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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캐시 H. 서른한 살이고 11년 이상 간병사 일을 해왔다. 11년이라면  꽤 긴 세월처럼 들린다. 실제로 그들이 내게 올해 말까지 8개월을 더 일해 주길 바라고 있으니, 그렇게 되면 내 경력은 거의 12년에 이른다. 내가 간병사로서의 경력을 그렇게 오랫동안 유지한 게 그 일을 환상적으로 잘해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서인 것만은 아님을 이제 나는 안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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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밀드레드가 나오는 부분에 이른다. 그녀의 서류를 훑어보고 그녀가 정말 어떤 사람이었을지 이해한 다음이기 때문에, 내가밀드레드의 모습이랍시고 지어낸 사소한 장면들에 민망함을 느낀다. 앤드루가 자서전에서 자기 아내를 밀어낸 정도를 보고 충격을받고 나의 공모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내 정신에 전혀 해롭지 않은부분 몇 군데는 그가 기운차게 편집해버렸다. 오늘 밀드레드의 서류를 훑어보며 알게된 바에 따르면, 이 문단들에서 드러나는 밀드레드의 모습은 극도로 희석된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그녀가 죽은뒤 그녀의 남편은 그녀의 존재가 그보다도 더 축소되어야 한다고생각했던 것이다. 자서전을 써야겠다는 베벨의 결심은 많은 부분아내의 오명을 벗기고 그녀가 배너의 소설에 나오는 은둔한 정신병자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겠다는 바람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이글을 읽어보니, 베벨은 밀드레드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것보다 그녀를 완전히 특징 없고 안전한 인물로 바꿔놓는 것을 더 원했던 것 같다-베벨의 목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내가 당시에 읽었던 위대한남자들의 자서전에 나오는 아내들과 똑같이 말이다. 밀드레드를 그녀의 자리로 돌려놓으려고.
어쩌면 해럴드 배너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똑같은 일을 하려고 했는지 모른다. 왜 소설에 밀드레드의 망가진 모습을 그린단 말인가? 이건 『채권을 처음 읽은 이후로 내가 자문하고 또 자문한 질문이었다. 밀드레드는 그토록 명석했던 게 분명한데, 왜 그녀를 미친 사람으로 만드나? 세월이 지나며 나는 여러 가지 답을 생각해보았지만-질투, 복수심, 단순한 악의-배너의 인생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몰랐기에 늘 같은 결론으로 돌아왔다. 배너가 밀드레드의 정신과 몸을 망가뜨린 것은 단지 그게 더 나은 이야기가 되기때문이었다고(설령 밀드레드에게 모욕이 되고 결국은 배너 자신을 파괴할지라도, 그가 쓰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었던 이야기인 것이다). 배너는 역사 전체에 걸쳐 출현한 비극적 운명의 여주인공, 자신의 파멸을 구경거리로 내놓는 그런 여주인공이라는 고정관념에 억지로 밀드레드를 끼워맞췄다. 밀드레드를 그녀의 자리로 돌려놓으려고. - P346

버린 종이를 도둑맞았다는 걸 알게 된 뒤 위로가 된 건, 그 내용이 전부 협박범을 위해 작성하던 허구라는 것뿐이었다. 그 페이지에는 앤드루 베벨의 정체를 드러내거나 나를 추적해올 만한 내용이 전혀 없었다. 이런 깨달음 때문에 생겨난 안도감이 잭을 생각하면서 든 분노와 슬픔보다 컸다. 이번에도 나는 내가 친구나 가족보다 베벨을- 베벨의 규칙과 표준, 위협을- 더 많이 신경쓴다는 걸 알고 낙심했다. 나와 그토록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당했다는 사실도 기밀 유지 조항을 위반했을 때의 결과에 비하면 중요하지 않게 보였다. 이 사실에 두 배는 더 의기소침해진 건, 내 생각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친구를 잃는 것은 베벨의 분노에 맞서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베벨의 힘은 그 정도였다. 그의 재산이 주변의 현실을 구부렸다. 그 현실에는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세상에대한 그들의 인식은 내 인식이 그렇듯 베벨의 부를 향해 끌려가는 중력에 포획되었다. 그 중력으로 휘어졌다. - P368

