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그래요. 너무 뽑히고 싶어서 당사자성을 막 어필했어요. 나는 빈곤 당사자다! 그렇게 들어갔는데 예상보다 더엄청난 곳이었어요. 품을 많이 들여야 했고, 긴장도 많이 해야 했고, 저는 교사가 일방적으로 가르침을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신입교사 오티에서 담당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야학이라는 공간은 누가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고 가르침을 받는 곳이다. 학생과 교사가 상호작용을 하는 곳이다." 그래서 내가잘못 알았구나, 내가 너무 정규교육의 정상성에 갇힌 수업을 하려고 했구나, 그런 생각도 했어요.
담 - 근데 물론 옛날에 쓴 문장이 창피할 수도 있고, 목적이 있어서 쓰는 글은 유치해지기도 하지만••• 빈곤이우리한테 해준 게 없는데 그런 경우에라도 스펙이 되면 좋잖아요. 빈곤 팔아서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좋은것 같은데요? 잘 쓰셨을 것 같아요. - P37
여름 (웃음) 연대... 어려워요. 예전에 인천 옐로하우스 (성매매집결지)에 제가 연대를 하러 갔었어요. 근데 제가 생각했던거하고 너무나 다른 거예요. 저는 옐로하우스 연대 요청을온라인에서 접했는데, 보통 활동가들이 연대 활동 다녀왔습니다, 하고 올리는 게시글을 보면 내부에서 갈등이 많지 않아 보이지만, 막상 현장에 가보니까 되게 삭막하고 모인 사람들끼리도 의견 충돌이 은근히 많았어요, 싸움이 번질 것같은 긴장이 계속됐죠. 연대자랑 당사자랑 의견이 다르다보니 언쟁이 붙기도 하고, 우리 앞으로 보지 말자, 이러고 헤어지지만 어차피 법원에서 또 만나야 되거든요. 그러면 법원 앞에서 또 싸우고, 그런 걸 보면서 느꼈어요. 연대라는 건 아름답지 않은 거구나. 엄청 싸우면서 동행하는 거구나•••.
담 연대 과정에서 입장의 차이가 있을 때 서로를 피하지않고서 어떻게 싸울 수 있을지가 굉장히 까다로운 것같아요. - P39
쪼이와는 강단에서 처음 만났다. 나는 불법 촬영물 삭제 방법을 강의하는 강사였고, 쪼이는앞으로 불법 촬영물 삭제를 업으로 삼고자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강사 유리는 아직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상태다. 강의 경험이 전무한 데다 자신이 불법 촬영물 삭제 업무를 한다고 어디 가서 제대로 얘기해본 적조차 없다. 검정색 미니스커트에 물망초색 니트를 입고 때가 탄 흰색 스니커즈를 신은 발로 바닥을 톡톡 차는 모습이 강의실의 중후한 분위기에 비해 파격적으로 어리고 불안정해 보인다. 미래의 유리는 바지 정장에 로퍼를신고 전국을 누비며 유창하게 강의를 이어나가는 활동가가 되지만, 그날의 유리는 모든 게 어설프다. 심지어 불법 촬영물 소비 양태를 설명하다가 갑자기 자기 감정을 못 이기고 울기 시작한다. 그때 파인애플 모양 머리 스타일을 한 학생 쪼이가 휴지를 뜯어준다. 강의 내내 앞줄에서 따스한 표정으로 호응해주었던 고마운 학생이다. 유리는 휴지를 받으며 쪼이를 본다. 쪼이의 눈 안에 태양처럼 무서운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다. 두 사람은 곧 다시 만나게 된다. 미래의 유리와 미래의 쪼이와 미래의 여러 동료들이 협동해서 해결 방안을 고심해야 할 심각한 디지털성폭력 사건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미래의 쪼이는 삭발을 하고, 수많은 피해자의 영상을 삭제한다. 직접 불법 촬영물 삭제 방법을 강의하기도 하고, 다른 실무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삭제 보고서도 발간한다. 매일매일 새로 태어나는 활동가들이 한 치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걸어간다. 아무도아무것도 모르는 순간에도 서로 만나고 헤어지면서. 그 치열했던 시간이 훗날 식탁에서 밥을삼키며 소화 가능한 이야기가 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 P50
담 숨은그림찾기를 잘해야 한다는 건, 해당 파일이 인터넷상에 하나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인가요?
