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면 이성적 추론 능력을 가진 개인도 한 가지에서만큼은 뛰어난 능력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어떤 입장(보통 직관적인 이유로 갖게 되는 입장)을 갖게 되면 그것을 뒷받침할 증거를잘도 찾아낸다는 것이다. 개개인이 이성적 추론을 하는 과정에서 선하고 개방적이고 무엇보다 진실을 중시할 거라고 기대한다면 오산이다. 개인적 이해나 평판의 문제가 얽힌 경우에는 특히 더 그렇다. 그러나 그런 개인을 모아 저마다 제자리를 찾아줄 수 있다면, 즉 일부가 추론 능력을 활용해 다른 사람의 주장을 꺾는다 해도 개개인모두가 공동의 연대 혹은 공동의 운명을 느껴 서로가 적정선을 지키며 상호작용을 해나갈 수 있다면, 결국에 그 집단에서는 훌륭한 추론 능력이 사회 체계의 창발성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진실 찾기를 목표로 하거나(첩보 기관이나 과학계) 훌륭한 공공 정책을 입안해야 하는(입법부나 자문위원회) 집단 혹은 기관에서 지식과 이데올로기의 다양성을 중요시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나아가 우리의 목표가 단순히 훌륭한 사고가 아니라 훌륭한 행동이라면, 우리는 더더욱 합리주의를 손에서 놓고 직관주의를 끌어안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 P180

• 우리는 남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강박적일 정도로 염려한다. 물론 이런 염려는 상당 부분 무의식적으로 일어나기에 우리는 이를 미처 눈치채지 못한다.
• 의식적 추론은 마치 대통령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공보관처럼우리의 모든 입장을 자동적으로 정당화하는 역할을 한다.
• 우리 안에 있는 공보관의 도움을 받아 종종 우리는 거짓말을 하고 남을 속이기도 한다. 그러고 나서는 자기 잘못을 너무도 잘덮어 가리기 때문에 심지어 우리 자신조차도 스스로가 잘못이없다고 믿는다.
• 이성적 추론 능력은 우리가 원하는 결론이 있으면 갖은 수를 써서 그것에 도달하게 해준다. 우리는 무엇을 믿고 싶을 때는 "내가 이것을 믿어도 될까?"라고 묻고, 무엇을 믿고 싶지 않을 때는 "내가 이것을 믿어야만 하나?"라고 묻는다.
• 도덕이나 정치 문제와 관련해 우리는 개인보다 집단을 염두에두고 판단을 내릴 때가 많다. 우리가 팀을 지지하고 팀에 헌신하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는 이성적 추론 능력을 활용한다. - P181

WEIRD권 사람들에게서는 그들만의 고유한 특성이 여럿 발견되는데, 다음과 같은 간단한 일반화 속에서 포착해볼 수 있다. 즉, WEIRD의 특성이 강한 사람일수록 이 세상이 관계보다는 별개의 사물로 가득 차 있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서양인의 자아개념이 동아시아인에 비해 더 독립적이고 자율적이라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진 사실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에게 "나는 ~이다(혹은 ~하다)"라는형식으로 문장 20개를 작성하라고 하면, 미국인은 자신이 가진 내적인 심리 특성 (행복하다. 외향적이다. 재즈에 관심이 있다)을 열거할 가능성이 더 높은 반면, 동아시아인들은 자신의 역할과 관계 (아들이다, 남편이다. 후지쓰의 직원이다)를 열거할 가능성이 더 높다.
이러한 차이는 피상적 차원에만 그치지 않으니, 심지어 시각적 인식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심리학 과제 중 ‘도형 안에 선 긋기‘라는 것이 있는데, 여기 들어가면 피험자들은 먼저 내부에 선이 하나 그어진 정사각형을 보게 된다. 그러고 나서 페이지를 넘기면 원래 정사각형보다 크거나 작은 정사각형이 있으나 안은 텅 비어 있다. 그 안에다 이전 페이지의 도형과 똑같은 식으로 선을 긋는 것이 피험자의 과제인데, 절대치를 맞추거나(즉, 새로운 도형의 크기는 무시하고 선의 길이를 똑같이 몇 센티미터로 맞춘다) 혹은 상대치를 맞추는 식이다(도형 크기에 따라 길이 비율을 맞춘다). 이 과제를 수행해보면 서양인들, 특히 미국인들은 절대치를 맞추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인다. 이들의 눈에는 선이 독립적 사물로 인식되고, 따라서 그것이 별개로 기억에 저장되기때문이다. 반대로 동아시아인들은 상대치를 맞추는 과제에 미국인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보인다. 동아시아인들은 자동적으로 부분 간의 관계를 먼저 인식하고 기억하기 때문이다."
인식에 이런 식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사고방식에도 차이가 나타난다.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전체적 사고를 하는 데 반해 (전체 맥락및 부분 간의 관계를 보는 사고방식), WEIRD권 사람들은 좀 더 분석적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초점이 되는 대상을 해당 문맥에서 따로 떼어내 그것을 어떤 범주에 집어넣은 후, 그 범주에 적용되는 사실은 그 대상에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보는 사고방식).‘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칸트와 밀 이래로 WEIRD 권 철학자들이 왜 대체로 개인주의적이고 원칙 지향적이고 보편주의적인 도덕 체계를 내놓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자율적 개인들이 모인 사회를 다스리려면 그런 도덕이 필요할 수밖에없는 것이다. - P190

