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의 정체를
알고 있다

오래전, 부모님 이야기를 빨치산의 딸이라는 실록으로쓰고 수배를 당했다. 책을 출판한 사장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적표현물 제작만이었으면 굳이 도망 다니지 않았을것이다. 그 전에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의 약칭)이라는 조직의 기관지 <노동해방문학> 기자로 2년 정도 일했는데, 그 조직이 반국가단체로 몰려 전 조직원에게 수배령이 내렸다. 함께 일하던 친구 대부분이 붙잡혀 7년 이상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 P11

"웜마야!"
다들 앉은걸음으로 문을 향했다. 찬 공기에 몸서리를 치며 목만 길게 빼고 내다본 바깥은 온통 새하얀 눈밭이었다. 발자국 하나 나지 않은 백색의 순수였다.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우르르 마당으로 달려 나갔다. 매화나무에도 감나무에도 눈이 한 뼘씩 쌓여 있었다. 뒤란의 대나무는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땅 끝까지 휘늘어진 채였다. 자연의 장관 앞에서 다들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 전등을 하늘로 비췄다. 빛기둥 안에서 주먹만 한 눈송이들이 수직으로 낙하하고 있었다. 순수에 압도당한 최초이자 마지막 경험이었다. 그날 나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토록 순수하게, 이토록 압도적으로 살고 싶다고.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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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끊임없는 움직임의 연속이다. 태양이 매일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지는 것처럼, 인류는 끊임없이 이주와 정착을 반복하며 생존의 길을 개척했다. 이러한 ‘이동‘은 역사에 깊은 흔적을 남기며 인류의 삶과 문화를 형성해왔다.
‘이주(移住)‘는 생존, 기회, 꿈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움직임이다. 경제적 기회를 찾아 나서고, 더 나은 삶을 위해 모험을 감행하고, 위기와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찾아 떠나는 등 다양한 동기가 있다. 반면 ‘이산(移散)‘은 선택이 아닌 필연에 의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규모 또한 개인을 넘어 공동체 단위 움직임을 유발한다. 전쟁, 재난, 정치적 분쟁으로 집단이나 민족이 대대로 살아온 터전을 떠나 새로운 곳에 뿌리를 내리는 ‘디아스포라(Diaspora)‘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이주와 이산의 주제는 단순히 물리적인 움직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정체성, 소속감, 삶의 방향성, 해소되지 않는 그리움 등이 얽힌 내적인 여정이기도 하다. - P21

호모 사피엔스는 ‘호모 미그란스(Homo Migrans)‘이면서 동시에 ‘호모 하브리두스(Homo Habridus)‘다. 호모 미그란스는 ‘이동(이주)하는 인간‘이라는 뜻이고, 호모 하브리두스는 ‘잡종 인간‘이라는 의미다. 인류는 아프리카대륙에서 탄생했다.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출발해 이동과 정착을 반복하며 여러 대륙으로 이주해 갔다. 최근에는 인류가 오스트레일리아와 유럽에서도 기원했다는 주장을 담은 ‘다지역 기원설‘이 아프리카 기원설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기는하다.
아프리카 기원설이든 다지역 기원설이든 공통된 주장은 인간이지닌 놀라운 두 가지 속성, ‘이동성‘과 ‘혼종성‘이다. - P39

인종 신화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인종이라는 개념은 인류가 인간의 다양성을 탐구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이다. 이러한 개념이 본격화한 것은 근대 유럽 국가가 먼바다와 다른 대륙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15세기 말 이후 신항로 개척 시대부터로 볼 수 있다. 유럽인은 먼 항해 끝에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에서 만난, 자신과 너무도 다르게 생긴 사람들을 ‘타자화‘하고 그들을 자신과 전혀 다른 사람, 다른 인종으로 규정하고 전형적인 이미지를 부여했다. 이렇듯 인종과 인종주의는 유럽인이 신항로 개척을 명목으로 다른 대륙에 진출하고, 탐험하고, 침략하고, 약탈하는 과정에 만들어진 근대의 발명품인 셈이다. - P41

