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1755)에서 천하의 무자비한 폭군도 극장에서는 타인의 불행을보며 눈물을 흘릴 수 있다고 말하면서 인간의 태생적 동정심을 긍정했다. 그런데 한 저자는 저 대목을 거꾸로 읽는다. 극장에서는 태연한 눈물을 흘리는 인간도 자신이 직접 행하는 악덕에는무감각해질 수 있다는 뜻으로 말이다. "우리가 스스로 야기한 상처에 대해서는 아무런 동정심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야기하지 않은 고통 앞에서는 울 수 있어도 자신이 야기한 상처 앞에서는 목석같이 굴 것이다." (사이먼 메이, 《사랑의 탄생》, 문학동네, 2016, 292쪽) 이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자신이 원인을 제공한 슬픔에 더 깊이 공감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그 반대로 행동한다. 이 경우 타인의 슬픔은 내가 어떤도덕적 자기만족을 느끼며 공감을 시도할 만한 그런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추궁하고 심문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 슬픔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나를 불편하게 할것이다. - P25

아이스킬로스의 소위 ‘고통을 통한 배움 (pathei mathos)‘(<아가멤논>, 177행)이란 고통 뒤에는 깨달음이 있다는 뜻이지만 고통없이는 무엇도 진정으로 배울 수 없다는 뜻도 된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같은 경험과 같은 고통만이 같은 슬픔에 이를 수 있다는 것 말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비참한 소식이다. 그런데 더 비참한 소식은 우리가 그런 교육을 통해서도 끝내 배움에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 교육이 하나의 생명으로서의 내 존립을 위협하기라도 한다면 말이다. 아가멤논과 스티븐과 우리 사이에는 단 하나의 결정적인 공통점이 있어 다른 많은 차이점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자신을 유지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하나의 생명체라는 것. 이것은 거부할 수도 박살낼 수도 없는 인간의 조건이다. <킬링 디어>가 엄밀한 의미에서 ‘비극‘인 것은 이 인간 조건의 비극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특정한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바로 결함이라는 것. 그러므로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다. - P27

 <킬링 디어>의 첫 장면을 가득 채우는 것은 뛰고 있는 심장이다. 이 장면은 말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심장이다. 심장은 언제나 제 주인만을 위해 뛰고, 계속 뛰기 위해서만 띈다. 타인의 몸속에서 뛸 수 없고 타인의 슬픔 때문에 멈추지도 않는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라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한계다. 그러나 이 한계를 인정하되 긍정하지는 못하겠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슬퍼할 줄 아는 생명이기도 하니까. 한계를 슬퍼하면서 그 슬픔의 힘으로, 타인의 슬픔을 향해 가려고 노력하니까. 그럴 때 인간은 심장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슬픔을 공부하는 심장이다. 아마도 나는 네가 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시도해도 실패할 그 일을 계속 시도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나. 이기적이기도싫고 그렇다고 위선적이기도 싫지만, 자주 둘 다가 되고 마는 심장의 비참. 이 비참에 진저리치면서 나는 오늘도 당신의 슬픔을 공부한다. 그래서 슬픔에 대한 공부는, 슬픈 공부다. - P28

이에 대한 내 대답은 조심스러웠고 변변치 않았다. 반박할 논리가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논리를 갖다 댈 영역이 아니라는 느낌 때문이었다. 이 세상의 슬픔 중에서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것은 많지 않겠으나, 그런 논리들이 그 슬픔에 ‘위로‘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프로이트가 소개한 또 다른 유명한 꿈을 떠올렸다. 병든 아이의 침상 곁에서 며칠을 지새운 아버지는 아이가 죽자 촛불로 둘러싸인 시신을 잠시 놓아두고 옆방에서 잠이 든다. 그런데 꿈에 죽은 아이가 나타나 아버지에게 말한다.
"아빠, 내가 불에 타는 것이 안 보여요?" 깨어나 옆방으로 달려가보니 촛불이 넘어져 아이의 수의(衣)가 타고 있더라는 것.
물론 옆방의 빛과 열기가 잠든 아버지에게도 전달되어 꾸어진 꿈이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어떻게 그 위급한 상황에서 신속히 깨어나지 않고 꿈을 꾸고 있을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프로이트의 답은 이렇다. ‘아버지는 꿈에서 다시 만난 아이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있고 싶었다.‘ 그러니 이 꿈 역시 소원 성취인 것이다. 이 꿈을 말할 때 내 목소리는 조금 떨렸는데 학생들은 몰랐을 것이다. ‘아빠, 내가 물에 잠기는 것이 안 보이세요?"라고 말하는 아이를 오늘도 꿈에서 만나고 있을 많은 분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 꿈은 고통일 테지만, 그 꿈에서 깨어나는 일은 그보다 더한 고통일 것이다. 2년 내내 그러했으리라.
(2016.4.7) - P35