"회장님은 밀드레드의 지성이 어떻게 드러났다고 생각하세요?"
"뭐, 알잖나. 수많은 사소한 것들을 통해서 드러난 거지. 이런 저택을 운영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야. 직원도 이렇게 많고 말이지. 물론, 밀드레드의 음악 취향도 그렇고. 하지만 그 얘기는 이미 했고, 책에 쓰일 만한 모든 사항을 다루었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내게 뒤지지 않으려면 꽤 재능이 있는 사람이어야 해." 그는 콧구멍으로 웃었다. "쉽지 않지. 나한테 뒤지지 않는다는 건 전혀 쉬운일이 아니야. 혹시 이 얘기도 책에 넣겠나? 적당히 유머러스하게말이야. 그건 그렇고, 자네도 그리 나쁘진 않다네, 알겠지만."
베벨을 자극하고 구석으로 몰아넣어야겠다는 욕구가 사라지면서 두 뺨이 붉어졌다. - P375

문득, 음료수가게에서 선디 아이스크림을 즐기는 그를 보자 어떤 깨달음이 들었다. 원래의 영역에 있는 그를 본 지금, 이자가 비양심적인 신문사든, 정부든 뭐든 높은 권력을 위해 일하는 공모자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녀석은 그냥 브루클린 꼬맹이였다. 단벌 정장을 입고 아이스크림을 먹는.
"있잖아." 나는 핸드백에 손을 넣었다. "여기 10달러 줄게."
그는 아이스크림을 먹다 말고 돈을 보더니 굳었다.
ㅍ"난 누가 널 이리로 보냈는지 알아." 내가 말했다. "그 사람 이름을 말하면 10달러는 네 거야. 말하지 않으면 그냥 갈게. 네가 할 수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이봐요, 파르텐자 양. 우린 당신의 공산주의자 아버지에 대해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만일•••••• "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몇 걸음을 뗐다.
"잭이요." 그가 말했다.
나는 멈춰 섰다. 그 순간의 경험은 오늘날까지도 내가 증오심을 측정하는 기준으로 남아 있다. 나는 돌아가 테이블 옆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 P378

"그런 생각은 못해봤는데" 아버지가 한참 만에 말했다. "내가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아니었어."
나는 아버지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하지만 시간이 됐구나. 넌 현명하니까 네 판단을 믿는다. 내생각이 너랑 다르더라도 말이야." 아버지는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시간이 됐어. 아니, 지났지. 넌 떠나야 해."
이런 마지막 말과 함께, 아버지도 내 손을 더욱 꽉 잡고 나를 자기 쪽으로 당겼다. 나는 아버지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난 다음 식탁을 돌아가 아버지를 끌어안았다.
"알겠지만, 이런 시궁창도 괜찮다면 언제든 돌아와도 된다." 아버지가 말했다.
우리는 따뜻하고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 그날을 함께 보냈다.  - P398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나는 직장에서든 사생활에서든 무수히 많은 남자들이 내 아이디어를 자기 것인 양 내 앞에서 되풀이해 말하는 경험을 했다 처음에 그 생각을 떠올린 사람이 나라는 걸 내가 기억하지 못할 것처럼 말이다. (어떤 경우에는 그들의허영심이 기억을 가리는 바람에, 그들이 선택적인 기억상실에 힘입여 양심에 한 점 부끄럼 없이 문득 떠오른 깨달음을 자기 것이라고주장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당시에 어린 나이에도나는 이런 기생적 형태의 가스라이팅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루가우리 가족 이야기를 자기 이야기인 것처럼 말한다니?
"대체로 나는 아내가 알려준 단서로 사건을 해결했지만, 아내에게는 티를 내지 않도록 신경썼네." 베벨은 잔을 들고, 다시 한번 혼자 미소 짓는 듯하더니 더 길게 숨을 들이켰다. "나는 늘 어떤 비서나 집사를 의심하다가, 밀드레드가 실제 살인자가 누구인지 밝히면놀란 척했네."
이건 내가 베벨의 회고록에 적어넣지 않은 내용이었다. 나는 용의자가 누군지 모르는 척하고, 상대를 아이 취급하며 틀린 게 분명한 용의자를 지적하는 내용을 밀드레드와 베벨에 관한 내 이야기에 집어넣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방금 읽은 소설을 아버지에게 말해줄 때마다 아버지가 한 바로 그 행동이었다. 아버지는 늘 나의 가짜 단서들을 성실하게 따라온 다음 범인이 버릇 나쁜 양아들이나 모욕을 당한 여자 후계자일 거라고 말했다. 그러는 내내 아버지가 나를 상대로 장난을 친 것뿐이라는 걸 이제야 알게 되다니 당혹스러웠다. 베벨의 생각이 아버지와 똑같은 방식으로 돌아가는 걸보자 두 배로 우울했다. 내가 만들어준 허구의 세계에, 베벨은 현실에서 아버지가 나를 대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아내에게 반응하는, 자기가 만든 장면을 덧붙였다. - P405

