둡고 어두울 정도로 어둡다‘며 세 번이나 어둡다는 말을 썼다. 김시습이 맞닥뜨린 어둠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스물한 살 시절 삼각산에서 글을 읽다가 수양대군이 나이 어린 단종에게서 정권을 탈취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흘이나 두문불출한 다음에 통곡하고 책들을 모두 불살랐다더니 그런 참담한 시대를 일컫는 것이었을까? 얼마만큼 어두웠기에 ‘어둡고 어두울 정도로 어둡다‘라고쓸 수 있을까? 그만큼 삶이 어둡고 어두울 정도로 어두웠다는뜻이 아닐까?
지리산으로 도망칠 용기도 없음을 확인하고 풀숲에서 나오는 내게 그 아이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괜찮느냐고 물었다. 까치산에서 내려간 나는 수업을 빼먹은 일로 교무실로 불려갔다. 왜 그랬냐는 선생님의 질문에 나는 모의고사를 망쳐서 그랬는라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재차 물었다. 나는 선생님의 눈을 쳐다보며 똑같이 대답했다. 그 말을 믿었는지, 아니면 전후사정을 짐작한 것이었는지 선생님은 내게 앞으로는 마음대로 수업을 빼먹지 말라고 말했다. 교무실에서 나왔더니 그 아이가 무슨 얘기를 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대로 얘기했다. 그 아이는 잘했다며 안심했다. 까치산에서 내려온 뒤부터 그 아이는 더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나는 웃고 싶을 때 웃을 수 있었고 놀고 싶을 때 놀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는 울지 않았다.
김시습이 맞닥뜨린, 어둡고 어두울 정도로 어두운 밤은 아니었지만 중학교 2학년 시절 나도 어둡고 어두운 어둠을 본 적이 있었다. 그 어둠을 보지 못했더라면 나는 아주 하찮은 조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어둠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면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제 몸으로 어둠을 지나오지 않으면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어둡고 어두울 정도로 가장 깊은 어둠을 겪지 않으면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그건 중학교 2학년생에게는 너무 가혹한 수업이었지만, 또 내 평생 잊히지 않는 수업이기도 했다. - P200

생>이라는 노래가하지만 바다는, 그런 바다는 다시 보지 못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나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처음으로. "바다다"라는 말에 놀라던 그때로 흘러간다. 세월은, 그렇게, 그렇게 부드럽게, 따뜻하게. 일본 시인 기타하라하쿠北의 세월은 가네」라는 시를 읽으면 가끔 아무런 후회도 없이, 아쉬움도 없이 세월을 보내던 그때 그 시절이 떠오른다.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렇게 흘러가던 세월의 속도다. 그시절이 결코 아니다.

세월은 가네. 붉은 증기선의 뱃전이 지나가듯
곡물창고에 번득이는 석양빛,
검은 고양이의 아름다운 귀울림 소리처럼,
세월은 가네. 어느 곁엔가, 부드러운 그늘 드리우며 가네.
세월은 가네. 붉은 증기선의 뱃전이 지나가듯.

다시 한번 그렇게 세월을 보낼 수 있다면, 간절히, 손꼽아 수학여행을 기다릴 수 있다면 "어텐션 플리즈, 바우!"의 세계를 소망할 수 있다면, 깜짝 놀라 바다를 바라볼 수 있다면.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도, 나이가 들고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릴 수만 있다면. - P212

눈에 익은 추사 글씨를 보다가 2층 한쪽에 걸린 난 그림을 보게됐다. 이파리 세 개가 너무나 아름답게 종이를 가르고 있었다.
추사는 그 그림에다 다음과 같은 글을 적어놓았다.