그러나 비WEIRD권 사회에 살면서 관계 · 맥락·집단·제도를 인식할 확률이 높은 사람의 경우에는 개인을 보호하는 일에만 그렇게 초점을 맞추지는 않을 것이다. 즉, 이때에는 좀 더 사회중심적인 도덕성을 가지게 되는데, 개인들의 요구보다 집단과 기관의 요구를 우선시하는 경우가 많아진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도덕적 관심사가 피해와 공평성의 원칙만 바탕으로 해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피해와 공평성 말고도 사람들이 염두에 두는 도덕적 관심사가 더 있을 것은 물론, 이런 사회는 사람들을 하나로 단결시킬 도덕적 덕목도 추가로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러한 관심사와 덕목들이 바로 2부에서 다뤄진다. 그리고 그와관련한 도덕심리학의 두 번째 원칙이 나오는데, "도덕성은 단순히 피해와 공평성 차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 P192

그러나 그중에서도 특히 나의 관심을 사로잡았던 것은 슈웨더가 오리사에서 연구한 내용을 토대로 하여 발전시킨 새로운 도덕성 이론이었다(그 내용은 1장에서 설명한 바 있다). 슈웨더는 그 연구를 발표하고 나서 동료들과 함께 그동안 모은 600여 개의 인터뷰 기록을 계속분석했다. 그 결과 도덕의 주제가 크게 세 가지 군(群)으로 나뉜다는것을 알아낸 그들은 거기에 각각 자율성의 윤리, 공동체의 윤리, 신성함의 윤리라는 이름을 붙였다." 각 윤리는 개개인이 무엇을 진정 중요한 것으로 여기느냐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 - P194

자율성의 윤리에서는 사람들이 더마다의 욕구• 필요• 애호를 지닌 자율적 개인이라는 점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그리고 그런 욕구• 필요• 애호를 자신이 적절하다고 여기는 방식에 따라 자유롭게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여긴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이 모인 사회에서는 인권·자유·정의 같은 도덕 개념이 발달하는데, 그래야 사람들이서로의 계획에 큰 타격을 주지 않고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주의적 사회에서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윤리가 바로 이 자율성의 윤리이다. 자율성의 윤리는 존 스튜어트 밀이나 피터 싱어(Peter Singer) 같은 공리주의자들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물론(이들은인간의 복리를 증진시킬 수 있을 때에만 정의나 인권의 가치를 인정한다)."칸트나 콜버그 같은 의무론자들의 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이들은 전체의복리가 손상되는 한이 있더라도 정의와 인권이 지켜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서양의 일상적인 사회를 걸어 나와 보면, 사람들이 쓰는 도덕적 언어에는 두 가지가 더 있음을 알게 된다. 그중 하나가 공동체의 윤리인데 여기에 바탕이 되는 생각은, 사람이란 가족·팀·군대·회사·부족·나라 등 자신보다 더 큰 실체의 구성원이라는 점이다. 자신보다 큰 이 실체들은 그것을 구성하는 개개인의 총합을 넘어선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존재하는 것이자 진정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것들을 반드시 지켜내야만 한다. 그리고 이 실체 내에서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에게 할당된 역할을 수행해내야 할 의무가 있다. 이 세상에 의무 · 위계질서·공경·명성 · 애국심 등의 도덕적 개념이 발달한 사회가 많은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서양에서처럼 자기 삶을 스스로 설계해야 한다거나 자기만의 목적을 추구해야 한다고 고집하면 이기적이고 위험한 사람으로 비친다.
이러한 개인주의는 분명 탄탄히 짜인 사회 망을 느슨하게 만들어 모든 사람이 의지하고 있는 사회제도와 공동의 실체를 허물어뜨리고말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신성함의 윤리에 바탕이 되는 생각은 사람이란 한순간 머물다 가는 존재로, 몸은 그릇이요 그 안에는 신성한 영혼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인간을 단순히 의식을 좀 더 갖춘 동물로만 여기지 않는다. 인간은 신의 아들이며, 따라서 그에 맞는 행동을 보여주어야 한다. 몸은 놀이터가 아니라 신전인 것이다. 따라서 어떤 남자가 생닭을 가져다 성행위를 할 경우, 설령 그 일이 어떤피해도 끼치지 않고 그 누구의 인권도 침해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런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신의 질을 떨어뜨리는 일이자 창조주를 욕되게 하는 일이며, 우주의 신성한 질서를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거룩함과 죄악, 순결과 오염, 고결과 타락등의 도덕적 개념을 발달시키는 사회가 많은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통속적인 서구 사회에서처럼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것이 방탕이자 향락, 나아가 인간의 저급한 본능에 대한 칭송과 다름없다. - P195

더불어 나는 슈웨더의 이론을 가져다 (내가 "이유를 말해줄 수 있어요?"라고 물었을 때) 사람들이 내놨던 정당화 근거들을 분석해보았다. 이론은 기막히게 들어맞았다. 펜실베이니아 대학 학생들은 거의 자율성의 윤리만을 도덕성의 언어로 삼아 이야기한 반면, 다른 집단(특히 노동자 계층 집단) 사람들은 공동체의 윤리를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사용하고 있었고, 신성함의 윤리도 좀 더 이용하고 있었다." - P197

