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슨은 흄과 입장이 같았다. 도덕철학자들이 하는 일이란 알고 보면 자기들 뇌의 "감정 중추에 의견을 구해" 그것을 조작하듯 정당화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는 비난했다." 그의 예측에 따르면 윤리학을 연구하는 일은 조만간 철학자들의 손에서 벗어나 "생물학의 영역이 될 것이니,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인간 본성의 연구가 윤리학과 하나로 짜 맞추어질 것이었다. 철학 · 생물학 · 진화의 이러한 결합은 윌슨이 꿈꾸던 ‘새로운 종합‘에 해당하는 것이었고, 나중에 윌슨은 이를 통섭(consilience)이라고 불렀다. 여러 사상이 "경계를 뛰어넘어 다 같이" 하나의 통일된 지식 체계를 이루게 된다는 의미였다." - P80

그러나 어떤 경우에서든 기본이 되는 심리는 패턴 연결이다. 이런식의 인지는 별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순식간에 자동적으로 일어나고, 우리는 여기에 떠밀려 뮐러 · 라이어의 착시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착시를 경험할지 말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저 한쪽 선이 다른 선에 비해 더 길게 우리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마골리스는 이런 식의 사고를 ‘직관적 사고‘라고 부르기도 했다.
반면 ‘이유를 찾아내는 인지 과정‘은 "우리가 어떤 사고를 거쳐 특정 판단에 이르렀는지 설명할 때, 혹은 내가 보기에 다른 사람이 어떻게 그런 판단에 이를 수 있었는지 설명할 때" 이용된다." 이유를찾아내는 인지 과정‘은 언어를 가진 생물체, 그리고 스스로의 입장을 남에게 설명할 필요가 있는 생물체에게서만 일어난다. ‘이유를 찾아내는 인지 과정‘은 자동적이지 않다. 이는 의식적인 과정으로, 때로는 수고스러운 일처럼 느껴지고, 인지 정보에 의해 그 흐름이 쉽게막힌다. 콜버그는 ‘보이는 그대로의 인지 과정‘은 무시하고 이 ‘이유를 찾아내는 인지 과정‘을 연구해야 한다고 도덕심리학자들을 설득한 것이다." - P98

마골리스의 아이디어는 내 연구에서 드러난 모든 내용에 완벽하게들어맞았다. 우리 머릿속에서는 직관적 판단이 먼저 일어나고("그건 당연히 잘못이죠!"). 그런 다음에야 천천히, 때로는 고문과도 같이 정당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음. 둘의 피임 방법이 모두 실패할 수도 있고, 그러면 둘 사이에서 나는 아이는 기형아일 겁니다. 직관은 추론을 일으키는 추동력이지만, 추론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 P99

감정이 사실은 인지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과학자들이 차츰 인정하게 된 것이다. 감정은 여러 단계를 거쳐 일어나는데, 그중에서도첫 단계가 방금 일어난 일이 내 목표에 도움이 되는지 방해가 되는지 여부로 그 일을 평가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평가는 일종의 정보처리, 즉 인지 작용에 해당한다. 어떤 특정한 입력 패턴이 감정의평가 프로그램에 감지되면, 그것은 우리 뇌에 일련의 변화를 일으켜적절한 반응을 보일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킨다. 예를 들어, 어두컴컴한 길을 지나는데 누가 뒤에서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면나의 두려움 체계는 위협을 감지하고 교감신경을 작동시키는데, 이로써 맞붙을지 아니면 도망갈지의 반응 기제(fight-or-flight response)가 작동하고, 심장박동 수가 올라가며, 더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기위해 동공이 확대된다. - P101