인간을 인종의 잣대로 구분하는 유럽인의 시도는 16세기에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한 분류, 즉인류를 피부색으로 구분하는 최초의 시도는 18세기 스웨덴 생물학자 칼 폰 린네 (Carl von Linné)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린네는 인류에게 ‘호모 사피엔스‘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분류학을 정립한 인물로 유명하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학자들의 순수한 분류가 분류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차이 (difference)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다만 그 차이에 인간이 의도적으로 위계(hierachy)를 부여하는 것이 문제다. 인간이 자연과 사회에 태생적으로 존재하는 차이에 의도적으로 위계를 부여하는 순간 차이가 차별을 낳고, 불공정과 불합리함이 발생하고, 폭력과 학대로 이어질 위험성이 생겨난다. 위계는 우와 열을 정하고 그에 따라 줄 세우기를 하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 서로 다르고 다양합니다. 차이가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로 다르고 제각각 차이가 있기 때문에 다르게 대할 수밖에없고, 다르게 대우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라는 억지 논리이자 궤변으로 귀결될 위험성이 크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식민 지배한 제국주의 시대 유럽인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든 ‘차별이 곧 평등‘이라는 논리가 있다. - P43

16~19세기, 제국주의 횡행으로 전 세계적으로 노예제가 행해졌다. 그때로부터 수백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그와 관련한 피해보상을 한다면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어떻게 해야 할까? 이것을실제 법으로 따지면서 판단을 내리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유의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그 자체로 충분히의미 있는 일이다. 카리브해 여러 국가를 비롯해 과거에 노예제로 심각한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본격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으며, 좀 더 힘 있는 목소리로 식민주의를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 식민주의의 큰 피해자인 한국인은 스스로 완전무결하다고 여기며 가해자인 일본을 향해 반성과 사과, 피해 보상을 요구하기만 하면 될까? 아니,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한국은 고도의 경제 성장을 거치며 우리보다 경제적으로뒤떨어지는 여러 국가에 산업을 이전하는 과정에 과거 유럽 버금가는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한국인이 과연 피해자인가?‘ ‘한국인도 가해자인 것은 아닌가?‘라는 성찰적 질문을 계속해서 해야 한다.
인종차별이 사라지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복합적인 차별과 구조적인 차별이 우리 사회에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이 인종차별적인 행위를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아니라 딱히 가해자가 없는 것 같은데도 여전히 피해자가 존재하는 구조적인 문제라는 이야기다. 어떤 측면에서 인종차별이 구조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성차별, 계급차별과 결합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 P67

 그리고 차별이란 근본적으로 ‘타자화‘의 산물이다. 타자화란 글자 의미 그대로 다른 사람을 자신과 다른 사람으로 규정하고 차별 대우하는 행위다. 말하자면, 나는 고귀하며 존중받아야 할 인간이지만 나에 의해 타자화된 다른 사람은 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 즉 고귀하지도 않고존중받을 가치도 없는 인간이라는 의미다. 다른 사람을 나와 다른인종으로 대하는 것이 타자화의 대표적인 사례다. ‘어떤 사람이 비닐하우스 집에 살아도 된다‘라고 생각하는 이유도 바로 그가 타자화의 대상이 되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타자화는 노예제 시절 백인이 흑인을 ‘말하는 가축‘ 정도로 취급했던 역사와 맥이 닿아 있다. 또한 나치가 유대인을 죄책감 없이학살하기 위해 그들을 ‘비인간화‘하는 과정이 단계적으로 치밀하게 진행된 것도 타자화와 관련이 깊다.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구분 짓는 타자화는 차별을 유발하는심리 기제로 작용할 위험성이 높다. 여기서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가르는 타자화는 ‘단순화‘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고 싶다. 인간은 원래 복잡한 존재다. 자기 자신을 생각할 때도 ‘나라는 인간의 내면이 얼마나 복잡한가‘를 생각하게 되는데, 다른 사람에 대해 ‘이 사람은 이런 유형이다. 저 사람은 저런 유형이다‘라고어떻게 쉽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을 그토록 쉽게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며 허구다. 이것이 바로 ‘단순화‘의 전형적인 사례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형화된 분류에서 한 발 물러나 상대방을 자신과 마찬가지로 존중받아 마땅한 고귀한 존재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려고 노력해야 한다. 나이지리아작가 치누아 아체베(Chinua Achebe)는 "모든 스테레오 타입은 단순화에서 출발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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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윌슨(Edward Wilson)이 쓴 『통섭』이라는 책을 알게 되었죠. 윌슨은 앞으로 인문사회과학이 사회생물학의 하위분야가 될 거라고 하더라고요. 이게 무슨 소리야. 하면서도 사실은 되게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인문학도들은 인간의 본성과 삶의 의미를 알고 싶어서 온갖고전을 읽습니다. 지금도 지식인들이 청소년들한테 그런 책을 권하고 있죠.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공자, 맹자, 노자, 장자, 칸트, 프로이트, 맑스, 니체, 뭐 그런 ‘위대한 철학자‘들이쓴 책 말입니다. 물론 이런 분들이 나름대로 인간과 삶의 본질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여러 해답을 들려줍니다. 그런데 명백한 한계가 있어요. 그 모든 대답이 관찰과 사색에서 나왔다는 것이죠. 그들은 인간이 ‘물질적으로‘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관찰로 얻은 빈약한 정보를 토대로 인간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가설을 세웠다는 말입니다. - P91