봄빛 짙어 이슬 많고, 땅 풀려 풀 돋다.
산 깊고 해 긴데, 사람 자취 고요하니 향기만 쏜다.
春濃露重 地暖艸生 山深日長 人靜香透

나는 그 그림의 화제, ‘春濃露重춘농로동‘을 몇 번이나 되면서 성북동 고갯길을 걸어 내려왔다. 봄빛이 짙어지면 이슬이 무거워지는구나. 그렇구나. 이슬이 무거워 난초 이파리 지그시 고개를 수그리는구나. 누구도 그걸 막을 사람은 없구나. 삶이란 그런 것이구나. 그래서 어른들은 돌아가시고 아이들은 자라는구나.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까 온 곳을 하염없이 쳐다보는 것이구나. 울어도 좋고, 서러워해도 좋지만, 다시 돌아가겠다고 말해서는 안되는 게 삶이로구나.
추사의 그림을 보지 않았더라면 나도 엉엉 소리내 울었을지도 모른다. 저녁 어스름 무렵이면 뒷골목 식당 알전구 아래 앉아 두 분이서 재미나게, 참 재미나게 말씀하셨지. 서울 아저씨는늘 웃으면서 농담을 하셨지. 봄빛이 짙어지면 이슬이 무거워지니까. 난초 이파리 지그시 고개를 수그리니까. 우리가 왜 살아가는지 이젠 조금 알 것도 같다. 아니,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렇게, 그냥 그 정도로만, 그럼, 다들 잘 지내시기를.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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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의 식구들은 모두 스물넷에서 서른두 살 사이의 사람들이었다. 인생의 정거장 같은 나이. 늘 누군가를 새로 만나고또 떠나보내는 데 익숙해져야만 하는 나이. 옛 가족은 떠났으나 새 가족은 이루지 못한 나이. 그 누구와도 가족처럼 지낼 수있으나 다음 날이면 남남처럼 헤어질 수 있는 나이. 그래서인지 우리는 금방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사이처럼 친해질 수 있었다. - P141

그런 식으로 오후를 보낸 뒤, 도서관 유리문을 열고 나오던 어느 저녁이었다. 5월의 푸른 밤이 교정 위로 드리워졌다. 도시의 붉은 불빛에 검게 기대 선 저녁 산 이마 위로 별빛이 반짝였다. 유리문을 열자마자, 유리문을 열고 조금 걸어 나오자마자, 참으로 푸른 밤이구나는 생각을 하자마자, 내 귓전으로 노랫소리 크게 울려 퍼졌다.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내 텅 빈 방문을 닫은 채로, 아직도 남아 있는 너의 향기, 내 텅 빈 방안에 가득한데 이런 가사로 시작하는 노래였다.
저도 모르게 나는 그 노래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노래는 계속됐다. ‘밤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별들 저마다 아름답지만, 내 맘속에 빛나는 별 하나 오직 너만 있을 뿐이야! 무슨일인지 학교 가운데 있던 금잔디 광장에 많은 학생들이 모여있었다. ‘창틈에 기다리던 새벽이 오면 어제보다 커진 내 방안에 하얗게 밝아온 유리창에 썼다 지운다 널 사랑해‘
광장의 한가운데에는 키가 작은 사내 하나가 통기타를 메고 노래를 부르며 서 있었다. 그게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본 김광석이었다. 그날, 나는 김광석의 그 노래와 완벽하게 소통했다. 그 느낌은 죽어도 잊지 못할 느낌이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그날, 유리문을 열자마자, 유리문을 열고 조금 걸어나오자마자, 참으로 푸른 밤이구나는 생각을 하자마자 내 귓전으로 들려오던 노랫소리 귀에 들리는 듯하다. 예술이란 결국 마음이 통하는게 아니라 몸이 통하는 것이라는 걸 깨닫던 그때의 일들이 어제인 듯 또렷하다. - P144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운다. 김광석은 젊어서 죽고 2003년을 기점으로 나는 김광석이 살아보지 못한 나이를 살게 됐다. 정약용의시 중에 다음과 같은 게 있다.

어느새 가을 멀리 가버렸으나
숲나무엔 가을 뜻 아직 남았네
적막한 바위 틈엔 물기 마르고
맑은시내 어귀에 뗏목 깔렸다
나무꾼은 상수리 밤톨 줍고
스님은 우물에서 무를 씻네
석양빛 아직 아니 사라졌는데
등나무엔 초승달 벌써 올라와
翛然秋遠逝 木林有餘情 斷溜雲根靜 横槎澗口清
野樵收橡果 儈井洗蕪菁 未了斜陽色 藤梢月已生