그보다 이곳의 도덕적 세계에서는 개인보다 가족이 사회의 기본단위가 된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더불어 이곳 사람들은 한 무리의 큰 가족(하인도 포함하여)에 속한 채 서로가 서로에게 무척이나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었다. 이런 세상에서는 평등이나 개인의 자율성 같은 것은 떠받들어야 할 가치가 못 되었다. 그보다는 노인·신·손님을 깍듯이 모시고, 아랫사람을 보호해주며, 자기 역할에주어진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공동체의 윤리가 무엇인지는 슈웨더의 책을 통해 머리로는 다 이해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난생처음 그것을 몸으로 실감한 것이 인도에서였다. 사회 구성원의 의무를 강조하고, 노인을 공경하고, 집단에 봉사하며, 자신의 욕구를 부정하는 도덕적 규약도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음을 나는 알게 되었다. 물론 볼썽사나운 부분도 없지는 않았다. 더러 권력자라고 해서 거드름을 피우거나 자기 힘을 남용하는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아랫사람(특히 여자)은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윗사람 마음이 죽 끓듯 바뀌면 여지없이 저지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곳에 와서야 나는 처음으로 고향의 도덕성에서 발을 빼볼 수 있었다. 그 발을 인도에 디디고 공동체의 윤리라는 관점에서 자율성의 윤리를 바라보니, 이제 자율성의 윤리에는 개인주의가 너무 지나치고 자기에게만 초점을 맞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인도에 머물렀던 세 달 동안 나는 미국인을 만날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 시카고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올랐을 때 누군가 커다란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말하는 투를보니 영락없는 미국인이었다. "이봐요, 당신이 저 사람한테 말좀해줘요. 이 짐칸은 내 자리 쪽에 있으니까. 이걸 쓸 권리는 나한테 있다고." 순간 내가 다 민망했다. - P200

당파심에 의한 분노에서 해방되자 홀가분한 것이 참 기분이 좋았다. 더구나 그렇게 화가 나지 않으니 옛날처럼 의분에 차서 어떻게든 "우리가 옳고 그들은 틀렸어"라고 결론 내리지 않게 되었다. 이제 내게는 새로운 도덕 매트릭스를 탐험할 여유가 생겼고, 그것들 하나하나도 나름의 지적 전통에 의해 지탱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뭔가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한 기분이었다.
1991년 슈웨더는 문화심리학이 가진 깨달음의 힘을 다음과 같은글로 표현한 바 있다.

그러나 타인이 품은 신념이라도 우리에게 유용한 부분이 있다. 사물에관한 그들의 신념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순간, 우리의 합리성 안에 잠자고 있던 여러 가능성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난생처음, 아니 다시한번, 그런 신념들이 가진 힘을 몸소 느끼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똑같이 한 가지 ‘배경막‘만 쳐 있지는 않은 것이다. 애초 우리 안에는 많은 것이 들어 있다. - P212

도덕 매트릭스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지만, 그것은 다른 매트릭스가 가진 논리(심지어 다른 매트릭스의 존재까지도)를 못 보게하는 면이 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세상에 하나 이상의 도덕적 진실이 있다는 사실을 헤아리는 데 무척이나 어려움을 느낀다. 사람을 판단하거나 사회를 운영하는 정당한 틀도 하나 이상있을 수 있다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이다.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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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났을 때부터 거의 모든 이점을 누려온 벤저민 래스크가 결코 가질 수 없었던 몇 안 되는 특권 중 하나는 영웅적으로 부상할 특권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회복력과 끈기에 관한 것도 아니고, 티끌로 황금의 운명을 만들어낸 불굴의 의지에 관한 것도 아니었다. - P13

아버지의 사업체를 매수할 사람을 구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벤저민은 버지니아주 소재의 제조사와 영국의 무역회사가 서로 입찰 경쟁을 벌이도록 부추겼다. 과거의 기억 중 이 부분과는 거리를두고 싶었기에, 영국 회사가 이겨 담배회사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된 것을 보니 즐거웠다. 하지만 정말로 큰 충족감을 주었던건, 이 매각을 통해 얻은 이윤으로 더 높은 차원에서 작업하고, 새로운 수준의 위험을 관리하고, 과거에는 고려할 수 없었던 장기 거래에 돈을 투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벤저민의 부가 증가하는 것과 정비례하여 그의 소유물은 줄어드는 걸보고 혼란스러워했다. 벤저민은 웨스트 17번가의 브라운스톤 저택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해 남아 있던 가족의 소유물 전부를 팔아 치웠다. 옷과 서류는 여행가방 두 개에 딱 들어갔고, 여행가방은 그가 스위트룸에 묵고 있는 왜그스태프호텔로 보내졌다.
벤저민은 돈의 뒤틀림에 매료됐다-돈을 뒤틀면, 돈이 자기 꼬리를 억지로 먹도록 만들 수 있었다. 투기의 고립되고도 자족적인 성질은 그의 성격과 잘 맞았고, 경이감의 원천이자 그 자체로 목표였다. 벌어들인 돈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또 그 돈으로 무엇을 할수 있는지와는 상관이 없었다. 사치란 천박한 부담이었다.  - P23