쪼이 그것도 있고요. 예를 들어서 유튜브 홈페이지를 생각해보시면, 여러 영상이 한 화면에 쫙 깔려 있잖아요. 유포되는 사이트 화면도 그런 식인데, 그중에서 제일 내 피해자 같은 영상을 눈으로 보고 찾아야 되는 거죠. 말씀하신 것도 맞는 게, 보통 한 피해자당 피해 촬영물이한 개만 있을 때가 거의 없거든요. 알고 보니 그 사람 영상이열개, 스무 개, 몇백 개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지원 요청을하는 분들은 영상이 한 개만 있다고 생각을 하니까 한 개만 보내주세요. 그러면 제가 그 영상을 보고 이 사람의 다른 영상도 다 찾아야 해요. 이 사람의 인상이라든지••• 모습이나 특징 같은 걸 기억했다가 다른 영상에서 알아볼 수 있어야하는 거죠.
유리 같은 영상이 하나가 있어도 그거를 쪼개서, 분할해서 유포하기도 하니까. 그걸 딱 알아봐야 돼. 올릴 때 섬네일도 다 다르게 하죠. - P54
쪼이 그냥 이런 게 있구나,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데, 그 와중에도 가해자들은 그 충격을 더 업데이트를 해줘요. 신기해. 가해자들이 진짜 성실해, 7번방 사건 때 가해자 중 한 명이 신상 공개가 됐잖아요. 보자마자 제가 "어? 나걔 아는데!"이랬거든요. 심지어 그 사람이 유포한 피해자 중에선 제가 지원한 피해자가 없었는데도요. 어떻게 알았냐면, 제가 입사하고 나서부터 그 사람 촬영물을 계속 마주친 거예요. 다른 피해자를 지원하면서도요. 일반 사람한테는 블로그 연재하는 것도 되게 힘들잖아요. 그 사람은 너무 장시간 꾸준히 업로드해서 제 기억에 남아 있는 거예요. 내가 따라잡아야겠다, 내가 저렇게 꾸준히 피해 지원을해야지, 그래야 저들을 조금이라도 이길 수 있지. 저들은 항상 나를 초월하는 게 있어. 맨날 충격받고 배워요. - P69
담 이걸 만드는 사람이 있다. 그게 누구다, 자주 말해야겠다고 느껴요. 이미지를 잘 만들수록, 이미지를 연출하는 사람이 최초 기획이나 취지에 대한 이해도가높을수록 결과물이 매끄럽잖아요. 메시지와 이미지간에 괴리가 적으면 연출자의 존재가 잘 안 보이더라고요. 기획을 한 사람이 있고 연출해서 찍은 사람이있는데, 그런 협업의 과정은 영상이 양질일수록 오히려 티가 안 나게 되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지난 대선때 윤석열 캠프에서 "민지가 해달라는데 한번 좀 해보자" 같은 카피를 쓰면, 야 저거는 누가 대신 써줬네, 하고 바로 알잖아요. 윤석열 후보가 청년 세대를 이해하는 수준과 저런 친근해 보이려는 카피 사이에 괴리가 너무 크니까 설계자의 존재를, 그림을 짠 사람의 존재를 알게 되는 거죠. 반대로 그림을 잘 만들수록 만든 사람의 존재는 좀 잊히게 돼요. - P97
유리 쪽방촌도 국토교통위 소속 의원으로서의 문제의식을가지고 간 거죠?
준짱 네, 쪽방촌은 최저 주거기준 이하의 생활공간이기 때문에법의 적용을 받지 않아요. 쪽방촌도 법의 적용을 받을 수 있게 바뀌어야 하고요. 그리고 쪽방촌이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되면 많은 경우 세입자가 혜택을 못 받잖아요. 그래서 세입자가 안전하게 이주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재개발 관련 법안도 필요하죠. 또 그런 낡은 집에는 쥐가 엄청 많거든요. 쪽방촌에는 가난한 사람이 많고 경제활동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많은데, 대부분 장애나 질병이 있기 때문이에요. 아까 놀이터에 모였다던 분들은 어느 정도 거동이 가능하니까 나올 수 있었던거고요. 간담회에서 한 어르신이 마이크를 잡고 이런 얘기를 하셨어요. "여기 오늘 못 나온 사람 중에, 저 방에 누워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 사람들이 말을 못 하니까 내가 합니다. 여기 쥐가 많은데, 그 사람은 쥐를 내쫓지도 못합니다. 쥐가 집에 돌아다니는데 같이 삽니다. 그래도 좀위생적인 환경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분은 자기 얘기가 아니라 옆집 사람, 옆방 사람 얘기를 하러 나오신 거예요. 그걸 보면서 도달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는 또 다른 수많은 공간을 생각했고요. 그때 느낀 걸 뭐라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그게 저의 직업이어서, 그런 이야기를 다룰 수 있어서 좋아요. - P108
준짱 삶이 팍팍해질수록 싸우는 건 좀 그만 보고 싶죠. 그래서 어느 정도는 지지자분들에게 긍정적인 감정을 드릴 필요가 있더라고요. 이 정치인을 지지해서 얻는 장점, 이 정치인이 안겨줄 수 있는 어떤 따뜻한 경험, 위로나 잠시나마 웃을 수 있는 순간.ㅣ••• 이런 걸 드리는 것도 일이더라고요, 알고 보니까.