《행복의 가설>이라는 책에서 나는 이 두 종류의 인지에 각각 기수("이유를 찾는 인지‘를 포함한 통제된 인지 과정)와 코끼리 (감정, 직관 및 모든 형태의 ‘보이는 그대로의 인지‘)라는 이름을 붙인 바 있다." 말(馬) 대신 굳이 코끼리를 선택한 이유는 코끼리가 말보다 훨씬 커다란 덩치를 가지고 있기(그리고 더 영리하기) 때문이다. 지난 5억 년 동안 동물의 마음을 움직여온 것은 자동적 인지 과정이었고, 그렇게 그것은 우리 인간의 마음도 움직여왔다. 따라서 수천 번의 제품 주기를 거친 소프트웨어가 기능이 향상되듯이, 자동적 인지 과정은 이제 자신의 일을매우 능숙하게 처리해내는 단계에 있다. 인간이 언어 및 추론 능력을 발달시킨 것은 최근 100만 년 사이의 어느 즈음인데, 이때 뇌가 스스로 회로를 재구성한 일은, 그러니까 코끼리 등에서 기수를 내리고그 자리에 어설픈 신참 마부를 앉힌 일은 없었다. 오히려 기수(언어를기반으로 한 추론 능력)는 계속 그 자리에 앉아 진화해나갈 수 있었는데.
기수가 어떻게든 코끼리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사실 기수가 시중들 수 있는 일은 여러 가지이다. 우선 미래를 더멀리 내다볼 줄 아는 능력(우리는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대안적인 시나리오를곰곰이 따져볼 수 있다)은, 코끼리가 지금 이 순간 더 나은 결정을 내리도록 도움을 준다. 또 기수는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나아가 첨단 기술까지 섭렵할 줄 아는데, 이 능력은 코끼리가 자신의 목표에는 한발 다가가고 재앙은 슬쩍 비키도록 도움을 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능력으로, 기수는 코끼리의 대변인 역할을 해준다. 그러나 이때 기수가 코끼리의 본심을 반드시 다 알 필요는 없다. 코끼리가 방금 무슨 일을 저질렀든 기수는 그것을 사후 조작하듯 설명하는 기술이 뛰어나고, 코끼리가 앞으로 하고 싶어 하는 일에 대해서도 그 정당화의 근거를 잘 마련한다. 인간이 언어라는 것을 만들어내고 그것으로 서로에 대해 험담하기 시작한 때부터, 코끼리 입장에서는 24시간 내내 일하는 이 홍보 회사를 등에 태우고 다닐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 P102

너무 뻔한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우리 중 도덕이나 정치 논쟁에 들어가서 이 원칙을 적용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그도 그럴 것이, 도덕이나 정치 논쟁에 들어가면 우리의 바른 마음이 기다렸다는 듯이전투태세에 돌입하기 때문이다. 기수와 코끼리는 척척 호흡을 맞추어 함께 공격을 막아내는 한편 적진을 향해서는 말발로 무장한 수류탄을 힘껏 내던진다. 그 모습에 우리 친구들은 감동에 젖기도 하고, 동맹들은 내가 팀에 헌신한다고 생각해줄 것이다. 그러나 적들은 이들과 달라 내가 아무리 훌륭한 논리로 무장하고 있다고 해도 마음을바꿀 리가 없다. 그들 역시 전투태세에 돌입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덕이나 정치 문제와 관련해 우리가 정말로 누구의 마음을 돌려놓고 싶다면, 나 자신의 눈으로는 물론 그 사람의 눈으로도 사물을 바라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진정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순간(깊이 있게, 그리고 직관적으로), 그 반응으로 어느새 나 자신의마음이 열리는 걸 느낄 것이다. 공감이야말로 서로가 바르다는 확신을 녹이는 해독제이다. 물론 서로 다른 도덕적 가치관을 허물고 서로 공감한다는 것이 몹시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 P108