 누군가에게 질문을 받았다면, 베저민은 금융계에 끌린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하기를 어려워했을 것이다. 금융계의 복잡성이 한 가지 이유였던 건 사실이지만, 그 밖에도 벤저민에게 자본은 균 하나 없는 생물로 보였다는 이유도 있었다. 자본은 움직이고 먹고 자라고 새끼를 치고 병들며 죽을 수도 있지만, 깨끗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벤저민에게 이 점은 더욱 분명해졌다. 투기의 규모가 커질수록 벤저민은 구체적인 세부 사항과 멀어졌다. 그는 단 한 장의 지폐도 만질 필요가 없었으며, 자신의 거래로 영향을 받는 사물이나 사람들과도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었다. 그가 해야 하는 일은 생각하고 말하는 것, 그리고 어쩌면 글을 쓰는것이 전부였다. 그러면 자본이라는 살아 있는 생물이 움직이기 시작해 아름다운 패턴을 그리며 점점 더 추상적인 영역으로 들어갔다. 가끔은 벤저민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자본 자신의 식욕을 따라가기도 했다. 이 점이 그 생명체가 자유의지를 행사하려 한다는 게 벤저민에게 또하나의 기쁨을 주었다. 벤저민은 그 생명체가 실망감을 안겨줄 때조차 그놈에게 감탄했고, 그놈을 이해했다. - P24

저택은 파티의 소음과 셸던이 해둔 번쩍번쩍한 장식으로부터 멀어질수록 달라져갔다. 헬렌은 질서정연하고 신중한 세상으로 들어갔다. 그곳의 침묵에는 침착한 자신감이 있었다. 마치 조금만 노력하면 침묵이 언제나 이길 수 있다는 걸 아는 듯했다. 공기에 배어있는 미약한 서늘함은 향기롭기도 했다. 헬렌이 인상적이라고 느낀건 네덜란드 유화나 프랑스식 샹들리에가 그리는 별자리, 모든 모퉁이마다 버섯처럼 피어나는 중국 도자기 같은 부유함의 뚜렷한 증거가 아니었다. 그녀는 보다 사소한 것에 감명받았다. 문고리. 어둑하고 우묵한 공간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의자, 소파와 그 주변의 빈공간. 그 모든 것이 존재감을 드러내며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그것들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물건이었지만 진짜 물건이기도 했다. 쓰레기투성이 세상이 망가진 사본을 만들 때 참조한 진품들. - P64

평생 자족적으로 살아왔다는 점을 자랑으로 삼던 사람이 문득세상을 완전하게 만드는 건 친밀함이라는 걸 깨달으면, 친밀함은참을 수 없는 짐이 될 수 있다. 축복을 발견하면 그 축복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게 되니 말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에게 과연 행복을 다른 사람에게 맡길 권리가 있는지 의심한다. 사랑하는 상대가 자신의 숭배를 지루하다고 느낄지 모른다고 걱정한다. 상대에 대한 갈망이 그들로서는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드러났을지 몰라 두려워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모든 의문과 걱정의 무게에 허리가 굽어져 자신의 내면을 보게 되고, 동반자 관계에서 새로 발견한 기쁨 탓에 이제는 떨쳐버렸다고 생각했던 고독을 더욱 깊이 표현하게 된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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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영  대중을 만나기 위한 다른 캐릭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코미디 워크숍도 가본 거예요.
이상적인 세상에서는, 정치인은 그냥 만들어야 하는 법만들기만 하면 되고, 사람들은 그걸 알아주겠죠. 그런데 현실에서는 어떤 정치인이 청년이고, 여성이고, 소수 정당 소속이고, 게다가 약자 관련 이슈를 다룬다고 하면 그 자체로 놀잇감이 되기 쉬워요. 무슨 말을 하더라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거나, 무시할 준비가 되어 있거나, 모욕할 준비가되어 있거나, 아주 극소수의 청중들만 모이게 되죠. - P158

혜영  누군가를 미워하려면 정성을 다해야 되지 않나요? 그 사람의 디테일을 알아야 미움이 솟아나니까요. 예를 들면 전가족은 미워할 수 있어요. 왜냐면 가족의 가장 미운 점을 속속들이 잘 아니까요. 거기에 대해서 두 시간 동안 떠들 수 있을정도죠. 근데 트위터에 있는 사람들을 그렇게까지 정성껏미워할 수는 없어요. 그만큼 제 마음속 미움이 크지는 않아요. 대신에 악의를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가 좀 더 어려운부분인 것 같아요.
그래서 내 안에 또 다른 캐릭터가 생기는 것 같아요. 공적인 나의 캐릭터.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 페르소나가 생기는 과정에 있어요. 선의만으로 이루어진 마음은 악의를 만날 때 너무 부서지기 쉽고, 배반당했을 때 상처를 너무 크게입잖아요. 그래서 과거와 다르게 공적인 선의의 차원에서 페르소나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 같기는 해요. - P160