최근 어느 글에 이런 문장을 쓴 적이 있다. "문학이 위로가 아니라 고문이라는 말도 옳은 말이지만 그럼에도 가끔은 문학이 위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고통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의 말이기 때문이고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그런 사람의 말만이 진실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이 말에 보충설명이 필요해 보여서뒤늦게 덧붙이려고 한다. 문학의 기능들 중에 위로라는 것도 있다는 데에는 동의하더라도, 그것이 가장 중요한 기능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을 분들이 많을 것이다. 문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분들일수록 더욱 그렇지 않을까. 인간과 세계에대한 깊이 있는 ‘인식‘을 전달하는 것이 문학의 더 본질적인 기능이며, 공감이니 감동이니 위로니 하는 ‘감정‘의 작용들은 부수적이거나 보조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취지로 말이다. - P37

인식의 영역과 감정의 영역이 별개라는 전제하에서만 그렇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그 둘이 서로 뒤섞여 있는 것이라면? 감정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일도 인식의 영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라면? 결론을 당겨 말하자면 이렇다. 어떤 책이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으려면 그 작품이 그 누군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것. 위로는 단지 뜨거운 인간애와 따뜻한 제스처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나를 위로할 수는 없다. 더 과감히 말하면, 위로받는다는 것은 이해받는다는 것이고, 이해란 곧 정확한 인식과 다른 것이 아니므로, 위로란 곧 인식이며 인식이 곧 위로다. 정확히 인식한 책만 정확히 위로할 수 있다. - P38

슬픔에 대한 어설픈 통찰을 늘어놓으면서 빨리 거기서 빠져나오라고 훈계하는 대목은 어디에도 없으므로 어디를 인용해도 상관없지만 내키는 대로 ‘휴식‘이라는 제목의 챕터를 펼친다. "순수한 휴식은 슬픔의 고통을 치료해주는 가장 효과적인 치료제다. 그러나 슬퍼하는 사람이 참 하기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도 휴식이다."(161쪽) 휴식이 왜 어려운가. 저자들은 "슬픔이 원기를 고갈시키는 것처럼, 좋은 감정 역시 에너지를 무척이나 소진시킨다는 점" (165쪽)을 지적한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와서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그것은 고마운 일이므로 나는 좋은 감정으로 응대한다. 그러나 그 응대는 그 자체로 나의 감정적 자원을 크게 소모시키는 일이다. 그런 일들이 피곤하다고 느껴지면 고마워할줄 모르는 나 자신에게 마음이 불편해져서 그것이 또 나를 갉아먹는다.
이런 대목만 보아도 이 저자들이 슬픔에 빠진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구나 하는 신뢰를 가질 수 있다. 저자들은 이렇게 말을 잇는다. 슬픔에 빠져 있지만 말고 외출도 하고 사람도 만나라고 말하는 이들의 헛소리에 신경 쓰지 말라고 당신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그저 아무 일도 안 하고 쉬는 것일 뿐이라고, 집안일도 남에게 맡겨버리고 필요하면 수면제도 먹으라고 수면제 대신 캐머마일 차를 드셔보시라고 말하는 친척의 말은 샌드위치 그만 먹고 도장이나 핥으라는 말과 같으니 과감히 무시하라고 함께 기도해주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이렇게 말하라고 "기도는 제가 직접 할 테니 설거지나 좀 해주시겠어요?" (168쪽) 이쯤 되면, 정확히 알지 못하면 제대로 위로할 수 없다는 말이 무엇인지 실감할 수 있지 않은가. 문학에서도 그렇고 인생에서도 그렇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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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요, 몰라요. 전혀 몰라요." 그들도 고향에 어머니가 있기에 그녀의 고통과 염려를 이해하면서 소소한 일들을 살펴 주었다. 그녀도 그들을 네 명의 적군을 매우 좋아했다. 농부들은 애국심에서 나온 증오 같은 것은 별로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것은 지배계급의 전유물이다. 비천한 사람들은 가난한 데다 온갖 새로운 의무들에 짓눌리기 때문에 가장 큰 희생을 당하며, 수가 많기 때문에 대포에 몸을 내놓고 떼죽음을 당한다. 또한 가장 약하고 잘 저항하지 않기 때문에 잔인한 전쟁의 비극을 가장 처참하게 겪어야 한다. 그들은 호전적인 열정이나 명예와 관련된 흥분하기 쉬운 일들 혹은패전국과 똑같이 승전국도 여섯 달이면 지쳐 버리는, 소위 정치적 책략같은 것을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 P515