・기수가 코끼리를 시중드는 모습은 사람들을 도덕적 당혹감에빠뜨렸을 때 목격할 수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사람들은강하게 직감하고, 그 느낌을 사수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사후정당화의 근거를 만들어낸다. 설령 하인(추론 능력)이 아무 이유를 찾지 못한 채 빈손으로 돌아와도 주인(직관)은 자신이 내린판단을 바꾸지 않는다.
• 사회적 직관주의자 모델은 홉의 모델을 기초로 하되 거기에 좀더 사회성을 불어넣은 형태이다. 사람들은 친구를 얻고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해 일평생 모질게 애쓰는데, 도덕적추론도 그런 노력 중 하나이다. 내가 "직관이 먼저이고, 전략적추론은 그 다음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진실이 무엇인지 밝혀내기 위해 사람들이 혼자 가만히 앉아서 하는 어떤활동을 도덕적 추론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 따라서 도덕이나 정치 문제와 관련해 누구의 마음을 바꾸고 싶다면, 코끼리에게 먼저 말을 걸어야 한다. 자신의 직관에 어긋나는데 그것을 사람들에게 믿으라고 하면, 그들은 전력을 다해서 빠져나갈 구멍을 찾을 것이다. 내 논거나 결론에 어디 미심쩍은부분이 없나 이유를 찾아내면서 말이다. 그리고 거의 백이면 백 그 노력은 성공을 거둘 것이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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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가서 아버님을 뵈실 거죠?"
"난 지금 몹시 바빠요, 켄턴 양. 잠시 후라면 몰라도."
"그럼 제가 부친의 눈을 감겨 드려도 될까요?"
"그렇게 해 준다면 더없이 고맙겠소, 켄턴 양"
그녀가 층계를 오르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녀를 불러 세우고 말했다.
"켄턴 양, 부친께서 방금 작고하셨는데도 올라가 뵙지 않는다고 막돼먹은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말아 주시오. 당신도짐작하겠지만 아버님도 이 순간 내가 이렇게 처신하기를 바라셨 을 거요."
"물론입니다, 스티븐스 씨."
"내가 만약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분을 실망시키는 게될 거요."
"압니다. 스티븐스 씨." -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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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버그가 내놓은 연구 결과 중에도 영향력이 가장 컸던 것은, 도덕적으로 가장 발달한 아이 (콜버그의 채점 기법으로 따졌을 때)는 역할 바꾸기를 평상시에 자주 접하는 아이라는 사실이었다. 역할 바꾸기란 자기 자신을 상대방의 입장에 놓아보고 어떤 문제를 그 사람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평등한 관계 (또래 사이)에서는 이것이 쉽지만, 수직적 관계(선생님이나 부모와의 관계)에서는 이것이 여의치 않다. 태어나서 한 번도 선생님이 되어본 적이 없으니 아이로서는 선생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본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부모를 비롯한 권위적 존재가 도덕 발달에는 장애물로 작용한다는 것이 피아제와 콜버그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물리적 세계에 대해서 우리가 아이에게 뭔가 가르치고 싶은 것이 있을 때에는 아이에게컵과 물을 가져다주고 그것으로 놀이를 하게 하면 된다. 물의 총량불변의 원리를 굳이 말로 가르치려 들지 말고 말이다. 아이에게 사람과 어울려 사는 사회적 세상에 대해 가르치고 싶을 때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놀게 내버려두고 다툼도 자기들끼리 해결하도록 한다. 십계명을 구구절절 말로 가르칠 필요가 없는것이다. 나아가 이들은 제발 아이들에게 하느님이나 선생님이나 부모에게 복종할 것을 강제하지 말라고 했다. 그랬다간 아이들이 규약정립기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하는 결과만 초래될 뿐이라는 것이다. - P39

다시 말해, 피아제나 콜버그의 애초 가정과는 달리 아이들은 어린나이임에도 모든 규칙을 다 똑같이 다루지는 않는다. 도덕철학자처럼 유창한 말솜씨는 없을지언정 자신에게 주어지는 사회적 정보를 복잡다단한 방식으로 분류하느라 그들 역시 나름대로 바쁜 것이다. 남에게 해가 가지 않게 하는 규칙이 특별하고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또 어디에나 적용되는 불변의 규칙이라는 것을 아이들은 일찌감치 깨닫는 것으로 보인다. 튜리얼은 이러한 깨달음이야말로 모든 도덕적 발전이 이루어지는 기본 토대였다고 말한다. 아이들은 "타인에게 해를 입히는 것은 잘못이다"라는 절대적인 도덕적 진리를 주춧돌로 삼고 그 위에 도덕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하나하나 건설해나간다는 것이다. 물론 문화마다 규칙의 세부 내용은 다를 수 있지만, 적어도 튜리얼이 연구한 문화에서는 어느 곳이나 아이들은 도덕적 규칙과 규약적 규칙을 구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튜리얼이 도덕 발달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보면 콜버그의 설명과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둘의 연구가 담고 있는 정치적함의는 비슷하다. 즉, 개개인에게 도리를 다하는 것이 도덕성의 핵심이라고 보는 것이다. 즉, 충성심 · 존경심·의무감 · 경건함. 애국심 · 전통 등의 덕목보다는 타인에게 해를 가하지 않고 공평성을 지키는 것이 도덕성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한편 위계나 권위는 대체로 훌륭한것이 못 된다(그러므로 제일 좋은 방법은 아이들이 스스로 깨치는 것이다). 따라서 학교나 가정에서는 권위주의적 원칙에 따라 어른들이 아이들을 훈련시키고 제약하기보다는 평등과 자율성으로 대표되는 진보적원칙을 구현하려고 애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 P43