유리  아직 많이 남았어요. n번방 방지법 입법했을 때도요.
n번방 방지법에 따라 카카오톡 등 해당 법의 대상 사업자가 불법 촬영물을 필터링하도록 했는데, 당시 쟁점이 온통 기술적인 문제에 쏠려 있었어요. 필터링이 뭐 하는 거냐, 혹시 위험한 기술 아니냐, 이런 걸 가지고 갑론을박했지, 이 법이 왜 필요한지, 그 이유는 신기할 정도로 외면되었거든요.
가해자 처벌을 엄하게 하면 되지, 기술적 차단을 왜 하려고 하냐고 따지는 사람들이 있죠. 재판하는 동안에도 피해자의 불법 촬영물은 계속 유포되고 있으니까 그렇죠! 그런 사람들은 불법으로 촬영하고 유포하고 시청하는 가해자 수가 몇 명인지는 알까요? 저는 거꾸로 따지고 싶어요. 어차피 다른 플랫폼으로도 유포되는데 왜 카톡 오픈채팅방에 굳이 그런 기술을 적용하냐고요? 불법 촬영물이 유통되는 오픈채팅방이 엄청나게 많으니까 필터링을 하죠! 카톡에도 n번방 같은 게 존재했으니까요!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이라도 막아야지 피해 규모를 줄일 수 있으니까요! (격앙됨)
근데 그때 혜영 님이 라디오에 나와서 이런 발언을했어요. ‘완벽한 n번방 방지법을 만들고 싶어 한다면 대한민국은 아마 그런 법을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마주하는 기술적이고 물리적인 환경이 끊임없이 달라지기 때문에 계속해서 새로운 성범죄가 등장하고 있고, 그런 현실을 조금이라도 따라잡기 위해 입법부가 노력하는 것이다. 피해자의 관점에서 이법이 입법됐을 때 얼마나 안심할 수 있을지를 조금 생각해봐주시면 좋겠다. 이 법이 모든 인터넷에서의 성착취 피해 영상을 막아주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적어도 특정한 규모의 온라인 공간에서는 나의 피해 영상이 올라가지 않겠구나, 라고 하는 데서 얼마나 안심할 수 있을지 생각해봐주면 좋겠다.‘ - P175

무모 담 님의 계기는 뭐였어요?

담  사실 저는 기르던 식물 때문에 비거니즘을 시작했거든요. ‘괴마옥‘이라는 선인장과 식물이었어요. ‘옥자‘
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열심히 키웠는데, 애정이 과했는지 과습이 온 거예요. 선인장이 물을 싫어하잖아요. 물을 너무 많이 줘서, 어느 순간부터 선인장이 무르기 시작하더라고요. 살리고 싶어서 사이버 식물병원에 문의를 해보니까 이미 상한 밑동을 잘라내고 남은 윗부분을 말렸다가 다시 심으면 괜찮을 수도 있다는 거예요.

무모  네.

담. 그래서 제가 옥자를 뽑아가지고 칼로 밑동을 자르는데, 기분이 너무 이상한 거예요. (웃음)

무모  (웃으며 끄덕끄덕)

담. 맨날 다른 채소, 그러니까 감자, 당근, 양파 같은 거는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썰어서 음식을 만들었으면서도, ‘옥자는 나한테 채소는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모 같은 식물인데도요•••.

담 네. 그때부터 약간 고기 먹기가 어려워졌던 것 같아요. 뭘 먹을지 말지가 너무 자의적인 기준에 의해 정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 P210

무모  예방적 살처분을 최대 3킬로미터 이내라는 광대한 범위까지 시행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는 걸로 알고 있어요.
일본을 비롯해서 미국 등 다른 나라의 경우는 전염병이 발생한 농가에서만 살처분을 실시하도록 되어 있어요. 역학조사상으로 위험군에 속하지만 전염병이 발생하지 않은 농가에서는 정밀검사 후에 문제가 있을 때만 살처분을 시행하고요. 네덜란드는 방역 정책이 굉장히 강력하다고 알려져 있는데도 1킬로미터 이내 살처분 정책을 가지고 있고요. 독일에서도 살처분 범위 설정은 굉장히 신중하게 이루어지거든요. 사육 밀집도 등의 요소를 꼼꼼히 고려해서요.

유리  돼지의 목적이 건강한 음식이기 때문에, 음식이라서더 철저하게 ‘예방‘하는 것도 있겠죠? 위생적인 고기를 만드는 게 중요하니까.

담  실적 내기에 급급한 행정의 문제도 있는 것 같아요.
2021년 12월에 동물권 행동 카라가 주관한 가축전염병 예방법 개정 국회 토론회 자료집을 보면 현재의예방적 살처분 정책을 ‘실패한 맞불 작전‘에 비유하는부분이 있었어요. 산불을 진화하기 위해 주변의 모든산을 맞불로 태워버린 다음 산불 진압에 성공했다고 말해도 되냐는 지적이었죠. 그러면서 ‘가축방역이란가축을 건강하게 살리는 것이 목적이지 건강한 가축을 과잉 살처분하여 방역 행정 성과 실적을 쌓으라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비판하고 있어요. 현재의 가축전염병 예방법은 동물을 소모품으로만 다룰 뿐 동물의 생명과 건강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현행법에 ‘가축의 건강 유지‘를 목적으로 추가하라는 개정안도 제안되었고요. -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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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그래요. 너무 뽑히고 싶어서 당사자성을 막 어필했어요. 나는 빈곤 당사자다! 그렇게 들어갔는데 예상보다 더엄청난 곳이었어요. 품을 많이 들여야 했고, 긴장도 많이 해야 했고,
저는 교사가 일방적으로 가르침을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신입교사 오티에서 담당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야학이라는 공간은 누가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고 가르침을 받는 곳이다. 학생과 교사가 상호작용을 하는 곳이다." 그래서 내가잘못 알았구나, 내가 너무 정규교육의 정상성에 갇힌 수업을 하려고 했구나, 그런 생각도 했어요.

