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얼굴색이 피오 똥처럼 변한다. 핑계를 대고 급히 자리를뜬다. 푸세식 변기에 혼자 있을 때에만 호흡이 침착해진다. 여기서만 진정할 수 있다니! 말도 안 돼. 가장 안전하게 느껴지는 곳이라는 이유로 필요한 시간보다 오래 푸세식 변기에 앉아 있기 시작했다는게 믿어지지 않는다. 벌레와 구더기와 나방이 종이접기 하듯 서로 포개져 있는데! 기름진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손이 덜덜 떨린다. 평소의 대처방식, 그러니까 나는 멋져 보이고, 웃고 있고, 여기에 적합한 사람이고, 괜찮다고 다짐하는 것이 더러운 물집투성이 손가락 주위에서 부서진다. 노랗고 검은 거미가 서까래에 친 거대한 거미집에 매달려 있다. 첫날 밤에 보고 소리를 질렀던 바로 그 거미다. 나는 거미에게 해그리드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해그리드가 나를 바라본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한 어두운 눈. 그 앞에서는 나의 미소가진짜 미소로 보이지 않을 것만 같다. 거미가 나의 마음속 어두운 곳까지, 온갖 안 좋은 것들을 꽁꽁 숨겨둔 곳까지 들여다볼 수 있을까? 내 표면에 드러난 것들은, 차와 자파케이크(초콜릿이 발린 동그란 모양의 영국 과자 - 옮긴이)가 먹고 싶어, 날씨는 어때, 같은 게 전부다. 하지만 속으로는 엿 같은 ‘운명의 산(소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화산. 주인공 프로도는 그의 동료 샘와이즈 감지와 함께 절대반지를 파괴하러 ‘운명의 산‘으로 여정을 떠난다-옮긴이)‘을 오르고 있다. 와이라도 나의 그런 모습을 간파하고 있을까? 그래서 내가 자기 주변에 있지 않기를 바라는 걸까?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속상함에 눈물이 난다. 화장실 바깥이 숨 막힐 듯 고요해서 입을 막고 소리를 죽인다. 그동안 가본 여느 장소와 달리 정글은 실제로 모든 것을 듣고 있다. 이 모든 소음에도 개의치 않는다. 수 킬로미터에 걸쳐 존재하는 생명체, 나무와 식물과 버섯, 암석과 대지에도 개의치 않는다. 지금껏 나 자신이 이토록 연약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정글은 듣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니 정글이 싫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 P86
따뜻한 물로 샤워할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참이다. 쿠션이 깔린 의자에 앉을 그날을, 단 몇 초라도 벌레에 물리지 않고 서 있을 그날을……. 하지만 나뭇가지에 매달린 야생 꼬리감는 원숭이가 태평하게 망고를 먹으며 구경하는 동안, 해리가 자기보다 큰 돼지에게 뽀뽀를 퍼붓는 모습에는 무언가가 있다. 숲 천장의 틈 사이로 햇살이 반짝거리며 진흙을 금빛으로 물들이는 모습에도 마찬가지다. 나의 마음 한구석을 살짝이나마 여는 것. 내가 갈망하는 것. 예전에는 그 존재를 미처 알지 못했던 것. 나는 고개를 젓는다. 어느 모로 보나 이 남자는 형편없는 멍청이에 불과하다. 이 돼지는 오래된 죽과 똥으로 뒤범벅이다. 그리고 와이라는... 와이라는 그냥 화만 내는 양아치일 뿐이다. 나는 마음을 강하게 먹으며 서둘러 숙소로 돌아간다. 함께 마음껏 뒹굴고 있는 해리와 판치타를 뒤로한 채. - P98
"나를 핥고 있어!" 목소리를 낮춰 감탄한다. 문 반대편에서 무릎을 감싼 채 쭈그려 앉아 있던 제인이 웃 "너무 들뜨지는 마. 소금기 때문일 거니까." 와이라는 도도하게 이마를 들이밀어 나의 팔을 뒤집더니 다른쪽까지 핥기 시작한다. 하마터면, 정말이지 하마터면 와이라는 케이지 안에, 나는 바깥에 있다는 것조차 망각할 뻔했다. 마치 정반대로 느껴진다. 와이라가 바깥 정글에, 우리가 케이지 안에 있는 것처럼. 정글이 암녹색을 드리워 와이라를 감싼다. 와이라의 혀는 거칠다. 살갗이 벗겨질 정도다. 생각보다 아프지만, 그만두지 않으면 좋ㄱ다. 지금 와이라의 낮은 소리는 지칠 대로 지친, 자포자기한 나의 귀에는 그가 나를 받아들였다는 뜻으로 들린다. 와이라는 내 팔 쪽으로 머리를 숙이고 앞발 한쪽을 철조망 가장자리에 편안히 댄 채로균형을 잡는다. 할짝, 할짝, 할짝, 살갗이 벌게진다. 몸의 나머지 부분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오직 와이라와 접촉한 이 좁은 살갗만이 감각의 대상이 된다. 그저 그 부분만이 나의 일부로서 존재한다. 그 밖의 다른 모든 것, 이를테면 놓친 버스, 시내를 구경할 기회, 이전의 생활 모두가 흐릿해져간다. 와이라는 나를 케이지가 실재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간다. 처음 만난 날 하악거리던 고양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똑같이 생겼지만, 결코 똑같지 않다. 모든 것이 달라졌다. 머리가 터져버릴 것만 같다. 워낙 활짝 웃고 있어서 또다시 우스꽝스러운 순간에 울음을 터뜨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와이라, 고마워." - P108