내 친구 세르발이 덧붙였다.
"그 보복으로 독일인들이 마을에 있는 내 성관을 파괴한 거야"
나는 그 초가집 안에서 타 죽은 네 명의 온순했던 젊은이의 어머니들을 생각했고, 그 벽에 몸을 기댄 채 총살당한 또 다른 어머니의 처참한영웅적 행위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불 때문에 그때까지도 거무스름한 작은 돌 하나를 땅에서 주워 들었다. - P521

행복 
Le Bonheur

램프에 불을 밝히기 전 차 마시는 시간이었다. 별장은 바다를 굽어보고 있었다. 지는 해가 하늘을 온통 장밋빛으로 물들이고 금가루를 뿌린듯 환히 빛나게 했다. 지중해는 잔물결 없이, 가벼운 흔들림도 없이, 사위어 가는 햇빛 아래에서 잔잔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윤기 나는 드넓은 금속판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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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신사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한 여자가 말했다.
그 여자는 지나치게 손쉬운 이상과 지나치게 원초적인 필요를, 그리고 지나치게 소박한 요구들을 갖고 있었네요. 어리석은 여자일 뿐이에요"
그러자 또 다른 여자가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아무러면 어때요! 어쨌든 그 여자는 행복했잖아요."
그때 저쪽에서, 수평선 깊숙한 곳에서 코르시카 섬이 어둠 속으로 다시 가라앉으며 천천히 모습을 감추었다. 자신의 기슭으로 피신한 보잘것없는 연인의 이야기를 하려는 듯, 바다에 드리웠던 커다란 그림자를 서서히 지웠다. - P522

아직 혼돈 속에 싸여 있는 그 섬을 상상해 보시오. 격류가 흐르는 좁다란 협곡들이 산봉우리에 내리치는 폭풍우를 갈라놓소. 그 섬에는 평원이 없다오, 물결치는 거대한 화강암과 잡목림이 있고, 구불거리며 굽이치는 땅 위에 밤나무나 소나무로 이루어진 숲만 펼쳐져 있다오. 때때로 산꼭대기에 바윗덩어리를 닮은 마을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곳은 처녀지, 불모의 땅, 황량한 땅이라오, 문화도 산업도, 예술도 없소. 문양이 조각된 나뭇조각 하나, 돌멩이 하나 만나지 못한다오. 우아하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조상들의 유치하거나 세련된 기념물 하나 만나지 못한다오. 그것은 그 당당하고 혹독한 고장이 지닌 가장 충격적인 측면이기도하오. 어떻게 생각하면 그것은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매혹적인 것들을 찾기 이전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초연함인지도 모르겠소. - P524