내 예측대로라면 세 도시 중 가장개인주의적인 곳(나아가 튜리얼의 이론에 가장 잘 부합하는 곳)은 필라델피아일 것이었고, 가장 사회중심적인 곳(나아가 오리사에서와 비슷한 결과가나오는 곳)은 헤시피가 될 것이었다.
연구 결과는 그야말로 명약관화하게 슈웨더의 이론을 지지하고 있었다. 먼저, 필라델피아의 피험자 네 그룹 모두는 튜리얼의 연구 결과를 확인시키기라도 하듯 도덕 위반과 규약 위반을 확실히 구분하는 미국인의 모습이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나는 튜리얼이 연구에사용한 이야기를 그대로 가져다 썼다. 즉, 여자아이가 그네에서 남자아이를 밀어 떨어뜨리는 이야기 (사람들은 이를 확실한 도덕 위반의 사례로보았다)와 교복을 입지 않고 학교에 가는 남자아이 이야기 (이는 규약 위반의 사례로 보았다)를 이용한 것이다. 이는 연구의 방법론을 정당화하는 길이기도 했다. 도덕과 사회 규약의 차이를 이런 식으로 못 박아이 두 이야기를 포함시켜두면, 무해한 금기 이야기에서 다른 결과가 나왔을 때 탐색 질문이나 면접관에게 뭔가 문제가 있어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이라고 탓할 소지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브라질에서도 상류층은 튜리얼의 두 가지 이야기에 대해서 미국인과 생각이 똑같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브라질의 노동자 계층 아이들은 달라서 교복을입지 않는 것은 보편적으로 잘못이라고 답했다. 특히 헤시피에 사는노동자 계층 아이들은 교복 안 입는 반항아를 또래를 미는 여자아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판단했다. 이러한 양상은 슈웨더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즉, 문화 집단에 따라 어디까지가 도덕이고 어디까지가 규약인지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 P61

연구에서 얻은 두 번째 발견은 무해한 금기 이야기에 대해 사람을은 슈웨더가 예측한 그대로의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필라델피아의 상류층에서는 그 이야기를 사회적 규약을 어긴 것으로 판단한 반면, 헤시피의 하층민은 도덕을 위반한 것으로 판단했다. 나아가 도시(포르투 알레그레의 시민들이 필라델피아 시민들보다 도덕의 범위가 넓었다). 사회계층(하층민이 상류층보다 도덕의 범위가 넓었다), 연령 (아이가 어른보다 도덕의 범위가 넓었다)도 저마다 상당히 큰 영향력을 갖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 가지 예상치 못했던 점은, 도시보다도 사회계층이 갖는 영향력이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이었다. 다시 말해 세 도시 어디든 고학력자들은 이웃의 하층민보다 오히려 다른 도시의 고학력자와 더 유사한 성향을 보였다. 도덕성이 차이 나는 곳을 찾겠다고 비행기를 타고 남쪽으로 무려 5000마일을 날아갔건만, 알고 보니 그 차이는 불과 몇 블록 떨어지지 않은 우리 학교 주변의 가난한 이웃과의 사이에 더 크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 P62