"뭐라고요?"
"그래. 내가 이 칼을 받으면 운이 나빠질 거다. 우리가 싸우게 될거야. 우리 둘의 연결이 끊어져."
나는 아버지의 작은 미신들이 단지 고향에서부터 가져온 유물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가져온 다른 전설과 일화, 요리법처럼 말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 문제에 관해 이상할 만큼 진지해 보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상자를 집어들려고 했다.
"잠깐. "아버지가 말했다. "해결책이 있어. 돈이야."
나는 아버지를 보았다.
"돈이라고." 아버지가 다시 말했다. "내가 너한테서 칼을 사는거지. 그렇게 해결하는 거야. 그러면 선물이 아니니까." 아버지는주머니를 뒤져 내게 동전을 내밀었다. "여기, 1페니를 받고 그 멋진 칼을 팔아주겠니?"
나는 동전을 받았다. 아버지가 상자를 집어들었다.
"아, 이것 좀 봐라!" 아버지는 활짝 웃으며, 엄지로 칼날을 더듬어보았다. "전에 이런 게 있었는데. 기억나니? 네가 그 칼로 화살을 깎아서 만들었어. 아주 오래전이지. 하지만 이 칼이 훨씬 낫구나. 멋진 작품인데, 아주 비쌌겠어. 무척 고맙구나, 얘야."
우리는 칼을 사용해 살라미 소시지와 치즈를 좀 자르고, 예전처럼 카운터에 서서 수다를 떨며 먹었다-나는 겨우 보름 전에 집을나왔지만, 아버지와 보낸 시간은 이미 옛 시절이 되었다. 베벨 이야기는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그날도 그 이후로도.
나는 우리를 구해준 그 동전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 P413

종 모양 유리 덮개 안에서는 종이 울리지 않는다

지금부터는 그 무엇도 기억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는 데서 오는 무시무시한 자유

콧노래가 내 머릿속에서만 들린다는 걸 깨닫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린다
파장이 없는 소음도 소리일까?

간호사가 방금 내 손톱을 깎았다. 깎으면서 먼지를 불어 날린다

사물에서 단어들이 벗겨진다

잠을 들락거린다. 검은 천 밑에서 나왔다가 다시 사라지는 바늘처럼. 실이 꿰어지지 않은 채. - P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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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브루클린 공립도서관에서 그런 책 몇 권을 빌릴 수 있었고, 이어지는 주에는 혼란스럽고도 무계획적인 방식으로 그 책들을 훑었다. 별 체계 없이 한 책에서 다른 책으로 건너뛰며 출처를 적지않은 채 아무 내용이나 메모했다. 나는 문서 연구에 대해서나 서지정보를 제대로 다루는 방법에 대해 제대로 훈련받은 적이 없었다.
알고 보니 그게 이점이었다. 나의 거칠고 타협의 여지 없이 비체계적인 접근법 덕분에 책들이 서로 합쳐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남자들 각각의 개인적인 특징은 카네기의 자족적인 독실함, 그랜트의 근본적인 품위, 포드의 딱딱한 실용주의, 쿨리지의 수사적 검약 등등 당시 내가 생각하던 그들 모두의 공통점 앞에 무너져내렸다. 즉, 그들은 모두 아무런 의심 없이 자신의 이야기는 들을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자신들의 말이 누군가의 귀에 들어가야 마땅하다고, 자신들의 결점 없는 삶에 관한 이야기는 반드시 전해져야 한다고. 그들 모두가 내 아버지에게 있던 바로 그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야말로 베벨이 글로 옮기고싶어하는 확신이라는 걸 알았다. - P311

