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입시에 낙방을 하고 죽은 듯이 두어 달을 방에 틀어박혀지내던 오빠는 아랫녘에서 슬금슬금 꽃소식이 올라오기 시작하자 기어이 배낭을 지고 집을 떠났다. 으레 오빠는 봄이 오는 것을 견디지 못해 잔설이 녹을 무렵이면 집을 떠나곤 했었으나 그시절 한참 소설 읽기에 빠져 있어 인생이나 사람을 보는 눈이 까닭 없이 허허롭기만 했던 내 눈에 집 떠나는 오빠의 모습은 등산용 배낭과, 물들인 작업복 차림에도 불구하고,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운명의 힘에 이끌려 무명 동저고릿바람에 엿목판을 지고바람처럼 떠돌아야만 했던 소설 속의 사내처럼 보이기만 했다. - P116
가진 것이 없어지자 오빠는 더욱 허황해졌다. 하루에도 몇 가지씩 사업 계획을 세웠다가 허물고 다시 세우면서 별반 알아듣지도 못하는 나나 어머니에게 설명을 늘어놓거나 사장을 육촌아저씨로 둔 친구를 만나 다시 계획을 짜며 우리형편으로는 꿈같은 오백만 원, 천만 원 소리를 거침없이 해대는것이었다. - P121
애정이 시간을 지배할 수 있을까. 시간에서 해방시킬 수 있을까. 아이의 얼굴에 떠오를 한번의 웃음을 위해, 단음절의 외침을위해 열 번을 울어보이고 스무 번을 웃어보이며 나는 이 아이도곧 내게서 떠나리라는 것에 괴로워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사랑의 허구가 아닐까.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보고 있는 것은 진실의 환상뿐이 아닐까. 믿고 싶은 것밖에는 믿을 수 없는 것이 아닐까. - P164
허위허위 올라온 길들은 꼬리를 잘라 흔적을 없애는 도마뱀처럼 재빨리 집들 사이로 숨어버렸다. 대신 연민과 증오와 욕정과 무관심으로 녹여버린 애정이, 지나간 시간들이 눅눅한 공기 속에서 숨쉬고 있었다. 앞으로의 모든 날들이 그러할 것이다. 내 앞에 놓인 끝없는 시간들이, 전혀 믿지 않는 것을 믿는 체하며 행복하게 살아야 할 그 지루한 나날들이 함성이 되어 숲을 흔들었다. 나는 문득 이미 죽은 사람을 생각하듯 아이와 남편을먼눈으로 보는 자신에 공포를 느꼈다. 아이의 팔목에 매달린 풍선이 둥실 떠서 흔들렸다. 나는 갑작스런 두려움으로 아이의 팔에서 풍선을 떼어내었다. 그것은 춤추듯 흔들리며 날아가 이내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이를 다시금 들쳐업고 단단히 띠를 동여매었다. 비탈을 내려가는 동안 아이는 점차 가벼워지고 나는 종아리에스치는 잡초의 서걱거리는 소리에도 깃털처럼 가벼워진 아이를 흘려버릴 것 같은 두려움으로 자꾸 잠든 아이의 이름을 불러대었다. - P169
황토흙이 좁은 사잇길로 벌겋게 흘러내려 발가락 사이로 스며들었다. 이른바 ‘특지‘는 그 좁고 가파른 길의 꼭대기였다. 일련 번호가 표시된 것도 아니어서 정옥은 별반 미덥지 않은 어머니의 기억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정옥은 다시 아이를 업었다. 길은 두 사람이 나란히 오르기에도 좁았다. 어머니는 택지만 닦아놓았던 분양 당시와 무덤이 들어찬 풍경이 너무도 다름에 기억의 혼란을 일으키는 기색이 완연했다. 계약서의 도면을 꺼내들고 출발했던 지점부터 되짚어 하나씩도면의 번호와 맞춰가기 시작했다. 그러는 중에도 연신 깨금발로 서서 샌들의 흙을 털어내며 혀를 찼다. 합장묘를 준비한 것에 안심하면서도 어쨌든 공동 묘지라는 사실이 서운한가 보았다. 선산은 북쪽이었다. 겨울에 상을 당하면 집뜰에 가묘를 쓰고얼음 풀린 후에야 새로이 장례를 치러 산에 매장을 한다고 했다. "여길 올라가려면 시신이 서서 가겠구나." - P213