• 도덕성의 범위는 문화에 따라 달라진다. 서양적이고, 교육 수준이 높고, 개인주의적인 문화에서는 도덕성의 범위가 몹시 좁다. 반면 사회중심적 문화에서는 도덕성의 범위를 넓히는 경향이 있는데, 이로써 삶의 더 다양한 측면을 아우르고 통제한다.
• 사람들이 갖는 직감(특히 역겨움 및 경멸감과 관련된 것)은 때로 도덕적 추론을 진행시키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도덕적 추론은 때로사후 조작과 다름없는 양상을 보인다.
• 도덕성은 아이들이 피해의 개념을 잘 이해하게 되었을 때 스스로 세워나가는 것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틀림없이 문화를 통한 학습이나 문화적인 유도가 합리주의 이론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역할을 할 것이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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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956년 7월

달링턴 홀

요 며칠 사이에 나의 상상을 붙들어 온 그 여행을 정말 감행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 같다. 아마도 패러데이 어르신의 안락한 포드를 타고 나 홀로 즐기게 될 여행,
잉글랜드의 수려한 산하를 거쳐 서부 지방으로 나를 데려다줄 여행, 그리고 예상컨대 무려 닷새나 엿새 동안 나를 달링턴 홀에서 떼어 놓을 여행이다. 이 여행의 발상 자체가 패러데이 어르신의 지극히 고마운 권유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언급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 P9

그러나 잠시 후 주위 풍경이 점점 낯설어지면서 내가 기존에 알았던 모든 경계들을 넘어 버렸음을 깨달았다. 흔히들 쓰는 말을 빌리자면 배에 돛이 오르는 순간 마침내 육지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이러한 순간을 두고 들뜬 기분과 불편함이 뒤섞인 느낌이라는 표현이 종종 사용되는데, 내가 주변 경관이 점점 낯설어지는 가운데 포드에 앉아서 받았던 느낌과 매우 흡사한 것 같다. 이런 느낌이 든 것은 내가 차의 방향을 틀어 산자락을 끼고 도는 도로에 들어선 직후였다. 도로변에 늘어선 수목들과 두껍게 덮인 나뭇잎들 때문에 눈으로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왼편이 가파른 절벽이라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내가 정말 달링턴 홀을 남겨 두고 떠나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고백하건대 약간 불안감도 들었다. 지금 혹시 길을 잘못 들어 황야로 이어지는 완전히 엉뚱한 방향으로 쌩쌩 달려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에 더욱 짙어지는 불안감 말이다. 그 느낌은 아주 잠깐에 불과했지만 결국 속도를 늦추게 만들었다. 심지어 길을 제대로 가고 있음을 확인한 후에도 왠지 차를 멈추고 잠시 중간 평가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 P39

우리가 이 땅을 ‘그레이트(위대한)‘ 브리튼이라 부르는 것을 두고 좀 건방진 관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감히 말하건대 우리 나라의 풍경 하나만으로도 그 숭고한 형용사를 사용하는 것은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위대함‘이란 정확하게 무엇인가? 그것은 대체 어디에, 혹은 무엇에 존재하는가? 물론 이러한 질문에 답하자면 내 머리보다 훨씬 더 지혜로운 머리가 필요하다는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내게 위험을 무릅쓰고 추측해 보라고 한다면 명백한 극적 효과나 화려함의 ‘결핍‘, 바로 그점이 우리 땅의 아름다움을 독특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차분한 아름다움, 절제의 미라는 표현이 꼭 들어맞는다. 마치 땅 자체가 자신의 아름다움을, 위대함을 자각하고 있어 굳이 소리 높여 외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여기에 비해 아프리카나 미국 같은 데서 볼 수 있는 풍경들은 전율에 가까운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분명하지만 꼴사나운 과시욕으로 인해 객관적인 관찰자에게는 저급하다는 인상을 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 P47