아버지는 감정의 독점권을 행사했다. 아버지의 행복은 그 어떤반대도 용납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기분이 좋으면, 모두가 기꺼이아버지의 긴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의 농담에 웃고 뭐든 아버지가떠올린 프로젝트에 기꺼이 참여해야 했다- 재앙에 가까운 집 인테리어든, 스물네 시간 내내 하는 인쇄 업무든, 누군가 이야기한 이탈리아인 정육점 주인을 찾아 브롱크스를 돌아다니는 것이든. 하지만 자기 기분이 처지거나 억울할 때면, 아버지는 모든 사람이 그 대가를 치르게 했다. 화가 나 있을 때의 아버지 얼굴처럼 결의에 찬 얼굴은 아직 본 적이 없다. 슬프게도, 그 결의는 오직 자신에게만 고정된 결의였다 결의에 차겠다는 결의에 찬 얼굴. 일단 그런 상태가 되면, 내가 보기에 아버지는 모든 형태의 타협을 자기 배신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잘못을 인정하는 것만으로 자신의 존재 전부가 부식되어 쓸려나갈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이십 년 넘게 아버지와 같이 살았고, 우리는 내가 독립한 뒤에도 가까이 지냈다. 그 모든 세월 동안 아버지는 내게 단 한 번도, 그 무엇에 대해서도 사과하지 않았다. - P312

이 모든 이유로, 아버지가 "급진적인 행동"이라는 말로 무엇을이야기하고자 했는지 알아내는 건 내게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잭이 아버지의 말에 감동받은 표정을 지었던 건 기억난다.
"제가 한 생각은요." 잭이 생각에 잠겨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제 자리가 유럽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거기에서 보도하는거죠. 최전방에서요. 헤밍웨이처럼. 어쩌면 최전방에 합류할지도 몰라요. 국제여단이요. 아시죠? 뭔가 하는 거예요. 이렇게 빈둥거리고있으니 죽을 것 같아요."
나는 우울하게 술잔을 들여다보는 그 두 사람을 보고 당혹감에 몸을 떨었다. 겉만 번드르르한 그들의 말. 소년 같은 진지함. 결정이 정말로 어떻게 내려지는지 이들이 알았다면, 진정한 권위의 목소리가 얼마나 조용조용한지 들을 수만 있다면, 자신들이 어떤 형태로든 진짜 권력으로부터 얼마나 불가능할 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지 알 수만 있다면. - P325

"혹시 내가 악의나 복수심에 따라 움직인다거나, 그보다 더 나쁘게는 잔인함에서 변태적인 전율을 찾는다는 얘기를 하는 건가? 내가 보기에 자네는 우리가 여기서 하는 일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것같군. 내가 보기에 자네는 이 모든 일이 다 무엇에 관한 것인지 모르는 것 같아."
"알고 있습니다."
"그래?"
"현실을 조정하고 구부리는 것입니다."
당시에 나는 그 표현이 이 상황에 적용되는 것인지 전적으로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남자가 남이 자기 말을 인용하는걸 좋아한다는 건 알았다.
"바로 그거야. 그리고 현실에는 일관성이 있어야 하지. 배너가 존재한 적도 없던 세상에서 배너의 흔적이 발견된다니, 얼마나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인가?"
앤드루 베벨을 만난 이후 처음으로, 나는 두려워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 P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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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샬로츠빌 지역당에 가서 내가 한 강연의 메시지는 간단했다. 공화당원은 도덕심리학을 잘 이해하고 있지만, 민주당원은 그렇지못하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정치적 행동을 주관하는 것은 기수가아니라 코끼리라는 것을 공화당원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해하고 있었고, 코끼리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도 잘 알고 있다.‘ 공화당원이 만드는 슬로건, 정치 광고, 연설문은 모두 사람의 직감에 직접적으로 가 닿는 경향이 있다. 그중에서도 1988년 윌리 호튼(WillieHorton)이라는 흑인 범죄자의 얼굴 사진을 넣어 만든 광고는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이 광고에서 공화당은 윌리 호튼이주말에 감옥에서 나와 잔혹한 살인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은, "범죄에 유화적인" 마이클 듀카키스(Michael Dukakis: 당시 민주당의 후보)가 범죄자 주말 휴가를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전국에 대대적으로 광고했다. 반면 민주당원은 코끼리보다는 기수를 정면에 놓고 호소할 때가 많으며, 따라서 정책의 세부 내용을 비롯해 그것이 가져다줄 이득이 강조되는 편이다.
조지 W. 부시나 그의 아버지 조지 H. W. 부시나 청중에게서 감동의 눈물을 자아내는 능력이 없기는 매한가지이지만, 둘 다 운만큼은 대단히 좋았다고 할 수 있다. 대선에서 그들의 대항마로 나선 이들은 머리를 주로 쓰는, 감정적으로 냉철한 사람들(마이클 듀카키스, 앨 고어. 존 케리)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민주당에서는 대통령이 나와 재임에까지 성공한 경우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이후로는 단 한 번뿐이었고, 이도 결코 우연은 아니다. 그 주인공은 자신의 친근한 이미지와 유창한 말솜씨를 하나로 결합시킬 줄 알았으며, 그럴 때면 거의 음악을 들을 때의 감동이 느껴지곤 했으니까 말이다. 빌 클린턴, 그는코끼리를 어떻게 매료시키는지 잘 아는 사람이었다. - P288