담 - 근데 물론 옛날에 쓴 문장이 창피할 수도 있고, 목적이 있어서 쓰는 글은 유치해지기도 하지만••• 빈곤이우리한테 해준 게 없는데 그런 경우에라도 스펙이 되면 좋잖아요. 빈곤 팔아서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좋은것 같은데요? 잘 쓰셨을 것 같아요. - P37

여름 (웃음) 연대... 어려워요. 예전에 인천 옐로하우스 (성매매집결지)에 제가 연대를 하러 갔었어요. 근데 제가 생각했던거하고 너무나 다른 거예요. 저는 옐로하우스 연대 요청을온라인에서 접했는데, 보통 활동가들이 연대 활동 다녀왔습니다, 하고 올리는 게시글을 보면 내부에서 갈등이 많지 않아 보이지만, 막상 현장에 가보니까 되게 삭막하고 모인 사람들끼리도 의견 충돌이 은근히 많았어요, 싸움이 번질 것같은 긴장이 계속됐죠. 연대자랑 당사자랑 의견이 다르다보니 언쟁이 붙기도 하고, 우리 앞으로 보지 말자, 이러고 헤어지지만 어차피 법원에서 또 만나야 되거든요. 그러면 법원 앞에서 또 싸우고, 그런 걸 보면서 느꼈어요. 연대라는 건 아름답지 않은 거구나. 엄청 싸우면서 동행하는 거구나•••.

담 연대 과정에서 입장의 차이가 있을 때 서로를 피하지않고서 어떻게 싸울 수 있을지가 굉장히 까다로운 것같아요. - P39

쪼이와는 강단에서 처음 만났다. 나는 불법 촬영물 삭제 방법을 강의하는 강사였고, 쪼이는앞으로 불법 촬영물 삭제를 업으로 삼고자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강사 유리는 아직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상태다. 강의 경험이 전무한 데다 자신이 불법 촬영물 삭제 업무를 한다고 어디 가서 제대로 얘기해본 적조차 없다. 검정색 미니스커트에 물망초색 니트를 입고 때가 탄 흰색 스니커즈를 신은 발로 바닥을 톡톡 차는 모습이 강의실의 중후한 분위기에 비해 파격적으로 어리고 불안정해 보인다. 미래의 유리는 바지 정장에 로퍼를신고 전국을 누비며 유창하게 강의를 이어나가는 활동가가 되지만, 그날의 유리는 모든 게 어설프다. 심지어 불법 촬영물 소비 양태를 설명하다가 갑자기 자기 감정을 못 이기고 울기 시작한다.
그때 파인애플 모양 머리 스타일을 한 학생 쪼이가 휴지를 뜯어준다. 강의 내내 앞줄에서 따스한 표정으로 호응해주었던 고마운 학생이다. 유리는 휴지를 받으며 쪼이를 본다. 쪼이의 눈 안에 태양처럼 무서운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다. 두 사람은 곧 다시 만나게 된다. 미래의 유리와 미래의 쪼이와 미래의 여러 동료들이 협동해서 해결 방안을 고심해야 할 심각한 디지털성폭력 사건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미래의 쪼이는 삭발을 하고, 수많은 피해자의 영상을 삭제한다. 직접 불법 촬영물 삭제 방법을 강의하기도 하고, 다른 실무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삭제 보고서도 발간한다.
매일매일 새로 태어나는 활동가들이 한 치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걸어간다. 아무도아무것도 모르는 순간에도 서로 만나고 헤어지면서. 그 치열했던 시간이 훗날 식탁에서 밥을삼키며 소화 가능한 이야기가 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 P50

담 숨은그림찾기를 잘해야 한다는 건, 해당 파일이 인터넷상에 하나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인가요?

쪼이 그것도 있고요. 예를 들어서 유튜브 홈페이지를 생각해보시면, 여러 영상이 한 화면에 쫙 깔려 있잖아요. 유포되는 사이트 화면도 그런 식인데, 그중에서 제일 내 피해자 같은 영상을 눈으로 보고 찾아야 되는 거죠.
말씀하신 것도 맞는 게, 보통 한 피해자당 피해 촬영물이한 개만 있을 때가 거의 없거든요. 알고 보니 그 사람 영상이열개, 스무 개, 몇백 개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지원 요청을하는 분들은 영상이 한 개만 있다고 생각을 하니까 한 개만 보내주세요. 그러면 제가 그 영상을 보고 이 사람의 다른 영상도 다 찾아야 해요. 이 사람의 인상이라든지••• 모습이나 특징 같은 걸 기억했다가 다른 영상에서 알아볼 수 있어야하는 거죠.