나의 숨이 와이라에 발맞춰 느려진다. 그는 할기를 끝냈다. 전장한 두 뒷발은 진흙 속에 오그라져 있다. 한쪽 앞발은 여전히 내바지 끝에 놓여 있다. 발톱을 집어넣고 발가락에 힘을 뺐다. 다른 쪽 앞발은 턱을 받치고 있다. 그의 눈이 서서히 감기고, 숨이 깊어간다. 가슴이 오르내리고, 속눈썹이 흔들린다. 믿기 힘들지만, 갑자기와이라가 연약한 존재로 보인다. 어안이 벙벙하다. 우리가 없는 매일 밤마다 케이지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우리를 만날 시간을 기대하고 있을까. 아니면 불안해할까. 또 현기증이 난다. 몸이 기우는 것같다. 아드레날린 때문이려나. 너무 오랫동안 이곳을 맴돌아서 그럴지도 모른다. 지금껏 앞으로 위로 어딘가로 움직여야 했던 압박과 소리와 빛 속에서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방향을 잃은 삶에 손이 떨리고 사지가 피곤에 찌들었다. 지금도 역시 피곤하긴 하지만 무언가가 다르다. 오랜 시간 동안 처음으로, 와이라의 차분한 숨소리와 나를 둘러싼 정글의 편안한 심장 박동을 들으며 몸이 떠오르는듯하다. 내 몸이 허공에서 멈춘 것 같은 기분이다. 내가 이런 장소에있다니. 더군다나 퓨마와 함께라니. 나는 와이라가 나에게 보이고싶어하는 모습만큼 용감하거나 대담하진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깨닫고 있다. - P113
"파라미, 로스 아니말레스 레스 카타도스 손 코모 라스 세보야스(나한테는 구조된 동물이 양파처럼 느껴져요)." 밀라는 나를 바라보며 말뜻을 이해했는지 확인한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안절부절못할 뿐이다. 밀라는 한숨을 쉬고, 영어와 스페인어를 섞어가며 천천히 말한다. 구조된 동물은 양파와 같다. 불안의 껍질을 힘겹게 한 꺼풀 벗겨내면 예기치 못한 다른 껍질이 나오고, 전혀 알지 못했던 또 다른 껍질이 그 아래에 숨어 있다. 우리모두는 이곳 동물들과 하나도 다를 게 없기에, 전부 제각기 엉망이고 망가져 있기에, 우리 또한 양파나 다름없다. "이 에소 에스로 케 아세 엘 파르케." 밀라가 미소를 머금는다. "바로 그게 파르케가 하는 일이죠. 그렇지 않나요? 우리의 껍질을벗겨내는 것." 그가 나의 가슴팍을 툭툭 두드리고 말을 이어간다. "당신과 나 말이에요. 한 꺼풀씩, 한 꺼풀씩. 그러면서 우리 자신에대해, 우리가 돌보는 동물들에 대해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되죠. 카다디아, 매일매일. 훈토스, 함께. 함께하는 거예요. 포르 에소 메 에나모레 데 에스테 루가르, 그래서 제가 이곳을 좋아하는 거고,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결코 알 수 없어요." - P118
야생 원숭이들의 고함이 차츰 잦아든다. 원숭이들의 우두머리는 무리를 이끌고 캠프 근처로 와서 코코와 파우스티노를 비웃곤한다. 우두머리는 덩치 큰 수컷 원숭이인데, 그래 봤자 코코가 몸집이 더 크다. 털의 붉은빛도 더 짙고 턱수염도 더 길고 두껍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 만일 상황이 달랐더라면, 숲이 벌목되지 않았더라면, 나와 같은 관광객이 이색 애완동물의 수요를 부채질하지 않았더라면, 다른 존재를 억누르고 짓밟는 행태가 정상이 아닌 세상이었더라면, 코코는 자신의 힘과 열정과 관대함을 앞세워 무리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두운 실루엣의 밀라가 나타난 뒤에야 코코가 움직인다. 해가 지평선 아래로 떨어진다. 하늘은 분홍색에서 금빛 붉은색으로 변하고, 그에 따라 숲 꼭대기가 구릿빛으로 물든다. 밀라가 우리에게 천천히 걸어온다. 카우보이모자가 얼굴에 그늘을 드리운다. 밀라가 주머니에서 치즈 한 조각을 꺼낸다. 코코가 밀라의 품속으로 들어가 치즈를 입안에 밀어 넣는다. 그리고 차마 아무도 볼 수 없다는 듯 얼굴을 가슴 속에 파묻는다.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워 보인다. 동물은 그저 동물일 뿐이라 여겼던 과거의 삶을 떠올린다. 그랬던 내가 싫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내가 동물과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 P132
고양이들은 주로 봉사자들과 헤엄을 치며 시간을 보낸다. 야생에서도 헤엄을 칠 것이다. 물속을 응시하는 와이라를 보면 이따금 그가 용기를 내려고 애쓰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두려워하고 있다. 나는 이해한다. 허세 부리기, 하악거리기, 으르렁대기. 전부 그의 대처 방식이다. 미소 짓기와 괜찮은 척하기가 나의 대처 방식인 것처럼. 내가 나뭇가지를 밟자 와이라가 1미터가량 공중으로 뛰어오른다. 제 그림자조차 무서워하는 퓨마다. 야생을 두려워하는 퓨마. - P140
|