우리 다섯은 정치적으로는 모두 진보였지만, 진보 쪽 사람들이 정치심리학에 접근하는 방식에는 똑같은 우려를 품고 있었다. 진보파의 연구 중에는 보수주의자가 어떤 면에서 잘못인지를 설명하려는것이 너무 많았다("보수주의자들은 왜 보통 사람들처럼 평등, 다양성, 변화를 수용하지 않는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날은 마침 정치심리학 회의가 열렸던 날이었는데, 보수주의자를 겨냥하거나 부시 대통령의 인지능력 한계를 지적하며 농담을 던진 연사가 한둘이 아니었다. 우리 다섯은 모두 그런 행동은 잘못이라고 느꼈다. 도덕적인 면에서만이 아니라(몇 안 되더라도 청중 속에 보수주의자가 끼어 있을 경우 험악한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기 때문에), 과학적인 면에서도 분명 잘못이었다(그런 행동은 특정결론에 이르려는 동기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원하는 결론이 있을 경우 사람들은 그쪽으로 나아가기 쉬운 법이다). 아울러 우리 다섯은 정치와 관련된 미국인들의 삶이 점차 양극으로 나뉘어 서로에게 무례를 범하는 것이 심히 걱정이었다. 따라서 도덕심리학이 힘이 되어 각파의 열성 당원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게 되면 좋겠다고 우리는 생각했다. - P295

이 소론에 담긴 핵심 생각은, 어떻게 하면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 평화롭게 살아갈 사회를 만드느냐 하는 문제에는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의 접근법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두 접근법중 하나는 존 스튜어트 밀로 대표되고, 나머지 하나는 프랑스의 위대한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 (Emile Durkheim)으로 대표된다. 소론에서 나는 밀의 비전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첫 번째로, 상호 이득을 위한 사회적 계약으로써 사회가 만들어진다고상상해보자. 이곳에서는 개인들이 다 같이 평등하게 지내며, 누구나 자유롭게 자기 뜻에 따라 이사하고, 재능을 계발하고,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계약사회의 대표적 수호자는 존 스튜어트 밀로, 그는 자유론(On Liberty)>에 이렇게 썼다. "교양 있는 공동체에서 그 구성원에게정당하게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하나, 타인에 대한 피해를 사전에 예방하려는 목적이 있을 때뿐이다." 밀의 이 비전은 수많은 진보주의자와 자유주의자에게 호소력을 지닌다.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밀의 사회는 평화롭고 개방적이고 창의적인 곳으로서, 각양각색의 개인이 서로의 권리를 존중해준다. 그러면서도 궁지에 처한 사람을 돕거나 공익을 위해 법을바꾸어야 할 때는 사람들이 자의적으로 하나로 뭉친다(오바마가 외치는 ‘단결‘도 이러한 것이다). - P303

이런 식의 사회 비전은 오로지 배려 기반과 공평성 기반에만 의존하고 있음을 나는 소론을 통해 보여주었다. 사람들이 누구나 이 두기반에 의지한다고 가정하게 되면, 우리는 사람들이 잔혹과 불의를보면 참지 못하며, 나아가 서로의 인권을 존중하는 일에는 발 벗고나서리라고 가정하게 된다. 이렇게 밀의 비전을 소개한 데 이어 나는 뒤르켐의 비전을 대조해 보여주었다.