술통
Le Petit Füt

아돌프 타베르니에에게
에프르빌의 여인숙 주인 시코 씨가 마글루아르 할머니의 농장 앞에 이륜 경마차를 세웠다. 시코 씨는 키가 크고 머리카락이 붉고 배가 나온 마흔 살의 원기 왕성한 남자였고, 상당히 영리한 사람으로 통했다.
그는 울타리의 말뚝에 말을 붙들어 맸다. 그런 다음 뜰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마글루아르 할머니의 농장 옆에 토지를 갖고 있었고, 오래전부터 할머니의 농장을 탐내었다. 그래서 여러 번 그 농장을 팔라고 제안했지만 마글루아르 할머니는 고집스럽게 거절했다.
"나는 여기서 태어났고, 여기서 죽을 거라우." 할머니는 말했다. - P532

29호 침대 
Lelit 29 

도에피방 대위가 길을 지나가면 여자들이 모두 돌아보았다. 그는 참으로 잘생긴 경기병 장교였다. 그는 늘 자기 넓적다리, 허리, 콧수염에 신경을 썼고,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뽐내며 걸어 다녔고, 쉬지 않고 으스댔다. 그의 콧수염, 허리, 넓적다리는 근사했다. 콧수염은 금빛이고 매우 견고했으며, 잘 익은 밀 빛깔의 아름다운 똬리를 이루며 섬세하고 세밀하게 말려 입술 위로 과감하게 흘러내렸다. 그런 다음 입 양쪽에서 무척이나 위풍당당한 두 개의 털 줄기를 이루며 뻗어 내려갔다. 허리는 코르셋을 입은 것처럼 날씬했고, 그 위에는 활처럼 부풀어 오르고 흰 남자답고 건장한 가슴이 있었다. 넓적다리 역시 경탄할 만했다. 착 달라붙는 빨간나사 바지 밑에서 모든 움직임이 마치 그림처럼 모습을 드러내는 체조선수나 무용수 같은 근육질의 넓적다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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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곳을 떴다. 성큼성큼 걸어 매독에 걸린 여자 환자들이 동요하고 있는 두 줄의 침대 사이를 지나 도망쳤다. 쉭쉭거리고 헐떡이는 이르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가 그를 쫓아왔다.
"당신보다 많이. 그래, 내가 당신보다 많이 죽였어. 당신보다 더 많아......"
그는 계단을 네 단씩 급히 뛰어 내려갔다. 그리고 집으로 달려가 틀어박혔다.
다음 날 그는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 P541

귀향
Le Retour

짧고 단조로운 파도가 해안을 후려쳤다. 작고 하얀 구름들이 바람에떠밀려 넓고 푸른 하늘을 새 떼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바다를 향해 뻗어 내려가는 작은 골짜기 사이에 자리한 그 마을은 따뜻한 햇살을 받고 있었다.
마을 끄트머리 길가에 마르탱 레베스크의 집이 외따로 떨어져 있었다. 진흙으로 벽을 쌓아 올린 초라한 어부의 집이었지만, 초가지붕 위에 파란 붓꽃이 피어 있었다. 문 앞에 있는 손수건만 한 뜰에는 양파, 양배추, 파슬리 같은 채소들이 가득했다. 울타리가 길을 따라 그 정원을 둘러싸고 있었다. - P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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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두 번째 산문집을 묶으며건축학을 잘 모르면서도 글짓기는 집짓기와 유사한 것이라믿고 있다. 지면이 곧 지면(面)이어서, 나는 거기에 글을짓는다. 건축을 위한 공정 혹은 준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식을 생산해낼 것. 있을 만하고 또 있어야만 하는 건물이 지어져야한다. 한 편의 글에 그런 자격을 부여해주는 것은 (취향이나 입장이 아니라) 인식이다. 둘째, 정확한 문장을 찾을 것, 건축에 적합한 자재(材)를 찾듯이, 문장은 쓰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다.
특정한 인식을 가감 없이 실어 나르는 단 하나의 문장이 있다는플로베르적인 가정을 나는 믿는다. 그런 문장은 한번 쓰이면 다른 문장으로 대체될 수 없다. 셋째, 공학적으로 배치할 것. 필요한 단락의 개수를 계산하고 각 단락에 들어가야 할 내용을 배분한다. 가급적 각 단락의 길이를 똑같이 맞추고 이를 쌓아 올린다. 이 시각적 균형은 사유의 구조적 균형을 반영한다(반영해야한가). 이제 넘치는ㅍ것도 부족한 것도 없다. 한 단락도 더하거나 빼면 이 건축물은 무너진다(무너져여 한다). - 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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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Main