기술이 발전해도 공부의 본질과 목적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방법은 크게 바뀝니다.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이 쓴 『공감의 시대』라는 책이 있습니다. 좀 어렵긴 한데, 그래도 읽을 만합니다. 21세기는 공감의 시대입니다. 남을 밟고 올라서는 능력은 경쟁력이 아닙니다. 남을 이해하고 남에게 공감하고 남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능력이 경쟁력입니다. 좋은 의미의 경쟁력이죠. 저는 과학혁명의 시대에는 더욱더 확실하게 공부의 본질을 붙들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인간만 할 수 있다고오랫동안 믿었던 지적 노동 가운데 많은 것을 인공지능이 대신하게 되겠지만, 공감하고 공감을 끌어내는 것은 그렇지 않기때문입니다. - P118

우리는 모든 것을 더욱
인간답게 만들어야 합니다.

과학혁명의 시대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독서도 글쓰기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포함한 공부도 스스로 인생을 설계하고 그 인생을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할것입니다. 수학 점수, 영어 점수를 따는 공부가 아니라 자신을 알고 남을 이해하고 서로 공감하면서 공존하는 인간이 되는 데 도움이 되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죠.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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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자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는 이유는 바로 디테일에있습니다. 예컨대 거대한 석상 문화로 유명한 이스터 섬의 문명이 몰락한 원인을 분석하면서 그는 무자비한 삼림 파괴에서 시작되어 그로 인한 전쟁, 지배계급의 전복, 인구 감소로 이어지는인과의 궤적을 정교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환경파괴야말로 문명 붕괴 요인들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유일하게공통적인 부분이라고 역설합니다. 즉 문명 붕괴 뒤에는 늘 환경과 생태의 중요성에 대한 무지와 무시가 있었다는 주장이죠.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문명의 붕괴가 과거의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저자는 환경 파괴와 기아로 허덕이는 소말리아나 르완다, 모든 종류의 환경 훼손이 총체적으로 드러나는 중국, 심지어 오랫동안 자원 ‘채굴‘에 혈안이 됐던 오스트레일리아의 ‘현재‘가 붕괴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경고하고있습니다. - P313

우리는 ‘이유‘를 찾는 동물입니다. 무언가가 우연히 일어났다는 설명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하죠. 불확실한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해 ‘인과 스토리(어째서 그런 일이 생겼는지에 대한 설명)‘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진화과정에서 유리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유를 찾는 능력이 발달한 것이지요. 저자는 이것을 ‘믿음 엔진‘이라 부르며, 이 엔진의 과열과 오작동으로 인해 그런 이상한 믿음들이 생겨난다고 말합니다. 가령 극히 일부의 암환자만이 민간요법의 효과를 보는데도 그 효력을 신봉한다든지, 출퇴근 방향이 비슷해 마주칠 개연성이 높았을 뿐인데도 그 만남을 운명으로 착각한다든지, 본인의 부주의로 생긴 교통사고를 신의 깊은 뜻에 의한 사건으로돌린다든지, 장로 또는 불자가 대통령이 되어야 나라가 잘된다고 믿는 것 등이 그런 이상한 믿음의 예일 것입니다.
평소에 멀쩡한 사람들도 입시, 취직, 결혼, 건강, 자녀 등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 엄습해오는 불안감으로 인해 믿음 엔진을폭발 직전까지 과열시킬 때가 있습니다. 이 폭발을 막으려면 순정품 냉각수가 필요합니다. 저자는 믿음의 근거를 돌아보게 하고 합리적 생각을 북돋아주는 회의주의 정신이야말로 그런 냉각수라고 말합니다.  - P336