이제는 사회가 개인 간 합의를 통해 만들어진다기보다 사람들이 함께 살방편을 찾는 과정에서 차차 유기적으로 만들어진다고 상상해보자. 즉, 생존을 위해 하나로 엮인 사람들은 상대방의 이기심은 서로 억누르는 한편, 사회 이탈자나 무임승차자 등 집단의 협동에 해가 되는 무리를 처단해나간다. 이때 사회의 기본 구성단위는 개인이 아니다. 그 기본단위는 위계질서가 잡힌 가족으로, 여타 기관들도 이를 본으로 삼는다. 이런 사회 속에서는 개인들이 태어나는 순간 강력하고 제약적인 인간관계 속으로 들어가는바,
따라서 자율성에도 심대한 제약이 따른다. 이렇듯 좀 더 구속적인 사회개념을 수호해온 사람은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으로, 일찍이 아노미(무규범 상태) 현상을 경고한 그는 1897년에 이렇게 썼다. "인간은 자신이 소속감을느낄 수 있는, 자기보다 높은 무엇이 보이지 않으면 고차원의 목표에 애착을 가지거나 규칙에 순응하지 못한다. 사회의 모든 압력에서 자유롭게 해방된다는 것은 곧 스스로를 버리는 것이자 든든한 기반을 잃는 것이다."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뒤르켐의 사회는 숱한 집단이 서로 포개지고 겹치며일종의 안전망을 이루어, 개개인을 사회화시키고 탈바꿈시키고 돌보는 것이다. 자기 뜻대로 하게 개인을 내버려두면 그는 결국 피상적이고 육체적이고 이기적인 쾌락을 좇게 되기 때문이다. 뒤르켐의 사회가 더 중요시하는 것은 자기표현보다는 자기 절제, 권리보다는 의무, 타 집단에 대한 관심보다는 자기 집단에 대한 충성이다. - P304

뒤르켐의 사회를 지탱하는 것은 배려와 공평성 기반만이 아님을나는 소론을 통해 보여주었다." 이런 사회를 건설하려면 충성심, 권위, 고귀함 기반도 마저 이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어서 나는 미국의 좌파가 이런 뒤르켐의 세상을 도덕적 흉물 정도로만 보는까닭에 사회적 보수층은 물론 종교적 우파까지도 제대로 이해하지못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뒤르켐의 세상은 보통 위계적이고, 종교적이며, 또 벌이 엄격하다. 더불어 사람들의 자율성에 한계를 긋고, 많은 경우 전통적인 성 역할을 비롯하여 전통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비전은 진보주의자에게는 떠받들기는커녕 싸워서 물리쳐야 할 대상이다. - P305