유리 같은 영상이 하나가 있어도 그거를 쪼개서, 분할해서 유포하기도 하니까. 그걸 딱 알아봐야 돼. 올릴 때 섬네일도 다 다르게 하죠. - P54

쪼이 그냥 이런 게 있구나,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데, 그 와중에도 가해자들은 그 충격을 더 업데이트를 해줘요. 신기해. 가해자들이 진짜 성실해, 7번방 사건 때 가해자 중 한 명이 신상 공개가 됐잖아요. 보자마자 제가 "어? 나걔 아는데!"이랬거든요. 심지어 그 사람이 유포한 피해자 중에선 제가 지원한 피해자가 없었는데도요. 어떻게 알았냐면, 제가 입사하고 나서부터 그 사람 촬영물을 계속 마주친 거예요. 다른 피해자를 지원하면서도요. 일반 사람한테는 블로그 연재하는 것도 되게 힘들잖아요. 그 사람은 너무 장시간 꾸준히 업로드해서 제 기억에 남아 있는 거예요.
내가 따라잡아야겠다, 내가 저렇게 꾸준히 피해 지원을해야지, 그래야 저들을 조금이라도 이길 수 있지. 저들은 항상 나를 초월하는 게 있어. 맨날 충격받고 배워요. - P69

담 이걸 만드는 사람이 있다. 그게 누구다, 자주 말해야겠다고 느껴요. 이미지를 잘 만들수록, 이미지를 연출하는 사람이 최초 기획이나 취지에 대한 이해도가높을수록 결과물이 매끄럽잖아요. 메시지와 이미지간에 괴리가 적으면 연출자의 존재가 잘 안 보이더라고요. 기획을 한 사람이 있고 연출해서 찍은 사람이있는데, 그런 협업의 과정은 영상이 양질일수록 오히려 티가 안 나게 되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지난 대선때 윤석열 캠프에서 "민지가 해달라는데 한번 좀 해보자" 같은 카피를 쓰면, 야 저거는 누가 대신 써줬네, 하고 바로 알잖아요. 윤석열 후보가 청년 세대를 이해하는 수준과 저런 친근해 보이려는 카피 사이에 괴리가 너무 크니까 설계자의 존재를, 그림을 짠 사람의 존재를 알게 되는 거죠. 반대로 그림을 잘 만들수록 만든 사람의 존재는 좀 잊히게 돼요. - P97

유리  쪽방촌도 국토교통위 소속 의원으로서의 문제의식을가지고 간 거죠?

준짱  네, 쪽방촌은 최저 주거기준 이하의 생활공간이기 때문에법의 적용을 받지 않아요. 쪽방촌도 법의 적용을 받을 수 있게 바뀌어야 하고요. 그리고 쪽방촌이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되면 많은 경우 세입자가 혜택을 못 받잖아요. 그래서 세입자가 안전하게 이주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재개발 관련 법안도 필요하죠.
또 그런 낡은 집에는 쥐가 엄청 많거든요. 쪽방촌에는 가난한 사람이 많고 경제활동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많은데, 대부분 장애나 질병이 있기 때문이에요. 아까 놀이터에 모였다던 분들은 어느 정도 거동이 가능하니까 나올 수 있었던거고요. 간담회에서 한 어르신이 마이크를 잡고 이런 얘기를 하셨어요. "여기 오늘 못 나온 사람 중에, 저 방에 누워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 사람들이 말을 못 하니까 내가 합니다. 여기 쥐가 많은데, 그 사람은 쥐를 내쫓지도 못합니다. 쥐가 집에 돌아다니는데 같이 삽니다. 그래도 좀위생적인 환경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분은 자기 얘기가 아니라 옆집 사람, 옆방 사람 얘기를 하러 나오신 거예요. 그걸 보면서 도달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는 또 다른 수많은 공간을 생각했고요. 그때 느낀 걸 뭐라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그게 저의 직업이어서, 그런 이야기를 다룰 수 있어서 좋아요. - P108

준짱  삶이 팍팍해질수록 싸우는 건 좀 그만 보고 싶죠. 그래서 어느 정도는 지지자분들에게 긍정적인 감정을 드릴 필요가 있더라고요. 이 정치인을 지지해서 얻는 장점, 이 정치인이 안겨줄 수 있는 어떤 따뜻한 경험, 위로나 잠시나마 웃을 수 있는 순간.ㅣ••• 이런 걸 드리는 것도 일이더라고요, 알고 보니까.

유리  ‘우리 의원이 이렇게 귀엽습니다‘ 하는.

담 사실상 가치의 연예인••• 국회의원은 가치가 상품인 연예인이라고 봐야겠네요.

준짱  맞아, 맞아, 아무리 의원실에서 정책을 잘 만들고 기획을 잘해도 플레이어가 그걸 잘 받아내지 못하면 안 돼요.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고 우리 머릿속에 각인이 된 정치인들은 어찌됐든지 간에 플레이어로서의 역할을 잘하고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거라고 생각해요. 훌륭한 아이디어를 내도 플레이어와 잘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흥행하기 어렵거든요. - P110

준짱  똥 싸는 건 너무 쉬운데 치우는 건 생각 많이 해야 돼요. 어디에 똥을 안 묻히고 이걸 쓸어 담을지.