사람들이 예심판사 베르티에 씨 주변에 모여 있었다. 베르티에 씨는 생클루에서 일어난 이상한 사건에 관해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있었다. 그 설명할 수 없는 범죄가 한 달 전부터 파리를 몹시 불안하게 만들었다. 아무도 그 사건에 관해 이해하지 못했다.
베르티에 씨는 벽난로를 등지고 서서 자신이 모은 증거들을 근거로다양한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결론을 내지는 못했다.
여자 여러 명이 근엄한 말들이 흘러나오는 사법관의 입에 눈을 고정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녀들은 야릇한 두려움에 그녀들의 영혼 속을드나들면서 굶주림처럼 그녀들을 고문하는 탐욕스럽고 만족할 줄 모르는 공포심에 마비되어 전율하고 있었다. - P470

늙은이
Le Vieux

포근한 가을 햇볕이 도랑의 키 큰 너도밤나무 너머로 농장 뜰에 내리쬐었다. 암소들이 뜯어 먹은 풀밭 아래의 흙은 최근에 내린 빗물에 젖어있어서 발로 밟으면 푹푹 빠지며 절벅거리는 소리를 냈다. 사과나무들은 흐릿한 초록색의 열매들을 짙은 초록색의 풀밭 위에 뿌려 놓았다.
암송아지 네 마리가 줄에 묶여 지나가며 이따금씩 집 쪽을 향해 음매 하고 울었다. 가금류들은 축사 앞 퇴비 위에서 활기 넘치는 몸짓을했다. 몸을 문지르고, 움직이고, 꼬꼬댁거렸다. 수탉 두 마리는 쉬지 않고 울어대며 지렁이를 찾고는, 힘차게 꽥꽥거리며 암탉들을 불렀다. - P480

목가
Idylle

모리스 르루아르에게
기차는 막 제노바를 떠나 마르세유를 향해 가고 있었다. 바위투성이의 굽이진 긴 해안을 따라가기도 하고, 바다와 산 사이를 뱀처럼 빠져나가기도 하면서, 잔잔한 물결이 은실처럼 가장자리를 두른 황금빛 모래해변 위로 기어갔다. 짐승들이 자신의 굴속으로 들어가듯이 갑자기 더널의 검은 입속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기차의 맨 마지막 칸에 뚱뚱한 여자와 젊은 남자가 말없이, 이따금 서로를 바라보면서 마주 앉아 있었다. 여자는 스물다섯 살쯤 되어 보였다. 그녀는 창가에 앉아 바깥 풍경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검은 눈과 풍만한 가슴, 통통한 뺨을 가진 피에몬테 지방의 건강한 농부 아낙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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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맛을 잘 음미하려는 듯 두 눈을 감고 그 육체의 샘물을 계속 마시고 있었다.
그녀가 천천히 그를 떼어 놓았다.
"이제 됐어요. 기분이 나아졌어요. 몸이 한결 좋아진 것 같아요"
젊은이는 손등으로 입을 닦으면서 일어났다.
여자는 살아 있는 두 개의 수통을 옷 속으로 집어넣어 가슴을 부풀리면서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내게 큰 도움을 주었어요. 정말 고마워요"
그러자 그가 황송해하는 어조로 대답했다.
"고마워할 사람은 바로 저예요, 부인.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거든요!" - P491

목걸이
La Parure

가난한 월급쟁이를 가장으로 둔 집안에 운명의 신이 잘못 판단해 태어났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세련되고 아름다운 여자들이 태어나는 경우가 있다. 그녀도 그런 여자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결혼할 때 그녀에게는 지참금도 없었고, 물려받을 유산도 없었다. 돈 많고 멋진 남자와 사랑해 청혼을 받을 방법은 더더욱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교육부에서 근무하는 사무원과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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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내 것 대신 다른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사 왔단 말이야?"
"그래. 아직까지 몰랐구나, 응? 하긴, 모양이 정말 똑같았으니까"
그녀는 자랑스러우면서도 순박해 보이는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포레스티에 부인이 감정이 격해져서 친구의 두 손을 붙잡았다.
"오! 가여운 마틸드! 내 목걸이는 가짜였어. 기껏해야 500프랑밖에 나가지 않는!"
- P498