여러분의 도덕 매트릭스가 오로지 배려 기반과 공평성 기반에만 의지하고 있다면, 아마 여러분은 에 플루리부스 우눔(E pluribus unum: 다자에서 하나로)이라는 미국의 비공식 모토를 들어도 고귀한 울림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고귀하다‘는 것은 앞 장에서 소개한 고귀함 기반의 그런 개념을 말한다. 한마디로 고귀함을 안다는 것은 어떤 사상, 사물, 혹은 사건에 무한한 가치를 부여할 줄 안다는 것인데, 그런 것들이 집단을 하나의 실체로 똘똘 뭉치게 할 경우 그 가치는 특히 커진다. 생각해보면 이 지구에서 성공한 나라치고 플루리부스(각양각색의 민족)로 우눔(하나의 국가)을 만들어내는 기적을 연출하지 않은 곳은 없다." 이 기적을 더 이상 연출하지 못할 때 나라는 망하거나 쪼개진다.
민주당이 플루리부스 정당이 된 것은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였다. 이후 민주당은 대체로 다양성을 칭송하고, 동화(同化)되지 않는 이민을 지지하며, 또 영어를 미국의 표준어로 쓰는 데는 반대하고, 성조기 핀은 웬만해서는 달지 않으려 하고, 스스로를 세계시민이라 칭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실정이니, 1968년 이래로 민주당이 대선에서 그토록 부진한 성적을 내왔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닐까? 미국의 대통령은 사회학자 로버트 벨라(Robert Bellah)가 말한 "미국의 시민 종교(American civil religion)"에서 대사제와 다름없는 존재이다." 그러니만큼 대통령은 (꼭 예수가 아니더라도) 신의 이름을 빌리지 않을수 없고, 미국이 낳은 영웅과 그것이 이룩한 역사를 찬미하지 않을수 없으며, 또 성스러운 경전(독립선언문과 헌법)을 입에 올리지 않을수 없고, 플루리부스를 우눔으로 성화(聖化)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가톨릭교도들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만일 어떤 사람이 라틴어를 쓰지 않겠다고 하거나 자신은 이 세상의 신을 전부 모신다고 여긴다면, 누가 그 사람을 사제로 선택하겠는가?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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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시절이 힘든 만큼 여러분 대부분이 지원할 수 있는 거의모든 일자리에 지원한다는 건 알지만, 우리가 고용할 사람이 이 일자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일 뿐 아니라 원하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하고 싶기도 합니다. 프렌티스 양은 이 일자리를 원하세요?"
"네."
"왜죠?"
나는 내가 그런 식으로 대답할 줄 몰랐다. 계획된 일이 아니었다. 내가 준비한 내용이 전혀 아니었다. 그냥 말이 나왔다.
"모든 걸 만드는 회사에서 일할 수 있는데, 한 가지 물건을 만드는 곳에서 일할 이유가 있을까요? 돈이 바로 그거잖아요, 모든 것. 최소한 돈은 모든 것이 될 수 있죠. 돈은 우리가 다른 모든 상품의 가치를 측정하는 보편적 상품이에요. 그리고 돈이 상품의 신이라면 여기가." 나는 손바닥을 뒤집어 사무실을 감싸는 호선을 그렸고, 그건 그 너머의 건물을 의미했다. "그 신의 최고 신전이죠."
긴 침묵 - P260

나는 이들의 소설에 들어 있는 질서라는 관념에 위안을 받았다. 그들의 소설은 전부 범죄와 혼란으로 시작되었다. 분별력과 의미자체마저 시험대에 올랐다. 등장인물과 그들의 행동, 동기는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무법성과 혼란이 지배하는 짧은 시기가 지나고 나면 언제나 질서와 조화가 회복되었다. 모든 것이분명해지고 설명되고 세상과 어우러졌다. 이 점이 내게 어마어마한 평화를 주었다. 아마 그보다 더 중요했던 건, 이 여자들이 내게 여성적 세계의 전형적 개념에 순응할 필요가 없다는 걸 보여주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연애나 가정의 축복만을 다루지않았다. 그들의 책에는 폭력이 있었다 그들이 통제하는 폭력. 이작가들은 직접 모범이 되어, 내가 위험한 무언가를 쓸 수 있다는 걸보여주었다. 그들은 믿음직한 사람 혹은 순종적인 사람이 되는 데는 아무런 보상이 따르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었다. 독자들의 기대와 요구가 존재하는 건, 의도적으로 그런 기대를 혼란스럽게 하고뒤집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처음으로 내게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한 작가들이었다. - P264

베벨 투자회사에서 시험과 면접을 보는 동안 나는 평생 여러 차례에 걸쳐 확인할 기회가 생긴 한 가지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권력의 근원에 가까워질수록 주위가 조용해진다는 것이다. 권위와 돈은 침묵으로 스스로를 둘러싸고, 사람은 누군가의 영향력이미치는 범위를 그들을 둘러싼 침묵의 두께로 측정할 수 있다. - P267

그는 책을 책상 위로 미끄러뜨렸다. 나는 책을 집어들었다. 겉표지는 회녹색이었으며 글씨는 검은색과 회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달러 지폐를 떠올리게 하는 색 조합이었다. 삽화나 장식은 없었다. 그냥 이렇게만 적혀 있었다.

채권
장편소설
해럴드 배너

이 단어들을 타자기에 입력하는 지금, 나는 앤드루 베벨이 그날주었던 바로 그 책을 보고 있다. 세월이 지나 겉표지는 이제 쉽게 상하고, 햇볕에 바랜 책등에 양쪽 덮개가 실 한 가닥으로 매여 있다.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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