모두 내가 확인해 보았으므로 아마도 정확한 이야기들일것인 이 두 사례에서 내 부친은 ‘헤이스 소사이어티‘가 지칭한 ‘자신의 직위에 상응하는 품위‘를 증명해 보일 뿐 아니라 당신이 이미 그 화신의 경지에 근접해 있었다는 점에 여러분도 동의해 주면 좋겠다. 그러한 때의 내 부친과 잭 네이버스 씨(기술적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던 때의 그 사람이라고해도 상관없다.) 같은 인물의 차이점을 생각해 보면 ‘위대한‘ 집사와 단순히 유능한 집사를 나누는 기준이 과연 무엇인지식별이 좀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만찬 식탁 밑에서 호랑이를 발견하고도 태연할 수 있었던 집사의 이야기를 내 부친이 그렇게나 좋아하셨던 이유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설명하자면 그 일화의 어딘가에 진정한 ‘품위‘의 핵심이 담겨 있음을 내 부친은 본능적으로 알고 계셨던 것이다. 따라서 이제 나는 다음과 같이 단정하고 싶다. 즉 ‘품위‘는 자신이 몸담은 전문가적 실존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집사의 능력과 결정적인 관계가 있다. 모자라는 집사들은 약간만 화나는 일이 있어도 사적인 실존을 위해 전문가로서의 실존을 포기하게 마련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집사로산다는 것은 무슨 팬터마임을 연기하는 것과 비슷하다. 슬쩍 밀거나 약간만 비틀거리게 만들어도 가면이 떨어져 내려가면 뒤의 배우가 제 모습을 드러내고 만다는 점에서 말이다. - P70

위대한 집사들의 위대함은 자신의 전문 역할 속에서 살되 최선을 다해 사는 능력 때문이다. 그들은 제아무리 놀랍고 무섭고 성가신 외부 사건들 앞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마치 점잖은 신사가 정장을 갖춰 입듯 자신의 프로 정신을 입고 다니며, 악한들이나 환경이 대중의 시선앞에서 그 옷을 찢어발기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그가 그 옷을 벗을 때는 오직 본인의 의사가 그러할 때뿐이며, 그것은 어김없이 그가 완전히 혼자일 때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품위‘의 요체다. - P71

반쯤 빛을 받고 있던 부친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특히."
내가 계속 말했다.
"외부 손님들이 계시든 안 계시든 더 이상 아버님께 식탁시중을 맡겨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나는 지난 오십사 년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식탁 시중을들어왔다."
부친은 서두르는 느낌이 전혀 없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또 있습니다. 아무리 짧은 거리더라도 아버님께 물건이얹힌 쟁반을 나르게 해서는 안 된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러한 제한들을 고려해, 또 아버님께서 간명한 것을 워낙 중시하신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수정한 업무 목록을 만들어 왔습니다. 지금 이 시간 이후로는 이 내용대로 해 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들고 있던 종이를 그분께 직접 건네기가 싫어 침대가장자리에 얹어 놓았다. 부친은 그것을 힐끔 보시고는 다시 내게로 시선을 돌리셨다. 여전히 뚜렷한 감정의 흔적이 없는 표정이었고 의자 등받이에 얹힌 두 손도 긴장 상태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비록 등은 굽었지만 그분의 풍채에담긴 충격적인 효과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옛날 차뒷좌석에 앉은 술 취한 두 신사를 정신 번쩍 들게 만들었던 바로 그 느낌 말이다. 이윽고 부친께서 말씀하셨다.
"그때는 계단 때문에 넘어졌을 뿐이다. 계단이 한쪽으로 기울었어. 다른 사람이 또 그 꼴을 당하기 전에 거기를 바로잡으라고 시머스한테 일러 주어라."
"알겠습니다. 어쨌거나 저 종이를 꼼꼼하게 읽어 보기는하실 거죠?"
"시머스한테 계단을 고치라고 꼭 지시해. 유럽에서 신사분들이 도착하시기 전에 확실하게 해야 해."
"알겠습니다. 아버님. 그럼 좋은 아침 되십시오." - P104