소바주 아주머니
La Mère Sauvage

조르주 푸세에게
나는 15년 전부터 비를로뉴에 간 적이 없다. 올해 가을에야 사냥을하러 친구 세르발의 집을 방문했다. 그 친구가 프로이센군이 파괴했던 성관城館을 마침내 새로 지었던 것이다.
나는 그 고장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세상에는 시각적으로 기분 좋고 관능적인 매력을 지닌 곳들이 있다. 사람들은 그런 곳을 감각적인 애정으로 사랑한다. 지상의 풍광에 매혹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종종 자신을 감동시킨 샘, 숲, 연못, 언덕에 대한 행복한 추억들을 간직한다.  - P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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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운옥 - 맞습니다. 모든 조선족이 범죄자일 수 없고 조직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그중 극히 일부일 텐데, 그럼에도 내국인이 그와 관련해 지나친 공포를 느끼게 되는 주요 원인 중 하나는 미디어가 그 부분을 지나치게 확대 재생산하거나 과잉 보도 경쟁을 벌이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예컨대 <범죄도시> 같은 영화에서 조선족이나 중국인에 대한 과도한 스테레오 타입으로 그들을 재현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님 말씀대로 저도 조선족을 비롯한 이주 외국인 범죄 관련 정확한 통계를 대중에게 공개하고 효과적인 대책을 세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지적해주신 것처럼 대중의 차별적인 공포를 해소하는 일에 있어서 ‘통계상의 디테일‘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좀 더 구체적으로, 통계를 발생 추이나 ‘몇건당 몇 건이다‘ 식의 단순 비율로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이는 자칫 어떤 집단을 범죄자 집단으로 규정해버리는 ‘과잉 일반화의 오류로 귀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재 나와 있는 외국인 범죄 증가 추이에 관한 통계상 보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매우 자세한 통계, 예를 들어직업 등의 구체적인 내용이 포함된 통계가 대중에게 제공되어야한다는 거죠. 단순 범죄율 증가 추이 같은 것만 이야기하고 ‘외국인 수의 증가 폭보다 범죄 증가율이 더 높다‘ 식으로만 알리면 오히려 정확한 실상을 알기 어렵다고 봅니다. - P229

이렇게 생명이 무성생식으로 번식하고 대를 이어가는 방식의 생태계에서는 다양성 자체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당시에 다양성이 존재하기는 했습니다. 생명이 다음세대에 유전자 세트를 물려주는 과정에서 매우 낮은 빈도로 에러가 발생하는데, 이것이 바로 일종의 다양성이었던 셈입니다.
그러다가 15억 년 전쯤 희한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어떤 특정 호스트가 기생자의 침입을 받게 된 겁니다. 기생자의 침입을 받은 호스트는 무척 고생하는데, 무성생식으로 번식하는 생명체라면 자기 유전자 세트, 그리고 기생자의 침입을받은 그 상태를 그대로 다음 세대에 물려주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심한 경우 앞세대 생명체에게서 유전자 세트를 물려받은 생명체는 그 탓에 죽고 맙니다. 그것으로 그 생명체의 번식과 유전자의 여정은 끝나는 거죠.
그런데 이때 만약 유전자가 이미 다양성을 획득한 상태라면 죽지 않고 생존하는 가능성이 생깁니다. 이런 맥락에서 호스트, 즉 숙주가 되는 생명체가 개발하고 진화한 것이 ‘성(性)‘이에요. 성에는 예컨대 남성과 여성, 두 개의 성이 있잖아요? 두 성이 섞이는 과정에서 일종의 ‘유전자 칵테일‘이 생깁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다가15억 년 전쯤부터 ‘알록달록‘해졌어요. 생명의 세계에 다양성이 크게 확장된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 인간을 포함한 생명의 역사에서 다양성은 근원적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 P251