어느새 청춘은 멀리 가버렸으나 내 마음엔 여전히 그 뜻 남아 있는 듯, 지금도 나는 김광석의 노래를 들으면 몸이 아파온다. 석양빛 아직 아니 사라졌는데 등나무에 벌써 올라선 초승달처럼 그렇게 가버린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청춘은 그런 것이었다.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가는 그 빛도 아직 사라지지 않았는데, 느닷없이 떠나버렸다.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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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들이 유대인이라는 사실. 그리고 이들이 5명 가운데 1명꼴로 살아남은 나라에서 살았다는 사실이 민감하고 또 거북스럽게 된 것은 피고에 대해서가 아니라 배경 증인들에 대해서였다. 하우스너 씨는 ‘비극적 다수의 희생자들을 불러모았는데, 이들은 이처럼 자신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했고, 이들 각각은 법정에서 시간을보낼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확신했다. 판사들은 ‘일반적인 그림을 그리기 위해 이 기회를 이용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인지 또는 적절한 것인지에 대해 검사와 논쟁했고, 실제로도 그랬지만, 일단 증인이 증언대에서자 증언 사이에 끼어들어 짧게 끝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란다우 판사가 말한 것처럼, "증인의 명예와 그가 말하려는 사안 때문이었다."
인간적으로 말해, 이 사람들이 법정에서 어느 누구라도 증언을 못하게할 사람은 누가 있겠는가? 또한 비록 증인들이 말해야 하는 것이 단지 ‘이 재판의 부산물로 간주될 뿐이라 하더라도, 인간적으로 말해 이들이 증언대에서 자신의 피맺힌 한을 쏟아 부을 때 그 세부사항의 정확도에 대해 누가 감히 문제를 제기하겠는가?
이외에도 다른 난제가 있었다. 대부분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이스라엘에서도 재판에 출두한 사람은 유죄가 판명 날 때까지는 무죄로 간주된다. 그러나 아이히만의 경우 이것은 완전히 허구에 불과했다. 그가 예루살렘에 등장하기 전에 유죄임이 어떠한 합당한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유죄임이 확정되지 않았더라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를 감히 납치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 납치하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벤구리온 수상은 1960년 6월 3일 날짜의 서신에서 아르헨티나 대통령에게 왜 이스라엘이 ‘아르헨티나 법에 대한 형식상의 위반‘을 범했는지를 설명하면서 "전 유럽에 걸쳐 거대한 그리고 전례 없는 규모로[우리 동족 600만 명)의 대량학살을 조직적으로 수행한 사람이 바로 아이히만이다"라고 썼다. - P297

세 번째로 고려해야 할 항목은 학살수용소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아이히만의 책임문제였다. 검찰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학살수용소에서 상당한 권위를 누렸다고 한다. 이 문제들에 대한 증인들의 증언을모두 파기한 사실은 판사들의 고도의 독립성과 공정성을 웅변적으로보여주었다. 이에 대한 그들의 주장은 그 상황 전체에 대해 그들이진정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들은 수용소에는 두 범주의 유대인이 있었다는 점에서 시작했다. 하나는 이른바 ‘수송된 유대인‘(Transportjuden)로서 무리를 이루고 있었고 나치스의 눈으로 보기에도 한 차례의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다른 범주는 ‘보호관리대상‘(Schutzhaftjuden)에 속하는 유대인들로 어떤 위반 사항 때문에 독일강제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인데, 이들은 정부가 ‘무고한 사람들을 완전한 공포 하에 두려고 하는 전체주의적 원칙 하에 있었지만, 제국 내부의 강제수용소에서 유대인을 없애려는 목적으로 동부로 이송되는 와중에서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나은 상태에 있었다. (아우슈비츠에대한 훌륭한 증인인 라자 케이건 부인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아우슈비츠의 커다란 패러독스였다. 범죄행위로 체포된 이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았다." 그들은 선택의 대상이 되지 않았고, 대체로 살아남은 것이다.) 아이히만은 보호관리대상과는 무관했다. 그러나그가 전문적으로 처리한 수송된 유대인의 경우, 수용소에서 사역시키기 위해 선택된 특별히 신체가 건강한 사람 25퍼센트를 제외하고는 규정상 죽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판결문에서 제시된 방식에 따르면 그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물론 아이히만은 이 희생자들의상당수가 죽을 운명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을 위한 선별작업은 현장에서 친위대의 결정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리고 이송될 사람의 명단은 통상 자국에서 유대인위원회나 치안경찰에 의해 이루어졌고 결코 아이히만이나 그의 요원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누가 살게 되고 누가 죽게 되는가를 말할 권한이 그에게는 없었다는 것이 진실이었다. 그는 알 수도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아이히만이 "저는 그 문제에 관한 한, 단 한 사람의 유대인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유대인이 아닌 사람도 죽이지 않았어요. •••••• 저는 유대인을 죽이라는 명령도, 유대인이 아닌 사람을 죽이라는 명령도 내린 적이 없었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과연 그 말이 거짓이 아닌가 하는 점이었다. 아무도 죽이지 않은 (특히 이 경우에 있어서는 아마도 살해할 배짱조차도 갖지 못한) 대량학살자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검찰은 개별 살인행위를입증하려고 지속적으로 애를 썼다. - P302