포플러나무의 그림자들이 잔디밭 대부분을 덮고 있었지만 모퉁이, 정자로 올라가는 언덕배기 쪽에는 아직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부친은 네 개의 석판으로 된 그 계단 옆에 깊은 생각에잠겨서 계셨다. 미풍이 그분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흩어 놓고 있었다. 잠시 후 내가 지켜보는 사이 부친께서 아주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셨다. 맨 위 칸에 이르러 돌아서시더니 약간 더 빠른 걸음으로 다시 내려오셨다. 그리고 다시 돌아서시더니 앞에 놓인 계단을 응시하며 몇 초가량 다시 조용히 서계셨다. 이윽고 부친께서 두 번째로 아주 조심조심 계단을 오르셨다. 이번에는 계단 위 잔디밭으로 계속 걸어가 정자 가까이 가서야 돌아서셨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땅에서눈을 떼지 않은 채 되돌아오셨다. 그때 그분의 행동은 사실내가 설명하더라도 켄턴 양이 편지에서 묘사한 것과 다를바 없을 것이다. ‘마치 떨어뜨린 귀한 보석이라도 찾고 있는 사람처럼.‘ - P106

"그는 나의 적이었소."
나리께서 말씀하고 계셨다.
"그러나 항상 신사답게 행동했어요. 우리는 육 개월 동안서로 포탄을 퍼부어 대면서도 서로를 점잖게 대했소. 그는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신사였고 나는 그에게 아무런 적의도 품지 않았소.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소. ‘이봐요, 지금은 우리가 적이니 나는 전력을 다해 당신과 싸우겠소. 하지만 이 몹쓸 짓이 끝나고 나면 우리는 더 이상 적이 될 필요가 없으니 함께 어울려 술이나 한잔합시다.‘ 그러나 더 몹쓸것은 이 조약이 나를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있다는 거요. 나는 분명 그에게 전쟁이 끝나고 나면 우리는 적이 아니라고말했소. 하지만 내가 지금 어떻게 그를 마주 바라보면서 내말이 결국 진실로 드러나지 않았느냐고 말할 수 있겠소?"
그리고 잠시 후 나리께서 고개를 가로저으시며 다소 무겁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번 전쟁에서 싸운 것은 이 세계의 정의를 지키기위함이었소. 게르만족을 상대로 하는 복수전에 가담하고 있다고 생각한 적은 결코 없었소." - P116

어쨌거나 브레만 씨의 사망 후 이 년여에 걸쳐 나리와 당시 그분의 가장 가까운 동지였던 데이비드 카디널 경이 힘을 합쳐 꾸준히 노력한 결과, 독일의 상황을 계속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공감하는 인사들을 광범위하게 결속시킬 수 있었다. 여기에는 영국인과 독일인은 물론 벨기에,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대부분 외교관이거나 고위 정치인, 저명한 성직자, 퇴역 장성, 작가, 사상가들이었다. 이 신사들 중 일부는 나리와 생각이같아서 당시 베르사유 조약이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이미 끝난 전쟁을 두고 한 나라를 계속 단죄하는 것은 부도덕하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일부는 독일이나 독일 사람들을 크게 걱정하는 것 같지 않았는데, 다만 독일의 경제 혼란을 막지 못하면 전 세계로 급속히 파급될지도 모른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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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스웨터와 두 개의 코트로도 막을 수 없는 추위가 느껴진다. 바깥이 아니라 가슴 안쪽에서 시작된 것 같은 한기다. 몸이떨리고, 내 손과 함께 흔들린 불꽃의 음영에 방안의 모든 것이 술렁인 순간 나는 안다.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 것인지 물었을 때 인선이 즉시 부인한 이유를.
피에 젖은 옷과 살이 함께 썩어가는 냄새, 수십 년 동안 삭은 뼈들의 인광이 지워질 거다. 악몽들이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갈 거다. 한계를 초과하는 폭력이 제거될 거다. 사 년 전 내가 썼던 책에서 누락되었던 대로에 선 비무장 시민들에게 군인들이 쏘았던 화염방사기처럼, 수포들이 끓어오른 얼굴과 몸에 흰 페인트가 끼얹어진 채 응급실로 실려온 사람들처럼. - P287