장대익 - 진화학자의 관점에서 사회를 볼 때마다 특별히 느끼는 게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우리 사회 구성원 하나하나가 서로 너무 다르다는 거예요.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잖아요. 저는 바로 이 점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를 부인하려고 해요.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모든 체계는 다양한 변이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진화론을 창시한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이 우리에게 남겨준 놀라운 지적 유산은 ‘진화는 변이로부터 시작된다‘라는 명제인데요. ‘변이‘가 없이는 ‘선택‘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삶에는 언제나 변이의 요소가 충만합니다.
동시에 우리에게는 ‘다름을 불편하게 느끼는 본능‘도 내재해 있어요. 실제로 이와 관련해 심리 실험을 해보면 자기 자신과 여러면에서 유사하거나 자신과 교류를 많이 하고 소통을 많이 한 사람일수록 더 공감을 잘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컨대 우리가 이주외국인, 탈북자, 장애인 등 자신과 다르게 생겼거나, 다른 가치관을 가졌거나, 다른 처지에 놓인 사람을 어려서부터 일상적으로 접촉하거나 만나지 못했다면 그 감정이 아예 길러지지 않거나 그러한 감정을 쉽게 잃어버리게 되는 거죠.
그러므로 저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다름 아닌 ‘공감 지수‘라고 생각해요. 즉, 다른 사람의 처지와 관점으로 사물과 상황을 볼 줄아는 능력. 그것이 다양성 지수와 맥을 같이한다고 봅니다.  - P257

반면 기성세대는 BLM 운동이 ‘정치적으로 올바른(politicallycorrect)‘ 것이니까, ‘머리로는 동의하지만 직접 참여하지는 않겠어. 왜냐하면 나는 그들(흑인)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으니까!‘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젊은 세대는 어려서부터 다른 인종, 다른 백그라운드, 다른 환경의 아이들과 뒤섞여(mingle) 지내왔기 때문에 BLM 운동에 실제로 동참하는 일이 전혀 어색하거나 이상한 게 아닌 거죠. 단지 자기 친구이자 동료일 수있는 한 사람이 억울한 피해를 보거나 심지어 끔찍하게 살해당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그런 분위기를 진심으로 바꾸고 싶어 하는 거예요. - P259

장대익 - 앞서 교수님이 ‘블랙 라이브스 매터‘를 말씀하셨잖아요?
이 부분에 대해 제 솔직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2세대 · 0세대 등젊은 세대를 너무 긍정적으로만 보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유심히 살펴보면, 말씀하신 대로 이 세대가 한편으로는 자신이 경험한 일에 깊이 공감하고 또 행동으로 옮기기도 하지만, 다른한편으로는 뭔가를 지나치게 혐오하는 경향도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경향이 이 세대의 주요 소통 도구인 소셜 미디어의 영향 탓일수도 있고, 갈수록 극심해지는 양극화로 인한 부작용일 수도 있을텐데요.
아무튼 어떤 일에는 교수님이 말씀하신 BLM 경우처럼 깜짝 놀랄 만큼 깊이 공감하기도 하지만 또 어떤 일에는 지나치게 무관심하거나 불필요한 혐오감과 적대감을 드러낸다는 거죠. 그래서 한편으로 잘파세대가 대륙과 국가, 지리적·물리적 한계를 뛰어넘어같은 세대 간에 형성되는 문화적 동질성을 바탕으로 다양성의 세계로 나가게 하는 긍정적인 에너지와 DNA를 지니고 있다는 교수님 말씀에 동의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매우 우려되는 점도 있거든요.  - P269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이들이 거의 태어날 때부터 SNS 등의 소통 도구에 익숙해 있고 몸에 체화돼 있다는 점이에요. 그런 점이 바로 다양성을 키워주는 요소라고 보는데, 그도 그럴 것이 SNS 공간에서는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어 전 세계 다양한 사람을 자유롭게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SNS의 기반이 되는 플랫폼 특성상 자기가 좋아하고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과만 계속 만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필터링 기술이 적용된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양극화 경향이 점점 더 심해질 수밖에 없고요. 말하자면, 갈수록 점점 더 ‘넓은공감‘이 아닌 ‘깊은 공감‘이 강화되어서 다양성을 오히려 감소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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