담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더욱 양보해서는 안 되는일이 있다는 말이 사무쳐요. 내가 언제는 당사자이고 언제는 연대자인지 무 자르듯 경계를 그을 수 있는 것은 아니죠. 그렇기 때문에 저는 오히려 우리가대부분의 상황에서 피해 당사자가 아니라 연대자이고, 심지어는 가해자에 더 가까울 거라는 사실을 상기하려고 노력해요. 연대자의 위치에 선 사람은 ‘나는 내 일도 아닌데도 대의에 복무하고 있어‘라는 알량한 자기 만족감이나 시혜적인 태도를 경계하고 운동에 방해나 되지 않을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해야하죠. 어떤 차원에서 구조적 폭력의 피해자였다 하더라도 그 위치가 영속적인 것도 아니고, 한 차원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다른 차원에서는 얼마든지 가해자일 수도 있고요. 그래서 그런 날이 있는 것 같아요.
도저히 참아지지 않는 날. 언제까지 피해자의 자리에만 머무를 건데? 대체 어디까지 스스로의 사정을 봐줄 건데? 언제까지 우리가 힘을 가지지 못했음을 연민하기만 하고,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힘에 대해서는 성찰하지 않을 작정인데? 그런 질문이 끓어오르는 날이요. - P134

 발달장애가 있는 동생 혜정, 혜정과 함께 살기를 원하는 언니 혜영의 탈시설 과정을 담은 그 영화에는 혜정이 "나중에"라는 말을 너무 많이 들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나중이 언제인지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정치인 장혜영의 시작은 혹시 혜정이 아니었을까 감히 짐작해본다.

나는 가끔 장혜영 의원을 걱정했다. 위풍당당한 모습, 친근한 모습, 날아다니는(?) 모습을 봤으면서도 울 것 같은 모습, 피로해 보이는 모습을 더 오래 기억했다. 혜정의 오늘을 사랑하는사람으로서 차별금지법 "나중에", 장애인 이동권 "나중에", 기후위기 대응 "나중에"와 같은 수많은 "나중에"와 맞서는 그의 마음이 신경 쓰여서 그랬다. 어떤 날엔 현장이 기가 막히고 업무가 사무쳤던 탓에, 어떤 날엔 얼굴과 이름을 걸고 일하는 여자들이 늘 감당하고 있는 모욕 때문에, 어떤 날엔 그냥 너무 슬퍼서 눈물이 나기도 하는 마음. 그런 장혜영의 마음이 나약함이나 가식으로 해석되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순간이 있어야 한다고 나는 믿었다. - P145

유리  (웃음) 아까부터 말씀하시는 게 한결같아요. 한 치의 문제도 없는 발언.

혜영  어디에서 누가 바로 받아써도 괜찮은, 마침표까지 찍혀 있는 문장으로 말하기 위해 노력하는 습관이 있어요.

담. 진짜 신기해요. 저는 혜영 님의 말하기에 전율할 때가 많아요. 스크립트가 그대로 나온달까요. 저 사람의 말은 통째로 글이다.

혜영  예, 노력하고 있습니다.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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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한 번에 한 분의 손님을 초대해 비건 만찬을 차려드려요.
대신 손님께선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식탁을 사이에 두고 당신과 나눈 대화를 기록하고 싶습니다."
- 담 - P5

엄살원의 손님들은 활동가들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너무 특수한 인간들의 집합이라고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자기 일도 아닌 문제에 자기 일처럼 화를 내는 게 직업인 사람들. 여성, 장애인, 성노동자, 퀴어, 빈민, 홈리스, 청소년, 동물의 이야기가 곧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고 굳게 믿는 감각이상자들. 비관할 구석이 가득한 세상에서 냉소를 통해 똑똑해 보이기를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 너무 순진한 게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감수하면서 굳이 어떤 희망을가져보기로 한 사람들.
나를 매번 놀랍게 한 것은 활동가들이 타고나기를 강건한 영혼의 소유자이거나 남에게 베풀고 남을 만큼 자원과 사랑이 넉넉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도리어 그들은 아프고 취약하며 그렇다는 이유로 미움받은 역사 또한 긴 사람들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왜? 자기를 돌보아도 모자랄 시간에 왜 어떤 사람들은 남을 돌보겠다고 오지랖을부리는 걸까? - P6

손더스의 표현을 빌려 엄살원의 손님들에게 나는 묻고싶었다. 당신들은 어떻게 ‘자기 자신의 일부‘이기를 그만두겠다는 놀라운 선택을 내릴 수 있었느냐고. 어떤 계기로 우리는 자신이기만 했던 자신의 투명도를 낮추어 마침내 나 아닌 존재들과 하나로 포개질까? 나는 고작 나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진실을 추구하는 데는 어떤 기쁨과 슬픔이따를까?
활동가들의 대답은 다양했지만, 그들이 모두 밥을 먹고 산다는 점만은 같았다. 그들처럼 나의 일부이길 그친 나, 나만은 아닌 나, 시끄럽고 커다랗고 무수한 나로 살아보려는 일은 많은 열량을 소모한다. 그래서 이들에게 밥을 든든히 먹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밥상 앞에 앉은 손님들의 얼굴은 유순하기 그지없다. 농성에 도가 튼 사람이건 국회를 드나드는 사람이건, 수저를 쥐는 손만큼은 다들 조그맣다. 한명의 인간은 누구든 이렇게 작다는 사실, 그 사실 때문에 때로는 기가 막히고 때로는 가슴이 미어졌다. - P7

여름  저는 자기돌봄이란 말을 보면, 살고 싶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자기돌봄을 잘 안 하는 타입이거든요. 죽음에 대한 열망과 거리두기를 실패한 삶을 살고있어서••• 제 몸을 돌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난다 해도 한때에 지나지 않고요. 자기 몸을 돌보고, 자신에게 좋은 것을 스스로 제공하고 싶은 마음과 노력을 놓치지 않는 건 어떻게해야 하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근데 그런 걸 몰라도 그냥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겠죠? 저처럼.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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