여기쯤 멈춰 서서 엄마는 저 건너를 봤어. 기슭 바로 아래까지차오른 물이 폭포 같은 소리를 내면서 흘러갔어. 저렇게 가만히있는 게 물 구경인가 생각하며 엄마를 따라잡았던 기억이 나. 엄마가 쪼그려앉길래 나도 옆에 따라 앉았어. 내 기척에 엄마가 돌아보고는 가만히 웃으며 내 뺨을 손바닥으로 쓸었어. 뒷머리도, 어깨도, 등도 이어서 쓰다듬었어.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 P311

머릿속 수천 개 퓨즈들에 일제히 불꽃 튀는 전류가 흘렀다가 하나씩 끊기는 것 같은 과정을 나는 지켜봤어. 어느 순간부터 엄마는 나를 동생이나 언니로 생각하지 않았어. 자신을 구하러 온 어른이라고도 믿지 않았고, 더이상 도와달라고도 하지 않았어. 점점 나에게 말을 걸지 않고, 가끔 말한다 해도 단어들이 섬처럼 흩어졌어. 응, 아니, 라는 대답까지 하지 않게 되었을 때부터는 원하고청하는 것도 없어졌어. 하지만 내가 까서 준 귤을 받아들면, 평생새겨진 습관대로 반으로 갈라 큰 쪽을 나에게 건네며 가만히 웃었어. 그럴 때면 심장이 벌어지는 것 같았던 기억이 나. 아이를 낳아기르면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되는 걸까 생각했던 것도.
그즈음부터 엄마는 잠을 잤어. 언제 그렇게 나에게 잠재우지 않는 고통을 주었느냐는 듯 하루의 삼분의 이, 나중엔 사분의 삼이상을 잤어. 호스피스 병동에서 보낸 마지막 한 달은 거의 종일 잠들어 있었어. 밀물 때가 지나치게 긴 이상한 바다처럼. 모래펄이완전히 잠긴 뒤 다시는 바다가 빠져나가지 않는 것처럼.
이상하지. 엄마가 사라지면 마침내 내 삶으로 돌아오는거라고생각했는데, 돌아갈 다리가 끊어지고 없었어. 더이상 내 방으로기어오는 엄마가 없는데 잠을 잘 수 없었어. 더이상 죽어서 벗어날 필요가 없는데 계속해서 죽고 싶었어. - P314

그 겨울 삼만 명의 사람들이 이 섬에서 살해되고, 이듬해 여름육지에서 이십만 명이 살해된 건 우연의 연속이 아니야. 이 섬에사는 삼십만 명을 다 죽여서라도 공산화를 막으라는 미군정의 명령이 있었고, 그걸 실현할 의지와 원한이 장전된 이북 출신 극우청년단원들이 이 주간의 훈련을 마친 뒤 경찰복과 군복을 입고 섬으로 들어왔고, 해안이 봉쇄되었고, 언론이 통제되었고, 갓난아기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광기가 허락되었고 오히려 포상되었고, 그렇게 죽은 열 살 미만 아이들이 천오백 명이었고, 그 전례에 피가 마르기 전에 전쟁이 터졌고, 이 섬에서 했던 그대로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추려낸 이십만 명이 트럭으로 운반되었고, 수용되고 총살돼 암매장되었고, 누구도 유해를 수습하는 게 허락되지 않았어.
전쟁은 끝난 게 아니라 휴전된 것뿐이었으니까. 휴전선 너머에 여전히 적이 있었으니까. 낙인찍힌 유족들도, 입을 떼는 순간 적의 편으로 낙인찍힐 다른 모든 사람들도 침묵했으니까. 골짜기와 광산과 활주로 아래에서 구슬 무더기와 구멍 뚫린 조그만 두개골들이 발굴될 때까지 그렇게 수십 년이 흘렀고, 아직도 뼈와 뼈들이 뒤섞인 채 묻혀 있어.
그 아이들.
절멸을 위해 죽인 아이들. - P317

숨을 들이마시고 나는 성냥을 그었다. 불붙지 않았다. 한번 더 내리치자 성냥개비가 꺾였다. 부러진 데를 더듬어 쥐고 다시 긋자 불꽃이 솟았다. 심장처럼. 고동치는 꽃봉오리처럼. 세상에서 가장작은 새가 날개를 퍼덕인 것처럼. - P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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