유리 ‘우리 의원이 이렇게 귀엽습니다‘ 하는.
담 사실상 가치의 연예인••• 국회의원은 가치가 상품인 연예인이라고 봐야겠네요.
준짱 맞아, 맞아, 아무리 의원실에서 정책을 잘 만들고 기획을 잘해도 플레이어가 그걸 잘 받아내지 못하면 안 돼요.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고 우리 머릿속에 각인이 된 정치인들은 어찌됐든지 간에 플레이어로서의 역할을 잘하고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거라고 생각해요. 훌륭한 아이디어를 내도 플레이어와 잘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흥행하기 어렵거든요. - P110
준짱 똥 싸는 건 너무 쉬운데 치우는 건 생각 많이 해야 돼요. 어디에 똥을 안 묻히고 이걸 쓸어 담을지.
담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더욱 양보해서는 안 되는일이 있다는 말이 사무쳐요. 내가 언제는 당사자이고 언제는 연대자인지 무 자르듯 경계를 그을 수 있는 것은 아니죠. 그렇기 때문에 저는 오히려 우리가대부분의 상황에서 피해 당사자가 아니라 연대자이고, 심지어는 가해자에 더 가까울 거라는 사실을 상기하려고 노력해요. 연대자의 위치에 선 사람은 ‘나는 내 일도 아닌데도 대의에 복무하고 있어‘라는 알량한 자기 만족감이나 시혜적인 태도를 경계하고 운동에 방해나 되지 않을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해야하죠. 어떤 차원에서 구조적 폭력의 피해자였다 하더라도 그 위치가 영속적인 것도 아니고, 한 차원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다른 차원에서는 얼마든지 가해자일 수도 있고요. 그래서 그런 날이 있는 것 같아요. 도저히 참아지지 않는 날. 언제까지 피해자의 자리에만 머무를 건데? 대체 어디까지 스스로의 사정을 봐줄 건데? 언제까지 우리가 힘을 가지지 못했음을 연민하기만 하고,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힘에 대해서는 성찰하지 않을 작정인데? 그런 질문이 끓어오르는 날이요. - P134
발달장애가 있는 동생 혜정, 혜정과 함께 살기를 원하는 언니 혜영의 탈시설 과정을 담은 그 영화에는 혜정이 "나중에"라는 말을 너무 많이 들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나중이 언제인지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정치인 장혜영의 시작은 혹시 혜정이 아니었을까 감히 짐작해본다.
나는 가끔 장혜영 의원을 걱정했다. 위풍당당한 모습, 친근한 모습, 날아다니는(?) 모습을 봤으면서도 울 것 같은 모습, 피로해 보이는 모습을 더 오래 기억했다. 혜정의 오늘을 사랑하는사람으로서 차별금지법 "나중에", 장애인 이동권 "나중에", 기후위기 대응 "나중에"와 같은 수많은 "나중에"와 맞서는 그의 마음이 신경 쓰여서 그랬다. 어떤 날엔 현장이 기가 막히고 업무가 사무쳤던 탓에, 어떤 날엔 얼굴과 이름을 걸고 일하는 여자들이 늘 감당하고 있는 모욕 때문에, 어떤 날엔 그냥 너무 슬퍼서 눈물이 나기도 하는 마음. 그런 장혜영의 마음이 나약함이나 가식으로 해석되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순간이 있어야 한다고 나는 믿었다. - P145
유리 (웃음) 아까부터 말씀하시는 게 한결같아요. 한 치의 문제도 없는 발언.
혜영 어디에서 누가 바로 받아써도 괜찮은, 마침표까지 찍혀 있는 문장으로 말하기 위해 노력하는 습관이 있어요.
담. 진짜 신기해요. 저는 혜영 님의 말하기에 전율할 때가 많아요. 스크립트가 그대로 나온달까요. 저 사람의 말은 통째로 글이다.
혜영 예, 노력하고 있습니다.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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