"더 주무시지 않구요." 이른 아침 집 앞 골목을 쓸고 온 부지런한 가장에게처럼 그녀는 천연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돌아서서는, 그에게는 들릴 리 없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난 아무것도 몰라요. 그냥 아무것도모르는 여자예요. 그걸 불행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비 온뒤 부드럽고 따뜻한 땅에 꽃씨를 뿌리고, 싹이 돋아 피어나는 모습에 놀라 기뻐하는 여자예요.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그날그날을 남들처럼 예사롭게 살아갈 수 있어요. 미래도 있구요. 아이가 있잖아요. 그러면 그는 대답할 것이다. 당신은 꽃씨나 뿌리면서 살자 하지만 꽃씨를 뿌리는 마음은 또 무엇이오, 그것은 꽃을보고자 하는 기다림과 꿈이 있기 때문일 것이오. 정옥이 미래라고 부르는, 자신이 죽은 뒤의 시간과 공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기 때문이다. 세상과 함께 핏줄을 남겨놓고 가기 때문이다. - P215
그는 상영 도중 극장을 나왔다. 밖은 여전히 대낮이었다. 해를따라 걸으며 그는 머릿속의 안개를, 그 비현실감을 걷어내려는듯 자꾸 머리를 흔들었다. 고깔 모자를 쓰고 미친 듯 춤을 추던 검고 흰 사람들. 초라하고 피로에 지친 만삭의 임부, 울고 있는아이. 그것은 어제의 일이던가. 조금 전의 일인가, 아니면 내일의 일인가. 어제와 그저께와 또 훨씬 이전, 자신의 몸을 빌려 지나갔을 어느 한 생의 기억과 구별할 수 없는 똑같은 길을 걸으며 그는 비로소 자신이 왜 울었던가를 알 것 같았다. 아들 때문이었다. 그가 희구하는 평화로운 삶, 아들이 살기를 바라는, 그러나 아들 역시 실패하고야 말 삶, 그럼에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의 어쩔 수 없는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 P222
문 앞에 ‘입실 금지‘ 니, ‘금남‘ ‘금녀‘ 등을 서투른 한문으로써붙이고 혹은 ‘요 노크‘ 따위 뒤에 붉은 매직펜으로 느낌표를세 개씩 붙이거나 아들이 해적선 표시를 본떠 뼈가 엇갈린 해골모양을 그려 붙이던 것을, 반드시 책상 서랍과 문을 잠그고 다니던 시절을 생각하고 그 여자는 미소를 지었다. 아이들은 그렇게자란다. 그리고 어느 때부터인가 그애들은 문을 잠그는 일을 소홀히 하기 시작했다. 이제 비밀은 일기장이나 마른 꽃, 네잎 클로버가 붙여진 편지 묶음, 우정의 맹세 따위에 있는 게 아니라는뜻이겠지. - P254
영원히 소멸되지 않고 떠다니는 고통에 가득 찬 심장이 있을까. 육체가 소멸한 뒤에, 그것은 물과 불과 공기와 흙이 되어 떠돌 뿐 세상의 눈 밝은 자 뉘라서 그걸 알랴. 그러면서도 그 여자는 지난 세월 동안 출근하는 남편, 문밖으로 나가는 아이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다시 저들을 볼 수 있을까. 지금의 작별이 추억의 한 순간으로 남게 되는 것은 아닐까. 미래의 어느 날, 나는 사고가 있던 날 역시 여느 날과 다름없었던 아침이었다고 회상하며 평온한 기류 속에 숨어 있던 불행한사건의 전조를 알리는 어떤 암시를 캐내어보려고 애쓰게 되거나않을까 따위들을 아득하게 생각하곤 했다. - P260
그 여자는 느릿느릿 마루의 전등 스위치를 올렸다. 불이 들어오기까지의 일 초나 이 초, 혹은 그보다 짧은 순간 그 여자는 어둠 속을 섬광처럼 지나치는 무엇을 보았다. 그것은 무언가 차갑고 날카로운 이물스러움이 그녀의 생애를 꿰뚫고 지나간 느낌이기도 했다. 아마도 일생을 동반해온 벗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그녀보다 앞서 이 집에서 웃고 숨쉬며 떠들며 살아갔던 사람들, 아니 그들보다 앞서 살았던 사람들, 또한 그 여자의 흔적, 비탄, 막연한 불안과 분노, 비애 따위를 한 번의 페인트 칠로 말끔히 지우고 천연덕스럽게 살아갈, 미래의 사람들의 가면처럼 냉혹하고창백한 얼굴들이었다.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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