지난 40여 년 동안 대형 참사의 메커니즘을 사회학적으로 연구해온 예일 대학교 명예교수 찰스 페로Charles Perrow(1960-)는<무엇이 재앙을 만드는가?》에서 불가피한 대형 사고를 유발하는 시스템의 복잡성과 상호연계성을 분석했습니다. 저자는 스리마일 섬 원자력발전소 사고를 비롯하여 몇몇 석유화학 공장폭발 사고, 항공기 사고, 해상 사고, 광산 폭발 사고, 우주탐사사고의 실제 사례들을 치밀하게 분석하면서, 복잡하고 강하게상호 연결된 시스템이 수많은 안전장치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붕괴될 수밖에 없다는 오싹한 진실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논지는 이렇습니다. 원전이나 우주탐사와 같이 수많은 요소들, 즉 부품, 절차, 운용자 등으로 구성된 복잡한 시스템에서 두 가지 이상의 장애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상호작용을 일으키면 시스템의 속성상 대형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붕괴로 이어지는 시스템의 속성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저자는 두 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상호작용적복잡성이고, 다른 하나는 긴밀한 연계성입니다. 전자는 선형적복잡성 또는 순차적 복잡성과 다릅니다. 아무리 복잡한 생산 라인이라도 한 지점에서 문제가 생기면 경보가 울리고 그 라인이 정지될 것이며, 감독자는 점검을 한 후에 다시 시작을 하면 그만입니다. 이것은 순차적인 복잡성입니다. 하지만 하나의 잘못이 다른 오작동과 상호작용하여 걷잡을 수 없이 큰 사고로 이어지는 경우들이 있는데요. 가령 드라이어가 과열되어 불이 났는데 집안의 화재경보장치가 작동하지 않아 외출한 사이에 집이 몽땅 타버린 경우가 있을 수 있지요. - P377

이렇게 책읽기를 ‘저자와의 대담‘이라고 여기는 순간, 독서는지겨운 안구 운동에서 흥미진진한 대뇌 운동으로 진화합니다. 상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코스모스>의 첫 장을 펼치는 순간세이건이 대담자로 초대된다는 사실을요. 제가 여기서 ‘대화‘보다는 ‘대담‘이라는 단어를 택한 이유도 있습니다. 대화는 대담에 비해 더 사적이고 주관적인 느낌이 있는데, 저는 고수의 책읽기는 좀 더 객관적이고 성찰적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즉, 저자와 적절한 거리두기가 필요하지요. 이를 위해서는 대화가 아닌 대담이 필요합니다. 책을 읽고 느낌과 감상만을 이야기하는사적 수준을 넘어서서, 새롭게 배운 것이 무엇이며 동의할 수없는(있는) 부분은 어떤 것들인지를 성찰하고 평가할 수 있는 단계로까지 나아가야, 책읽기가 더 흥미진진한 지적 게임이 됩니다. 좀 거창하게 말했지만 이것이 바로 제가 이 서평집에서 ‘대담으로서의 독서‘를 들고 나온 이유입니다. - P399

‘자신의 용어와 문장‘으로 저자의핵심 논지와 적절한 사례들을 요약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후에 생각할 거리들 그것들이 어떤 쟁점들을 던져주며 어떤-함의들을 이끌어내는지까지 발굴해서 덧붙이면 금상첨화겠지요. 저는 이것이 바로 ‘토크로서의 독서‘이며 적극적 독서의궁극적 지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읽기의 끝은 지식의 비판적 ‘전수‘가 아닐까요?
많은 영장류 학자들이 침팬지는 ‘공동 주의집중joint attention 과 ‘문화 전수 cultural transmission‘ 능력을 진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인간과 같은 문명을 이룩하지 못했다고 주장합니다. ‘공동 주의집중‘이란 제3의 대상을 가리킴으로써 관심을 공유하는 행위를말합니다. 가령 제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여러분은 달을 함께 바라보겠지만 침팬지는 제 손가락 끝만 쳐다봅니다. ‘문화전수‘란 남들로부터 배움으로써 또 다른 이들에게 전달해주는행위를 말합니다. 예컨대 침팬지는 우리처럼 패러디물을 만들어가면서까지 <강남스타일>의 말춤을 동료 침팬지에게 전수해줄 수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누군가가 소개해주는 책들에 함께 관심을 기울이고(공동 주의집중), 그 책의 내용들을 자신의 언어로 타인에게도 이야기해주는 것(문화 전수)은 지구상에서 오직우리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독특한 행위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번 서평집의 과학적 존재론입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2014년 3월 보스턴에서
장대익 드림 - P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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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한 자학을 하려고 이 이야기를 꺼낸 건 아닙니다. 글을쓸 때 개별적 경험을 일반화하는 게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싶어서 꺼낸 겁니다. 신영복 선생은 왜 ‘떡신자‘와 ‘창신꼬마‘의 일화를 소개한 걸까요? 그분은 자기 변화는 인간관계의 변화를 통해 완성된다고 보았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방식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자기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가 바뀌어야 개인의 변화도 완성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맺고 있는 인간관계의 변화가 그 사람의 변화의 질과 높이의 상한이라는 겁니다. 같은 키의 벼 포기나 어깨동무하고 있는 잔디가 그런 것처럼 말이지요. 신영복 선생은 재소자들과 맺고 있었던 인간관계의 변화를 도모하기 위해 신뢰를쌓아야 했고, 신뢰를 쌓기 위해 ‘쪽팔림‘을 감수하면서 교도소문화의 상징 가운데 하나인 ‘떡신자‘를 자처한 것입니다.
신영복 선생의 글에는 이런 게 많습니다. ‘떡신자‘와 ‘창신꼬마‘라는 개별적 경험을 통로로 삼아 스스로를 변화시키려면 최종적으로 인간관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보편적 결론으로나아가는 서술방식 말입니다. 저는 이것이 독자의 공감을 얻는 데 매우 효과적인 글쓰기 전략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개인의변화와 인간관계의 변화 사이의 관계에 대한 신영복 선생의 견해는 받아들일 수도 있고 배척할 수도 있습니다. 배척해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개별적 경험을 보편화하는 글쓰기의 방법만큼은 누구나 배워도 좋을 것이라 믿습니다. - P42