히틀러는 외국 국가를 정복한다는모든 관념을 거부한다는 점과, 그가 요구하는 것은 독일인들의 이주를위한 동부의 ‘빈 공간‘ [volkloser Raum)이라고 지적했다. 그의 연설을들은 사람들(특히, 블롬베르크, 프리츄, 레더)은 그런 빈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따라서 동부에서의 독일 승리는 자동적으로 전체 원주민의 ‘소개‘로 이어질 것이라는 점을 인식해야만 했을 것이다. 동부 유대인에 대한 조치는 반유대주의의 결과일 뿐아니라 포괄적인 인구정책의 일부였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만일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했다면 폴란드인들은 유대인과 동일한 운명(즉 종족학살)을 겪었을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추정이 아니다. 독일의 폴란드인들은 이미 유대인의 별 대신에 특별한 ‘P‘자 표지를 달고 다니도록 이미 강요받았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이미 알듯이 파괴의 과정을 제도화하는 가운데 경찰이 취한 최초의 조치였던 것이다.)9월 회의 이후 이동학살대의 사령관들에게 보내진 속달 편지에는 재판에 제출된 특별한 관심을 끄는 문서들이 있었다. 그것은 단지 점령지역의 유대인 문제‘만을 지칭하고 있으며, 비밀을 지켜야만 할 ‘최종목표‘와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예비적 조치들‘을 구별하고 있었다. 후자에 속하는 그 문서는 철도 가까운 곳에 유대인을 수용하라고 분명히언급하고 있다. 특이한 점은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책‘이라는 구절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최종 목표‘란 아마도 폴란드 유대인의 파멸을 의미했을 것이며, 이것은 그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새로운 내용은 제국에 새로이 합병된 지역에살고 있던 유대인이 폴란드로 이주되어야 했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이것이 실로 독일을 유대인이 없는 지역으로 만드는, 따라서 최종 해결책을 향한 첫 번째 조치였기 때문이다.
아이히만과 관련된 한 이 문서들은 비록 이 단계에서도 아이히만은동부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거의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는 점을 분명히보여준다. 여기서도 역시 그의 역할은 ‘이송‘과 ‘이주‘ 전문가로서의 역할이었다. 동부에서는 ‘유대인 전문가가 필요 없었고, 어떤 특별한 지시들‘도 요구되지 않았으며, 어떠한 특권적 범주도 존재하지 않았다. 유대인위원회 요원들조차도 게토가 마침내 소개되었을 때 예외 없이 처리되었다. 예외는 없었다. 왜냐하면 노예 노동자들에 부여된 운명은 단지 다른 종류의 보다 느린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행정적대량학살에서 그 역할이 아주 본질적이라고 생각되어 ‘유대인 장로회기구가 즉각적으로 설립하게 된 유대인 관료조직은 유대인을 체포하고수용하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은 군대의 배후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야만적 대량학살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였다. 군 사령관들은 민간인들의 대량학살에 저항한 것 같고, 또 하이드리히는 독일 고위 지휘관과 유대인, 폴란드 지식인, 가톨릭 성직자, 그리고 귀족들에 대한 완전한 ‘즉각적인 청소‘의 원칙을 수립하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200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이 청소되어야 하는 작전의 규모 때문이 유대인이 먼저 게토에 수용되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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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 산꼭대기에서 보낸 그 마지막 겨울이 사실은 내게 봄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사람은 당나라 시인 두보였다. 두보는 곡강 이수曲江 二首 그의 첫번째 수를 이렇게 시작했다. 人生七十古來稀‘라는 유명한 구절이 담긴 시다.

한 조각 꽃이 져도 봄빛이 깎이거니
바람 불어 만 조각 흩어지니 시름 어이 견디리
스러지는 꽃잎 내 눈을 스치는 걸 바라보노라면
몸 많이 상하는 게 싫다고 술 머금는 일 마다하랴
一片花飛減却春風飄萬點正愁人
且看欲盡花徑眼 莫厭傷多酒入唇

그해 겨울, 나는 간절히 봄을 기다렸건만 자신이 봄을 지나고 있다는 사실만은 깨닫지 못했다.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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