그러나 어쨌든, 어린 시절 저는 「제인 에어』에서 인간적·사회적 공분(公憤)을 느꼈습니다. 나이를 먹은 지금도 다르지않은 감정을 느낍니다. 사회악의 구조적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샬럿 브론테를 비판하거나 소설 『제인 에어를 혹평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돈과 권력을 가졌으나 인간으로서는 비천한 자들이 고귀한 인간적 감정을 지니고 자기 힘으로 힘껏 살아가는 사람들을 공공연하게 경멸하고 모욕하는세태에 대한 공분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을 읽는 데 들어가는 시간은 전혀 아깝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진화생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공분을 느끼는 능력은 문명이 아니라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이라고 하더군요. 사회적 공분을 느끼는 능력이 호모 사피엔스의 본성에 속한다니 반갑지 않습니까? 역시 공부는 좋은 겁니다. - P47

카이스트에서 가르치는 정재승 교수나 김대식 교수 말씀으로는, 뇌가 충분히 성장하기 전에는 가치판단을 내포한 지식과 정보를 가르치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고 하더군요. 어릴 때는 도덕이 아니라 수학이나 물리학을 가르쳐야 한다는 겁니다. 옳은 견해인지는 모르겠으나 역사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뇌가 덜 자란 상태에서 초기에 입력된 정보들은 나중에까지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잘 바뀌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독재자는 유아 교육을 장악합니다. 나치도 그랬고 스딸린도 그랬으며 김일성과 박정희도 그랬습니다. 북한이 저렇게 못살고, 인민들이 굶어죽고, 독재가 극심한데도 반세기넘게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유아 교육을 확실하게 장악한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유치원 때부터 ‘위대한 어버이수령님의 은혜‘를 가르치면 어른이 된 후에도 죽은 수령의 사진만 보면 저절로 눈물을 흘리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 뇌가 지닌 결함을 철저하게 이용하는 것이죠. - P48

거듭 말합니다. 공부는 인간으로서 의미 있게 살아가려고하는 겁니다. 학위를 따려고, 시험에 합격하려고, 취직을 하려고 공부를 할 때도 있지만 공부의 근본은 인생의 의미를 만들고 찾는 데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책을 읽고 공부를 할 때, 내가 삶을 살아가는 태도를 결정하는 데 참고할 수 있는 것들을 찾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많이 인쇄된 책이 기독교성경이라는데,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누구나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거기에서 찾을 수 있거든요. - P60

인지혁명의 핵심은 언어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생각이나감정이 먼저고 언어는 그것을 표현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언어는 단순한 수단이 아닙니다.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는 데 필요한 조건이기도 합니다. 언어가 없으면 생각 자체를 할 수가 없어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스스로 인지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감정을 느끼는 데도 언어가 필요합니다. 분노, 사랑, 연민, 복수심, 어떤 것이든 마음속에 어떤 감정이 일어날 때 그게 뭔지 인식하려면 그 감정을 나타내는 말을 알아야 하니까요.
자기의 생각과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먼저 그 생각과 감정을 나타내는 어휘를 알아야 합니다. 글을 잘 쓰고 싶어서 문장 공부를 열심히 해도 아는 어휘가 적으면 글이 늘지 않습니다. 사용할 수 있는 어휘의 양을 늘리는 것이 글쓰기의 기본이에요. 아무리 멋진 조감도와 설계도가 있어도 건축자재가 없으면 집을 지을 수 없는 것처럼, 어휘가 부족하면 생각과 감정을 글로 쓸 수 없어요. 그래서 글을 잘 쓰고 싶다면 먼저 어휘를 늘리라고 권하는 겁니다.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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